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0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7,50)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죄인인 한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여인은 예수님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
오늘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합니다. 한 사람은 모범적인 바리사이 시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인 여인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여인을 만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빚진 사람 두 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과 적게 진 사람이 둘 다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시몬은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그러한 상식은 잘 알면서 어찌하여 영적으로 빚진 여인이 그만큼 감사하는데 못 알아보느냐고 지적하십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엄청난 자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을 깨닫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어찌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어찌 나에게 아픔을 주는가? 내게 이렇게 해도 되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준 아픔은 잊어버린 채 상대방이 자신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려 합니다.
시몬은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여인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인을 구원한 것은 그의 믿음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사랑하기
-김인한 신부-
고해성사 중에 주일미사 빠진 것을 고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끔 그럴 때 물어봅니다. 왜 주일미사를 빠지는 것이 죄가 될까요 하고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대답을 못하시거나,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고백한다고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초등학생 아이에게 들었습니다.
‘내가 주일을 빠지면 예수님이 아파해요’ 하고 말입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말이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께 다가가지 않는다면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요.
죄라는 말보다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사랑에서 어긋나는 삶이겠지요.
주님을 믿고 산다는 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성당 다니는 천주교 신자로 믿고 사는 게 아니라,
주님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주님을 품는 사람이 우리들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한 죄 많은 여인이 행복해보입니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더 용서받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더 평화롭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더 많이 행복할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사랑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일찍이 구약시대에 다윗은 사울 왕의 음악치료사였습니다.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그를 괴롭힐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습니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습니다.(1사무 16,14-23 참조) 다윗은 감성지수(EQ)가 높아서 예술치료를 잘하였던 모양입니다. 또한 다윗은 작은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쳐 이겼지요.(1사무 17,40-54 참조) 돌멩이는 비록 작지만 돌리고 돌리면 원심력이 커져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지성지수(IQ)가 높아서 과학적 사고를 잘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하였고, 그에게서 목숨을 건지려고 다윗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헤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 끝내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1사무 24,1-23; 26,1-25 참조) 다윗은 의지지수(PQ)도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루 갖춘 다윗은 영원히 칭송받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신명기 6장 5-9절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의 핵심이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EQ)을 다하고, 목숨(PQ)을 다하고, 힘(IQ)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용서로 표현됩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장재봉 신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촌이나 친척들이 잘된다는 것은 더불어 기뻐할 일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내 배가 아프다는 표현을 보면 우리들의 못된 심보를 꼬집는 말일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의 삶을 되돌아보아도 그런 못난 심보가 가득한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씨는 다 그렇고 그렇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 강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 없이는 형제 자매가 잘되는 꼴조차 보지 못하는 못나고 모자란 우리인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주제와 처지를 올바로 알 때에만 그분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는 완전한 의탁이 가능할테니까요. 인간은 내 자신의 힘만 가지고는 이기적인 마음, 혼란스러운 욕망을 우리 마음으로부터 뽑아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에 거룩한 생명이 태어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으십니다.
이렇게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입맞춤을 해 드릴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이 베푸신 놀라운 기적의 공로를 언제나 치유받은 자가 지녔던 믿음의 덕으로 돌려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좋은 것이고 엄청난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온갖 어려움과 삶에 결핍된 요소들이 예수님께 의탁하는 "믿음" 하나로 완전히 축복으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겨자씨만한 믿음만으로도 우리 기도에 대한 흔쾌한 응답을 주십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고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말 그대로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자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십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은 꼼짝 못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주 큰 약점이시지요.
우리들이 예수님을 진정 믿는 사람들이라면 형제 자매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망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이요. 내 기도가 부족한 탓인 것을 고백합시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이고 무기입니다.
초대 공동체에서는 그리스도교를 길의 종교라고도 하였습니다. 길의 종교라는 말의 뜻은 주님과 함께, 모든 이가 구원으로 향하여 걸어가는 종교임을 밝힌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 형제 자매와 더불어 가지 않는 길은 천국을 향한 길이 아닙니다. 내 형제 자매가 없는 나 홀로 천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이가 구원되리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다 함께 살릴 것입니다. 나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이웃들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까 7:36-50]의 사건은 바리세이인 시몬의 집 뜰 안에서 된 일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의 부자집은 정방형의 마당을 한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건물을 세워 지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화원과 우물이 있고, 따뜻한 날에는 그 마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러한 환경에 어떤 귀한 손님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그들의 풍속에서 의례이 세 가지 일이 행해졌었다.
1) 주인이 나와 손님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을 했고,
2) 길에 먼지로 더러워진 발에 물을 부어 씻겨주는 것.
3) 그리고 약간의 향로를 분향하든가, 장미향 한방울을 손님 머리위에 부어 바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리세이인 시몬은 예수를 초대해 놓고도 그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은, 예수를 반은 호의로, 반은 멸시하는 태도를 가졌었다는 표였다. 그러나 사람들 틈에 그 집에 들어와 예수를 찾는 죄 많은 여인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었고, 발에 입을 맞추었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으며, 유대여인들이 으례이 목에 걸고 다니던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발라 드렸던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본 시몬은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저런 죄녀가!" 또 "사람들에게 그토록 명성 높은 예수가 저런 여자가 누구인줄도 모르다니!"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이렇게 바리세이인 시몬처럼 우리도 다른 이를 잘못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흔히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어느 사람의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을 용서 못하고 하느님 앞에 그의 참다운 진실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돌아온 탕자를 대하실 때도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며 무슨 짓을 했으며, 무슨 염치로 돌아 왔느냐? 고 따지거나 다시는 안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으시고 받아들이시는 것도 아니며, 오직 "아버지를 찾아 돌아왔다는" 그것만을 가지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시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통회하는 것만을 보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그런데 시몬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은 선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떳떳했기에 눈물을 흘릴 필요성은 커녕 예수와 자비의 용서가 아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남을 용서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만큼 용서를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며, 용서 받아본 적이 없으니,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니, 자기도 하느님 앞에 용서 못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진실히 용서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용서하는 그 행위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람을 하느님과 갈라놓고 단절시키는 것은 바로 "자기 만족"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타인에게도 아쉬운 것을 모르고, 하느님께 대해서도 아쉬운 것을 모르니, 자기 만족으로 차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거기에는 죄의 용서에 대한 진정한 고마움을 모르기에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살펴 자기를 용서하라. 자기를 용서 못하는 것은 교만이고, 하느님께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열 줄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용서했으니 타인을 용서하라. 집, 직장, 친구, 이웃 등을 용서하라. 용서함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라. 그럴 때 평화가 있고, 새로이 무엇인가를 의욕있게 할 수 있다.
사랑과 용서의 등식
-박상대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피리를 불어도 곡을 하여도 호응하지 않는 장터놀이의 아이들로 치부(置簿)된 가운데, 그들 중의 하나인 시몬(40절)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예수께서는 기꺼이 초대에 응하여 그의 집에 들어 초대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게 된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먹고 마시며 어울리는 하느님 지혜는 오직 그 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됨(35절)을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모양의 놀이든 기꺼이 응해주시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시는 분이시다. 마태오, 마르코, 요한복음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처음부터 예수님의 적대자로 등장시키는 반면, 루가는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손길이 닿게 한다.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그들은 예수를 감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왔으며(루가 5,17), 갈릴래아 지방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합세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반감을 가지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고, 고발할 기회를 찾으면서 예수의 일행을 따라다니고 있었다.(루가 5,21.30.33; 6,2.7.11) 비록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무시하고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으나, 루가복음의 예수님은 그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그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는 이유는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그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자연히 드러날 것”(35절 참조)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하느님의 지혜가 죄 많은 여인의 회개와 용서를 통하여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존경했거나 그분을 모셔다가 따로 말씀을 듣기 위해 자기 집에 초대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예수를 고발할 또 다른 빌미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몬이 손님을 초대해놓고 해야 할 세 가지 관습을 행하지 않았던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주인은 손님을 마중하여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을 하고, 먼지로 더러워진 발에 물을 부어 씻겨주어야 하며, 약간의 향료를 분향 하든가 향유 한 방울을 손님의 머리 위에 발라주어야 했다. 그런데 시몬은 이 모든 관습적 의례를 행하지 않았고, 반면에 갑자기, 그러나 의도적으로 나타난 ‘행실이 나쁜 죄 많은 여자’가 이를 대신 해버린 것이다.(44-46절)
죄 많은 여인이 예수께 한 행위는 사랑의 행위였다. 여인이 보여준 사랑의 행위에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다.(48절)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분명 하느님께 속한다. 예수께서는 물론이고 그분과 같은 식탁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49절)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0절)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네가 보인 사랑이 너의 죄를 용서하였다.”(47절 참조)는 말과도 같다. 결국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신 예수이시지만,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행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극진한 사랑을 보인 사람은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것이고, 적게 용서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 중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죄인이라 생각하는 의인도 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은 예수가 자기를 위해 별로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은 예수의 죽음이 완전히 자기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죄인이고,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죄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동시에 예수께 엄청난 빚을 졌다. 우리 중에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데 이 빚마저 그분께서 다 탕감해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결국 사랑하는 것은 용서받는 것이며,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2003-09-18 )
-양승국신부-
우리는 저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인 듯 합니다. 존경하는 정호승 시인의 말씀처럼 "상처 없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진주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장미꽃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상처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을 때 마다 흔히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만이 상처받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은 상처를 겪은 사람만이 삶의 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결국 좀 더 넓게 생각한다면 상처는 수치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지난 우리 삶 안에서 마치도 상흔처럼, 문신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야말로 결국 우리를 거만하지 않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랜 세월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온 한 가련한 여인, 상처로 인해 늘 아파하고 갈등하고 한 평생 주눅 들어 살아온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너무도 당당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실이 나빴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그 여인은 오랜 방황과 악순환의 세월을 접어보겠다고 그토록 노력했었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습니다.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은 어느새 과거의 비참함에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습니다.
여인의 머릿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큰 걱정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내가 변화될 수 있으려나? 죽을 때 까지 계속 이렇게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토록 불가능해보이던 여인의 회개는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녀의 쓰라린 상처를 당신 자비로 아물게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인해 지난 세월의 모든 상처를 완전히 치유 받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여인은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찾아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이었습니다. 당시 꽤 값나가던 물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에게 있어 전 재산과 다름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가져온 여인은 회개의 표시로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회개가 얼마나 절실했으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다 적셨습니다. 그 눈물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냅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하나 하나의 행동을 눈여겨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마음은 지상 최고의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봉사는 더 이상 극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었으며 용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이렇게 행동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위주로,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오늘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된 여인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역시 누구나 여인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토록 비참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킬 전환기가 찾아오리라고 확신하면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매일 망가지고 깨져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 새 인생을 살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뻐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이 때로 고달프고 때로 열악하기에 고통고 많고 좌절도 많겠지만 다시 한번 "지금이 바로 또 다른 내 인생의 출발점"이라 여기며 힘차게 새 출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시길 빕니다.
"혹시라도 우리 삶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건 우리 자신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그분에 의해서 형성된 것입니다"(정호승, 연인 참조).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가 7,47)
<죄사함을 받으려면...>(2002/09/19)
-오상선신부-
나이가 들어갈수록
또 영성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젊을 때는 멋 모르고 행했던 일들이
얼마나 죄스런 일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더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는 게 죄지요!> 하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예수님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 기사에서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부터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셨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떠나갔다!>는 진술도
이러한 면을 시사하고 있는 것같다.
그렇다면
이 죄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찌 이 죄를 보속하고 기워갚는단 말인가?
그 최선의 방법을 주님께선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답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사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배워 알고 있었고
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로 머리로만 이었다.
그러나
이 <행실이 좋지 않다>고 평이 나 있던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가진 것 중 가장 고귀한 것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았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다.
사랑이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점을...
다른 사람들이 머리를 굴리며
이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도와 줄 수 있을까 등을
궁리하고 있던 때에
이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는다.
수재의연금을 내면
과연 이것이 수재민들에게 잘 전달은 될 수 있을까?
또 아무렇게나 집행되어
수재민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배불리게 만들지는 않을까?
이러한 생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수재민들을 화면으로만 보면서 안되었구나 하며
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머리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수재에서
우리 정동 수도원 공동체는
재정상태가 열악함에도 불구하고(사실 마이너스 재정이다...)
선뜻 기금을 내어놓고
월 12만원 용돈에서 형제들이 또 떼어내며
강릉지역 수재민들을 위해
작은 부분을 내어 놓았다.
회관 직원들과 며칠간 수해복구를 위해 간다기에
회관 직원들은 몸으로 만이 아니라
성금을 기꺼운 마음으로 갹출하였고
주위의 사람들 마저도
기꺼이 동참해 주어
수재민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사랑은 이렇게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죄가 크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가 해야하는 유일한 것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뿐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
오늘 따라 우리 회관 직원들이
얼마나 이뻐 보이는지...
이번 추석은
그래서 참으로 기쁜 명절임에 틀림없다.
직원들의 눈에 기쁨이 서려 있고
직원들의 마음에 서로를 위해주고 생각해 주는 열정이 담겨있다.
이번 추석은
이렇게 참으로 더 사랑함으로써
용서받음의 기쁨을 체험토록 하자.
한가위 명절,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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