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루가 9,62)
No one who sets a hand to the plow
and looks to what was left behind is
fit for the Kingdom of God.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신다. 밭을 가는 사람이 궁금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비뚤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며 사는 것을 뜻한다. 맡겼으면 믿어야 한다. 의심은 믿음을 흐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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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사람의 말입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생활 속의 실천이지, 그저 붙어 다니며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사건건 주님의 뜻이라며 자신을 못살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일이 간섭하시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지나친 신심은 광신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힘들게 하는 신심입니다. 괴롭히는 신심을 어찌 바른 신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삶 속의 조용한 추종이 오늘 복음의 첫 번째 사람의 길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집을 떠나기에 앞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당연히 그래야 할 일입니다. 대단히 중요하고도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르실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고 하시면서 지나간 일에 매달리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새벽을 열며
용서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용서의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러한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가 어떤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관심을 끌고 싶었는지 아버지의 코를 잡고 넥타이를 입으로 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뺨을 힘차게 때립니다. 바로 이 순간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까요?
“나는 내 아들을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이 어린아이를 집어 던질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어린아이이기에 무례한 행동을 할지라도 용서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행동을 다 큰 어른이 했다면 어떨까요? “나를 이렇게 모욕하다니…….”라고 말하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상대의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즉, 10살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아니지요. 이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어린이일 때에는 그 눈높이로 어린이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상대방이 어른이 될 때면 상대방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만약 주님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는 주님이기에 우리들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으신 분이기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첫째 자리에 반드시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지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주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청을 거절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장례도 치루지 않는 불효막심한 자녀가 되는 것일까요? 또한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몰인정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눈높이를 맞추시는 주님께, 우리 역시 눈높이를 맞추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내 자신의 눈높이에 모든 기준을 맞추기보다는 주님의 눈높이에 맞춰 나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주님처럼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세운 눈높이가 아니라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는 오늘을 만드세요.
빠다킹신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이수철 신부-
수도생활이든 세속에서의 신앙생활이든 어려움은 마음이 갈릴 때 일어납니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저기에 있는 경우로, 주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옆으로 뒤로 한눈팔 때가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아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마음이 갈리면 에너지도 분산되고 갈라진 틈으로 온갖 유혹도 들어와 마음이 들떠
살기 참 힘듭니다. 그러니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마음이 갈리면 살기 힘들지만,
몸이 약하고 병이 있어도 마음만 주님을 향해 모아져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낼 수
있습니다. 진정 믿는 이들은 주님을 따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에 마음 또한 단순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연연하거나 온갖 세속 욕심에 휘둘릴 때 삶은 복잡해지고 혼란해집니다.
저절로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에 빠지고 불평불만도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니 때로
과일나무 전지하듯 이런저런 불필요한 것들은 정리하고 삶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가려버리는 것들은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삶이 어렵다하여 지난 추억에 머물거나 탈선하여 방황해선 안 됩니다.
지금 여기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타개해가면서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여 또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여기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ㄴ)라고 했다.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거처할 곳도 없이 하루하루 생활하셨다. 가난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다.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쉴 곳도 없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나가며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고통이 닥치면 우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이리저리 방황하고 피할 방법은 없는지 찾게 된다.
우리 시설에 입소할 때는 만신창이의 몸이었던 이들이 점점 안정을 찾고 건강을 회복해서 시설 밖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퇴근 후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잠잘 곳도 없었는데, 이제는 따뜻한 밥을 해놓고 기다리는 사람과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해요.” 찬바람 몰아치는 추운 겨울 몸 아프고 배고프고 이야기할 사람도 거처할 곳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 아픔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 화려하고 부유한 주님을 기대하기보다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가난하고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과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주교구 김병환 신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께서 당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다.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보금자리를 얻고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을 때 그 사람이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장례는 아들에게 중요한 도리요 윤리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를 거부하시는 것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도리와 윤리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다. 훗날 예수님의 수난을 보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박해와 방해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곧 죽음을 각오하고 하느님 나라 소식을 전하는 길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훗날 예수님의 삶이 그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 도리와 윤리에 얽매이지 말기를 바라신다.
또한 예수께서는 집에 가서 작별인사를 나누게 해 달라는 사람에게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라고 하신다. 열왕기 전서 19장 20-21절을 보면 엘리야는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엘리사에게 집에 가서 모든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런 연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가 되어 엘리야를 따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그 순간부터 모든 인간적 일들을 미련없이 끊어버려야 한다는 단호함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십자가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인간적 정리에 끌려서도 안 되고, 과거에 미련을 가져서도 안 된다. 인간사의 인연을 끊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묵묵히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투신(投身)과 투심(投心)
-조성풍 신부-
도시에서 생활하는 내가 쟁기를 이용한 밭갈이 장면을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기억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쟁기질을 할 때 잠시 한눈을 팔거나 목표점을 놓쳐버리면 밭이랑과 고랑이
고르지 못하고 제멋대로의 모습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눈을 팔거나 목표점을 잃어버리면 방황하게 됩니다. 더구나 뒤를 돌아보고
있으면서 올바른 쟁기질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거의 삶은 중요합니다. 지금의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빠져 있으면 결코 현재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현재는 다가올 미래의 과거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라는 수렁에
빠지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삶에 충실했으면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다가올 현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를 보람되게, 그리고 미래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오늘 지금이라는 현재에 온전히 투신(投身)과 투심(投心)을 다했으면 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양승국신부-
<수사님께서 남기신 유품 한 박스>
저희 공동체에서 그간 모시고 있었던 할아버지 수사님의 임종과 장례식 때문에 한 몇일 바빴습니다. 돌아가신 수사님께서는 첫 한국 살레시오 회원이셨고, 한 평생 낮은 곳에서 굳은 일만 골라해 오신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돌아보니 수사님은 젊은이들로만 이루어진 저희 공동체에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기나긴 투병생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늘 장난스런 얼굴로, 손을 꽉 쥐시며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던 재미있던 어르신이셨습니다.
수사님을 묻고 돌아와, 수사님께서 머무셨던 방에 들어갔었는데, 어찌 그리 황망하던지요. 수사님께서 남기신 소지품을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사님의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고 떠나신 것은 겨우 낡은 옷가지 몇 벌, 이젠 구식이 된 라디오 하나, 쓰시던 안경, 틀니, 다 합해서 한 박스도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당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 않으셨던 분, 거의 외출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시며 공동체 안에서 머무르시던 분, 단 한 번도 공동기도에 빠지지 않으셨던 분, 언제나 먼저 팔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삽을 드시던 분, 참으로 좋은 모범을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건강문제로, 또 성소문제로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결국 ‘떠나기로’ 거의 마음의 결정을 짓고 수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수사님께서는 길게도 아니고 딱 한 말씀만 해주시더군요.
“서원한 수도자가 가긴 어딜 가! 그냥 계속 가! 가다보면 길이 생겨!”
단 한마디 말씀, 단순한 말씀, 투박한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선배로서 방황하는 후배에게 건네주신 참으로 값진 말씀이었습니다. 수사님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그 말씀을 이제 저는 후배들에게 다시 건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도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때 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었건만,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이쪽에 한 발, 저쪽에 한발,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주 돌아다보니 삶이 비뚤 비뚤, 흔들리고 방황하기 마련이지요. 뒤를 돌아보느라 앞에 있는 암초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된통 크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뒤를 돌아보다 큰 나무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기도 합니다.
한 평생,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하셨던 수사님, 아무리 큰 풍랑과 시련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던 바위 같던 수도자, 그리고 영예롭게도 가난하고 겸손한 수도자의 신분을 간직한 채 삶을 마무리하신 수사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수사님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서원한 바를 죽기까지 지키겠다는 투철한 수도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앞만 바라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 안식처, 하느님
- 이성우-
사람의 아들이 머리를 두고 쉴 곳은 어디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내가 편히 쉴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내가 쉴 곳은 아버지 품이고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나는 오직 그곳에서만 머리를 두고 쉴 수 있습니다.
나의 안식처는 바로 하느님뿐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보금자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나의 안식처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람, 힘, 명예, 재산, 권력, 지위 등등, 그 어느 것도 나의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지도 못하는 것에 내 인생을 걸고 나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편히 쉬지도 못하는 그곳에 내 모든 것을 걸고 가고 있다면, 잠깐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가?
나에게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가?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 때로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영원한 안식은 하느님뿐이시고, 근본적인 행복의 원천도 하느님뿐이십니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일생을 어디에 가치를 두고, 어떻게 보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시어머니의 틀니
-홍선미(의정부교구 중산 천주교회)-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아쉬운 점들이 자주 떠오른다. 내가 실수로 떨어뜨려 금이 간 시어머니의 틀니를 즉시 고쳐드리지 못해 오래 불편해하셨던 것도 그 중 하나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너나 잘해라.” 마음 아플 때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를 이해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 그분은 이미 훌륭하게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셨고, 내가 그 의미를 받아들여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면 어머니는 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거라고.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시작되었을 즈음 어느날이었다. 나의 부주의로 남편과의 관계에서 그동안 쌓였던 소원한 것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마침 아들도 사춘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던 터라 모든 것이 내 못난 탓인 것만 같았다. 먼저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나를 초대하셨다. 뒤돌아보지 말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사람들은 늘 자신의 생각 속에 머무른다. 그 안에서 궁리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 생각이 우리의 운명도 되고 굴레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생명의 길이다. 예수님은 쟁기를 들고 뒤돌아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생명의 길을 따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데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존재론적인 결단이 요구됩니다.
-서울대교구 홍성만 신부-
어제에 이어 오늘의 복음에서도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마음이 굳히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토록 마음이 무거운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접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의 속마음은 아마 이러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네가 나를 따르겠다고?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길인데, 세상의 일들은 완전히 포기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이렇게 끝내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존재론적인 결단이 늘 요구됩니다.
그만큼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내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데 나를 가로막는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이 유혹과 타협하지 마시고 앞만 보고 나아갑시다.
"쟁기에 손을 재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힘차게 주님의 뒤를 따르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성실과 책임감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느헤미야 (느헤 2,1-8)
--경규봉 신부--
느헤미야는 수사라는 성에서 페르시아 왕의 술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수모를 받고 고통을 당하며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탄 채로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1,3). 그는 이를 대단히 가슴 아파하면서 여러 날을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마침 그가 페르시아 황제에게 주안상을 준비하여 술을 따라 올리는 기회가 생겼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잊지 않으시고 황제로 하여금 그의 걱정과 소망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성을 다시 세우도록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항상 밝은 얼굴로 주변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페르시아 황제는 그를 기억하고 염려하여 그의 걱정거리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사실 잔치의 흥을 돋우어야 마땅한 술 담당 관리가 연회장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황제를 진노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그에게 연민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그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황제에게 예루살렘에 돌아가 무너진 성읍을 다시 세우도록 해주시기를 청한다. 사실 아르닥사싸 황제는 예루살렘이 자주 반기를 든다는 사실을 알고 성을 다시 쌓지 못하도록 명령한 적이 있었다(에즈 4,19-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고 황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칫 죽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황제는 그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황실 재목으로 성을 복구할 재목을 제공하도록 허락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사실 느헤미야는 수사 성에서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즐겁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읍이 무너진 채 있으며, 동족들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으며,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읍을 복구하고자 결심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경외하며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이었고, 동족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에게 청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아가 사람에 대한 사랑 또한 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없이는 결코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지만,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 역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어렵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달란트를 소중히 여겨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당신의 일을 하도록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신다. 그리고 그러한 이를 당신 나라에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한 번의 인생이다. 이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하느님께서 주신 삶과 달란트를 잘 활용하자.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도 인정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며,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충실히 행하는 신앙인이 되자.
예수를 따르는 길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강영구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세 사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떠돌이다.
너도 무소유(無所有)의 자유인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출가하여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따위의 인연을 끊었다.
너도 모든 인연의 끊을 끊고 무애인(無碍人)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서 현재에 충실 하는 사람이다.
너도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겠느냐?”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자유를 누리는 길이자 부요하게 되는 길입니다.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학연(學緣) 따위 인연 묶여 편 가르고 이익을 추구하는 생활은 죽은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혈연(血緣)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대자비를 실천하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과거는 오늘을 있게 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딛고 서야할 소중한 발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을 잡혀 미련과 회한(悔恨)에 빠지면 현재를 잃게 됩니다.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모든 것을 실리 위주로 따지고 처신하는 현대인들에게 전부를 요구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김웅태 신부 -
오늘 복음[루가 9,57-62]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난다. 즉, 첫번째 사람에게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 조차없다." 하신 말씀이요, 두번째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신 말씀이고, 세번째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첫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따르려면 "희생"을 각오 하라는 말씀이다. 즉, 짐승에게는 그들이 안식을 누릴 굴과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만, 당신은 그러한 안식처, 휴식처를 가질 수 없을만큼 희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구도 거짓 구실에 속아서 예수를 따르도록 설득 당했고, 사기 당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실에 매혹되어 신뢰하며 따랐으며,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현실의 모든 것을 뛰어 넘는 하늘나라의 이상을 보여 주었고, 그것을 취득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요구보다 더 큰 노력과 희생이 요구되기에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두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얼른 듣기에 무자비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들의 풍습에서 보면, 그의 부친이 죽지도 않았고 죽어 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에게 부친이 있는데, 그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하는 지금 당장 따르기를 핑계대고 미루는 표현의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요점은, "모든 일에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미루다가 놓치면 목적하는 바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다.
심리학자들도 말하기를 기분이 좋을 때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을 일으키기가 점점 어려워 진다고 한다. 예를들면,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지!" 하고 마음 먹었는데, 그 순간에 쓰지않고 다음날로 미루면, 그 편지는 그때 마음으로 쓰기가 어려워 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번째 사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즉,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자가 밭이랑을 곧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고자 하는자는 석양을 향해서 걷는자가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앞일에 몰두하는 적극적인 생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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