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5)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말도 믿지 않고 당신도 믿지 않는 백성의 불신을 한탄하고 계신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지혜의 모든 자녀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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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세월은 약이 아니라 마취제일 따름입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낫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는 대부분 처음부터 손쓰지 않으면 더 심해집니다.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 사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 있는가 하면 걱정도 참 많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길입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서 자식 둔 부모치고 마음 편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부모 역시 자녀 못지않게 매일매일 숨이 가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지혜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참는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말도 믿지 않고 당신도 믿지 않았음에도 그분께서는 참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아픔을 인내하며 그분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과 상처까지도 그분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닫힘
-김인한 신부-
가끔 부족한 제 강론과 강의를 통해 새로운 마음을 다짐하는 신자들과
신학생들을 보면 정말 마음을 열고 듣는 그네들의 모습에 감동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사제 모임과 연수 덕분에 강의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제들의 삶이 그러하듯 말하는 것, 강의하는 것에 익숙한 저에겐
오랜만에 다른 분들의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하고 가르치는 데 익숙한 제겐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제 시선과 제 마음으로 재단하는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만 많이 듣는 분들을 보면 귀만 천국에 가 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하는데 제 경우에는 귀 하나도 천국에 못 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늘상 비판하는, 그리고 오늘 주님의 비판의 자락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가장 큰 잘못은 애당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닫혀 있음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이 오래될수록 나 자신만의 믿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분명 주님으로부터
된통 꾸지람을 들을 것 같습니다. 열려 있음으로 인해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이길 다짐해봅니다.
사람이 되고 싶은 허수아비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100년에 한 번, 봉황이 나타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준다는 봉황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영험한 봉황은 앞모습은 기러기요, 제비턱에 닭의 부리, 뱀의 목에 거북이 등, 꽁지는 물고기, 뒷모습은 기린이요, 영롱한 오색 깃털에, 울음소리마저 신비한 5음을 낸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 사람이 되고 싶은 허수아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외로이 들판에 서서 올 가을에는 꼭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발가락이 간지러워 내려다보니 작은 새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서 나오는 단물을 정신없이 빨고 있었습니다. ‘내 발가락 사이에서 단물이 나오네?’ 허수아비는 발가락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작은 새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물을 달게 먹고 난 작은 새는 허수아비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렇단다.” “사람이 되고 안 되고는 아저씨 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 후로 날마다 작은 새는 허수아비에게 날아와 신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고, 그의 발가락 사이에서 솟아나는 단물로 목을 축이며 행복해했습니다. 허수아비도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드디어 허수아비의 꿈을 알고 있는 가을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은 새가 아주 못생기고 몸이 불편하여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검은부리 참새를 데리고 왔습니다. 작은 새는 자기가 마실 물을 양보할 뿐더러 참새가 물을 먹는 동안 먹이감을 구해 오기도 했습니다. 허수아비는 못생긴 검은부리 참새를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작은 새가 안타깝고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높은 창공을 가르며 솔개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검은부리 참새를 노리며 허수아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허수아비는 ‘기회는 이때다.’ 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솔개는 순식간에 참새를 낚아챘습니다. 먹이를 구해 오던 작은 새가 이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면서 참새를 구하려다 솔개의 날개에 치여 저만치 나동그라졌습니다. 허수아비는 놀라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들녘의 추수를 다 마친 농부가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허수아비를 쑥 뽑아 논두렁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때 허수아비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앞모습은 기러기요, 제비턱에 닭의 부리, 뱀의 목에 거북이 등, 꽁지는 물고기, 뒷모습은 기린이요, 영롱한 오색 깃털을 지닌 작은 새의 주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알고 사랑한다면 매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지혜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입니까?
-부산교구 김성규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루가 복음사가가 비교적 짧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무엇이었으며,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전제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며, 이를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지혜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관해 이야기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에 관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시어 당신의 위대성을 드러내십니다(루가 7, 24 - 30). 또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관해서도 말씀하십니다(루가 7, 31 - 35). 우리가 방금 들은 복음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요한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보았습니다(마태오 21, 26; 마르 11, 32).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루가 1, 76). 유대인 최고의회(=산헤드린)는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언자요?"(요한 1, 21). 그렇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였고, 다가올 구원을 말하면서 마음의 철저한 변화, 곧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때에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 구세주가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요한을 두고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신지를 물어오도록 한 바 있습니다.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고 본대로 전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위해 활동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질병을 치유하러 오신 예수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메시아, 인류를 서로 화해시키고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대사제를 의심 없이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마침내 드러내신 그 모습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시빗거리로 삼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앙갚음을 하시고 화를 잘 내시고 성질이 급하신 분이시려니 여기는 자들의 자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용납 못 하는 처지이다 보니, 예수님도 우리를 깊이 용납해주지 않으시는 분이시려니 생각합니다. 사람이 때때로 너무 자신 만만하여 철면피해지면, 우리에겐 예수님이 아무 필요도 없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좀 못마땅한 예수님, 내게 잘 해주지 않고 요구가 너무 많은 예수님, 지나치게 곤란한 처지에다가 나를 밀어붙이는 예수님, 아니면 너무 어려운 분이라서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지니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들에게도 바른 생각을 지니지 못합니다. 못마땅합니다. 불만 투성이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태도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를 생긴 그대로 사랑치 않으신다는, 내게 뭔가 불만이 있으시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이와 다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생긴 그대로 사랑하시며, 나를 온전하게 받아 주시며, 내게 바로 지금 친절하시고, 상냥하시고, 관심을 기울이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넘치신 분이십니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잃었던 양을 찾게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잃었던 은전을 도로 찾은 여자도 예수님의 이 심경을 잘 알 것입니다. 그 여자도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하며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의 생활이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임하신 그리스도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곳으로 오신 그리스도님, 바로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천하게 오신 그분 안에 삶의 진실이 있고, 생명의 영원한 기쁨이 있고, 온갖 풍요함이 있다는 것을 믿는 생활입니다. 사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취하시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가사의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를 가진,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미움 속에서 사랑을, 어둠 속에서 빛을, 하찮은 것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찾아내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자신의 생각과 아집,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기쁨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 멘.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까?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도, 예수의 기적도 받아 들이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루가 7, 31-35)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그들의 생활 태도를 다음과 같이 한탄하시는 것이다. 즉,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 학만 어울리는 구나!'"하고 비평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다른이를 쳐다보는 마음 자세는 과연 어떠한가? 혹시라도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지적하시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가졌던 사고 판단, 고집스런 비평의 자세는 아닌지?
여기 모인 우리들은 모두 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의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겨대고, 강요하며, 그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우선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우하며, 상대를 존경하여 섬기며 봉사하고자 하는 자세가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 속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겸손되이 따르는 자세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정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게 되는 것은, 좋기도 하고 한편 불행을 자초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기 쉬우나,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이 끝내는 승리하게 된다고 오늘 복음이 일러주는 것이다.
새로운 지혜가 필요할 때
-안동교구 김기환 신부-
30대 중후반쯤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물음표 하나가 맴돌기 시작한다. 이때쯤 되면 나를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던 좋은 직장도 시시해지고,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던 폭넓은 인간관계도 활기를 잃어버린다. 대외적으로는 아직도 인정받고 멋있게 보이는 내 모습이 정작 나 자신에게는 매력 없이 보여지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살아오는데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던 삶의 전략과 전술들이 이제는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는 굴레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지혜가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이제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과업과 규범에 맞추어 살아왔던 내 모습에서 벗어나 나만의 고유한 개성을 살려내고 형성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피리를 분다고 무조건 따라서 춤추고, 곡을 한다고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우는’ 예수님 시대의 우매한 대중의 모습을 벗어버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예언자 요한은 남들처럼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먹지 않아서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남들이 상종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 하고 어울리다가 결국 십자가형까지 받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인간의 지혜를 버리고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할 시기다. 그것은 집단적 가치와 규범에 맞추느라 눌러놓거나 잊고 살아왔던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찾기 시작할 때, 나의 얄팍한 지혜를 훨씬 폭넓게 감싸안는 하느님의 지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 인간의 지혜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삶은 그런대로 진행되겠지만 너무나 무미건조한 나날의 연속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에게서만 드러난다.
성경과 불경을 딱 한 줄로
-양승국 신부-
어느 날, 강가를 걷고 있던 까까마리 고등학생인 나에게 스님께서 불쑥 물었습니다. "니, 성경과 불경을 딱 한 줄로 줄일 수 있겠나?" "헛 참, 그걸 알면 내가 미쳤다고 스님을 졸졸 따라다니겠습니까?" 한참 뜸을 들이시던 스님께서 정답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지나가노니, 헛되고 헛되도다!"
존경하는 이산하 시인이 쓴 산사기행 "적멸보궁 가는 길"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요 며칠 세상 돌아가는 걸 눈여겨보며 문득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날도 섣불리 기약할 수 없다는 사실, 안심하고 지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이번 수재로 인해 크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런 저런 사연들을 들으면서 "참으로 인간이란 존재는 이렇게도 나약한 존재구나" "죽기살기로 기를 쓰고 살아가지만 정말 한 순간이구나" 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일은 숟가락을 들어올리는 일입니다. 시인의 표현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런 일은 "숟가락을 밥그릇에서 입으로 가져가는 일"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시련이나 고통 앞에서 취하는 행동들은 각양각색입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며 자포자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지혜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일단 벌어진 사태의 추이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차분히 연구를 시작합니다.
상황의 극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도 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바로 하느님께서 지니고 있다는 것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번 태풍 때 모든 것은 한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전문가들은 거의 정확하게 태풍의 진로를 파악했었고, 상당히 설득력 있는 대비책도 강구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룰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입니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순간에 희생당하신 모든 분들이 이제 주님의 품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위로를 받으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살아남은 우리들은 보다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예견되는 모든 조짐들, 예표들에 우리의 오관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슴 아픈 사건들은 주님으로부터 다가오는 경고의 신호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빨리 정돈된 생활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음성, 다시금 그릇된 길을 접고 새 출발하라는 주님의 외침을 이번 사건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분위기를 띄웠음에도 불구하고 냉랭한 사람들, 마치 소 닭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그럴 때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제 그만 좀 알아들어라" "깨어 나거라." "내 말 좀 귀담아 들어보라"고 외치고 계시건만, 그저 묵묵부답인 우리는 아닌지 반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면형무아(麵形無我)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루카 7,31-35)
-김경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창립자이신 방유룡(무아 안드레아) 신부님은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찬 분이셨습니다. 무아 안드레아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완덕이 무엇이며, 그 절정이 어디뇨? 완덕은 점성(點性)에서 시작하고, 그 절정은 면형무아에 있도다. 길이·넓이·깊이·높이가 점에서 시작하였고 자연계에서는 마지막이 되는 시간과 공간이 여기서 나왔도다. 무는 점성을 지나가는 정신이니 이는 면형이로다. 면형에 계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무화하시고 텅 비우셨다. 이는 시공을 넘어간 정신이요 완덕의 절정이로다. 면형은 자연을 넘어간 초자연이니, 그는 곧 하느님이시도다. 임이 면형과 하나가 되심은 무아와 하나가 되심이기에 실상 면형은 무요, 전능으로 드러난 무요, 무는 자아를 없앤 무아요, 무아는 면형과 하나니 임과 면형이 떠날 수 없는 인연이라기에 나는 울었나이다. 완덕의 비결은 면형이요, 그 성공의 비결은 점성이로다. 슬기는 이것을 알아듣고 범사에 정밀(精密)하여 미소(微小)함에서 정밀함으로 만사형통하는도다. 초목의 생명은 뿌리에 있어서 뿌리 없이 살 수 없고 뿌리 내릴 준비가 없으면 싹도 틀 수 없도다. 위대한 일은 무엇이며, 복된 삶은 무엇인고. 주님의 눈에 들고 그 사랑 속에 삶이로다. 인품이 뛰어난 이를 위대하다 하고, 물질이 풍부한 이를 복되다 하나 아무리 비천한 이라도 주님의 뜻에 맞는 이가 성인(聖人)이요, 제아무리 위대한 이라도 성의(聖意)에 불합(不合)하면 죄인이로다”(영가 80 중에서).
무아 안드레아 신부님은 자아를 없앤 무 안에 하느님께서 임하심을 면형의 신비로 깨달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날 밀떡의 형상 안에 당신 모습을 감추고 계신, 초자연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 신비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완덕의 절정인 면형무아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아를 내세우고, 자신의 힘을 키워서 자아를 완성하려 애쓰지만 실상은 자신을 비우고, 무가 되려고 노력할 때 그 무의 자리에 하느님이 임하심을 면형무아의 신비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나를 버리고 주님께서 내 안에 임하시어 나를 통해 주님이 드러나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제 1독서 : 1 코린 12,31-13,13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복 음 : 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석양은…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아침에 강론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나는 왜 신부가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자라난 환경이 어떠했길래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행주입니다. 바로 앞에 행주대교가 있는 곳인데 늘 한강이 보였고 들과 산이 있었지요. 지금도 어릴 시절을 떠올리면 석양이 지는 들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난히 해 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석양의 풍경을 많이 보아서 제가 종교인이 되었을까요? 해 뜨는 모습을 많이 보았더라면 사업가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늘상 해질 무렵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어머니가 부르셔야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갔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특히 석양 낙조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해는 질 때 서서히 내려가다가 한순간에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해가 지금 막 지는구나.?‘이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과학적으로 해는 방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8분 전에 이미 지고 없습니다.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가 8분이 걸리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지는 해를 보고 지금 방금 사라졌다고 8분의 시차를 망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고서도 ??별이 참 아름답구나, 저기 저 별이 빛나고 있구나.?‘생각하고 감탄하지만 그 별 중에 어떤 별은 벌써 수천 년 전에 없어진 것도 있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없어진 별의 빛이 여기 지구에 오기까지 수천 년이 걸린 셈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 것들이 다 맞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에 대해 우리는 확신하며 주장하고 말하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거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면 전혀 다른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접하고 놀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이 있다면 자기는 절대적으로 다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주장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화가 나신 모습입니다.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는데 이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예수님을 더욱 불신하고 죽여 없애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을 두고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생각을 합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미친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보고서는 맨날 먹고 마시기만 하는 모리배로 비판을 하지요. 아무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였습니다. 자기들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으면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대하였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제대로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났다고 교만했던 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성경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스스로를 높이고 으스댔던 그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을 처형하고 마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자기 중심의 틀과 교만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신관이나 신앙 논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래된 본당에 가보면 이런 신자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다 판단을 하고 결론을 맺습니다. 또 이렇다 저렇다 하며 하느님까지도 판단을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처럼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어려움을 만듭니다.
순수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배우면서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보고 말하며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두고 왜 본당 신부 또는 수녀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를 좀더 사려 깊게 묵상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목하는 사람은 한 두 명의 신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신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당장 눈앞의 것을 해결하려는 마음보다는 10년 후, 100년 후를 바라보는 긴 안목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 안주하면 그 때부터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새롭게 배우려는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늘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 가지라도 더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사리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무조건 판단하고 자기와 같지 않으면 모조리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매일 새로워지고 열린 마음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평일미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말씀을 경청하며, 또 그 말씀으로 하루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미사 중에 새로운 다짐을 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이런 노력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보다 더 많은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귀 기울이는 우리들 열린 모습 안에서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 우리 공동체의 힘찬 모습을 찾아봅니다.
마음의 조용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오늘이 되도록 합시다
- 서울대교구 홍성만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은 물론이요 당신마저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장터란 곳은 조용함을 찾아볼 수 없는 장소입니다. 장터는 흥정과 더 큰소리와 소리로, 자기의 이익과 주장을 내세우는 소란한 곳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주장만을 외쳐 대는 장터와 같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혹시 장터와 같지는 않은가?
- 내가 속한 신앙의 공동체가 장터와 같지는 않은가?
- 혹시 나의 가정이 장터와 같지는 않은가?
장터와 비슷하다면, 그 안에는 나의 이익과 주장을 내세우는 소리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조용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 장터는 장터와 같은 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마음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소란함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살피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마음의 조용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오늘이 되도록 합시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한국 순교자 대축일)
-이회진신부-
지난 해 대전 교구 내 성지 순례를 중에 “배나드리”라는 옛 교우촌을 찾아보았습니다.
성지 안내 책자에 나와 있는 옛 교우촌은 사라진지 오래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그곳이 옛 천주교 교우촌이었다는 사실은 까마득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1817년 삽교에 까지 미친 박해 때 배나드리의 신자 20-30여명이 해미로 압송 되었고,
민첨지(베드로) 등 몇몇 신자들은 끝끝내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였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를 약속하고 석방된 후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배나드리 교우촌은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배나드리라는 교우촌이 기억날 때마다
우리가 견디어내야 할 유혹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 2 독서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무겁게 하는 유혹들이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과 같은 것이긴 해도
이것이 우리를 하느님과 갈라놓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유혹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와 우리의 신앙은 어려움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 순수하고 단단해진다는 것을
역사 안에서 또한 체험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죽음과 혹독한 형벌이 두려워 배교를 했다지만
그들이 온전히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배교의 너울을 쓰고 뿔뿔이 다른 곳으로 가 숨어 살면서
그들은 더 모진 양심의 가책을 견디어 내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위협이나, 혹독한 고문, 혹은 환난과 같은 것이
우리의 신앙을 온전히 버리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비록 그러한 폭력 앞에서 두려워 무릎을 꿇었다 해도
그것이 온전히 우리를 신앙에서 떠나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폭력에 앞서 우리를 더 유혹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폭력보다 우리에게 신앙을 다 버리게 만드는
더 강한 유혹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보면 사탄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유혹하는 장면이
매우 이채롭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신성을 지니진 예수님께서 가장 이기기 힘들었던 유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채찍질을 받는 것과 같은 고통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면 그렇게 힘들게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고,
아들 딸 낳고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이 소설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마지막 유혹이었다고 상상합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에 맞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에 완전히 물리쳤다고 소설 속에서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삶”에 대한 유혹은
실제로 우리의 현실 안에 늘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그렇게 체포될 일도 없고 매를 맞을 일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래야 하지? … 그냥 평범하게 농사나 지으며
부모님과 자식들과 편안하게 그냥 그렇게 살다 죽으면 될 텐데… ”하는
“평범한 삶”에 대한 유혹은 그들에게 매를 맞는 것보다 더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평범한 삶”에 대한 유혹은 매우 위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그냥 표 나지 않게 조용히 성당이나 왔다갔다 하며
그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큰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 하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은
주일만 신자, 혹은 무늬만 신자인 신자 아닌 신자를 양산하고 있고,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기에
자신들은 하느님 나라에 갈 수없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패배의식을 만연시킵니다.
특히나 오늘날의 물질문명은 더욱 우리를 편안한 삶의 일상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평범한 삶”과 타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기쁨이 아닌 고통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행복이 아닌 귀찮은 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조들이 치열하게 살다 떠나며 남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 맞는 것이나 칼에 맞아 죽는 것을 잘 견디어내라는 것이라기보다
이 세상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보았을 때
그 가치를 자신의 삶 안에서 잃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범한 삶”에 대한 유혹,
그것은 십자가와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서 떼어 놓는 가장 큰 유혹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 배부른 신앙인이기보다 당신에게 목말라 하도록 저를 흔들어주소서. 아멘.”
잔치놀이와 장례놀이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완고함을 꼬집은 비유(31-32절)와 이 비유의 뜻을 풀이하는 내용(33-34절)을 담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14절)는 단 한 말씀으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키신 기적을 보았다. 이 기적사화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기 위한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업적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물러간 다음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세례자 요한을 높이 칭찬하셨다.(24-28절) 예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 크다"(28절)는 말씀으로 세례자 요한을 극찬(極讚)하셨으나,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것이라도 이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밝혀 주셨다. 28절 후반부의 말씀은 예수께서 요한을 너무나 높이 칭찬하셨기에, 그 높이를 조정하려는 복음사가의 의도가 곁들여진 듯한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극찬 뒤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나라의 지고(至高)함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온 백성이 요르단강에 있는 요한에게 와서 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지고(至高)의 하느님나라에 성큼 다가섰으나, 백성의 지도급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다는 것이다.(29-30절) 이들을 두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춤>은 잔치놀이를, <곡-울음>은 장례놀이를 의미한다.(32절) 놀이는 혼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잔치에는 술과 음식과 여흥이 필요하지만, 장례에는 금욕과 절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장례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있으며, 잔치놀이는 혼인잔치에서 신랑의 역의 맡아 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과 어울려 식음(食飮)하시는 예수님에 비유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으니, 결국 장례놀이에도 잔치놀이에도 호응하지 않은 세대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잔치와 장례가 벌어진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잔치만으로도 살 수 없으며, 장례만으로도 살 수 없다. 혼인잔치의 신랑이신 예수께서 더는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잔치는 일단락 되었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장례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떠나가신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에 잔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잔치와 장례가 뒤섞인 세상에 우리는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잔치놀이든 장례놀이든 놀이가 벌어질 때 적극적으로 그 놀이에 참여하고 호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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