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43)
I must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because for this purpose I have been sent."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다. 그러자 수많은 환자들이 그분께 몰려왔다. 가난 때문에 질병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고쳐 주신다.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힘과 권능을 보여 주신 것이다. 행동으로 드러내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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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수많은 환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당신께 그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교회에서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의 치유 기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증언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까요? 진정으로 그들의 병이 나았을까요? 분명 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신앙으로 병이 낫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든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시는 예수님과 지금 우리가 성체를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분이십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셨다면 성체의 예수님께서도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났다고 해서 그분의 치유 능력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고자 아픈 사람을 낫게 하셨습니다.
의학적인 지식만을 앞세워 질병과 믿음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신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며칠 전, 인터넷에서 ‘전국 맛 집 주소록’이라는 자료를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음식관련 프로그램에 소개된 맛 집 만을 정리한 자료였지요.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면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어제 동창 신부와 함께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맛 집 하나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자그마치 3군데의 프로그램에서 소개가 된 음식점이었지요. 얼마나 맛이 있으면 3군데에서나 소개가 되었겠어요?
하지만 동창 신부와 저는 그 음식점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 음식점에 전화를 하면 이러한 안내 문구가 나옵니다.
“고객님,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하신 후 다시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영어로 어쩌고저쩌고 말하네요(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 “The dail is wrong number, please call again.”). 그렇습니다. 가게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허무했습니다. 잔득 기대를 하고서 왔는데, 약도에 적혀 있는 곳에는 다른 식당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맛이 있는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들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게를 확장하는 경우가 있으면 모를까, 잘 되는 가게가 없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특별한 이유 때문에 없어지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세 군데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방송되었던 맛 집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점이 듭니다. 바로 이렇게 의문을 품는 제 자신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많은 기대를 가집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딱 맞게 이 세상은 돌아가지 않더군요. 전혀 뜻하지 않은 정 반대로 흘러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판단과 생각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음식점이 없다고 의심을 품고 있는 저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이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군중들의 기대는 자기들하고만 함께 하는 예수님을 원했던 것이지요. 예수님만 계신다면 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굶어 죽을 일도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하느님의 기대에 순종하는 인간의 모습 때문이 아닌,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기대를 주님께 가지고 있었습니까? 혹시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드러내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또다시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의 기대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간절한 기대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에 맞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빠다킹신부
함께 머물기
-김인한 신부-
같은 교구 빈민사목 위원회 신부님들과 함께 부산 범천동에 있는
‘예수의 작은 자매의 우애회’ 수녀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사글세방에
세 분이 사셨는데, 한 분은 국제시장의 공동화장실 청소부로 일하시고,
다른 분은 양산 터미널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시고, 또 한 수녀님은 나이가
많으셔서 집안 살림을 하시며 동네 아이들의 친구로 살고 계셨습니다.
사도직의 방향이 어디냐고 묻는 저의 어리석은 질문에 수녀님들이
씨익 웃으시면서 ‘없는데요’ 하시고는 ‘우린 그냥 가난한 사람으로
무력한 사람으로 똑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해야만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을 해야만 예수의 제자는 아닙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그들과 함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있어 보이고 성과가 나와야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뜻을 이루고 나를 전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예수님께서 머물렀던 마을을
떠나셨듯이 내가 이뤄낸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에서 떠날 수 있는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합창
-박기호 신부(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
2007년 7월 6일은 한국교회에 특별한 날이었다. 한국 최초로 청각장애인을 사제로 서품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필자는 서품식장에 모인 청각장애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기에 창미사와 기도를 수화로 봉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웅장한 합창이었다.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였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기도였다. 자신들의 사제를 가졌다는 기쁨과 자부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었으리라. 필자 역시 장애인 사제 서품을 결정한 교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울먹이는 마음으로 고백했다. 새 사제로 인해 이 땅의 청각장애인들에게 주님의 은사가 풍요롭게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모든 존재에겐 언어가 있다. 자신들의 언어가 엄연히 있기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기도하고 찬양하는데 ‘말 못하는 이, 듣지 못하는 이, 보지 못하는 이’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진실한 것을 보기 위해 눈을 감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하지 않는가? 진짜 장애인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웃음도 눈물도 없는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부나 정치인들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당신께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긍휼히 여기시고 배려하고 사랑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얹으시어 치유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인격체로 소중히 여기시는데 왜 우리는 장애인들을 뭉뚱그려 보며 차별할까?
주님의 치유를 원하는 이는 모두 주님 앞에 나와 함께 찬양드릴 의무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양승국신부-
<명품(名品)으로 재창조되는 은총의 순간>
유럽대륙에서는 14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소빙하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 나무들의 성장이 현저하게 지연되었습니다. 특히 1645년부터 1715년 사이 70년 동안이 가장 추웠답니다.
그런 까닭에 알프스의 가문비나무들이 예외적으로 단단하고 큰 밀도를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난히 많은 명품 바이올린들이 생산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혹한의 빙하기 시대, 추위로 인해 비록 나무들의 성장이 더뎠지만, 그래서 나이테를 살펴보면 이 기간이 유난히 촘촘하고 좁지만, 대신 나무의 밀도는 훨씬 높아진다는 것, 나무의 강도는 훨씬 세다는 것, 그 결과 명품 바이올린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경청’, 조신영, 박현찬 공저, 위즈덤 하우스 참조).
유독 혹한의 시기에 많은 명품 바이올린이 생산되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시련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란 너무나 힘겹습니다.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아픔, 아무리 노력해도 수용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물러서 바라보면 그 시련은 우리를 값진 ‘명품’으로 만들기 위한 은총의 도구란 것입니다.
최근 ‘투르 드 코리아 2007’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국을 방문한 사이클 계의 전설인 렌스 암스트롱의 인생 역시 혹한의 계절을 명품으로 꽃피운 모범 답안입니다.
그의 빙하기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이클 선수로 한창 잘 나가던 젊은 시절 그는 암 진단을 받습니다. 생존율도 높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뇌까지 전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 빙하기를 잘 극복했습니다. 2년 만에 다시 페달을 밟았고, 약 3주간 3500㎞ 남짓 달리는 지옥의 레이스 ‘투르 드 프랑스’에서 7연패(1999년~2005년)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그는 이제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고통 앞에서 포기하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고 크게 외치며 동료 암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손수 암(CANCER)이란 영어 단어로 6행시를 지었습니다.
Courage(용기)
Attitude(태도)
Never give up(포기하지 않기)
Curability(치료 가능성)
Enlightenment(깨달음)
Remembrance of my fellow patients(동료 환자들에 대한 기억)
그는 97년부터 ‘암스트롱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Cancer’의 ‘r’(remembrance of my fellow patients: 동료 환자들에 대한 기억)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해질 무렵까지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일일이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도 예수님으로 인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불치병을 앓던 사람 역시 말끔히 치유되어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오랜 혹한기를 꿋꿋이 견뎌온 가난한 백성들이 그간의 모진 고통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명품’으로 거듭나는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고통 앞에서도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뚜렷해졌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명료해졌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신앙의 사막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머지않아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간 우리가 겪어온 오랜 방황과 갈등의 세월을 마무리지어주실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시달려왔던 굶주림과 갈증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부족한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값진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청주교구 유재훈 신부-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이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치는 악마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려지면 더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게 말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면 자기들을 강대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곧 정치적인 해방을 꿈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까 봐 악마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에는 기복적입니다.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들을 위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청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단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단계를 벗어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과 아픔까지도 받아들이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미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일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특히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말 한 마디면 모든 병을 낫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씩 치료하지 않고 병자들을 한꺼번에 치료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씩 치료하셨습니다.
때로는 흙으로 이용하시기도 하고 죽은 사람 위에 올라가시기도 하십니다.
공생활 동안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으니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치유의 은총을 받았을까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도전과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치유의 기적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병자들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이
기적을 가능케 했던 것은 아닐까요? 바로 사랑의 힘에서 기적이 나왔던 것이지요.
현대인들에게 치유의 기적은 의술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기적 역시
사랑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가 내 아내나 딸을 수술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 수술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잘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기적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셨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골로 1,1-8 (여러분에게 전해진 진리의 말씀이 온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복 음 : 루가 4,38-44 (나는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선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년 동안 예비신자 한 명씩은 다 봉헌하도록 하자고 전에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유, 작년에 괜히 다 해버렸네. 좀 남겨둘 것을…”
부담이 있지요. 많은 신자분들이 선교에 대해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내 신앙도 형편없는데 이 상태에서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더군다나 교리 지식도 짧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괜히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망설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선교는 나 같이 주일 미사만 겨우 나오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장님이나 총구역장, 꾸리아 단장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야."
한편 선교를 하자고 하면 선전문을 들거나 요란하게 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큰 거부감을 나타내고 힘겨워 하기가 쉽지요. 그렇다면 선교는 신앙심이 깊고 교리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지요.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느 성당에서 8개월 정도의 기간을 갖고 선교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부와 중등부, 어른들 모두가 참여한 행사로 학생들은 각 학년별로, 또 어른들은 각 구역별로 나름대로 목표량을 정해주고 함께 할 것을 제안하였지요. 초등부도 유치부부터 6학년까지 실적표를 다 그려 붙여서 어느 학년이 잘 하는지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잘 하는 어린이한테는 상을 주고, 또 잘하는 학년에는 특별히 칭찬을 해 주며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하고 많이 아는 6학년 학생들이 제일 잘했을 것 같지요?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놀랍게도 유치부 꼬마 어린이들의 결과가 제일 좋았습니다. 처음에 유치부 어린이들은 한 열 명 정도 되었는데 6개월이 지나서 확인해 보니 세배로 늘어 있었습니다. 삼십 명도 넘는 어린이들이 성당 마당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선교를 잘했을까요? 유치부 어린 꼬마들의 신앙이 뛰어났겠습니까? 아니면 교리 지식이 풍부했을까요? 아닙니다. 답은 유치부 어린이들의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선교는 용기입니다. 선교는 용기를 내는 것부터 시작되지요. 유치부 어린이들은 성당에 안 다니는 자기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이 다음 번 성당에 올 때 친구 한 명씩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너 나랑 같이 우리 성당에 가자."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그래." 그리고는 따라나섭니다. 그래서 같이 오면 간식도 주고 또 선생님이 잘 왔다고 칭찬도 해주고 하니까 다음에 또 오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교는 용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어린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6학년만 되도 뭔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제일 못하는 학년이 6학년입니다. 자기 생각이 많아지고 이것저것 따지고 재는 것이 많아지지요.
"내가 저 친구에게 말을 했을 때 저 친구가 어떻게 나올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에게 어떻게 세상과 신앙을 조목조목 이야기해서 완전히 항복시켜 성당으로 끌고 나올까?"
이렇게 생각하면 시작도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이야기 꺼냈던 사람이 주저앉고 말지요. 처음 시작이 틀렸습니다. 신앙이 어떻고 성사가 어떻고 이 세상이 어떻고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아주 사소한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친한 친구가 성당에 다니니까 한번 가서 보고 싶어진다거나, 나무를 좋아하는 이웃이 있으면 어느 날 “나무를 참 좋아하시네요. 우리 성당에 참 멋진 소나무가 있는데 한번 구경 가실래요?” 그리고 그냥 가볍게 한번 와서 보는 겁니다. 오면 나무만 보고 갑니까? 성모님도 보게 되고 성당 건물도 보고 해서 눈에 익숙해지는 것이지요. 또 어떤 경우에 이웃과 나란히 성당 앞을 지나 가다가 “우리 차 한 잔 하고 갈까요?”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차는 찻집에만 있습니까? 성당에 와서 차 한 잔씩 뽑아들고 편안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누어 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선교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작은 것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을 해서 서서히 하느님을 알아 가는 것이지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인간적인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은 또 아닙니다. 더불어 필요한 것이 있지요.
두 번째로 꼭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선교를 시작했다가 상처를 받기가 쉽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고 오히려 내가 흔들릴 수가 있지요. 친구한테 성당에 한 번 가보자고 제안했다가 무안만 받고 친구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성당에 가자고 하면 얘기 한 즉시 싸구려 장사꾼 취급을 하며 너무 쉽게 반응을 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하려고 시도했다가 상처를 받고는 다음에는 말도 못 꺼내고 어색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선교할 때 오는 그런 부담감을 어떻게 소화하면 좋겠습니까? 방법은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로 준비하면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반응에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절에 나가자거나 교회에 가자고 하면 “그래, 당장 갑시다.”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겁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에 오는 사람은 “내가 죄가 많은데 성당 갔다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어쩔 줄 몰라 하지요. 그러므로 성당에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을 내 입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다음 동네에도 이 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제자들이 찾을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피곤하고 지칠 때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재충전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에서 오는 많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상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선포는 특별한 누구만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 신자들이 일년에 한 명 하느님께 예비신자를 봉헌하는 것이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 먹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복음 선포는 해서 뭐합니까? 신자들이 많아져봐야 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교가 교회의 생명이라고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복음 선포가 개인의 신심을 성화 시키는데 첫 번째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복음 선포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가 또 가정이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풍성하게 살고 싶으면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언행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저는 사목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심도 약하고 교리 지식도 짧은데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면 걱정말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면 신심이 탄탄해집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 교리 지식이 나도 모르게 풍부해지지요.
나 개인에게 오신 주님을 이제는 이웃에 전함으로써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내 신앙을 이제는 개인에서 이웃에게로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선포는 이웃 사랑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구를 정말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만난 주님, 나의 삶을 정화시켜 주시는 주님을 어떻게 전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전하게 되는 겁니다.
-부산교구 정승환 신부-
오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십니다. 우선 예수님은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십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했다는 보기 드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열을 적대적이고 반항적인 하나의 권능으로 보셨고, 그 악의 세력을 어제 복음에 이어 물리치고 계십니다.
병은 죄와 함께 이 세상에 들어왔고, 이제 예수님은 그 원래의 상태를 복구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영혼과 육신은 온전히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부터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이고, 주님과 함께 미구에 영육으로 고통이 없는 영광에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고통 중에 시달리던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구원의 손길이 그들 앞에 서 계심을 직감하고 주님께 달아드는 것입니다. 마치, 바르티메오처럼 육신과 영혼의 눈이 뜨이기를 희망하면서... 이제 안수를 통해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벌어집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리 덮는 것은 이 치유의 원천이 저 높은 곳,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은총의 내적 효과는 바로 성사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허약하고 병든 육체를 고쳐주시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시고자 그 동네를 떠나게 되십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데 비해 가파르나움의 군중은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나 그분은 떠나셔야했습니다. 당신의 사명은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골로사이서의 말씀처럼 복음은 온 세계에서 열매를 맺으며 널리 퍼져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오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나의 생활은 과연 어떠한지를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나 가파르나움의 병자들처럼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들이며 주님의 자비로움과 사랑 안에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언제나 평화를 전하면서 시몬의 장모처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주님께서 한 곳에 안주하지 않으셨듯이, 폐쇄적인 자아를 부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주님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적 신앙인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보석 - 주님을 가슴 가득 품고 세상을 향해 그분의 사랑을 외쳐야할 것입니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 그 깊은 곳까지 치유해 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치유를 통한 은총
-최혜영 수녀-
오늘날 질병의 고통만큼 인간을 위협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의기충천하다가도 덜컥 큰 병에 걸리고 나면 어깨가 축 쳐지고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에 안 걸리려고 온갖 좋다는 약은 어떻게든 구해서 먹으려 하고, 신약(新藥)을 개발하는 데 엄청난 돈이 투자되곤 합니다. 현대 의학이 과거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 감기 바이러스도 퇴치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신약이 많이 발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병도 많이 생겨 인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일뿐 하느님 자체는 아닙니다. 병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의 전부이시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며 해방입니다. 우리가 치유의 은혜를 청해야겠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넘어 하느님의 다스림을 맛볼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은 순례의 여정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한만옥 신부(의정부교구 백석동 천주교회)-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주셨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청한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따스한 사랑의 손을 얹어 고쳐주셨다.
날이 새자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셨다. 아마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분은 자주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으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시는 바로 그 기도 안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소외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본 군중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들을 떠나지 말고 함께 계시기를 청한다. 그분이 함께 계시면 모든 병도 낫게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신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복음서에서는 어느 한 곳에 안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늘 떠나신다.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에까지.
신앙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사제들도 이 본당에서 저 본당으로, 이 소임에서 저 소임으로 계속 이동하는 것이 아닐까?
- 임성환 신부-
오늘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소문이 나돌았을까요?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신통방통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 그 사람이 손만 얹으면 어떤 환자들도 다 낫더라. 그러고도 돈을 요구하지 않더라. 와~’
이런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온통 예수님께로 모이게 되었고 예수님은 소문 대로 손을 얹으시고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서 함께 살자고 붙들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낫게하는 굉장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을뿐 예수님 그분의 참 모습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받았던 세례의 그 때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세례 예식의 첫부분은 사제의 3가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2가지의 질문이 끝나고 나면 사제는 세 번째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세례받을 사람들의 결심을 묻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세례성사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의를 가지지 못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며 기도에 참여하고 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약속합니까?” “예,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곧 아버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하는 동안 세례를 받을 예비신자들은 굉장히 가슴이 벅차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님이,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강영구신부-
태양은 ‘나는 태양이다!’하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대지(大地) 위에 묵묵히 밝고 따뜻한 햇볕을 비추어주기만 합니다.
동녘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의 여명(黎明)이 찾아옵니다.
깊은 잠에 빠졌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솟아오르고 어둠이 물러가면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때 묻고 더러운 것, 병들고 상처 난 것,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고, 가야 할 길도 보입니다.
태양의 밝음과 따뜻함으로 만물은 생명을 누리고 제 갈 길을 찾아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태양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에 쌓인 중생(衆生)들은 예수를 만나서 새 삶을 얻습니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듯 예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어둠의 세력인 악마도 물러갑니다.
만물이 따가운 가을 햇살을 즐기듯,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박상대 신부 -
세례와 광야유혹 이후, 어느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자기 공생활(公生活)의 목적과 방향을 논리적으로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또 다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첫 공생활의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 회당을 나선 예수께서 오늘은 (아직 제자로 불림을 받지 않은)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뿐 아니라, 해질녘에 사람들이 데려온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다.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에 연결시켜 살펴보면 구마기적과 병자치유는 모두 같은 날, 바로 안식일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4,31-41)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분명히 이 ‘일’을 두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6,2.7)
앞으로도 자주 접하게 될 예수님의 구마기적사화나 병자치유사화는 그 서술상 일관된 구조를 보이고 있는 바, ① 마귀와 병자의 고백 및 상황묘사, ② 예수님의 기적적 구마 및 치유, ③ 구마 및 치유 실증(實證), ④ 당사자와 목격자의 증언과 반응 등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과 질병으로 앓는 사람을 분명히 구별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은 물론 천재지변까지도 마귀(악)의 다양한 작업이라 보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향하여 마치 ‘구마예식’을 행하시듯이 ‘열이 떨어져라.’(39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곧 이웃에 대한 ‘봉사’로 이어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는 마지막 날까지 연일 계속될 그분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구마와 병자치유가 예수님 일상의 스케줄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어디론가 따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이다.(42절) 왜 그곳으로 가셨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복음의 언급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것이다.(6,16 참조)
기도(祈禱)는 루가가 특별히 선호하는 복음의 테마이다. 루가는 공관복음 작가 가운데 기도에 관한 말씀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셨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권장하셨다. 많은 부분이 루가의 고유사료이다. 그러나 루가는 신자들의 믿음을 보존하고(22,32), 유혹을 이기며(22,40.46), 장차 재림하실 인자를 맞이하는(21,36) 방법으로 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가르침을 받고 치유와 구마기적의 은혜를 입은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늘 그들 곁에 두려고 붙잡았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마냥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으시다. 세상의 만백성을 위한 자신의 길을 가셔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속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만 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입은 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람이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를 묵상하면서 나의 하루는 과연 어떤지 생각해 본다......◆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루가 4,38-44)
-유광수 신부-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는 열병이 무슨 병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감기 몸살이나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육체적인 열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하였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로도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은 지도 모른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신 후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일이 있다(마르 9, 33).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자기들 안에 부글 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하시면서 그들이 앓고 있는 열병에서 치료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시몬의 장모는 자기 집에 온 손님이 왔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열병 때문에 누워 있어야 했다.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사랑해야할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고, 봉사해야할 인간이 봉사를 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가정과 사회, 공동체, 교회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어떤 열병이든 열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악이다. 악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든다.
열병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즉 나로 하여금 아니면 공동체가 아니면 가정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공동체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이란 공동체가 서로 뜻이 맞지 않을 때 또는 공동체가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났을 때,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개인적인 열병 때문에 공동체가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또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때문에 개인적으로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가족간에 사랑이 없을 때 가족 모두가 열병을 앓는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녀들이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자녀들의 열병 때문에 부모가 열병을 앓고 누울 때도 있다. 가족간에 한 사람이라도 열병을 앓고 있으면 그 열병은 모든 가족에게 번지고 영향을 끼친다. 결국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나만 혼자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열병을 앓게 하는 원인 제공을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열병은 절대로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그래서 공동체가 또는 사회가 더 나아가 나라 전체가 열병을 앓게 만든다. 이런 모든 악(열병)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주위 환경의 잘못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그 열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시몬의 열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듯이 우리도 내가 앓고 있는 열병 또는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가족이 앓고 있는 열병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청하자. 오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앓고 있는 열병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조용히 성찰해보고 그 내용을 적어서 예수님게 봉헌하도록 하자. 아마 오늘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셨듯이 또 마귀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자 마귀가 나갔듯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의 악을 몰아내시어 치유시켜 주실 지도 모른다. 우리도 열병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도록 하자.
복음은 열병을 앓고 있던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손이 부인에게 봉사했던 것처럼 부인의 손도 "봉사하는 손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중들다."는 말은 희랍어로 "디아꼬니아" (Diaconia) 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세르비레"(Servire)라고 하고 영어로는 "써비스"(Service)라 한다. 이 동사의 뜻은 " 노예가 되다. 종 노릇하다. 종살이 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비위를 맞추다. 순종하다. 몰두하다. 힘쓰다"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즉 봉사한다는 것은 "타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요,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요, 타인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봉사하는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경우는 봉사자의 진정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봉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봉사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두가 봉사하려고 하지 않고 봉사를 받으려고만 하는 데에서 미움이 생기고, 상처를 받고, 불목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열병을 고쳐주시어 시중들게 해 주셨다는 것이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되찾아주신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병을 치유시켜 주셨다는 것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하신 것이다. 즉 잃어버렸던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아주신 것이다.
인간이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봉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먼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복음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기적이요, 선물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바로 우리 자신이고 또 열이 가셔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는 모습 또한 열병을 앓고 있는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열병으로 계속해서 누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치유 받고 일어나서 시중드는 아름다운 인간이 되고 싶은가?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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