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13일 목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Margaret K 2007. 9. 13. 04:57

   2007년 9월 13일 목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354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독실한 어머니에게서 종교 교육을 받으며 자라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였다. 사제가 되어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던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된 뒤 특히 교회의 쇄신에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로마 황실의 반대로 두 차례의 유배 생활을 한 끝에 407년 세상을 떠났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신앙을 해설하고 믿음의 실천을 독려하는 저술을 많이 남겼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는 별칭을 얻은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Be merciful,

just as also your Father is merciful.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현실적으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라고 하신다. 또한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말라고까지 하신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삶을 사셨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우리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께서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답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해야 완벽할 수 있는지 그 답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웃 사랑의 완벽한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렵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부 사이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천사의 행위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길을 다시 결심한다면 그는 이미 천사로 변신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김인한 신부-


어렸을 때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착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물론 절대적인 악과
절대적인 선은 없는 것이기에 경향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고 무엇보다도 창조하신 그분의 손길이 사랑이셨기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시니 좋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 이기적일 뿐,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나 자신을 미워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끊임없이
부정함으로써 나 자신을 미워하고 사랑에 무기력한 사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분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이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의 모습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는 이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 안에 자유로운 우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황금 귀와 황금 입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우스갯소리로 흔히 ‘사오정’이라고 하지요. 사오정 시리즈는 책으로도 여러 권 나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오정이 드디어 귀 수술을 했답니다. ‘이제 사오정 시리즈가 끝나는구나.’ 하였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오정의 귀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가 친친 감긴 붕대를 풀어주고 나서 사오정에게 물었지요. “이제 좀 어떠세요?” 그러자 사오정이 “예! 의사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제는 잘 보입니다.” 하더랍니다. 어쩌죠? 귀 수술한 효과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사오정 시리즈는 당분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그를 일컬어 ‘요한 금구(황금의 입)’라고 하지요. 성인(聖人)이라고 할 때 그 말마디 글자를 풀이하면, ‘왕다운 귀와 입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어떤 말이 쓸모있고 위엄있고 가치있는 말일까요? 또 지혜로운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인간적인 면에서는 마냥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느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이야말로 멸망의 길이 아닌 참다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황금 입’을 가진 사람은 결국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황금 귀’도 동시에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황광지(마산 가정 폭력 상담소)-

 

가정폭력상담소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서는 배우자에게 일방적으로 학대받고 살아온 사람도 많지만, 부부간에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다 불화가 일어나고 힘센 남편이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신의 요구만 강요하고 자신은 배우자의 요구가 이치에 맞지 않다며 회피한다. 이렇게 따지고 나가면 영원히 평행선이다. 그러면 결국 주먹이 강한 사람이 이기겠지만 속으로는 두 사람 모두 멍이 든다.

가장 이상적인 가정생활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 어깨가 뻐근하면 먼저 아내의 어깨를 주물러 주자. 남편이 살갑게 말해 주기를 원하면 먼저 상냥하게 이야기를 건네자. 내가 축구중계를 보고 싶으면 자녀들에게도 권해서 함께 즐기자. 내가 하는 공부가 고달프면 부모님의 고달픈 생활도 마음에 새기자.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예수님의 가르침 중,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한 차원 높은 사랑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실천하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 말씀에 따라 살려고 몇 번 애쓰다가 보면 꼭 나만 손해보는 것 같은 억울한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한술 밥에 배부르랴. 그 정신을 마음에 두고라도 열심히 산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질 것이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동구와 소련의 개혁은 하느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한 입증이며, 그들의 양심이 하느님의 진실성에 승복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맑스, 레닌주의가 100여년간 인류의 절반을 지배했지만, 그들은 무너지고 하느님의 통치는 영원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며 불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진실된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루까 6:27-38]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말씀을 들려 주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하시면서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와같은 루까 6:27 이하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대인 관계 속에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율인 것이다. 세계의 4대 성인들도 각각 황금율을 말씀하셨는데, 공자님은 仁을 말씀하시고, 부처님은 慈悲를 말씀하시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겸손을 가르치셨다. 예수님 사상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바로 오늘 복음에서 들은 말씀이라고 보겠다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이러한 말씀들이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말씀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품성이며 덕이라 하겠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오래 전부터 들어 온 것이지만, 다시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할수록 위대한 말씀임을 새삼 느끼고 자신이 부끄러워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찬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이러한 경지에 나날이 가까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과거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이러한 말씀을 뚜렷하게 실행했던 기억은 찾아 볼 수 없고 살아 갈수록 이러한 사랑의 경지는 아직도 아주 먼곳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 인간의 사랑과 만남은 여러 형태일 것이다. 세상에는 이웃이나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하고 타인의 선익까지도 강제로, 무력으로 강탈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사랑의 일종이긴 하지만 이기적인 사랑이며, 남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고 이익을 챙기는 방법입니다. 사기, 강도, 폭력, 심지어 살인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참 무서운 괴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古城의 女人」 (La morte vivante) .....

남을 희생하여 자신의 유익 만을 챙기는 행위는 바로 이와같은 것으로 더불어 함께 공존해야 할 인간 공동체, 인간성을 거부하는 잔인한 행위이다.

두번째 사랑의 모습은 '주고 받는' (Give and Take) 식의 사랑이다.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 그래도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이 하는 무난하고 또 어쩌면 교양있고 품위있는 이들의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도 않고 또 남에게서 손해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개인주의적인 태도라고 보겠다. 그리고 남이 무엇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그만큼은 베풀 줄 아는 신사적인 사랑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죄인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사랑도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이들을 많이 본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갚을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러한 사람아다. 그 사람에게는 들어가는 것만 있지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남에게 줄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고 받는 사랑의 수준에만 머물러도 그 사람은 공동체 생활에서 그래도 인정받고 더불어 무엇인가 힘을 합해 해 볼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세번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찬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으로서 가장 차원 높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세속적으로 생각해 볼 때 손해받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기에겐 손해가 되는 사랑입니다.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원수,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이들, 옛날에는 부모친척을 죽인 이들이 보통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교묘하게 사기를 쳐서 자기 사업을 망하게 한 이들이 원수일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자기를 못살게 굴고 자기의 성공을 시기하고 저지시키고 온갖 중상모략으로 방해한 이들, 이들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마저도 내어 줄줄 아는 아낌없이 이웃의 필요에 도움을 주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거기엔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이것도 말로만의 축복이 아니라 진실한 뜻이 담겨져 있는 축복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러한 이러한 요구는 우리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인지도 모른다.

남녀 간에 서로 끌리는 정으로 결합하여 함께 사는 부부들도 여러가지 이유로 다투기도 하며, 서로 간에 미움을 갖고 살기도 하는데, 자기를 해치고 못살게 구는 원수들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차원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또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워주어라』고 예수님은 요구하신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의 견지에서 이것을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닮으려는 거룩한 마음과 신적 은총의 힘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희생만을 즐겨하는 심리학적으로 마소키즘(자기 학대증)적인 경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이 있다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진실되이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고 따른 이들에게 빈손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고 그것을 생각해 주신다는 점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는 자기희생적인 거룩한 모범을 통하여 원수도 감화되어 나쁜 마음을 돌이키고 감화되어 참된 인간이 되도록 초대하는 행위라고 보겠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성도들이기에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 인내로서 마음을 새롭게하며, 서로 도와주고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은총을 거져 주셨으니 우리도 자기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거져 주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을 고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게 될 것이다.

희랍말의 아가페라는 말은 타인에게 대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적이며, 능동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이 말은, 타인이 나에게 어떠한 태도로 대하던지 간에 그의 행복을 기도하며, 바라는 태도이고, 자신의 이해를 굽혀서라도 자진해서 상대방에게 착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같이, 마음속으로 부터 원수를 사랑하기는 인간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또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한 일이며, 그릇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자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자면, 상대방이 내 자신을 모욕하고 중상하고, 해독을 끼쳐온다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를 용서하며, 착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좋게 가져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죄 때문에 내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대신 희생 되셨기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 받은 내 자신도 그리스도를 닮아서 타인을 용서하고 착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감정으로가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으로서 이루어 지는 것이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듯이 어쩔 수 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저절로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며, 크리스찬의 믿음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황금률을 뛰어넘어...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어제 복음의 행복선언(20-23절)과 불행선언(24-26절)에 이어 오늘은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판단금지(37-42절)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은 분명 제자들만을 향하여 선포된 말씀이다.(20절) 오늘 복음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된다. 이는 곧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주위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 성서를 통하여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들까지 포함된다.


  루가복음의 평지설교(6,20-49)는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5-7장)와 내용상 상통하는 대목이지만, 산상설교처럼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게다가 분량도 매우 적다. 특히 마태오는 5장에서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대비시켜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6개의 대당명제를 조직적으로 설파(說破)하고 있는 반면, 루가는 모든 것을 “원수를 사랑하라.”(27절)는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열거하고 있다. 원수의 미움에는 친절로, 저주에는 축복으로, 박해에는 기도로 대하라는 것이다. 누가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을 대어주고,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고, 달라는 대로 주고, 뺏긴 것을 돌려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저변에 깔고 있다. 따라서 사랑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31절) 황금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마태 7,12 참조) 즉,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 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않으면 단죄 받지 않을 것이고, 남을 용서하면 용서받고, 남에게 주면 받는다는 지극히 간결하고 당연한 황금률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37-38절)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단지 황금률에 머물지 않는다. 평지설교의 결론이자 핵심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것이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요구와도 같은 것이며, 요한복음이 전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13,34)는 새계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 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에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황금률을 기반으로, 당신의 모상을 닮았다(창세 1,26)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겸손하게 배울 때, 비로소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박해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질문에 머물러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원수도 그가 원수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영원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황금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는지에 상관없이 행동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오늘 복음의 구구절절 사랑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고 숙연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