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8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가 9,20)
Who do you say that I am?”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제자들이 답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승은 무덤덤하다. 그분의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당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정답을 말한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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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스승의 이 질문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어떤 세상의 구원입니까? 당연히 우리 인류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내가 책임질 사람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세상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한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따르느냐? 무엇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재앙을 없애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믿음은 불행을 피해 가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잘 극복해 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더 나아가 고통마저도 자기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여기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데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주인님’의 줄인 말입니다. 무엇의 주인이겠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내 모든 소유의 주인입니다. 그분께서 주셨기에 내 몸이 있고,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이 고백에는 이렇듯 엄청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한 달에 한번 있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음악피정을 한다고 공지를 했기에 날짜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가위 연휴 바로 다음 날이었거든요. 더군다나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저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음악피정이 시작하는 10시경. 저의 불안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더군요. 너무나도 적은 교우들 그리고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 피정 강의를 해주실 신부님께서는 일찍 오셔서 강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이에 반해서 좌석을 채우는 숫자는 너무나 적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찬양을 시작하면서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함께 큰 소리로 찬양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나는 이 음악피정을 단순히 한 달에 한번 치루는 일로써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 더 가까이 체험하는 것이 목적인데 어느 순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치러야 하는 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에 연연하게 되고, 날씨가 안 좋으면 안 좋아서 불만이고 날씨가 너무 좋으면 사람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놀러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단 한 사람이도 이 음악피정을 통해서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피정을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지요.
“저 역시 피정에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강의 때마다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드리겠습니다. 성사를 보실 분은 조용히 고해소로 오셔서 성사 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에게 고해성사를 드렸습니다. 저 역시 고해소에서 기도를 하면서 처음의 불편한 마음들을 하나씩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큰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고, 놀라운 것은 점점 사람들이 오셔서 음악피정의 빈자리를 채우시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재주와 능력이 중시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커 보이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주님 앞에서는 얼마만할까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인 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하는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이 보이는 예수님에 대해 들리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의 이름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 호칭을 받는 예수님에 대해 한껏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인기도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곧바로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려는 욕심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진정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해 봅시다.
빠다킹신부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승국신부-
요즘 저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강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강좌 때 마다 한 인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돌아보니 꽤 많은 인물들을 소개했습니다. 성모님, 양부 요셉, 세례자 요한, 바오로 사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 베타니아의 마리아, 세리 마태오, 세관장 자캐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바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었습니다. 계속 파고들어보니 정말 존경스런 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존경하는 성서 상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으셨습니다. 제자공동체의 으뜸이 되셨고, 사도교회의 수장이 되셨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와 관련해서 복음사가들이 보여준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자중의 제자였던 베드로 사도,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 사도의 실수나 나약함, 인간적 부족함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관련한 기사들 살펴보니 수치스런 기록들이 꽤 많았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등 예수님께 신랄하게 혼나는 장면,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내쏟다가 주어 담지 못해 당황하는 모습, 최종적으로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모습 등등.
복음사가들은 왜 그런 부분을 좀 감싸주지 않고 신랄하게 보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참으로 의미 있는 묵상주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수도자란 누구입니까? 사제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그 신분이 단 한 번에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온 몸으로 말해주고 계십니다. 자신의 신원을 매일 새롭게 선택해야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제자요, 수도자요, 사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한 때 ‘반석’, ‘바위’라고 부르시기도 했지만, 다른 때 ‘사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가장 믿을만한 반석에서 배신자, 사탄로 넘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단 한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럴 듯 해보입니다. 거룩해 보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순식간에 사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배신자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래의 나약하고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지 않고서는 잠시도 홀로 설수 없는 부족한 우리의 근원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거의 죽음과 멸망에 도달한 베드로 사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당신 자비의 눈길을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습니다.
그 따뜻한 눈길,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의 눈길에 베드로 사도는 바닥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새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죄와 방황과 타락의 길을 거듭하는 우리를 인정사정없이 내치지 않으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총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되풀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배반했다고 해서, 타락했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한번 부여한 수제자 직분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나약함으로 인해 삶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베드로 사도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베드로를 신뢰하십니다. 밀어주십니다. 감싸안아주십니다. 수제자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 앞에 베드로는 비로소 진정한 수제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는 사도 중의 사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중한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오늘 신자로서 본분을 망각했다 할지라도, 오늘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하루를 보냈다할지라도 있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백
-김인한 신부-
언젠가 사제서품식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젊은 사내들이
서툰 몸짓과 함께 일생을 두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이 담긴 그 모습을 보며
저의 고백도 떠올려보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지 않고 주님으로 인해
살겠다고 맹세한 제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라고 그때처럼 우렁차게 고백할 수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주님은 과연 누구신가요? 베드로의 저 가슴
가득한 고백을, 또한 그것을 일생을 두고 살아내는 그의 삶을 우리도 깊이
고백하고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 때 이전의 내가 죽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인이신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또 삶 안에서 주님을 형식적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우리의 첫 고백처럼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임을
삶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신앙고백
-변진흥(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어느 신심단체에서 ‘과연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자매는 ‘나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고, 어떤 형제는 ‘나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라고 했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과 평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풍토는 기복적 요소를 물씬 풍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예를 들면서 다시 제가 함께하고 있는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이분들의 대답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압축되었지요. 물론 정답입니다. 구원 신앙의 핵심을 꿰뚫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이런 질문을 제가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도구로 쓰시는 분’이라고요. ‘그분께서 언제 어떤 모양의 도구로 쓰시건 나는 그냥 그분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물속에 던져지건, 불속에 던져지건, 자갈밭에 던져지건 ‘내가 왜 그곳에 던져지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그냥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를 좋아합니다. 이 기도의 지향처럼 평화의 주님께서 쓰시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 미움을 사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어둠에 빛을 비출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만 있다면 들어오는 복을 걷어차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더라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강영구신부-
만일 예수께서 저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저는 우물쭈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바르게 대답하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자기를 아는 사람이 예수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 있게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려면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지식(知識)이 아닙니다.
예수는 나자렛의 목수 출신이고, 그분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며 그분의 형제들이 누구인지(마태13,55) 따위를 아는 객관적인 지식으로 박사(博士)가 될 수는 있겠지만,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지식(知識)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을 줍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 안에 귀의처(歸依處)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나는 누구
-조성풍 신부-
성묘를 가거나, 장례 미사에 참례하게 되면
삶을 보다 진지하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 앞에서 그분을 기억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런저런 대답들이 오가고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여기느냐?”라고 직접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답을 함으로써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함께함의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 대한 고백과 그에 걸맞은 우리들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김병환 신부(전주교구 삼천동 천주교회)-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이는 신앙고백과 수난은 서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해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 당신 신원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마지막 과월절, 그러니까 예수께서 당신 수난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을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처음에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물으시자 제자들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란 말은 구약에서 예언된 왕,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 예수께서도 베드로의 대답에 깜짝 놀라신다.
베드로의 대답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었던 신앙이었다. 그런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언급하시면서 처음으로 당신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 수난의 엄청난 사건이 믿음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고 자신도 수난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고 또한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이해하고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예언자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이며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깨 1,15-2,9)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
-경규봉(전주교구)-
다리우스 왕 2년 6월 1일에 예언자 하깨는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에 백성은 회개하고 성전건축을 위한 재료들을 준비하여 드디어 6월 24일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초막절(레위 23,33-36)의 마지막 날인 7월 20일, 백성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또다시 예언자 하깨를 시켜 말씀을 내리셨다.
백성 가운데 솔로몬의 성전을 본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 가운데 노인들 중 몇몇이 어렸을 적에 화려한 솔로몬 성전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예언자 하깨의 독려로 1달 동안 열심히 일하여 윤곽이 드러난 성전은 예전의 웅장하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형편없었다. 때문에 노인들은 자신들이 재건한 성전을 보면서 실망하였다. 탈무드의 기록에 따르면 재건된 성전에는 솔로몬 성전과 비교해서 다섯 가지가 없었다고 한다. 재단의 거룩한 불,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세키나(Shekinah), 계약의 궤와 그룹, 우림과 둠밈, 예언의 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빠져 있는 성전을 본 노인들은 실망하였으며 그 동안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처럼 재건한 성전이 형편없이 초라한 것을 보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백성에게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전하시는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에게 힘을 내라고 3번이나 반복하면서 주님께서 함께 계실 터이니 일을 시작하여라. 이집트를 탈출할 때 약속하신 대로 함께 계시며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에 머물러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도록 할 터이니 겁내지 말고 힘을 내어라. 이제 곧 온 천하와 뭇 민족이 뒤흔들릴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뭇 민족이 가져오는 보화로 지은 하느님의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이다. 은과 금, 이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이므로 가난하고 어렵다고 걱정하지 말라. 주님께서 이 성전에 평화와 안녕, 번영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세운 성전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웅장하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에 비해 너무나도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하느님의 영광이 차고 넘치며 솔로몬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라고 하깨는 예언했다. 그것은 그들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궁핍과 고난을 이겨내며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이룩한 것일지라도 크고 화려하지 않으면 사람의 눈에는 보잘것없이 보이고 하찮게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해도 마음과 정성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눈에 들지 않는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과 정성을 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향하고 갈구하는 마음,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 당신을 희망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어여삐 보시고, 그 마음속에 머무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렇게 이룩한 당신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당신의 평화를 주신다.
나아가 그 성전은 이 지상에서 세워진 성전을 넘어서서 종말에 이룩될 천상의 성전이기도 하다. 하깨 예언자의 예언은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뭇 민족들은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보게 될 것이다. 야훼의 날에 우주가 진동할 것이며,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왕국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드리자.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당신의 평화를 가득히 채우시는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
-부산교구 권경렬 베드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예수님께서 물어 보십니다. 이 물음은 우리들이, 매우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자의식을 갖게 되고 한번쯤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그리고 남과의 관계 속에서 남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를 묻게 되기도 합니다. 나 어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 우리는 거울을 보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비춰 보기도 하고 사람들의 말에 아주 예민해져 때로 남이 나를 두고 평가하는 말에 좌지우지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한 관심입니다. 내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관계들을 통한 의미추구가 아닐까싶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는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의미에 관심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됨의 본질을 이루는 인간성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삶은 의미가 있고, 인생은 진퓽?찾을 가치가 있음을 믿으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는 조바심을 심중에 품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실존의 유한함을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의 무한함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에 그토록 관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고 하더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사람됨에 관심하는 우리에게 사람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 단순한 존재를 넘어설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당신이 가실 길,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고 목숨까지 내어 놓는 그 길이 사람됨의 길이며, 존재 너머에 태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싫든 좋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이고 알든 모르든 우주 속에서 사람이라는 역을 맡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 자신을 내어놓고 세계에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끼치며, 이해하며, 찾아내며, 함께 세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열려져 있는 세상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 만나고, 함께 우정을 드러내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길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됨의 의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의미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을 걸고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쓰디쓴 시련, 실망, 좌절 뒤에 따라옵니다. 우리의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나옵니다. 삶의 진실로부터 뽑은 체험들입니다. 세상을 솜씨 있고 약삭빠르게 다루는 것으로는 삶의 참된 의미는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진실한 관계 속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걸 때 삶의 참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어지는 선택에서 옳은 선택이란 참으로 어렵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진지하게 다룰 중요한 결단은 과연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진리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를 위해 죽을 것인가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결정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따라 그 사람됨이 결정됩니다. 자기가 한 말들이, 자기가 한 행위들이, 자기에게 던져지는 물음들의 대답인 삶이, 자신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저절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가치 있게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존재 의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일 것입니다. 허무와 패배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 항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사명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냐 저 세상이냐를 선택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 하느님과 세상을 함께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서로 반대되는 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위해 살고 죽는 것이 곧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든지 상관하지 않게 되고,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며, 우리가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가 9,18-21)
-유 광수 신부-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유럽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발전과 한국인의 열심한 신앙 생활에 감탄하고 놀라워한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으며 아시아의 선교는 한국 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 한국 교회는 살아있고 아시아의 선교를 떠 맡을 만큼 성숙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비록 유럽 교회가 잠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내가 만나 본 유럽인들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적인데 비하여 한국 교회는 겉으로는 크게 발전한 것 같지만 안을 들어다 보면 왠지 미성숙하고 그리스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은 생각하는 사고가 그리스도적이고, 몸에 벤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적이고, 그네들의 문화가 그리스도적이다. 그네들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그리스도적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 나라는 어떤가?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 온 것은 불과 2백년이 조금 넘었다. 그 중에서도 약 백년동안의 박해와 교회 제도상 외국 선교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적인 신앙 교육을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유교, 불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우리들의 사상이나 마음까지 완전히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열심하고 희생적이고 생명을 바쳐 순교까지 하는 열성은 있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상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고 우리의 심성에까지 촉촉히 적셔주지를 못하고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지금도 복음보다는 불교적인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이 더 많이 마음에 와 닿고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신앙은 어설프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왠지 급조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의식 세계를 볼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마만큼 군중들과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한결같이 구약 성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물었다면 누구라고 대답했을까? 석가, 공자, 단군, 위대한 성현 중에 한 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교, 불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인 복음은 아무래도 낮 설은 것 같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리스도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즉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는 고백이다. 사실 이 말은 엄청난 말이다.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십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가?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생활 속의 구세주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재물이 구세주요, 권력이, 명예가 그리고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애인이 구세주이다. 나의 취미가 구세주요, 나 자신이 구세주인 경우를 많이 본다.
맥루한은 "아무도 아무에게 아무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어도 배우는 이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 즉 배우는 이의 열성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나를 구원해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가 복음적이지 못할 때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다.
나의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습관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발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과 제자들의 고백의 또 다른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즉 군중에게 있어서 에수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중에 한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절대적인 분이 아니니까 절실하게 믿을 필요도 없고 구세주라고 가지 고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여러분들 중에 한분일 뿐이다. 그분이 요한 세례자이든 엘리야이든 옛 예언자 중에 한분일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분이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에는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신 분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과 제자들과는 이런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군중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고 그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신 분인 예수님을 위해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렸고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고백은 나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누구인가? 이 말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예수성심시녀회 포항모원 한창현(요셉) 신부님-
살아가다 보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좋게 말할 때가 있는가하면 나쁘게 말할 때도 있고,
정확하게 알고 말하는가하면 전혀 다른 것을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고요.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을 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하나...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씩을 했지만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나 신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장 정확하게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아마 우리들은 많은 말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말을 해서
상처를 주거나 신자답지 않게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엉터리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다른 이들의 말에 너무 힘겨워할수도 있습니다.
또 남을 힘들게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합니다. 제대로 알고 말해야하겠습니다.
한편 오늘은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오상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많은 성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오상을 받으신 성인들도 계심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오상을 받으셨던 분들 중에는 비오 신부님이 계십니다.
2002년 성인 품에 오르셨고요. 이분은 50년 동안 손과 발 옆구리에 오상을
받으시고 수많은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어 주신 분이십니다.
고백성사를 보고도 같은 죄를 또 짓게 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짐하지만 잘 안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은 단번에 여기에서 건져 주십니다.
제대로 통회하지 않은 죄인들,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가벼운 죄만 고백하는 죄인들,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큰 죄인들을 낚시로 고기를 낚듯 한번에 걷어내십니다.
이미 자신에게 올 영혼들을 13세때 환영으로 보신 분이십니다.
하루 한두 시간만 주무시고 한끼 적은 식사로 평생을 사신 이분은
수많은 희생과 보속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에 관한 책을 읽은 어떤 사람은, 이 책을 한번 읽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아 고백성사를 보았는데 예수님께 성사를 본다고 하는
고백성사의 참뜻을 체험하고 참으로 기뻤다고 합니다.
오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분의 신앙을 본받고
또 터득하여 주님과 일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면서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에 화답하여,
본당활동과 소공동체운동 안에서 믿음의 씨앗을 전파하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매진한다면 우리 신앙의 기쁨은 거기서 배가 될 것이고,
우리 신앙에 확신을 준 비오 신부님 역시 천상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계시
-박상대 신부-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가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가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가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이루어낸 치적(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 바친 ‘감사의 기도’(루가 9,16)로 이루어낸 기적(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가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가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도고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적(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주시고 보충해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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