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일 연중 제 26주간 월요일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수녀는 1873년 프랑스 알랑송에서 태어났습니다. 1888년 어린 나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1897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습니다.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성녀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고행과 희생을 바쳤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성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사제들을 위하여, 특히 먼 지방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남몰래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데레사 수녀는 1925년 성인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1929년 비오 11세 교황은 성녀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68년 군 사목에 전념하는 군종 사제와 군인 성당, 국군 장병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돕고자 해마다 10월 첫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날의 특별 헌금을 군종교구로 보내어 군의 복음화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가 제 자식을 아끼듯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포근한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는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현실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달라고 청합시다.
제 1독서 : 이사 66,10-14ㄷ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러들이리라.)
제 2독서 : 1코린 7,25-35 (처녀는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복 음 : 마태 18,1-5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려면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신다. 어린이일수록 어머니에게 더욱 매달린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은 주님께 철저하게 의탁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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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축일을 지내는 데레사 성녀의 부모는 자녀를 아홉 두었습니다. 넷은 어려서 잃고 남은 다섯은 모두 수도자가 되었는데, 데레사 성녀를 포함해 셋은 가르멜 봉쇄 수도회 수녀로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성녀의 부모도 혼인 전에는 수도 생활을 열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곧 가족 모두가 희생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데레사 성녀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요안나 아르크 성녀에 이어 프랑스의 두 번째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을 ‘한 알의 모래’로 여기며 평생 겸손한 자세로 살았던 이 무명의 수도자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로마를 순례한 것 외에는 수도원을 떠나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성녀는 봉쇄 수도원 안에서만 살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단 한 사람에게도 직접 선교한 적이 없는 그녀가 어떻게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것일까요?
성녀는 자신의 모든 희생과 보속을 선교사들을 위하여 주님께 바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희생이라도 사랑으로 바치면 주님께서는 크나큰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성녀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
-이수철 신부-
어린이를 상징하는 표현은 순수함, 단순함 그리고 겸손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함은 하느님께로 돌아오기 위해 부단한 회개를 통해 깨끗해지는 마음입니다.
마치 하얀 새 옷보다는 계속된 세탁으로 색깔이 바래 하얗게 된 옷 같다고 할까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 하나입니다. 죄를 짓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회개하십시오. 하느님은 용서하십니다.
죄를 짓더라도 곧장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해 일어나십시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자포자기가 대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해진다면 그 또한 은총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와 같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꽃이 되어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단순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모든 면에서 작아진다는 의미다. 작아진다는 것은 소화 데레사 성인의 영성이기도 하다.
오래전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 이야기다. 초아라는 소녀와 함께 동해 바다가 보이는 야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는 청명했던 날씨가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 검은 구름이 오락가락하더니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동해 바다에는 성난 파도가 날뛰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정말 무서웠다. “가자, 우리 빨리 뛰어가는 거야.” 그러나 몰아치는 폭풍은 우리를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덜덜 떨면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폭풍에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떼어놓았다. 갑작스러운 폭풍에 산새들도 울부짖었다.
그때 초아가 “저기 작은 꽃 좀 봐.” 하며 작은 풀꽃들이 피어 있는 동산으로 달려가더니 거기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아, 너무너무 포근해.”라고 말하는 초아를 따라 나도 눈을 감고 풀꽃의 향기를 맡았다. 순간 우리는 작은 꽃이 되었다. 작은 꽃잎이 되어 나비처럼 훨훨 나는 것 같았다. 사납게 불어대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난 그때 알았다, 작은 이들의 행복을. 그 꽃은 너무 작아서 무서운 태풍도 사나운 비바람도 덮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도 풀꽃처럼 작아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품에 안고 가실 것이다.
데레사의 작은 길
-권지호 신부 -
오늘은 10월 1일, 선교의 수호자이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대축일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 알랑송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녀는 9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성녀의 어머니는 성녀가 5살이 될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후, 아버지와 언니들의 손에서 자라던 성녀께서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처럼 따르던 둘째 언니 폴린느가 갈멜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녀도 나중에 15살이 되어 갈멜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러나 9년 후 바로 오늘 성녀는 폐병에 걸려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나갔습니다.
9년동안의 짧은 수도생활 동안, 완덕의 절정에 도달한 성녀는 당신이 스스로 말하듯이 작은 길을 걸어 갔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말씀처럼, 어린이로서 그 작은 길을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어린이의 작은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성녀는 자신의 이름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성녀가 걸어가신 작은 길은 어떤 것입니까?
성녀는 수도원 안에 살고 있었지만 세상 밖에 나가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성녀는 사제가 되고 싶어했고, 성서학자도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도 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런 열망으로 가득 찬 성녀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기의 정확한 성소를 찾고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
“드디어 저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이 심장은 사랑으로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지체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지게 되면 사도들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 흘리는 것을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하고, 사랑이 전부라는 것, 사랑은 모든 때와 장소들은 포함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도 미칠 듯이 기뻐 부르짖었습니다. 오! 예수님, 나의 사랑이시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저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제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Ms B 3v°)
성녀는 자기의 성소를 깨닫고 나서 구체적으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실천이 너무나 작은 것이기 때문에 성녀께서 걸어가신 길을 작은 길이라고 합니다.
성녀는 우선 일상생활의 작은 일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녀는 매순간 어떤 행동을 할 때,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복도를 걸어 갈 때도 ‘당신을 위하여’,, 묵주기도를 드리거나 미사를 봉헌할 때도 ‘당신을 위하여’라고 먼저 말하였습니다.
갈멜수도생활은 너무나 단조롭고 좁은 공간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작은 희생을 끊임없이 바쳤습니다. 예를 들면, 의지 뒤에 기대고 앉지 않는다든지.. 또 수녀님들과 같이 빨래를 할 때, 옆에서 비눗물이 튀어오는 것을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라고 하면서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녀는 매일 구체적으로 조그만 희생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완덕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성녀는 나중에 폐병에 걸렸습니다. 폐병에 걸려 처음으로 각혈을 하게 되었을 때 성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정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통을 통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버림받으신 예수님과 일치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성녀의 병이 심해지자 옆에서 다른 수녀님이 간호를 해주어야 했습니다. 하루는 간호하는 수녀님이 성녀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잠을 못자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 ≪자매님은 무엇을 합니까? 잠을 자야 해야 할텐데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십니까?≫ ≪저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임종을 앞둔 성녀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 “제가 가는 예수님의 팔 속으로 여러분도 곧 오시도록 여러분의 삶이 완전히 겸손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데레사 성녀는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천국으로 떠나갔습니다 : “하느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녀가 걸어가신 길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너무나 작은 일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데레사성녀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성녀의 삶을 바라보면서, 한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지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했는가입니다. 이것이 데레사 성녀가 남긴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데레사 수녀님을 천국으로 부르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누구나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주신 분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데레사 성녀는 우리나라 나이로 16세에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들어가 살다가 24세에 세상을 떠난 분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교회에 던진 감동은 대단했다. 숨어 지낸 짧은 생애, 데레사 성녀의 ‘작은 길’은 단순하고 사소한 일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1. 짧은 생애, 큰 메아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1873-1897년)는 입회할 수 있는 나이보다 어려 교황님의 특별한 허락을 받고 16세에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24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삼가 조의를 표해야 할’ 일생이었다. 그러나 봉쇄수녀원 안에서 조용히 숨어 지낸 짧은 생애는 교회 안에 너무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안에서 성녀의 생애와 영성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데레사 성녀는 수녀원 담장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는데도 ‘선교의 수호자’가 되었다.
성녀는 지금부터 불과 100여 년 전에 살았던 분이기에 2000년 교회 역사에서는 실로 최근의 성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데레사 성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좀 더 깊이 깨달아야 하겠다.
2. 사랑이 나의 소명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교회의 여러 지체들이 저마다 맡은 사명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1고린 12─13장)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은 어떤 지체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찾을 수 없어 속상해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1고린 12,3)와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3-13)라는 말씀에서 잠시 침묵에 잠겼다.
성녀는 모든 일을 가치 있고 위대하게 하는 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자신이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소명이 바로 온 교회에 사랑을 불어넣는 일, 곧 교회의 심장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녀는 부르짖었다. “오! 저의 사랑이신 예수님!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3. 가는 실로 짠 베가 더 곱다
데레사 성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을 좋아했고, 이 말씀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았다. 어린 나이에 언니들을 따라 입회한 봉쇄수녀원의 생활은 실로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녀원 울타리 안에서 기도하고 일하는 것뿐이었다. 자서전에 보면 수녀원 안에서의 일이란 접시 닦고, 청소하고, 바느질하고, 때로는 제구(祭具)들을 닦는 단순한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신문에 날 만한 큰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수녀나 다 하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할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있는 그런 불편들, 여러 사람이 함께 살면서 겪어야 하는 ‘서로를 참아주는 일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런데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위대한 성녀로 만들었을까?
성녀는 스스로 자신은 순교자들이나 사도들처럼 엄청난 일을 할 능력도 없고, 큰 활동이나 세상이 놀랄 만한 큰 자선사업을 할 처지도 못 된다고 하였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소한 일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열심히 할 뿐이었다. 그리고 성녀는 자신이 하는 사소한 그 일들과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참으면서, 그 하나하나의 희생을, 복음을 전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끊임없이 바쳤다. 말하자면 성녀는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선교사들을 위한 희생으로 하느님께 바친 것이다. 성녀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가는(고운) 실로 짠 베가(천이) 더 곱다.”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성녀의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현대에는 신앙 때문에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많은 신앙인들이 평범하게 직장일을 하고, 집에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키우고 시장을 보면서 일상의 사소한 일 속에 묻혀 살고 있다. 누가 알아주는 일이 아니고, 신문에 날 일도 아니다. 데레사 성녀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 모든 사소한 일에,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삶도 하느님 앞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일상의 평범한 일을 하며 사는 우리 모두는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월급쟁이도, 구두닦이도, 청소부도, 가정주부도, 군인도, 공무원도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내가 하는 사소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서 할 때, 그 사소한 일들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사랑만이 모든 것 안에 영원한 가치를 부여해 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 어린아이의 작은 길
-박상대 신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내어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다. 또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다고 해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다. 이것이 하느님사랑의 법칙이다. 사람은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나 이 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겉으로 많이 받은 자는 속으로 허기짐을 느끼며, 속으로 충만한 자는 겉으로 아쉬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의 진가(眞價)를 깨닫는 자는 드물다. 아기 예수의 성녀 소화 데레사! 그녀가 바로 드문 선각자(先覺者) 중의 한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허약한 몸 때문에 병석을 즐겨야 했던 성녀는 그만큼 속으로 옹골차졌던 것이다.
오늘 대축일의 주인공 마리아-프랑수아-데레사 성녀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알랑송에서 아버지 루이 마르탱과 어머니 젤리 게랭 가족의 아홉 번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성녀는 4살이 채 못 되어 반고아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마리아를 데리고 오빠가 사는 리지외로 이사를 하였다. 리지외로 이사 온 마리아에게 펼쳐진 시간들은 매번 새로운 영적 체험들이었다. 성녀는 어릴 적부터 특히 성모 마리아 신심에 출중했다. 7살 때부터 고해성사를 즐겨 받았고, 10살에 큰 병을 앓았으나 “미소의 성모 마리아”의 전구에 힘입어 치유되었다고 한다. 1884년에는 첫영성체를, 얼마 후에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 때 성녀는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여 명상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누이들이 극구 반대하였고, 리지외의 주교도 어린 나이 때문에 그녀의 입회를 거절하였다. 1886년 성탄절에 그녀는 전격 회심의 은총을 체험하였고, 이 체험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고, 사랑의 삶을 그녀는 소명으로 깨닫게 된다. 1887년 아버지와 함께 로마를 순례하고, 레오 13세 교황(1878-1903)을 알현한 자리에서 수녀원 입회를 간청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드디어 성녀 데레사가 15살이 되던 1888년 4월 9일, 그 해 성주간과 부활대축일로 인해 이동된 성모영보대축일에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겉으로는 아주 단순한 수도생활의 삶 속에서 그녀의 영성은 급상승하고 있었으니,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구체적으로 십자가 추종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죄인들의 불쌍한 영혼의 회개를 위해 스스로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가 보여준 “완덕의 길”에 정진하기 위해서도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녀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모범삼아 수도명을 데레사로 정한 것이다. 성녀는 하느님께 대한 내적 헌신으로, 마치 한 아기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그런 아이처럼 ‘작은 길’을 걷게 된다. 이는 단순하고 작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절감하고, 유아적 신뢰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에 내어 맡기는 아이처럼 사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사람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성녀가 걸어가는 ‘작은 길’의 핵심 사상이었다.
1895년 부수련장이 된 데레사는 원장수녀의 요청으로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였다. 복음적 겸손과 단순함과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익히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이 같은 덕행을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육체의 병고와 내적 충만함으로 죽기까지 영혼들을 구하고, 교회의 쇄신과 사제들의 성화, 그리고 선교사와 선교지역을 위해 기도하는 소임만이 성녀의 일상(日常)이 되어갈 무렵, 성녀는 성서를 유일한 독서로 삼았다. 폐결핵 진단이 떨어지고 1896년 성금요일에 첫 각혈을 쏟아냈던 성녀는 주님과 만날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그래도 아직 난 고통을 덜 받았다.”고 중얼거리며, 믿음과 희망으로 사랑의 주님과 만남을 준비하였다. 중병 가운데서도 자서전 기록은 계속되었고, 1897년 9월 30일 저녁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하느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했다. 1898년 성녀의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가 출판되자 영성서적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50개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작은 길’을 좋아했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갔던 데레사는 1925년 피우스 11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1927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와 나란히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녀에게 교회학자의 칭호를 부여했다. 소화 데레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세우시는 ‘한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 이 말씀은 교회가 이 어린 성녀의 살아있는 모범으로 그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복음적인 이념이다.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15세에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9년을 살았고, 그곳에서는 특별한 영적인 노력을 하였다. 성녀는 그의 언니 첼리나의 명을 들어 내적 체험을 썼는데 그것이 "영혼의 이야기"이며, 이것으로 성녀가 존경을 받게되는 자서전이다. 그리고 성녀는 그의 작품 "영적인 아이의 작은 길"에서 무한한 봉헌을 하고 있다. 성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께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 말은 자신의 "성소"를 발견한 교회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성녀는 짧은 기간의 수도생활이었지만, 그리고 한번 들어가면 바깥구경을 전혀 할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살았으면서도, 그 안에서 전교지방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전교지방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을 하였다. 자신은 한번도 전교지방에 가서 전교를 해본 일이 없으면서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성녀는 수도원 안에서 몇 년간의 수련장으로 일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영적인 삶의 스승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성녀를 조금씩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모두 바치도록 인도하셨다. 여기서 "포교사업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든 삶을 이를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녀는 작은 일에 충실하였다. 문을 조용히 닫는다든지, 복도를 다닐 때 조용하게 하는 것 등이다. 성녀는 특별한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으로 성녀가 되신 것이다.
또한 성녀는 성체를 통해 사도적 역할을 발견하였고, 이 성체는 오늘 우리에게 역시 성체의 "영적인 가난"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전교지역의 교회에 대한 큰 지향을 통하여 성녀를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축성된 적은 양의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가장 미소한 분"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을 가르쳐 주신다: 바로 당신의 십자가이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어린이는 도움을 받고,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 앞에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언제나 하느님께 달아들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즉시 실천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자.
얻는 것과 잃는 것
-김강정 신부-
살면서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얻은 것은 또 가질 수 있는 것들이지만, 잃은 건 모두 되찾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동심, 순수, 꿈, 열정 등등. 순수 하나면 넉넉한 시절, 동화 속 주인공마냥 꿈을 키우던 날들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허나 이만큼씩이나 자라버린 오늘, 제게는 동심도, 키워오던 꿈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황무지처럼 메마른 영혼의 깊이에서 영성을 길어내는 자신이 그저 초라할 뿐입니다.
철부지의 마음을 지녀야만 이를 수 있다는 영성의 마루. 그 완덕의 고지가 제게는 너무 높아만 보입니다.
정녕 말라버린 삶 앞에 빗물 같은 순수가 필요합니다.
그 여여한 흐름을 타고 당신께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의 발원. 당신 품에서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마냥 뛰노는 철부지 아이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왠지 수도원 담벼락 아래서 세상을 아름답게 살다갔다던 한 성녀의 삶이 자꾸만 그리워집니다.
황혼이 곱게 내려앉는 저녁, 장미꽃비를 내리겠다던 성녀의 마지막 말씀이 노을이 되어 어느새 하늘을 저리도 곱게 물들여가고 있습니다.
장미의 비
-서울대교구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인들은 어린이처럼 단순하다. 오늘 천상 탄생의 축일을 맞이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1873-1897)의 모습은 아이처럼 마냥 순수하다. 15세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9년 남짓 수도생활을 하고 24년의 짧은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데레사 성녀는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8년 만에 시성되었다(1925년). 그처럼 짧은 시간에 널리 사랑받게 된 이유로 사람들은 흔히 그녀의 ‘작음’의 영성을 지적한다. 실제로 성녀는 언니 수녀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작음을, 자신의 가난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기뻐하신다”고 쓰고 있다. “자신의 가난과 허무를 깨달을수록 그 분의 자비에 대한 눈먼 희망에 더욱 매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음을 사랑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건조함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가난하게 되고, 그 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의 불꽃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나의 소명은 사랑이다. 교회의 한복판에서 나는 사랑이고자 한다”고 고백한다. 성녀는 이 사랑의 소명을 위하여 “땅에서 선을 행하도록 나의 하늘을 사람들에게 넘겨 주고 싶다”고 원의를 발하고, “나는 그들에게 장미의 비가 떨어지게 하고 싶다”면서 지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토로한다. 이처럼 봉쇄수도원의 독방에서 세상의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그녀의 원대한 기도지향을 받들어 교회는 그녀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1927년).
그녀는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의 제물로 자신을 봉헌하고 이 사랑의 번제를 죽음의 순간에 완성한다. 그것은 바로 노력 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나는 당신의 손을 받들고 당신 곁에 있습니다. 당신의 손이 순교의 종려나무가지를 노력 없이 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녀는 “한밤의 망상과 싸우지 않기 위하여 차라리 눈을 감으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요구인가요?”라고 반문하며 번민의 밤 속에서도 평안하게 눈을 감는다. 마치 위대한 화가 라파엘이 “나처럼 하시오. 노력 없이 일하시오”라고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더 잘되는 법이다. 노력 없는 노력이란 바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아기 예수 데레사 성녀의 ‘어린이와 같은’ 삶의 영성이다.
불과 만 두 살의 나이에 언니처럼 수도자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3살 이후로 좋으신 하느님이 요구하신 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선택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하는 조숙한 영성의 천재! 그녀는 마침내 고통을 통해 완덕이 자신에게 다가온 것을 확인하면서 “매순간은 하나의 영원이고, 기쁨의 영원”이라고 외친다. “신뢰, 오직 신뢰가 우리를 이 사랑으로 이끌어 준다”고 말하면서 성녀는 세상 안에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약한 영혼들에게 오늘도 자신의 하늘을 넘겨 주고 그들에게 장미의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신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 마태오 18, 1~5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은 천체 우주 망원경의 렌즈를 닦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일의 세대인 어린이들을 제대로 돌보아야만, 저 드넓은 미래의 시야가 바로 보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린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이들의 것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린이를 돌본다는 것이 과연 천체 우주 망원경의 렌즈를 닦듯이 미래의 발전된 세상을 향한 돌봄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어른이, 부모들이 오히려 깨뜨리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영악스러워 지고 더욱 이기적이고 더욱 계산적인 경쟁 속에 내팽개쳐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가 걸맞지 않게 느껴지는 오늘의 우리 마음입니다.
제 자신은 “가끔 세상이 이토록 삭막해지는 것은 인간이 달나라에 발을 내딛고 난 다음부터이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어야하고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어야 합니다. 신화는 신화로, 동화는 동화로, 전설은 전설로 남아있어야 하며, 신비는 신비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큰 슬픔은 신비의 순수함이 사라지는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류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어린이들의 순수함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이 또한 어른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어린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셨던 오늘 축일의 주인공이신 소화 데레사 성녀의 삶은(1873~1897) 또 다른 일깨움을 우리에게 준다고 하겠습니다.
열 다섯 살 나이에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여 스물 네 살에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온전히 작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셨던 성녀의 삶은 ‘낮아짐과 사랑’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첫 영성체 때,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라는 약속을 죽는 그 순간까지 지켰던 성녀는 마지막에도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음 하셨습니다.
작아짐과 순수함을 잃지 않을때 나올 수 있는 기쁨의 삶,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마지막으로 이 같은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나는 지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나의 천국을 지내고 싶습니다.”
그렇듯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면서 작아짐의 삶을 사셨기에 지상에서 천국을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사셨기 때문에 그 같은 삶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태 18, 4)
작아짐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자주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더욱 많은 재물을 쌓으려 하고, 더욱 많은 고집 속에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더 큰 욕망의 울타리에 자신을 가두면서 끝내 그곳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불행한 삶을 스스로 자초하며 삽니다. 때문에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 세상 온갖 부귀영화와 영예가 결코 영원하지 않기에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 31)
그러므로 사라질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느님 영광의 나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이사 66, 12)
이 같은 약속이 계심에도 우리는 자주 나를 내세우고 내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의 자리에 세상 것을 두었습니다. 때문에 시련인 것이고,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기쁨과 참 평화는 우리를 향하여 팔 벌리고 있었건만 우리가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잊지 않아야 하는 진리는, 교만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에덴 낙원을 포기하게 된 것도 실은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였던 교만이었습니다.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죄도 역시 교만입니다.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하느님 은총의 구원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꼴찌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낮추는 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1코린 1, 21)
제 인생 저녁에 빈손으로
-양승국 신부-
착복식이 끝나자마자, 원장수녀는 데레사에게 명했습니다.
"오늘부터 주방 일을 맡아주세요."
데레사는 기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예, 수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하느님, 오늘부터 가르멜수녀원 주방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게 첫 소임으로 이렇게 좋은 일을 맡겨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자신을 낮추고 오만한 마음을 성모님 발밑에 봉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참아내며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데레사는 하루 일과 안에 벌어지는 작고 사소한 일에서도 하느님을 찾았고, 그 하찮은 사건을 통해서 크나큰 영적 진보를 일궈냈습니다. 데레사는 다른 수녀님들이 함부로 내팽개쳐놓은 이불을 개거나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옷가지를 차곡차곡 정리해 옷장 안에 넣는 등,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하찮은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데레사는 정리정돈 및 청소의 대가였습니다. 그리고 데레사는 그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작은 영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은 선물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지난 날, 지나친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영혼을 놓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지는 않겠습니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데레사는 24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선종하기 직전 데레사는 각혈을 하는 등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도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럴수록 데레사는 더욱 기도에 매진했습니다.
데레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의 특징은 아주 독특합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레사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성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일상에서 매일 우리가 접하는 아주 작고 하찮은 일을 열심히 함을 통해서도 높은 영적 생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려줬습니다. 매일의 작은 수고와 번거로움, 귀찮음을 기꺼이 참아내고, 그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것, 그것이 데레사가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준 영성의 길입니다.
좋으신 아버지께 대한 어린이다운 완전한 의탁, 아버지 품에 꼭 안기려는 자녀다운 신뢰, 아버지께 모든 것을 다 걸고 모든 것을 다 바치려는 순수한 봉헌, 그것이 데레사가 개척한 성성(聖性)의 특징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보다 앞서고 싶어하고, 남을 딛고 올라서려고 하지요. 그러나 데레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히는 한낱 작은 모래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조그마한 모래알을 찬란히 빛나는 별로 만드셨습니다.
다음은 첫 서원식 때 데레사가 품에 지니고 있던 기도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오직 예수님, 당신만이 저의 '모든 것'이 되어주십시오."
"제가 절대로 수녀원의 짐이 되지 않게 하여주시고,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게 하시며, 제가 예수님 당신의 작은 모래알처럼 잊혀져 발에 밟히게 하소서."
"예수님, 저로 하여금 많은 영혼을 구하게 하시고, 오늘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하나도 없고, 또 연옥의 모든 영혼이 구원을 받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다만 제 존재가 당신께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나이다."
과거에 우리는 이 성녀를 소화(小花) 데레사라고 칭했습니다. 의미있는 이름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정녕 하느님 앞에 한 송이 작고 예쁜 꽃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작음의 소중함, 작음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보여준 성녀였습니다.
확대지향적 물질만능주의 영향 아래 큰 것, 많은 것들에만 각별한 의미를 두는 이 세상에서 작은 꽃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 데레사였습니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게 됐던 데레사, 마치 하느님의 손수건처럼 가벼운 존재가 된 데레사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큰 사람, 너무도 높은 사람, 너무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 머릿속에 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은 너무 무거워서 하느님 품에 쉽게 안길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버릴 만큼 버린 사람, 밑으로 밑으로 내려간 사람, 작아질 대로 작아진 사람,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구부린 사람은 그 무게가 너무나 가벼워서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 자비의 품안에 머무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제 인생의 저녁에 빈손으로 저는 당신께 나아갑니다."
낮은 사람이 가장 위대합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인 10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날인 오늘은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 㰡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참을성이 더 생기고 남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인내하지 못하고 점점 옹졸해 지는 것일까?㰡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평균 연세가 70~80이 되시는 할아버지들의 모임에 나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되면 그 답이 확연해집니다. 어르신들이 음식을 시켜놓고는 기다리지를 못하는 겁니다. 재촉을 하고 사소한 심부름을 수도 없이 시키며 목소리들이 커지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어릴 때는 친구도 많습니다. 아무하고나 쉽게 사귀고 싸움을 해도 또 금방 친해지며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지고 내 것도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이라고 우기는 못된 이기심으로 사방에 벽을 쌓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나이가 들어서도 유아적인 상태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순수해지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 의지하여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 또 있고 없고, 배우고 못 배우고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성녀가 되셨으니 세상에 오염될 시간도 없이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꽃 피우고 그 깨끗한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돌아가신 분으로 교회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시성이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신심이 충만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난 데레사 성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14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마침내 그토록 소원하던 봉쇄 수도원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여서는 성덕을 쌓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과 싸움을 했고 그 어떤 여타의 덕보다도 순명의 덕을 배우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가 이 소화 데레사 성녀를 㰡선교 사업의 수호자㰡로 지정했다는 사실입니다. 24세가 되도록 봉쇄 수도원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이 어린 성녀를 교회는 왜 선교지의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한 수호 성인으로 모신 것일까요? 우리 상식으로는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는 선교사 중의 한 분이 적합하리라고 생각이 되지요. 우리 교회 내에는 이방의 나라에서 열심히 선교를 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은 성인도 많습니다. 그런데 선교지에는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봉쇄 수도원의 데레사 수녀가 㰡선교 사업의 수호자㰡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신앙의 근본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㰡통공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고 우리는 주일마다 신앙 고백을 하지요. 통공이란 서로 상통한다는 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신앙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성인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안식을 기도하고 연옥 영혼들은 우리의 기도와 선행에 힘입어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천국에 이른 그 영혼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성인의 통공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生)과 사(死)를 떠나 누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을 두고 드리는 기도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하고 회의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성모님께 초를 봉헌하며 이것이 과연 가납될 것인가 의심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도는 분명히 이루어지고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모니카 성녀는 아들 아오스딩 성인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함께 있지 않았지만 밤낮으로 기도했던 그 결실이 바로 아오스딩 성인의 회심이지요.
데레사 성녀는 언제 어디서나 선교지의 선교사와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기도의 지향이 그 곳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 㰡선교 사업의 수호자㰡로 성녀를 지정한 교회의 확고한 결정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물론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살아가지만 신자들의 기도가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교황님과 교구장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 만큼 필요하고 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또 은인들을 위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하여 끊임없이 정성껏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께 가납이 되고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오늘 데레사 성녀 축일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을 맞아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녀의 가정입니다.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네 명이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 집의 관심사와 부모의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교육했음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부족할 전망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의 쫓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가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기만을 기도하는 부모들이 지나치게 많은 요즈음입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녀들은 이기적으로 자라고 자기만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희생적인 뒷바라지로 세상에서 출세를 했지만 늙은 부모는 양로원에서 외롭게 힘든 노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만 욕심을 둔 부모의 잘못된 교육이 그대로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요즈음 나이 든 부모는 자식을 의지하지 못하고 노후 보장 보험 같은 것에 노년을 의지한다고 합니다. 신자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녀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기도하고 가르치고 길렀다면 그런 보험 따위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란 자녀는 부모의 든든한 힘이며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하느님을 의지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녀를 가르친 데레사 성녀의 가정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전교의 달이 시작되는 오늘 우리는 데레사 성녀의 축일을 지내며 성녀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닮기를 기원해 봅니다.
㰡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㰡(마태18,3)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위대하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늘 기억해 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며, 이를 삶으로 증거한 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소화 데레사 성녀이십니다. 성녀의 겸손과 단순함에 가득 찬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본받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가정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복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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