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07. 9. 12. 01:15

  2007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무조건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져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굶주리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그 원인이 주님이어야 한다. 행복 역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

 

 오늘 복음은 행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에 대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부족함을 느끼는 데 행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넉넉하고 넘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을 행복의 첫 조건으로 꼽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마음을 비우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채우라는 것일까요?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는 모두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듯이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의 가난은 욕망 앞에서 절제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지식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얼렁뚱땅 다가가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행복의 첫 출발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물질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소유, 곧 그분의 힘과 은총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양승국신부-


<착한 죽음의 연습>


   저희 수도회 오랜 전통 가운데 ‘착한 죽음의 연습’이란 것이 있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당신이 설립한 아이들의 기숙사에서 행해지던 행사였습니다. 저희 집 같은 양성공동체에서는 아직도 그 좋은 습관이 남아있지요.


   ‘착한 죽음의 연습이란’ 뭔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피정을 한번 하는 것입니다. 월말이 다가오면, 월례피정을 하면서 피정과 동시에 자신의 생활공간과 주변을 깨끗이 한번 정리정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불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공동체 앞에 내어놓습니다. 언제 죽더라도 잘 정돈된 모습으로 떠날 수 있도록 외적, 내적인 준비를 한 달에 한번 실시하는 것이지요.


   최근 새 학기를 맞이한 저희 공동체에서도 ‘착한 죽음의 연습’을 실시했습니다. 사용하는 침실도 바꾸었습니다. 저도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침실을 바꾸었습니다.


   침실을 바꾸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는 형제들, 그 짐을 옮기느라 낑낑대는 형제들을 저는 그냥 두지 못합니다. 인정사정없이 혼냅니다.


   “수도자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으냐? 달랑 가방 두 개만 양손에 들고 갈 수 있어야지”


   그러면서 저는 보란 듯이 폼을 잡지요.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만 이불에 뚤뚤 말아서 어깨에 메고 단 한 번에 침실을 비워버립니다.


   뭐든지 모으기 시작하면, 거기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중에는 반드시 애착이 가는 값진 물건도 있겠지요. 그러니 당연히 문단속도 잘 해야 합니다. 어디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것은 절대로 사지 않고, 모으지도 않고 늘 정리하며 살아가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 침실을 바꿀 때, 공동체를 바꿀 때, 그렇게 간단할 수 없습니다. 침실 문을, 사무실 문을 언제든지 활짝 열어놓고 살아갑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 실감하며 삽니다.


   하느님 나라가 약속된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는지 생각해봅니다.


   시편에서는 인간의 능력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하느님은 뒷전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만 신뢰하고 그분께 삶의 마지막 희망을 두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기에,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께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 사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 집착 때문에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할 여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매일 그 소유로 인해 부대낍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영혼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어렵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상 천국 체험은 요원합니다.


   매일 버리는 사람들, 매일 떠나는 사람들, 매일 정리하는 사람들, 매일 어제와 결별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지상에서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서있는 듯한 감미로운 평화가 친구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양심불의 촉수를 높일수록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옛날 중국엔 같은 날 한집안에서 출산과 제삿날이 겹치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제자가 근심에 가득 차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방금 제 아들이 태어났는데 오늘이 어머님의 기일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스승이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가서 모친의 제사를 지내게.” 그러자 제자는 환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나갔습니다. 잠시 후 다른 제자가 와서 역시 근심어린 모습으로 물었습니다. “방금 저희 집에 강아지가 태어났는데 오늘이 마침 아버님의 기일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제사를 궐하게나.” 그 제자도 안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곁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다른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보기에는 같은 경우인데 어찌하여 한 제자한테는 제사를 지내라 하시고, 한 제자한테는 제사를 궐하라 하십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각각 원하는 대답을 해준 것뿐일세. 자식이 태어난 날이긴 하지만 어머님의 제사를 지내고 싶어하는 마음과 강아지가 태어났다는 것을 구실로 아버님의 제사를 궐하려는 마음을 그대로 읽어준 것뿐이라네.”
이어서 스승이 그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낮과 밤을 무엇으로 구별하느냐?” 제자가 말했습니다. “저만치 서 있는 나무가 보이면 낮이고, 안 보이면 밤입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형제의 얼굴이 보이면 낮이고, 보이지 않으면 밤일세.”
양심불의 촉수를 높일수록 진리를 보고 기뻐하고, 불의를 보고 슬퍼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서영남 (인천 민들레 국숫집)-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가난한 사람이 정말 행복합니까? 정말 가난은 힘겨운 것입니다. 노숙을 해야 하고, 추운 방에서 자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질병으로 고통받고 울어야 합니다. 가난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가난은 참으로 막막한 것이고 슬픈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외롭고 속상한 것이 가난입니다. 하느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주고 사랑하고 정의를 지키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처럼 들리는 세상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부자가 없습니다. 부자가 없으면 가난한 사람 또한 없습니다. 절대다수 사람들의 빈곤은 극소수 사람들의 부유함의 직접적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욕심내고, 편하게 살기를 꿈꾸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이름 석 자 남기려 으스대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부끄럽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행복은 재물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가짐과 생활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에 얽매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뛰어넘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뛰어넘는 의미와 가치가 바로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상입니다.

가난한 민들레 국숫집 손님들이 나누는 파 한 단, 사과 한 봉지, 하루 일한 막노동의 대가를 선뜻 나누는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익명으로 보내주시는 쌀과 반찬들,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면서도 나눠주시는 마음 가난한 분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을, 세상을 초월하는 의미와 가치를 얻기 위해 때로는 현실적인 안녕과 편안함을 물리치고 스스로 고통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결정적 자유입니다. 또한 고통과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야말로 인간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행복의 열쇠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신앙인의 행복 지수

-서울대교구 조풍성 신부-


언젠가 인터넷에서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뜻하고,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의미한다’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적 소중한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네 잎 클로버 찾기에 열중하다가 무수히 많은 세 잎 클로버들을 짓밟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인생살이 안에서도 일어날까 말까한 커다란 행운을
잡기 위해, 자기 옆에 있는 소소한 행복을 무시하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행복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의 작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리저리 헤매던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는 가장 낯익은 곳, 바로 그들의 고향 일상의 삶 안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 또는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를 물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소박한 곳, 겸손한 그곳에서
행복은 드러나고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부산교구 장훈철 바오로 신부-

 

이젠 가을이라는 계절의 이름을 불러도 될 만큼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우리들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루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선언’을 말씀 하셨습니다.
특히 이 루가복음을 흔히 소외 자들의 복음서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신 행복선언의 말씀은 소외 받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루가복음서 전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그 시작이 바로 오늘 ‘행복선언’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각자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옛 청소년 영화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제목이 떠오릅니다.
요즘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공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아마도 행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스개 소리 하나 할까 합니다.
이 영화 제목을 듣고 저희 본당 주일학교선생님께서 저에게 농담이면서도 아주 진지하게 ‘신부님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연 봉순 이예요 호호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에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또한 도시에서 사목을 맡아하는 사제로서 누구보다도 경제적인 면이 우리들 모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부가 우리들 모두의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자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는 ‘성적과 경제적인 부’ 이 둘이 행복의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이 현실을 탓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 이 둘의 특징을 알고 이것이 모든 행복의 기준이 될 자격이 없음을 느끼길 바랍니다.

이 두 가지의 특징은 끊임없이 올라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올라가면 누군가는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이 둘은 계속해서 순서를 매깁니다.
그러나 항상 일등과 꼴지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경쟁이라는 미명아래 투쟁의 전쟁터 같은 싸움에 휩쓸리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할 우리들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위의 기준으로 순서를 매기면 이 세상에는 딱 한 명만 부자이고, 한 명만의 1등이 존재할 뿐입니다.

돈은 더 쓰지만 즐거움은 줄었고, 집은 커졌지만 식구는 줄었습니다.
일은 더 대충 대충 넘겨도 시간은 늘 모자라고, 지식은 많아 졌지만 판단력은 줄었습니다. 약은 더 먹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
우리는 달나라에도 갔다 왔지만 이웃집에 가서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외 받는 모든 이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서를 매기지 않으셨습니다.
9월의 선선한 가을바람을 맡으며 행복한 상상을 한번 해 봅니다.

올해의 봉사 상은 누가 뽑힐까? 올해의 헌혈 왕은 누가 될까? 올해의 선행 학생과 청년은 누가 뽑힐까? 라는 고민이 연예인 연기 대상 못지 않은 세인의 관심과 인기를 끌 그 날을 기다리며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우리의 풍요로운 관심을 보여줍시다.

 

 “사람이 찾아야 할 참된 행복”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새옹(塞翁)이란 새상(塞上:북쪽 국경)에 사는 늙은이란 뜻이지요. 글이 생겨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福)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또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새옹지마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또 마냥 기뻐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의미의 고사성어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화와 복이 노끈처럼 번갈아 찾아옵니다. 결코 어느 한쪽만 찾아오는 일은 없지요. 언제나 행복과 불행이 함께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4개의 행복 선언과 4개의 불행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우리가 바라는 행복과 불행이 반대로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시고, 반면에 부유한 사람, 배불리 먹는 사람, 웃고 지내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물론 여기서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등은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심한 낭비벽으로 가난해진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따르다가 어려워진 사람들입니다. 또 여기서의 부자 역시 재물과 권력과 세상을 사는 재미에 빠져서 하느님을 떠나 눈 앞 세상에만 의지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세상에서 부유해진 사람은 자칫 이 세상의 형편에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붙잡지 않게 됩니다. 자기의 재물과, 지혜와 권력에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재물은 더 많은 재물을 요구하고, 권력은 더 높은 권력을 요구합니다. 끝없이 세상에 집착하게 만들지요. 그럼으로써 결국 재물이 인간을 지배하게 됩니다.

반대로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욕망에서도 멈출 줄 알고, 소유한 것이 많지 않아도 함께 나눌 줄 알며, 적은 것에 감사하고, 끝없는 소유의 욕망 앞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만족할 줄 아는데서 비롯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알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만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 오늘 복음이 얼마나 명확한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 때문에 말 그대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혹독한 박해 중에서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고, 박해 중에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 순교자들을 박해했던 사람들은 부유했고 권력가들이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의 눈에 너무나도 잘 보이는 사실입니다. 박해를 하고 사람을 죽이면서 오히려 더 불안하고 힘겹게 살게 된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가난하게 되거나 박해받는 상황을 자처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하게 노력해서 풍요롭게 살아야 하지요. 그것이 하느님 축복의 열매입니다. 그래야 이웃과 나눌 수도 있고, 가정을 꾸려갈 수도 있지요.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잠언30,9)라는 잠언 저자의 말처럼 게을러서 가난해지지도, 또 재물 때문에 하느님을 떠나서도 안되겠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불행은 누구에게나 교차됩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권력이나, 재산, 또는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재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지요.

그런데 우리 시대는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돈! 돈! 돈! 하며 살아갑니다.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또 자녀들까지도 돈을 벌러 나가지만 만족보다는 끝없는 갈증에, 그리고 상대적인 빈곤에 시달립니다.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지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줄 알며 절제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 공동체 안에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내가 무엇으로 나의 중심을 채우고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이나 재물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에 끝없이 휘둘릴 뿐 참된 평화나 행복은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말씀하시며 우리 삶의 핵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중심에 계실 때 참 행복이 시작됨을 기억하며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     

-최혜영 수녀- 

 

예수님의 전도 활동 초기에는 군중들의 인기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기적적인 치유를 받으려고 사방에서 병자들이 몰려오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다고 감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조상대대로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 마음을 부풀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던 현세적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라, 섬김의 삶과 수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는 점차 그분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가 현재의 실패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풍성하게 열매 맺으리라는 확신을 보이셨습니다. 비록 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세상 끝에는 승리하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비전은 이렇게 “올바른 일을 할 때는 눈앞의 이익이나 남의 이목에 좌우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 속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김경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상 논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부자가 되고 싶은데 부자는 불행하고, 오히려 가난하고 배고프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말씀이 이제 나이를 먹고 인생 중반을 넘어가니까 조금은 알아듣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얻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얼마나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얻고 싶은 행복은 물질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을 가져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행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불행합니다. 내가 지금 가난해서, 배고파서 울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말할 수 있어 행복하고, 걸을 수 있어 행복함을 누릴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정용철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스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밝고 생각이 깨끗하며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어떤 유혹도 다가오지 못합니다. 어떤 슬픔도, 미움도, 시기도 그를 당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으로 남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의 편입니다. 따라서 외롭지 않고, 외롭지 않으니 두려움도 없고, 흔들림도 없습니다. 그는 사랑을 낳고 기쁨을 만들며 감사를 나누고 희망을 전합니다. 그는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진정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이 말씀을 생활 속에서 육화시키면서 체험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가졌다고 뽐내지 않고 없다고 기죽지 않으며 항상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확신입니다.


 

 -배재근신부-


흔히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은
16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십대 때 ‘30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 55세 때,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려고
파리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평신도 수도사로 들어가 부엌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의 식사를 해주면서 부엌을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식사를 수도사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했습니다.
“하느님! 이 귀한 천사들을 섬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에게 비천한 부엌일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하찮은 일도 사명감을 가지면 소중한 일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수도사들을 섬기면서 행복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는 작은 일도 큰 일로 생각했고, 접시 하나 닦는 것을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변함없이 살자 수도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을 때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신도 수도사인 그가 원장에 뽑혔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행복의 조건은 없었습니다.
그는 교육도 못 받고 절름발이로 가정도 이루지 못했지만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힘든 부엌일을 하면서도
항상 기쁜 얼굴로 “나는 참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국왕 루이 12세가 수도원을 방문해 그에게 행복의 비결을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섬기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들이 행복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은 하느님만을 섬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현세에 만족하며 하느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도 참 복된자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모두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를 달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바친 금구 성인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섬기는 일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모두를 하느님 섬기듯이 산다면 그곳은 이미 천국일 것입니다. 아멘.

 
행복선언 불행선언

-이회진-


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뒤 12제자를 뽑으신 예수님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아래 자신들의 자리에서 기다리던 이들이었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루가 복음은 5장-9장까지 설교와 기적 등을 통해 모두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늘 우리가 듣는 4가지 행복선언과 4가지 불행선언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이 보다 집약적이며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야 하며,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멸시 받는 이들을

“지금” 가까이 바라볼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아픔, 고통, 슬픔, 멸시, 인간 소외, 질병, 기아, 고독 … 등

인간의 온갖 어려움에 대해 마음을 열어 관심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걱정이 없다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바라보는 데 둔감해지는 것을

예수님을 “불행하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활 영역이 좁은 사람들은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고,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관심 혹은 가족에 대한 관심 정도 밖에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세대에 부모님들의 첫 번째 관심은 하나나 둘밖에 없는 자녀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 어려움에 대해 부모들은 이미 알고 있기에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더 많은 지식과 방법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첫 교육부터 대결과 성공 그리고 사랑의 주관적인 면을 무의식중에 가르치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에 대해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사람이 살아갈 동기와 힘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음을 보도록,

그래서 더 많은 동정심이 필요하며 더 많은 형제애와 선행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복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깊은 마음을 지닐수록,

우리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아픔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도 더 섬세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것이죠.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 전하는 4가지 행복과 불행에 관한 선언에서도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외적 만족이나 물적 충족감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말씀으로부터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적 감수성”을

“지금” 지닌 그리스도인이 되길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바라보길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이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금 잠시 눈을 감고 저에게 어려움을 느끼는 이의 마음을 제 마음에 담으며 당신께 기도합니다. 그를 위해 당신의 은총을 청합니다. 아멘.”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강영구신부-

태풍 ‘나비’가 동해안으로 날아갔습니다.
오늘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깨끗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가난이나 부요(富饒)가 행복(幸福)과 불행(不幸)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난과 부요(富饒)가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거나,
부요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天國)입니다.

가난의 그릇에 하느님 나라를 담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차지하기에 누구보다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가난의 그릇에 탐욕을 담아서 불행해집니다.
탐욕은 족쇄이자 늪입니다.  
탐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탐욕의 늪에 빠지면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이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그분 위에 서있다면, 가난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가난은 하느님 나라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당신이 부요하다 하더라도 돈과 재물에 기대서지 않고 하느님께 기대어 선다며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당신의 부요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어주는 방편이 됩니다.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예수님을 닮는 가난한 사람입니다.(一明)

마산교구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

-박상대신부-

 

  한적한 산에서 밤을 새워 가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다음날 12제자를 따로 불러 사도로 세우셨다. 예수의 일행이 산을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뿐 아니라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가르침을 목말라하고, 병고에 허덕이고,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를 고쳐주셨다.(루가 6,12-19) 이제 예수님의 설교가 시작된다. 청중은 12제자, 다른 제자들, 그리고 모여든 백성들이다.

 

  오늘 복음은 루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평지설교"(6,20-49)의 시작이다. 루가복음의 평지설교는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5-7장)에 비해 그 분량이 매우 적다. 루가의 평지설교는 행복선언(20-23절), 불행선언(24,26),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판단금지(37-42절),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에 관한 내용이다.

 

  마태오복음이 산상설교의 첫머리에 "9개의 행복선언"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 루가는 4개의 행복선언과 4개의 불행선언을 들려준다. 원전(原典)이 되는 예수어록에는 4개의 행복선언이 전해지는데, 마태오는 5개를 추가하여 9개로 편집하였고, 루가는 4개를 충실히 옮겨 쓰면서 4개의 불행선언을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행복(불행)선언의 짜임새를 보면, 우선 대상(對象)이 언급되고, 다음에 행복(불행)선언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그 이유가 될만한 보상(補償)이 언급되는 구조를 이룬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이 구조를 따라 선언문을 살펴보자. 마태오복음의 9개 행복선언: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 - 하늘나라, ② 슬퍼하는 사람 - 위로, ③ 온유한 사람 - 땅, ④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만족, ⑤ 자비를 베푸는 사람 - 자비,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하느님 대면, ⑦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 하느님의 아들, ⑧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 하늘나라, ⑨ 예수님 때문에 모욕, 박해, 비난을 받는 사람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행복선언: ① 가난한 사람 - 하늘나라, ② 굶주린 사람 - 배부름, ③ 우는 사람 - 웃음, ④ 예수님 때문에 미움, 추방, 모욕, 누명 받는 사람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불행선언: ① 부유한 사람 - 위로 끝, ② 배부른 사람 - 굶주림, ③ 웃는 사람 - 슬픔과 울음, ④ 칭찬 받는 사람 - 거짓 예언자와 동급.

 

  예수께서는 지금 가난함, 굶주림, 울음, 미움과 추방, 모욕과 누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선포하셨고, 그 반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셨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이런 상태 자체를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좋을 "부정적인 것", 즉 악(惡)의 범주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유함, 배부름, 웃음, 칭찬 그 자체를 불행한 것으로 선포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되려 "긍정적인 것", 즉 선(善)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왜 부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로, 긍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불행한 자로 선포되는 것일까? 그것은 각각의 상태가 가지는 수용능력 때문이다. 가난함과 부유함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잘 수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세에서 물질의 부유함과 넉넉함을 누리는 사람에게 청빈을 요구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회개의 경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는 브라질 까마라 대주교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이들!(루가 6, 20-26)

 -유 광수신부-

 

오늘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인가를 말씀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늘 우리에게 빛이다. 즉 우리가  어떻게 살면 행복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는 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계시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이 밝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는 복음을 알아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반드시 모든 인간이 알아야 할 진리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고, 그 진리의 길을 살아갈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복음을 모르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신앙인들은 이런 새로운 진리를 알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행복한 곳으로 가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알고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참된 인생의 길을 안내 해주고 보여주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을 증거하는 증거자들인 것이다. 

 

하느님이 밝혀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전혀 낮선 삶이며 새로운 길을 걷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일반인들의 가치관과 행복관은 인간적인 사고, 인간적인 지식과 이 세상에 국한된 사고 안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 행복관은 하느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깨닫게 된 새로운 세계요, 새로운 가치관이요, 행복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五福)이라는 것이 있다.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이다.
수는 장수하는 것이요, 부는 재물이 풍부한 것이요, 강녕은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이요,유호덕은 도덕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일이요, 고종명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행복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재물을 축적하려고 하고, 장수하기 위해서 몸에 좋다는 약이나 건강 식품을 찾아 먹는다. 몸에 좋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먹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나 이런 행복관도 시대에 따라서 변화한다. 요즈음은 도덕을 지키는 유호덕이나 제 명대로 사는 것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사는 삶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아무튼 시대에 따라 가치관과 인생관도 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관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시한 행복한 이와 불행한 이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큰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한 이들 즉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을 당하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부유한 이들,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불행하다고 말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왜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고 또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가치관이나 행복관이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과 불행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고 바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행복관 즉 많은 재물, 우리의 건강, 장수 등일 것이다.

 

또 우리가 기도를 하더라도 그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건강을 위해서, 재물을 풍부히 갖을 수 있도록, 출세를 위해서, 편한 마음으로 오래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님이 제시한 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 간단하게나마 예수님은 왜 가난 이들,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 모욕을 받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는가?.

 

"행복하여라"는 말이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냥 행복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한 이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이 행복한 이들인지를 지적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제시한 행복관은 영적인 차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즉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제시해준 것이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존재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려면 무엇보다도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란 나약한 사람, 청하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 의탁하는 사람을 말한다.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것을 청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한다. 부자는 이런 것을 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부르기 때문에 청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굶주리는 이들이란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것에 굶주린 사람을 말한다. 우는 이들이란 영적인 것을 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자기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뉘우치고 우는 이를 말한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쫓아냄과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란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편 불행한 사람이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칸트는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가인 에카르트는
"하느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그 무엇을 털어내는 것이다"라고 했고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병고와 가난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