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일 연중 제 26주간 월요일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가 9,48)
“Whoever receives this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돈이 없거나 건강이 좋지 않거나 힘이 없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때 가난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기꺼이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 때문에 주님과 멀어진다면 우리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주님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한 보석 세공인을 불러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나를 위하여 반지 하나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매우 큰 승리를 거둬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그리고 동시에 그 글귀가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나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느니라.”
보석 세공인은 명령대로 우선 매우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지 안에 새겨 넣을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다윗 왕이 원하는 그 글귀를 도저히 써 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지혜롭다는 평을 받고 있는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답니다. 그리고는 말했지요.
“임금님의 황홀한 기쁨을 절제해 주고 동시에 그가 낙담했을 때 북돋워 드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말을 써 넣어야 할까요?”
그러자 솔로몬은 별로 어렵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말을 써 넣으시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아마 임금님이 승리의 순간에 이것을 보면 곧 자만심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만약 임금님이 낙심 중에 있다면 이내 표정이 밝아질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을 우리들은 얼마나 집착을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순간이고 곧 지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이러한 집착에서 헤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하늘나라에서의 삶에도 똑같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너희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만 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어린이처럼 약한 모습을 절대로 간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한 사람을 무시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내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영원할 것 같다는 이 세상도 결국은 스쳐지나가는 한 순간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곳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늘나라인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집착을 버리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 세상. 결국은 이것 역시 곧 지나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집착이나 절망에 빠지려 할 때, 종이에 적어 보십시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빠다킹 신부
당신이 예수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강영구신부-
이 편지를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 거기 어린이가 없었더라면 무엇이라 말씀하셨을까요?
틀림없이 아무나 앞에 세우고 이렇게 말씀하셨겠지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사람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도 저도 태어날 때는 작고 약한 어린아이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당신은 어른이 되었고 저는 중늙은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 적의 ‘나’나 ‘당신’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 적의 ‘나’나 늙은이가 된 ‘나’는 같은 ‘나’입니다.
어린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어른 안에도 예수님이 계시고 늙은이 안에도 틀림없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눈을 뜰 차례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예수님이 현존(現存)하시고 나아가 하느님이 현존(現存)하십니다.
그가 비록 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를 사랑한다면 미움은 이미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뀌고 말겠지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돈이 없거나 지식이 없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서가 아닙니다.
눈을 뜨지 못해 ‘너’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돈이나 재물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행복을 줍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예수님이자 하느님입니다.(一明)
마산교구
들꽃의 영성
-조성풍 신부-
어떤 모임이나 교육에서 처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으레 등장하는 물음들이 있습니다.
“고향은, 출신 학교는, 사는 곳은, 본관은 어디인지?”
거기에 은근히 나이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싶어 하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너무 심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모습을 보게도 됩니다.
사실이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높이려고만 애쓰는 모습만큼이나
초라한 모습은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더 큰 인정이 돌아옴을 겪곤 합니다.
나는 이런 겸손의 영성을 ‘들꽃의 영성’이라 부르곤 합니다.
산에 가면 피어 있는 들꽃은 낮고도 낮은 자리에 피어있습니다.
더구나 한 송이가 아니라 여러 송이가 함께 어우러져 있을 때
더 아름답습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
자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
그리고 혼자 두드러지기보다는
함께 돋보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김병환 신부(전주교구 삼천동 천주교회) -
◆제자들이 왜 다투었는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복음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수난에 대한 두번째 예고를 하신 뒤였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누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걱정이 되어 다투지 않았나 싶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다투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지도자가 어때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신다. 어린이를 비유로 말씀하시어 어린이를 통하여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당신의 성심을 제시하고자 하신다.
어린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표상이며 곧 예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의미는 매우 깊다. 어린이는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사랑과 신뢰, 순종과 겸손, 변함없는 성실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어린이는 맑고 깨끗하고 순수함을 지니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표본으로 가장 좋은 생활 자세의 가치 기준이 된다.
진실로 위대하게 되는 비결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데’ 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참된 신앙행위이며, 이것 없이는 누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도 예루살렘이 어머니로 의인화되면서 어린이는 거룩한 도시,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백성임을 나타낸다. 어린이는 하느님의 본성과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제자들에게 하느님 본성의 상징인 어린이가 될 것을 가르치신다. 어린이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수난 신비를 깊이 깨닫게 되고, 자신들도 수난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며, 또한 참다운 지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 나라 주인의 상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특정인에게만 제한을 두고자 하는 요한에게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말라”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 한 모두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당신 백성에게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시는 하느님 (즈가 8,1-8)
--경규봉(전주교구)--
예언자 즈가리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시고 염려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한다. 하느님께서 시온에 돌아오심으로써 재건된 성전에 임하실 것이며, 예루살렘이 앞으로 번영할 것을 보증하신다. 하느님께서 시온 산 위에 다시 계심으로써 시온 산은 적들 앞에서 안전하고 거룩한 산이 될 것이다. 평화와 번영을 이루어 노인과 아이들까지도 편안히 쉬고 뛰노는 도읍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어 예루살렘에 살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신 백성이 되고, 당신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어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루살렘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살만한 땅에는 이미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대단히 궁핍한 가운데에서 폐허가 된 땅을 일구는 것도 힘든 일인데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갈등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성전건축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할 수도 없었으니 그들의 심적, 육적 고통은 상당히 컸다. 때로 실의와 좌절에 빠지기도 했고, 때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즈가리야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이제 곧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며 당신 백성의 하느님이 되시어 신실하심과 정의로우심으로 보살피실 것이다. 그 날에는 예루살렘이 번영하고 만백성이 편안히 쉬고 즐길 수 있는 거룩한 도읍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고 힘을 내도록 격려한다.
“시온을 생각만 해도 역겨워지는구나. 속이 화끈거리며 타오른다.”라고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실망만이 담겨진 표현은 아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허물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간을 염려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는 죄와 악행에 빠진 인간에게 저주와 징벌만을 내리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 속에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배려와 불쌍히 여기심이 담겨져 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안에서 사리라.”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함께 하시고, 인간 가운데 머무르심으로써 인간을 거룩하게 하고 미덥게 하고자 하신다. 당신께서 함께 계심으로써 인간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하고자 하신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통해서만 행복과 만족을 구하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물질을 통해서는 결코 만족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주고자 하신다. 나아가 그러한 행복은 야훼의 날, 메시아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이루어지고, 그 때 하느님과 인간은 완전하고도 영원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됨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우리 안에 머무르시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과 부자지간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럼으로써 지상에서부터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시작하는 평화와 번영이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됨을 약속받은 것이며, 약속의 성취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 그처럼 우리를 염려하시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인,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자.
예수 제자의 길
대기업에 함께 입사한 한 동료는 대리가 되고 다른 한 동료는 평사원 그대로였습니다. 또 몇 년이 지난 뒤 한 동료는 부장이 되고 다른 한 동료는 과장으로 있었습니다. 진급이 늦은 동료는 속으로 늘 불만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회사 상사에게 잘못 보인 것은 아닐까? 아니면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사관학교에 함께 입학하여 열심히 학업과 군사훈련 등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소위”계급장을 달게 됩니다. 먼 훗날 누구는 별을 단 장성이 되고 누구는 군대 문을 나서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경험하게 되고 피라밋의 장점을 향하여 가는 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음을 실감합니다.
경쟁사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를 점령하고 같은 위치라 하더라도 서열이 높고 싶은 심정은 다 같은 인간의 욕심에 틀림없다 할 것입니다. 더더욱 우리 주변에서 40-50代에 명예 퇴직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늘 스트레스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높은 위치로 가고 싶은 인간의 욕심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추구하는 현실입니다.
각박한 오늘의 현실에서 잠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오늘 루가 복음의 첫 구절이 우리 마음속을 맴맴 돌고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는 내용입니다. 열 두 제자들의 이력을 상세히 알고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 당대 유대사회에서 내노라 할 만큼 이름 꽤나 있는 인물들은 아님에도, 사도단에서 서로 높낮이에 관하여 좌충우돌한 모양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신 다음 하신 말씀을 잘 새겨 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어린이의 모습은 힘없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낮추는 작은 사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내리 누르는 자가 아닌 봉사자로 섬기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임을 가르치시는 예수께서는 그 당시 얼마 안 있어 그 길을 가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교회 공동체에서 봉사하고 있는 신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직책이나 직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으로 자처하고 너를 위한 봉사가 진정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는 제자일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를 눌러야 내가 올라갑니다. 너보다 내가 이겨야 합니다. 소위 경쟁입니다. 그런데 선의의 경쟁이기 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넘어서야 하는 현실은 너무 각박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너를 이기기보다 나를 이겨야 합니다. 나를 제어하고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근간에 소개된 책들 중 “느리게 사는 법”의 의미를 소개한 내용도 보았습니다.
“진정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라고 누가 말한다면 받아들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너를 위한 어리숙한 삶이 하늘나라를 위한 지름길임을 암시하는 듯도 합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유 광수신부-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마르코 복음을 보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사람이란 첫째가 되는 사람이다. 첫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다른 이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더 좋은 옷, 더 좋은 집, 좋은 차를 가져야 하고, 더 아름다워야 한다. 한 마디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자기가 첫째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사람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하는 제자들 앞에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선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예수님이 내세운 어린이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이란 아주 하찮은 존재이며 사람이기는 하지만 "가장 작은 사람"이다. 가장 큰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린이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찮은 존재요, 없이 여길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생각과는 정반대 되는 생각이다.
그럼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가장 작은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자기가 첫째가 되는 데 필요한 사람이지 어린이처럼 하찮은 존재, 가장 작은 존재가 아니다.
그럼 누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가?
어린이를 사랑하는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어린이를 자기의 경쟁의 상대자로 보지 아니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절대로 높아지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는 어린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허리를 굽혀 자기 자신을 낮춘다. 받아들이려면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열어야 하고 손을 내밀어야 하고 가슴을 벌려야 한다. 즉 어린이가 들어 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어린이가 편안하게 안기기 위해서 어린이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빈 잔 즉 잔이 비어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고 손을 벌려야 상대방을 안을 수 있는 법이다.
하찮은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겸손함을 의미한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가장 작은 사람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장 큰 사람이란 늘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을 상징한다. 즉 자기가 가장 높고, 많은 것을 알고, 높은 자리에 있고, 가장 좋은 옷과 좋은 차와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섬겨야 한다. 자기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섬겨야 한다. 자기가 하느님인 사람에게 어린이와 같은 하찮은 가장 작은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욕적인 일이고 창피한 일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자기를 높여주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다른 삶과 함께 생활할 때 어떻게 인간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웃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서 자기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쟁의 상대자로 생각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한다면 진정한 이웃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내가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할 나의 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공동체가 일치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으며 평화를 가질 수 없다.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미워해야 하고, 자기는 잘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잘 안 되기를 바라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다른 사람이 경쟁의 상대자가 아니라 사랑해야할 사람들이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수록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의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2,6-8)
가장 큰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은 누구나 이런 원의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정말 가장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결국 추한 인간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4 번이나 "받아들이다"라는 말씀을 사용하셨다. 오늘 우리도 4 번쯤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가장 큰 사람이 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 방법에 의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날이 되도록 하자. 내가 속해 있는 가정, 공동체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 루가가 전하는 갈릴래아 활동기의 마무리 설교
-박상대 신부-
루가복음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광야유혹의 40일을 보낸 후 자신의 고향인 나자렛과 갈릴래아 지방을 거점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셨음을 보여준다.(4,14)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대목(이사 58,6)을 빌려 메시아로서의 자기 신원(身元)과 사명(使命)을 명백히 선포하신 점이다.(4,16-22)
따라서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신원과 사명을 그 내용과 함께 구체적으로 밝혀나가는 것이 루가복음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숙제의 핵심은 메시아이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루가는 자신의 숙제를 예수님의 직접적인 활동으로 하나씩 풀어간다.(4,31-9,50)
우선 이 땅에 도래한 메시아의 활동은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구마기적과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병자치유기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가르치고 그들 가운데서 뽑은 사도들을 교육시킴으로써 미래의 선교를 준비한다.
급기야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파견되어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을 예의주시한다. 와중에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구약율법의 근본정신을 새로 세우고 죄의 용서를 발설(發說)한다. 그들에게 예수가 걸림돌이 되는 만큼 예수의 신원은 서서히 밝혀진다.
결국 제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고백한다.(9,18-21) 그러나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정작 예수의 참된 신원과 평행선을 긋는다.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자기 신원에 대한 확신과 사명에 대한 다짐은 두 번씩이나 수난과 죽음의 예고로 이어지는데 제자들은 이를 간파하지도 물어보지도 못한다.(9,45)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발설한 목소리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툼이 있어난다.(46절) 이처럼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둘 이상 모인 곳에 누가 더 높은가를 가름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늘 있는 일이다. 어떤 공동체든 그 안에 리더가 있기 마련이며 또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 공동체가 누구에 의해, 무엇을 위해 창설되었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공동체라면 이는 필시 예수의 정신을 담보(擔保)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신 것은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회의 힘없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를 받아들임은 곧 예수를 파견한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 가운데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원칙이 세워진다.(48절)
계속두면 스승의 책망이 더 이어질까 두려웠던 것인가? 요한이 나서서 엉뚱한 말을 던진다. 예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49절) 사실 이 지적은 제자들의 질투와 투기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제자들에게도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가 주어졌다.(9,1) 그러나 제자들은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는 9장 40절을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올라가 계신 동안에, 악령이 들린 아이를 아버지가 데려와 제자들로 하여금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했던 것이다.(9,40)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라.”(50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는 쫓아내었으나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서로 다른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음이 암시되었다. 여기까지가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가 4,16-9,50)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어느 유대교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 랍비는 매일 저녁마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그날에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나 알아보곤 하였습니다. 그 마을에 또한 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땅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자는 파수꾼을 고용해서 매일 저녁 자기의 땅을 둘러보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랍비가 마을을 둘러보는데 파수꾼을 만났습니다. 랍비와 파수꾼은 함께 걸으면서 마을을 둘러봅니다.
랍비가 파수꾼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오?"
"나는 마을 부자를 위해 일합니다. 매일 저녁 그의 땅을 둘러봅니다."
파수꾼이 랍비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오?"
랍비는 머릿속으로 만군의 야훼 하느님을 위한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파수꾼의 질문을 받고 보니 정말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일하나 의심도 되고 자책도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랍비가 말합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말하기가 망설여지는군요.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마을의 랍비입니다." 두 사람은 침묵가운데 한참 걸어갑니다. 랍비가 다시 입을 엽니다. "나를 위해 일하지 않겠어요?" "물론이죠. 어떤 일을 하면 되죠?" "단 한가지 일만 하시면 됩니다. 그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늘 일깨워 주세요. 늘 새삼 생각나게만 해주면 됩니다."
랍비가 파수꾼을 고용해서 자신을 위한 파수꾼이 되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견해서 읽으면 그런 대로 의미가 있구나 생각되는데 자꾸 읽고 또 읽으면 점점 더 메시지가 강하게 들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제가 사목자이기에 더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랍비의 지혜는 바로 오늘 현대 사목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지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랍비는 그 마을의 영적 파수꾼입니다. 그런데 이 랍비는 그 마을의 참 파수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한 파수꾼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무엇인가 경종을 울려주는 파수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예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씀에는 오고가는 모든 세기의 신앙인들을 위해 경종을 울려주는 파수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묻습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이 말씀의 배경을 먼저 살펴봅시다. 이 때는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막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때가 아닙니다. 오늘의 배경은 주님과 3년간 생활한 때에 일어나는 대화입니다. 제자들은 3년 전에 자기의 모든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세리 마태오는 하늘의 보화를 사모하며 부의 길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벌써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지 3년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이 만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3년간 따랐다면 여러분의 모습은 지금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께 무슨 질문을 하겠습니까?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므로, 그 주님을 따르는 삶 안에서 보상을 받는 차원에서 제일 으뜸이 되길 원했습니다. 최고의 명성을 원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길이 남게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주님께서 한 파수꾼을 불러 세우십니다. 누구일까요? 어린이 하나입니다. 그 어린이 한명을 제자들 가운데 시우시고 말씀하시길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이 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알기 전에는 이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옛날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이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낙태가 편만했고 비록 낙태되지 않아 세상에 태어나도 가정에서 버림받기가 일쑤였습니다. 병약한 아이나 원하지 않는 아이들은 산 속에 버려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동물에게 잡혀 먹히거나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집에 데리고 와서 노예로 부려먹곤 했다고 합니다.
유아시기를 넘기는 아이들이 약 2/3 가 되는데 겨우 살아남은 이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유가 됩니다. 아버지는 마음대로 자녀를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약 반 정도가 8살을 넘깁니다. 로마시대에는 자녀를 죽이는 것을 하나의 'act of beauty(멋진 행위)'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노예로 팔기도 하고 제멋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곧 이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어른들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짓밟는 사람들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아이들은 늘 자신을 죽이고 낮출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어린아이를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제자들 앞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제자들 눈앞에 파수꾼으로 선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한번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밝고 아름답고 명랑한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둡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을까요? 그림으로 된 성서책들을 보면 예수님이 예쁜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화가들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그렇게 귀엽고, 예쁘고, 명랑한 아이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수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었고 어른들의 이용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 앞에 어린아이를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21세기의 유복한 어린아이들을 세우시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어린아이 자리에 누가 파수꾼으로 설까요?
오늘복음 묵상을 준비를 하면서 'Kids on the street' 이란 책을 접해 보았습니다. 평생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위해 살던 두 분이 지은 책입니다. 오늘 미국에는 150만 명의 아이들이 homeless가 되어서 길거리를 배회한다고 합니다. 그중 57%는 이혼한 부모의 자녀라고 합니다. 16%는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25%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48%는 한번 이상 자살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40%가 15세 이하의 아이들이라 합니다. 이들은 'America's lost trib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떠한 이유로 homeless가 되었든지 가정을 떠난 이들의 삶은 비참합니다.
'Youth Worker'라는 잡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길거리의 아이들이 매시간 접하는 폭력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끝없는 성폭행을 당합니다. 소녀들은 납치되고 마약주사를 강제로 맞습니다. 아이들은 폭군들에게 끌려 다니기 일쑤입니다. 이들의 반 이상은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바로 이러한 아이들을 오늘 주님은 우리 기성교회 교인들을 위해 파수꾼으로 세우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파수꾼의 모습은 유복한 자녀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homeless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자, 이 시간 우리 앞에 homeless 어린이가 파수꾼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십시다. 이 어린이의 어떤 모습이 우리를 가장 압도할까요? 우리가 보는 것은 고통의 얼굴 모습일 것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입니다. 자살도 여러 번 시도해 보았습니다. 이 땅위에서 자기가 설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안전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려서 세상 고통을 다 겪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아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세워 놓으신 아이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는 그날도 어른들에게 도망 다니던 아이였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죽이겠다는 아버지에게 눈물을 쏟으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던 아이였을지 모릅니다. 이 땅위에 자기를 반기는 곳이 아무도 없는 상처투성이의 아이였을 것입니다. 쓸모없는 아이입니다. 하루 밥만 먹여 주면 만족해하고 자신이라는 긍지는 전혀 없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린아이를 놓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제자들에게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주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저 비천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도 아닌 저런 아이처럼 되란 말인가?"
이렇게 당혹해 하고 있는데 한수더 떠서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또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 거지와 같은 아이를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받아들이다는 의미의 영접이란 단어를 풀어 보겠습니다. 저는 개신교에서 잘 사용하는 영접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이 '영접'이란 해석이 아주 잘된 해석이라고 봅니다. 사실 헬라어로 ' ' 인데 영어로는 'receive'라고 번역이 됩니다. 'Receive'란 동사는 대등한 관계의 뉘앙스가 있습니다만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대등한 관계에서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 '는 대등한 관계보다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모시는 것으로 해석함이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잘것 없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받아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찮은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은 자가 되어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곧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천한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아 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지들을 영접한 적이 있으십니까? 자선은 베풀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들을 영접하라 하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아마도 고개를 흔들다 못해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어릴 때 이미 어린아이의 고통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그 고통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 뿐 아닙니다. 어린아이보다 더 낮아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때야 비로써 그토록 원하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 어린아이들보다 천해진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죽이는 일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곧 자신의 ego를 완전히 무시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ego를 위해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길 원했는데 천국에서는 실제로 자신의 ego를 완전히 버리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후 제자들은 어린아이만 보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저렇게까지 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그런데 이들은 갈등하면 할수록 자신의 ego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시길 원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겐 파수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겐 갈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렇게까지 하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이 갈등을 시작하신 분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ego를 죽이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St. Therese of Lisieux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어릴 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영혼으로 보는 체험을 합니다. 이 분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작아지는 삶' 입니다. 그분은 스물 네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삶이 위대함을 보질 못했습니다. 도리어 가까운 주변에서는 아무런 덕행을 하지 않은 평범한 수녀로 알려진 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little flower'(소화)로서, 가장 작은 자로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된 성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소화 데레사(St. Therese)가 쓴 글로 얼마나 그가 작은 자로 살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제가 언제나 작은 한 톨의 모래로 남아 있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모든 눈에 숨겨진, 단지 주님만 볼 수 있게 말이에요..." 이 분은 늘 큰 자가 되길 원하는 세상에서 모래처럼 작은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평범한 소녀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아는 자기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한 톨의 모래와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이 소화 데레사 성녀(St. Therese) 는 잠시 후 또 다른 글을 씁니다.
"하나의 모래알이 atom(원자)가 되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오직 주님만 나를 볼 수 있게 말이에요..." 백사장의 모래가 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얼마 지난 후 생각해보니 백사장의 모래도 사람의 눈에 보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고 주님의 눈에만 보이는 atom(원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St. Therese가 세상을 떠날 때 수도원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St. Therese는 친구들 눈에 띄이는 일은 하질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 눈에 띄이는 일만 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모래가 되다 못해 원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래가 되다 못해 원자가 되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안띄어도 주님에게만 보여지는 삶을 사는 것,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도 이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St. Therese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모래가 되고, 아니 그것을 넘어 원자가 되어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막연했습니다. 혼자서 모래라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인지, 원자라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인지...
오늘 복음은 확실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모래가 된다는 것은, 원자가 된다는 것은 고통의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서지는 삶이었습니다. 매일같이 나약함에 노출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의 삶처럼, 오늘 거리의 어린아이들의 삶처럼... 자기의 ego를 깨뜨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래알보다는 바위가 되고 싶어합니다. 모두가 바위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위가 모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뜨려져야 합니다. 매일 깨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라는 바위를 깨뜨리기는 커녕 매일 커지려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파수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자가 되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나의 ego가 깨지는 경험을 하십시다. 우리의 ego가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인정하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그때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만은 보십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복음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길거리의 어린아이보다 더 낮은 삶을 산 아이들은 옛날 노예생활을 했던 흑인 노예 아이들일 것입니다. 어느 흑인 노예 소녀가 다음과 같은 글을 아빠에게 썼습니다.
"나의 주인은 가면 갈수록 더 악해집니다. 오늘 아침 나는 무릎을 꿇고 복도를 닦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내가 일하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마치 새가 벌레를 쏘아보듯이... 그는 무엇인가 나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모른척 하고 마루를 닦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자기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아빠, 나는 그들이 하라는대로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더 원할까요?"
이 소녀는 주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니 존재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주인 앞에서 ego는 깨어질대로 깨어져서 원자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아빠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빠에게만 자신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의 아빠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요?
우리도 우리 아빠되신 하느님께 이러한 편지를 쓰는 작은 모습의 사람이 되십시다.
"아빠, 나는 그들이 하라는대로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더 원할까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느님은 나의 작은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두올묵상팀]
마음의 대화
-이인옥-
나를 홀대하는 사람에게는……
, 오늘 복음에서 루가 복음사가가 전하는 상황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역사적 현실처럼,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역사적 갈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엄청난 적대감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어떻습니까? 비극의 연속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구원의 길을 향한 여정에서 잠시 사마리아에 머무르시고자 심부름꾼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예수를 맞아들일 생각을 접었습니다.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며 노기에 찬 모습으로 예수께 말씀드렸으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하십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갚는” 보복율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주시고자 하시는 모습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보여 주시듯, 이웃이 아닌 원수 같은 처지에서도 어려운 경우를 만났을 때 도우는 사람을 격려하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앙갚음의 현실을 뒤바꾸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나에게 당장 모함을 하고 남에게 나의 단점을 말해 이간시키고자 하는 사람을 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복수와 징벌보다는 용서와 회개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그 모습에 우리 신앙인들은 다시 한번 고개 숙여야 합니다. 가까이서 우리를 소홀히 하거나 홀대하거나 멀리 하는 사람들과도 좀 더 친근해지기 위한 노력은 신앙인의 숙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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