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7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07. 9. 7. 06:16

  2007년 9월 7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루가 5,36)

 

 “No one tears a piece
from a new cloak to patch an old one.
Otherwise, he will tear the new
and the piece from it will not match the old cloak.

 

 

  

 단식에 관한 논쟁이다. 예수님께서는 헌 옷을 깁는 데 새 옷을 잘라 댈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그렇게 되면 새 옷도 헌 옷도 버리게 된다고 하신다. 단식이 옷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 옷이다

 

☆☆☆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일입니다. 옛사람들은 하늘의 기운을 얻고자 할 때 단식하였습니다. 먹고 싶은 욕망을 참을 때 하늘이 도와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덕을 닦는 사람에게 단식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겐 단식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단식은 강렬한 참회의 수단이었습니다. 부정을 씻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방법으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의 단식을 법으로 정해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의무적인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만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단식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 자체보다 단식하는 동기를 더 중히 여기십니다. 단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먹는 자유를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단식뿐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의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한 방법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활동 자체에 매달려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저를 괴롭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키도 저보다 크고 힘도 저보다 훨씬 셌지요. 그러다보니 자주 이 친구로부터 놀림과 괴롭힘을 당했었지요. 그런데 한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맞았지요. 한 번도 울었던 모습을 못 봤던 그 큰 덩치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울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니 피도 보입니다. 저는 무서워서 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살피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집의 창고에 들어가서 저는 펑펑 울었습니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경찰아저씨가 와서 나를 붙잡아 가지 않을까?’

하지만 다행히 별 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지요. 비록 머리에 큼지막한 반창고를 붙이기는 했지만, 학교에 나왔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기뻐서인지 친구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동안 내가 많이 괴롭혔지? 미안해.”

그 뒤 우리 둘은 누구보다도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친구가 돌 던진 저를 용서하지 못하고 더 괴롭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평생 원수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요?

요즘 인터넷 안에 들어가기가 싫습니다. 짜증나기도 하고, 때로는 무서운 생각까지도 듭니다. 이 안에는 모두 옳은 사람만 있는 것 같아요. 빈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 잘못 쓴 것을 가지고도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이 퍼지고, 이 말들이 결국 그 사람을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매장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이 짧은 새벽 묵상 글 안에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오타와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들어갈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삶 안에는 얼마나 많은 잘못과 오류가 있을까요? 하지만 스스로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완벽함의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하는데는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선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큰 죄도 용서하시는 하느님, 작은 것도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

크게 보시고 끊임없이 참으시는 하느님, 작게 보고 조금도 참지 못하는 인간.

사랑이 중심이 되는 하느님, 자신의 이익이 늘 중심이 되는 인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에 대한 흉을 봅니다. 즉,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들은 ‘치사하다, 쫀쫀하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이보다 더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를 더욱 더 슬프게 합니다.



인터넷에 악플을 달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본 뜻    

-김인한 신부-


 차를 즐겨 마시는 편입니다.
다도를 제대로 배우진 못했어도 나름 정성스럽게 마시려고 합니다.
지허 스님이 쓰신 차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도의 시작과 마침은 누워서 마시지 말 것.
즉 당연히 어떤 누구도 차를 누워서 마시는 일은 없을 테고
너무 외형적인 것, 규칙에만 매달리기보다 차 자체를 즐기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차를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 그 자체입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고 사람이 먼저여야 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은 낡은 우리들의 시선으로
하느님의 뜻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은 우리의 눈으로 재단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삶이 사람을 만든다

-박기호 신부(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후회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예수님을 만난 것은 새 인간상을 본 것이며 제자로 산다 함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얻는 것이다. 이제까지 기어 다니며 구르는 재주와 잔꾀로 먹고사는 굼벵이가 아니라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창공의 삶을 얻는 것이다. 그것을 번신(飜身)이라 한다. 예수님과 합일되어 사는 자, 번신의 몸을 얻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
꿈 많은 젊은이들은 얻고 싶은 것이 많고 그래서 온종일 바쁘다. 그런데 대학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잠 못 이루며 기를 쓰고 대학에 들어간 순간부터 토익과 연수와 씨름하며 또 과외를 해야 한다. 도서관 가는 길도 전투처럼 느껴진다. 정보시대에는 안테나를 바짝 세워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몸부림의 목적은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라는데, 정말 그렇다면 왜 곧바로 행복한 삶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우리 ‘산 위의 마을’ 공동체는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오는 신문을 본다. 농업 노동은 힘들다. 그러나 그토록 열심하고 싶어도 어려웠던 신앙생활을 얻었고 건강하게 살다가 묻힐 땅도 넓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미래를 불안하게 여기지 않는다. 정보와 경쟁에 밀린다고 안달할 이유가 없는 것은 행복한 생의 길은 한없이 넓고 많다는 발견 때문이다. 삶이란 자기 삶의 항아리에서 빚은 술이다. 삶의 선택은 자신이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만든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다. 더덕밭에 풀이 많다.


 

 -강정웅 신부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새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만 바라보고, 모세의 율법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아예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데도 그들은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한다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맛보아왔고 맛보고 있는 묵은 포도주에 너무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묵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셔온 묵은 포도주가 이 세상의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새 포도주는 그들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얽매어 눈과 귀가 멀어버린 그들이기에, 눈과 귀만 먼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굳어버린 그들이기에, 구세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예수님을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실 때에 제일 먼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제대로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전의 낡은 악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며, 헌 가죽 부대를 버리고 새 가죽 부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 4장 말씀처럼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아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해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복음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하느님이 아닌 세속을 향해 있었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향해 있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입어야 합니다. 새 가죽 부대를 마련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예수님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드릴 수 있도록 회개의 생활로써 새 가죽부대를 마련하도록 합시다. 부족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나직이 기도해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시다.

-서영남 (인천 민들레 국숫집)-


경석씨는 민들레 국숫집의 VIP 손님이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혼자 삽니다. 술을 드시지 않을 때는 얼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모릅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아주머니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부끄러워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막노동을 하러 다닐 때는 술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일해서 품삯이라도 받으면 그때부터 동네가 시끄러워집니다. 누구라도 눈에 거슬리면 온갖 욕을 하며 행패를 부립니다. 술에 취해 밥을 먹지도 못하면서 민들레 국숫집에 와서는 몇 차례나 상을 차지합니다. 몇 시간을 저를 따라다니면서 주정을 부립니다. 식사하는 손님들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다가 사소한 트집을 잡고 싸우기를 밥 먹듯 합니다.

몸도 상하고 술 마실 돈도 떨어지면 경석씨는 얌전해집니다. 몸을 추스를 동안 부지런히 국숫집을 찾아옵니다. 경석씨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무던히도 속을 썩여드렸다고 합니다. 술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너무 외롭다고 합니다. 외로워서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의 여섯 달이나 민들레 국숫집을 자기 집처럼 찾아왔습니다. 무던히도 애를 먹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게 “다른 사람들은 세 번 정도 술주정을 하면 쳐다보려고도 않는데 왜 계속 날 봐주느냐?”고 물어봅니다.

그후에 경석씨는 스스로 동사무소 사회복지사를 찾아가서 알코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몇 달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한 경석씨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막노동을 나가면서도 비가 오는 날이거나 쉬는 날에는 ‘성언의 집(무료급식소)’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합니다. 길에서 만나 술 한잔 하자고 하면 손을 휘휘 내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비로소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됩니다. 참회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는 사람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사람입니다.

  

-부산교구 이창신 신부-


 시간의 구분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년, 월, 일, 시간, 분 등으로 시간을 나누고 구분합니다. 만일 시간의 구분이 없다면 얼마나 우리의 생이 무료하겠습니까? 일의 보람도, 반성도, 새로운 일에 대한 희망도 어쩌면 시간의 구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시편저자도 날 수 샐 줄 아는 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구분된 시간, 그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오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맞이하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집안에 큰 걱정거리가 있거나, 누구나 몇 차례씩 겪게되는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반대로 나름대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면서 생기 넘치게 그래서 하루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보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저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봤습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당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시했던 단식과 기도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를 지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보내는 즐거움에 대한 말씀과 함께, 신랑이 떠나면 그들도 단식과 기도를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혼인잔치는 가장 큰 기쁨의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결혼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축하를 전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며 모두가 하나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혼인잔치는 혼인식장에 신랑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어 일주일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얼마 후면 우리도 민족의 명절 추석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처럼 되어라는 말처럼 명절이 되면 모든 사람이 들뜨고 기쁨이 넘칩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기쁨, 마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오심의 의미, 예수님께서 전하신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바로 혼인잔치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추구할 행복과 기쁨은 저 세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유대인들은 주님과 함께 나누는 기쁨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잔치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심의 의미를 우리가 깨닫는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고 그래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기에 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론 세상의 즐거움에 눈과 귀를 돌리며 진실된 삶을 외면하고 오늘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을 소홀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신랑을 빼앗기 뒤의 단식과 기도는 신랑과 함께 나눈 기쁨을 되찾기 위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을 거부하는 우리에게 단식과 기도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새롭게 일깨우고,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누리는 기쁨을 되찾아 줍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는 오늘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혼인잔치의 기쁨의 시간입니다. 혹 고통의 시간이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맙시다. 즐겨 외웠던 오늘이라는 시로 강론을 마치고자 합니다.

오늘

세상에서 너 소유한 모든 것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오늘'이니
너의 구원자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두 도적 사이에서
자주 십자가에 달리운다.

기쁨은 오직 오늘의 것,
어제나 내일이 아닌
다만 오늘 너는 행복할 수 있으리니
우리네 슬픔의 대부분은
어제의 잔재이거나
내일에서 빌어온 것일 뿐
너의 오늘을 고스란히 간직하라.
너의 음식, 너의 일, 너의 여가를 향유하라.

오늘은 너의 것이니
신께서 오늘을 너에게 주셨다
모든 어제는 거두어 가셨고,
모든 내일은 아직 그분의 손 안에 있도다.

오늘은 너의 것이니
거기서 기쁨을 취하여 행복을 누리고
거기서 고통을 취하여 사람이 되라.

오늘은 너의 것이니
하루가 끝날 때
"나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라.

  

-조성풍 신부-

 

 요즈음 ‘변화’라는 말과 더불어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면
시대에 뒤쳐진다는 위기의 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 살아가는 교회 역시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단순히 사회에
순응하여 녹아 없어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곳곳에 녹아 스며들어 복음의 정신을 드러냄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40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교부들은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함을 사목헌장에서 가르쳤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것은 공동체 안에
긴장과 반대를 가져올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힘들어합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끝임 없는
변화와 전환에 용기 있게 자신을 내놓는 삶이 아닐까요? *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골로 1,15-20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복 음 : 루가 5,33-39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을 한 것이다)

개구리가 좋아하는 온도는 23℃ 정도라고 합니다. 그 정도의 온도에서 개구리는 가장 활발하게 잘 움직이지요. 그런데 온도를 23℃ 에 맞춰놓고 불을 서서히 달구면 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는 나오려고 하지 않고 발버둥을 치다가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푹 삶아져 죽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개구리 이야기는 자기의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해 버리면 발전은 있을 수가 없지요. 어떻게 보면 그것은 죽음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식자층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메시아의 도래 시기를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았지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였지만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만의 관습과 경험과 지식 안에서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오늘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단식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 (루가5,33)

단식하지 않는다고 따지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고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다시 한번 드러내 보이십니다. 즉, 신랑인 당신이 오셨고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과 지식 때문에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 고집에 더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루가5,36-37)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 것만을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질책하시지요.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일 조심해야 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이웃을 판단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도 그런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한계입니다.

우리는 자꾸 새롭게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발전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신자분들 중에도 모태에서부터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신 분도 계실 터이고 영세 받은 지 벌써 십 년, 이십 년이 되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연륜이 깊은 분일수록 정말 한 해 한 해 새롭게 발전해 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된 본당에 가보면 아주 고집스런 신자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주교가 되었다며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일쑤입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한 음식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저는 나오는 음식을 보고 ‘음식을 이렇게도 만들 수가 있구나!’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음식들이 나왔는데 재료는 보통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모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예로 한 가지만 말씀드려 본다면 이렇습니다.

하얀 큰 접시에 게 요리가 나왔습니다. 게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튀겨서 통째로 먹는 작은 게가 식사하는 인원수대로 나오는 요리였습니다. 그런데 접시 위의 모습이 새로웠습니다. 하얀 접시 위쪽에 레몬 소스로 동그랗게 달 모양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는 분말 녹차로 지평선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게 4마리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다양하게 연출해 놓았는데 맛을 보기 전에 눈부터 먼저 즐거워지는 것이 여간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보통 식당에 가면 이런 게는 접시 가득 튀겨서 놓고 마음껏 먹으라고 내놓았을 겁니다. 여기서는 겨우 4마리를 내 놓았을 뿐인데도 기억에 아주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산뜻한 요리가 되었습니다. 이 요리들이 저에게는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자꾸 생각하고 노력하면 발전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지요.

이는 저도 염두에 둘 일입니다. 똑같은 미사를 드려도, 똑같은 강론을 해도, 똑같은 레지오 훈화를 해도 자꾸 발전하는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발전하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매번 ‘그게 그거지.’하는 마음으로 구태의연하게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발전이란 있을 리 없습니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끊임없이 배움의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익히고 알아나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배움의 기회를 넓히고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관습과 전통, 또 과거의 지식에 안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만의 중심 사고에서 또 그들만의 과거 경험과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했다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이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요.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남의 입장을 배려할 때 나의 성장도 함께 동반되어 보다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나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이웃에게는 쉽게 열지 않는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은 퇴보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바꾸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새 옷에는 새 천으로, 새 부대에는 새 술로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강영구신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슴 속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에게
형제의 행운과 기쁨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탐욕과 이기심,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형제의 행복을 배 아파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가슴 속에 사랑과 자비심(慈悲心)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형제의 행운과 기쁨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고, 형제의 슬픔과 고통이 나에게도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을 만들고 행복을 누립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곳에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로마12,15-16)
눈높이를 맞추고 같은 처지가 되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새 옷에는 새 천 조각으로,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로
헌 옷에는 헌 천 조각으로, 묵은 부대에는 묵은 포도주로 다가가는 사람이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같아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다.

-박상대 신부-

우리가 이번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주간 토요일까지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줄곧 루가복음을 봉독하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의 모든 부분을 연이어 듣지는 못한다. 이 말은 평일미사에 제공된 복음을 읽고 한정된 부분만으로 복음의 참뜻을 깨우치려들면 무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도는 늘 복음의 참뜻을 위협한다. 한정된 어느 한 단락의 복음만 가지고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된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예수께서 공들여 설파한 복음전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복음사가들의 편집의도를 곡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사의 그날 복음으로 제공된 부분의 앞뒤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하며, 진정한 신자(信者)라면 ‘매일미사’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신구약 합본성서를 늘 곁에 두고 빠진 부분을 함께 읽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이 그렇다. 매일미사 책에 실려 있는 오늘 복음의 시작은 “그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성서의 원문에는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표현이 복음의 앞뒤 문맥을 더 잘 말해주는가? 두말 할 것 없이 성서원문이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무슨 말씀을 듣고 예수께 반론을 제기하는 지는 앞부분을 살펴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권위 있는 가르침과 기적행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명성이 순식간에 나자렛과 가파르나움을 넘어 사마리아와 유다지방 일대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4,37.44; 5,15) 급기야 이를 확인하고 감찰할양으로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파견된 것이다.(5,17)

그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5,21), 못 마땅하게 여겨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으며(5,30), 오늘은 복음에서와 같이 단식문제로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묵상한다면 잘 이해할 수 있겠고, 좋은 결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단락으로 구성된 오늘 복음은 단식에 관한 말씀과 옷과 포도주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를 담고 있다. 물론 후반부의 이중비유는 전반부의 단식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이해해도 좋다. 오늘 담론은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단식(斷食)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다.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이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단식의 날이 오게 될 것인즉, 예수께서 더 이상 그들 곁에 계시지 않을 때가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33-35절)

‘새 옷과 헌 옷,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부대와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준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이다.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기 마련이다. 여기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당장은 맛이 좀 떫고 불편하더라도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법칙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