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9. 17. 07:16

   2007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거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루가 7,6-7)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Therefore, I did not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to you;
but say the word and let my servant be healed.

 

 

  

 “주님,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백인대장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신다. 군사 백 명을 거느린 위세 당당한 백인대장이었지만 겸허하게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이다

 

☆☆☆

 

 조선 시대 송시열은 제16대 임금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 대군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가 버팁니다. 그러다가 임금이 항복하고 봉림 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초야에 묻힙니다. 훗날 봉림 대군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입니다. 효종은 즉시 송시열을 불렀습니다.
부름을 받은 송시열은 한양으로 가는 길에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포졸 간부가 왔으니 방을 비워 달라는 주인의 애원을 듣게 됩니다. 이에 송시열은 조용히 방을 옮긴 채 태연하게 잠을 잡니다.
송시열의 유고집인 『우암집』에 실린 내용입니다. 익은 벼는 고개가 숙여지지만, 쭉정이는 숙여지지 않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탓입니다. 송시열이 벼라면, 포졸 간부는 쭉정이였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아무나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백인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의 고급 장교입니다. 그러한 그가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는 알맹이가 꽉 찬 사람이었습니다.

 

 

 

   가슴으로 믿기      

-김인한 신부-


 이 지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 지금 이 순간 내 온 존재를
던져 믿음을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많으나
신앙인들은 드물다고 하나 봅니다. ‘믿는다는 생각’과 ‘믿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믿어야겠다는 생각은 진정 하느님을 내 안에 모셔들이지 못해
불안한 상태이고, 믿음은 주님을 내 안에 모셔들임으로써
모든 것을 주님 안에 맡긴 상태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고, 맡긴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하실 때 항상 믿느냐는 질문을 먼저 던지시는데 이 백인 대장은
예수님이 묻기 전에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겐 치유가 먼저고 믿음은 그 나중이지만 백인대장에게는 믿음이 먼저이고
치유가 그 나중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은총이 먼저고 믿음은
그 다음일 때가 있습니다. 은총을 보고 믿거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고
셈하는 얄팍한 믿음이 우리들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고 믿기 때문에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더 이상 믿어야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존재 안에서 주님을 모셔들이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련을 참아내는 힘은 오직 천주님으로부터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얼마 전 당황스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침 식사 당번이 되어 그날은 특별히 맛있는 음식으로 실력을 발휘하리라 마음먹고 주방에 갔습니다. 계란·빵·찰떡을 굽고 죽과 국을 데우기 위해 가스불을 약하게 켜놓고 채소를 씻었습니다. 식탁도 닦고 수저도 놓고 하다가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지금쯤 어느 정도 데워졌으려니 하고 가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떡이 말랑말랑 노릇노릇 익기는커녕 가스대 위에는 싸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불꽃이 이는 것을 보았는데`…. 처음 켤 때 보인 것은 잔여 불꽃이었나 봅니다. 점화된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급해졌습니다. 조금 있으면 모두들 식사하러 올 텐데 큰일났습니다. 그 순간 ‘아차!’ 하고 스쳐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주님께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내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로구나.’ 부랴부랴 가스 집에 전화를 해 배달을 부탁하고 전기 프라이팬을 꺼내 이것저것 서둘러 준비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9월 중순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면서 「103위 성인전」을 통하여 매일 한 분씩 우리 순교 성인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남편(최창흡 베드로)과 딸(최영이 바르바라), 사위(조신철 가롤로)와 함께 성인품에 오른 손소벽 막달레나(1840.`1.`31. 당고개에서 참수)는 옥중에서 주뢰형과 곤장형(260대)으로 살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흐르는 아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내 힘만으로는 벼룩이나 이가 주는 괴로움조차 잠시라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을 참아내는 힘은 오직 천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양승국신부-

 

<인생을 활짝 꽃피어나게 하는 칭찬의 말 한마디>


   소규모 복지시설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아온 아이들이다보니 대체로 공부에 취미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성적표를 들여다볼 때 마다 큰마음을 먹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야지.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어떤 한 아이는 제 성씨가 ‘양가’여서 그런지 늘 ‘양가, 양가’로만 받아오더군요. 또 다른 한 아이 성적표를 받아보니 더 기가 막혔습니다. 아이가 받아온 성적표에는 친절하게도 전교 석차까지 다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600명인 전교생 가운데 꼴찌에서 세 번째인 598등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당시 중간고사에서 1명은 몸이 아파서 시험을 제대로 치루지 않았고, 또 다른 1명은 가출 중이었기에, 실제로는 저희 아이가 꼴찌였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야, 우리 ○○, 이번에는 뒤에 두 명이나 생겼네. 잘 했다. 다음에는 뒤에 좀 더 생기도록 노력해보자.”


   이모한테 이미 많이 혼났었고, 저한테도 단단히 혼 날걸로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칭찬을 들은 아이는 신이 났습니다. 싱글벙글하며 “예! 앞으로 더 많이 생기도록 할게요!”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


   오늘 저녁때의 일입니다. 공부나 다른 것에는 별 취미나 관심이 없는 아이가 한 명 있는 데, 오직 축구시합 때만 눈빛이 완전히 살아나는 아이였습니다.


   아이가 뛰는 포지션에 왼쪽 수비라인인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꽤 터프하게, 그리고 곧잘 상대 공격수들을 막아내곤 했습니다.


   오늘 저녁 축구시합 때도 얼마나 열심히 공을 차는지, 그리고 효과적으로 상대 공격을 차단해내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기특해서 시합이 끝나고 제가 그랬습니다.


   “야, 우리 ○○, 프리미어리그 최고 수비수인 이영표 선수 저리 가라인데! 오늘 정말 대단했어!”


   아이는 제 칭찬의 말 한마디에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입이 찢어져 귀까지 올라갈 정도였습니다.


   돈보스코의 예방교육 방법 안에 아주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교육방법이 칭찬과 격려입니다. 돈보스코는 교사들에게 자주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들이 담당한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품을 가르쳐드릴까요?”


   “값나가는 선물도 아이들이 좋아하겠지요. 맛있는 케이크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상품이 있습니다. 바로 칭찬입니다. 모범적인 아이가 있으면 가끔 이렇게 이야기해보십시오. ‘나는 네가 아주 만족스럽다. 네가 얼마나 모범적인 학생인지 부모님께 말씀드리겠다.’ 이런 칭찬의 말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탁월한 효과를 나타내는지 잘 보게 될 것입니다.”


   칭찬이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그 칭찬은 상대방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될 것입니다.


   칭찬은 받는 아이의 마음을 넓혀주고, 마음속에서 새로운 불꽃이 솟아오르게 하며, 열정과 기쁨의 풍토를 마련해줍니다.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다들 칭찬을 좋아합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기울인 노력과 작은 성공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칭찬은 사람들의 인생을 활짝 꽃피어나게 해주는 아주 좋은 도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백인대장에게 칭찬이란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백인대장은 가파르나움에 살고 있던 로마 주둔군의 지휘관으로 추정됩니다. 이 백인대장은 가파르나움에 유다인 회당을 건립하는데 도움을 줄 정도로 유다인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백인대장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시며, 이 세상 모든 병고나 죽음마저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백인대장은 이미 훌륭한 신앙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또한 백인대장의 인간성이나 성품은 얼마나 탁월했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주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였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가족, 친지가 아니라 자신의 종의 병을 치유시켜달라고 간절히 예수님께 청하는 백인대장입니다.


   사실 하인의 병, 그냥 안됐군,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인대장은 자기 휘하에 있는 부하나 종에 대한 배려가 극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대장은 대단한 겸손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신다는 것을 무척이나 송구스럽게 생각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백인대장은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그리고 전지전능하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제반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A급 칭찬을 통해 그가 인간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신앙 안에서도 한 단계 더 성숙하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잘 들어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A급 칭찬을 받은 백인대장의 신앙과 삶은 더욱 비약적인 성정을 거듭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    

최혜영 수녀-

저희가 미사를 드리며 성체를 모시기 전 매번 고백하는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라”는 말씀은 로마인 백인대장의 말에서 온 것입니다. 로마병사 백 명을 통솔하는 이방인에게서 이런 믿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감탄하셨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로마인은 유다인과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었지만, 로마인 백인대장 개인으로는 그 누구보다 신실한 마음과 따뜻한 인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 전쟁의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 보시기엔 귀중한 자녀일진대, 소수 인간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구조적인 악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인위적으로 적을 만들어 원수지간이 되도록 부추깁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은 이러한 악의 구조를 파헤치고 인간의 선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김경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목숨 바쳐 주님을 증거한 우리 순교자들을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200여년 전 그 시대, 학문을 통해 알게 된 복음 진리를 신부님이 한 분도 계시지 않은 열악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잠시 지나가는 현세의 삶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에 더 확신을 가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자기 자신이 생명의 주인인 양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고, 물질을 많이 가진 자가 힘있는 자이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은 이 세상은 잠시 살다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명예와 물질,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 아버지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어떤 이는 하느님을 믿어 순교자가 되고, 어떤 이는 배교자가 되었는데 이분들의 차이점은 기도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순교자들은 늘 기도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 산골짜기를 찾아 숨어 살면서도 기도하시고, 감옥에서도 기도하시고, 매를 맞으면서도 기도하시고, 굶어 죽어가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만이 저의 전부이십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죽을 각오를 고백드리자 이분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며, 고통이 영광이 되고, 죽음이 새 삶이 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주님의 제자들이 죽음으로 교회의 기초가 되신 것처럼 한국교회도 순교자들의 피땀으로 기초를 놓은 교회입니다. 뿌리가 튼튼합니다. 선조들이 눈물과 피땀으로 뿌려놓은 신앙의 씨앗을 우리가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핏속에는 순교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순교정신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여야 합니다.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이회진-

 

 얼마 전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지난 1월의 전라도 어떤 지역의 군수 후보 부인이 교회에 1억을 기부했는데

그것이 5월 지방 선거를 위한 정략적인 헌금이었다며

검찰이 후보 부인을 선거법 위한 협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것입니다.


후보 부인측은 단순히 교회에 무기명으로 헌금한 것이라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검찰 쪽은 평소에는 100만 원정도 이던 헌금이

선거를 앞두고 1억 원이라는 거액이 기부되었다는 것은

선거를 염두에 둔 것이고 일반적인 교회 헌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조사가 진행 중이라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씁쓸한 것은

2000년 전 예수님이 살던 시대의 유다인들이나 오늘날 신앙을 지닌 이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이리 가십시오. 저리 가십시오.” 하며 움직이려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움직이는 힘은 다른데 있습니다.

로마 백인대장에 요청을 받은 유다인 원로들이 예수님을 백인대장의 집으로 모시려고 할 때

유다인 원로들은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이유가

백인대장이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지만,

예수님이 그곳에 가는 이유는

자기 노예를 소중히 여기며 살려 달라 청하는 사랑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불러내는 힘도 역시 다른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 다른 이들을 “이리 가라, 저리 가라”하고 부리지만

그것이 사람의 생명까지 살리지는 못합니다.


생명은 사람은 목숨에 관계된 것이긴 하지만

신앙 안에서 보면 믿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며

서로 살게 하고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하느님의 힘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서로를 위해 살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먼저 그것은 백인대장이 자기 노예에게 보였던 것처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당신에 대한 신뢰”,  즉 겸손한 믿음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우리의 사랑은 때로

너무 이기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죠.


겸손한 믿음은 자신의 지위나 힘을 통해 예수님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믿음은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감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더 이상 자기만의 소유물이나 자신만의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것이기에 믿음 안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곳이고,

이 새로운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살리는 마음들이

생명을 새롭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기에 예수님의 기적을 불러내는 힘은 우리의 지위와 힘이 아닌 정작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아끼는 사랑의 마음과 그분께 대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우리의 필요에 응답해 주시기 위해

이미 그곳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한 얼굴 마담도 아니고,

예수님을 움직이는 힘이 사람의 신분이나 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데도

오늘날의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풍요 앞에 내세우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백인대장의 겸손한 고백은 우리가 서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우리의 지붕 아래 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지붕 아래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주님, 저를 당신 크신 팔로 둘러 주소서. 아멘.”

 

 

 '축복을 받는 백인대장'

-홍성만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어떤 백인대장이 소중히 여기는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의 끝 부분에서는, 그 노예가 건강해졌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시간적으로는 길게 잡아 불과 두 시간 정도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백인대장이나 병자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생명에로 가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 이 변화의 한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위계 제도의 엄격한 질서 속에 사는 백인대장, 그의 위치는 대단합니다. 노예란 그에게 있어서 별로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한 노예를 위해, 유다인의 원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 간청하게 합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백인대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서 예수님께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십니다. 백인대자의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룁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명령이 곧 현실이 되는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살아온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모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마침내 주님을 모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습니다.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도 못합니다.

 

엄격한 위계질서의 정신을 뿌리로 한 겸손, 하찮아 보이는 노예를 위한 지극한 배려, 원로 유다인으로부터 사랑은 받는 이방인인 백인대장,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그 위에 축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축복을 받는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믿음의 토양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겸손

-이수철신부-



인간(homo)과 겸손(humilitas)은 똑같이 흙(humus)에

어원을 두고 있다합니다.


흙같이 겸손해야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침저녁 산책 때마다 바라보는 잘 정돈된 기름 진 밭

무럭무럭 자라나는 배추들, 저에겐 큰 기쁨입니다.

 

바라볼 때 마다 없는 평화를 느낍니다.

묵묵히 생명을 길러내는 밭의 흙, 겸손의 말없는 스승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겸손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의 토양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겸손입니다.
믿음의 진정성은 겸손을 보면 금방 확인됩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들, 한결같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모습에서도 믿음과 겸손의 깊은 상관관계가

잘 들어나고 있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겸손이 가득 배어있는 백인대장의 말에 감동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겸손을 통해 드러나는 심중의 믿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감탄하신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 덕이 겸손이라 합니다.

믿음과 함께 가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이 비록 공부는 짧았지만, 성서를 체험으로 꿰뚫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믿음과 겸손의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성서의 진리가 아니라, 체험으로,

믿음과 겸손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성서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은 곧장 응답되어

백인대장의 종은 건강해졌다 합니다.

 

이런 면에서 미사경문 중 영성체전 백인대장의 고백을

재현하는 다음기도는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진정 백부장처럼, 내 믿음과 겸손을 다해 간절히 고백하며

말씀과 더불어 성체를 모신다면 웬만한 영육의 상처나 병은

치유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도 교회의 잘못된

주님 성찬 거행을 지적하며 주님의 말씀을 통해 개선을 촉구하십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 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

겸손과 온유의 행적을 기억하여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신다면

결코 가난한 형제들을 차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의 믿음과 겸손을

깊이 해 주십니다.

 

아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카 7, 1-10) 이야기의 주인공은 로마의 백부장 즉,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100인 대장이다. 로마 군대에서 백부장이란, 일반 서민의 신분이 아니었으며, 로마 군대에 중추적인 역활을 하는 사람이다. 역사가 폴라비우스가 백부장의 자격에 대해서 쓴 바를 보면,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 들어서도 아니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사나이 중에 사나이였다고 하겠다.

그 백부장은 자기 종에 대해서 대단히 자비심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로마 법률에 의해서 볼 때 "종"이란 살아있는 도구로 취급되어, 주인은 그를 학대할 수 있었으며, 원한다면 주인은 그를 죽이기까지 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어 일을 할 수 가 없으면 밖에 내어버려 죽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태도는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종을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치루려는 태도였다. 그래서 이방인인 예수께 간청하려 나온 것이다. "이방인인 예수께 간청한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듣기에는 별 이상할 것 없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신앙 안에서 죄인시하는 생각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이상하게도 그 백부장은 인간적인 관례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회당을 지어줄 만큼 야훼 하느님께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백부장이었다. 그는 독실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믿음은 눈에 보이고, 자기가 하는 일 속에 하고 있고, 이루어지는 일에 근거를 두고 시작해서 하느님께로 이르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다. 즉, 삶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하느님께 이르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사용할 때, 따라오는 결과가 있다면, 하물며 예수님이 당신 권위를 사용하신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고 고백한 그였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하는 겸손한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이러한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시며, 그의 소청을 들어 주셨던 것이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자는 친구를 얻으나, 교만한 자는 친구도 멀어집니다. 겸손한 자는 비록 적이라 하더라도 친구가 될 수 있으나, 교만한 자는 아군이라도 적처럼 경계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어떠한지 오늘 복음의 말씀 앞에 다시 한번 생각해 봄이 좋겠다.

 

 역사에 길이 남을 신앙고백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신앙이 고백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미사 예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체를 모시기 전에 우리가 드리는 기도이지요. 중요한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영성체 전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원전이 바로 오늘 복음 내용이지요.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7,6-7)

바로 백인대장의 이 고백이 성체를 모시기에 앞서서 우리가 하는 기도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감탄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7,9)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시지요. 백인대장이란 로마 군인으로서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린 장교를 말합니다. 당연히 힘과 권력이 주어지고 특히 지배 민족으로서의 오만함이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는 겸손과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감탄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훌륭한 믿음과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유다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아픈 종을 살려 주십사고 간청하게 하자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루카7,4-5)

이렇게 설명하는 것으로 봐서 그들은 백인대장을 식민지의 치안을 담당하던 지배국의 장교로서가 아니라 훌륭한 인품과 겸손을 지닌 인격자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 사이에서까지 좋은 평판을 듣고 우호적이었던 이 백인대장에게 어려움이 생깁니다. 대단히 아끼던 종 하나가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제까지의 그의 평판이 결코 풍문이 아니었음이 드러나지요.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7,6-7)하고 전갈을 보냅니다. 본인이 몸소 예수님을 찾아오지 못한 것이 귀찮아서거나 백인대장이라는 신분의 위엄을 차리기 위해서라거나, 또는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하찮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님이 확연히 드러나지요. 그는 주님을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평판 못지않게 겸손하고 신실한 그의 삶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 인품에 감탄하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그 겸손과 믿음에 상응하는 결과를 보여주시는 것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놀랄 만한 믿음이고 놀랄 만한 겸손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관광객이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구경을 하다가 목이 말라 폭포의 물을 떠서 맛있게 마셨습니다. ?’아, 물맛 좋네!?“하고 걸어나오던 그는 폭포 옆에 ??포이즌?‘(POISON)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보았지요. 자신도 모르게 독 성분이 든 물을 마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습니다. 창자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지요. 그는 동료들과 함께 급히 병원에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전해들은 의사는 껄껄 웃으면서 ?’포이즌은 영어로는 ??독?‘이지만 프랑스어로는 ??낚시금시?‘란 말입니다. 별 이상이 없을 테니 돌아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의사의 이 말 한 마디에 그렇게 아프던 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음은 물론이지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다스리고 지배하지요. 신앙도 몸과 마음 전체로 드러내야 합니다. 마음과 몸이 따로따로 움직인다면 바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지요. 저는 요즘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을 찾아뵙고 식사를 대접해 드립니다. 식당에 모시고 가면 부모님께서는 제가 돈 쓰는 것이 염려가 되어 항상 싼 가격의 음식만을 고집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한사코 제일 좋은 것으로 대접해 드립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정말 부모님을 존경하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집에서 최고의 것을 대접해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을 모신다고 하면서 ?’소탈하셔서 간소하게 차렸습니다.?“하고 성의 없는 식탁을 은근히 변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린 사람이 소탈하다고 하면 이것은 박대입니다. 예의에 어긋난 처사이지요. 초대한 주인은 자신의 처지에서 정성을 다하고 찾아온 손님은 그 성의에 감사하며 함께 기쁘게 나누는 모습에서 정(精)과 성(誠)이 오가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삶의 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얼렁뚱땅 겉모습으로만 얄팍하게 살아가는 사람과는 격이 다르지요. 준비하고 정성을 다하는 만큼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무금이나 헌금, 심지어는 미사를 청하는 신자들의 모습에서도 믿음의 정도가 묻어납니다. 미사 예물 봉투 하나 하나까지도 저는 유심히 바라봅니다. 정말 정성을 다해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성으로 성의 없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지요. 참으로 하느님을 영원한 분,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모신다면 목욕 재계 등 성심 성의껏 갖추고 최고의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의 진실된 흠숭이 없다면 겉으로 아무리 떠들어봤자 헛된 몸짓일 뿐이지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귀한 사람은 귀한 사람으로서, 어른은 어른으로서 대하는 정성과 예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고 우리 삶은 좀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마음을 다해 최고의 정성을 기울이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을 다해 준비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이 그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께 최고의 예를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그 이상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예와 정
성과 믿음과 신뢰와 감사가 꽉 찬 마음을 담은 태도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숨은 염원까지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마음의 되새김

-조성풍 신부 -

오늘 복음을 통해 자신의 종을 무척이나 아끼는 백인대장을 만납니다. 자신의 아랫사람에 대한 백인대장의 따뜻하고도 겸손한 마음은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마음이겠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이 예수께 아뢰고 있는 이 말은 어디선가 많이 귀에 익은 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미사 중에 영성체를 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고백하는 말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우리 각자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주님의 집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심을, 함께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미사 중에 사제에 의해 예수님의 몸이 높이 들려졌을 때, 예수님의 몸을 바라보며 그런 자신의 고백과 결심, 그리고 청원의 마음을 모아 백인대장의 외침을 외쳤으면 합니다.

 


 

  生老病死의 고뇌 앞에서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거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강영구신부-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입니다.
태어나고 싶어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배운 것이 많아도, 높은 지위에서 권세를 누리는 사람도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苦惱)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입니다.
떠돌이 랍비 예수님 앞에 권력자인 로마군인 백인대장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눈 밝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끼는 종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만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통치권자로서 그가 지닌 지위와 권력은 물론, 돈과 재물도 무력하기만 합니다.
자신의 무능과 무력을 깨달은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손길이 떠돌이 랍비 나자렛 사람 예수를 통해서 펼쳐지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대자비(大慈悲)의 손길을 붙잡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낮춥니다.
병들어 죽어가던 종은 백인대장의 비움과 겸손의 덕을 톡톡히 봅니다.

명색이 사제(司祭)인 제 모습은 믿음의 사람 백인대장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도 저 때문에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낫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때문에 고통의 질곡에서 환한 기쁨의 세계로 건너왔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백인대장은 구도(求道)의 길에 더욱 정진(精進)하라는 채찍입니다.(一明)

마산교구 

 

 

 † 이방인에게서 한 수 배운다.

-박상대신부-



예수께서는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따로 선발하셨고(6,12-16), 산을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거기에 모여든 모든 병자들과 악령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고쳐 주셨으며(6,17-19), 제자들을 포함한 그들 모두에게 황금률과 원수사랑을 골자로 한 소위 평지설교(6,20-49)를 들려주셨다. 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오늘은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이방인 백인대장의 놀라운 믿음에 감탄하시고, 중병으로 거의 죽게 된 그의 종을 고쳐주셨다. 백인대장의 놀라운 믿음과 그의 종에 관한 치유사화는 마태오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발견된다.(마태 8,5-13; 요한 4,43-54) 그냥 넘어 갈 수도 있겠지만, 세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사건을 가지고 제각기 달리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오는 10가지 기적사화를 모아 놓은 기적사화집성문(8-9장) 안에서 두 번째 기적으로 이를 다루고 있으며, 요한은 자기 복음서의 첫 번째 기적사건인 가나 혼인잔치기적(2,1-12)에 이어 두 번째 기적으로 이를 전하고 있다. 요한은 고관이라 하는데 마태오와 루가의 백인대장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백인대장이라 함은 통상 로마제국의 군사편제에 따라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와 역할을 행사하는 백부장을 뜻한다. 희랍어 성서 원문에는 서민출신이 아닌 ‘왕궁의 관리’로 표기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는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 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 들어서도 안 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격을 서술하고 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게다가 자기 종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루가는 이 백인대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여 회당까지 지어준 그런 사람이라고 덧붙였다.(5절)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 백인대장을 로마군대의 고위 관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헤로데 안티파스 군대의 이방인 백부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이 기적사화를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장소가 헤로데 안티파스의 관할구역인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기 때문이다.

세 복음서의 비교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마태오복음에는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를 찾아와 종의 치유를 위한 자비를 청하고, 요한복음은 고관이 직접 와서 병으로 죽어가는 자기 아들의 치유를 정하고 있는 반면, 루가복음에는 백인대장이 먼저 유대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종의 치유를 간청하게 한 점이다.

유대인 원로들은 백인대장이 회당까지 지어 줄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소개한다. 이에 도와 줄 마음을 먹은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이번에는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시켜 예수님의 직접 왕림(枉臨)의 수고로움을 사양하고 그저 치유의 한 말씀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7절 참조) 이 기도문은 온 세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중 영성체 예식 직전에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는 외침에 응답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이방인의 믿음에서 한 수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인가? 오늘날 이 같은 믿음은 외교인에게서보다 우리에게서 먼저 발견되어야 하리라. 아울러 루가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자신이 늘 강조하는 기도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기도란 하느님께 직접 드릴 수도 있지만, 백인대장이 예수께 유대인 원로들과 친구들을 통하여 자신의 바람을 전해 드렸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 또는 성인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전구(轉求)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고통 받고 역경에 처해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