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Margaret K 2007. 9. 14. 08:23

   2007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고 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곧,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그분의 크나큰 사랑을 거듭 되새기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문헌에 따르면 세르지오 1세 교황 때인 7세기 말경으로 여겨진다.

  

☆☆☆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4-15)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desert,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다. 십자가의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는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민수기의 구리 뱀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미리 보여 준다

 

☆☆☆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갑니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그들을 환영할 곳은 없었습니다. 정착할 곳도 경작할 땅도 없었고, 초원도 물도 부족하였습니다. 탈출의 흥분이 가라앉자 현실의 문제로 불안에 떨던 백성은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이집트 탈출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의 생활도 여태껏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기적을 이어 온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불평하는 등 근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혹독한 보속으로 백성의 정신을 차리게 하신 것입니다. 오갈 데 없던 백성이 살려 달라며 다시 모세에게 애걸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한 백성의 청을 결코 모른 체하지 않으십니다. 또 다른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그 기적의 구리 뱀에 비유하십니다. 오늘의 우리는 무엇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까? 돈과 물질이라는 뱀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다시 예수님께 돌려야 합니다. 기적은 믿음을 가진 이에게는 언제라도 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지금 현재 우리 성당에서는 한창 공사 중이랍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크게 하는 공사는 아니고, 성당의 옥상과 벽면에 생긴 금을 메우고 그 위에 방수액을 바라는 어떻게 보면 간단한 공사라고 할 수 있었지요. 더군다나 우리 성당의 교우 한 분이 자기 집의 일처럼 성심성의껏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하고 계셔서 제가 굳이 신경 쓰고 볼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본당을 책임지고 있는 주임신부인데 어떻게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전혀 살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을 안고서, 어제 밤에 공사를 했던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옥상에 올라서자마자 큰 문제만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만 아직 굳지 않은 방수액을 제가 밟은 것이지요.

이제 두 개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선은 방수액 바른 부분을 밟았으니, 두 개의 발자국 자리를 다시 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더 큰 하나는 얼른 구두 하나를 사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록색 방수액이 구두 전체에 묻었거든요. 더군다나 저는 여분의 구두가 없습니다. 내일 당장 봉성체와 미사가 있으니, 신을 구두가 있어야 하는데 초록색 방수액이 묻은 구두를 신고서 자랑스럽게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구두를 사러 갈 시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우리 본당에 순교자 현양 연극이 있어서 오시는 교우들을 맞이해야 했거든요.

저와 제일 친한 신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러니 제 신발 사이즈를 불러 준 뒤에 구두 하나만 사다 달라고 말이지요.

연극이 끝난 뒤에 구두를 받았습니다.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사실 구두를 사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뭐 하긴 했습니다. ‘아직도 쓸 만한 신발인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새 신발을 받아서 신는 순간, ‘그래, 그 신발은 이제 버릴 때가 되었어. 5년 가까이 신었으면 됐지 뭐.’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쩌면 어제 저에게도 해당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두 하나 버렸다고 아쉬워했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우리 삶 안에서는 참으로 많습니다. 내게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오는 것들 그래서 왜 내게 이러한 고통과 시련이 오냐고 원망도 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고통과 시련이 나를 더욱 더 발전하게 해주고, 나를 더욱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서야 고통과 시련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의 십자가도 이러한 전화위복이지요. 분명히 당시의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면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때요? 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들의 구원이 오게 되었다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고 가신 십자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매년 하는 하나의 축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뜻 깊은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없이 우리의 구원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구리 뱀을 봐야지만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잠깐 동안이라도 주님의 사랑을 묵상합시다.


 빠다킹신부

 

 

   하느님의 세심함      

-김인한 신부-


 예전에 어느 선배신부님에게서 십자가와 불상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편안히 앉아서 누가 바라보더라도 인자한 눈으로 계시는 부처님상과
십자가에 매달려서 가시관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예수님상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물론 약간 편협한 견해이긴 하나 부처의 가르침은 고통의
단초가 되는 집착을 끊음으로 인해 해탈할 수 있는, 스스로의 구원 안에 이르는
편안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껴안음으로 인해 행복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음을, 세상을 껴안음으로써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살기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피하기는 쉬우나, 십자가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십자가를 껴안기는 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선택할 때, 십자가를 껴안을 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시간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 이유입니다.

 

 

 폭우 속에서 한 십자가의 길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지난 7월 어느 주일. 지리한 장마가 시작되고 연 이틀 동안 줄곧 폭우가 퍼부어 대는 한낮의 어둡고 스산한 오륜대 성지에서였습니다. “수녀님, 십자가의 길을 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산에 못 가겠어요. 누가 함께 가주면 몰라도`….” 한국순교자 기념관 앞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자매님의 떨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아, 이 젖은 목소리!’ 왠지 외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자매님, 이런 날씨에 어떻게 오셨어요? 어느 본당에서 오셨어요?” 인사말을 두서없이 건네면서도 당혹스러웠습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미끄러운 산길에서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더군다나 오늘은 주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속마음과 달리 저는 “자매님, 제가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에 동참해 드릴게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런! 주님, 제가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조금 전까지 마구 쏟아지던 졸음마저 매정하게 뒷걸음쳐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머나, 수녀님. 수녀님은 본명이 어떻게 되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는 정말 고맙죠.” 조금 전의 두려움 반, 난처함 반이던 자매님 얼굴이 무지개마냥 화사해졌습니다. 폭우 속에서 거북이 걸음으로 14처까지 가는 동안 구멍이 난 것도 아닌데 우산살 사이로 빗줄기는 튀고 연방 옷소매로 흘러내린 빗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기도책을 흠뻑 적시며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자매님도 저도 비에 젖는지, 사랑에 젖는지 마냥 자비송을 외치며 빗속에서 8월의 태양처럼 뜨거운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잠시, 하느님의 종 124위에 올라 시복시성을 기다리고 계시는 이정식 요한 순교자(1868년 수영장대에서 참수)와 그 가족의 묘소 앞에서 묵념을 했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말없이 지고 가셨을 그분들을 생각하며, 폭우 속에서 했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게으른 수도자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과 구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을 한다. 하느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로 하여금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이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그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오늘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다리셨다는 뜻이며(요한8,28;12,32), 하늘의 영광에로 돌려졌다는 뜻(사도 2,33;5,31; 필립2,9)으로 이중적인 높임의 뜻이 있는 것으로 서로 분리가 될 수 없다. 우리들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으로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에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게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즉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의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에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 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여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구하자.

 

 

대구 평화 방송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삼아야 하리니, 그 안에 우리의 구원과 생명과 부활이 있으며, 그로써 우리는 구원과 자유를 얻었도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의 미사전례 입당송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축일의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아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에 기념 성전을 짓고 십자가를 현양하기 시작하면서 생겼습니다. 이 후 7세기 중반에 와서 바티칸 대성전에서 십자가 나무 조각을 내어놓고 신자들이 경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날이 9월 14일 이였습니다. 이 후 십자가 현양축일을 크게 경축하고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 경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가르칩니다. 구원의 표징인 구리 뱀에 관한 이야기가 첫째 독서의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 뱀을 본 사람은 치유의 은사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구리 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이제 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구원과 생명을 주는 상징이 된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인사이동이 있어 구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책 상자, 옷상자가 방 여기저기 널려있어 정신이 없던 그 곳에 별다른 생각 없이 전부터 책상머리에 얹어두던 십자가를 꺼내어 책상 위에 단을 올리고 얹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산만하던 방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져 옮을 느꼈습니다. 비록 정리된 것은 하나 없지만, 아직 새로운 임지에서 사목담당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복지관 관장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산만하기만 하던 내 마음이 무엇을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구나, 그저 십자가의 삶을 살면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이겨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각자 삶의 여정 안에서 나름의 힘겨움을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작은 부분을 발견하며,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이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이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듯이 내 자신 어깨위에 세상이 지워주는 십자가를 짊어질 때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그리스도는 당신 성령의 힘으로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벌거벗은 젊은이가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바라보며 깊이 머리 숙입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 머리 숙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 제단에서 온 세상의 죄를 대신 갚아 주셨으니, 성자 그리스도의 제사로 저희 모든 죄를 씻어 주소서.” 아멘.

 

-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


 

 기억이 정확하다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에 생기는 잠시의 공백기간 중에 ‘러브스토리’라는 영화를 본 것 같습니다. 사춘기의 문턱에 막 들어섰던 어린 저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야”라는 영화 속의 대사는 3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도 영화의 장면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외적인 상황이 서로에게 잘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러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랑이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러한 사랑은 우기가 단지 영화나 동화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도 시대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하여 왕위까지도 포기한 원저공의 사랑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놓인 사람에게 주는 사랑에는 감동을 받고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에게 주는 사랑의 위대함은 자주 잊어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뭐든지 주고 싶고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사랑의 실천은 훨씬 더 값지고 위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데렐라의 꿈에 도취되어 그러한 사랑을 자주 지나쳐버리고는 합니다.

사실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사랑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들었고, 또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주는 이러한 사랑은 그것이 일어난 그 당시에만 우리의 심금을 울릴 뿐,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즉시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현실은 정말로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버리면서 사는 것은 비단 그러한 사랑 뿐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마저도 우리는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지고 가신 거룩한 십자가를 경배하는 성 십자가 경배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많은 경우 잊어버리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하신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을 복음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포기하는 것은 귀하고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결국에는 저절로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 놓으신 것은 하나밖에 없는 당신 외아들의 목숨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사랑의 가치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로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나쳐 버리는 어떠한 것을 포기한 사랑의 행동에 감탄하고 부러워한다면, 그것으로써 하느님의 위대한 인간 사랑에는 더욱 감사하여야하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매일 매일 새로운 힘을 얻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

- 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초등학교 시절 다음날 수업을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하는 것이 연필을
깎는 일이었습니다. 가지런히 깎인 연필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필은 자신의 껍질을 벗어야만 필기구라는
자기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포기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런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자아포기를 통해 십자가는 수치스런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영광의 도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십자고상을 걸고, 십자성호를 긋고, 십자 목걸이를 하면서 그 의미를
새기고 또 전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포기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날 “나 목말라요!”라고 말하는 부랑인과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 2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린 마더 데레사는 십자가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삶을 따를 수 있어야겠습니다.

 

 

-부산교구 한종민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세상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는 “하느님께서 독생 성자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음” 을 기억합니다.

“십자가” 라는 단어는 예수님께 참 잘 어울립니다.
십자가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사형의 도구입니다.
사형의 도구인 십자가 예수님께 잘 어울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치워질 수 없는 잔임을 깨달으신 후 그 십자가를 기꺼이 가슴에 껴안으십니다.
그리고 또 그 십자가에 기꺼이 몸을 내어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기꺼이 몸을 내어 놓으신 것은 사람에 대한 구원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기꺼이 몸을 내어 놓으신 것은 성부 하느님께 대한 순명(順命)입니다.

순명은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순명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일치는 현존으로 발전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현존하심으로써 성부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상징되는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상징, 성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우리에게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십자가가 주어진다는 것은 고통과 아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예수님처럼 껴안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늘 업(業)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지금 나에게 이 십자가가 주어지는지 의심을 품고 원망을 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늘 부정하고 저주하고 원망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멀리 치워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우리의 십자가를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 그 십자가는 덕(德)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에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과 사람을 위한 공덕(公德)을 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람을 위한 공덕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부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명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순명에서 우리는 성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이 현존에 대한 깨달음은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 구원을 더 깊게 깨닫도록 합니다.

오늘 교회는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가 구원되었음을, 그리고 그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교회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느끼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어떻게 깨닫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업(業)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성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순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가져다 주고 세상과 사람을 향한 우리의 공덕(公德)입니다.

 

 당신은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요즈음 젊은 의학도들이 몰리는 과(科)는 성형외과나 피부과 쪽이라고 합니다. 내과나 정형외과 같이 힘든 과목보다 몇 배나 인기가 높다는 것이지요. 피부과를 지망한 의사들에게 선택한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㰡’왜 하필 피부과를 택하셨습니까?㰡“

㰡’첫째로 피부과 환자는 밤에 찾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귀찮지가 않지요. 둘째로 피부과 환자는 죽는 경우가 드뭅니다. 의료 사고가 있을 수가 없지요. 셋째로 피부과 환자는 완치되는 경우가 희박합니다.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을 수가 있답니다.㰡“

이런 이유들로 피부과를 택했노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환경보다는 편하고 좋은 미래를 바라고 꿈꿉니다. 그래서 좀 편해 보이고 나아 보이는 곳을 택해서 인생의 방향을 잡습니다. 그런데 좀 편하고 나아 보인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편해 보인다고 선택하고 결정한 그곳에도 어려움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지요. 이것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㰡’왜 천주교 신자가 되셨습니까?㰡“하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㰡’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㰡“ 또는 㰡’복을 받기 위해서㰡“, 㰡’천국에 가기 위해서㰡“라고 대답합니다. 모두가 좋은 것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단지 우리의 바램일 뿐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㰡’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㰡“(루카9,2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꿈꾸는 마음의 평화, 또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일 따위는 말씀하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없는 삶을 희망하며, 고통이 없는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㰡’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㰡“(마태10,38)

예수님께서도 그 길을 가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도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지고 가신 거룩한 십자가를 경배하는 날,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가 고통을 상징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 십자가를 드러내 놓고 찬양을 드리는 날입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찾아든 우리에게 교회는 이렇게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지요. 십자가를 져야만이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어려움이 가로놓이면 피하고만 싶은 것이 약한 우리의 마음이지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셨으며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온 인류를 당신께 모아들이셨고, 또 당신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축복과 평화, 구원을 바라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의 평화도 하느님의 축복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㰡’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㰡“(갈라6,14)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십자가 안에는 우리의 구원과 생명과 부활이 있으며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는 구원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사람마다 져야하는 십자가의 모습은 다 다릅니다. 가난이 십자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급하고 모난 성격으로 늘 어려움에 처하는 사람이 있고, 사고를 저지르는 자식이 십자가인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㰡’왜 나에게만 이런 십자가가 있습니까?㰡“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근시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눈앞의 자기 일 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습니다. 가끔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㰡’신부님이 참 부럽습니다. 벌어 먹일 처자식이 있습니까? 회사에 나가 골머리를 썩힐 일이 있습니까?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으시겠어요?㰡“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포함해서 영적인 아버지인 신부에게 딸린 신자(자녀)의 수는 평균 수천 명이 넘습니다. 바람잘 날이 없지요. 부자도 거지도 대통령도 성직자도 수도자도 십자가의 고통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거역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살려달라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그냥 살려 주지 않으시지요.

㰡’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㰡“(민수21,8)

높이 달린 불 뱀을 쳐다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을 살려주십니다.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구리 뱀이 높이 들렸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높이 들리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하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었다면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피해 가셨을지 모르지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지신 이 십자가를 어찌 우리가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무겁고 커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처절한 십자가의 길을 다 걸으시고 이제 더는 내려갈 길이 없는 밑바닥에서 온갖 치욕을 다 겪으신 후에 부활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냥 시늉으로만 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치욕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부활의 승리를 이루셨다는 것이지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끝까지 내려가야 부활은 시작됩니다. 죽음 같은 아픔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감으로써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고 부활의 신비입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삶의 십자가를 져야만이 우리가 원하는 마음의 평화와 축복,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또 거기에서 구원이 있음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삶의 중심에, 집안의 중심에, 성당에, 각 공동체가 모이는 회합실에,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몸의 중요한 부분에 십자가를 걸고 달며 그 의미를 되새기지요. 뿌옇게 먼지 앉아 있는 장식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다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부딪혀오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말고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로 받아들이십시오.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사랑과 용서의 상징인 십자가 (민수 21,4-9)

-경규봉(전주교구)- 


십자가 현양 축일에 우리가 읽는 독서는 민수기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광야에서 떠돌아야 했던가! 때로 그들은 이민족에 의하여 공격을 받고 멀리 쫓겨나기도 했고, 때로 그들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어서 갈증과 굶주림에 허덕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곧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는데,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아야만 했으니, 그들의 육적 고통은 물론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이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그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자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리하여 불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기도해주기를 모세에게 청한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시어 뱀에 물린 사람이 살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없애신 것이 아니라, 구리뱀을 쳐다봄으로써 살 수 있도록 하셨다.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 여기에 하느님의 심오한 뜻이 있다. 그것은 불뱀을 없애기만 하신다면, 이미 불뱀에 물린 사람은 모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물린 사람들도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살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을 보다 깊이 믿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일반적으로 뱀에 물리면 물린 자리 위쪽으로 독이 퍼지지 않도록 묶은 다음, 십자로 물린 자리를 칼로 째고 독을 빨아내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서 뱀에 물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모세가 구리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으니까 구리뱀을 바라보도록 열심히 설명하고 권했지만, 믿음이 없고 인간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힌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구리뱀을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고집대로 물린 자리 위를 끈으로 묶고 상처를 째고 독을 뽑아내다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더라도 모세의 말을 따른 사람이나 믿음을 가지고 모세의 말을 따른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나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백성 가운데에는 전혀 물리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번 물린 사람도 있을 것이며, 여러 번 물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물린 사람은 한 번 구리뱀을 바라보고 살아났을 것이며, 여러 번 물린 사람 여러 차례 바라보고 여러 차례 살아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함으로써 살아난 사람들은 삶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여러 차례 물렸다가 살아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체험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삶이 곧 은총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광야는 인생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곧 우리 자신이고, 뱀은 죄를 상징한다. 우리는 인생이란 광야에서 죄라는 뱀에게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로 인한 죽음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받고 구원되도록 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면 다시금 새 생명을 받고 구원되어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 생명을 받고 다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곧 구원의 상징이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상징이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시어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비록 많은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용기를 갖고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자. 그리하여 나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십자가를 들어높이기 위하여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강영구신부-

여기 예리한 칼이 있습니다.
흉포한 생각을 하는 폭력배는 그 칼로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겠지요.
일류 요리사는 그 칼로 예술작품 같은 음식을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외과 의사는 그 칼로 병든 사람을 살려낼 생각을 합니다.
같은 칼이지만 누구의 손에 들리는가에 따라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죄수를 처형하는 죽음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스승 예수님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살리는 도구로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대자비심(大慈悲心)이 나타나는 자리가 됩니다.
십자가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뻗는 종선(縱線)은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고 하늘과 땅이 맞닿는 자리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는 횡선(橫線)은 사람과 사람, 너와 내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단절로 고립되고 소통(疏通)이 없는 곳에 절망과 죽음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만남의 자리, 소통(疏通)의 자리가 되어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을 줍니다.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顯揚)하려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고
십자가를 통해서 너와 내가 만나 ‘형제자매’라고 부르게 됩니다.

당신의 삶이 십자가를 현양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 오늘은 ‘큰’ 십자성호를 긋자.

-박상대 신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십자가와 십자고상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와 성공회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덤성당은 곧 부활성당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걸맞게 전례복음은 요한사가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한 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니고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이는 곧 요한복음사가의 편집의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고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발설(發說)이라는 보다는 요한복음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으니(13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지고(至高)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고, 영광 중에 다시 높이 들려 올려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신 까닭에 세상은 물과 영으로 다시금 태어나,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다.(민수 21장) 여기서 구리뱀은 신약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에 비유된다. 그러나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이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동기(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方法)으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목적(目的)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동기(動機: 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때는 노예나 흉악범을 처단하던 형틀 십자가! 십자가는 이제 우리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손으로 이마에서 가슴으로 왼쪽 어께에서 오른쪽 어께로 ‘큰’ 십자성호를 그으며 십자가에 묻혀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 아멘......◆

 

 

<하늘에서 내려온 이>(요한 3,13-17)

-유광수 신부 -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하늘로 올라간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당신의 특성을 말씀하셨다. 예수님 말고 누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또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과 사람의 아들과의 차이점이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하늘과 땅을 넘나드시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늘에 관한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늘에 관한 것을 알려 줄 수 없고 땅에서 일어난 것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보고 드릴 수 없다.


그럼, 예수님은 왜 하늘에서 내려 오셨는가? 구원해야할 인간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新婦가 이 세상에 떨어져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이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 그분이 오셨다. 즉 물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는 인간을 건져내기 위해 당신이 이 땅에 내려 오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고 한다. 즉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이 하늘에 올라 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도 어떻게 해서 갈 수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 가려고 여기 저기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분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숨겨진 세계, 신비의 세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을 계시(啓示)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늘 나라는, 우리 홀로 넘나들 수 없는 하늘 나라는,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 나라는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란 revelatio라고 하는데 이 말은 "드러냄, 노출, 폭로, 누설, 공개"라는 뜻이다. 무엇을 드러내고 폭로하고 노출시키는가?

어쩌면 우리는 하늘 나라란 어떤 나라인가? 하고 하늘 나라의 환경과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마치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갔다 온 사람이 달나라는 어떻고 어떻더라 하듯이 하늘 나라의 풍경, 하늘나라의 생활 등 외적인 것을 생각하런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그런 것을 드러내거나 노출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이다. 따라서 그분이 노출시키고 폭로하고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비를 알려 주고자 한다. 즉 내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해서 오늘 이런 모습으로 고생하고 병들고 죽게 되었는지, 또 앞으로 나는 어디로 가야 하고, 그 곳을 가기 위해서 어떤 길을 걸어가면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폭로하신 것이다. 따라서 나의 과거를 알고 싶으면 또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고, 앞으로 내가 가꾸어야할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고 싶으면 나의 역사에 대해서 폭로해 주신 계시를 통해서 알아야 한다.

 

이렇게 나에 대해 자세히 폭로한 나의 신상명세서를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그 계시가 바로 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복음은 모두 다 하나의 계시이다.

복음 속에는 지나온 나의 과거가 기록되어 있고, 현재의 나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건강진단서가 기록되어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처방전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모르면 나에 대해서 알 수 없고 하느님의 계획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은 나에 대한 역사가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진리이고,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놓은 길이고, 그 진리의 길을 걸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생명의 책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으로서 나를 이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분만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분만이 나의 미래 현재 미래의  역사를 알고 있고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계시가 바로 복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 복음대로 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늘 나라에 올라 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늘에서 내려온 이", "하늘로 올라간 이"를 통해서 나도 하늘로 올라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내 인생경로는 하늘에서 내려 왔다가 다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요, 이를 위해서 사는 것이 나의 신앙생활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나의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분"(요한 14, 6)이시고, 나의 인생 길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하신 스승이시며, 나를 하늘로 인도해주시는 목자이시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내려온 분께서 하늘로 올라간 그분의 길을 따라 가노라면 그분이 나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서 어떤 희생 댓가를 치루셔야 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결코 하늘 나라에서 우주선을 타고 이 세상에 내려 왔다가 이 세상의 모든 관광을 멋지게 마친 후 다시 우주선을 타고 하늘 나라로 올라간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이 나를 하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치룬 댓가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그분 앞에 무릎 꿇어 경배드리고 그분을 믿는 우리의 자세가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나 그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왜 모르는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 댓가를 치루었는 지를 기록해놓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고 한탄하셨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신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하시면서도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4, 22-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 인간에게만 두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알아야할 진리란 바로 이런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무엇을 보답해야하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 생명까지 바치신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매일 무엇을 달라고 만 하는 신앙생활은 이젠 그만 두어야 한다. 정말 예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알아들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