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루가 8,16)
“No one who lights a lamp conceals it with a vessel
or sets it under a bed;
rather, he places it on a lampstand
so that those who enter may see the light.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도 기쁘게 사는 모습으로 우리 주변을 비추어야 한다. 우리는 밝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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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씨는 택시 기사입니다. 어느 날 새벽에 한 아가씨를 태웠습니다. 첫 손님이 여자면 싫어하는 동료 기사들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목적지에 닿자 그 아가씨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미안해요. 너무 바빠 돈을 안 가지고 탔어요. 이를 어쩌지요?”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꾹 참았습니다. “이런, 할 수 없지요. 그냥 가세요.” 총총걸음으로 뛰어가는 여자를 보면서 야고보 씨는 마음을 달랬습니다. ‘이것도 남을 도와주라는 하느님의 배려가 아닌가. 하도 남을 돕지 않으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사랑을 실천하라는 게 아닌가.’ 그 이후로 야고보 씨는 마음이 더욱 밝아졌으며, 운전에 대한 지겨움도, 사고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인생은 어둠 속의 행진입니다. 끊임없는 빛의 생활이 없으면 삶은 어두워지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빛의 생활이겠습니까? 기도와 성사 생활, 그리고 희생과 선행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선행을 많이 베풀면 베풀수록 삶의 어둠은 엷어질 것입니다.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빛의 생활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은 그 자체로 주님 앞에서 드러납니다.
새벽을 열며
아기들을 보면 잡을 줄만 알지 놓을 줄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미사 후에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씩을 쥐어줍니다. 그런데 어떤 꼬마아이가 엄마의 등에 업혀서 나오는데, 양손에 딸랑이가 쥐어져 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탕을 내밀면서 딸랑이를 놓고 사탕을 손에 쥐라고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이 아기는 딸랑이를 손에서 떼지 않습니다. 그저 사탕 한 번 보고 딸랑이를 한 번 보기를 반복할 뿐이었지요. 아마도 나름대로 이렇게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걸 갖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이걸 잡고 있는데…….”
이렇게 선택하지 못하는 아기를 대신해서 저는 딸랑이 하나를 빼앗아 대신 손에 사탕을 쥐어 주었지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기의 엄청난 울음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랑이 장난감을 제가 가지려고 빼앗았을까요? 그 장난감을 가지고서 제 방에서 혼자 놀려고요? 물론 아니지요. 딸랑이 때문에 사탕을 쥐지 못하니까 제가 딸랑이를 빼앗아 사탕을 손에 쥐어 준 것 뿐입니다. 하지만 이 아기는 자기의 것이 빼앗겼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울뿐이었습니다. 새로운 물건인 사탕은 이제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딸랑이도 다시 쥐어주고 덤으로 사탕을 주어도 아기는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아기의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어쩌면 우리들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손에 꽉 쥐고 있는 것들. 주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기쁨이 넘치는 행복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만은 절대로 안돼요.”라고 말하면서 손에 쥐고 있는 욕심 덩어리들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욕심 덩어리를 억지로 빼앗고는 대신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화라는 선물을 주시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내 욕심 덩어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께 원망을 할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화에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지요.
아기는 아직 성숙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치는데, 지금 어른이 된 우리들은 왜 그럴까요? 우리 역시 영적으로 성숙이 들 되어서 그렇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이 등경 위에 놓여 있어야 등불의 역할, 즉 주변의 것들을 환하게 비출 수 있음을 말씀하시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 보내진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환하게 비추는 역할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욕심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 욕심 덩어리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마음의 평화를 대신 손에 쥘 때, 우리들은 보다 더 주님의 뜻을 잘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나요? 세상의 모든 것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손의 숫자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욕심은 이제 그만입니다.
빠다킹신부
내 안의 해
-양승국신부-
한 신부님의 낱말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너무 의미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저를 받으십시오’
‘나쁜 사람’: ‘나뿐인 사람’
‘아내’: ‘안해’, ‘내 안에 떠있는 밝은 해’, 결국 ‘남편 마음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주는 해와 같은 사람’
(임형락 신부님, 가톨릭부산 1844호 참조)
저도 조금 덧붙여봤습니다.
‘남편’: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특별히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가난한 사람’: ‘가치 있고 난(대단한) 사람’, 결국 ‘교회 공동체로부터 VIP 대접을 받아야하는 하느님의 선물인 사람’
‘친척’: ‘친절히 대하고 척(隻)지지 말아야 될 사람’(참고: ‘척지다’는 ‘다른 사람과 원수지간이 되다’란 의미)
‘가족’: ‘가까우니만큼 더 예의를 갖추고 족치지 말아야 할 사람들’
좀 어색한 해석일수도 있겠지만 오랜 기간 흩어졌던 가족들과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한가위를 맞아 마음에 새겨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족’ 또는 ‘가정’이란 단어, 때로 떠올리기만 해도 부담스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가정에 힘이 되어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크게 한번 팍팍 밀어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우리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욱 미안스럽고,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이 가족인 것입니다.
특별히 세파에 지쳐 힘겨워하는 가족 구성원, 각고의 노력을 다해보지만 자꾸 일이 꼬이기만 하는 가족 구성원을 바라보면 더욱 안쓰럽고 연민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비틀거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가치 부여와 사랑은 계속되어야겠지요.
가족이란, 부모형제란, 친척이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입니다. 결국 가정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복음의 정신이 실천되어야 할 장입니다.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 중에 하나는 가정을 살리는 일입니다. 가정을 재건축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투박한 진흙 항아리 같은 우리 가정 안에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때로 부족해 보이는 우리의 아내, 남편, 가족, 친척 안에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들, 때로 나약해보이고, 때로 ‘쪼잔’해보이고, 때로 형편없이 보이겠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성삼위의 밝은 빛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노력은 나부터 먼저 등불처럼 환하게 밝아져야 합니다. 환하게 미소 짓는 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해처럼 환하게 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살림
-김인한 신부-
제가 좋아하는 우리말 중에 ‘살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살림이라는 말은 단순한 집안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삶의 태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살림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파급되는 행위로 다른 존재를 살린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삶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우리는 살림꾼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철저한 살림꾼이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앓는 이에게는 기쁨을 전하고 악령으로 묶여 있는 이들을 해방시키신
철저한 살림꾼이셨습니다. 살림하는 분들이 그렇듯이 세세히 바라보고
다가가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이 살림꾼의
사명이셨습니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한, 죄악으로 죽어가는
우리들을 구원으로 살리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바라는
등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자신을 세우는 죽음의 문화가 판을 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과 우주 만물, 그리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내 작은
손길로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또 다른 그리스도, 또 다른
살림꾼 예수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진실게임과 참된 신앙
-변진흥(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모 방송국에서 상영한 아침 드라마 ‘내 곁에 있어’는 겹겹이 쌓여 있던 출생의 비밀과 정략결혼을 위해 숨겼던 과거가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점점 더 시청자들의 마음을 졸아들게 만드는 기법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순차적으로 드러날 비밀이지만 막상 비밀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당사자들이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배신감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일종의 숨 막히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진실게임을 우리는 정치판에서 보게 됩니다. 대선 고지를 향한 경선에서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차별 폭로로 꾸며지는 진실게임이 얼마나 그들 자신과 우리 사회 모두를 비인간적인 적자생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지 봅니다. 이처럼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상대를 무자비하게 벗겨내는 진실게임은 서로에게 상처만 안겨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 늪에서 좀처럼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훌륭한 산물이라는 민주주의 제도를 훌러덩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드라마나 진실게임처럼 누가 벗겨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어나가며 하느님과 자신에게 스스로를 내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앞에 숨김이 없을 때 그분도 나에게 그분의 신비를 숨김없이 드러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게 되면 그분이 도구로 쓰실 등불이 될 수 있고, 등불을 놓는 등경도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빛의 도구가 되어 비로소 그분과 함께 샛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등불이 되어...
-윤경철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총장)-
오늘의 복음인 ‘등불의 비유’ 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왜 등불을 가져오는가’ 입니다.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으려고 가져왔겠습니까? 이 물음의 답은 물론 ‘아니다’입니다. 등불을 켜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일반 가정집에서는 토기 등잔에 올리브 기름을 담아 불을 밝혔습니다. 등잔은 대개 다리가 긴 쇠등잔대에 놓았고 등불을 끌 때에는 흔히 됫박으로 덮었습니다. 곡물의 십일조를 재기 위해 어느 집이나 반드시 됫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됫박아래 두는 것은 불을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끄기 위해서입니다.(예수를 따라 pp 139-140 참조. 성서와 함께) 이제 우리들의 존재의미는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등불은 ‘오신 예수님, 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를 말하고 있습니다. 해가 만물을 비추듯이 세상을 비춰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널리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그 신비는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리키지 않고 등불처럼 드러나야 할 그 무엇입니다. 신앙인에게 그 신비는 참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누구나가 다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귀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말씀을 듣는 귀와 듣지 못하는 귀입니다. 귀가 있다고 다 말씀이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너희는 세상의 등불’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세상의 등불이 되시오’ 라는 명령도 아니고 ‘세상의 등불이라면’ 이란 가정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세상의 등불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시더라도 우리 자신이 불빛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불빛의 원천이며 불빛 그 자체이시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달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해의 빛을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등불을 켠 사람은 그 빛을 가리지 않습니다. 등경 위에 놓아 집안 곳곳이 비치도록 합니다. 그래서 등불을 됫박으로 덮어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받아들였겠습니까? 점점 더 사명감에 불타올랐는지, 아니면 나는 도저히 그러한 것이 될 수 없다고 꽁무니를 뺏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 말씀을 지금의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하신다면 아마도 당황해 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등불을 밝히고 싶지만, 자기 속 깊은 곳에 어두움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재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싶지만,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 마음의 빛과 밝음을 빼앗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직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등불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자기 자신 속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타락한 땅, 빛을 필요로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깨끗함과 빛을 잃어버린 세상.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의 세상의 모습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깨끗함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이 퍼져있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에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이는 카인이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살해한 직후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타락해 있고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창세 6,12).
이는 노아 홍수에 관한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더러워지고, 어두움이 되는 원인은 바로 인간의 이기주의와 욕망이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기주의와 욕망이 있는 한, 세상은 계속해서 더러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타락한 정도와 어두움의 깊이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주의의 깊이와 욕망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의 힘이 우리들의 마음에 사랑과 숨결을 불어넣어 줄 때, 비로소 우리들의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 때 마음에 있는 욕망이 깨끗해지고 세상을 향한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등경 위에 놓인 등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겸허하게 성령의 숨결이 들어오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성령이 우리들의 어두움을 비추시어 사랑의 힘을 넣어주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론 왕이 된 첫해(기원전 538년)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예레 29,10)하신 대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다.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나라를 맡기셨고,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맡기셨다고 선언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에게도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예물을 가져가도록 지원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였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왕위에 오른 즉시 페르시아 제국을 통합하였고, 기원전 539년에는 바빌론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다음 해인 기원전 538년에 칙령을 내려 유다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유화정책을 폈고, 그들의 성전이나 제단 등을 복구시켜 주곤 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락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그가 진정 야훼하느님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깨닫고 섬겼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음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바빌론 제국의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남은 유대인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전을 지을 자원을 제공하도록 했다. 당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물을 주는 것은 고대 근동지방의 관습이었다. 상대의 물건이나 사람을 잘못 가진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속죄 예물(1사무 6,1-3)을 피해자에게 주었던 것이다(출애 12,35-36).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바빌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관습을 지키도록 주관하셨으며(출애 12,36), 이 예물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 각지에서 흩어져 살면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갖은 고난과 역경을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들은 언젠가 주님께서 불러주실 그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로마 5,3-4)는 말씀처럼 그들은 고통을 인내로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희망을 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포로가 되도록 하신 까닭은 그들을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거듭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했고,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느님만을 섬기게 되었고,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백성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때가 이르자 이방인인 고레스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당신 백성으로 하여금 새롭게 태어나 당신을 섬기도록 인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섭리 안에서 그처럼 당신 백성을 이끄신 것이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가 힘들게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 듣고 계신다. 다만 당신 섭리 안에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실 따름이다. 우리에게 적합한 때에 맞추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역경이나 환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숨은 증거자
-최혜영 수녀-
회의를 위해 조치원의 ‘예수의 작은 자매회’ 피정집을 다녀왔습니다.
소리없이 숨어서 노동을 하시며 관상생활을 하시는 수녀님들을 뵐 때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세라피나 수녀님은 요즘 공익근로로 유원지 화장실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모두 “이분들이야말로 참 좋은 몫을 택하셨다”고 말하지만, 워낙 고된 생활에 철저한 청빈생활을 하다보니 지원자가 많지 않아 한국에 진출한 지 50주년을 넘어섰지만 회원이 3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진다는 복음 말씀처럼 숨은 일을 하시는 수녀님들의 증거생활은 어떤 말이나 업적보다 큰 것 같습니다.
1992년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 이고니온(코니아)에 들렀을 때이탈리아와 프랑스 출신의 두 분 수녀님만이 성 바오로 성당을 지키고 계셨는데 가톨릭 신자라고는 딱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역할은 이슬람 이웃들의 좋은 벗으로 친교를 나누며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도 세계 각지에 파견되어 그 땅의 가장 미천한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시며 예수님의 사랑을 몸으로써 실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김덕진(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30년 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조작되어 8명의 목숨을 형장의 이슬로 앗아가고, 수백 명을 구속시켰던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 활동을 해온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다. 참여정부에 들어서서 ‘과거사 진상규명’이라는 큰 화두가 사회에 던져졌고, 찬반논쟁이 국회는 물론 언론에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인혁당 사건과 군의문사 사건, KAL`858기 사건 등의 진상규명 활동을 하며 유족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어왔다. 곁에서 지켜본 유족들의 지난 세월은 말 그대로 눈물의 역사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자식들을 건사하며 살아온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서대문 사형장 앞을 지날 때마다 통곡을 한다. 살점 같은 아들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에 보냈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려받은 군의문사 가족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오열을 한다. 이분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을 밝혀내어 누군가를 처벌하자는 것도 보상을 받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속시원하게 풀어줄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고 빨갱이로, 군 부적응자로 낙인 찍힌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바람만을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다. 혹자는 지난 일이니 덮어두자고도 하고, 이제 와서 들추어내는 것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일일 뿐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족들을 만나 그들의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본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행히 국정원 내부의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하며 진실을 고백했다.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많고, 그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진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러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이회진신부-
대체적으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소극적인 편입니다.
“혼자만이라도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 뭐”하고 생각하거나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조용히 지내야 해” 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도 그렇고, 수녀님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조용합니다.
뭐 좀 시끄럽게 할라치면 “왜 저러나?”하는 반발을 받기 싶죠.
어쩌면 천주교가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조용한 편이어서 그런지, 말없고 조용한 편인 천주교의 모습이 좋긴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이 고요하고 내향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성당에나 다니면서 기도나 하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때로 우리 신자들은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침묵으로만 대응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람이 지닌 내적 고요에 근거한 “겸손”의 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침묵은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외짝 교우 중 자매님만이 성당에 다니는 경우
많은 경우 남편이나 시댁의 눈치를 보며 겨우 겨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주일이나 평일에 성당에 가려고 하면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죄진 사람처럼 빠져나와 도망치듯 성당에 와서는
정신없이 미사를 드리고는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갑니다.
그러다 성당에 가는 게 들키면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남편이나 시댁 어른으로부터 “성당에 가면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뭐가 좋아서 그렇게 허구한 날 �아 다니냐?”며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좀 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당당해졌으면 합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남편이나 집안 식구가 우리에게 “성당에 가면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말할 때,
“성당에 다니니까 내가 당신을 이제까지 데리고 사는 거야!”
“성당에 다니니까 그래서 이런 살림에 사랑으로 이해하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겁니다.”
라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신앙이 무엇을 주고 있는지 드러냈으면 합니다.
마음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태도는 분명 아닙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신앙은, 믿음은 어떤 것이냐?”라고 물을 때,
자신이 지닌 신앙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지닌 신앙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은 미사에 자주 나오고 어떤 단체에 가입해 활동을 많이 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일상생활 안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자여야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느끼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거리에 나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거리에 나가 성당 소개 책자를 나눠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무엇을 줍니까?”하고 세상이 물을 때,
여러분이 지금 느끼는 행복과 기쁨 그리고 깊은 사랑과 이해심으로 밝게 빛나는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천주교 신자야!”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소극적인 신앙의 삶은 분명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잘못된 신앙 습관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그렇게 감추는 사람은 믿음을 잃어버릴 위험 또한 늘 가까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자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신앙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환하게 비추시길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빛이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세상이 여러분에게 물어본다면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십시오.
“나는 이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빛을 드러내십시오.
그것이 더 이상 여러분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만은 않겠습니다. 왜 사냐고 물으면 당신을 알기에 새 세상을 보았다고 말하겠습니다. 아멘.”
별빛 되기
-조성풍 신부-
어렸을 적 방학이 되면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때에는 밤이 되면 등잔불을 밝히곤 하셨습니다.
방문 밖이 어둑어둑해지면 켜지는 등잔불은 방안의 어두움을 서서히 몰아내주었습니다. 어두움을 이겨내는 것은 어두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빛을 비춤으로써 물러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달빛이나 작은 별빛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올바로 알아 실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실천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별빛들이 모여 미리내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는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등경 위의 등불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강영구신부-
저는 요즘 신영복 교수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돌베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주역(周易)의 기초 개념을 강의하는 중에 위(位)와 응(應)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맞아떨어져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위(位)는 ‘자리’를 말합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 있으면 득위(得位)-제자리를 차지함-하여 방 안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 있으면 실위(失位)-제자리를 잃음-하여 아무리 밝게 빛난다 해도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만물은 고유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등불의 자리가 등경 위인 것처럼,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자식의 자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사제의 자리, 수도자의 자리, 평신도의 자리가 있고, 직장에서는 사장의 자리, 간부의 자리, 평사원의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을 득위(得位)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나는 것을 응(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리에 걸맞은 삶의 모습을 말하지요.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라도 불 꺼져 있다면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제 구실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자리에 있다고 해도 대통령답게 말하고 처신하지 못하면 빛을 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제(司祭)라는 지위 하나로 큰 소리 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제답게 살고 처신할 때 빛을 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비출 수 있습니다.
양(洋)의 동서(東西), 시대의 신구(新舊)를 넘어서서 진리(眞理)는 하나로 통합니다.
행복한 추석 연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양승국신부-
<당신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성공하는 길은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봤습니다. 유명작가나 예술가가 되어 사회에 이름을 날리는 것일까요? 물 좋은 자리로 인사 발령받는 것일까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일까요? 큰 본당이나 수도원의 책임자가 되는 것일까요? 일하는 직원만 해도 수 백 명이나 되는 병원이나 대규모 복지시설, 혹은 큰 학교의 책임자 자리에 앉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겠지요.
수도자로 성공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높이높이 올라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주님 안에 사는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시는 바와 같이 수도자로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의 은은한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등불은 어떤 것입니까? 어두운 방 한가운데, 촛불 한 자루 달랑 켜놓는 것, 혹은 백열등을 켜는 것과 등불을 켜놓는 것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입니다.
등불을 켜놓으면 왠지 분위기가 포근해집니다. 부드러워집니다. 따뜻해집니다. 행복해집니다. 거룩해집니다.
수도자로 잘 사는 길은 등불처럼 사는 길입니다. 등불처럼 사는 수도자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등불 같은 수도자에게서 그리스도의 자취를 찾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지친 사람들은 그 등불 같은 그 수도자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계시는 등불이란 바로 예수님 그분 자체를 의미합니다. 구원의 빛으로 오신 메시아 그분 자체이자,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주신 생명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만의 주님이 결코 아닙니다. 나만 사랑하셔야 하기에 침대 밑에 감춰두거나 그릇으로 덮어 두어야 할 존재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활활 타오르는 한줄기 강렬한 빛이 되어 세상 한 가운데 높이높이 올라가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활활 타올라야 할 세상의 등불입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면 너무도 볼품이 없습니다. 한없이 부족합니다. 지극히 나약합니다. 형편없습니다.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볼품없는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란 촛불 한 자루가 켜짐으로 인해 완전히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부족한 우리 삶이지만 우리 각자의 초에 그리스도가 점화됨으로 인해 우리는 그럴듯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주님 안에 살아감으로 인해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형편없지만 주님으로 인해 더 없이 아름다운 존재,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자.
-박상대 신부-
우리는 지난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가 8,4-15)를 묵상했다. 이 복음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그리고 "비유의 설명"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가 선호하는 하느님나라에 관한 비유이다.(마태 13,1-23; 마르 4,1-20)
그러나 복음이 전하는 비유의 서두를 보면 무엇에 관한 비유인지 전혀 눈치를 챌 수 없다. 물론 비유의 본문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서로 다른 조건에 떨어진 씨앗이 그 조건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은 뻔한 일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와 그 설명을 따로 제자들에게만 밝혀 주심으로써,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임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하늘나라의 신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10절)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우선 제자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전적으로 제자단에게만 한정되어 머물러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 복음의 "등불의 비유"(16절)가 필요한 것이다. 즉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등불과 같이 등경에 올려진 채 빛나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등불의 비유"에서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16절)는 말씀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등불을 켜는 이유가 바로 빛을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불에 비유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아직은 비유들 속에 감추어져 있다.(17절) 그러나 이 신비는 곧 드러나야 하고, 또 드러나서 등경 위의 등불처럼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을 때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즉, 십자가는 등경이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등불로서 세상을 밝히 비추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오늘 비유의 마지막 구절로 넘어가 보자. 우선 "가진 사람은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18절)는 말씀을 소유재산에 대한 새로운 분배정의, 즉 "물질적인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원리로 알아듣는다면 실수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진 것" 이란 물질적 소유를 뜻하지 않는다. 소유는 소유인데 신비에 관한 지식의 소유를 말한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통찰함으로써 얻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는 일이다. 관리는 신비에 대한 인식과 믿음, 그리고 증언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종말론적 보상률이 추가로 적용된다.
종말론적 보상률이란 복음서 모두가 즐겨 쓰는 개념으로서,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밝히는데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것인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진 사람은 가진 만큼보다 더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줄로 알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항상 가지고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등불>(루까 8, 16-18)
-유 광수신부-
루가는 8, 10절에서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로 제자들과 다른 이들과의 차이점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야 한다. 이런 제자들의 의무를 생각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도록 하자.
우선 등불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등불이란 어둠에서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마치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배들의 길을 안내해주는 등대처럼 등불은 어둠 속에 사는 이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빛이다. 따라서 등불은 등불 자체로 어둠을 비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등불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빛은 예수님이시다.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이 세상에 왔다."(요한 1,4.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루가도 즈가리야의 입을 통해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가 1,78-79)라고 노래했고 시므온을 통해서도 "계시의 빛"(루가2,32)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란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자기 안에 받아들여 빛이신 그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바로 빛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곳이다. 만일 교회가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있다면 다른 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 교회의 특성은 그리고 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에서 빛으로 존재해야 이유는 바로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그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함이다. 교회의 이런 사명은 이 세상 극변에 까지 그리고 이 세상 마칠 때까지 해야할 의무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누가 이 위대한 사명을 수행해야하는가? 물론 복음선포의 사명은 성직자 수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사명이고 의무이다. 그래서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하면서 파견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가?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코전 9,16)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코전9,23)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오늘 날 우리가 등불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등불을 켜는 작업을 해야 한다. 등잔에 등불을 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선 기름을 부어야 한다. 그리고 불을 붙여야 한다. 등잔에 기름을 넣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18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름이 없으면 탈 수 없듯이 말씀을 듣지 않으면 등불을 켤 수 없다.
나 자신이 빛은 아니다. 빛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빛이신 예수님은 오늘 날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따라서 빛이신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일 때 내 안에 작은 빛이 타오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등불을 켠다."는 것은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고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할 것이며 그러면 자연히 말씀의 빛이 발산하게 될 것이다.
신자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한다면 꺼진 등잔일뿐 결코 빛을 비추는 등불은 되지 못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정치, 경제, 법조계, 의료계, 학교, 언론계 등에 있지만 그들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인으로서의 빛을 비추지 못하니까 빛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이 성직자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각각 자기 자리에서 등경 위에 켜 놓은 등불처럼 빛을 비춘다면 우리 사회는 이렇게 어두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등불을 켜면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두지 않는다. 아니 둘 수가 없다. 그러나 꺼져있는 등잔은 한쪽 구석으로 쳐 박아 두거나 아니면 마치 골동품처럼 장식용으로 쓰여질 뿐이다.
등잔은 등불을 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등불로 사용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나는 법이다. 등불이 아니라 꺼진 등잔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특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이 덮어져 있거나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띄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속성상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등불은 그 자체로 빛을 비추게 되어있다. 등불을 켰으면 그 자체로 이미 주위를 비추고 있는 것이지 주위를 비추기 위해 또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본질상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불인 것이다. 빛이신 말씀이 살아 있지 않은 교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활화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꺼진 등잔일 뿐 등불은 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말씀을 듣고 생활하는가에 따라 우리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리스도 신자는 숨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나게 해야하고 감추어진 것은 훤히 나타나게 해야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생활화 함으로써 서서히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이 알려져 훤히 비추도록 해야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걸음이며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생활해야하는 이유이다.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내 안에서 숨겨져 있고 감추어 있을 것이다.
이런 신앙생활은 나 혼자에게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코 빛으로 나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헤메이며 살도록 놔두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신앙 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 수 있는 많은 특권을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를 사용하지 않을 때 결국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고" 이 은혜를 잘 사용하는 이는 즉 하느님의 말씀을 알려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생활하는 이는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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