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Whoever does not carry his own cross
and come after me
cannot be my disciple.
건물을 세우려 한다면 먼저 경비를 따져 볼 것이다. 전쟁을 할 때에도 상대의 세력을 알아본 뒤 작전을 짠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결과를 맞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도 그 의미를 알아야 기꺼이 질 수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련 앞에 나서면 어려운 삶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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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국가 반역자를 처형하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였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도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삶의 역경을 평화의 계기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짊어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고통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저마다 다양하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절박함
-김인한 신부-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신앙의 선조들에게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바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직 채워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잃더라도 주님을 잃을 수는 없다는 그 절박함으로 말입니다.
어찌 보면 신앙의 선조들은 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선택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포기한다고 하지만,
진정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을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하지 못해서 이기적이 되고,
다른 이에게 아픔을 입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기적이 되고, 다른 이에게 아픔을 안기고 ,
그리고 자유롭지 못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비워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지 못하는 우리네 삶인 것
같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내 안에 가득 채움으로써
주님 도구로서의 삶이 되길 기도해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려놓아야 할 것들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 접하는 세계에 들어갈 때는 자신이 과거에 지녔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옛날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결혼에서 자주 다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친정 가정에서 배운 태도나 규칙들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방해가 되는 옛것들은 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만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4,25-33)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덜 사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추종할 때는 예수님을 가장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앞자리에 모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제베대오의 아들 야보고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놔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마르 1,16-20). 게다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세관원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자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28).
그러나 내려놓지 못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특히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마음이 가는 것만 보이고, 마음이 가는 쪽의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다른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돈, 명예, 사회적 지위, 학력, 더 나아가 교만함, 질투심, 욕심 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있어 자신에게 방해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걷어 내어 홀가분하게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익숙하지만 미워하라는 오늘 복음은 낯설기만 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도대체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유다인에게 있어서 '미워한다'는 말은 우리말의 의미와는 달리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서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모나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둘째 자리에 놓고 첫째 자리에는 하느님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자들을 많이 봅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의 첫째 자리에는 자식이나 재물, 때로는 관심사인 음악이나 미술이 놓여 있어도 안 되며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오직 예수님만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던 해에 하느님 은총으로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으나 어느 날 하느님께로부터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받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아브라함은 삶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며 일생을 살아왔기에 애지중지하던 외아들을 넘어서 하느님 말씀에 순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바다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후손을 축복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반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재물과 예수님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결국 재물을 첫 자리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영원히 구원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삶의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번째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회적 상황으로 가장이 갑자기 실업자가 될 수도 있고, 건강하게 잘 살다가 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자녀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고 부부간에 말 못할 고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지요. 이것을 원망하고 비관하며 끝내 이런 아픔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의 기쁨에 동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알게 된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청춘 남녀가 꿈에 부풀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불행히도 뇌성마비에 걸린 아기였습니다. 그 때부터 이 가정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원망하고 아내는 남편을 원망했으며 아무도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삶의 희망이 다 사라졌지요.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예비군 훈련에 참여했던 남편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정관수술을 받고 왔습니다. 이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6~7년 세월이 흘러 예기치 않게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됐습니다. 수술한 자리가 풀려서 둘째 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많은 고민 끝에 새 생명을 낳으면서 이 부부는 장애아인 첫째 아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부모마저 부끄럽게 여긴다면 아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에 생각이 미치면서 아이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려웠지만 한 번 마음을 열기 시작하자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미사를 나가면서 오직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당에서 레지오 단원을 포함한 사람들이 수시로 방문을 해 기도를 해 주고 태어난 둘째 아이도 형을 그렇게 좋아하고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십여 년을 지옥같이 지냈던 가정에 새롭게 온기가 피어나고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지요.
누구에게나 다 어려움은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면 할수록 혼란과 고통은 가중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난관도 받아들일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예수님 가르침은 억압이 아닌 자유에로의 초대임을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참된 지혜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헛된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항구한’ 생활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즉 당신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다음 자리’에 두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언제나 가치서열에 있어서도 우리 마음을 봉헌함에 있어서 항상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신이 주님께 얼마를 할애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정말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려할 때에는 항상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 생활을 뒤덮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용기를 잃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계산을 정확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두 비유를 말씀하신다(28-33절). 그러면서 이 비유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태도에 연결하고 계시다.
즉 우리로 하여금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루가 18,24; 12,13-34; 16,1-13 참조).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감정 예를 들면,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막아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두 비유가 주님을 따르는 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잘 계산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고(골로 1,18),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골로 1,15)이라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우상화’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즉 하느님이 제일 첫 자리에 모셔져야 하는데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우상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다.
수도자는 속세를 떠난다. 그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도 그 가치관에 있어 우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고 사는 우리는 항상 주님을 따르는데 잘 계산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에 집착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우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올바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그 뜻은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쟁에 임하던 임전훈(臨戰訓)이라고 합니다. 몇해 전인가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다가 결전을 앞둔 이순신의 방에 있는 글귀였던 기억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이순신 장군의 당시 마음 이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앞두고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혈연의 인연을 끊고 자신의 위치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입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모든 장수와 병사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전장에 임했기에 결국 우리 민족을 일본침략의 칼 아래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척의 배로 300여척의 일본 전함을 상대해서 대승을 거둔 것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합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뒤집고 대승을 거둔 것은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 덕이기도 하겠지만,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이 이순신을 비롯한 모든 장병에게 있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내 가족과 나의 행복과 생명을 민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포기할 수 있을까요? 나와 내 가족의 행복과 평화가 아니라 더 큰 가치, 즉 민족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을 오늘날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과 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웃는 현실입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웃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는 일이 우리사회에서 커다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 국가와 국민들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 물질적인 손해를 입힌 공무원과 정치인의 부정부패는 우리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참으로 참담한 각종 사고와 사건의 현장을 손 놓고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욕심과 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과 가족, 타인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주고 맙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장 26~27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이 내세우고 있습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 임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에게 내세운 임전훈과 비슷한 의미의 말씀입니다. 결국 비우고 버려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인간적인 걱정을 비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식, 친지에 대한 걱정, 인간적으로 누리고 싶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비우고 버릴 때 참으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내 욕심과 걱정의 틀에 사로잡혀 있으면 결국 우리는 그 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언제나 새로운 일을 함에 있어서 발목을 잡혀 결단의 순간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모두 개인적인 욕심과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데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결국 개인의 욕심과 인간적인 걱정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가족, 타인과 사회가 함께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산다는 의미이고, 더불어 함께 사는 상생의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더욱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욕심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나와 가족, 타인을 파멸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욕심과 걱정을 비우고 포기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나도 살고 내 가족, 이웃을 상생의 길, 즉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길에 우리는 늘 놓여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실천할 것인지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한 주간의 화두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감정에 흔들리는 연약한 신앙 반성해야"
인간의 행동에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만 여기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들이 본능 감정 기분 습관이란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그 자체로는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만 실제 쓰여 질 때는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말들입니다.
예를 들면 「본능적인 행동」 혹은 「감정적인 반응」 「습관적인 행동」 등은 그 자체로는 윤리적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중립적 가치를 가지는 말들입니다만 이러한 말들이 어떤 대상에 적용될 때는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 이유는 인간의 본능이 선보다는 악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일 것이고(원죄교리도 첫 인간 아담과 이브의 죄를 우리가 전해 받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이 악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본능과 습관에 따른 행동들은 힘들여 배우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는 행동, 인간의 지고의 가치인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행동들은 행동할 당시에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만 그 결과는 후회와 죄책감을 낳거나 아니면 우리가 소망하는 바람직한 결과와는 동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주의할 점은 본능과 감정 습관 등을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능과 습관 등 이러한 요소들은 육체적 생명을 위해서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고 특히 가족과 같은 1차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본능과 감정을 넘어서는 행위가 본능에 따른 행동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추종을 위한 2개의 단절어와 망대 구축과 전쟁 수행의 이중 비유를 들려줍니다.
먼저 예수 추종을 위한 두 개의 단절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들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먼저 「미워하다」란 말은 오늘의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란 의미를 종종 「미워하다」란 말로 표현합니다. 때문에 여기서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과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해야 한다는 비교적인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
물론 루가는 자기 십자가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란 형벌의 도구이기에 목숨 바침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할 사실은 가족과 자신을 미워하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행동들, 이 모두는 우리의 본능이나 감정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아니 본능과는 정반대 편에 놓여 있는 행동들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본능은 가족과 자신에 대한 배타적이고 편파적인 애정을 추구하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는 생명 있는 존재면 무엇이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욕구인데 이를 예수님이 부정한다는 사실은 본능을 넘어서는 무엇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본능을 넘어서는 의지적인 선택과 같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망대구축과 전쟁수행의 이중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망대를 세우거나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기분이나 감정에 얽매여 어떤 일을 시작한다면 결국 끝내지 못할 것이고, 끝내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비유가 주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제자됨의 길은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만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에 먼저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재물과 같은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시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휩싸여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오늘의 또 다른 이스라엘인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고가 이러한 말씀들이 가지는 의미인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 본능에 흔들리는 나의 연약한 신앙을 반성해봅니다.
우리는 결국 버리고 떠나야 할 것에 애착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려는 사람은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고 또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미워한다는 단어는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애착하는 것이고, 미워하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라는 가족적 유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고 초기 신앙인들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초기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실천한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가족이나 자신에게 집착하셨으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였으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과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큰 희생을 각오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망대를 짓는 사람이 성공하려면 계획성 있게 행동한다는 말과, 전쟁터에 나가는 임금은 치밀한 계산과 준비를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일시적 기분이나 체면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어려움을 무릅쓴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애착하였던 인연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삶을 사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지만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던 사람들이 그들의 실천을 기록하여 남긴 문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부모에게만 집착하는 아동은 학교에 가도 적응하지 못합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직업인으로 적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창세기는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참조)고 선언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자녀,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모두 불행합니다. 태아가 성숙하고도 모태를 떠나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모태를 떠나 자기가 살 세상을 만나고 거기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면서 생명은 자라고 성숙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중심적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며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가 10,29-37)를 우리는 잘 압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사제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현재 사제로서 또 레위로서 누리고 있는 인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진 인연들을 잊고 자기가 새롭게 만난 사람, 곧 강도 맞은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이미 가진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인연에 몰두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진 인연에만 집착하는 미숙함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기 앞에 던져진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이를 고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에게 용서를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베짜다 못가의 병든 이를 고쳐놓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인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인연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내 일신의 안일과 행복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배타성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 출렁이게 하는 일입니다. 바다이신 하느님은 생명을 있게 하신 분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노력할 때, 하느님이신 바다는 우리 안에 출렁입니다.
가족과의 인연은 좋은 것이고, 은혜롭게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 베풀어진 인연이고 버팀목입니다. 그러나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생명이 내 안에 출렁이면, 휩쓸려 버릴 수도 있는 버팀목들입니다. 부모님도 떠나시고, 선배들도 떠나고, 친구들도 떠나갑니다. 어느 날 나도 떠나면서 내 생존을 위해 버티어 주던 모든 것이 나와 헤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그 바다와 같으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일이 당신 안에 파도가 되어 출렁이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며, 바다이신 하느님이 당신 안에 파도를 일으키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서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그분이 부활하셔다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를 버티어 주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는 우리가 소중히 생각해해야 할 인연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버려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행동하고,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장차 버리고 떠나야 할 것에 애착하고 집착하며 삽니다. 가족과의 인연에 갇히고, 가진 것에 발목을 잡혀서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우물만 알지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만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미 주어진 인연들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이 작은 파도가 되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고 살리는 작은 파도들을 주변에 일으키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동행과 추종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장사의 논리(論理)로 살아간다. 실제로 장사를 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고, 장사를 하지는 않더라도 장사의 논리에 입각하여 사는 사람들도 많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데 목적이 있다. 밑지는 장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적은 투자로 몇 배, 몇 십 배의 이윤을 남기고, 가장 싸게 구입해서 가장 비싸게 파는 일은 모든 장사꾼의 바람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장사의 논리로 산다는 말은 내가 이만큼 투자하면 얼마만큼 크게 벌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바란다는 말이다. 때로는 수고 없이 공짜를 바라는 수도 있다.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는 데는 어떤가? 여기도 장사의 논리가 적용될까? 그렇다. 적용된다. 하느님과 세상의 재물을 놓고 늘 갈등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많은 신자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싸게 하느님을 믿고,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물론 늘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열심히 사는 신자들도 많고,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충 그리고 약간의 신앙생활로 세상과 하느님을 절충하는 타협형 신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 현실이다. 하늘나라 행(行) 열차를 탈 수만 있다면 구석자리도 좋고, 아니면 입석(立席)이라도 괜찮다는 태평형의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으라고 하신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말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건데 몽땅 내어놓으라는 것인가?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루가 14,1)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정에 오르셨다.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를 동행하였다.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과연 예수를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과의 동행’의 의미를 밝혀주신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골고타에서 자기 생애의 최후를 십자가 죽음으로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어떤 동행자도 예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동행의 의미는 곧 추종의 의미로 그 정도가 다소 약화된다. 동행(同行)은 예수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나, 추종(追從)은 예수를 따르는 것, 즉 제자 됨의 길을 걷는 것이다. 추종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추종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자기부정이다.(26절) 자기부정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데, 이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 친구까지 미워하는 것으로 비약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27절)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자기 십자가’이다. 다른 누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육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즉 수능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 쳐야할 과목을 크게 일반 공통과목과 특수 선택과목으로 나누듯이, 예수추종(제자 됨)의 조건에도 공통과 선택이 있다. 공통에 해당하는 것이 첫 번째 추종조건인 자기부정이다. 선택에 해당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누구에게나 같은 방법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그만한 비용이 있는가를 곰곰이 따지거나, 일 만의 군사로 이 만의 군사와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이 승산(勝算)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각 상대방 임금에게 화평(和平)을 청하듯이(28-32절), 예수추종의 기본정신은 자기부정이지만, 추종의 방법은 다양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강조하듯이 추종의 기본정신인 자기부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것’(33절)으로 요약된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해서 버릴 것을 그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명예와 권력,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착취, 취미와 재미 등, 때로는 정말 재물과 재산, 내가 가장 아끼는 소유물,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이 예수추종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탄과 악습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무엇이라도 버려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추종의 맛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그릇을 비로소 비울 때 그 빈 곳에 예수추종의 기쁨이 채워질 것이다. 그 기쁨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친 예수께서 맛보신 기쁨이며, 그분께서 주시는 기쁨이다.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인숙이 이야기
교구 사제단 피정 때에 지도를 해주신 신부님의 체험담이 떠오릅니다.
전라도 광주에 천주의 성요한 의료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복지원에 인숙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나이는 스물이 넘은 아가씨지만 정신 연령은 네다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 수준이라 했습니다.
어느 날 수사님들께서 장애인 방에 간식을 넣어 주고 인숙이 방을 나오는데, 갑자기 인숙이가 죽겠다며 소리를 치더랍니다. 황급히 인숙이 방으로 수사님들께서 달려가 보았더니, 방금 나누어준 인숙이 간식을 다른 장애인들이 먹으려 하자 인숙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간식을 한 입에 털어 넣다가 그만 목에 걸려 숨을 못 쉬고 캑캑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께서 급히 간식을 토하게 하고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너무도 이상한 것이 숨을 못 쉬는 상황에서도 인숙이는 한 손은 목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잠시 숨을 쉬게 하고는 팔을 강제로 벌려 옷을 젖혀 허리춤을 보았더니 며칠 전 복지원 식당에서 닭 요리를 하고 버린 닭 내장을 인숙이가 나중에 먹으려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몰래 건져 허리에 매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신 연령이 낮은 인숙이 눈에는 닭 창자가 울긋불긋 한 것이 먹음직스러웠나 봅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인숙이야 정신 연령이 낮은 장애를 가졌으니 이해 되지만 정상인이며 어른인 우리들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허리에 매달고 있는 썩은 닭 창자가 무엇인지 만져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썩은 닭 창자를 잘라 버리면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악취를 풍기지 않고 너 나 할 것 없이 개운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되질 않아 악취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라 버리지 않는 썩은 닭 창자는 ‘교만’ ‘이기심’ ‘자존심’ ‘썩은 냄새나는 고집’ 등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진정 버리기 어려운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자존심, 교만도 함께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고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려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 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뼈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 위에 다시 비상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역시 천상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의 비상은 자신을 수없이 버리고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 찬 뚱뚱한 상태로는 날아서 하늘나라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도 성 바오로의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믿게 되었는데, 얼마 동안 옥중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시중을 들어줍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원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를 용서해 주고 잘 받아줄 것을 부탁하며 편지를 씁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그저 물건에 해당될 만큼 재산의 일부인 별것 아닌 존재로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데, 바오로 사도는 그를 아들로, 심장과 같은 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레몬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필레 9, 16)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만큼 자신에게 있는 자존심과 명예까지도 버리며 스스로를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스승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2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지다’는 ‘십자가를 소중한 보물로 알고 품에 안고 따라야 한다’로 번역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십자가가 마지막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천국 문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보물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는 이겨내고 받아들이며 안고 나아갈 때 분명 공로가 되는 것이며,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히 갈라지는 심판대에서 천국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양승국 신부-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흔적 앞에 홀로 선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아이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살인데 엄마는 어느 하늘 아래 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과 허전함, 상처와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했는지 모릅니다.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어서 '누군가'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이 멘 할머니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른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못했노라고, 그래서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니 고통 앞에서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 틈에서 할머니는 그나마 힘겹게 밥을 몇 숟갈 뜨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니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때로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직 어깨를 조용히 감싸안아 준다든지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왜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왜 하필 나에게만 유독 큰 십자가입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쩌면 저렇게도 큰 십자가를 보내십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답답해하면서 지난 노트를 뒤적이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얼굴입니다.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땅과 생명의 땅, 그 사이에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사다리로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인 삶의 일부를 넘어 전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가 평생 친구처럼 여기고 끌어안고 가야할 삶의 동반자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번 한 주간,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로 인해 힘겨워하는 이웃들 삶에 우리 온기가 전해지는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홀로 지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많은 것을 포기함은 큰사랑의 증거이다.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1.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교리반에 나오는 예비신자 부부와, 그 사람을 교리반에 안내한 신자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 예비신자 자매가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질문을 하였다. 내가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신자 자매가 먼저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거야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하자, 예비신자도 이해가 간다는 듯이 "목사님들은 가족이 있으니까 신자들의 부담도 많고, 일반인들도 신부님들을 목사들과는 다르게 본다."며 맞장구를 친다. 정작 신부인 나는 그 이야기에 끼어 들 겨를도 없다. 아마 많은 이들의 생각도 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에 100%동의할 수는 없다. 수녀나 수사들이 독신을 지키는 것과 사제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이유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면 수도자들도 자신들이 하는 일(사도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 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제들의 독신은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2.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사랑의 증거이다.
한 때 클린튼 미국 대통령의 성 추문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이 클린튼의 추문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에는 높은 점수를 주었음도 사실이다. 직무수행 능력과 도덕성과는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다. 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닐 것이 아닌가? 우리 주변에는 수도자나 사제가 아니라도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스님들이나 수도자들처럼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학문이나 예술을 사랑하여 거기에 전념하여 투신하다 보니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 정열을 바치다 보면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어떤 것을 버리는 것은 더 큰 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한 사도 바오로는 "세상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하셨다.(필리3,8)
3. 버리고 비운만큼 채워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집짓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 집을 완성할 힘이 있는지를 미리 따져보고, 전쟁에 이길 가망이 없으면 먼저 화평을 청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자신의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기에 그것을 알고 미리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속담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확신도 없이 섣불리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어설픈 태도를 경계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 하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따라오는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오는 십자가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에겐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별하는 고통이 큰 것이라고 한다. 세상 것에 많은 애착을 가진 그만큼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세속적이고 시간 속에 사라져갈 세상 것들을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하느님은 당신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나의 일상의 생활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M.E주말 교육에서는 "사랑은 결심이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의지를 실어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바치는 것이 참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10,29-30). 아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꿈이 있다는 것은 젊음의 상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영을 내리시리라는 약속을 요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3,1)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이 꿈을 꾸는 세상은 예수께서 꿈꾸시는 바로 그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지금은 그 꿈의 완성을 위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은 하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병 고치는 능력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말씀의 위력에 끌려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빵의 기적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줄 수 있으려니 하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모두 가니까 덩달아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도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이 멋있어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도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소망을 기대하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같은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 힘이 되어주는 ‘도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가긴 하지만 예수님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아셨는지 그들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예수께서 가족 간의 불화를 일으키고, 자신을 미워하여 자살을 유도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자명합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고(苦)를 낳는다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혈연에, 물질적인 것에, 심지어 자신의 목숨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당신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로 한 수도자는 물질에 대한 소유를 포기한다는 ‘가난서원’을, 혈연과 육신의 만족을 포기하는 ‘정결서원’을,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포기하는 ‘순명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아니라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각기 자신의 처지에 맞갖은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난·정결·순명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는 돌발적인 물음에 무척 당황하지 않았던가요? 베드로는 예수께 자신들이 부모와 집과 아내와 토지를 버렸으니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했지만 자기 목숨까지는 쉽게 버릴 수 없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요? 현세의 한자리를 꿈꾸는 그들과 예수님과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특별한 계층이나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따를 수 있지만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조건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반쯤 따르며 완전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한 카시아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부들의 전통과 거룩한 책들의 권위에 따르면 포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대는 모든 열성을 다해 이 세 가지 포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 번째 포기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포기는 그대의 옛 삶의 방식, 곧 악행과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격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포기는 미래의 삶만을 관조하고 또 보이지 않는 삶만을 갈망하기 위해서 모든 현세적이고 보이는 삶에서 그대의 정신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포기는 모두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했던 대로 말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먼저 네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이 세상의 재산과 땅의 풍요로움을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친족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삶의 모든 방식, 곧 과거의 습관과 악행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현세적인 기억, 집착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열렬한 신앙으로 첫 번째 포기를 실천했더라도 두 번째 포기를 같은 열성과 성의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두 번째 포기를 실천하고 난 뒤에 세 번째 포기로 넘어감으로써 그대는 옛 아버지의 집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옛 인간에 따른 아버지라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토록 천상적이고 비육체적 삶에 주의력을 집중한 결과 그대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 영혼이 연약한 육체와 특수한 장소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면 밭갈이가 엉망이 되고 진도도 나가지 않겠지요.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이렇게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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