2007년 10월 4일 목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자유분방하고 낭비가 심한 생활을 하였다. 18세 때에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으나 포로 신세가 된 그는 석방된 뒤 오랫동안 중병에 시달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프란치스코는 전혀 딴사람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곧, 청빈을 실천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였으며, 클라라 성녀를 도와 프란치스코 제2회인 ‘클라라회’를 세웠다. 또한 수도 생활은 하지 않지만 가난과 희생을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프란치스코 제3회도 설립하였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1232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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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다(루가 10,5-6)
Into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hold.'
If a peaceful person lives there,
your peace will rest on him;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떠나라고 하신다. 그래야만 주님께 철저히 매달리게 된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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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기도’로 잘 알려진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노래’에서 죽음을 “누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죽음을 좋아하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사람을 어둡게 하고 움츠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죽음을 누이로 불렀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해답은 성인의 가난한 삶 속에 있습니다. 극단적인 청빈 생활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욕심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완벽하게 가난한 삶을 살았기에 사람들이 흔히 갖게 되는 애착까지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삶 때문에 그는 대자연을 형제로 느꼈고, 죽음까지도 누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처럼 극단적인 가난을 실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그분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애착이 지나쳐 집착으로 가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특별히 기억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성인을 통하여 그러한 은총을 주십사고 기도합시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
-양승국신부
<멀고도 먼 과제, 자기 해방의 실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들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 무신론자들에게서까지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를 일컬어 ‘제2의 그리스도’ ‘새로운 복음사가’라고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해 자신의 생애 전체를 바쳤습니다. 읽고, 느끼고, 받아들인 복음을 자신의 온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었던 것입니다.
개신교 역사학자 폴 사비티에는 프란치스코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성인입니다.”
프란치스코와 여러 측면에서 ‘코드’가 맞았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년마다 한 번씩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인류의 구원은 보장이 될텐데...”
다음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그가 온몸으로 실천했던 복음적 가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형제들이 하나 둘 모여들던 초창기시절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농부가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숙소로 삼고 있는 헛간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헛간에 당나귀를 들여놓아야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안방에다 당나귀를 들이겠다는 농부의 말에 제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자 성깔이 만만치 않았던 농부 역시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형제들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한 욕설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프란치스코는 농부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제 그만 두시오. 우리가 살던 곳을 차지하시오. 우리 형제들은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얼굴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당나귀와 자리다툼하기 위함이 아니고 당신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자 갑시다. 어디 밤샐 곳이야 있겠지요.”
안타깝게도 프란치스코는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른 죽음의 이유는 다름 아닌 철저한 복음의 실현 때문이었습니다. 험난했던 복음전파 여행, 계속되는 과로, 그로 인한 위장병, 간장병, 각혈, 눈병...
프란치스코는 죽음이 서서히 다가옴은 깨닫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에게 남길 유언서를 쓰기 시작하는데, 한 구절 한 구절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늘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거룩한 귀부인 가난을 받으십시오.
모든 사람들에게 굽히며,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가장 독특하고 감동적인 측면은 만인형제애(萬人兄弟愛)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사람, 모든 대상은 형제이며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다가오던 죽음에게조차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어서 와요. 자매인 죽음이여!”
프란치스코 회헌에는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오는 사람 모두, 그가 친구이든 원수이든 강도든 도둑이든 모두 형제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내린 ‘가난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이란 선택과 결단은 당시 사회의 통념이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하는 특별한 결단이었기에 그가 직면했던 어려움이나 헤쳐 나가야했던 도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복음적 길을 확신했던 프란치스코였지만 꾸준히 그 길을 걸어가기란 정녕 힘겨웠습니다. 그도 결국 어쩔 수 없는 한 나약한 인간이었기에 불확실성과 어둠사이에서 방황도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빛을 찾기까지 일생동안 고달프고 힘겹고 외로운 투쟁을 계속해왔습니다.
그의 생애는 길고도 지루한, 그러나 완만하나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린 신앙여정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가난의 특징은 사회적응의 실패로서의 가난,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비참하고 궁색한 가난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속적 안녕과 물질만능주의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기해방의 도구로서 가난을 선택한 것입니다.
완벽한 가난을 자신의 삶에 적용함을 통해 대자유인이 된 프란치스코는 가난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부담이나 초조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기에 만민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생활성서 [작은 거인들] 중에서-
성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부유한 가정 생활을 포기하고 가난한 수도자가 된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책으로 출판되었고 연극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프란치스코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독특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자유로움은 그리스도교 신자거나 아니거나 할 것 없이 700년 이상 동안 한결같이 사람들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노래한 ‘태양의 찬가’는 죽음을 앞두고 큰 고통을 받으면서 만들어졌다. 그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감사했고 특별히 죽음을 자매로 부르면서 간절히 죽음을 기다렸다. “…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은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최민순 신부 역) 나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고 있는가? 죽음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겠다. 하늘에 있는 나의 친구, 성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이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저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남겨주신 <평화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문이지요.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㰡아시시㰡는 이탈리아의 움브리아주(州) 페루자현(縣)에 있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지방 도시로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움브리아 평야의 평화로운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무척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축일이 되면 아시시의 순례 여행이 떠오르곤 합니다. 아시시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좀 더 떨어진 㰡또디㰡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박을 할 때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지요. 아시시 보다도 더 외지고 아름다운 마을 또디에서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러 나갔는데 그 마을 꼬마들이 모두 나와 저를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동양 사람을 처음 본 모양입니다. 산책하는 길 내내 많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쳐다보던 기억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하느님의 일보다는 세상일에 관심을 두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던 중세 시대 때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했던 성인입니다.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기사가 되기 위해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 사이의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많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됩니다. 이후에도 예전과 같이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던 프란치스코는 생사를 오가는 중병을 앓게 됩니다. 이 때 병상에서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게 된 프란치스코의 삶은 크게 변화됩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출세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통회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아시시로 말을 타고 돌아오던 중 우연히 나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본능적으로 나병 환자 곁을 피해가고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와 나병 환자를 포옹하고 자선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그들을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후 프란치스꼬는 다미아노 성당 앞을 지나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나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㰡프란치스코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㰡그 말씀은 그리스도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프란치스코는 글자 그대로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곧바로 그는 그의 말과 장비들을 팔아 성당 수리비용을 마련하여 주임 사제에게 봉헌했으나 그가 거부하였으므로 성당 창문 옆에다 돈을 놓고 떠나갔습니다.
얼마 후 주임 사제와 성당 수리를 함께 하기로 협의하고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나서 프란치스코의 행동의 부당성과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시 법원과 교회에 의뢰하는 바람에, 프란치스코는 만인들 앞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의 정당성과 앞으로의 활동을 천명해야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주교와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㰡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㰡
이처럼 그는 가족들과 이별을 하였고 주교는 그에게 망토를 건네주며 십자가를 걸어 주었습니다.
그 날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탁발승의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성경의 부자 청년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묻지요.
㰡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㰡(마르10,17)
예수님께서 율법의 계명들을 말씀하시자 그 사람은 주저 없이 답합니다.
㰡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㰡(마르10,20)
그러자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㰡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㰡(마르10,21)
부자 청년은 㰡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㰡(마르10,22)고 성경은 전하고 있지요. 결국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세상에 남았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일 뿐이었지요.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 많은 유산과 창창한 세상의 미래를 버리고 하느님을 따랐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를 향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주셨지요. 오늘 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재산이 얼마인지는 하느님도 모를 정도라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의 성공만을 따라 살았다면 온 세계에 펼쳐진 수도회의 번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라한 결과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접고 하느님을 따르면 이처럼 부족한 부분은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전철을 밟지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 속에서 어떠한 사람보다도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셨던 성인 중의 한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시지요.
사실 가난은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은 불행이고 아픔이지만 자발적인 가난, 복음적인 가난은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지금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이유는 없어서 각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나도 풍요로운데 기인합니다.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사람은 금방 비만해집니다.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정신과 영혼은 빈사 상태를 헤매고 육신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갈증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갈증이 정신과 영혼을 황폐하게 이끌고 이기적으로 만들지요. 비만이 만병의 근원이듯이 세상의 것을 더욱 차지하고 누리려는 욕심과 지나친 물질적인 풍요가 갈수록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간이나 형제간, 이웃 간에 탐욕이라는 불순물이 끼어 들어 편안하지도 않고 사랑이나 우애는커녕 왕래도 없는 비인간적인 관계로 치달아 가고 있지요.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발적인 가난은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모든 것을 움켜잡아 육신에 너무 많은 살이 붙으면 몸과 정신은 무기력해집니다. 바른 육신과 맑은 정신을 지니려면 비만으로부터 탈출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눠야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잘 쓰는 계획을 세우십시오. 형제나 부모,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얼마씩 나누겠다는 계획을 세워서 실천한다면 모든 관계에 서서히 온기가 돌고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비인간화와 세상 곳곳에 퍼져나고 있는 죽음의 문화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길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었을 때 이 세상은 상생의 문화로 흐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나 소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일 뿐이지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바르게 쓰는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9월 라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처럼 오상을 몸에 지닐 수 있었고, 1226년 10월 3일 유언을 마친 프란치스코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읽게 하였고, 자신은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저녁에 포르치운쿨라에서 임종하셨습니다. 그의 유해는 10월 4일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죠 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2년 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230년 5월 25일 엘리야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지금의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습니다.
오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을 맞아 좀 덜 먹고 덜 쓰고 욕심을 줄이는 삶을 살 때 우리 삶이 더욱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어리석은 부자 청년이 아닌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서울대교구 심흥보 신부-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주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심으로써 교회를 쇄신시키신 분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박해시기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로마제국의 식민지 국가들의 국교가 됨으로써 교회는 많은 재산을 희사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보다, 더 큰 성당건물을 짓고 성사 집전과 교회법의 테두리안에서 신자들의 조직을 관리하는 측면의 사목정책으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흔히 '면죄부'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전대사' 문제, 이른바 베드로 성전을 짓기 위해 헌금하는 사람은 헌금의 양에 따라 죄를 사해준다는 일도 이 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교회의 정책을 반대하면서 각 지방에서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하려는 토호정치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개신교의 여러 분파들, 성공회라는 영국교회 등.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교회를 떠받친 두 분의 성인이 있었는데 한 분은 설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신 도미니코 성인님이시고 다른 한 분이 바로 우리 본당의 주보성인이신 프란치스코 성인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 33)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일생을 사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져 가난해진 프란치스코의 삶은 여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많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프란치스코 성인님께 존경과 희사를 해서 가난한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기도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교회가 바로 가난한 교회이며 프란치스코 성인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이룬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역이나 단체다 하는 구분과 대조도 없이 신자 누구나 복음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가난한 교회가 됩시다.
그리스도의 평화
-이수철 신부-
제가 살고 있는 이곳 요셉수도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분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러, 건물이 아름다워서,
수사님들이 좋아서, 강론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밖에도 많습니다.
그분들이 수도원을 찾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우리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향기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향기가
점점 진하게 발산됩니다. 나 자신을 안팎으로 비워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평화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는
사제의 권고에 따라 서로 돌아보며 복음 말씀대로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비는 인사보다 더 좋은 것은
내 존재 자체가 평화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말없이 고요히 평화를 선사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방문길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수녀회 초창기 시절 창설자 신부님은 수녀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당신이 먼저 그 지역을 방문하셨다. 그런 후에 일정 지역을 선택해 수녀들을 둘씩 파견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하게 하셨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여 실질적인 도움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라고 말씀하셨다.
새로운 사도직을 준비할 때도 신부님은 가정 방문을 통해 사람들의 현실을 파악하도록 하셨다. 회원들은 지역을 정한 다음 짝지어 각 가정을 방문했다. 1980년대에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과 부산 700여 곳의 산부인과를 방문하여 낙태 직전에 있는 고귀한 생명을 구했다.
신부님은 굶주리는 이들에게 수예품 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하셨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공민학교를 설립하시고 신문팔이나 폐지를 줍는 청년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셨다. 아파도 가난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무료진료소와 자선병원을 설립하셨다. 회원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찾아 판잣집 마을 곳곳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1970년에 외국 은인들의 도움으로 지은 자선병원은 수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이제 건물 수명이 다 되어 다시 지어야 하는 무거운 숙제가 남아 있지만 가난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하신 창설자의 정신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예수께서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감실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야 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라는 창설자의 말씀이 오늘따라 새록새록 생각난다.
복음 선포, 세상 것들, 하느님께 의탁
-이성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마음으로 제자들을 보내셨을까요?
주님께서 당부하는 말씀들입니다. ‘떠나가시오. 지금 있는 곳에서 떠나가시오. 매여 있는 곳에서 떠나가시오. 사람이나 돈,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마시오. 그래야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돈주머니를 가지고 가지 마시오. 돈주머니에 매여 있으면 하느님보다 돈을 더 믿게 됩니다. 그럴 때 돈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하느님은 밀려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돈에 끌려 돈을 따라가게 됩니다. 복음은 퇴색되어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는 복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다른 이들도 돈으로 보게 되고, 사람은 보이지 않고 돈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고 아버지이신 하느님만 의지하라는 주님의 당부이십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성령은 가장 크게 작용하실 수 있고, 나를 통해 나오는 복음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되어 다른 이들을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는 말씀은 ‘우리의 여정에서 사람에게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것, 즉 복음을 놓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가장 중요한 자리에 하느님을 두고 세상의 것들(돈, 자루, 신발, 사람)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께서는 더 큰 선물, 즉 복음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나오는 복음은 다른 이를 살리는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 쓰지 않은 성경
-홍선미(의정부교구 중산 천주교회)-
얼마 전 가깝게 지내던 분이 세례를 받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늘 최선을 다해 오신 분이다. 어느날 예비자 교리에 다닌다고 하여 무척 반가웠는데, 남편에게 대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세례식 후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는 구절과 맞물려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형제님의 막내동생 이야기다. 명석하고 반듯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용돈의 대부분은 성경을 사는 데 썼고, 성경을 사면 이름을 쓰지 않은 채 읽다가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동생은 치료가 어려운 병을 앓고 있었고, 투병생활 동안 동생의 부탁으로 자주 성경을 읽어주면서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동생의 병은 점점 악화되었고, 2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의사가 다녀가고 나서 잠시 후 동생이 다시 깨어나 가족 모두 너무 놀랐다고 한다. 동생은 가족에게 “하느님은 정말 계시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꼭 전해줘. 그리고 형도 꼭 하느님 믿어!” 하며 영원히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이제 20년이 지나 막내동생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씀하던 형제님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분의 20년은 이렇게 착하고 순결한 동생을 죽게 했다고 믿었던 하느님을 이해하기 위한 침묵의 대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세례를 받은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행복해하는 그 부부를 보면서 동생의 정신이 형의 마음속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양승국신부-
<무심한 나그네>
2세기 중엽 한 익명의 신앙인에 의해 쓰인 글귀는 ‘진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은 참아 받습니다.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란 사명을 제자들을 부여하고 나서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파견에 앞서 간단한 당부를 하시는데, 그 핵심이 어느 한 곳에 연연해하지 말고 ‘무심한 나그네’처럼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저희 수도자들을 보고 ‘부럽다’고 하십니다. 왜 부럽냐고 여쭈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수사님들은 세상 걱정 하나도 하지 않고, 매일 기도 속에 거룩하게 지내시고, 부양해야할 가족도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 면도 없지 않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수도생활, 적당히 기도나 하고, 적당히 봉사하고, 놀고먹는 그런 삶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연마해나가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신과 투쟁해야 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 안에서 한없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때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머리 터지게 싸우기도 합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인해 정말 자존심 ‘팍’ 상하기도 하고, 엄청 속이 상해 욕이 입까지 치밀어 오를 때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부럽다, 얼마나 좋으냐?’는 말씀에 수긍이 갑니다.
때로 홀가분하게 모든 것 떨쳐버리고 홀연히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갈 기회가 가끔씩 주어지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세상살이 하는 분들, 어쩔 수 없이 잔뜩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그 ‘인연의 무게’에 대한 압박감이 조금은 덜하며, 그 대신에 더 깊이 또 다른 가치관을 추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본격적인 복음 선포에 매진하려는 제자들에게 세상 그 어느 것에로도 묶이지 말기를 당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무소유’,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버림’, ‘떠남’을 강조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보다 영원한 가치관,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대상, 그래서 한번 투신해볼 가치가 충분한 목적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고 부차적인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다시금 덕지덕지 붙어있는 제 영혼의 군더더기들을 바라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영혼의 장애물들을 바라봅니다.
크신 하느님, 자유로우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또 다시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홀로 떠나는 ‘무심한 나그네’를 꿈꿉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욥기 19,21-27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복 음 : 루카 10,1-12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를 열두 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에는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12명이 아니라 많을 때는 72명까지 되었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72명의 제자 파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자의 숫자는 대부분 열둘을 언급하고 있는데 루카 복음만이 72제자의 파견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견 시의 주의사항이 열두 제자나 72제자 모두에게 같다는 내용으로 봐서 일부학자들은 루카가 임의로 재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카의 근본 의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열 두 명의 제자에게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에는 70 혹은 72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지요.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이 세상에 퍼져 새 민족을 이룰 때 70인종으로 나열되어 있고(창세10장), 모세를 부를 때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원로 70명을 대동하라고 말씀하셨으며(탈출24,1), 유다의 최고 의회 산헤드린은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70인역 그리스 성경에는 창세기 10장의 새 민족을 72인종으로 서술하였고, 원로들 역시 72인으로, 또 세계 안에는 72명의 왕자와 72개의 언어가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에녹3서17,8;18,2-3;30,2) 따라서 72제자라는 표현에서 72의 의미는 숫자적인 의미보다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먼 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충분한 준비는커녕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는 부분입니다.
㰡’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㰡“(루카10,4)
잘 준비해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더 좋을 것같이 생각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지요. 제자들이 오로지 의지해야 할 것은 돈도 지팡이도 식량자루도 아닌 하느님이심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㰡’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㰡“(루카10,7)라는 말씀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뒷바라지해야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 집에 주님의 평화를 빌어주라고 가르치십니다.
㰡’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㰡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㰡‘ 하고 말하여라.㰡“(루카10,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로지 복음 선포의 의무만을 주셨을 뿐 결실의 의무까지 지우지는 않으셨습니다.
㰡’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㰡“(루카10,6)
중요한 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제자들이 빌어주는 평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역시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하며 살아가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평화에만 집착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과 재물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갈증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우리를 참 기쁨과 평화에로 인도하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지요.
㰡’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㰡“(요한14,27)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도박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일종의 도박환자였지요. 손에서 화투짝을 놓으면 늘 불안했고 곧 돈을 딸 것 같은 착각 때문에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 딸 것 같은 생각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지요. 차차 건강도, 가정도, 그리고 사업마저도 병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화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뜻대로 안 되었지요. 부인은 돈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눈물로 호소를 해보기도 하고 이혼을 하자고 협박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도박 자체가 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밤낮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구제불능의 친구가 어느 성령 세미나에 참석해서 그 몹쓸 병을 고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지도 않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묘한 일이었지요. 손에서 화투짝을 떼면 생 자체에 아무 의미를 못 느끼고, 손에 화투가 있어야 살 맛을 느꼈던 사람이 이제 그 헛된 평화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는 차츰 건강을 찾고 일할 의욕도 찾았으며, 가정에는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이웃과도 화목하게 되었지요. 믿음이 평화를 가져왔고 평화는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72제자에게 복음 선포의 자세를 가르치시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평화를 빌어줄 것을 사명으로 주십니다.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이 복음을 우리는 받아들였고, 하느님의 평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도 복음 선포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말씀과 함께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교임무의 핵심: 평화주의, 성사와 말씀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로부터 세상의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된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공관복음의 공통된 보도이지만(마태 10,1-39; 마르 6,8-11; 루가 9,1-6), 오늘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가복음만의 특종기사에 속한다. 물론 열둘과 일흔둘이라는 파견의 규모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루가복음이 제자들의 파견기사를 두 번이나 보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루가복음이 나름대로 설정한 예수님 공생활의 시기적인 구분에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열두 제자의 파견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가 4,14-9,50) 안에서 이루어졌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상경기(루가 9,51-19,28)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을 결정하시고 사마리아 지방을 통하여 가려하셨음을 보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와 거부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9,51-56) 따라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거쳐 가셔야 할 곳으로 또 한번의 제자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가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10,2)는 말씀을 삽입하여 일흔두 제자라는 대규모 파견의 시급함과 타당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2차 파견에서도 1차 파견(루가 9,1-6) 때와 똑같은 선교상의 여장규칙과 임무를 훈시하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어린양에 비유되고, 파견되는 곳의 환경과 사람들이 이리떼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 선교상의 어떠한 안전장치나 무장도 허용되지 않는 파견자의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는 딱 두 가지이다.(9절)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이는 곧 성사(聖事)를 베풀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는 그 곳에서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사람이나 병이 들어 마음과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이리떼와도 같은 백성들을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교화하여 그 나라의 어린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이리로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심판을 면할 길을 없다.
파견된 제자들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다. 만약 한 동네가 연대(連帶)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거부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의 발에 묻은 흙을 털어버리고 가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선교사의 거부는 곧 복음의 거부이고, 복음의 거부는 하느님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거부하는 동네 전체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12절)이다. 소돔이 어떤 곳인가? 도시 전체의 엄청난 죄상이 야훼의 분노를 싸게 되어 아브라함의 애끓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인(義人) 열명이 없어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로 멸망당한 도시가 아니었던가?(창세 19,24-28)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는 소돔보다도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음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일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선포는 그저 이리떼 속에 보내어지는 어린양처럼 철저한 평화주의와 두 가지 임무, 즉 성사집행과 말씀선포를 준수해야 한다. 한 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복음을 선포하거나, 세속적인 특혜와 지위확보나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수용하는 작금(昨今)의 선교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가거라>(루가 10,1-12)
--유광수 신부-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다. "가거라.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파견되어 가야할 곳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많은 사나운 것들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양들을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보내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는 것일까? 양들이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무기는 물질적인 돈 주머니나 여행 보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무기인가? 그것은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이 그 무기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필요한 무기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에게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세상의 돈 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의존해 가지고서는 절대로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것들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것들에 의해 먹히고 갇히고 힘을 빼앗길 것이다. 복음을 전하려면 그런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어디를 가나 먹을 수 있는 보따리 즉 예수님을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건물을 짓고 좋은 차를 가져야 하고 경제적으로 보장이 되어야 하고 안전한 거처지를 마련해야 하고 최신식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어야 한다.
즉 복음은 어떤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복음화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무리 좋은 매체를 가지고 있고 좋은 시설을 갖춘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어있다면 그 사람이 어디에 가나 또 어느 도구를 사용하든 모든 것은 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복음은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달려 있고 그 사람이 사나운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위험한 장소에 파견되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어 있으면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큰 취약점은 복음을 전하는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복음화된 복음의 사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경씨의 "미래에서 온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병'이라는 메타포를 써서 표현하자면 '중독'과 '에이즈'의 세상이야. 이 지구화 과정을 일으키는 초국적 자본주의는 'BM2'로 인간 세상을 망치고 있지. 'BM2'는 이모가 만들어낸 Buiness, Money, Many, 즉 B.M.M 의 약자야. 세상을 큰 시장터로 만들고 온 땅을 비즈니스 게임터로 만드는 초국적 자본주의는 우리를 정신 없이 바쁜 사람들로 만들어 가고 있어. 모두 "바쁘다, 바뻐" 하고 아우성을 치지. 너무 바빠 자신과 가족, 이웃을 돌볼 시간이 없는, 정신 없고 분열된 개인을 만드는 것이 이 자본주의의 음모야. 정신 없는 인간을 지배하기는 참 쉬운 거니까. 그리고 이 정신 없는 개인들이 숭배하게끔 하는 신은 돈이지.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파하며 "돈교"에 입교시키는 거야. 그리고 뭐든지 많이많이 무한정 불려 나가야 해. 생산도 늘리고, 섹스도 더 진하게 많이 해야 하고, 차도 더 빨리 몰아야 하고, 뭐든지 더 많이, 더 진하게, 더 빨리 해지 않으면 실패고 퇴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중독의 과정이지. 중독된 사람은 그 중독을 야기시킨 대상 없이는 살 수 없게 돼. 그리고 중독의 정도를 더욱 더 심화시키다가 죽음까지 몰아가는 거야. '무엇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느낄 때, 우리는 이미 중독에 들어가 있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메타포를 들자면, 그것은 '에이즈'야. 에이즈란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지. 우리의 면역체계는 몸 안에 균이 들어왔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세포가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백혈구를 동원시켜 죽이게 되어 있어. 그렇게 해서 몸의 온전성을 지켜갈 수 있지. 그런데 에이즈에 걸리면, 다른 균이 들어와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세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낼 능력이 없어져 버려. 때문에 무엇이 들어오든 상태가 되고 결국은 이물질 세포에 잡아먹혀 죽게 되는 거지.
이것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거짓자아'가 '참자아'를 잡아먹는 병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고도로 이름답게 포장된 거짓자아들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지. 대중매체의 광고들은 많은 경우 이 거짓자아 바이러스로 현혹시키고 있어. 이걸 먹으면, 이걸 바르면, 이걸 입으면, 이걸 타면....이런 식의 미사여구로 말이야. 이걸 쫓아가다 보면 참자아를 찾기는커녕 잡아먹히게 되는 거지.
이 문화적인 중독과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치료하는 기도와 명상법은 , 중단하기, 숨쉬기, 깊이 들여다보기야. 그래서 시커들은 도시를 떠나 숲으로 가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동굴에 숨는 거야. 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람의 수레바퀴에서 잠시 내리는 거지. 그리고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신의 목소리를 듣고, 존재로 충만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거야. 우선은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는 거야.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네 존재가 잔잔해질 때까지. 그런 다음 그 잔잔해진 영혼의 수면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바라보는 거지. 이것을 생활화하면 진짜 너의 삶을 살 수 있어.
이 가능성으로 임신한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그 홀로 있음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위대한 창조도, 진정한 친밀함도 얻을 수 없어. 어떠한 큰 슬픔이나 고통도, 분노나 외로움도, 그리고 의미 없음도 기도와 명상에 의해 치유될 수 있지.
<돈주머니도>(루가 10, 1-12)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것은 그것도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돈주머니도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다. 슈퍼 맨이라면 몰라도 아니면 요술 방맹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매일 복음 묵상을 해야하기 때문에 오늘 복음 묵상을 대강 끝내고 나면 곧 다음 날 복음을 읽는다. 그리고 말씀 중에서 느낌으로 와 닿는 한 말씀을 선택하여 그 말씀을 지니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하루 종일 내가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항상 내가 선택한 말씀을 지니고 살아가려고 한다. 길을 갈 때에도 말씀을 지니고 가고 일을 할 때에도 말씀을 지니고 한다. 늘 말씀을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어떤 책을 읽어도 아니면 광고물을 보아도 라디오를 들어도 텔레비젼을 보아도 항상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말씀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한다.
따라서 나의 묵상은 어느 한 자리에 앉아서 묵상한 것이 아니라 오며 가며 보고 들은 것이 모두 내 묵상의 소재요 말씀 묵상의 연장이다. 책을 읽다가 내 묵상에 도움이 되는 글을 읽게 되면 그 글을 취하고, 또 묵상을 하다가 라디오에서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나 뉴스 또는 전해주는 소리 중에서 묵상과 관련이 되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들으면서 또 묵상한다.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의 묵상의 재료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내 삶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하느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도 밤 하늘을 수놓은 별님과 달님도 아름다운 단풍도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작품이요,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의 세계이다. 따라서 복음을 묵상하는 것이 꼭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성당에서만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어떤 말씀을 지니고 있느냐이다.
내 안에 아무 말씀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나는 무엇을 보든 무슨 소리를 듣든 다만 내가 듣고 보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내 안에 말씀을 지니고 있다면 단순히 외적으로 보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내 안에 있는 말씀과 연관시켜서 보고 듣게 되기 때문에 말씀에서 빛을 받아 보고 듣게 된다.
즉 말씀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이 내 밖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끝나버리지만 내 안에 말씀을 지니고 있으면 내가 밖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말씀에서부터 다시 보고 듣게 되니까 전혀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듣게 되는 것이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식을 둔 부모는 늘 마음에 자식의 병을 지니고 산다. 따라서 어디에 가든 무엇을 보든 항상 자식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과 관련하여 듣고 보게 된다. 혹시 조금이라도 자식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용한 의사가 어디에 있다고 하면 아무리 멀어도 그 용한 의사를 찾아가고 무슨 약이 좋더라고 누가 이야기 하거나 라디에서 들으면 그 약을 구해 보려고 가진 애를 다 쓴다. 즉 부모는 자기를 위해서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고 죽어가고 있는 자식의 병을 지니고 다닌다.
내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 또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사느냐? 에 따라서 각자 지니고 다니는 것은 다를 것이다. 시인은 늘 시적인 관점에서 보고 들을 것이며 작곡가는 늘 새로운 곡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골프광은 그린 필드를, 바둑 기사는 바둑판을, 이발사는 뒷통수만 볼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 지니고 다니는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아니라 각자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지니고 떠나는 법이다.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제자들의 관심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떠나야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을 수 있을까? 무엇을 좀 더 챙길까?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든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 장소나 사람에 의해 자기의 사명이 흔들리거나 소홀해서는 안되고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 선포자가 지니고 다녀야 하는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이 아니라 복음을 지니고 다니다가 어떤 장소나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더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 선포자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그는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내가 유다인들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1고린 9,19-23)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한테 파견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항상 복음을 말해야하고 복음의 관점에서 보고 들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지니고 살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일에 미사 참례하는 것, 아니면 아침 저녁 기도하는 것, 아니면 봉헌금이나 교무금을 내는 것, 아니면 세례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신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복음이 없는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과연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돈주머니나 여행보따리나 신발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 56-5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평화롭습니까...
-경훈모 신부 -
우리는 매일 주님의 성전에 나아가 묵은 자신을, 집착의 자신을, 갈등의 자신을 끊어버리고자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고통, 부활을 통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사제의 권고 말씀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이 같은 주님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할 것을 또한 약속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처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며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씀하셨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인 우리들을 뽑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의 평화'를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아니 우리 신앙인들이 가정과 사회 그리고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를 부르짖는 교회와 절간이 날로 많아져 가고,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지만, 우리가 바라고 부르짖는 평화보다는 불화와 불신이 팽배한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오늘의 현실은 이렇게 암울하기만 한 것일까요! 정치적 신념없이 오직 권력을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혼탁한 정치인들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의 축적에만 정열을 쏟는 그릇된 기업가들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제종교가 그릇된 사랑과 평화와 자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과연 무엇이 오늘의 현실을 이렇듯 암울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그에 대한 책임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평화롭습니까! 평화를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평화를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이가 어떻게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평화를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알지 못한, 체험하지 못한 평화를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그들이 전하는 평화는 헛된 것입니다. 평화를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오늘의 현실을 만든 당사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찾고자 하는 평화는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하느님의 평화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평화입니까! 성서의 세상과 실제 세상사는 다르다고 하면서 재물과 명예, 지위와 권세를 찾고 쫓는, 이로 인해 울고 웃는 우리 자신이지는 않습니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발도 들고 다니지 말 것이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시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평화의 사도로서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며, "당신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를 / 당신들한테 털어놓습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평화를 구한다고 하면서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가 잠깐 동안의 안식과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며 잠시뿐이나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한 안식과 위안, 평화를 가져 줄 수 있습니다.
평화를 구하고자, 평화 속에 머물고자하는 여러분! 평화를 빌어주기에 앞서 평화를 체험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자신이 됩시다.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 자신 안에 평화가 함께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그가 바로 평화의 사도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태도
-까따꿈바 묵상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즈라 사제에게 율법책을 가져다가 읽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에즈라가 율법책을 읽어 주었더니 듣는 백성들은 너무 감격하여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어나서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있고 아멘하면서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현상입니까. 오늘날의 신자들도 이와 같은 점을 배워서 성경을 읽고 듣고 깨달아 지켜서 복을 받는 지름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묵시 1,3). 그런데 오늘날의 신자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1. 백성들은 들으려고 모였습니다.
먼저 독서 말씀에서 보다시피, "그 무렵 온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학사 에즈라에게 성경책을 가지고 오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을 사모하는 태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튿날 온 백성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모여 왔다. 그들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율법에, 일곱째 달 축제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13-14)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밝히어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도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은 권한을 가진 내시가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다가 필립보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필립보가 읽는 것을 깨닫겠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 말하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없이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사도 8,26-31).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주님의 종들이 읽는 성경을 들으며 깨달아 은혜를 받겠다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2. 주님의 종은 읽었습니다.
두번째로 독서 말씀에서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종인 에즈라 사제는 성경을 읽고 백성들은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본인이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을 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눈이 먼 사람은 귀로 들어 읽고 귀가 먹은 사람은 눈으로 보아서 읽으며 눈도 귀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때는 손으로 만져서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종들은 먼저 많이 읽고 연구하여 신자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주님의 종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고르넬리오와 같이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사도 10,33). 그리고 테살로니카 성도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1테살 2,13). 그러므로 주님의 종들은 열심히 전하고 성도들은 들어야 할 것입니다. "에즈라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하느님의 율법서를 읽어 주었다"(18)고 하였습니다.
3. 듣고난 후의 태도가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서 말씀 5-6에서 보듯이,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라고 잔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의 태도가 전에 보다는 달라지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일어섰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느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좋아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고 즐거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좋은 본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태도입니다.
ㅅ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열심히 읽고 듣고 깨달아 지키며 말씀을 대할 때는 일어서고 싶은 심정이 생기도록 하고 아멘 아멘 하면서 동의하며 심지어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눈물이 나오도록 하였으면 하는 것이고 그리고 크게 기뻐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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