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Margaret K 2007. 9. 30. 01:51

   2007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오늘 복음에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부자고, 다른 한 사람은 거지나 다름없는 라자로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죽어서는 고통 속에 놓입니다. 반면에 라자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첫째와 꼴찌가 바뀐 상황입니다. 주님의 이끄심을 따르면,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루가 16,25)


 'My child, remember that you received
what was good during your lifetime
while Lazarus likewise received what was bad;
but now he is comforted here, whereas you are tormented.


  

 부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저세상에서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반면에 라자로는 이승의 삶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호화로운 상황에 놓였다. 급기야 부자는 라자로를 보내 자신의 형제들만이라도 고통스런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죽음 저쪽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알려진 것은 거지나 다름없는 처지라는 것뿐입니다. 그는 부잣집 대문 앞에서 음식 찌꺼기로 연명하였습니다. 몸에는 종기가 돋아 개들이 핥았다고 하니 비참하기 짝이 없는 처지의 사람입니다.
부자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으며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었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아무튼 두 사람의 생활은 극명하게 달랐고, 그렇게 살다가 둘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저쪽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라자로는 복된 사람의 대열에 들어갔고, 부자는 고통 속에 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저세상 삶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는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고, 라자로는 착한 일을 하였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신분과 상황은 죽는 순간에 바로 끝납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승의 신분이 저승에서도 보장되겠지.’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무관심    

-김인한 신부-


 누군가가 사랑의 시작은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누군가를 바라볼 때, 즉 나의
모든 방향이 그곳에 향해 있을 때 그 누구든 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라보지 않는 무관심으로 누군가를 품을 순 없습니다.
복음에서는 부자의 어떤 특별한 잘못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악행을 한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나름대로 율법에 따라서 잘 생활했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의 진짜 잘못은 무엇입니까?
무관심을 넘어서 망각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를 무관심이라고 하지만 그것의 끝은 바로 망각입니다.
하느님의 심판 대상도 바로 이 무관심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갇혀 있을 때 찾아오지 않았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라자로를 바라봅시다.
무관심으로 닫혀 있는 시선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무관심

-권지호 신부 -


  미국 지하철 안에서 일어나는 강도 사건은 러시아워 때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만원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변을 당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도 일어납니다. 혼자 사는 옆집 사람이 죽었는데도, 모르고 있다가 송장 썩는 냄새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뉴스는 이제 특별한 뉴스거리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거지 나자로의 얘기를 통하여 우리의 무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가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한 일은, 그저 자기 돈으로 잘 먹고 잘 산 것뿐입니다. 그것이 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바로 자기 집 대문간에 앉아 있던 거지 나자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이런 모습은 현대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무관심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가슴 뜨끔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모두가 자기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때,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웃에게 관심을 두었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이기적인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참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모습을 보고 모두들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은총 덕분입니다. 믿음은 넓은 시야로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웃과 먼 이웃을 자애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신앙은 주님의 마음으로 베풀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으로 오늘 우리는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건강한 균형감각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애로운 주님의 베푸시는 마음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비로움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길 빕니다. 아멘.


 

 죽음은 삶의 최종 평가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

 

몸이 편찮은 신자들에게 병자성사나 환자를 위한 기도를 할 때 그들의 얼굴 모습을 보면 가족과 이웃에게 지금까지 어떤 마음과 태도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는지 조금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들은 적어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오신 것 같고, 몸이 불편해서 그렇기는 하지만, 밝은 미소 없이 양미간에 주름이 깊이 패인 분들은 ‘주변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오셨구나’ 하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특히 임종에 가까운 환자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과 같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날 때도 이 세상에서 살 때 지녔던 마음들을 그대로 가지고 떠나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루카 16,19-31)은 가난한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할아버지 품으로 가고, 반대로 부자는 저승으로 가서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큰 구렁을 사이에 두고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식혀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살아 있을 때 인색하고 자비를 베풀지도 않고 살아온 그의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해 부자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를 당하지 않기 위해 라자로를 자기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 부자는 회개를 이 세상이 아니라 저세상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이 죽을 때의 모습도 다르다고 합니다. 삶의 흔적들이 보여 주는 진실은 죽음의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죽어 가는 모습은 살아온 모습의 반영이고 요약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나온 부자 역시 살아 있을 때 모습을 갖고 주님으로부터 셈을 받은 것입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에서든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평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5,31-46).

죽음을 바르게 맞이하고자 한다면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평화로운 죽음을 바란다면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삶 안에서 평화로운 마음을 지니며 살아야 합니다.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평소에 기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은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인생의 마지막 장이기 때문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되돌아가는(코헬 12,7) 존재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위험성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지난주일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재물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그 재물이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 위험성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직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찾아드는 모든 ‘파멸적’ 능력을 극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마음을 굳게 닫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풍요한 의식주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가난한 라자로는 부자들이 식사 후에 손을 깨끗이 하는 빵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으며, 돌아다니는 개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는 정말 ‘자기 집 문간에’ 드러누웠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까? 팔자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입장이 바뀐다. 라자로는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은 식탁에 자리잡게 되고,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생애 동안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전과 같이 누구에게나 명령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24절). 하여간에 오늘 복음의 비유는 전통적인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El‘aza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간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대답은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에 관한 것이다. “얘야, 너는 살아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2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균형을 이루어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세상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만이라도 그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한다(28절). 그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음을 들어 그것도 거절하고 있다.

사실 형제적 사랑이나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넉넉하다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11,46-53; 12,10-11 참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이웃을 바라보려고 하여야 한다.

이 부자는 어찌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그것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말라”(이사 58,7)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것은 재물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유한 모든 재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상실해버려 더 이상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위험성’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원교구 김기원 신부-


2-3년전부터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양극화‘라는 말이다. “중간 부분이 해체되면서 양 극단으로 모이는 현상”을 말하는 이 용어는 원래 정치학, 사회학에서 사용되던 개념이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빈곤이 오히려 증대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경제학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 양극화라는 말은 요즘“고용의 양극화”, “노동시장의 양극화”, 그밖에 주택/교육/문화/권리의 양극화 등 여러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다. 정책과제 면에서 양극화는 주로 소득의 양극단, 특히 최빈곤층의 소득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양극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각 계층 간의 이질감으로 인해 사회통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고, 또한 절대 빈곤층의 증가로 각종 사회 범죄들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양극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산층을 살리는 것 외에, 절대빈곤층에 대한 무조건적인 재정지원과 교육, 직업훈련 등을 통해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양극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빈곤층에 대한 관심과 적절한 대응책과 적용을 통해 그 현상을 최소화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몇몇 특별 계층만 잘 사는 나라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고, 상위 몇프로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한마디로 밑바닥 인생의 삶에 대한 연민이 없다는 것이다. 교정사목을 하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도움의 손길을 받았더라면 그들이 변화되었으리라는 것과 지금처럼 수용자의 신분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죄악은 그가 돈이 많았다는 것도 아니고 거지 라자로를 멸시했거나 모욕을 주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죄는 단순하게도 가난한 라자로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라자로에게 아무런 위해도 주지 않았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했던 라자로를 외면했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맹자는 우물가에서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한 아이를 보면 달려가 그를 구하려는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였다. 이 측은지심이 메말라 버린 사회는 죽은 사회와 다름없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 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나의 눈길과 손길이 필요로 하는 곳에 관심을 갖고 자그마한 것 하나라도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하느님이 도우시는' 라자로

-양승국 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라는 거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던 중증 신체장애자였습니다. 아침마다 동료 거지들은 그를 번쩍 들어 부잣집 대문 근처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심각한 장애를 지닌 동시에 지독한 피부병까지 앓고 있는 라자로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멀찍이 피해서 달아날 뿐 아무도 그에게 동정을 베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배가 고팠던 라자로는 있는 힘을 다해 부자의 식탁 바로 밑까지 기어갔습니다. 매일 성대한 만찬이 벌어지던 부자의 식탁 아래서 가끔씩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고 필사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경우에 따라 직접 손으로 집어먹기도 했기에 부잣집에서는 빵을 사용해서 지저분해진 손을 닦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이 더러워진 손을 닦는데 사용했기에 비위생적이기 짝이 없는 빵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라자로의 비참함. 그것도 식탁 밑에서. 더욱 가관인 것은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주인 없는 개들마저 라자로에게 다가와 그의 종기를 핥았지만 그는 그 개들조차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개보다도 못한 삶이 바로 라자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런 라자로를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 라자로란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우신다'입니다. 라자로는 자신의 비참함을 한없는 인내로 이겨냈으며 자신의 미래를 전적으로 하느님 손에 맡겼습니다.

라자로는 살아 생전 자신의 비참함을 절실히 깨달으며 살았기에 오직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라자로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마련하신 천상잔치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히십니다.

재산이란 있다가도 한순간에 사라지는 뜬구름 같은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 재능, 학력에 한껏 자아도취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한순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거두어가십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우리 자세는 라자로와 같은 겸손함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제 눈은 비참함으로 흐려진 채 날이면 날마다 눈물짓나이다. 제 희망은 이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너무도 '잘' 살았습니다. 의식주 그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옷은 오로지 최고급 명품으로만 잔뜩 치장했습니다. 집은 임금님 대궐처럼 지었습니다. 매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냥 즐겼습니다. 오직 제 한몸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겼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가 진귀한 음식을 즐기고 있던 바로 그 식탁 밑에만 하더라도 라자로라는 거지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엎드려서 '언제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나'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동네 개 보듯이 했습니다. 기분 좋으면 뜯고 있던 닭다리 하나를 크게 선심 쓰듯이 밑으로 던져주었습니다.

부자의 오만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 있나'하는 생각에 치가 떨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자의 가장 큰 과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 앞에 겸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잘 나누어 쓰라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임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돈이면 전부인 줄 알고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하게도 무시하면서 오만하게, 안하무인격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가서는 지옥불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불평등과 불의, 의인의 고통,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서러움을 우리 역시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성실히, 꾸준히,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부와 명예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분들은 훌륭한 부자들, 하느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그 모든 부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뜬구름과 다를 바 없음을 기억하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고, 작은 손길이라도 보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넉넉한 가을이 되길 빕니다.

 

 무관심이 판치는 세상은 지옥이다

-예수회 변희선 신부-

 

자본주의 경제에서 삶의 최대 가치는 돈을 버는 일이다. 물론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리고 돈을 많이 소유한「부자」와 돈이 없는「빈자」라는 두 계층이 생겨났다. 이러한 빈부의 격차를 해결하고자 칼 막스라는 학자는 공산주의를 주창했지만 약 70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돈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부 부유층 사람들은 하룻밤에 천만원이 넘는 돈을 호화 요정에서 쓰고, 병들고 가난한 어느 아버지는 천만원의 상해보험금을 노리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는 감옥에 들어갔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적 발전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국가의 경제를 위하여 월남전에 나가서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중동에 간 근로자들은 비지땀을 흘렸으며, 몇 만원이 안 되는 월급으로도 열심히 일한 언니들의 정성이 모여서 수출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의 진정한 목적인 삶의 질적 성장은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삶은 혼자서 이뤄지지 않는다. 누구든지 두 사람(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나고, 사람은 이웃과의 만남과 관계가 없으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人間)의 간(間)자는 사이를 뜻한다. 결국 사람은 남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혼자서만 돈을 많이 벌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 사회는 극심한 이기주의와 탐욕이 판을 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졌다. 이 모든 현상들은 인간 관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 관계는 먼저 서로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에서 비롯한다. 안 보면 보고 싶어지고, 만나고 싶어야 정상적인 인간관계이다. 이러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탐욕이다.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죄악은 그가 돈이 많았다는 것도 아니고, 그가 거지인 라자로를 멸시하거나 모욕을 주었기 때문도 아니다. 이 부자의 잘못은 단순히 가난한 라자로에게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이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된 원인은 자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이웃 라자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은 것 때문이다.

맹자님은 우물가에서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보면, 먼저 달려가 그를 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이라고 가르쳤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메말라버린 사회는 사람의 본성이 없어진 비인간적인 사회이며, 결국 우리 스스로가 지옥을 미리 만드는 셈이다.

어떠한 물질도 그 쓰임새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고픈 경우에 좋은 것이며, 배가 부른 이에게는 가치가 없다. 돈은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니다. 돈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쓰여질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 돈이 필요한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무수한 기업들이 도산하는 경제적 난국에 빠져 있다. 그러나 30년전보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에게 정말 부족한 것이 있다면 따뜻한 마음이다. 떡 한 개라도 나누어 먹으려는 따뜻한 가슴이 아쉬운 것이다. 반면에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경제 논리의 풍토에서는 모두가 냉혹하기 쉽다.

가슴이 따뜻하려면 무엇보다도 겸손과 청빈의 맛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겸손과 청빈의 맛은 나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부터라도 관심과 걱정은 하느님께 맡기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보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서, 내 이웃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머리 속을 비우고 미소와 친절로 이웃에게 다가가자.


 

 부자든 빈자든 이웃을 위한 마음과 눈과 귀가 있어야

-박상대신부-

 

 마태오, 마르코와 함께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루가복음에는 다른 두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루가 고유의 특수사료들이 많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우선 예수의 전사(前史)가 그렇고,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여자들, 죄인들에 대한 자비와 관심을 소재로 삼은 대목들도 그렇다. 예수께서 자주 기도하는 모습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루가복음의 고유성에 속한다. 루가는 세상의 재물을 놓고 부자와 빈자, 소유와 포기에 관한 문제를 큰 관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죄인들의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에 관한 다양한 비유들도 빼놓을 수 없는 루가의 특수사료들이다. 특히 루가복음 15~16장에는 다른 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유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잃었던 은전의 비유’(15,8-10), ‘잃었던 아들의 비유’(15,11-32), ‘약은 청지기의 비유’(16,1-15), 그리고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가 그것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우선 부자(富者)와 빈자(貧者)에 관한 비유이다. 오늘의 비유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19-21절)는 부자와 빈자가 처해있는 이 세상의 모습을, 제2부(22-26절)는 저 세상에서의 역전된 상태를, 그리고 제3부(27-31절)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관계를 보여준다. 제1부에서 부자와 빈자의 대조가 매우 날카롭고 격한 색조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모습으로, 빈자는 빈털터리 거지에다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고, 게다가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을 만큼 비참한 삶을 인내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19-21절) 여기서 부자가 지독한 구두쇠라거나 도덕적으로 악한(惡漢)이라는 말도, 라자로가 선인(善人)이라거나 그 부자에게 적선(積善)을 요청했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제2부는 죽음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후에 부자와 빈자의 상태가 완전히 역전된 것으로 전개한다. 빈자는 죽자 바로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아브라함 품에 안기었다는 것과 부자는 죽어 그냥 땅에 묻혔다는 대비(對比)가 역전의 전초전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저승에서 빈자의 상태와 부자의 상태가 큰 구렁텅이(카스마)를 사이에 두고 전혀 교류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이는 제3부의 이승과 저승의 관계로 다시금 강조된다. 저승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는 부자가 이승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 이승에서의 삶은 이승의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가 부자이건 빈자이건 간에 어떤 모양으로든 교류가 가능하다. 오늘 비유에서 치부(致富)나 부유함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관건은 사람자체에 있다. 바로 자신이 가진 부(富)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고,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 말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즉 자기 집 문간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개들에 의해 종기까지 핥음을 당하는 한 거지를 보고도 보지 못하고, 그 신음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부자 말이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하느님 나라에 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모세도 예언자도, 누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부자의 철갑을 뚫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동(動)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비록 이승에서 부자였지만 저승에서는 참으로 가난한 빈털터리였던 셈이다. 세상을 살면서 타인을 위한 눈도, 귀도, 마음도 없는 자는 이와 마찬가지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라자로의 처지가 천국에 빗대어 표현되었다고 해서 부자의 처지가 굳이 지옥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비유가 빈부의 극심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비유는 다만 저승에서 반전된 처지를 통하여 이승의 부자들을 경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물질과 재산이 많고 해서 다 부자는 아니다. 반대로 가진 재산이 없다고 해서 다 라자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지니고 있는 욕심이나 무관심이 이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빈곤한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거나, 빈자라 할지라도 물질적 궁핍을 불평하거나 원망하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 또한 오늘 복음의 부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결국 오늘 복음의 비유는 사실 ‘예수의 말씀을 비웃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16,14)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앞서간 대목의 복음들을 함께 살펴보면 재산의 소유가 제자로서의 예수님 추종을 줄곧 위협하고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하게 함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재물의 소유가 이승에서는 안위와 행복을 약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도 모르는 저승에서의 고통과 불행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승에서의 빈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빈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의지요 선택이며 사랑이다.

 
부에 중독되지 않게 깨어 있어야

-서울대교구 문종원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질타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사람은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권력과 재물을 쥔 자가 아니라, 지상에서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은 라자로와 같은,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풍요 속에 굶주리는 지구촌의 일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함으로써,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요즘 강남에 사는 어린이들 중에 많은 어린이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 아파트 몇 평이니?" “응, 30평이야." “야, 좁아서 어떻게 사니, 적어도 40평은 돼야지" “제네는 50평이래." “부러워한 꺼 없어. 전세 들어 살거든." “너희 엄마 차 있니?" “없어. 우리 집에는 차 한 대 뿐이야." “그러면 너희 엄마한테 빨리 뽑으라고 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돈과 물질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눈 아래 얕이 봅니다. 돈과 인격이 비례한다고 하는 의식이 우리 마음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습니다.

경제성장과 함께 갑자기 부를 움켜잡은 졸부들은 돈과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릅니다. 자기의 돈이니,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간섭이야" 하며, 큰소리 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호의호식과 과소비로 사치생활을 합니다. 몇 억원짜리 가구를 구입하여 떵떵거리고 살아갑니다.

한번은 새 사제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러 오시는 수도회 외국 신부께서 점심 식사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편안하게 좋은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방이나, 세계 여러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어느 도시 한 곳에서만도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몇 백명이나 됩니다." 같이 식사하던 동료 사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칫 의식 없이 살아가기 쉽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장 낮은 살 속에 있는 맑은 영혼들


저희 새 사제학교 신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사목상담 실습을 하기 위해서 신경정신과 의원, 본당 구역, 그리고 병원 등 여러 곳으로 파견되어 나갑니다. 저는 성가 복지 병원에 나가는데, 거기서 호스피스(임종) 환자들을 상담합니다.

입원한 환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랜 투병생활을 하느라 환자도 지치고, 간호를 하는 가족들도 지칩니다. 가족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이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밥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옷 입고, 대소변 보는 것까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급기야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기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해줄려는 마음 안에서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입원한 환자 중에서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 특히 죽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맞이하는 영혼을 볼 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사목상담을 하면서, 그리고 동료 사제들의 상담사례를 들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 앞에서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지금은 이렇게 수족을 못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상담을 한다고 하지만, 하느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우리는 봉사함으로써 봉사받습니다. 때로는 도움을 받는 환자들보다 봉사자들이 더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요즈음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 알고 개인주의에 물들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하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즐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봉사함으로써 봉사받는다는 것을 생활을 통해 체험하면서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봉사함으로써 마음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에 자기 멋대로 살지 아니하고, 안일과 자기 만족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맡은 사명을 나무랄 데 없이 온전히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섬김과 나눔으로써 얻는 풍요로운 삶


오늘 복음에서,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는 라자로를 위로해주시고,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은 사람들을 위안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으로 배우기에, 자신에게 닥친 역경과 어려움을 슬기롭게 대처해나가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가를 보게 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의 유익과 쾌락을 쫓아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에게 도움과 기쁨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와 같이, 영예와 권세가 영원히 그분 안에 계시기에, 고통과 어려움의 생활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인내를 낳아 고통받는 사람들을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합니다.

시간이 많아서,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여건이 허락하여서, 또는 남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기에, 그저 하느님의 일꾼으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눕시다. 우리가 이웃에게 인색하다면 우리는 영육간에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위안해주십니다. 우리는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3대가 한집에 살면서 한방에서 밥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식사 때 할아버지 자리는 유리가 달린 문 곁인데, 밖을 내다보시다가 밥을 얻으러 온 사람이 있으면 “얘, 어멈아. 손님 오셨다.”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바로 숟가락을 놓고 동냥 그릇을 들고 온 이한테는 밥과 찬을 담아주었고, 빈손으로 온 이한테는 윗방에 따로 상을 차려 대접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무위당이었기에 나중에 이웃들이 그한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고 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와는 아주 대조를 이루는, 한창 더운 대낮에 자기 앞을 지나가는 세 나그네를 달려가 맞이한 아브라함에 비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극진히 대접한 세 나그네는 하느님의 천사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하느님 대신 아브라함이 등장한다고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말합니다. 부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난한 이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의 라자로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개개인의 이름으로 부르실 만큼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도가 보입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3)라고 한 마리아의 노래가 이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어떤 부자, 도대체 그의 잘못이 무엇인가요? 그가 부당하게 부를 축적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로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는데 즐겁게 사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는 라자로를 미워하거나 학대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부자의 잘못은 형제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라자로는 죽어 아브라함 품에 안기지만 부자는 죽어 저승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내가 좋은 것들을 소유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노력 때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것이 기본을 이룹니다. 물질적인 것 이외에도 내면의 자질이나 건강 등 타고난 것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마태 24,`45) 하듯, 가진 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제때에 모든 이에게 고루 분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부자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내 배가 부르면 종의 배도 부르다.’는 옛말 그대로였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부자의 가족한테서 부자 같은 사람이 나오고, 장일순 선생의 가족한테서 장일순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조상, 곧 할아버지로 부르고 있지만 진정 아브라함의 후손은 장일순 선생 같은 가족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성치 못한 몸(종기투성이)이었고,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란 굶주린 사람 라자로는 게을러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떠하였든 부자의 집 앞에 있는 라자로는 일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회의 구조와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쥔 쪽은 부자와 권력자입니다. 단지 부자라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청렴하지 못한 부자, 나누지 않는 부자가 잘못된 것입니다.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사람이 7초에 한 명, 60억 세계 인구 중 30억이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목숨도 환율처럼 1달러 대 1천 원, 1달러 대 3만 리라 하듯 그 값이 각각 다른 걸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13명만 죽는다고 해도 전세계가 들썩거리지만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천문학적 숫자가 아사 직전인데도 세계 언론은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뭐가 제일 필요하세요?’ ‘씨앗이죠.’ 어쩌면! 아프가니스탄 농부들과 입을 맞춘 듯이 똑같은 말을 한다. 굶주림 끝에 종자까지 다 먹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에게 씨앗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에요.’ 이야기인즉 작년에 한정된 구호 자금으로 한 마을은 씨를 배분하고 그 옆 마을은 주지 못했단다. 안타깝게 비가 오지 않아 파종한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으나 씨를 나누어 준 마을 사람들은 씨를 심어놓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확기까지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았는데, 옆 마을은 아사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전세계는 남한 인구만큼인 4천2백만 명의 에이즈 환자가 있고, 매일 1만5천 명씩 늘어난다고 합니다. 임산부가 에이즈에 감염되었을 경우 태아도 감염되는데 이런 모자 감염은 임신 7개월에 한 번 억제 약을 복용하고 출산 후 3일 내에 아이에게 한 번만 보조제를 흘려주면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약값은 단돈 4유로(6천원)인데 그것이 없어서 죄 없는 아기의 목숨이 무참히 꺼져간다고 합니다.”(「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그렇습니다. 늘상 내 코가 석 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 눈 돌릴 겨를이 없다며 무관심하게 살고 있습니다. 한비야 씨는 이 책에서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지만 생명의 반대 역시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

 

 

  

 오늘의 부자는 라자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신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간에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은 종기를 핥기 위해 모여드는 개들뿐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두 사람이 모두 죽어서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고, 부자는 땅에 묻혀서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죽음 후의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라자로가 아브라함의 품속에 있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죽어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땅에 묻히고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죽음 후의 세계로 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신경 기도문에서는 이 죽음의 세계를 고성소 혹은 저승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재물을 지니고 호사스럽게 사는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의 부자는 재물을 많이 가지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재물이 주는 행복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는 자기 집 문간에 있는 거지 라자로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가졌다고 결정적으로 행복한 것도 아니고 현재 굶주린다고 결정적으로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은 있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본인이 게을러서 가난할 수도 있고, 오늘 라자로와 같이 몸이 불편해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도 있습니다. 이북 동포들 같이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굶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세상의 불공평을 인간이 서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겨서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나누어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를 사람들이 배워 실천하여 공평한 세상이 될 것을 원하십니다. 마태오복음서는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사람,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사람,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을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고도 말합니다. 중국의 고전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한 사람에게 재물을 주어 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구하려 하지만, 가진 자는 그 가진 바를 뽐내고 갖지 못한 이를 깔보니 하늘이 노할 것이다”(채근담(採根譚)).

오늘의 부자는 라자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야기가 지적하는 비극입니다. 재물을 가졌다는 것은 나눌 것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지 않고 재물만을 행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이기심입니다. 작고 약한 형제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외면하는 우리의 비극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라자로가 부자 집 대문간에서도 굶주렸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역사 안에 지속되는 비극입니다.

19세기 유럽이 산업혁명을 겪고 기계문명의 혜택으로 인간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유럽의 지성인들은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 신앙이 해결하지 못한 지구상의 가난을 이제 기술문명이 해결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드디어 가난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물질로써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되면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그리스도 신앙 같은 것은 지구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그들은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은 오늘까지 가난을 해결해주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생산성이 증대하자 오히려 이 세상의 빈부격차는 더 심화되었습니다. 부요한 자와 가난한 자, 부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경제력은 더 큰 격차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부익부(富益富)빈익빈(貧益貧)이 더 심화되었습니다.

기술문명과 더불어 나타난 공산주의는 재물을 강제로 공평하게 나누게 하여 인간 모두가 호화롭게 사는 지상낙원을 만들겠다고 말하면서 역사 안에 출현하였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그 사상은 실험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70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 실험의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사라지고 의기소침한 인민은 모두 가난 안에 평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북의 정권이 아직도 그 사상에 충실하여 인민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의 힘으로 인간을 평등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에 대한 말이 인간 삶에서 깡그리 사라졌을 때, 인간은 극도의 잔학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죽음의 나라에서 애원하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로 끝납니다. 부자가 애원한 것은 자기 형제들이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라자로를 형제들에게 보내어 경고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그들을 찾아가 말해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는 또 애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지만,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초기교회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에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하느님에 대한 말을 역사 안에 지속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한 일을 연장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을 죽기까지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도 같은 실천을 합니다.

 

 

 
무한한 관심과 따뜻한 사랑

-서울대교구 주보 2001. 9. 30.-


1. 성서이야기


제1독서 아모스 6,1.4-7은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을 들려 주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기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가장 번성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매우 부패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에 아모스 예언자는 "상아 침대에 누워 거문고를 뜯으며 포도주를 대접으로 퍼 마시는 이들"을 향하여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5,24)고 외쳤던 것입니다.

제2독서 디모테오 전서 6,11-16은 교직 수여식이나 세례식 때 주례자가 행한 훈시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피하라는 것(6,10.11a)과 여러 덕행들을 쌓아서 신앙생활 및 교직생활을 올바르게 하라(6,11b.12)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6,19-31은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입니다. 이 예화는 루가 복음서에만 나오는 것으로 부자와 라자로의 처지가 저승에서는 완전히 뒤바뀐다는 이야기(19-26절)와 부자가 자기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27-31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5절에는 부자와 라자로의 상태가 뒤바뀌게 된 이유가 나옵니다. “얘야, 돌이켜 생각해 보아라. 너는 생전에 복을 누렸지만 라자로는 그만큼 불행을 겪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심한 고통을 받는 거다.” 그리고 26절에서는 저승에서 한번 결정된 운명은 다시 바뀔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부자는 다만 제 형제들이라도 죽기 전에 회개하여 구원되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라자로의 부활을 보면 회개할 줄로 믿고 라자로를 부활시켜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에 앞서 돈을 좋아하고 의로운 체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들 가운데서 높은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흉물입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루가16,15).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이 예화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의 운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만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호의호식하면서 하느님의 심판도 사후의 생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지만 결국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한 부자의 비참한 말로와, 세상에서는 멸시와 천대만을 받으면서 살았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 한 거지의 아름다운 운명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평등한 삶을 살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정의가 실현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주는 아름다운 교훈은 이 세상의 재물에 빠져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살다가는 언젠가 저 부자처럼 저승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죽음으로써 영원한 운명이 확정되기 전에 모세나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서둘러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찾아가면 혹시나 회개하지 않을까 생각한 부자를 향하여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지상에서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회개하지 않으리라'고 한 아브라함의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영원의 삶을 그리워하면서 지상에서 가난한 이웃에게 무한한 관심과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훗날 저승에서 누리게 될 부활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깊이 새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신(物神)보다 더 위험한 우상은 없다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루가 복음은 ‘가난함=구원, 부유함=멸망’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물론 의로운 부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산과 돈에 대한 집착, 물욕이 모든 악의 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신(物神)보다 더 위험한 우상은 없다.


1. ‘가난함=구원, 부유함=멸망’인가?


복음서마다 어떤 문제를 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복음사가의 신학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보면, 부자는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그냥 가난했기 때문에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 그렇다면 모든 부자는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다 멸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산상설교의 ‘참된 행복’에서도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한다. 그러나 루가의 병행구절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라고 말한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로 하늘나라를 차지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마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수식어를 붙인 것보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 예수님의 의도에 훨씬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에 설명을 덧붙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갖 불의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는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호의호식하는 당시의 부자들도 보시고, 과중한 세금과 엄격한 율법과 식민통치에 시달리면서 묵묵히 운명처럼 가난을 받아들이고 희망 없이 사는 민초들도 보셨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만 희망을 걸고 있는 그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구원될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리라.


2. 의로운 부자를 찾기 힘든 나라


얼마 전 신문을 보니, 현재 세계 최고의 거부(巨富)는 미국의 ‘빌 게이츠’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누가 제일가는 거부였는지를 따지면 ‘빌 게이츠’는 6위이고, 석유 왕 ‘록펠러’가 1위, 강철 왕 ‘카네기’는 5위라고 한다.

이들 거부들은 하나같이 적은 돈을 아꼈고, 자신을 위해서보다 공익을 위해서 돈을 썼다고 한다. 미국 인구 5만 명 이상이 사는 도시에 록펠러나 카네기 이름으로 된 병원이나, 공연장, 학교, 연구실, 복지시설 등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록펠러는 “돈을 벌기보다, 쓰는 것이 열 배는 더 힘들다.”라고 말하였다. 카네기는 어릴 적 스코틀랜드 고향에서 토끼를 기를 때 풀을 뜯어주던 소꿉친구에게 먹고살 만큼 한밑천 주고는, 1달러를 관에 넣고 죽었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공익을 위해 철저히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부자가 존경을 받는다.

자기 재산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 안에는 남의 몫이 함께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세 살짜리 손자에게 몇십 억을 유산으로 남기며 재산을 철저히 분산, 은폐하고도 버젓이 공직에 재기용되는 우리의 세태와는 너무나 다르다.


3. 물신(物神)[맘몬(mammon)]보다 더 무서운 우상은 없다


물욕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가장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다. 유다는 은전 30닢에 스승을 팔았다. 보험금을 노리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유산을 탐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세태가 우리의 현실이다. 그뿐인가? 청부살인, 미성년자 인신매매, 성적(成績) 조작, 부정 대출, 온갖 비리의 묵인 등 세상을 죽음의 골짜기로 만드는 많은 죄악들이 바로 물욕 때문이 아닌가? 우리 시대의 가장 무서운 우상은 바로 물신(物神) 곧 맘몬(mammon)인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4),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루가 18,25)라고 말씀하시며 성서 곳곳에서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경고하셨다. 오늘 복음인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성욕(性慾)과 물욕(物慾)은 가장 끊기 힘든 욕구라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성욕은 차츰 쉽게 조절할 수 있지만, 물욕은 점점 더 강해진다. 그래서 “노욕(老慾)은 하늘도 못 말린다.”라는 말까지 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실직자가 속출하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급증하고 있다. 노동계를 보면, 한쪽에서는 비정규직의 신분 보장을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 한국에서 봉급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어느 자동차 회사 직원들은 ─ 지금도 자신들의 밥그릇이 작다고 파업 투쟁 중이다. 비정규직과 실업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기들의 밥그릇을 나누는 상생의 지혜는 없는가?

가진 자들이 고통을 분담하려는 자세를 저버린 채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는다면, 사회는 겉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는 부자에게 구걸하는 걸인이 있고, 저세상에는 걸인에게 구걸할 부자가 있을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현대인들의 특징을 무감각 무감동 무관심 등 방관자적인 요소에서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들의 의미는 약간씩 다릅니다만 공통점은 주위의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현상, 가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현대인들이 이러한 현상에 쉽게 노출되는 것은 고도로 기계화된 사회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단순노동과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속도라는 요소가 이러한 현상을 낳게 되는 원인이라 합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부터 타인에 대한 적절한 관심과 사랑의 자극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합니다.

신학교 시절, 특히 소신학교 시절 너무나 자주 들었던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나, 사랑의 생활을 위해서는 주위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아울러 주위의 사람과 사건 사물들을 하느님과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삶이 사랑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야기나 다 같은 맥락이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단순합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부자와 아주 불행한 처지에 놓은 거지 라자로가 있었는데 죽음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고 부자는 땅에 묻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먼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관념,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던 무의식적 관념에 대한 반박입니다. 즉, 거지와 부자의 극단적인 반전을 통해 물질적인 부와 가난을 가지고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불행과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에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사실과 현재의 물질적인 상태를 가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현실적인 부와 가난은 하느님 은총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기에 예언자들의 가르침대로 내일을 위한 회개의 생활이 우리 삶의 숙제라는 사실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오늘 필자가 독자들과 함께 묵상해 보고 싶은 점은 부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핵심은 부자의 윤리적인 모습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부자의 모습을 우리가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 부자의 모습 속에는 오늘의 우리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부자가 죽어서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합니다. 왜 그러한 고통을 받았는지 성서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기에 여기에서는 유추해 볼 수밖에 없는데 필자는 그 이유를 무관심과 무감각 등 구경꾼적인 요소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사실 부란 그 자체가 선이 아니듯, 역시 악이 되는 것도 아니기에 부 자체가 부자가 고통을 받는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부자는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한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노력,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거지 라자로를 대문간에 앉아 있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일지라도 배를 채우도록 허락했다는 점을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만은 아닐 수 있는 것이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긍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부자의 모습에는 무관심으로 대표되는 「구경꾼적인 어떤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거지를 그 집 대문 앞에 두었던 것도 관용 때문만이 아니라, 거지의 삶에 대한 극단적인 무관심에서 나온 행동이요, 또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도 애덕의 산물이 아니라 남은 음식에 대한 무관심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개들이 종기를 핥는다는 표현도 결국은 부자의 무감각을 드러내고, 어쩌면 이러한 삶이 물질적 부를 가능하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이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부자의 무관심도 그 원인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부자의 모습은 옛날의 어떤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남이야 어떠하든 자신만 똑바로 살면 된다는 고도로 기계화되고 민주화된 사회에서 선의의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그리는 삶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주위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사랑이라는 회개의 삶』,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 생각해 봅니다.

 

 
가난한 마음의 행복

-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성서를 보면 부(富)는 선이고 가난은 악(惡)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벌어서 부를 누리며 잘사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사람이 게을러서 일을 안 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도 정말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또 말하기를 부자로 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재물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을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재물에 자신이 묶여지지 않아야 합니다. 있거나 없거나 재물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할 때 하늘나라는 열리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미 마지막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멸망의 길은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도자부터 석고 타락하여 탐욕에 눈이 어두웠으며 사치와 낭비로서 국민생활은 전체적으로 망조가 들고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등장하여 올바른 길을 재촉했지만 아무도 올바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망할 사람은 어차피 망하며 망할 나라도 어차피 망하며 망할 나라도 어차피 망합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망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흥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잘되는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도 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 흥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참으로 잘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잘산다는 것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았던 것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그러나 것에 탐닉하다 보면 무엇이 더 소중하고 올바른 것이지 눈이 닫혀 못 보게 됩니다. 귀가 닫혀 못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잘 먹으면서도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결국 어떻게 불행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극적으로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내용만 가지고 부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릅니다. 도둑질했다는 문구도 없고 도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옥에 빠져서 물 한 방울도 축일 수 없는 비참한 시세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욥기에 나오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호사롭게 먹고 마시고 지냈다는 이유 때문에 불행하게 되어 모든 자식과 재산을 몽땅 잃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다시 찾았지만 그가 사탄의 장난에 고생한 얘기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세상에서 복을 누린다고 행세께나 했던 자들은 결국 불행합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기 때문입니다. 복은 말 그대로 「복」입니다. 그런데 왜 복이 불행으로 연결이 되느냐?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복은 참된 복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래서 잘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설교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며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웃는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가난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슬퍼할 줄 알아야하며 또 억울하게 여겨져도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상품의 광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순간의 삶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기껏해야 70년이고 근력이 좋아야 80년인데, 우리는 그래서 무엇이 더 올바르고 소중한지 좀 찾아봐야 하며 무슨 삶이 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 고생도 좀 해봐야 합니다. 재물에 묶여 인생을 헛되게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흥청거리고 너무 분수를 모릅니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말 자체가 혐오스럽지만 젊은이들의 비뚤어진 가치관이 병든 우리의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총체적으로 썩었다는 말이 있는데 배금사상이 사회 전반에 암처럼 번져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벌되 늘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가난한 마음이 없다면 그 재물은 정말 불행의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복으로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한 주님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님의 복이 영원히 살아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