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Margaret K 2007. 9. 16. 00:40

   2007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1-32)

 

There will be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ople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유산이 있는 한 사람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에게 기꺼이 유산을 내준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실패를 경험할 때 하느님을 더욱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이라면 누구나 사랑으로 받아 주신다

 

☆☆☆

 

 인간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건강할 때에는 그 고마움을 모르는 채 늘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가진 게 많고 젊을수록 이러한 생각을 뛰어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해집니다. 재물과 젊음이 늘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총뿐입니다. 혹독한 시련과 함께 오는 은총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전형적인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날린 작은아들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참으로 당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녀석아 그게 네 것이냐? 유산을 달라니, 그러면 내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이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으나 아무런 대꾸 없이 유산을 내줍니다. 그리고 유산이 작은아들에게 남아 있는 한, 그가 사람 되기는 힘들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채 흥청망청 유산을 다 날리고 맙니다. 쉽게 얻은 재물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차디찬 세상을 체험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허무와 외로움이 그를 왜소하게 만들고, 절망과 고통이 그를 어린이의 심정으로 되돌려 놓았던 것입니다. 시련이 은총으로 바뀌었습니다.

 

 

 

   약함     

-김인한 신부-


 사제가 되어 첫 소임지에 갔을 때 누구에게나 사목 잘하는 신부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만 같았고 자신감이 넘쳐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 젊음과 힘과 능력을 믿었던 것이지요. 탕자의 말처럼 재산만 나누어주신다면,
주님이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제 힘만 믿었습니다. 그러나 넘어지는 시간이 늘어가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의 약함을 절감하게 되면서 내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모든 것을 걸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작은아들의
잘못은 방탕한 삶을 살았던 데에 있기보다 자신의 능력, 그리고 아버지가
나누어준 재산이면 다 된다라는 생각과 믿음으로 세상을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왜 죄인들,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이라는 것이 보잘것없음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자기의 것, 자기의 힘, 자기의 교만을 포기하는 날,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비롭지 못한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옳게 판단하고 옳게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는 하느님처럼
자비롭지 못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만날 때 비로소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른 이를 내 품 안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넓은 품을 우리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노랫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 자주 흥얼대던 '탕자처럼'이란 제목의 복음성가 가락이 떠올랐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다."

당신께로 발길을 돌릴 때마다 단 한번도 내치지 않으셨던 그분은 진정 자비의 주님이셨습니다. 당신께 하소연할 때마다 조용히 제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던 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시던 그분은 진정 연민의 주님이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못할 짓을 했어도 기다려주셨던 주님, 제가 아무리 거스르는 짓을 했어도 눈감아 주셨던 그분은 진정 인내의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주님을 두고 너무도 자주 한눈을 팔고, 딴길을 갔었던 지난날들을 다시 한번 뉘우칩니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 하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아들이 보였던 행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될 행동, 어처구니없는 행동, 한마디로 막가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회에서도 '유산'이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 고려하는 것이 기본 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작은 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몫의 유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갑니다.

이 말은 이제 '당신은 당신, 나는 나'란 말과도 같습니다. 결국 남남이 되었다는 말, 부자간 인연을 끊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작은 아들이 떠나간 후 남은 아버지가 느꼈던 심정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참담함'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짐'이었겠지요.

완전히 '맛이 간' 작은 아들이었기에 챙겨온 거금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수중에 땡전 한푼 남지 않게 되었을 때야 작은 아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각합니다. 타향에서 알거지가 된 작은 아들은 너무도 배가 고픈 나머지 돼지들이나 먹는 '짬밥'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부끄럼을 무릅쓰고 아버지께로 발길을 돌립니다.

회개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정말 정도(正道)를 걸어야겠다는 굳은 결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우리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진정 수치스럽고 면목 없는 일이겠지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회개의 가장 본질적 요소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는 일이 아니라 태초부터 주의깊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향해 우리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눈길에 우리 시선을 맞추는 일입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 얼굴, 악에 기울었던 우리 마음을 다시 한번 아버지 쪽으로 돌리는 일이 바로 회개의 핵심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했던 일차 목표는 다분히 표면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굶어죽는 것은 시간문제이겠구나.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좀 많았던가? 빨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지내면서 우선 이 지긋지긋한 배고픔에서 벗어나자"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이때까지 작은 아들은 회개의 순간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작은 아들의 회개가 시작되었습니까?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제나 저제나 작은 아들이 돌아올까 목을 쭉 빼고 기다리다가 멀리서 작은 아들이 힘 없이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둘째 아들은 회개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참된 회개는 우리가 정확한 하느님 모습, 자비 충만한 하느님 아버지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됩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회개를 시작합니다.

이 은총의 가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가득한 눈길에 우리 시선을 고정시키는 은혜로운 나날 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복음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며 찬미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는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행위였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들이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기까지’ 하신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 아름다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어떤 전례행위나 법적 실천 또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실천적 행동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실질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지 그분을 식사에 초대하는 세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죄인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구원이 제시되고 있다. 비유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가 단죄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의 잘못과 배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순 제4주일에 보았기 때문에 앞의 두 비유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자.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의로운 사람들’보다 죄인들에게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구약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한다(에제 34,1-31; 예레 23,1-6 참조). 여기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기쁨’의 의미가 강하다. 단지 목자의 기쁨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커진 기쁨이 애타게 찾으려 할 때에 생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게 한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보면, 형이 화를 내고 우울해 하는 대신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32절) 하신다.

즉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7절) 기쁨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굳어지게 한 역설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하느님의 논리이다. 이 기쁨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함에 있어서 극복해야할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성취되는 기쁨이다. 여기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된 의(義)를 빗대어하신 말씀이다.

이 기쁨의 의미는 두 번째 비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난한 여자가 조금씩 돈을 모아 은전 열 닢을 마련하였다. 은전 한 닢은 농부의 하루 품팔이에 해당하는 돈이다.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에는 얼마나 기쁨이 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한낮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창문이 없고 출입문은 낮아서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가난한 집을 연상케 한다. 등불까지도 그 여자의 기쁨을 더더욱 들뜨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내용(마르 1,15)을 ‘복음’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라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관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교회라고 하는 집안에 사랑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문을 두드리는 모든 형제들을 기꺼이 맞아들임으로써, 그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다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기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간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1절) 애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나약한 인간

-안동교구 권용오 마티아 신부-


지난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으며, 현재 시성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마더 데레사께서 생전에 몇몇 사제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하느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이 매스컴에 잠깐 화제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일생을 바친 거룩한 수도자였습니다. 인도의 켈커타 거리에서 짐승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아 극진히 간호하며 마지막 임종을 도와주는 일을 시작으로 극빈자들을 위한 봉사에 일생을 바치면서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 주셨던 마더 데레사는 이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해 볼 마음을 갖지 못했던 임종자들을 위한 희생적 봉사에 헌신하는 마더 데레사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케 하여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개된 편지에서 정작 자신은 하느님 체험을 느낄 수 없는 내면의 어둠으로 고통 받으며 신앙의 갈등을 겪었음을 고백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 교회 내부에서는 마더 데레사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서 나약한 한 인간임을 드러낸 것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갈등 속에서도 사랑의 실천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삶은 그만큼 깊은 믿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합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해 온 사람들은 이것을 하느님 부재를 증명하는 자료라고 주장하면서 마더 데레사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하느님 때문에 인생을 망친 피해자라고까지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내면에 일어난 신앙의 어둠에 대해 그것을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까지 나왔지만 결국 하느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드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시나이산에 머무는 동안 남아있던 백성들은 더 이상 감각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불안한 마음을 없애려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지금까지 그들을 이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부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통제할 수 없는 하느님 대신에 통제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을 대체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이런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탕자의 비유도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과 그 욕망이 가져오는 파국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탕자는 외견상 독립된 삶의 추구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 듯하지만, 사실상 아버지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재산을 차가운 돈으로 모두 바꾸어버림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며, 이런 단절이 그에게는 불행의 시작입니다. 전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떠난 탕자가 찾아간 곳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었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탕자는 자신이 선택한 삶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운명은 갈라집니다. 이스라엘백성이나 탕자처럼 자신의 나약함을 부정하려할 때 불행은 시작되며, 내면의 어둠을 안고도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마더 데레사처럼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파님 - 얼굴


책을 읽다가 문득 히브리어로 ‘얼굴’이 ‘파님’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원이 죄 많은 인간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용서와 자비, 사랑의 얼굴을 돌리신다는 뜻임을 알았을 때, 진정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옛 시인의 노래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 5)
인간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으면 모든 창조가 끝나고 마지막 창조물인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 하셨을까?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비로소 “참 좋았다”(창세 1, 31) 하셨을까?

그렇게 좋으셨던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때에는 인간이 짓는 죄에 노여워하시며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 6)고 하셨지만 이 또한 인간을 영영 내치지 않으시려는 하느님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같이 아름다운 단어인 ‘파님’을 생각 하다가 ‘파’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것은, 우리 한국 음식에 파가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쪽파든 실파든 대파든 양파든 말입니다. 그렇게 먹는 파 뒤에 존칭어 ‘님’을 붙이면 하느님의 얼굴이 된다? 참으로 신비로운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식사 중에 하느님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거듭 짓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 ‘파님’의 얼굴을 보이시는데, 나는 나에게 상처를 끼쳤다고,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나에게 약간의 손해를 끼쳤다고 “그깟 놈 얼굴 다시는 보나 봐라” 하는 식으로 얼굴과 등을 돌리는 경우가 없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용서하지 않고 주님의 용서를 바란다면 그것은 억측에 불과합니다. 회개하는 나를 사랑과 용서의 얼굴로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생각한다면 나 또한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의 가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며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이렇게까지 잘라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 7)

때문에 이렇듯 용서를 받은 우리 역시 용서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 3)

돌아가야 할 곳


코헬렛의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 5; 7)

회개란 “되돌아간다”입니다. 이제껏 걸어 왔던 그릇된 길을 돌아 선의 길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 하느님을 떠나 왔던 길을 돌아 하느님 품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 세상에 미련을 두고 온갖 세상일에 파묻혀 살았다면 이제는 천상의 집을 목표로 되돌아가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목숨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분명 우리가 영원히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되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신앙인입니다. 때문에 죽은 망자를 일컬어 “돌아가셨다”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행복은 분명 회개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복음의 탕자 역시 자신의 죄를 뉘우쳐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갔기에 비로소 자신의 집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같은 회개가 있을 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과거의 어떤 것도 질책하시거나 묻지 않으시고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 24)

그리고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가장 좋으신 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은 늘 팔을 벌려 우리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 같은 희망의 하느님께서 내 곁에 계시기에, 하루하루를 그분께 의탁하며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희망에 반대되는 낙담, 실망, 절망, 회의, 분노, 포기, 우울함 등에 하느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령을 슬프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빌라의 대 테레사 성녀께서는,“가장 위험한 병은 정신을 하느님께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바로 그 약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언제든 우리가 회개하여 돌아서면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무나 자비로우신 하느님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복음을 전하러 나가면 가끔 이렇게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고, 저 같은 사람이 성당에 나가면 남들이 손가락질합니다. 성당이 욕을 먹는다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가 많은 사람이나 남의 구설수에 오를 만한 사람들은 성당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리, 창녀, 문둥병자, 죄인들은 물론 자연재해나 질병에 의해 다치거나 실명한 사람들까지도 하느님께 천벌을 받은 부정한 자들로 여기고 공동체에서 격리시켜야 하며 사소한 접촉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회 통념의 굴레에 갇혀 고통받고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예수님 소문은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그야말로 복된 말씀이었습니다. 절망 중에 신음하던 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안고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그들은 부정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을 가르치려 듭니다. 군중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며 예수님께도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하던 이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어 하느님 사랑을 가르치고 계시는 현장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 버렸다면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도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 들판을 찾아 헤맬 것이고 마침내 찾게 되면 무엇보다도 기뻐할 것이라는 비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에서도 은전 아홉 개가 주는 기쁨도 크지만 잃어버린 한 닢을 찾게 되면 얼마나 기쁨이 크겠느냐며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 할 것이다"(마태 15,7)고 거듭 죄인의 회개를 강조하시더니 세 번째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중의 하나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풍족한 아버지의 집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행복하게 자라난 둘째 아들은 세상의 환락과 재미에 마음을 뺏겨 떼를 써서 집을 나갑니다.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아버지께 졸라서 먼 고장으로 떠나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지요. 재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교만하고 건방진 씀씀이에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가고, 그는 결국 빈털터리 외톨이가 되어 냉정한 인간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굶주리던 그는 돼지 밥으로라도 배를 채워보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지요.
 
방탕했던 아들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고통을 체험하고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 자기 발로 떠났던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많은 생각으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향해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밤낮 없이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먼저 아들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아들의 목을 끌어안았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하인으로라도 써 달라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라고 명령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아버지는 회개하여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이며 동네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품고 살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고 들으면서도 죽어도 용서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들과는 함께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되는 이웃이 있다면 여러분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름없이 예수님을 거스르는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강조해 말씀하셨듯이 우리 역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씻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함은 물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듯이 우리도 자비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기쁨입니다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청소년 상담학을 공부할 때 강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처음 가출하려고 마음을 정한 청소년들은 밖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밤늦게 집 근처를 배회하면서 자기 집에 불이 켜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본다고 합니다. 불이 켜져 있으면 집으로 돌아오고, 꺼져 있으면 가출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켜 있는 불빛에서 자신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부모, 형제자매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5,1-32)에서 나오는 작은아들의 생각과 마음은 모두 바깥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졸라서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물려받아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가지고 간 모든 재산을 흥청망청 모두 탕진하자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고장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돼지들이 먹는 꼬투리 열매로라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작은아들은 정신이 난 것입니다. 외부로 나가 있는 삶의 방향이 이제 자기 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는 갈등의 한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성취를 하면 변하거나 자신을 살펴야 할 이유를 잘 찾지 못합니다. 또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고생을 하며, 양심의 가책을 경험하고, 굴욕을 겪음으로써 변화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갈등 안에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일방적이었던 태도에서 반대의 입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의 모습 중에서 전혀 보지 못하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자신을 다른 방향에서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갈등이 변화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갈등을 통해서 이루어진 회개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합니다.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작은아들은 느낀 것입니다.

이런 회개의 체험은 세상과 이웃 사람에 대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리코의 자캐오는 회개한 후 단절되었던 이웃과 화해를 합니다. 그 징표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루카 19,1-10). 회개를 통하여 그는 기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기쁨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개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양 한 마리를 잃고 그것을 되찾아서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은전 한 닢을 잃고 되찾아서 기뻐하는 여인의 비유,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을 영접하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것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음식까지 나눈다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처신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비웃고 비난하였습니다. 그 비난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에까지 몰고 갔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사람을 죄인과 동일시하던 그들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목자,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분개할 여건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여인은 잃어버린 은전을,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잃었던 것을 되찾아서 기뻐합니다. 겪은 아픔에 대한 원망이나 보복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은 잃었던 죄인을 되찾아서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우리는 오늘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떠나갔습니다. 유산을 취하고 아버지를 버린 것입니다. 패륜의 시작입니다. 그 아들은 재산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렸고, 받은 유산은 결국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재산이 없어지자 그는 모든 사람의 냉소를 받으면서 굶주려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굶주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후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줍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말합니다.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자기를 배신한 아들에 대한 울분도, 탕진한 재산에 대한 추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되찾은 것이 기쁘기만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이것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사람을 단죄하고 그 죄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원칙입니다. 착한 사람 상 받고 악한 사람 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원칙입니다. 인간 사회는 이 원칙을 바탕으로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교육기관은 성적과 품행이 좋은 사람을 택하고 나쁜 학생을 버립니다. 우리는 운동시합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입상하지 못한 선수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사회에서 격리시킵니다.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질서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을 생각할 때도 그분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버림과 벌을 받는다고 상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라 그 벌은 더 철저할 것이라 상상합니다. 예수님에게 항의하는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파와 율사도 그런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비롯해서 율법을 못 지키는 사람들, 성전이 요구하는 제물봉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에 걸린 사람들, 곧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 비유들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실 뿐 아니라 되찾아서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완성된 세상을 만드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그 기원이 설명되는 세상이고, 하느님에게로 나가면서 완성되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완성시키는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 완성되는 세상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자식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창조하셨다는 말이고, 인간은 온 땅에 퍼져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지닌 사명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이를 비롯해서 고통당하고 불행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그런 불행들은 퇴치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상선벌악을 원칙으로 삼지 않고,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측은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들 안에 살아 계시면서 온 땅을 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어디서나 우리가 그 측은히 여기심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상선벌악의 좁은 벽을 헐고 측은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넓은 세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기 동생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상선벌악의 좁은 벽 안에 갇혀 있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측은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같이 외치는 거리의 선교사들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세상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하느님의 측은히 여기심을 온 땅에 실천하겠다는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열손가락을 깨물어라.

-박상대 신부-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 없다.”고 했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 한결같다는 뜻이다. 1920년경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살았던 막스 켄달의 열 손가락이 모두 엄지였다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통상 사람의 열 손가락은 각각 다른 손가락이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등 손가락 각각의 모양과 기능이 다양하듯이 자식들도 매 한가지다. 부모의 마음에 들어 자랑이 되는 자식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의 속을 있는 대로 다 썩히고 끓이는 자식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은 한결같으며, 오히려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주면서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베푼다. 오늘 전례의 제1독서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다.(출애 32,7-14)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로부터 계약의 판을 받으려 할 때,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불충을 저질렀다. 그러나 모세의 간곡한 애원을 들어 하느님께서는 분노와 재앙을 거두셨다. 사실 모세의 애원보다는 하느님 자신이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백성들 모두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 아니다. 제2독서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했던 죄인 중에 큰 죄인인 사울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사도로 삼으셨다.(1디모 1,12-17) 오늘 복음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세리와 죄인들에게도 그분은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신다.

루가복음 15장은 복음사가 고유의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복음으로서 세 가지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4-7절; 마태 18,12-14),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여인의 비유(8-10절), 그리고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11-32절)가 그것이다. 세 비유는 이렇게 잃은 것을 되찾고 되찾은 것에 대하여 크게 기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들을 말씀하신 이유는 잃어버린 것에 비유될 수 있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 말씀의 청자(聽者)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유의 내적 의도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과 종교의 윤리성과 순수성을 구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고, 이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는 자체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1-3절)

누구나 무엇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만사를 제쳐두고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찾지 못하면 밤잠을 설치기도 했을 것이다. 또는 집을 나간 자식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고, 외도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제자리에 돌아오도록 기원하며 속을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만백성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마찬가지다. 하느님도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잔칫상이 꽉 차기를 바라신다.(14,23)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아있다. 100마리의 양 중에 99마리가 왔다 해도, 은전 10개중에 1개가 모자란다 해도, 비록 아들이 자신의 권리를 내세워 유산을 챙겨 떠나갔다 하더라도, 그 잃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찾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실 뿐 아니라, 이참에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을 고치자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잃은 양 한 마리이고, 잃은 은전 하나이며, 자신의 힘과 재산을 믿고 가족도 이웃도 하느님도 잊고 지내는 탕자(蕩子)에 속한다. 특히 탕자의 비유에 우리 자신을 자주 비춰볼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탕자의 비유에서 타락과정은 ① 자기고집(12절), ② 이기심(13절), ③ 분리(13절), ④ 육신의 욕심(14절), ⑤ 영적 빈곤(15절), ⑥ 비천함(16절), ⑦ 굶주림(16절)으로 전개되고, 회복과정은 ① 깨달음(17절), ② 결심(18절), ③ 회개(19절), ④ 돌아옴(19절), ⑤ 화목(20절), ⑥ 새 옷을 입음(22절), ⑦ 즐거움(23-24절)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잃은 것에 속한다고 주저할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외면하지 않고 회개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100 중에 1개인 나 자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나 하나 때문에 세상 끝까지 찾아 나서시고, 찾을 때까지 하늘나라의 잔치를 미루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나 하나의 회개를 하느님과 하늘의 천사들이 그렇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 하나가 곧 전부이기 때문이다.


 
머리의 논리보다 가슴의 논리로 살자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인간의 삶에는 가슴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과 머리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대표적인 부분이 인간관계란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가슴의 논리를 앞세우다보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관계란 면에서는 머리의 논리가 차지하는 넓이 보다는 가슴의 논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넓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가슴의 논리는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란 약점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가슴의 논리는 삶의 따스함을 불어 넣는 힘이요,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우리 삶의 최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의 발전과 인간의 행복이 비례하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현상이나 경제 발전이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현상도 결국 경제 자체에 그러한 요소가 있기 보다는 경제를 지배하는 머리의 논리가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삶의 숙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슴의 논리의 고유성을 인정함으로써 가슴과 머리가 조화되는 삶,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슴의 영역을 넓혀 감이 바로 오늘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3개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예수님에 대한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공격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로서 그 주제는 모두 잃은 것을 되찾는 기쁨으로 요약됩니다.

이 비유들은 실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슴의 영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많은 면에서 쉽게 수긍이 갈 뿐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과 뜻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고 좀 더 차가운 머리의 논리로 생각해 본다면 이 이야기들은 많은 문제점을 가진 이야기들입니다.

먼저 잃은 양을 찾는 비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무시하는 것, 이것은 욕심입니다. 맹수와 강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미련을 끊고 99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현명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환산은 힘듭니다만 은전 한 닢은 대략 삼 백원(미화 18센트) 전후의 작은 돈입니다. 때문에 돈을 찾기 보다는 돈을 찾는 노력과 수고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함이 더 적극적인 행위요 칭찬받을 행동입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아무도 없기에 사실 복음의 아버지처럼 잔치를 베풀고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현명한 아버지였다면 어쩌면 그 기쁨을 속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이 크다 하여도, 큰 아들을 생각하고, 또 작은 아들의 소행을 알고 있는 종들과 이웃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 보다는 차갑게 대함으로 근신케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지만 작은 아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한 질책은 성실히 일한 큰 아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상을 받지 않고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행동이 지적을 받지 않고 상을 받는다면 탕자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작은 아들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미래의 수많은 작은 아들들도 그러한 충동에 너무나 쉽게 빠져 들 위험이 있기에, 아버지의 기쁨이야 잔치를 베풀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만 잔치를 베풀고자 하는 욕구를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삭이고, 좀 더 냉정하게 아들을 대하는 것이 좀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자와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모두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점이고 예수님은 이를 교훈으로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줌과 동시에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아낌의 마음으로 머리의 논리와 이익을 넘어서는 어리석은 사랑, 관계 때문에 모든 조건과 이유를 넘어서는 바보 같은 눈먼 사랑이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사랑이요, 신앙인이 추구해야할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함을 찾고 사랑의 조건과 이유를 찾는 머리의 유혹을 자제하는 일,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 때문에 때로는 비웃음과 손해를 감수하는 가슴의 논리로 사는 일, 죄인을 감싸안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라 생각해 봅니다.

 

 잃은 자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1. 윤락여성에게 봉사하는 수녀님


하루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수녀님이 방문을 했다. 그 수녀님은 서울역 근방 윤락가에서 윤락여성들을 돌보고 있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 윤락여성들의 실태와 갖가지 사연, 그들을 돌보는 데 따르는 어려움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를 듣던 나이 드신 아주머니 한 분이 “수녀님들이 ‘그런 것들’한테까지 신경을 쓰면서 봉사를 해야 합니까?”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물론 천사 같은 수녀님들이 윤락가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게까지 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식으로 교회는 죄인들과는 확실한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많은 신자들이 ‘미혼모들’의 집이나 ‘알코올 중독자’, ‘윤락여성들’을 위한 교회의 시설과 활동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속으로 ‘망할 것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교회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를 똑바로 깨달아야 한다.

2.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믿고 있는 신(神)의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생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관(神觀)에 따라 신앙생활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참모습을 가장 잘 알려주신 분은 계시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양 한 마리’, ‘잃었던 은전’, ‘잃었던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복음서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에 빌붙어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고 자기들도 떼어먹는 세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민족의 배반자였다. 그리고 창녀와 함께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장이었던 자캐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회개한 죄인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 자주 드나드셨다. 어디 그뿐인가? 돌로 쳐죽인다고 모인 군중들 앞에서, 간음하다 들킨 여자를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시며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형제들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태도가 널리 알려지면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 광경을 보고 율법학자들과, 가장 열심하고 경건한 자로 자처하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보며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오늘 복음의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죄인들을 벌주고 심판하시려고 정의의 칼날을 세우고 휘두르시는 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헤매시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죄인들이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라고 당당?선언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과 ‘잃은 자’를 찾으시며 사랑하신다.”는 사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선포하신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3. 하느님의 비할 데 없는 사랑


예수님은 “아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보여주신다. 일찍이 신학자 ‘한스 큉’은 “인류역사상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신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도 결국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등 당시 지도자들의 신관(神觀)과 예수님의 신관이 다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전하셨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시고 돌아가셨다”(로마 5,8 참조). 한마디로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들과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시려고 당신의 생명마저 바치신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형제들을 거듭거듭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하느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아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머리와 이론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체험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믿음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에 따라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남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은 지식과 이론에 눈이 가려 현실 속의 생생한 하느님·예수님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예수는 율법도 하느님도 모르는 사람, 따라서 하느님은 도저히 예수란 인물 편이 되면 안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어울리는 죄인의 무리에게 하느님은 더더욱 그들 편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들과 같은 의인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누구 편이어야 합니까?

1860년대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노예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던 남부 11개 주가 연합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초반기 북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북부의 여론도 갈라졌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링컨은 하느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마침내 북군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메릴랜드를 방문했을 때 한 참모가 “대통령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 북군 편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내 염려는 내가 하느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하느님은 우리 편이 되어주신다네. 하느님께서는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셨네.” 링컨보다 성경을 더 잘 알았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인지를 생각하기보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신들의 편이라고 못 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며 그들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예수님 주변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루카 15,1) 있었습니다.

우리한테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씨가 내 마음밭에 떨어져 싹이 납니다. 싹은 실천을 통해 점점 자라 나를 링컨처럼 큰 나무가 되게 합니다. 이제 온갖 새들이 ‘나’라는 나무에 깃들이게 되는 영향력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잃은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오늘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남성을 위해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여성을 위해서는 은전의 비유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부모를 위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십니다.

비유에서 양을 잃은 사람이나 은전을 잃은 사람이나 아버지나 모두 ‘찾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어이 찾고야 맙니다.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태초의 아담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는 먼저 곰곰이 계산해 봐야 한다고 하셨지만(루카 14,28) 당신이 우리를 찾는 데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될지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계속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루카 20,13) 하며 사랑하는 아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하느님은 아들의 죽음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하나를 위해서도 치르신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이, 아홉 개 은전이, 큰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이 섭섭해할 만큼 잃은 하나에 집착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납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유다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때 쉰들러는 유다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공장에서 일할 유다인들의 명단을 밤새 작성하고 그 대신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도 전범자이기에 떠나려 할 때 그 덕분에 살아남은 유다인들이 그를 전송하며 금니를 뽑아 만든 반지를 감사의 선물로 줍니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의 말씀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순간 쉰들러는 철로에 주저앉아 통곡합니다. 그동안 낭비한 재산과 끼고 있는 반지를 팔아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을 멸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라도 그 도시를 구하고 싶어 조심조심 하느님께 청을 드렸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도 소돔을 멸하지 않을 구실만 찾으셨겠습니까?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라고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내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잃은 한 마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처사가 왠지 섭섭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잃은 한 마리의 양이었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보다 더한 통회의 눈물을 흘릴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