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시었다.(루가 9,2)
He sent them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the sick.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막강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권한이었다. 하느님 나라의 힘이 주어진 것이다. 자칫 교만에 빠질 수 있는 권한이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기에 스승은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게 하십니다. 돈은 물론 빵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무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승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았을 것입니다.
돈을 지니면 그 돈의 힘에 기대기가 쉽습니다. 또한 돈이 많을수록 그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커집니다. 물질은 그것을 지닌 사람의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역경을 만나면 하느님보다는 돈과 물질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스승은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역경 속에서 바치는 기도는 더욱 애절해집니다. 오로지 주님께 매달리기에 그렇습니다. 작은 은총을 체험해도 감격이 앞섭니다. 주님께서 힘이 되어 주심을 진하게 느끼는 결과입니다. 신앙인은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우면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불평불만을 더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궁핍해지면 그분께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그들을 정화시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엄격한 통제를 하신 것은 그러한 의미였습니다.
새벽을 열며
작년에 사고로 인해서 양팔목이 부러진 적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사고를 당했을 때, 설마 뼈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니겠지 싶었어요. 그래서 파스만 바르고 하룻밤만 자고나면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밤새 팔목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조금만 건드려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결국 날이 밝자마자 병원을 찾아갔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골절 같다고 하시면서 엑스레이를 찍자고 하셨습니다.
엑스레이를 여러 방향으로 찍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팔목이 너무나 아픈 저로써는 이렇게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엑스레이 기사 선생님께서는 제가 고통스러워하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촬영을 해주셨습니다.
잠시 뒤, 엑스레이 기사 선생님께서 손을 조금 움직여야 할 것 같다면서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너무나 아플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지요. 제 손목을 잡는 것을 느꼈고 한 차례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저는 제 자신도 모르게 “아~~”라는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러자 통증이 가라앉았고 저는 눈을 뜨면서 말했습니다.
“다 됐나요?”
바로 그때 엑스레이 기사 선생님께서는 안됐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씀하세요.
“아직 만지지도 않았는데…….”
만지지도 않았는데, 저는 아플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아팠던 것이지요. 아무튼 저는 이 때 정말로 견디기 힘든 것은 통증에 대한 아픔보다도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이 세상의 모든 법칙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려움만 없다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은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파견할 때의 모습이 조금 이해하기 힘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만약 나를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과연 나는 떠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최소한 먹고 마실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교통비와 숙박비 그리고 옷가지 몇 개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 ‘떠나라!’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걱정과 함께 아무것도 없어서 혹시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라는 두려움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에 순종하면서 정말로 그렇게 떠났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떠나지만, 그래서 모든 것이 불가능해보이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떠나라고 했으면 무조건 맞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요? 과연 아무것도 없이 떠날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이 있을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의 것과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삶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하여
-양승국신부-
수도생활을 하다보면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사이동입니다. 때로 티격태격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아이들 좀 더 잘 키워보자고 머리 맞대고 고심하던 형제들과의 이별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무엇보다도 진하게 정을 주고받았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뒤고 하고 떠나야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은 정말 큰 것입니다. 또한 함께 동고동락했던 직원들, 후원자들과의 이별도 아쉽기만 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바꿔야만 한다는 데서 오는 부담감 역시 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떠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습니다. 떠남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삶을 다시 한 번 정돈할 수 있습니다. 결국 떠남의 순간은 영원한 떠남인 결정적인 죽음을 예비하는 행위이기에 삶의 여러 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떠남은 슬픔과 아쉬움의 순간이기보다는 참으로 필요한 은총의 순간입니다. 보다 자주, 보다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새로움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떠남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녔었던 기득권을 포기하려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제자리일 것입니다.
떠남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떠남을 준비해야 합니다. 매일의 작은 희생과 양보, 기쁘게 물러남, 십자가의 수용 등을 통해서 말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징 하게도 질긴" 집착에서 매일 떠나는 우리의 나날이면 좋겠습니다. 안주와 편리에 길들여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과감히 길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세계,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니고 있던 낡은 세계관과 가치관을 벗어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까워하고 미련을 가지는 한 결코 새로운 길을 갈 수 없음을 알기에 미련 없이 가진 바를 나누고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숱한 인연들도 그간 쌓아온 업적들도 모두 내려놓고 홀연히 떠나는 수도자의 뒷모습, 그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다시 또 없습니다.
필요한 것
-김인한 신부-
냉담하는 분들과 만나게 되면 생활이 나아지고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다시 나가겠다고 하는 말들을 듣곤 합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지만 되돌아보면 제 자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본당 사목을 할 때에도 사람들이 좀 더 있으면, 예산이 더 있으면, 그리고
무언가가 있으면 사목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것은 복음인데, 오직 재물과 외형적인 것에만 얽매여서
예수님의 뜻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의 뜻,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셨기에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을 생각하고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헤아려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무궁화를 닮는 신앙
-변진흥(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요즘 도시에서는 무궁화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사랑한 무궁화를 중국 사람들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라 하여 ‘하루 영화 꽃’으로 낮추어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선도의 한시(漢詩)를 본 사람은 ‘아하, 그렇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윤선도의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핀 꽃이 내일까지 빛나지 않은 것은(甲日花無乙日輝)
한 꽃으로 두 해님 보기가 부끄러워서다(一花羞向兩朝輝)
윤선도는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 장렬하게 지는 모습을 선비의 지조에 비유하여 임금에 대한 충성을 토로한 것입니다. 과거의 선비들은 하늘에 해가 두 개 있을 수 없듯이 두 임금을 결코 섬길 수 없다며 충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그 힘이 조선 왕조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그 힘을 지녀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세도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르신들한테서 ‘찬류세상(竄流世上)’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물 흐르듯이 눈 깜빡할 새에 금방 지나가는 세상이니 다른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그런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주신 말씀, 곧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말씀은 무궁화처럼, 과거의 선비처럼 살라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현재 우리 생활 속에서 보면, 서울 인심보다 지방도시 인심이 더 낫고, 지방 도시보다는 지방 마을 인심이 대체적으로 더 나은 것을 여행을 해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의 현재 인심보다는 과거의 인심이 물건이 넉넉지는 못하지만 몇 배 더 나았다고들 누구나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인가? 하다못해 요즈음 서울 거리에 나서면 더울 때 물 한 그릇 얻어먹기도 그리 쉬운 인심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각박해진 인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이러한 처지에 살고 있는 또 그러한 생활을 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오늘의 복음의 말씀[루카 9:1-6]을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전파의 여행을 떠나면서 어떻게 돈 한푼도 없이 또 식량도 없이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유대나라, 예수님 당시만 해도 그들 생활은 현재의 우리가 살고있는 생활 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당시, 그 생활 환경에로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그 당시 생활여건은 어떠했을까? 물론 그들이 오늘날과 같은 물질문명의 혜택 속에서 더욱이나 메스컴의 문화권 속에서 산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자신의 뜻을 쉽고도 빨리 전하는데 신문이나 책, 전신, 전화, 마이크, 스피커, 자동차, 비행기 등 여행에 도움이 되는 그 모든 것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 예수께 배우고 들은 바를 일일이 두 발로 돌아다니며 자신의 입으로 전해야 했다. 또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필요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 속에서 손님을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을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정성껏 했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현재 복장에서 아무 것도 더 가지지 않아도 유대 백성 누구에게나 찾아갈 수 있었고, 만일 푸대접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 취급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발의 먼지까지 털어 버리는 그 행위는 바로 복음을 거두는 행위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교훈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천국의 기쁜 소식인 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손님 대접을 받으면서 복음 전하는 임무보다 물질적인 손님대접 받음에 메여, 복음 전파가 뒤늦거나 가리워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일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의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옛날과는 너무나도 생활이 편리한 시대 속에 살면서 오늘의 기계문명을 얼마만큼 잘 이용하여 복음 전파에 힘을 쓰고 있는가 하는 점을 자기 처지에서 누구나가 다 해야하는 복음 전파의 임무를 생각해 보고, 열성을 내야 하겠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서, 성서, 교회 서적을 사주는 것도 좋은 전교 방법이다.
교회의 일꾼
-최혜영 수녀-
올여름 서울대교구 부제서품식에서 한국교회 첫 청각장애인 부제가 탄생하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서울 번동본당 박민서 부제로 가톨릭농아선교회 정순오 신부(현 번동성당 주임)의 권유로 사제성소를 생각했고 꼬박 10년이 걸려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각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그분의 바람대로 건청인(건강한 청력=비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잇는 다리가 되시기를 기대해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순교선열들의 공로로 아직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배출하고 있지만 일손이 부족한 곳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있는 해외의 많은 나라들과, 특히 북한교회와 중국교회를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역할과 책임감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일꾼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를 느끼는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일꾼을 양성해가야 합니다. 사명감을 심어주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 모두 교회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므로 성소자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성소자 감소를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에,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며 신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
-김덕진(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복음에서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셨지만 병에 걸린 이들을 아무 대가도 없이 고쳐주신다. 또 그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그렇게 했다. 불치에 가까운 병을 고쳐줌으로써 예수님은 생물학적인 삶과 함께 영혼의 삶도 선물해 주신 것이다. 사회가 현대화되어 갈수록 새롭고, 더 강력한 질병이 생겨나 사람들을 괴롭힌다. 새롭고 강력한 질병이 생겨나면 연구자들은 그 치료법과 치료약을 개발하기 위해 재벌기업들의 투자를 받아 몇 년간 신약 개발에 매진하게 된다. 자본에 지배를 받는 연구이니 비윤리적 실험이 자행되고, 고액 상품화를 위한 각종 전략이 첨가된다.
지난 7월 서울에서 있었던 한미 FTA 2차 협상 때 의약품 부분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사람의 목숨, 건강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의약품이 과연 자동차나 반도체 같은 공산품과 똑같이 협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그 생존율이 80퍼센트에 육박하는 명약 ‘글리벡’을 개발한 노바르티스사는 5년 동안 60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우리나라 환자들은 한 달에 300만 원이 넘는 약값을 감당 못해 통곡했다.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투자된 비용과 시간, 사람들의 노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개발된 약을 돈이 없어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그 약을 먹고 오래 살고, 돈이 없으면 일찍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라면 참 재미도 희망도 없는 세상이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려 고통받는 사람들이 비싼 약값 때문에 두 번 세 번 가슴에 못질을 당해야 하는 현실. 예수님처럼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 것은 어렵다고 할지라도 약을 먹고 사람이 살 수 있다면 먹게 해서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의 값비싼 치료제가 우리 민중의 목숨줄을 틀어쥐고 흥정을 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함께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파견받아 떠나는 길에서
-상지종신부-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당신께로 모으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주어 세상에 보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믿음을 불러일으켜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보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 곳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다가올 마지막 날 완성될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현재를 포함하지만,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나라입니다.
병자는 아픈 사람입니다.
육신이, 마음이 아픈 사람입니다.
자신 때문에, 사람 때문에, 사회 때문에 아픈 사람입니다.
어제가 아닌 오늘, 내일이 아닌 오늘 이 시간 아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구해줄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현실적 세계를 포함하면서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병자의 치유는 현실안에서의 고통의 극복, 해방, 자유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 그리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의 파견을 받은 이들이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사명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 운동,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여타의 사회운동과는 다릅니다.
철저히 현실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초극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개혁과 궁극적인 구원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운동가입니다.
믿는 이들은 복음에 바탕을 둔 사회운동가입니다.
운동가로서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의 자세가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마라."
믿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물질적 기반에서 힘을 얻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의 힘은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능력, 물질적 기반에 의지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수행하는 운동은 퇴색하고 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자신의 복음을 떠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꺼이 빈손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 있어라."
믿는 이들은 지금 주어진 것에 충실합니다.
지나간 사람, 일에 머뭇거리거나 희미한 미래를 공상하며 현재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구체적 현실에 머물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거든 떠나라."
믿는 이들은 반하느님적인 무엇, 비복음적인 무엇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함께 해서는 안되는 세력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습니다.
과감한 단절이 있을 뿐입니다.
현실 안에 살아가면서도,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결단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현실 안으로 파견된 믿는 이의 한 사람으로서
믿음을 무기로 삼아
지금 주어진 사명에 철저히
복음을 거스르는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서
신앙의 길을 쉼없이 걸어가고자 합니다.
예수의 리더십
-박상대신부-
복음선포를 위해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내리시는 규칙은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떠나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집을 떠날 땐 통상 지팡이를 휴대하였는데, 이는 맹수나 뱀,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던 것이었고, 맨발로 다닐 수도 있었지만 신발은 돌길과 거친 길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예수님의 12제자들에 대한 여장규칙은 너무 엄하다 못해 야속하게 들리기도 한다.우리가 루가복음에서 늘 받는 분위기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자비와 사랑이다. 따라서 루가는 선교여행을 할 때 선교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보살핌과 안배에 의탁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익히 알려진 《겅호!》《열광하는 팬》《하이파이브》《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1분 경영》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켄 블랜차드가 필 하지스와 공저(共著)로 《섬기는 리더 예수(The Servant Leader)》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12)는 예수님의 말씀을 키워드로 삼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배우는 ‘섬기는 리더십’을 구상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리더십이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과정으로서, 사생활이나 일터에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순간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가정이나 교회, 직장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예수님을 리더십 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예수께서 12제자를 길러내시고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저자 블랜차드는 ‘섬기는 리더’가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리더십의 형태는 예수께서 보여준 ‘상황대응형 리더십’으로서 제자들의 상태를 적절히 분석하여 적용하는 4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상황대응형 리더십의 4가지 유형은 ① 지시형, ② 지도형, ③ 지원형, ④ 위임형이다.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라. 예수께서 12제자를 파견내용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 안에 블랜차드의 말대로 “지시, 지도, 지원, 위임”의 네 가지 유형이 모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복음선포의 어제와 오늘 복음산책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유광수 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살고 예수님과 하나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할 때만이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8,25)라는 그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삶을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파견된 이들의 목적은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빵을 주기 위함이다. 이런 사람이 되게 위해서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신을 따르도록 하셨고(5,1-11), 두 번째,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들을 구성하시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셨고, 그들을 교육시키셨다.(6,12-8,56까지)
그리고 이제 이렇게 준비된 이들을 파견하신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교육의 목적이다. 즉 부르심-교육-파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교육과정이며 그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교육시키셨고 또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힘과 권한을 주셨다. 오늘 복음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제자는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활해야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힘과 권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귀가 갖고 있는 힘과 권한이 아니라(4,32.36) 죄를 사해주는 힘과 권한이다. 이 힘과 권한은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낫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된 사람들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불러 주셨고 양육시켜 주셨고 파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허락된 사람들만 알고 다른 이들은 비유로만 알아 듣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른다. 따라서 선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다.
선교를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선교사인가 아닌가는 내가 어디에 있든 또 어떤 신분으로 있든 반드시 내가 있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고 있는 가에 달려있다. 내가 그리스도 신자이면서 아직까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용기가 없고 또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해야하는지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전하는 법이다. 내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없다면 또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고 또 병자들을 고쳐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그런 교육을 통해서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훈련을 시키셨다. 오늘 복음 이전의 모든 교육은 바로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신 내용들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지려면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맹목적으로 믿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공부하는 것이고 공부하고 묵상한 말씀을 실행하면서 복음적으로 사는 삶의 방법을 훈련받을 때 가능한 것이다.
복음 선포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 지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들을 묵상하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팡이, 여행 보따리, 돈, 여벌 옷이다. 복음 선포자가 여행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는 것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즉 선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생활하신 방법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2,6-7)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코후8,9) 복음선포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가난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주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복음선포자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
이토록 가난한 모습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선포는 나의 능력이나 재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코후12,10)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활동하신다.
제자들이 가지고 가지 말아야할 것들은 우리들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고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지니지 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복음 선포자는 선교를 떠나면서부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 하지 말고 "그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야 한다. "(마태 6,32-33)
지금은 우리가 이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 생활의 여정은 항상 나만을 위한 생활에서 다른 이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진보하고 성숙해지는 여정이어야 한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년 9월 28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0) | 2007.09.28 |
---|---|
2007년 9월 27일 성 �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0) | 2007.09.27 |
2007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0) | 2007.09.25 |
200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0) | 2007.09.24 |
2007년 9월 23일 일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 (0) | 2007.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