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07. 9. 6. 00:17

   2007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루가 5,5)

“Master, we ha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 caught nothing,
but at your command I will lower the nets.”

  

 부르심을 받는 베드로의 이야기다.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그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베드로는 고기를 매우 많이 잡는다. 그러자 베드로는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기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고백이었다. 그러한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다

 

☆☆☆

 

 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허황된 꿈과 현실적으로 가능한 꿈입니다. 복권을 사는 이들은 대부분 눈빛이 달라집니다. 당첨을 기대하는 막연한 희망 탓입니다. 그러기에 맑기보다는 몽롱한 눈빛입니다. 각고의 노력 없이 한탕을 노리는 사람의 눈빛이 어찌 야무질 수 있겠습니까? 허황된 꿈은 사람을 흐느적거리게 만듭니다.
허황된 꿈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망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탕을 노리다 보니 때로는 사기를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들은 쓰라린 고통을 참고 견디는데 자신은 단박에 이루려 하니 편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허황된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꿈을 간직했더라면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앞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겸손입니다. 주님 앞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허황된 꿈에 젖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진심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르심     

-김인한 신부-


 지금 사는 곳은 산허리 빨간 벽돌집에 사내들만 모여 사는 곳입니다.
모두 부족한 이들이지만 주님의 도구로서 사는 이가 되기 위해 오늘 하루도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이곳 학생들의 신학교 입학까지의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한 사람 한 사람 다 자신의 모든 발걸음이 계속된 하느님 부르심의
결과라고 고백합니다. 누가 보기에는 별 대단할 것 없는 인생사이고
의미심장한 사건 하나 없지만, 그래도 부족한 자신을 부르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따르는 젊은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하였듯이 주님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아는 이는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부족하기에
자신으로 사는 것은 의미가 없고, 바로 주님의 도구로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음을 안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 그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을 삶의 의미로 삼기에 주님께 의미를 두는 삶에
자신을 투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으로 가득한 그물을 부여잡기보다
베드로처럼 과감히 그물을 버림으로써 오롯이 주님으로 인해 의미를 갖는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산 위의 마을에는 어부들이 산다

-박기호 신부(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


 필자는 ‘산 위의 마을’에 살고 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도 들었고, ‘가난한 자 행복하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들었다. 구원의 길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알고만 있을 뿐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천국 문앞에 얼쩡거릴 뿐 들어가지 못하면 신앙생활도 무상할 것이다.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가? 사업에 넘어져 빈손 되고 공부로 자식농사 망치기도 하는데, 그까짓 명예고 재산이고 자식이고 하느님 앞에 던져버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갈 수는 없을까? 말씀대로 살아볼 수는 없을까? 한번 해보자. 환란의 도시를 떠나 기도생활에 전념하고 정직하게 노동하면서 살아보자. 그래서 1,000일 기도를 바치면서 은인들의 도움으로 발전 전망이 없는 오지의 화전민들이 물러났던 산골짝에 마을을 건립하고 가족들을 모았는데 왔다가 돌아간 사람, 갈팡질팡한 사람`…. 하여튼 현재 4가족 16명이 살고 있는데 우리같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 종종 물어물어 찾아온다.
어부는 고기를 왜 잡는가?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다. 돈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예수님 방식은 변통이 아니라 직통이다. 돈 없어도 치유받고 배불리 먹게 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직행복(直幸福)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재산의 포기도, 도시문화의 단절도, 자식의 미래도 두려워 말라. 가진 것 없어도 만족스럽고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배를 가진 어부는 바다에 살고, 산 위의 마을에는 그물을 버린 어부들이 산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서영남 (인천 민들레 국숫집)-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두려워하며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하고 애원합니다. 두려움이 뒤섞인 황홀함은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부였지만 이제는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 변했습니다.

콜베 형제는 청송교도소에서 16년째 살고 있습니다. 10여년 전에 콜베 형제의 대부인 교도관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는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날아갔습니다. 징벌방을 밥 먹듯이 들락거렸습니다. 20년 6월형에 감호처분을 받았기에 희망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매달 한 번씩 면회를 다녔습니다. 콜베 형제가 변하는 모습을 보는 행복에 저는 청송이 먼 줄도 몰랐습니다. 편지도 제대로 쓸 줄 몰랐는데 서예공부를 열심히 해서 멋진 달필로 변했습니다. 공장의 반장을 하면서 힘없는 사람들, 나이 많은 노인들을 극진히 돌보아 줍니다. 힘들게 일해서 받은 상여금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민들레 국숫집에 쌀을 보탠다며 여섯 번이나 이십만 원씩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출소하게 되면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버렸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서, 자신의 처지에서 깊은 의미를 추구해 더욱 성숙한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현실을 살면서도 그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를 따르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콜베 형제는 지금도 청송교도소에서 살고 있지만 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의 순명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골로 1,9-14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복 음 : 루가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가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사목을 하시고 좋은 결과들을 내실 뿐 아니라 큰 애착을 가지고 성전을 꾸미고 가꾸시는 모습이 너무나 뵙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 정성을 다 들이시다가 어떻게 여기를 떠나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몇 년 머무르다가 훌쩍 떠나야 하는 성직자의 상황을 잘 아는 신자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이지요.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다져놓은 자리는 편안하고 안락합니다.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하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자리를 떠나서 예측이 안 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일 수밖에 없지요. 애착이 깊을수록, 또 확신과 지식이 가득 차 있을수록 떠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기에 안주한다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제나 수도자가 한 곳에 안주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수도자나 성직자는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 또 업적이나 사람들보다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인간적인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성숙시키는 이러한 떠남의 과정은 아픔과 아쉬움을 뒤로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를 믿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에 집착하고 연연해하는 사람들은 매사에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주위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떠나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것을 그 주변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본인만 모르지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전형적인 어리석음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상황을 여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실 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오늘 복음에 그려지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뽑으시는 장소가 어디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뽑으시는지를 알면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시는데 인간 베드로가 가장 애착을 갖고 확신하고 있는 직업을 통해서 부르고 계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장 애착을 느끼며 놓으면 죽을 것처럼 여겨 떠날 수 없었던 자리는 바로 “어부”의 자리였습니다. 몸담고 있는 겐네사렛 호수를 떠난다는 것은 그에게 그 자체로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어부라는 직업을 떠나고 더군다나 배를 버린다는 것은 베드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고 꿈도 꾸어보지 못한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오늘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만나신 곳은 겐네사렛 호숫가입니다. 겐네사렛 호수는 우리가 잘 아는 갈릴래아 호수의 옛 이름이지요. 말 그대로 베드로에게는 겐네사렛 호수가 홈그라운드였습니다. 고기잡이에는 누구보다도 선수였던 베드로에게 그물을 쳐 고기를 잡을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직업적으로 예수님과 베드로는 상극이었지요. 호숫가에서는 모든 것이 베드로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베드로는 반문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5,5)

베드로의 인간적인 반응을 볼 때 벌써 그의 전문적인 지식이 예수님의 권위에 꽉 눌려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힌 것을 보자 베드로는 놀라움을 넘어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한 갈릴래아 호수에서 밤새 이 잡듯이 뒤졌지만 한 마리도 안 잡혔던 고기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두 배에 가득 그물이 찢어질 지경으로 잡혔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순간과 맞닥뜨리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당황하고 두려워하게 되지요. 베드로는 엄청나게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기뻐하거나 당장 달려가 퍼담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잡혔으면 “웬 떡이냐!”하고 반가워하며 한 걸음에 달려갔을 텐데 지금 베드로의 반응은 전혀 그와 다르지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가 5,8)

이것은 어부의 반응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의 반응이지요. 지금 베드로는 ‘이 예수님이라는 분이 인간이 아니고 정말 하느님이시구나.’하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루가5,10)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말이 필요 없는 예수님의 완전한 K.O. 승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살찌우는 ‘순명’에 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예수님께서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 베드로에게 다가와 다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였다면 그 말씀을 따랐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신자들이 더 깊은 신앙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상식을 뛰어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베드로와 달리 그물을 치는 수고를 다시 하려고 하지 않지요.

하느님께 순명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새로운 계기가 생깁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지요. 나의 지식과 경험에 안주하면 거기까지 밖에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내 지식과 경험의 범주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제한하는 한계를 두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나의 경험과 지식을 접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풍요로움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다 놓고 하느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자 밤 새워 노력했으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고기잡이로서의 절망과 피로가 한순간 희망으로 바뀌고, 실패는 성공으로 바뀌었으며, 보이지 않던 앞날에 새로운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비린내나는 고기잡이 어부에서 인간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신앙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5,5)하고 따를 때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질 수 있다는 오늘 복음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산교구 이창신 신부-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깨우쳐 주는 작은 목소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어긋난 우리를 바로 잡아주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삶의 진리를 새롭게 체험하게도 합니다.

제가 얼마 전 경험한 일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본당 관할구역에 있는 한 양로원을 방문합니다. 그 날도 몇 명의 신자와 함께 약속된 시간에 양로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할머니께서 매달 찾아와 줘서 고맙다하시며 조그마한 선물이라며 포도주 한 병을 내놓으셨습니다. 날씨도 더웠고, 저는 제가 할머니들을 위해서 뭔가 해드려야 한다는 입장만을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포도주를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자세히 포도주를 보니 그 포도주는 국산으로 지하철 티켓 두 장 값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참 싼 포도주도 있다구나 했는데 사제관 식사를 도와주시는 자매님께서 옆에서 듣고 계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포도주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네요."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좋은 선물, 값비싼 선물에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저는 그 한마디의 말씀에 큰 방망이로 머리를 맞는 듯 큰 충격을 받았고, 그동안의 삶을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큰 것, 좋은 성과,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가지도 보니 작지만 소중한 진실을 보는 눈과 귀가 멀었나 봅니다.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 포도주는 지금 제 방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전합니다. 어부인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부로서 어디서 고기잡기가 좋은지 더 잘 아는 베드로,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지쳐 있었던 베드로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더 해보겠노라며 다시 그물질을 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가 왜 처음 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호수로 나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일수도 있고, 복음서가 전하듯 색다른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호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외면해버려도 상관이 없을 법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기에 그는 놀라운 결실을 맛볼 수 있었고, 고기낚는 어부로서의 삶에서 사람을 낚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지만 그래서 소홀할 수 있는, 지나쳐버릴 수 있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외면하고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작은 그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잊고 살았던 진실의 모습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시장 사람의 성실과 정화원들의 정성된 빗질로 유지되는 깨끗한 거리. 아이스크림 하나에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어린아이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이웃이 건네는 인사와 미소. 우리 주위엔 나를 가르치는 작은 목소리를 많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주위에서 함께 하는 사랑을 담은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작은 목소리가 주는 작은 감동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넘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살아가면서 누군가 앞에서 말을 통해 무엇인가를 전해야 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특히나 강론을 준비할 땐 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최선을 다해 강론을 하지만 혹시 무성의하게 보여지면 어쩌나, 또 강론의
내용에 상처받는 분이 계시면 어쩌나 등등의 고민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어려움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을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똑같이 강론을 듣고서도 각자에게 전해지는 부분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면,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알맞은 형태로 요리해주시리라’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강론을 멋지고 맛있는 요리라고 생각했던, 더 나아가 그런 요리를 내 힘만으로
장만하겠다는 욕심이 부담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론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요리 재료일 뿐이고, 그 재료를 신앙인 각자에게 적합한
영양식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소금 항아리’를 통해서도 말씀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제자들은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라고 아룁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번 순교자 성월 동안은
‘사람 낚는 행복한 어부’가 되도록 청해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험    

- 최혜영 수녀-

 

 평범한 어부들이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상에 밀려 한 치 앞을 못 보던 사람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낚으라”는 초대는 결단을 요구하는 모험입니다. 여태 익숙해진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심으로써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익숙했던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는 두려움 가운데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나의 약점과 부족함만 바라본다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지평을 넘어 예수님께 마음을 향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깊은 곳으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수영 잘하는 친구를 따라 깊은 곳에 가서 수영을 했을 때 느꼈던 기분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모험을 왜 마다하겠습니까?

 


 

 주제 파악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한만옥 신부(의정부교구 백석동 천주교회)-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델피의 신탁으로 이렇게 외쳤다. “너 자신을 알라!” 사실 자신을 아는 것, 이른바 주제 파악을 잘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제를 모르고 어떤 일에 뛰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아 왔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주제를 알고 분수를 알아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적어도 고기 잡는 일에는 어부인 자신이 목수인 예수님보다 한 수 위여야 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에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 예수께서는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전에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베드로는 반신반의하면서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친다. 결과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의 주제, 정말로 보잘것없고 죄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주제 파악으로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나는 주님 앞에 어떠한 존재인가? 그분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있는가?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 [루까 5, 1-11]은 예수님의 포교생활의 초기 모습 중에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구약의 가르침이 계속되어 오던 회당에서 하셨는데, 회당에서 예수님을 사람들이 쫓아내자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이제는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사람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복음전파의 모습은 회당이라는 어느 장소에 제한되거나 제약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의 집처럼 개인집, 게네사렛 호수가, 밀밭가, 또 산에서 등 어느 장소이건 어느 장소에서도 필요 하다면 언제든지 아무 구애를 받으시지 않으시고 자연스럽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 게네사렛 호수가에 이루어졌던 장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그 호수에 배가 두 척이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려서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즉, 인간적인 경험, 인간적인 지혜, 노력을 다 써 봤지만, 기대하던 결과는 이 조건, 이 경우에는 헛수고였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승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가 있었다. 즉, 일생을 그 바닥에 자랐고, 그 일로 잔뼈가 굵어 왔고, 고기잡는 그 일에는 전문가였던 그 베드로, 그는 주 예수의 말씀 앞에 자기의 능력, 경력, 재능, 힘,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았고,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출 줄 알았기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그물을 치겠습니다!" 말할 수 있었고,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일생을 어부로 살아 왔고, 게네사렛 호수라면 자기가 노는 마당처럼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 보고있는 그가 그 모든 지혜와 경력을 바보처럼 포기하고 고기한번 잡아본 적이 없어 보이는 예수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그 말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놀라운 순종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대로 한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많은 고기가 엄청나게 걸려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어 다른 배의 동료들의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그렇게 능력있고, 그렇게도 잘 알고, 그 일에는 그렇게도 경력이 많은 그 베드로가 그 모든 것을 낮추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결과였다.

그러기에 "그는 겁을 집어먹고 저는 죄인이오니 저를 떠나 주십시오!"하며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느님을 대한다면, 많은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삶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다 더 큰 하느님의 능력을 매사에 경험하게 되고 보게 될 것이다. 아멘.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강영구신부-


시몬 베드로는 나자렛의 목수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이 지닌 어부(漁夫)로서의 전문적인 지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눈이 번쩍 뜨여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罪人)이라고 고백합니다.
죄인(罪人)이 따로 없습니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짓을 하는 사람만 죄인(罪人)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닌 학식, 전문지식, 지위와 명예, 돈과 권력 따위에 의지해서 서려고 하는 사람이 죄인(罪人)입니다.
돈과 권력, 지위와 학식 따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는 사람이 죄인(罪人)입니다.
하늘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사는 사람이 죄인입니다.
불행하게도 죄인(罪人)은 자신이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는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불러 제자로 삼습니다.
자신이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는 이미 죄인(罪人)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때부터 하늘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신앙여정

-박상대 신부-

루가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침과 활동이 제한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넓은 지평으로 펼쳐진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교적 회당에서 행해졌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겐네사렛(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행하신 가르침과, 현직 어부(漁夫)들인 시몬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엄청난 고기를 잡게 하신 자연이적(自然異蹟)을 통하여 첫 제자들을 얻으신 제자소명사화를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이유는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예수께서 언제 어디에 계시던 그분이 계신 바로 그 시각과 그 장소가 구원성취의 시간이요 장소이기 때문이다.(루가 4,21) 예수께서 시몬과 그의 동료(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들을 첫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는 4복음서 모두에 보도되고 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루가 5,1-11; 요한 1,35-42)

마르코의 소명사화가 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마태오가 이를 그대로 베꼈고, 루가는 마르코의 원전(原典)에 자연이적사화를 곁들였다. 요한은 제자소명사화의 구조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편집하였고, 오늘 복음의 자연이적사화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사화와 연결시키고 있는 반면(요한 21,1-14), 루가는 이것을 제자소명사화에 연결시켰다.

루가의 이러한 의도는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불림을 받는 마르코에서와는 달리 시몬(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향한 가르침을 마치시고 갑자기 시몬을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4절) 시몬이 예수께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답하였다.(5절) 예수께서는 물풀만 걸려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밤새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시몬은 서로 아는 사이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을 나오셔서 곧바로 시몬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4,38-39)로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고, 시몬은 예수님의 능력에 이미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르코는 그 순서를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바, 소명사화(1,16-20)가 먼저고 장모치유(1,29-31)는 그 다음이다. 이 점이 바로 마르코에 없는 자연이적 사화를 루가가 곁들인 이유이다. 천직(天職)이 어부였던 시몬이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몬이 예수께 떠나달라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8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와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신비를 경험한 인간의 통상적인 태도이다. 매혹이 강하면 예수를 따를 것이고, 공포가 강하면 예수를 버릴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예수를 따라 나섰지만,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압박은 늘 베드로를 따라다닐 것이다. 신앙이란 아마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여정이 아닌가 싶다.......◆

  

 

 <밤새도록 애썼지만>(루가 5,1-11)

 -유광수 신부-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몰려온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해주는 곳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으면 교회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복음 선포라고 하고 또는 사도직이라고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갖은 사람들이다. 언제 어디에서든 자기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어야 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일이다. 이 일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 복음은 교회가 또는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타고 있는 배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라는 말은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앞으로 사도로서 복음을 전해야 할 시몬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라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아니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훈련시키신다.

우선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고 이르셨다. 이 말을 듣고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분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대답하고 이어서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묵상할 것이 많이 있다.
첫째, 똑같은 장소, 똑같은 도구(배, 그물), 똑같은 사람이 고기를 잡았으나 결과는 너무 달랐다. 한쪽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하였고 또 다른 한쪽은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쪽은 허탈감, 빈곤함, 절망감이 감돌았고 다른 한 쪽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풍요로움, 일한 보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다시 말해서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도구를 가지고 똑같은 장소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한쪽은 빈곤함과 허탈감이요 절망감이었다면 다른 한 쪽은 풍요로움과 기쁨이 가득찼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하였는가?
어떻게 하면 열심히 일했지만 결과가 비참해지고 빈곤함만 남게되고 어떻게 하면 생각하지 못한 많은 풍요로움을 가져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그 차이가 무엇인가? 그 비결은 지극히 간단하다. 즉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인간적인 노력과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아니면 말씀에 의존하는가? 에 달려 있다.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어릴 때부터 어부로서 살았고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일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만큼은 자기들이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직업인들이다. 그러니까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의 도움이나 의견을 들을 필요없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내리었더니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인간적인 노력과 방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을 많이 해도 말씀이 없으면 또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노력과 방법대로 한다면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몬과 그의 동료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에 오는 절망감, 허탈감, 피곤함, 공허함 등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들이 비극이요, 부정적인 상황들이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고,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만일 시몬과 그의 동료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시몬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무릎을 꿇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셋째,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비참해진다는 것이다. 시몬과 그의 동료 어부들은 장차 사람낚는 어부들이 될 사람들이다. 고기잡는 일이 그들의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낚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사람낚는 어부로서 살아가지 않고 고기 잡는 일에 매달릴 때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쓰라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기쁨을 맛보고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넷째, 복음을 전하는 일은 믿음의 행위이지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고 했을 때 "스승님의 분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물을 내렸다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다.

우리 같으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내리겠는가?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서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스승님의 분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그물을 내렸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주님께 선택받은 사람들

J. 밀턴은 '아레오빠지데카' 라는 글에서 "신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었을 때는 자유의지를 준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해오면서 사람을 선택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크게는 나라 일인 대통령, 극회의원 선택에서부터 작게는 기정일인 친목회 회장 선택까지 집단체일 경우는 항상 사람을 선출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뽑을 때, 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이드로가 모세에게 이런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① 재덕을 겸비한 자 ②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 ③진실무망한 자 ④ 불의한 이(利)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면에서 보면 건강한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육체든 정신이든 건강해야 합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정신과 의사 100명의 추천을 받아 작성한 건강 10가지 수칙을 보면 이렇습니다. 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②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③ 반갑게 마음에 담긴 인사를 한다. ④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 ⑤ 누구라도 칭찬한다. ⑥ 하루 세끼 맛있게 천천히 먹는다. ⑦ 약속시간에는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린다. ⑧ 일부러 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⑨ 원칙대로 정직하게 산다. ⑩ 때로는 손해볼 줄을 알아야 한다. 괜히 이리저리 휩쓸리고 군중심리나 개인친분도, 연고나 지역 감정적으로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믿는 자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 어떤 사람을 택하였나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이런 사람을 택하여 쓰시는 것입니다.

1.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니시다가 고기를 잡는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또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각기 그물을 던지거나 그물을 손질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즉 열심히 자기 일에 충실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1) 인간은 역할적 존재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일거리가 있습니다.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크든 작든 중요하든 소홀하던 간에 자기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큰 일에도 충실합니다.

(2) 일거리가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일을 싫어해서 일을 안 하는 사람이거나 다른 하나는 남이 일거리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3) 자기 일에 충실하면 인정받습니다.
디모데오1서 3장 13절에 "보조자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은 훌륭한 지위에 오르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더욱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고 했습니다. 교회나 직장이나 사회가 일반입니다. 자기 일을 잘하면 더 좋은 일, 더 큰일 , 더 중요한 일을 맡겨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두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은 자기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더 주셨습니다(마태 25,28).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계속 쓰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종교학자는 인간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명령은 신의 최초의 법이다." 마태 4,19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이 말씀은 법이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두말없이 이유없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성경 속에 하느님을 순종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성공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즉시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즉시 따랐습니다.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즉시 보냈습니다(마태 21,3).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드리라고 하니 즉시 모리아 산을 향해 나갔습니다. 하느님을 순종하는 것은 시각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모두다 하느님을 순종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 순종하는 것입니다.

(2) 믿고 순종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따랐지 그 말을 못 믿으면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따라갔습니다(창세 12,1). 사람이 인정 버리지 못하고 미련 버리지 못하면 결국 그것 때문에 올가미가 되어서 순종하는 복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으면 옛사람의 습관과 성격을 버려야 합니다. 
순종하지 못하던 사람이 순종하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유 많던 사람이 믿고 버리고 순종하여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과감한 결단의 사람을 쓰십니다.

R. 데카르트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해악(害惡)은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쓰시느냐 하면 결단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니엘도 이사야도 결단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오로도 결단의 사람이고 베드로 역시 결단을 내린 사람이므로 주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결단은 몇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1)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할까 말까? 갈까 말까? 하며 따져보고 생각해 보고 계산해 보고 눈치보고 머뭇거리다가는 결단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어부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2) 과감히 해야 합니다.
어부가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돌봐주는 이도 없습니다. 그래도 담대하게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3)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배와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물질적 손실입니다. 이것 감수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사람이 현재만 보고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면 현재의 손실에 얽매이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더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법입니다(요하 12,24). 한 알의 희생을 아까워 맙시다. 희생은 하나를 잃는 것이요, 그 결과는 30이나, 60 또는 100을 얻는 것입니다.

(4) 비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상식 선에서 보면 직업 버리고 부모 버리고 가정 버리고 배버리고 떠나면 반드시 비난의 화살이 오게 될 것입니다. 과감하게 결단하는 사람은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큰일하는 사람을 보면 이런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루가복음 18장 28절에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하자, 주님께서 뭐라고 하신지 아십니까? 29-30절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왕이면 주님께 나도 선택받아 쓰임 받는 자가 됩시다. 기왕이면 직장에서 사회에서 큰 일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일에 충실해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신의 법인 하느님의 명령을 순종합시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비난도 희생도 손해도 각오하면 한 만큼 비례하여 여러 배의 축복을 받게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