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07. 10. 5. 07:09

   2007년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루가 10,16)

 

 Whoever listens to you listens to me.
Whoever rejects you rejects me.
And whoever rejects me rejects the one who sen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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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도시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대부분을 보내셨고, 많은 기적과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알리셨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꾸짖으신다

 

☆☆☆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참으로 뜻밖의 말씀입니다. 일찍이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실 때 그 고을에 의인 다섯 명만 있어도 진노를 거두겠다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그분의 자비를 청했던 것입니다. 자비의 주님께서 왜 불행을 언급하셨을까요?
벳사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의 고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에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간택하기도 하셨습니다(요한 1,43 이하 참조). 사도들의 절반이 이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드러내시면서 소경을 고쳐 주기도 하셨습니다(마르 8,22 이하 참조).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곳도 바로 벳사이다였습니다(마르 6,30 이하 참조). 그만큼 이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무척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저주라기보다 예수님의 탄식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여보세요.”

“신부님, 미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안 나오세요?”

“네? 맞다. 곧바로 나갈게요.”

작년 12월, 간석4동 성당에 부임한 뒤 처음으로 미사 시간에 늦었습니다. 새벽 미사도 아니었습니다. 오전 10시 미사였는데, 글쎄 미사 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때까지 잠을 자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특별히 급한 일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 시간에 제 방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저께는 공휴일이어서 새벽미사였거든요. 문제는 평소 새벽미사가 있는 날은 월요일뿐이기 때문에 어제가 저녁미사 있는 화요일로 착각을 했고, 그래서 미사에 들어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하게 들어가느라 어제 강론 원고가 아닌 엉뚱한 종이 한 장 가지고 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행동까지 했지요.

그런데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저의 게으름 때문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생겼거든요. 9시 30분쯤,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살 일이 있어서 갈까 말까를 계속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귀찮은 것입니다. ‘저녁미사고 오늘은 특별한 일도 없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가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미루어서 마트에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게으름 피우면 안 되지. 얼른 마트에 가자.’라는 마음을 먹고서 9시 30분쯤에 마트로 향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어제처럼 5분 늦는 것이 아니라, 30분 이상 늦어버리는 큰 사고를 쳤을 것입니다.

게으름도 득이 될 수 있음을 어제 깨닫게 됩니다. 하긴 주님께서는 부정적인 것도 부정적으로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가진 부정적인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주님께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모두 내어 맡기는 겸손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합니다. ‘잘된 것은 내 탓, 못된 것은 주님 탓’을 외치면서 내 안의 이기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고 계십니다. 이 세 도시는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유명하지요. 그런데도 그들이 변화되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이기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지금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시는데, 이에 반해 나는 얼마나 변화되고 있을까요?




주님께 모두 맡기세요.


 빠다킹신부

 

 

   하느님의 자녀      

-이수철 신부-


 오늘 복음에서 ‘너희를’이 꼭 예수님의 당대 제자들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볼 때 이 구절의 영적 의미는 더욱 풍부해집니다.
우리와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이 단절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열매를 잡아당기면 줄기에 이어 뿌리가 뽑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기서 열매가 우리들이라면 가지는 그리스도요 뿌리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이치가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됩니다.
인간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막연히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건강한 신비주의입니다.
이웃을 물리치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에 이어 하느님을 물리치는 일이 될 수
있다니 이웃들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지요. 하여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서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형제들을 통해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몰라뵙고 얼마나
소홀히 사람들을 대했겠는지요? 새삼 우리의 이중 배경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자녀가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러니 이런 배경이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생각하면
함부로 처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오늘 복음은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을 향한 경고다. 예수께서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펴 주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예수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이들을 꾸짖는 말씀이다.
믿음은 감사다. 생활하면서 늘 칭찬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좋은 일을 하고도 감사는커녕 오히려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주님께 부르짖는다. “주님,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나 역시 반성하게 된다. 마음이 나 자신으로 꽉 차 있어 믿음이 상실되지는 않았는지, 받은 은혜에 대해 정말 감사드리고 있는지, 혹 수도자로 선택받았다고 해서 바리사이처럼 자만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은혜를 인정한다면 정말 겸손하게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소년의 집 출신으로 구성된 재부동문회에서 일흔다섯 분의 수녀님을 점심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식당에 들어가니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잘생긴 아들딸들이 다가와 수녀님들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동문회 회원들은 수녀님들과 함께 지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절을 올렸고,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도 전해 주었다. 그날 그들은 우리 수녀님들을 예수님 대하듯이 맞이했다.
은혜를 아는 사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백하는 예언자 바룩

-경규봉 신부-

바룩(‘축복받은 이’라는 뜻)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비서요 친구이며, 동시에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었다. 그는 유다의 명문 출신으로서 마아세야의 손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이며(1,1), 그의 동기 스라야는 시드키야 임금의 재무대신이었다(예레 51,59).

바룩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파괴에 관하여 전한 신탁을 글로 적어 유다 임금 여호야킴에게 전달하였다(예레 36,1-21). 그러나 여호야킴은 그 두루마리를 칼로 한 조각 한 조각 베어 불에 살라버렸다. 그러자 바룩은 그 내용을 더 늘린 신탁의 두루마리를 새로 만들었다(예레 36,27-32). 그 다음에 바룩은 호사야의 아들 아자리야에게 친 바빌론파로 몰려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끌려갔고(예레 43,1-7),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 독서는 바룩이 드리는 참회기도 가운데 죄를 고백하는 부분이다(1,15 - 2,10). 정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자신들이 당하는 재난과 저주는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이며, 자신들의 마음이 악하여 다른 잡신을 섬기고 하느님 뜻에 어긋난 일을 행하며 자신들 생각대로 살았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죄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곧 죄이다.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그리고 죄의 결과 인간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며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창세기 3장은 이러한 죄에 대하여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그들도 그 열매를 따먹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열매를 따먹지 않기 위하여 열매를 만지지도 않으려고 굳게 결심하였다(3,3).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은 후에 그 열매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진 후에 그 열매를 바라보니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3,6) 보였다. 자신의 생각이 달라진 후 바라본 열매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열매였던 것이다. 생각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진다. 그래서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따주었다.

사실 열매 하나 따먹은 것이 어떻게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고, 그것까지도 죄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정말 쩨쩨하신 분이 아니신가? 너무 야속하지 않은가? 그런데 대부분의 문제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악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하와는 비록 열매 하나를 따먹었지만, 카인은 친동생을 죽이지 않았는가? 더욱이 중요한 것은 열매 하나를 따먹었다는 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랐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열매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바라본 열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울 정도로 탐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길 정도로 자신의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통과 죽음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열매를 따먹는 것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자신의 생각대로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죄일 수밖에 없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예언자 바룩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순종하지 않은 대가로 재난과 저주를 당했음을 고백한다.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이 죄이며, 그 대가가 너무나도 큰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고 따르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자


 

 
종이 되기보다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우리

-박규환 신부-

사진에서만 바라보던 아름다운 에머랄드 빛 해변과 야자수 그늘. 이번 휴가로 인해 저 역시 그 그림 속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습니다.

로만 칼라를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로만 칼라를 하고서 찍은 여권의 증명 사진, 입국 신고서에 적힌 Priest, Father(=사제)라는 신분과 괌 한인 성당 방문이라는 여행 목적. 이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사제임을 알 것인데, 다른 국가도 아닌 가톨릭 국가인 괌에서 세관 검사를 받다니, 사제에 대한 특별한 예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세관원으로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내심 마음은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무어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뭐라 해봤자 나만 구차해질 뿐이지. "볼 때면 봐라. 뭐 특별한 것도 없다"라는 마음으로 세관 조사를 받았습니다.

공항 밖에서 저를 기다리던 이들은 "이런 적이 없는데 액땜했다고 치십시오. 그 놈들이 뭘 잘못 먹었나 봅니다. 여행 첫날 기분은 나쁘시겠지만 빨리 잊으셔야지 그것 때문에 여행을 망칠 수야 있겠습니까!"라며 위안의 한 마디를 건넸습니다.

새벽녘 숙소에 짐을 풀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첫 해외 여행으로 인한 설레임 때문인지, 세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인지!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다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성서를 발견하고 집어들었습니다. 그 때 "불행하다. 너 코라진아! 불행하다. 너 베싸이다야! 사실 너희 가운데서 행한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벌써 가루와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너 가파르나움아. 하늘에라도 오를 성싶으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이 제 가슴 한편에 송곳과 같이 예리하게 다가왔습니다.

코아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 이 도시들은 왜 불행할 수밖에 없었는가! 예수님께서 다른 어느 도시에서보다 많은 기적을 보여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셨건만 자기 도취와 오만에 빠져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외면하였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단 말인가!

사제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나는 사제직을 선택하였는가! 사람들로부터 예우를 받고자 이 길을 선택하였는가! 아니면 만민의 종,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고자 이 길을 선택하였는가! 세관에서 검사를 받았다는 것이, 사제의 신분을 알아봐 주지 못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인가! 그렇다면 세관 검사를 받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기 도취와 오만을 던져버리고 그 무엇을 위해 사제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금 생각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참으로 다양하고도 기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세관 조사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기 도취와 오만에 빠져 허우덕 거리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해 주셨습니다. 신분과 지위, 과거에 행했던 활동과 업적 이러한 것들이 구원을 보증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요, 오늘의 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얽메여 오늘을 살아간다면 성숙됨이 아닌 퇴보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모습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 나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주님! 종이 되기보다는 주인이 되고자 했던 저의 모습을 용서해주십시오. 자기 도취와 오만함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항상 첫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저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 회개해야 한다.

-전주교구 김병환 신부-


예수께서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 대해서 저주의 말씀을 하신다. 이 도시들은 지금은 없어져 그 위치 또한 분명하지 않지만 갈릴래아 호숫가 북쪽에 있었던 큰 도시로 전해진다. 이들 도시는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몹시 배척하였다.

코라진은 어떤 도시인가? 코라진은 가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4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으로 전해진다. 코라진은 그 페허가 큰 것으로 보아 당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이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베싸이다는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갈릴래아 호숫가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또한 베싸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고향이며 필립보의 고향(요한 1,44)이기도 하고 야고보와 요한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이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마르 1,29)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베싸이다는 분명 가파르나움 근처 어느 곳이라고 생각된다. 이곳 역시 예수께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숫가 북단에 있었던 도시로 복음서에서, 특히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도시의 하나였다. 가파르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이 있었으며 예수께서 참으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전해진다. 악령들린 사람과 중풍병자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마르 1,21-­34), 베싸이다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이곳으로 오셔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신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예수님 전도 중심지로 예수님의 고향과 같은 도시이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곳 도시에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여 하느님의 신성과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많은 기적을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들쓰고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결코 코라진과 베씨이다와 가파르나움과 같은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예수입니다.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강영구신부-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멀리서 억새 소식과 단풍 소식도 들립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저를 생각하시듯이 나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반성합니다.  
예수님의 동체일신행(同體一身行)은 철저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분신(分身)이나 또 다른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제자인 우리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1요한3,16) 하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3,26)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의 말씀을 삶의 길잡이로 삼고,
그분의 몸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요한6,53-57) 받아먹는 우리는 틀림없이 제2의 예수입니다.
이웃과 형제들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어찌 우리가 경망스럽게 함부로 말하고 처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예수입니다.(一明)

마산교구

 

 

웰빙 신앙

-조성풍 신부-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3D’와 연관된 직업이나,
‘3고’와 관련된 질병을 얻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럽고(Dirty),
위험하고(Dangerous), 어려운(Difficult) 직업은 피하고 싶어합니다.
또 고혈압, 고지혈, 그리고 고혈당과 연관된 질병은 꺼려합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운동과 식생활을 하느냐에 높은 관심들이
쏠리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웰빙의 삶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웰빙의 삶은 무엇일까? 웰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앙생활의 웰빙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망애’ 삼 덕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10월 묵주기도 성월에는 웰빙의 신앙생활을 잘 가꾸신 성모님과 더불어
건강한 신앙생활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양승국신부-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지만>


이 한 세상 살아오시면서 가장 큰 당혹감, 좌절, 슬픔, 배신감...등등을 느낄 때가 어떤 순간이었습니까?


믿었던 친구로부터 꽤 큰 ‘거금’을 떼였을 때, 그래서 가계가 휘청했을 때, 엄청 속상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또 마음 크게 먹으면서 천천히 넘겨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심사숙고 끝에 시작한 사업, 심혈을 기울여서 시작한 사업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난관에 부딪치고, 내리막길로 접어들 때,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려니, 값비싼 경험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한 교통사고, 그로 인한 장기간의 입원,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많이 아프겠지만, 세월과 더불어 치유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사별,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며 슬픔이겠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보십시오. 그가 떠나고 없는 이 세상, 당장 죽을 것만 같았는데, 숨도 못 쉴 것 만 같았는데, 다 지나갑니다. 고인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어느새 우리 삶은 자연스럽게도 원상 복귀됩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했던 사람, 그래서 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으로부터의 철저한 ‘배신’, ‘등 돌림’ ‘실연’,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정녕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 상처, 그 아픔은 평생 가슴에 맺혀 잊혀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잊기 위해, 새 출발하기 위해 일부로 씩씩해지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지만, 그 서글픔 그 배신감, 그 참담함은 쉽게 씻어지지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이란 도시를 향해 신랄한 어조로 질책하십니다. 도를 넘어설 정도로 악담을 퍼부으십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심하게 가파르나움을 몰아붙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이란 도시를 각별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진한 애정의 표현으로 자주 가파르나움에 들르셨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다른 도시에서보다 훨씬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을 애지중지하셨습니다. 애틋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도시 가파르나움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열렬한 사랑을 차가운 눈길로 외면했습니다. 그 간절한 사랑의 시선에 자신들의 눈길을 맞추지 않고 등을 돌렸습니다.


가장 풍성한 은총을 입은 가파르나움이었지만 감사와 찬미, 기쁨에 찬 응답을 한 것이 아니라 냉랭한 얼굴로 돌아섰습니다. 끝까지 그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철철 흘러넘치는 애절한 사랑과 은총을 끝끝내 거절하는 가파르나움이었기에 마침내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넘치도록 큰 은총을 끊임없이 보내주고 계십니다.


‘은총은 무슨 은총?’하시겠지만, 우리의 눈과 귀가 좀 더 맑아지고 밝아질 때,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을 받고 살아왔는지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지나온 모든 세월은 한 마디로 은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었습니다. 고통도, 상처도, 아픔도, 눈물도, 십자가도 모두가 은총이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은총, 우리를 보다 큰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 그 은총을 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진지하게 한번 헤아려보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불행하여라(루가 10,13-16)

 - 유 광수신부-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베싸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마치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의 회개를 위해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마치 부모가 매일 술이나 마시고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식에게 "이제 제발 정신차려라. 너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 말은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요, 안타까움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이듯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그 화를 끼친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 16-17)라고 말씀했지만 아담과 에와는 그 말을 듣지 과일을 따 먹었다. 그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고통을 겪고 죽어야 했다. 하느님은 이런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런 희생을 치루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담과 에와가 야훼 하느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행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나의 부모가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까지 불행해진다. 즉 고통을 겪게 된다. 한편 내가 회개하면 나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개로 받는 축복이 나만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내 주위에 있는 분들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복을 받는다.

 

 다음 글은 지난번 서울 주보에 실린 신달자 시인의 글이다.

 - "나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게 하자 학생들은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인데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는 기색도 보였지만 아버지라는 말에 긴장의 표정이 비치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가까우면서 멀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모르는 관계가 아버지일 것입니다. 시를 가르치는 저는 적어도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아들을 속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자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알아 가는 것은 문학의 출발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아버지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게 하는 일이 제 역할이어서 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솔하면서도 눈물겹게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좌절한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눈물 많은 아버지, 병든 아버지, 꿈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속 시원히 풀어 본 적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 직장에서 물러나 가족의 눈치만 살피는 비겁한 아버지, 그리고 50대에 기가 꺾여 열등감으로 불화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일으켜 주세요.' 하나같이 학생들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 하고 미워하면서도 깊은 애정으로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위엄을 지니고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과 가족을 압도하던 사나이는 어디 있는지... 아닙니다. 어느 때고 이 땅의 남자와 아버지는 고독하고 슬펐습니다. 중학생 때 저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고 더 그리울 게 없는 당당한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행복한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늘 아쉽게 기다리고 때때로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허약한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내 문학의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척추가 허물어진 이 땅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일으켜 주시기를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계속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의 길 거리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4번이나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즉 물리침으로써 정말 내가 불행해지는지 그리고 그 불행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되는지 어디 한 번 4 번 말씀을 물리쳐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