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22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07. 9. 22. 05:42

   2007년 9월 22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쪼아 먹기도 하였다.(루가 8,5)

 

“A sower went out to sow his seed.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was trampled,
and the birds of the sky ate it up.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복음 선포자를 격려하는 한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오늘 복음에서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결론은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좋은 땅이겠습니까? 유혹이 없고 삭막함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땅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유혹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장애를 만났기에 더욱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좋은 땅은 만들어진 땅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땅과 씨앗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 땅이 됩니다. 정성과 애정을 기울여야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사실이 좋은 땅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흐르는 물과도 같습니다. 뛰어넘고 도약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나간 것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시작해야 새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땅으로 가는 삶입니다.

 

 

새벽을 열며

 

 먼저 제 축일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카페에 들어가 보니 대단하네요. 그리고 E-Mail을 통해서도 많은 축하를 받았습니다. 사실 본당신부가 되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영명축일. 그러나 제가 그러한 축하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야지요. 더군다나 교우들에게 언제나 받기만 하고 드리지 못하는 저이기에……. 그래서 주일에 하겠다는 영명축일 축하식을 없애고, 축일 당일인 어제는 동창신부에게 미사 부탁하고 도망쳤지요. 그리고 자전거 탔습니다.

오랜만에 꽤 먼 거리를 탔지요. 총 122Km.

돌아오는 10월 3일에 자전거 순례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 답사 차원으로 인천에서 서울 잠실체육관까지 다녀왔습니다.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면서 문득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보게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지요. 지나가는 사람 얼굴 하나하나…….

저도 남자라고 미인인 여성만을 쳐다본 것이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저를 바라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성만 쳐다 본 것이 아니라,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꼬마아이들의 얼굴까지……. 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표정이 다 다르고, 얼굴이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본 사람의 얼굴을 지나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기억하려해도 도저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너무나도 귀여운 꼬마아이라 할지라도 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그 순간뿐입니다. 지나가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머리 나쁜 탓도 있겠지요.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고 계시면서 너무도 다른 우리들 각자를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세요.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래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 지나가면서 얼핏 본 사람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를 기억하시는 것이고,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이 보다 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지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나를 사랑하시기에 계속해서 기억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 조금이라도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시기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시면서 당신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분.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

이러한 분이시기에 주님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절로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빠다킹신부

 

 

   희망 뿌리기      

-김인한 신부-


 신학교 뒷동산에 텃밭을 일군 적이 있습니다. 산 아래쯤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었는데 물도 잘 빠지지 않는 좋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기껏 해놔봐야
고라니나 멧돼지들이 내려와서 채소들을 먹을 때는 허탈하기도 하고,
그만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들인 땀에
대견하게도 뭔가 피워내는 것을 보고 마음 흐뭇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지대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기보다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 일을 합니다. 기름진 땅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아주 일부여서 좋은 땅이든
자갈밭과 풀이 난 곳이든 일단 씨를 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처럼 씨를 뿌린다는 것은 농부가 게으르고
무능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소출을 얻기 위해 척박한 땅이지만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의 씨앗, 사랑의 씨앗,
화해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우리가 씨앗을 싹틔우기 힘든 척박한 땅인데도,
주님께서는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묵묵히 우리 가운데 씨앗을 뿌리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시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풍부히 받아들이고 열려 있다면 열매 맺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희망을 지닌 농부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쇠귀에 경 읽기

-변진흥(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우리 속담에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지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처럼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오히려 예수께서 일부러 이런 혼란을 조장하시는 듯한 상황이어서 알아듣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다시 곱씹어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지만 그분의 선택과 은총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일러주어도 ‘쇠귀에 경 읽기’일 수밖에 없으니 그저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어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기는 힘듭니다. 마치 햇빛이 사물을 구분하게 하듯이 그분 은총의 빛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 은총의 빛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수월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요.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주어도 ‘쇠귀에 경 읽기’이기 십상이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알아서 하라.’는 식의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우리로 치면 자기 자식 챙기는 모습처럼 그분만의 독특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내가 많은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강성덕 목사 (경기도 덕혜원)-


작년에 봉사하던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작물을 심었다. 필요한 먹을거리의 상당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검은콩과 메주콩이다. 처음 밭에 심었을 때는 새들이 와서 모두 먹어치웠다. 결국 몇 곱의 노동량을 투입하여 모종을 해 옮겨 심었다. 자라는 콩에 흙을 북돋워주고, 웃자란 콩은 잘라주었다. 가을 추수 때 과연 얼마나 달렸는지 궁금해서 한 포기를 잡고 열매를 헤아려 보았다. 무려 430개나 달린 것도 있었다. 물론 가장 무성하게 달린 것은 메주콩이었다. 반면 검은콩은 잎은 무성하고 키도 컸지만 열매가 없는 것이 많았다.

올해도 스무 가지가 넘는 작물을 심었다. 무농약·무비료를 고집하고 있다. 이미 많이 거두어 먹고 남는 것은 나누어주고 있다. 그렇지만 다 잘된 것만은 아니다. 토마토는 병이 들어 실패하였고, 옥수수는 큰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 같다. 고구마는 반 이상이 말랐다. 하지만 20포기 안팎으로 심었던 오이와 애호박은 매일 수확하는 기쁨이 넘친다. 씨를 뿌려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은 생명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예수님의 비유는 늘 현장감이 있어 좋다. 예수님도 농사일을 잘하시지 않았을까? 하지만 말씀을 읽으며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내가 많은 열매, 백배의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만일 맺지 못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분명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맺는다면 그것은 부지런한 농부이신 하느님과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의지한 우리가 하나 될 때일 것이다.

 

 
한 분 하느님 앞에 서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사도 바울로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디모테오에게 명령한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므로 그때까지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라고 명령한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복되신 주권자이시며 왕 중의 왕으로서 불멸하신 분이시라고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

초대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과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애써 이룩한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며 분열시켰다. 사도들이 이민족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러한 거짓 교사들로부터 교회를 지켜내고 하느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로는 여러 가지 모함과 비방에 시달리고,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많은 박해와 고통 속에서 사도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과 충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사도 바울로 자신도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으며 죽을 위험에 처했었기 때문에 디모테오에게 격려를 넘어서서 명령함으로써 그의 믿음과 심지를 굳건하게 해주는 것이다.

바울로는 먼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앞에 서라고 명령한다. 오직 유일하신 하느님만이 불멸하시며 우주와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이시다. 하느님만이 만복의 근원이시며 빛 가운데 계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제 아무리 빛을 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빛이 아니며 태양 앞의 촛불과 같다.

제 아무리 크고 강한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힘이 아니며, ‘새 발의 피’(鳥足之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서있는 사람은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유혹과 협박도 물리칠 수 있으며, 갖은 박해와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의 힘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서서 살아가도록 바울로는 권고를 넘어서서 명령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반대하고 박해하는 자들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셨던 것처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시며 진리를 선포하셨다(요한 18,36-37). 이처럼 당당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서, 그리스도처럼 대담하게 복음과 진리를 선포하도록 명령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것이며,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므로, 박해와 역경을 이겨내며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도록 명령한다.

바울로 사도가 명한 이 명령은 곧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도록 명령하신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명령하신다.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면서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시고 복음과 진리를 선포하신 그리스도처럼 반대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명령하신다.

오직 하느님만이 한 분 주권자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므로 하느님 앞에 서서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걷도록 명령하신다. 오직 하느님께 영예와 권세와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살아가도록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인,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꿋꿋이 걸으며, 고난과 역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신앙인,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신앙인이 되자..........◆


 

 기름진 마음의 밭을 가꾸자.

-최현욱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에 감사드리면서 기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유명한 성자(현자)에게 가르침을 받던 제자가 하루는 스승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삶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삶은 진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란 깨달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 진리이다. 진리란 눈 뜬 사람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고, 눈 뜬 사람입니까?”
“깨닫고 눈 뜬 사람이란 자신의 삶의 중요성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에 두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 에 두는 사람이다.”

그러자 제자가 또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은 자신의 가슴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인가? 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신의 가슴속에 악을 품고 있으면 악이 나오고, 슬픔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슬픈 얼굴이 나오고, 기쁨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기쁜 삶의 모습이 나온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이 이제는 아주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 가슴속이 하나의 토양이 되게 하라. 그대 가슴속에 담긴 것이 밖으로 싹트게 된다. 그대 가슴속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서 그대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만일 그대의 마음속이 좋은 토양이라면 그대로부터 싹터 나오는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속이 나쁜 토양이라면 결코 좋은 것들이 싹터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마음은 그 씨가 뿌려지는 밭, 토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토양은 씨앗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네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어 진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길바닥으로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한쪽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돌밭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머리로,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가시밭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기는 하지만 세상의 온갖 걱정이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쉽게 흔들리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좋은 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온갖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내 마음의 밭이 길바닥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비옥한 땅인지, 우리 각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과연 나는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이 누구는 좋은 땅이고, 누구는 길바닥이고, 누구는 돌밭이고, 누구는 가시덤불이라고 구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누군가에 대해서 “저 사람은 가시밭이다, 저 사람은 길바닥이고 돌밭이다”라고 함부로 구분하고 그렇게 사람을 평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이렇게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비옥한 땅, 좋은 땅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밭이 도저히 씨앗이 뿌리내릴 수 없는 밭이라면 거름을 주고 잘 가꾸어서 좋은 토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밭이 가시덤불이라면 삽과 곡괭이를 들고 그 가시나무를 뽑아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내 마음의 밭이 돌밭이라면 그 돌들을 골라내면 되고, 길바닥이라면 쟁기로 갈아엎으면 다시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기름진 마음의 밭을 가꾸라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을 잘 받아들이고, 또 잘 가꾸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우리 마음의 밭이 좋은 밭이 될 수 있도록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오늘 하루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살다     

-최혜영 수녀-

 

 날이 갈수록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있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수도 있고 응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이 나에게 또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준다는 깨침을 누구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황 진(라파엘) 선배님은 척수 공동증이란 희귀병으로 30년 넘게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수도회에 입회할 무렵부터는 아예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라잉맨(누워 있는 사람)이라 부르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의 불꽃을 태우셨습니다. 제 수도생활의 햇수만큼 그의 투병생활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하느님, 왜?”라는 질문과 함께 연말이면 그분이 만드신 달력을 파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에게는 달력을 보내는 일이 자신이 아직도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가 병만 나지 않았더라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그림도 그리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을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주셨을까요? 그는 묵묵히 고통 받는 욥처럼 인내롭게 살아냄으로써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나 존귀하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몸으로 살아준 라파엘님께 경의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가시덤불 사이로 자리는 싹

 -김덕진(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있다. 물질이나 명예, 더 편하고 나은 삶을 원하는 우리의 욕심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도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거나 금세 시들어 버리게 하는 가시덤불을 만들어 낸다. 치열한 경쟁 시대, 돈이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세상을 살면서 욕심을 가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욕심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 어떠한가는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내가 행복해지려 하는 것은 아닌가, 더 많은 다수에게 득이 되는 길이 있는데도 오직 나만, 내 가족만을 위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돌아보지 않는 순간 가시덤불이 나를 둘러싸고, 비옥하던 땅에는 바위들이 굴러오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셨고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 편이셨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싸워주셨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셨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마주칠 때마다 번번이 그렇게 자신의 일처럼 나서셨다. 이렇게 살아야 좋은 땅에서 가시덤불도 돌덩이도 없이 싹을 틔우고 잘 자랄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애초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기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포기하기는 이르다. 그분께서는 당신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에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가시덤불을 다 잘라내지 못하더라도 잘라낸 몇 개의 가지 사이로 안간힘을 쓰며 자라나는 줄기를 기뻐하실 것이고, 돌덩이를 힘껏 밀어내고 자리잡은 뿌리에 박수를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땅과 씨앗

-이회진신부-


 

 수도원에 들어올 때는 세상을 위해 훌륭한 봉사를 하고자 했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나누고, 더 많은 땀을 흘리며 사람들 가까이에 다가가 도울 수 있는

그런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수도회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더 열심히 살면서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더 많이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그때 양성 담당 신부님은 제게 자꾸 이것에 대해서 묵상을 반복해서 시켰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자 한다는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며

반복해서 묵상을 시키는 양성 담당 신부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제가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끝내 버티자

신부님은 제게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지향을 두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지향을 두고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던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 대해 제 무의식 속에 잠긴 것은 

무엇인가 열심히 착한 일을 하는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받았습니다.

각자 받은 그 말씀의 씨앗은 무한한 사랑의 잠재력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그 말씀의 씨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고, 내가 성장하는 것이고, 내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사랑을 베풀고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복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늘에 복을 쌓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늘에 (나의) 복을 쌓기 위한 것”이 되는 것이죠.


많은 경우 우리는 봉사하지 못해서, 기도하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돌아보아야 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봉사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안에 하느님을 향한 내적 충만함이

자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움직이는 데

실제로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힘은 다른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의 근본은 자신의 힘과 의지, 용기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은총과 내적 충만함이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의지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씨앗의 성장하는 힘은 자신의 작은 몸이 아닙니다.

씨앗의 성장하는 힘은 그 안에 담긴 생명에 대한 잠재력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의 씨앗으로, 사랑과 희망의 잠재력으로 받은 우리기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님께 더 해드려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에게 당신 안에 머무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의 좋은 땅에 머무르며 당신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연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루가 10,42 참조).


아래 글은 하느님 안에 먼저 머무르려 했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묵상 기도입니다.

좋은 땅에 머무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더욱 더 많이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 길동무가 되고자 합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이 삶의 어두운 밤과 저 많은 위험 속에

꼭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굳센 사랑만을 제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주님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주님, 제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

-양승국신부-


며칠간 세미나를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제들을 위해 보다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겠는가?’하는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를 위해 훌륭한 강사께서 물 건너 오셨습니다.


제대로 된 형제적 봉사를 위해 리더십, 조직력, 친화력, 참신한 아이디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등등 여러 덕목들이 요구되지만, 보다 우선적이고 중요한 덕목은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두는 삶’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봉사를 하기 원한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복잡한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심산유곡에 위치한 봉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하루 온종일 기도 속에 보내는 사람일까요? 하루 10시간 이상 감실 앞에 앉아 성체조배에 전념하는 사람일까요?


그보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 무얼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운동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 미사, 영적 독서, 피정뿐만 아니라 공부 휴식, 운동, 취미활동, 잠을 잘 때에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영적인 사람이며 제대로 된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보다는 성령의 활동에 많은 부분을 내어맡기는 사람, 밤이슬 내리듯, 미풍이 불어오듯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람이야말로 보다 효과적인 형제적 봉사를 위해 적합한 사람입니다.


좋은 말씀들을, 핵심을 찌르는 말씀들에 다들 많이 반성을 했고, 형제들과의 공동체 생활에 새로운 전망을 지니게 되어 다들 기뻐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뜻밖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들은 그 말씀들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는 일입니다. 피부로 와 닿는 만만치 않는 현실 앞에서 가르침을 떠올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론과는 너무나 다르더군요. 집으로 돌아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인내심이 흔들립니다. 갑자기 다가온 잡다한 걱정거리들로 인해 숨이 막힙니다. 밀린 숙제들이 압박합니다. 그 주옥같은 말씀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이 바람에 흩어지지 말고 제 마음의 밭 안에 뿌리내려지길 기대합니다. 지속적인 자기 비움과 낮춤으로 말씀의 씨앗들이 숨 막히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작고 초라하나마 싹을 틔우고, 작은 열매나마 맺히기를 소망합니다.

 

 

 

 

 

 마음 땅 가꾸기

-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한 해의 결실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자연이 제공한
결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마련한 신앙의 열매를 하느님 안에서 나눈다면 더없이
좋을 시간입니다. 한 해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해 농부는 기름진 땅을 만들고,
곡식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의 땅을
잘 가꾸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항상 좋은 땅과
같은 마음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에는 길바닥인 때도, 바위투성인
때도,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때도 있습니다. 새가 쪼아 먹거나 발에 짓밟혀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게만
느껴지는 길바닥의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 안에서 그 관계가 깨져버린 바위투성이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여겼으나, 나를 옭아매 숨이 막혀버리게 하는 가시덤불
같은 만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는 이런 길바닥이나 바위투성이,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의 체험들이 있습니다. 서로 그런 체험들을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한 가족으로서의 깊은 정을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쪼아 먹기도 하였다.

-강영구신부-

찾아갈 고향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반겨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고생을 마다하고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 사랑 나누는 행복하고 즐거운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던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은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갈라디아 6,8-9)
인생살이는 씨 뿌리는 것입니다.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탐욕(貪慾)과 이기(利己)의 씨를 뿌리는 사람도 있고,
하늘의 소리를 듣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은총의 씨를 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받고,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받습니다.
나누고 베풀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받습니다.
하늘나라(天國)를 뿌리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거두고 누립니다.
미움과 증오, 원한과 원망, 탐욕과 이기심으로 지옥(地獄)을 심은 사람은 지옥(地獄)을 거둡니다.

행복도 불행도, 천국도 지옥도 내가 뿌리고 거둡니다.
행복한 추석 되십시오.(一明)

마산교구 


 

 † 땅을 탓하지 말자.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 모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마르 4,1-20; 마태 13,1-23) 루가는 마르코의 전승을 그대로 베끼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다. 마르코는 등불의 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와 함께 씨 뿌리는 비유를 맨 앞에 놓았고, 마태오는 7개의 비유들(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을 모아 놓은 비유설교집(13장)에서 첫 번째 비유로 다루고 있다.

서로 약간의 차이는 보이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같다. 특이한 점을 지적한다면,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는 비유의 해설이 예수의 제자단에게만 따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제자들이 다가와 비유의 뜻을 물었다(마르 4,10)고 하며,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오자(13,10) 그들에게만 비유의 뜻을 밝혀주신 것(13,18)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말씀 자체나 그에 대한 해설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① 우선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곧바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거나 새의 밥이 되고 말았다.
② 바위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습기가 없어 말라 죽어버렸다. 그래서 마르코와 마태오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고 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왕성한 덤불에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
④ 마침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서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그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기록함으로써 토양(土壤)의 질(質)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 비유는 그 자체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파종(播種)의 방법이나 그에 따른 수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다. 비유란 원래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므로 예수께서 ‘무엇을’ 파종에 빗대어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선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씨앗이 떨어지는 곳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① 길바닥은 그야말로 가능성 제로의 상태를 말하며, 길바닥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은 충분히 세속적인 환경을 말한다. 하늘의 새는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악마를 뜻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믿음도 구원도 없다.

② 바위는 수분이 없어 씨앗을 감싸 않을 수 없는 마음이다. 말씀에 대한 반응은 있으나 세상의 시련과 고통이 닥치면 뿌리가 없어 믿음도 사라진다.

③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힌 마음이다. 말씀을 수용하여 믿음의 생활을 하지만 그 마음은 늘 세상의 온갖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더 가까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들에 눌려 믿음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이다.

④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을 뜻한다. 이 마음은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믿음의 뿌리와 생활의 줄기를 뻗어 꾸준히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무에게는 슬픈 운명이 있다. 씨앗이 뿌려진 그곳에 싫든 좋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자신의 힘으로 옮겨 다닐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심겨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더워도 추워도 옷 한 벌 벗고 입지 못하는 그런 슬픈 운명이다. 그러나 진작 나무는 자신의 그런 운명을 슬퍼하지도 나무라지도 트집 잡지도 않는다.

자연이라는 큰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저 슬프다고 생각하는 쪽은 우리 인간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늘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남의 것이 더 크고 좋게 보이면 기뻐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슬프고 실망하며 포기한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마음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토양과도 같다. 그러나 그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유로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토양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이 나무에게서 배울 점은 많지만, 분명한 것은 나무와 사람은 다르며, 나무보다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과 같은 자신의 딱한 처지와 환경을 나무는 불평해도 바꿀 수 없으나, 사람은 바꾸어 개선(改善)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