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5일 토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마리아 칠고(七苦) 축일’이라고 했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과 함께하시면서 겪으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서 시작된 이 기념일은,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실 때 함께 아파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이다. 아들이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 그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were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계신다. 아들의 죽음 곁에 계신 것이다. 무슨 말이 제대로 들리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비통에 잠긴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신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죽어 가는 자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대신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나설 것입니다. 이처럼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비할 데가 없이 강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셨습니다.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분이 누구이시던가! 천사의 발현으로 당신이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된 이분은 위대한 구세주가 될 분이 아니던가! 소년 시절의 추억과 청년 시절의 체험이 성모님의 가슴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결실도 이루지 못하신 채 죽음의 길로 나아가시다니…….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고뇌 속에서도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어머니로서 신앙인으로서 십자가를 함께 지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육체적 아픔만이 아니었습니다. 믿고 사랑했던 예수님에 대한 고뇌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셨습니다. 성모님의 위대한 모습입니다.
어머니
-김인한 신부-
저희 어머니는 저를 포함해 아들 셋을 낳으셨습니다. 막내아들이 세 살 되던 해에 일찍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고 막막한 곳에서 세상을 받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갓 결혼한 젊은 20대의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고,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회사 앞의 조그마한
가게에서 국밥집을 차려서 집안을 꾸려나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나서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릴 때에 막내아들은 허름한 국밥집에서 국밥을 나르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볼까 어머니가 도움을 청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마친 막내아들에게 어머니는 “김 신부님은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신자들을 더 많이 생각해주고 품어주는
사제가 되길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막내아들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픔을 묵상하다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성모님이 당한 고통은 사랑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의 길에
주님 십자가의 길이 보입니다. 성모님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픔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고 주님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랑함으로 인해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득 지금은 중풍으로 불편하시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국밥이 먹고 싶습니다.
느그 집에 엄마 있나?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다 해보았지만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인을 만난 젊은이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자 도인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부처를 섬기는 날 많은 돈을 벌게 될 걸세.” 하고 말했습니다. 젊은이는 그날로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부처를 찾아다녔지만 어느 절에도 없었습니다.
몇 년이 흐르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청년은 문득 고향 마을에 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홀어머니 생각이 간절했지만 차마 어머니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어머니의 모습이라도 보고 가려고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저만치 초라한 집이 보이고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는 방문 앞으로 가서 모기만한 소리로 “어머니!” 하고 불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제나저제나 저녁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단번에 아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정신없이 뛰어나왔습니다. 그 바람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채 마당에 내려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이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사죄했습니다. “어머니,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일으켜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어미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한 도인이 네가 돌아오면 주라고 이것을 맡기고 갔단다.” 하며 어머니는 종이 한 장을 내놓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금궤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였습니다. 그곳은 바로 마을 입구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그곳 돌부처 밑에서 금궤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효성을 다하여 극진히 모십시다. 성모님 품 안에는 예수님이 맡겨놓으신 하늘나라의 지도가 있습니다. 얼마 전 길을 가다가 목격한 일입니다. 아이들 둘이서 싸우는 것 같더니 한 아이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느그 집에 엄마 있나?”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이가 풀이 죽어 달아나 버렸습니다. 우리 천주교회에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양승국신부-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불멸의 이순신’, 그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는가 봅니다. ‘이순신 어록’이 여기저기 많이 떠돕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 조국을 지키고 싶은 자 나를 따르라.”
‘불멸의 이순신’을 제작하는데 많이 참고했다는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슬픔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기록에 충실했던 분임을 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칼의 노래’는 무인답게 간략하고 단순 소박한 필치로 기록한 장군의 일기를 토대로 쓴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만을 상대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군은 의혹에 찬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던 선조임금과 조정대신들, 자신의 실속만 차릴 뿐 오히려 방해만 되던 명군들, 자신 안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수시로 치받고 올라오는 고열, 계속되는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심신의 고통 등 다방면의 적군들과 힘겹게 싸워야만 했습니다.
계속되는 오해, 근거 없는 모함, 그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또 얼마나 억울했으며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차라리 육신이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내 몸은 죽어지지 않았다”라고 고백했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의 최후는 또 얼마나 장렬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군부 지도층은 철군을 명령합니다. 필사적으로 고국 땅으로 돌아가려는 왜군들,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자고, 이쯤해서 적당히 타협하자고 회유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 수도 없이 죽어간 부하들과 백성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지난 7년간 저 바다에 수많은 전우를 묻었다. 우리 손으로 이 전란을 끝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 조선 백성의 한을 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인의 굴레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척의 배도, 단 하나의 적도 살려 내지 마라.”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예정된 죽음, 자청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냥 두었으면 적들은 알아서들 조용히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가는 적들과 마지막 전투를 벌입니다.
죽을 각오로 임한 마지막 해전에서 아니나 다를까 이순신 장군은 치명상을 입습니다. 총탄에 맞은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이 동요될 것을 염려하며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은 죽어가면서도 부하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먼저 걱정했습니다. 백성들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철저하게도 이타적인 삶, 자신 안에 자신은 하나도 없었던 삶이 장군의 삶이었습니다.
마치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십자가상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단말마의 고통에 괴로워하시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님을 걱정하십니다. 제자공동체를 걱정하십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극심한 자신의 고통, 자신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머님과 제자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 고통은 다국적군과도 같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큰 대못이 박혀있던 손과 발의 통증,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었겠습니다. 체중이 아래로 쏠림에 따른 심장의 압박, 그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인한 고통도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계속 흘러내리는 피와 땀으로 인한 탈수 증세는 심각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고통은 극도의 수치심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의 알몸인 상태에서 높이, 높이 매달려져 있다는 사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겠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님을 위로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십자가형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잊고 죄인인 우리를 생각하는 예수님의 그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메시아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그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부산교구 최현욱 베네딕토 신부-
매미들은 뜨거운 여름의 2, 3개월을 노래하며 살기 위해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땅속 어두운 곳에서 애벌레로 지낸다고 합니다. 짧은 생애이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참 삶을 위해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기다리는 매미의 삶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의 고통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모님의 삶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처녀인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33년이라는 짧은 예수님의 생애를 위해서 너무나도 큰 고통을 끌어안고 사신 분입니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라도 자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을 받고, 배신당하고, 죄인으로 취급받아 사형 당하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미쳤다, 마귀 들렸다는 등 온갖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았고, 삼년동안이나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서 배신당하는 것을 어머니는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 모든 고통을 다 이겨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고통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있는 고통이라면, 일부러 고통을 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통도 있음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몸에 종양이 생겼는데 고통이 싫다고 수술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양을 없애기 위해서 수술에 필요한 칼은 피를 흘리게 하고, 고통을 당하게 하지만, 이 칼은 치유의 칼이고 생명의 칼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소중한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어머니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떠나야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겪는 고통도 있고, 자녀를 위해서 겪는 고통, 부모님을 위해서 겪는 고통도 있습니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나은 삶을 이루게 해 줍니다. 고통은 우리를 힘들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참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고통을 통해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북해도에서 청어를 잡는 영국의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생 고생해서 어렵게 잡은 고기를 영국에 가져오면, 성질이 급한 청어는 이미 죽어 있고, 결국 값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어부는 언제나 살아있는 청어를 가져왔습니다. 어부들이 도대체 어떻게 청어를 살려서 가져올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 답은 청어의 천적, 즉 청어를 잡아먹고 사는 물고기 한 마리를 청어들과 함께 넣어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청어들은 잡혀먹지 않기 위해서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도망 다니다 보니까 죽을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좋은 조건에서 운반되던 청어는 다 죽어버렸지만, 고통 중에 있던 청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듯이, 고통 없는 영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면서 내가 이겨내야 할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신비
-최혜영 수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삶은 예수님의 삶만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셨기에 믿음 하나에 자신의 전 생애를
내던진 분,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신 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였기에 혈연을 넘어
신앙 가족 공동체의 중심에 세워지신 분….
마리아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처럼 적나라한
인간실존의 고통과 죽음을 관통하실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이민자로서 이집트 피난살이를 경험하였고, 가난한 과부로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냈으며,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아들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마침내는 사형수의 어머니로서 십자가 밑에 섰습니다.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남의 고통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결코 피해서는
성장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듯 우리 자신들도 고통의 용광로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인내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배재근(F.하비에르) 신부-
교회는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아들 예수의 고통에 온전히 동참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운명은 참 기구합니다.
처녀의 몸이면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됩니다.
일찍이 예언자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리니, 그대의 영혼이 꿰찔리리라.”
이미 성모님의 고통은 시므온 예언자를 통해서 예고되었습니다.
성모님은 헤로데를 피해서 밤에 요셉과 아기 예수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성전에 남아있던 아들 예수를 사흘 동안 찾아 헤매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골고타 언덕길에서 서로 만나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아들 예수의 고통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를 못 박는 장면을 두 눈으로 보셔야 했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정말 성모님의 마음은 일찍이 시므온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요한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합니다.
아들 옆에서 성모님은 죽음 없이 순교의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아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아들 예수가 힘겹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어머니를 생각해서 요한을 당신의 아들로 주신 아들 예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한편 어머니보다 먼저 자신이 이 세상을 마쳐야 하는 아들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서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왜 교회는 오늘 기구한 운명을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가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복된 고통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고통입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훨씬 초월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아들 예수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부산교구 한종민 신부-
오늘 우리 교회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는 기억합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현양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본기도에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주님의 교회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기도를 통해서 고통의 성모 마리아의 의미를 보다 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합니다.
그 잉태는 마리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응답은 하느님께서 강생을 통해서 행하고자 하시는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입니다.
그 강생 사건이후에 성모님이 된 마리아는 예언자 시메온을 통해서 예수님과 당신에 관한 예언을 듣게 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ㄴ-35)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겪게 되실 고통과 함께 그 고통에 동참해야 하는 마리아의 운명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성경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가 그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순간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부탁하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극한 고통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통 속에서 마리아는 침묵합니다.
침묵은 동의(同意)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극한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침묵 속에서 그 고통을 동감(同感)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의 제자를 부탁합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부탁의 말씀은 우리 교회를 성모님께 맡기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신 당신의 어머니께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하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메온의 예언에 대해서 마리아가 성모님으로서 어떻게 그 고통을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고 그 고통에 말없이 동감(同感)했습니다.
고통은 선(善)이 아닙니다.
고통은 피해야 하는 악(惡)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악을 선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악(惡)의 십자가는 선(善)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그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침묵으로 그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리고 동감(同感)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 안에서 십자가는 아들을 죽이는 악(惡)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선(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많은 고통과 그 고통을 통해서 일어나는 악(惡)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그 고통을 피할 때 그 고통은 우리에게 악(惡)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악(惡)은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선(善)이 됩니다.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수난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히브5,7-9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 음 : 요한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 묵상
보통의 어린 아기들은 하루에 평균 400번 정도를 웃는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40세가 넘는 어른은 하루 평균 15번을 웃는답니다. 물론 더 많이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번도 안 웃는 사람도 있고 화만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요. 웃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5분을 웃으면 5시간을 운동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의 얼굴 표정은 인체 내 위장의 모습과 같아서 찡그린 인상을 가진 사람은 위의 모양도 찌그러져 있다고 합니다. 웃는 것이 이렇게 건강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잘 안 웃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는 㰡성 십자가 현양 축일㰡이었고 오늘은 㰡성모 마리아 고통 축일㰡입니다. 이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께서도 아드님의 십자가 길로 고통을 함께 걷고, 아파하셨기 때문에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밝고 활기 찬 분위기보다는 절제되고 엄숙한 분위기를 요구함으로 신자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불교와 개신교, 천주교의 신자나 성직자들의 모습과 분위기는 조금씩 다 다릅니다. 불교 신자나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늘어진 귀와 편안한 얼굴, 불룩 나온 배가 먼저 연상이 됩니다. 또 개신교 신자와 목사님을 생각하면 활기차고 밝으나 좀 가벼운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요. 그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와 사제, 수도자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무겁습니다. 밝고 활기 차기 보다는 근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내의 가르침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우리 천주교는 끊임없이 고통을 강조하고 희생을 요구하며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절제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치 천주교 신자는 오히려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게 하고, 성당에만 가면 무릎을 끊고㰡내 탓이오㰡를 외웁니다. 그렇게 고독한 수도자 같은 인상을 쓰고 있어야지 아주 신심이 깊은 신자라는 느낌이 오는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작아지고 주눅이 들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신자가 되면 지켜야 할 것은 왜 그리 많습니까? 신앙 생활을 오래한 할머니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㰡신부님, 용서해 주세요. 사는 게 다 죄지요.㰡
이러니 웃을 일이 있겠습니까? 마치 부활이 없는 십자가만의 신앙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신앙이 아니고 부활의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선 부활은 영광이고 기쁨이며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궁극적으로 기쁨과 희망과 영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슬픔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부활의 그 날까지 인내하며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성당에만 오면㰡내 탓이오㰡하면서 죄인이 되어버립니다. 결코 바른 모습은 아니지요.
교회는 왜 예수님과 성모님의 극심한 고통의 순간들을 㰡성모 통고 축일㰡이나 㰡성 십자가 현양 축일㰡 등으로 다양하게 경축하며 기념하고 기리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지요. 우리의 삶은 그렇게 부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인간은 고통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지나서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숙할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만 있다면 사람은 턱없이 교만해지기 십상입니다. 고통 안에서 인간의 본질과 하느님을 깨닫게 되지요.
모순과 한계를 지닌 인간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고통들을 겪으며 우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㰡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㰡(로마5,3-4)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바오로 사도 역시 고통 중에 바라보는 희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시련과 고통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잉태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십자가를 일생 지신 분이십니다. 루카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이런 예언을 하고 있지요.
㰡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㰡(루카2,35)
이 예언처럼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서 또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신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 어려움을 겪었고, 아이를 낳자마자 먼 이집트로 피신을 가야했으며, 그 아들이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고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가는 길을 함께 걸으셨고,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 가는 아들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처절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모든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순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과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성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 고통들을 극복해 내시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셨습니다. 부활을 희망하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고통이 부활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어떠한 믿음도 없는 고통은 처절하고 단지 허무할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가 고통스럽다고 이야기하지만 시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름진 삶 속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려움은 우리에게 희망과 부활을 제시해주지만 나의 욕심을 따르는데서 생기는 어려움들은 결코 부활을 잉태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고 이웃을 죽이고 모두를 죽이는 파멸을 가져올 뿐이지요. 반면에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겪게 되는 모든 고통들을 성모님과 예수님처럼 승화시킬 때 그것은 단지 허무한 시련이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자 부활입니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지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잎새>로 유명한 소설가 오 헨리 역시 시련과 고통을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오 헨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카우보이, 점원, 직공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은행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곧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이란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헨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고, 인간이 갖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깨달았지요. 결국 복역이라는 고통은 한 평범한 사람이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석방된 뒤 헨리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 얻은 풍부한 감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불과 10년 남짓한 작가 활동 기간 동안 그는 무려 300여 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가난한 서민과 빈민들의 애환을 다채롭게 그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도 나를 찾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고통들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이 하느님과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새로운 삶을 찾아내는 희망으로 열매 맺을 수 있지요. 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 유한한 우리 인간이지요.
처절한 십자가 밑에서의 절규 속에서도, 그리고 장사 지낸 지 사흘이나 지나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승화시켜 부활에 동참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모 통고 기념일의 의미이지요.
오늘 하루도 그렇게 마음 편한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웃으며 밝게 지내야 하겠지만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로 어찌할 바 모를 괴로움에 처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비한다면 그것은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결국 승리하셨고 부활에 동참하셨듯이, 믿고 노력한다면 우리 역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여러분과 함께 경축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어려움 중에도 기쁘게 노력하고 희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모 칠고
-조성풍 신부님-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예외 없이 고통스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단지 그 고통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반대받는 표적으로 살아가신 아드님과 함께해야 했기에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셨을 성모님의 고통을 교회는 일곱 가지로 전해줍니다 .
첫째,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신 고통. 둘째, 이집트로 피난 가신 고통.
셋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
넷째, 십자가 길에서 예수님과 서로 만나신 고통.
다섯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신 고통.
여섯째,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
마지막 일곱째, 예수님의 성시를 돌무덤에 장사지내심을 보신 고통.
그러나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한 자신의 일생을 결코 불행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는 협력자로서의 삶에 기꺼이 순명하셨음을 압니다. 사실 우리 삶 안에 도전으로 다가오는 많은 고통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때문에 실망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실망과 체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이
하느님의 뜻 안에 자리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어머니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그대에게
진주조개는 속살을 파고드는 진주핵(珍珠核)을 품고 아픔의 세월을 견딥니다.
진주(珍珠)가 커지면서 아픔도 함께 커집니다.
인고(忍苦)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무엇보다 영롱하고 단단한 진주(珍珠)가 태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주(珍珠)의 영롱함에 감탄합니다.
진주의 영롱함은 아픔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호사(豪奢)와 향락은 쌓이고 뭉쳐져도 빛이 나지 않습니다. 악취가 날 뿐이지요.
고통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여인 중에 복된 여인’(루가1,42)입니다.
잘 난 남편이나 출세한 아들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와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라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지 않았습니다(루가11,28).
죽음보다 더 큰 고통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 위에 인생의 뿌리를 내렸기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루가11,28).
십자가 아래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비명을 듣고도 혼절(昏絶)하지 않는 독함으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고통 중에서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하고 기도하며 서있을 수 있었기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은 진주(珍珠)보다 더 영롱하게 빛납니다.
고통을 피하려하지 마십시오.(一明)
마산교구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 : 주님과 함께 수난과 죽으심을 당하시는 성모님
-경규봉(전주교구)-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성모 통고 축일을 지낸다. 성모님은 주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신 분이시며, 성모님의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상 고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모님은 주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당하셨다. 약혼한 처녀의 몸으로, 약혼자와 무관하게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 사실을 약혼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부터 고통이다. 요셉이 성모님과 파혼하려고 마음먹고 있을 때에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했다고 성서는 간단히 기록하고 있지만, 요셉이 겪는 심적 고통은 상당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요셉의 심적 고통을 보면서 성모님이 겪는 고통 또한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처럼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당하셨다.
만삭의 몸으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여행해야 했으며, 더욱이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빈들의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아야 했다. 아마도 산파의 도움도 없이 예수님을 낳고 뒤치다꺼리까지 하셔야만 했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 갓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요람에는 뉘이시지 못할망정 방안에라도 뉘이셔야 했을 터인데 말구유에 눕히셔야만 했으니(루가 2,7),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시메온이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2,35)라고 예언하였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무엇보다도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피난길을 떠날 때에, 또한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기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마태2,16-18), 성모님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을까?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려 3일 동안이나 걱정하며 찾아다니실 때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루가2,41-50)?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실 때에 성모님이 겪은 심적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또한 예수님이 마귀 들린 사람이며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악령을 쫓아낸다는 소문을 들으셨을 때(마태 12,27) 성모님의 마음은 오죽 답답했을까?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로부터 배반당하시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실 때 십자가 아래 서계신 성모님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성모님은 이처럼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다.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더 주님과 함께 하셨으며, 주님과 함께 하신 그만큼 많은 고통을 당하셨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고통을 맛보셨다. 그리고 그러한 성모님의 고통은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5)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것이었다.
교회는 일찍부터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했으며, 예수님과 함께 고통과 수난을 당하신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 밑에 서 있는 것을 기도의 이상적인 모델로 여겼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지만, 성모님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내적 평화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평화와 모든 심적, 육적 고통을 이겨내시면서 주님과 함께 하신 것이다.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평화와 힘을 가지고 성모님과 함께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하루가 되자.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 성모칠고 - 하느님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 순간
-박상대 신부 -
어제는 교회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심으로써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며, 나아가 부활과 생명, 구원과 해방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 안에는 말 못할 고통이 묻혀있다.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한 여인의 고통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일생을 통하여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받으신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 아울러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그 고통이 그분만의 고통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세상 구원을 위한 우리 모두의 고통임을 각오하려 한다. 그러므로 오늘 기념일이 어제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모께서 겪으신 고통에 대한 구원사적 반성(反省)은 이미 중세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중세기에 이르러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 즉 성모칠고(聖母七苦)를 일부 지방교회에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1600년대에는 수도회로 확산되었고, 1814년 비오 7세 교황이 전체교회에 보급시켰다.
성모님께서는 평생을 두고 아들로 말미암아 마음 쓰시고 속을 태우셨겠지만 그 가운데 일곱 가지 고통을 알아보자.
①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4-35)
②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가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대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마태 2,13-15)
③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사흘 동안 찾아 헤맴: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루가 2,41-52)
④ 골고타로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모자(母子) 서로 상봉하심: “예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손에 넘어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밖을 나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타라는 말은 해골산이라는 뜻이다.”(요한 19,16-17)
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마태 27,35)
⑥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앉으심: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요한 19,38)
⑦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심: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루가 23,53)
성모칠고 중 ④~⑦에 관한 성서상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던 여인들을 일일이 언급하고 있으나(마태 27,55-56; 마르 15,40-41; 루가 23,49), 성모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성모님에 대한 유일한 성서상의 언급은 요한복음사가의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던 어머니 마리아와 애제자(愛弟子) 요한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성모 마리아는 과월절을 시작하던 새벽시간에 예수께서 붙잡혔다는 소식을 도망쳐 나온 제자들로부터(마태 26,56) 전해 듣고 달려와, 줄곧 아들 예수 근처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는 아들의 십자가 길을 동행하였고 가능한 십자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마리아는 어떻게 이 모든 시간들을 이겨내었을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을 에는 비통 중에 하염없이 우시네.”(부속가 4) 인간의 어떤 말도 표현도 성모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이 어디 칠고(七苦)뿐이겠는가?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고통이 늘 그분과 함께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오늘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당신이 어머니 마리아와 하나임을 확인하신다. 그리고 애제자에게도 말씀하신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27절) 이렇게 성모님은 마음을 에는 고통 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탄생되는 교회의 어머니요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우뚝 서신다. 그분은 일생을 고통으로, 그러나 포기나 좌절함이 없이 아들과 하느님의 뜻을 좇아 끝까지 인내와 겸손으로 구원사업에 협력하셨다. 그러기에 성모께서 받으신 고통과 아픔은 하느님 크신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物理的)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모 통고의 참의미
교회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 다음 날에 성모 통고 축일(9월 15일)을 지낸다. 이렇게 마리아 어머니의 고통을 지내는 신심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고, 또 이 축일은 풍성한 영신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다.
1. 복음서의 근거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가 서 있었다"(요한19,25).
마리아 어머니가 갈바리아에서 함께 자리하신 것은, 예수를 성전에 봉헌할 때 성령이 시메온으로 하여금 예언하게 한 그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었다. 그때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하였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2,35).
복음서를 보면 우리는 마리아의 다른 고통들도 익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낳을 때 큰 불편을 겪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가2,7). 베들레헴의 아기 학살 사건이 있었다(마태2,16-18). 3일 동안이나 예수를 걱정하며 찾아다녔다(루가2,41-50). 나자렛 주민들이 아들 예수를 들고 일어나 동네밖으로 끌어냈고,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다(루가4,28-30). 그 후 예루살렘의 율법 학자들로부터도 같은 곤욕을 치루셨다(루가11,53-54, 19,47-48 등등). 그 외에도 수난 기사들이 있다.
바오로 6세는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고 마리아의 고통을 이사야 53장을 암시하면서 설명하셨다(마리알리스 꿀뚜스 7).
2. 마리아의 연민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밑에 서 있으려는 것이 옛 신자들의 기도이자, 기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4-5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사막의 교부" 포에멘 원장은 오랜 탈혼에서 깨어난 뒤에 이렇게 혼자말을 하였다: "내 영혼은 구세주의 십자가 밑에서 울고 계시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와 함께 있었습니다.
나 역시 마리아 어머니와 함께 흐느껴 울고팠습니다."(APOTHEGMA 144).
4세기의 성 에프렘 시리아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의 애가를 썼는데, 이 마리아 애가는 성 토요일 저년 기도에서 지금도 불려지고 있다(시리아 전례).
500년경의 성 로마노 작곡가는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 찬가"를 썼는데, 이 찬미가 속에는 예수께서 당신 모친에게 고개를 돌려 십자가의 신비를 설명하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서방 교회의 대성인들도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고 가르쳤는데, 그들 중에서도 성 암브로시오와 안셀모 그리고 베르나르도가 가장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이 영성의 주제(통고)는 13세기에 이르러 아주 보편적이고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는데, 특히 프란치스코회 설교자들과 성모의 종 수도회들의 공로가 가장 크다.
이 시대의 성모 통고 신심을 알려 주는 좋은 시는 야꼬뽀네 다 또디(+1306)가 강렬한 슬픔을 표현한 "마돈나의 비애"가 있다:
오 아들아, 네 영혼이 널 떠났구나,
오 아들아, 기가 죽었구나,
오 아들아, 멀어져 가는구나,
오 아들아, 힘이 쇠하였구나!
오 아들아, 붉고 흰 피로 목욕하였구나.
오 아들아, 비할 데 없구나,
오 아들아, 난 누구에게 가야 하리? 오 아들아, 너는 날 떠났구나!
이러한 분위기는 중세기 성모 신심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었는데,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성자 곁에서 그 모친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였다"는 사상이 짙게 깔려 있는 성시이다. 이어서 나온 시가 저 유명한 "십자가길의 성모"(STABAT MATER)이다. 그리고 11세기에 나온 "그리스도의 생애 묵상"이란 책에서 보편화되어 알려진, 소위 "성모님의 발작설"은 서서히 사라졌고 또 교황과 신학자들도 이를 인정치 않았다.
3. 마리아의 통고
마리아 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다. 이런 신심을 크게 보급시킨 분은 아마도 헨리코 수소(1295-1366) 성인인 듯 하며, 이 밖에도 도미니코회 라인강 주변의 신비가들의 공로가 크다고 한다. 갈바리아의 중심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즉 예수님의 체포에서부터 장례 때까지를 묵상하던 중에 이 신심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신비가들은 먼저 "마리아의 다섯 가지 기쁨"을 대중적인 신심으로 보급시킨 뒤, 성모님의 다섯 가지 고통 신심을 전파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성모 칠고 묵상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마리아의 통고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 내용과 같다. 예수의 수난이 곧 마리아의 수난이었다.
1. 예수, 체포되시고 매맞으으심을 묵상합시다.
2. 예수,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받으심을 묵상합시다.
3. 예수,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4.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5. 예수, 숨을 거두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을 묵상합시다.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움을 묵상합시다.
7. 예수, 베로 감아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보아서 예수의 어린 시절이 포함된 "성모 칠고"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시메온의 예언.
2.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과 에집트 피신.
3. 예수,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리심.
4. 예수, 체포되시고 재판 받으심.
5.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움.
7. 예수, 베로 감아 무덤에 묻히심.
이 신심의 또다른 변형은 당신 아들이 생활하시고 활동하시다가 사형당하신 곳을 찾아보시는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다. 이 신심은 야고보 데 보라지네의 "황금 전설’에 따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성모 칠고" 신심은 14세기에서 보편화되었고, 또 수많은 묵상과 기도를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 시켰다. 물론 성모 칠고를 그린 회화와 성상들도 제작되었는데 저 유명한 "피에타"는 곧 이 신심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1464년초, 도미니꼬 회원인 앙렝이 "동정 마리아의 새로운 시편"(매일 성모송 150번 바치는 기도)을 전파하고 다닐 때, 그는 성모성 50번마다 우리 주님의 수난과 당신 모친의 통고 그리고 최후의 만찬부터 장례까지를 묵상의 주제로 추천하였다.
1475년에 쾰른에서 처음 생겨난 로사리오회는 "다섯 가지 통고"가 포함되어있는 15가지 신비 목록을 만들어 묵상토록 하였다. 위의 "다섯 가지 통고"는 게쎄마니의 비애, 매맞으심, 가시관을 쓰심, 십자가 지고 가심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다.
1482년, 플란델의 교구 사제인 요한 드 쿠당베르는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성모 칠고를 묵상하도록 가르쳤다:
1. 시메온의 예언(루가2,34-35).
2. 에집트로 피신하심(마태2,13-21)
3. 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루가2,41-50).
4. 갈바리아로 오르심(요한19,17).
5. 예수, 십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요한19,18-30).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요한19,39-40).
7. 예수, 무덤에 묻히심(요한19,40-42).
이 신심은 오늘날 "성모 통고회"가 보전하고 있고, 또 교황의 승인도 받았다.
4. 영성
구세주 예수의 수난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동참은 성서 신학이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어 준 마리아 영성의 중요한 일면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를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는"(교회 55) 여인, 그리고 "시온의 훌륭한 딸"(교회 55)로 부르고 있으며, 바오로 6세께서는 주의 봉헌을 언급하시면서, 마리아를 "옛 이스라엘의 사명을 완수하신 분이자,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모델"(마리알리스 꿀뚜스 7)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갈바리아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신"(참조. 요한 19,30) 성자의 수난으로 그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를 위해 "해산의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묵시 12,2).
성서적인 이런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의 기쁨과 고통(신적 모성과 십자가의 고통)은 마리아와 교회에 대해 불가분의 성격을 띄는 것이다. 그러므로 9월 15일, 성모 통고의 전례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신심이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5).
그리고 성모 통고 축일의 본기도는 다음과 같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성자 곁에서 그 모친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게 하신 천주여, 당신 교회로 하여금 성모와 함께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눔으로써 그 부활에도 참여케 하소서. 성부와..."
<묵상마무리>
오늘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평생을 예수님의 곁에서 수난과 고통을 함께 하신 성모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그동안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수난에 직면하자 모조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비록 멀찌이서나마 자리를 지킨 것은 요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더 이상 군중의 환호를 받지 못하자 신앙을 지탱하던 인간의 의지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종교계와 국가의 권위가 그분을 배척하자 사도들은 그만 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인간적인 버팀목에 의존하고 있다가 그것이 사라지자 그들 역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십자가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분의 믿음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여겼지만 그분의 신성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점에 있어서 수정처럼 투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파멸로 만사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예수를 단순한 메시아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우러러 보던 마리아는 어떤 기분이셨을지 생각해 봅시다. 말하자면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이 죽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죽음은 마리아에게 더없이 비통한 인간적인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과 같았습니다. 마리아는 단순히 메시아인 당신 아들 때문에 비탄에 잠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때문에 비통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가 십자가의 심오한 그 신비를, 이른바 둔감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자신을 내던지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간파한 사람은 오직 마리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분의 동정심은 하느님께서 품고 계시는 우리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당신 어머니 마리아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로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관계를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면서 공경하게 되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그 이름처럼 다정하고 감미롭고 자애로운 이름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맨 먼저 어머니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 애타게 기다리던 취직 통지를 받은 사람, 피땀 흘려 싸워서 승리의 월계관을 쓴 운동선수. 그들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면 한결같이 그 기쁨을 맨 먼저 어머니에게 알리고 싶다고 합니다. 앓아 누웠을 때는 어떻습니까? 어머니가 손만 잡아주어도, 아니 머리맡에 앉아 계시기만 해도 견딜 수 있었지요.
그분은 분명 우리들의 어머니이시니 좋은 일이 있을 땐 기뻐해 주시라고, 슬픈 일이 있을 땐 위로해 주시라고 응석을 떨곤 합니다.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저희를 지켜주시는 성모님은 분명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계셨던 성모님은 우리의 온갖 시련의 동반자요, 지주이십니다.......(아멘).......◆
[두올묵상팀]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0) | 2007.09.17 |
---|---|
2007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0) | 2007.09.16 |
2007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0) | 2007.09.14 |
2007년 9월 13일 목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0) | 2007.09.13 |
2007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0) | 2007.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