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일 연중 제22주일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루카 14,1.7-14)
When you are invited,
go and take the lowest place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대부분 이 말씀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실천은 어렵다. 자신을 높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평소의 절제와 극기가 없으면 자신을 낮추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다가 삶을 그르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비록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높은 자리의 첫째 조건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먼저 볼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포장하기를 좋아하여 별것 아닌데도 그럴듯하게 꾸밉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포장을 벗으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할 때 삶의 기본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 때 높은 자리 역시 잘 어울립니다. 우리 각자는 ‘내가 누군데…….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하는 생각을 버립시다. 그러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은총을 청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감출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과 태도에 예수님의 자리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지하철을 탈 때 가끔 목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차례로 줄에 서 있다가 지하철의 문이 열리면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뒷사람들이 앞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옵니다. 또 건널목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다보면 건널목 바로 옆 횡단보도에서 판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끼리 자리 때문에 다투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모두 좋은 자리,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아우성인가 봅니다.
자리는 그 사람의 체면과 역할을, 사회적 지위와 능력을 그리고 때로는 이해관계를 나타내고 드러내는가 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세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루카 복음(14,1.7-14)에서 자리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8-10).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리를 청하는 장면이 마르코 복음 10장 37절에 나옵니다. 두 제자는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사람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리 때문에 다툼을 벌인 것입니다.
꼭대기는 단 한 사람만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외롭고 고독한 자리입니다. 또한 무게중심이 불안정하기에 쓰러질 위험성도 큽니다. 그 높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서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정상의 자리는 완성이 아니라 전환점, 반을 왔다는 표지라고 합니다. 내려올 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끝자리, 낮은 자리는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붐벼서 함께 어울리기에 인간다움이 배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식탁 자리에 관한 가르침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춤은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삶의 터에서 내 마음과 태도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실 자리가 있다면 어떤 자리에도 미련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평화가 있을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완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행복할 것이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밀치며 자리다툼을 하는 것을 안쓰럽게 바라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그리고 집 주인인 바리사이에게도 한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오늘은 예수님의 낮추는 이가 되라는 말씀과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라는 이 두 가르침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맹사성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학문으로 19살에 장원 급제를 하고 20살에는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를 해 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파주 군수로 가 있던 어느 날 맹사성은 한 고승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스님, 제가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어떤 덕목을 최고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스님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막힘없이 대답했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십시오."
그 말에 맹사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인데 이렇게 먼 길을 온 저에게 그 말씀밖에는 할 것이 없으십니까?"
그 말에는 대꾸가 없던 스님이 녹차나 한 잔 하고 갈 것을 권하자 맹사성은 마지못해 다시 앉았습니다. 그런데 찻잔에 녹차를 따르던 스님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찻물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넘친 찻물로 방바닥이 금방 흥건해졌지요. 화가 난 맹사성이 스님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행동이시오? 지금 나를 모욕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한 마디 하는 것이었습니다.
"찻물이 넘쳐서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그리 모르십니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시뻘개진 맹사성은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그만 방문에 머리를 찧고 말았습니다. 그 때 스님이 또 한 마디를 조용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머리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상대방에게 숙일 것을 요구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줄줄이 부딪히게 되지요. 삶이 힘들어집니다.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14).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어우러지기를 좋아하지요. 낮은 계층 사람들과의 접촉을 불편해하며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 득이 안 되는 사람과는 관계하고 싶어 하지 않지요. 우리는 참으로 영악하게 되돌려 받을 만한 사람한테만 빌려주고 나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람과의 친교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나에게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며 내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진다는 말씀과 되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베풀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평소 우리가 갖고 있던 선입관이나 편견을 깨뜨리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루가 14,1). ‘바리사이’라는 말은 왠지 남의 말꼬투리나 잡는 악하고 거짓으로 가득 찬, 부정적인 이미지로 우리 머리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바리사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요한 3,1 이하의 니고데모 참조). 그러나 통상적으로 바리사이는 위선자나 이중인격자의 대표처럼, 예수님의 적대자로 늘 간주되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에 대한 이런 기존의 시각을 뒤엎고 식사 초대에 응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관을 사려 깊게 재고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손님)을 향해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식사에 초대한 사람(주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8.10.11). 여기서 맨 끝자리에 가서 앉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의 행복과 기쁨을 더 배려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작은 십자가이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필립비서에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마땅히 지녀야 하는 생각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들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새번역 필립 2,3-5.8-9). 그러나 자기 중심적 행복 찾기는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사랑의 깨달음을 오히려 방해합니다. 바리사이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며 자신들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식사에 초대한 주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 14,13-14). 하느님 나라가 발견되는 자리는 가진 것이 없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믿을 데라고는 오직 하느님뿐인 삶 안에서입니다. 이런 삶에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려는 확고한 의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마침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주셨습니다(14,2-6). 수종을 앓는 사람도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14장 12절로 미루어 보아 그는 바리사이의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 새롭습니다.
바리사이의 초대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자들의 화려한 파티를 연상시킵니다. 이런 모임에서는 어느 자리에 앉는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지위의 서열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떤 자리에 앉으셨을까요? 당연히 윗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구간에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윗자리를 고르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보이기 위해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격이지요. 11절까지 ‘자리’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오지만 이는 자리에 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여 끝자리에 앉는 마음을 가져라. 그러면 결과적으로 영광이 돌아온다.’는 말씀이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11) 겸손은 자기 비하나 비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하게 아는 자기 인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고 한 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자신의 자리에 당당하게 똑바로 서 있는 겸손한 자의 말입니다. 따라서 높아지기 위해서 일부러 낮추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면 하느님께서 높여주십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섬김을 받기 위해 먼저 섬겨야 하는 논리와 같습니다.
음악회나 연극 그리고 운동경기 등을 관람할 때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면서도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서 천상 양식이 마련된 미사의 초대에는 서로 다투어 앞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금총’을 받는 앞자리라는데도 굳이 뒤에 남아 있는 것이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아마도 미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이겠지요.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히브 12,22-23ㄱ)
이어 예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ㄴ-13)
코린토 교회에서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자리가 일치보다는 분열을 일으키자 사도 바오로는 이를 꾸짖었습니다(1코린 11,17-34). 좋은 음식을 가지고 먼저 와서 배부르게 먹고 술에 취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늦게 온 이들은 배가 고픈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1코린 11,22ㄴ)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내놓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서 있거나 발판 밑에 앉으라고 하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야고 2,1-4). 좋은 차를 몰고 오면 깍듯이 경례하고, 허술한 차를 몰고 오면 무시하는 오늘의 세상살이가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식에 갈 때 부조금을 내고, 상갓집에는 조의금을 냅니다. 큰일을 치르는 집에 목돈이 필요할 것이니 조금씩 돈을 내어 돕자는 아름다운 취지였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집에는 많이, 부유한 집은 적은 금액을 부조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여서 별 볼일 없는 집은 대충 넣고, 권세있는 집에는 그쪽 체면을 봐서, 또는 나중에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라도 적은 액수를 봉투에 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가치관과는 영 다르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Pay It Forward(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갓 중학교에 입학한 트레버는 사회 시간에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방법을 생각해 일 년 동안 실천하라는 숙제를 받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트레버는 심사숙고 끝에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자신이 누군가 세 사람을 도우면 그 세 사람은 각각 또 다른 세 사람을 돕게 되고 그 아홉이 다시 각각 세 사람을 돕고`…. 그러다 보면 ‘사랑 나누기(Pay It Forward)’ 운동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이를 실천합니다.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유료 주차장에서 앞차가 뒤차 주차비까지 지불하였습니다. 뒤차는 또 그 뒤차의 것을 지불하였는데, 맨 마지막 차에는 그날 주차료를 걱정하면서 딸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발레를 보여주기 위해 돈을 모아 표를 샀지만 주차료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차를 몰면서 하느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가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되돌려 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푼 것이 아니기에 두 이야기 모두 감동스럽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마음입니다.
낙타의 겸손
-평화신문 2004-08-29 -
무술계의 한 대가가 오랜 연마 끝에 유단자 자격을 갖춘 제자에게 신중한 어조로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검은 띠를 받는 참 뜻이 무엇이냐?"
너무도 쉬운 질문에 자신만만해진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검은 띠는 긴 수련의 끝을 의미합니다. 제가 그동안 연마한 모든 노력의 대가로 얻는 보상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답변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아직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1년 후에 다시 오너라."
실망한 제자는 1년 동안 더욱 열심히 수련을 쌓은 뒤, 다시 스승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승은 이번에도 작년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검은 띠를 받는 참 뜻이 무엇이냐?"
한결 성숙해진 제자는 작년보다 훨씬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검은 띠는 수련 과정에서 기량의 진보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이번에도 작년과 똑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너는 아직도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1년 후에 다시 오너라."
한동안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제자가 이번에는 인격 수양에 집중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후 다시 스승 앞에 섰습니다. 스승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검은 띠를 받는 참 뜻이 무엇이냐?"
제자는 아주 조심스럽고 겸손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검은 띠를 받는다는 것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더 큰 깨달음을 향한 여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 대답에 아주 흡족해진 스승은 드디어 "너는 이제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홍병식, �성공할수록 겸손해지는 미덕� 참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겸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아침마다 묵묵히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 오면 낙타는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제나 주인 앞에 고분고분 무릎을 꿇는 낙타 모습에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말없이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주인이 매일 얹어주는 짐을 아무 불평 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낙타는 자신이 지고 가는 짐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낙타에게 짐은 무거우나 짐으로 인해 낙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고통과 십자가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나 그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생각할수록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약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만 갑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길
-서울대교구 함세웅 신부-
영세한 사람이면 누구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신앙을 떠드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확고 부동하게 믿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확신도 없고 기본적인 반응도 없이 입으로만 믿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는 볼 수 없는 사실들을 전부 완전히 믿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입으로만 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뜻을 알며 자기의 소신을 다해서 진리로 삼습니다. 때로는 굳은 신앙을 가진 분들도 신앙의 시련 속에서 의심도 가져 보며 많은 고통을 받기도 하나 그들의 극심한 고통은 결국 그들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분명히 말해 주었고, 또한 사랑과 생활이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지능에 속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며, 신앙에 동의하는 것은 성총의 능력 아래서의 지적 행동인 것입니다. 굳은 신앙을 가졌다면 성세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잘 깨달아 용감히 그 일을 ‘선택’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고도 후에 자꾸만 그 선택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은 신앙이 약해진 까닭입니다. 순교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용감히 선택함으로써 그들의 ‘선택의 불변’을 실제로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지상적인 것을 사랑함에 있어서 주님의 뜻에 맞도록, 주님의 뜻에 따름으로써, 이 모든 것을 실로 주께 향한, 주께 온전히 의지하고 매달리는 그러한 사랑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나 그 사랑은 주께 대한 사랑 속에 있는 것이기에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 묶여지고 그 사랑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 속에 있어 나름대로의 특징하는 일, 특기가 다르나 이 모든 것이 종국에는 천주님 안에 있고 천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며 당신을 위한 살아 속에 있어야 하므로 신앙과 사랑은 하나로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루가 14,11) “위대한 자 되리만큼 도리어 자기를 낮추라, 그러면 주 대전에 은총을 얻으리라”(집회서 3,8) “내 마음이 양선하고 겸손함을 배우라”(마태오 11,29)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야고보 1,20)
“온화한 언사는 동료를 많게 하며 원수의 마음도 누그러지게 한다”(집회서 6,5)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줄로 생각지 말라. 두려워하건대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시는 천주님 앞에 네가 남만 못할까 하노라. 네가 무슨 좋은 일을 하였다 하여 교만하지 말라. 네가 무슨 선한 것이 있다면 남들에게는 이보다 더 선한 것이 있을 줄로 생각하여 겸손한 마음을 보존토록 하라. 네가 너를 모든 사람 밑에 둔다고 조금도 해가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너를 높이게 되면 해로울 것이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항상 평화가 있으나 교만한 자의 마음에는 분노와 질투심이 자주 일어난다”(준주 성범 1권 7,3)
“너는 네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다고 번민할 것이 무엇이냐?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도 그렇지 못하고, 너도 그렇지 못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는 그러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왕이나 교황이라 할지라도 무슨 걱정이나 괴로움이 없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면 남보다 좀 낫게 지낸다는 자는 누구냐? 그는 천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준주 성범 1권 22,1)
“남의 조그마한 잘못을 책하면서도 나의 더 큰 잘못을 상관치 않고 지낸다. 남들 �문에 내가 얼마나 큰 괴로움을 받아 참게 되는지는 꽤 빨리 깨닫고 헤아리지만 내가 남에게 끼치는 괴로움은 쉽게 깨닫지 못한다. 자기 사정을 올바르게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은 남에게 대하여 엄하게 판단할 것이 없을 것이다”(준주 성범 2권 5,1)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만족을 누리기 쉽고 평화를 누리기도 쉬울 것이다. 네가 칭찬을 듣는다고 더 거룩해지지도 않고 책망을 듣는다고 더 천해지지도 않는다. 너는 그대로 너다. 너는 네 속이 어떠한지를 잘 살핀다면 다른 이가 너를 가지고 무엇이라 하는지 상관치 않을 것이다. 사람은 겉을 보고 가치를 헤아리나 천주님은 마음에 깃든 것을 보신다. 사람은 행동을 살피고 천주님은 그 뜻을 살피신다. 항상 잘하면서도 자기를 변변치 못한 자로 여기는 것은 겸손한 마음의 자세이다”(준주 성범 2권 6,3).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서울대교구 최희수 신부-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입니다. 한국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담장 주위에는 해바라기들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고, 교외로 나가보면 코스모스들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김장용 무우와 배추의 씨를 뿌릴 때입니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한가위 휴가에 대해 얘기를 나눕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가위 때,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들과 하늘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차례를 지냅니다.
자기의 때를 아는 겸손함
저는 중학교 다닐 때, 집에 약간의 논이 있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 조금 경험이 있습니다. 약 3천평의 땅이었지만,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상 논에 들어가 일을 해보면, 땅이 넓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농사일은 하루아침에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해나가야 된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비록 3,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배운 것은 자연의 순리였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때(時)를 아는 겸손함입니다. 더운 여름에 하루가 다르게 자란 벼들은, 가을이 되면서 이삭이 영글고, 드디어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면 농부들은 기쁜 마음으로 낫을 댑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과 농부의 순수한 마음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농심(農心)은 천심(天心)이란 말도 이해가 됩니다. 순수한 마음이 없이 농사를 짓기는 힘듭니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다느니, 농촌에 시집을 올 사람이 없어 농촌 총각이 비관 자살을 했다느니 하는 기사는, 이제 별로 특종기사가 아닙니다. 현대는, 머리가 비상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전부 대도시로 몰려들어,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봉급을 타면서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영세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도시 근로자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요즈음 사회는 무엇이나 최고를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가 공부벌레이기를 원합니다. 인륜(人倫)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을 강요합니다. 학교에서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인격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지지 않는 요령만을 가르쳐줍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가 필요한 것은 움켜쥐려는 살벌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겸양지덕(謙讓之德)이란 말은 현대인의 큰머리(?) 속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하느님의 말씀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바로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아득히 사라진 겸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집회 3,18)라는 말씀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게 되면 될수록 너는 더욱 훌륭하게 된다." 또한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19)는 말씀은, 바로 현대인에게 충격적으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현대에는 옛날처럼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저히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려 합니다. 더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기가 모르고 있는 것조차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은폐하기 위한 무수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자기의 말도 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남의 말을 들을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습니다"(집회 3,29).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너무 자신들의 얘기만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삶은 겸손함의 극치
예수님의 삶 자체는 바로 겸손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일생 중에서, 저에게 항상 묵상 주제로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나자렛에서의 삶입니다. 공생활을 하기 전의 30평생 동안 묵묵히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아들로서의 신분을 지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 나자렛의 삶이 필요했겠습니까? 지식이 부족했겠습니까, 아니면 능력이 모자랐겠습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은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때를 아무 불평도 없이 기다렸던 것입니다. 마치 누렇게 익은 벼가 농부의 낫을 기다리듯 말입니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예수님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순명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직 자신의 때를 겸손되게 기다리는 자만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던 겸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고백하는 솔직한 태도를 뜻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나약함을 하느님께 진솔하게 인정할 때,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은 정말로 하느님의 오묘함을 볼 수 있는 조건이며,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동시에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받지도 못하며 초대받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애덕임을 역설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갖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루가 14,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두고 사는 삶이, 바로 겸손한 삶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넓은 들판에 황금 물결이 넘실거릴 때를 미리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자연의 순리를 보면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11).
신앙인의 겸손한 태도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아주 평범한 것들을 소재로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의 짤막한 두 개의 비유는 ‘잔치’라는 소재를 통해 보다 깊고 보편적인 어떤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비유(14,15-24)도 같은 내용이다. 잔치를 우정, 인간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현실을 초월한 신적인 메시지에로 개방되어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모든 것들이,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것들이 신적인 것에로 나아가는 길, 상징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그러므로 식사에 초대받았을 때나, 다른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할 때에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잔치에 참여해야할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모두가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1절)고 하신다. 이 비유는 바?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기의 특권을 뽐내어 주장하는 사람을 하늘나라에서 제외시키신다. 반대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19).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있어서도, 바리사이파 사람은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앞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세리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당하다고 하며 자비를 구한다. 그래서 세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A. Stöger, Vangelo secondo Luca, vol. II, Roma 1969, p. 33).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규범은 겸손이라는 것이다. 겸손을 통해서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 하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윗자리로’(10절) 불러 올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 이다. 내가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손에 우리를 모두 맡길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모델이시다. 그분은 첫째이시지만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필립 2,9).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대성이란 겸손과 봉사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거나 그들 가운데 있도록 할 때, 우리는 가장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우둔함이 첫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기주의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사심과 계산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다. 잔치를 베풀 때에 똑같이 되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를 것이 아니라, 되받지 못 할 사람들을 불러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갚아주심을 기다리라(12- 14절 참조)고 하신다.
여기서는 첫째로 ‘무상성’을 가르치신다. 오직 진실되고 단순하며, 티 없이 맑은 뜻으로 행해지는 행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부차적인 계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파괴된다면 안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14절) 주님께서 주실 바로 그것이다. 이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과 행동의 ‘무상성’을 되찾게 된다. 그 때의 행위가 겸손을 통해 위대 하게 된다.
둘째로는 이 무상성 외에도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바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간과해오고 있지 않았나 한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이들은 바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오늘날에는 노인, 기형아, 지체부자유자, 마약중독자, 감옥에 갇힌 이, 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도 겸손의 행위이며 마지막 자리를 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윗자리에 오르라’는 초대를 받을 것이다.
제1독서의 ‘지혜’의 가르침도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주님의 능력은 위대하시니 비천한(겸손한) 사람에 의하여 그 영광이 빛나기 때문이다”(집회 3,18- 20).
이제 하느님 앞에 스스로를 낮출 수 있고 겸손된 자세로 주님 앞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진정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될 것이며, 그 겸손한 자세로 더욱더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으로 대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풍성한 갚음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 도록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낮아지고 내어줌
-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
얼마 전 교육계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전 동국대 교수 신정아씨를 기억하시지요. 신정아씨는 미술계에서 소위 잘 나가는 인재였다고 합니다. 올해 광주 비엔날레 예술 감독을 했고, 제법 유명한 사설 미술관에 큐레이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분이 학력을 위조해서 교수가 되고 감독이 되고 큐레이터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예일대에서 공부를 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미술계 일부에서는 신정아씨의 기획능력을 인정했다는 사실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능력은 있으되 학위를 허위로 위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도덕적 불감증이 불러일으킨 일입니다. 일단 거짓으로라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보자는 속셈이지요. 인정을 받으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테고, 탄탄대로의 성공의 길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 개인의 명예가 실추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계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고, 꿈 많은 학생들에게 허탈감과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분명 한 개인의 그릇된 비도덕적 명예욕이 낳은 참담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정아씨가 학위를 위조했지만 실력은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에게 생각할 화두를 던져줍니다. 실력보다는 학벌과 파벌이 우선시되는 교육계의 풍토, 특히 미국발 학위라면 검증절차도 별다른 효력를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미국 사대주의에 물든 교육계의 관행, 이것이 우리사회의 현주소인가 싶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교육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 망라해서 학벌과 파벌, 족벌, 지연, 여기에 더해서 미국 사대주의가 합세해 우리 사회를 비뚤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실력이 있어도 이러한 프리미엄이 없다면 남들이 알아주는 자리엔 언감생심,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려 할수록 우리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삼아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자신도 함께 높아졌던 우리 조상들의 겸양의 정신을 이제는 보기 힘들어 졌습니다. 한껏 자신을 높이고 과장해야 대접받고 인정받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조상들의 미덕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이지만 이제 그러한 모습은 쉽게 찾기가 힘듭니다. 누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누구를 찾아 그 탓을 돌리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겠지요. 우리 자신이 모두 이 사회를 비뚤어지게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그 탓을 굳이 따진다면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이 아니라 기성세대 어른들이 더 많은 책임을 가져야겠지요. 권위가 인품이나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에서 나온다고 믿고 그렇게 달려온 어른들의 책임이 큽니다. 뒤와 옆을 애써 외면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탓입니다. 주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나 자신의 행복과 부(副)를 위해서만 달려온 탓입니다. 이러고서는 사회가 정상적이길 바란다면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저마다 편협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우리 사회가 겸손과 희생을 통한 상생의 사회이길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겸손의 미덕으로 살아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몰염치한 생각입니다.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연의 끈을 동원해서 남보다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못된 심보는 버려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나를 지탱해 주고 대접받을 것이라는 편협한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장 가난하고 겸손하게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분이 되셨습니다. 자기희생과 내어줌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장 11절)라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이셨기에, 그분은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며, 인류의 구세주로 우리 앞에 계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은 자기 욕심 다 부리고 허세와 이기심에 사로잡혀 산다’고 핑계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바로 복음(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겸손의 삶을 살아갈 때 세상도 겸손해 지는 법입니다. 내가 낮아지고 내어 줄때 예수님께서 주셨던 하느님 나라는 우리 사회에서 커나갈 것입니다.
오만은 모든 죄의 뿌리이다.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오십 보 백보」,「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오십 보 백보」일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을 아는 사람은 결코 오만하지 않을 것이다. 오만은 모든 죄(罪)의 뿌리이고, 멸망으로 가는 문이다.
1.새끼손가락도 없으면 병신이다.
하루는 손가락들이 모여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엄지손가락이 “그래도 손가락 중에는 내가 최고다. 항상 제일(第一)을 주장할 때나, 두목을 표시할 때는 나를 치켜드는 것만 봐도 알 것이다.”하며 자랑하였다. 그러자 둘째인 금지가 나서서 “하늘의 별을 가르킬 때도, 이것저것 지시를 할 때도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며 자기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가운데 손가락인 장지가 나서면서 “그래도 키도 내가 제일 크고, 생긴 것도 내가 제일 멋쟁이가 아닌가? 뭐니 뭐니 해도 손가락 중에는 내가 제일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넷째인 약지가 나서면서 “병들어 약을 다려 먹을 때는 항상 내가 저어야 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때, 막힌 혈(穴)을 뚫으려면 내가 피를 흘려야 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였다. 그러자 제일 작아서 보잘것없고, 쓸모없어 보이는 새끼손가락이 가만히 듣고 있더니 “나도 중요한 약속을 할 때나, 귀를 후빌 때는 필요하고, 내가 없으면 병신인데!”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우스운 이야기는,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제 나름의 자존심은 있게 마련이고, 또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보여도 모두 제 할 몫이 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2. 제 잘난 맛에 산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착각은 “나는 주인공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위한 조연 내지 단역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할 때도, 모든 사건을 볼 때에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은 보지 못하면서, 남들의 얼굴 생김새, 몸매, 옷매무새, 걸음걸이, 말투 등등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 이렇게 인간은 신체구조나 의식구조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판단하고 살아가게 마련인지 모른다. 그래서 모두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일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바로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교만을 낳는 것이다. 여기엔 “나는 너와는 다르다.”, “감히 나하고 맛 먹으려고!”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자만은 초등학교나 사춘기 학생들에게나 어울릴 유아적인 미성숙이 아닐까? ‘오십 보 백보’,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 보시기에 돈 있고, 많이 배우고, 잘났다고 뽐내는 인간들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우리는 온갖 위선으로 자신의 치부(恥部)를 가리고 포장한 자신이 하느님 보시기에 어떨지를 자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오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나 두려움이 없는 증거이다.
3. 교만은 악의 근원이고, 겸손은 덕의 근본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고 하신다. 누가 교만한 사람인가?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나 약점이 드러나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디질 못한다. 누구나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지만, 오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교만을 더욱 못 견디어 한다. 뿐만 아니라, 교만한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다. 오만한 사람은 누구나 그를 싫어하기에 참된 친구가 없고 고독하다.
교만 중에 가장 역겨운 교만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다. 일을 좀 맡아 달라고 부탁을 받으면, 내심으로는 좀 더 애걸하기를 기다리면서 온갖 겸손한 어투로 사양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모습이다. 그러면 참된 겸손은 무엇인가? 참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선(비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손은 진실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오만 방자함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기에 모든 죄악과 불행이 거기에서 나온다. 오늘 제 1독서에서는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집회3,18.28)고 하신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항상 맘의 평화를 누리고, 모든 덕이 싹틀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고, 특별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죄인들과 가까이 하셨다. 성체성사를 통해 ‘훅- 불면 날아 가버릴 만큼’ 자신을 무한히 낮추시고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밥으로 내 놓으셨다. 지극한 겸손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음으로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구원을 체험하는데 신앙의 길이 있다.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 저희 마음을 당신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아멘.
겸손-있는 그대로의 자신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그리스도인 곧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며, 예수를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앙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또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곧 우리는 한마디로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인들이란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마치 자기가 그 잔치의 주인공이나 되는 양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거만하고 오만스러운 인간이 되지 말고,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예수는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참된 겸손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고 우리도 진정으로 겸손한 신앙인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 겸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고, 그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계산된 마음으로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도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함이며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겸손의 첫걸음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한 마음으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나는 내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분간하게 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아도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자기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의 첫걸음은 정직함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바라볼 수 없고 그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가정에서, 이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디이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압니다. 터무니없이 비굴하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면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이일 저일 온갖 일을 간섭하는 사람, 아무런 협조도 하지 않으면서 뒤꽁무니에서 남을 헐뜯기나 하는 사람,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면서 형제들을 비판하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위치와 그에 합당한 처신을 하지 않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곳에는 늘 미움과 싸움과 분열과 불화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만 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정이 그렇고 우리 사회가 그렇고,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모든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려면,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가정 공동체 안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또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아내로서의 자신의 위치, 자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가정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잘나고 똑똑한 남편, 잘나고 똑똑한 아내, 잘나고 똑똑한 자식들만 있는 집안은 얼마 못 가서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공동체만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설자리 앉을 자리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사회 공동체, 그런 본당 공동체는 늘 말썽과 불화와 분열 속에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이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나의 설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별하는 것이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겸손이 또한 모든 공동체를 사랑과 일치로 이끌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덕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겸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덕이지만, 동시에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 데, 또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리고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추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회개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루가 복음 11장 15절 이하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곧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만 방자했던 작은아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는 오만한 사람은 처음에는 제 마음대로 즐겁고 유쾌할지 모르지만, 그의 마지막은 불행과 비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작은아들은 돼지우리 가운데서 돼지가 먹은 구정물을 먹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작은아들이 자기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돼지우리 안에서입니다. 작은아들은 절망과 비참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됩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작은아들은 그 때 눈이 뜨여서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용서를 청하리라 마음먹게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 그는 겸손해져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회심하여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거짓 없이 바라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성탄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동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성당의 문은 너무 낮고 좁아서 몸을 굽히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되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탄생지에, 거만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겸손해지는 사람만이 그 성당에 들어가서 예수의 탄생지를 순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겸손한 사람만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는 오만한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내침을 받게 됩니다.
또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겸손한 사람은 다른 형제들의 허물과 약점을 참아 줄 줄 알고 용서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늘 오만하고 하느님 앞에 고개 숙이지 못하는 거만한사람이 이웃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흥을 보며 허물을 들추어 형제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요.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 늘 교만한 사람이 자기의 모습은 보지 않고 형제의 허물만 보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일치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사람, 자기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끝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시작이자 바탕입니다. 끝으로 오늘 우리가 들은 제1 독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듣겠습니다.
“너는 들어라. 매사를 유순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리라.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드러내신다. 주님의 능력은 위대하시니, 비천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영광은 빛난다.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뿌리가 그에게 깊이 박혀 있는 까닭이다. 총명한 사람은 격언의 뜻을 되새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는다.”(집회 3, 17-20. 28-29).
“낮은 자리에 앉아라”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허영심·이해득실, 극복해야할 장애”
자신을 가장하여 자신을 좀 더 그럴듯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허영심입니다. 이러한 허영심이 병적으로 발전하면 자기도취적 성격장애를 가져옵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으로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장애의 특징은 인정에 집착하게 되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에 잠겨 타인의 찬사와 존경을 요구합니다. 성격장애 중 가장 흔하며 또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만 문제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이는 사람과는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허영심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강력하고 생산적인 힘이요, 최소한의 허영심은 우리를 죄책감에 빠지지 않고 활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허영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허영심이 삶의 중심을 외부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이 외부로 옮겨지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의 독단적인 평가에 맡기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의 욕심은 끝없이 다른 사람의 찬양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욕구가 성취되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보다 낫다는 사실을 강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게 되는 우를 범함으로 결국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비 복음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자리다툼을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자리다툼. 2000년 전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재 필자는 자치단체로부터 사회 복지시설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기에 가끔 외부 행사를 하게 됩니다. 이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누가 언제 축사를 해야 하고, 누구를 어디에 앉혀야 결례가 되지 않는지 등등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말은 쉽습니다만 실제 생활에서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애정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더러운 오물도 자신의 것이라면 달라지는 것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인간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러기에 『과대평가를 하지 않는다』란 말은 객관적이란 말과 함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벗어난 눈, 「나와 너의 관계」를 벗어난 제3의 눈, 즉, 하느님을 의식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잔치에서 자리를 정하는 이는 초대한 사람이 자리를 정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초대자, 하느님을 의식할 때 우리는 매일 우리를 유혹하는 허영심에서 벗어나 겸손이란 그리스도인의 처세술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비하 없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는 되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이해득실에 따른 대인관계를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이해득실을 따진다. 계산적이다. 이 말들은 분명 우리의 머리에서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말입니다만,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즉, 『이해득실을 따진다』란 말은 머리에서는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선택의 기준입니다만 실제 생활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이 바로 이 말이요, 때로는 정의와 공평이란 가면으로 많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유혹의 마음입니다. 특히 시장 경제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해득실에는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말이겠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이해득실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이해득실을 넘어서야 하는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실망과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의 대부분의 원인이 바로 이 이해득실에 있기 때문이고, 또 인간이 사기나 도박 등 각종 헛된 욕심에 빠져 삶을 탕진하게 되는 것도 결국 비용과 보상을 따지는 이해득실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고 의지적인 삶」, 이해득실을 극복해야하는 당위입니다.
요약해 봅니다. 허영심과 이해를 따지는 마음. 모두가 극복해야할 대표적인 장애물입니다.
물질과 인간을 통해 이해득실과 인정을 추구하는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이해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연습,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장애물에서 해방하는 길이 아닐까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초대
-전주교구 서광석 신부-
어떤 도인이 있었다. 그 도인은 부자의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그 도인은 남루한 옷차림새로 부잣집에 갔다. 그러나 그 도인은 부잣집의 문간에서 출입을 거부 당했다. 들어가고저 다시 말해도 소용 없었다. 그 도인은 되돌아와서 좋은 옷을 차려입고 말쑥한 모습으로 부잣집에 다시 갔다. 그 때에는 그 도인을 그 부잣집의 문간에서 들여보내주었다. 도인은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도인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옷에 가져가 붓는 것이었다. 그 때 그 부자가 도인에게 왜 음식을 옷에 쏟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 도인은 대답했다. “당신이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고 이 옷을 초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옷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 부자는 결국 인격체인 사람을 초대한 것이 아니고, 옷이나 직책을 초대한 셈이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이들을 초대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서 인격을 뺀다면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 중에 가난뱅이, 부자, 지위가 높은 사람, 지위가 낮은 사람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격체이다. 이 인격체라는 면에서 보면 사람은 모두 똑같고 고귀하다. 그런데 부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이미 보답을 받았다. 그 사람들이 중요하다거나, 보다 더 효과적인 일을 한다는 등의 이유로 이미 대접을 받았다.
그러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이제 대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당연한 일이다. 높고 낮음을 없애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여기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에 속한다. 계급이나, 차별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압력이고 고통이며 슬픔이 되는가? 계급이나 차별은 그 자체로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며, 어떤 일을 하는데 효과적인 방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류 사회에서 초기로 부터 점차 이 계급과 차별이 발전해왔다.
어느 한 편의 고통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차별과 계급이 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오늘날 사회의 여러 학문에서도, 많은 반성 후에, 이제는 화합형의 공동체가 일을 수행하는데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효과적인 것, 비효과적인 것을 떠나 단호하게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리고 또한 보답하실 것을 보증하신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보상이며, 거저주시는 한없는 은총과 상충되지 않는 보상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보상과 은총은 상충되는 개념일 것이나, 하느님께는 상충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보상으로 우리에게 한없이 갚아주실 것을 말씀하시며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하고 오늘 분부하신다.
욕망과 소망
-전주교구 이동 신부-
현대는 자신을 알리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더 잘 알리려고 하다보니 겸손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가르쳐줍니다. 또 누구나 다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고 까지도 말해줍니다. 이 말씀은 잘 알고 있지만 살아가면서 실천을 잘 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더 갖고 싶고 더 오르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욕구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도 더 높고 귀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은 더 높은 자리를 찾아 앉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욕망은 한계가 없습니다. 한계가 있다면 그처럼 자신을 지치고 피곤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욕망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도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드러나게 누가 보아도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얻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줄을 서고 기회가 되기만 한다면 그것을 잘 이용해서 윗자리에 오르기를 즐겨합니다. 특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잘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욕망을 드러내어 놓지 않고 잘 포장해서 마치 그러한 일이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인 것처럼 공익적인 소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속아 넘어갈 만한 그럴듯한 이유가 생겨서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너는 네가 지금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는가?” 하고. 만약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자신에게도 또 다른 이들에게도 고통을 주고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소망이 아닌 지나친 욕망의 탐욕이 포장된 모습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바라는 마음처럼 보이지만,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은 욕망으로 다른 사람까지 생각하는 마음은 소망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외적 겸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겸손한 사람이 가진 소망에 대해서도 들려줍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일은 자신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윗자리에 앉지 않아서 비어 있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게 되었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행복이겠지요. 그러나 저 자리는 원래 나의 자리인데 라고 계속 생각하면서 잔치 집에 앉아 있다면 결코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이 우리를 초대하신 매일의 잔치집입니다.
우리는 이해타산에 빠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복음서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모습들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서 하느님 자녀가 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어느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아 가셔서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 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그리고 원칙 하나를 교훈으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들은 집주인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후일 그들은 집주인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행입니다. 결혼식에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부의금을 낼 때, 우리는 이미 그들에게서 받은 것이 있거나 아니면 후일 우리 차례가 오면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초대합니다. 이해타산을 앞세우는 우리의 관행입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하는 대우를 받고 싶고, 사람을 초대하거나 무엇을 베풀 때는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관행입니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초대할 때는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잔치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서 그들을 행복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관행과 예수님의 권고 사이의 거리는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한 나머지 우리의 주변은 우리가 이용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잘 되고 우리 자신이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과대포장 합니다. 입은 옷으로, 가진 자격증으로, 주어진 지위로, 가진 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시선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베푼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되돌려 받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하게 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이 우리만을 보는 우리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느님 자녀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실천에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높이고 드러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대방의 수준으로 낮춥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돌봅니다.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시면, 우리는 소신껏 살지 못하고 모두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욕구 충족을 위해 우리는 전전긍긍 노심초사하며 노예와 같이 살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오로지 지도자 동지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이북의 주민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 하나가 스스로를 높여도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한데, 하느님이 스스로를 챙기고 높이면 우리는 소신을 버려야 하고, 자유롭게 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그대들은 나의 벗”(요한 15,14)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에게서 자유롭게 배워서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셔서 세상에는 자연 질서가 있습니다. 계절 따라 자연은 변하고, 계절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자유로운 인간이기에 우리를 감동시키는 인간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감동하고 행복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삶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시는 하느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스스로를 낮추고 관대하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질주에는 긴장과 반목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 질주에 이웃은 모두 타도해야 하는 경쟁자로만 있습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무자비하게 달렸을 때,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외면한다 하더라도, 어떤 씁쓸함과 어떤 후회는 외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해타산에 빠릅니다.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못 가진 이에게는 인색합니다. 생색나는 일에는 돈을 쓰고 생색나지 않는 일에는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도 나 한 사람 잘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도 돈을 바쳐야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도 돈을 내어야 병을 고쳐 주시는 것 같이 말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습니다. 한국이 경제 성장을 조금하면서 돈은 과대평가되었습니다. 교회들도 사람들도 모두 돈을 향해 달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근성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이해타산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런 해방은 한 번 깨달아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는 실패를 무릅쓴 꾸준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일도 되돌려 받지 않고 베푸는 일도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는 것, 준만큼 받아야 하는 이해타산의 철칙은 우리의 뼈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관행과 그 철칙은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살과 새로운 피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비추어야 하고 예수의 몸과 피인 성체성사가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살자
-광주대교구 박래형 베드로 신부-
어떤 피정에서 강사 신부님이 “삼척이 어디에 있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강원도”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은 “틀렸다. 삼척은 여러분들 마음 안에 있다.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 하는 이 세 가지가 바로 삼척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예화라 생각된다. 요즘 매스컴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이 학위 자격에 관한 내용이다. 다니지도 않았던 대학을 다녔다고 주장하고, 받지도 않은 학위를 받았다고, 자신의 경력을 속인 학력위조가 드러나 이것이 일파만파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실력보다도 어떤 대학을 다녔고,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느냐를 따지는 학벌 위주의 세태가 문제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다니지도 않은 대학을 다녔다고 하고, 취득하지 않은 학위를 땄다고 거짓말하는 사람들 역시도 큰 잘못이다.
거짓으로 시작된 토대위에 쌓인 탑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면 금방 무너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 볼 수 있겠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장 주된 원인이라 생각된다. 자기 Pr시대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오늘의 세태에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말씀처럼 생각된다. 정말 그럴까? 겸손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겉치레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겸손은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겸손은 그저 자신을 낮추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렇다. 참된 겸손은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고,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고, 그래서 부족한 것은 채우도록 노력하고, 잘하는 것은 더 잘할 수 있도록 향상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를 쓰고 위만 쳐다보며 살아가지만, 그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높이 올라 갈수록 떨어질 위험,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을 위험, 결정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겸손을 의미하는 라틴어는 흙에서 왔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안아주고, 어떤 것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그 불순물들을 정화시켜 만물을 성장시켜주는 흙처럼 되라는 의미일 것이다.
흙처럼 사셨고,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보여주시며 우리들 역시도 그렇게 살도록 요청하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섬기는 삶,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낮은 곳에 계신 하느님
-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겸손하여라. 그러면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
오늘 제1독서(집회3, 17-19: 28-29)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이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또 오만한 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도 겸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억울해도 내려가고 손해가 나도 낮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겸손을 ‘후밀리따스’(humilitas)라고 합니다. 이 말은 ‘후무스’(Humus)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후무스는 흙, 즉 땅이라는 말입니다. 땅은 모든 것을 다 안아줍니다. 어떤 것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온갖 잡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땅은 그 불순물들을 모두 정화시키면서 만물을 성장시켜줍니다. 마치 하느님 같습니다!
노자는 또 물을 최고의 선으로 바라봤습니다. 물은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올라가려고도 하지 않으며 기회만 닿으면 내려갑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근 모양이 되고 네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또 네모꼴 모양이 됩니다. 그러면서 물은 만물을 키우며 생의 기운을 줍니다. 물도 꼭 하느님과 같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내려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턱도 없이 ‘밑지는 장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저마다 올라가려고 합니다. 어떤 세상인지 가만히 있으면 당하고 손해봅니다. 자기 분수보다 더 확대하여 선전도 해야하고 젠체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팔리며 그래야 알아줍니다. 세상이 그처럼 사악해졌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언제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올라가다 스스로 헛디뎌 떨어지기도 하지만 옆에서 기어이 붙들고 흔들어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올라가면 멀미나고 피곤합니다. 그리고 내려가면 손해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진정 올라가는 길입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 두 자매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자매는 너무 똑똑합니다. 본당신부가 한마디 하면 세마디, 네마디를 합니다. 자기 주관이 너무 세서 누구의 말도 안들어갑니다. 그런데 다른 자매는 자기 주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도 “예”요, 저렇게 해도 “예”합니다. 그리고 정히 할말이 있으면 끝에 가서 살짝 한 마디만 붙입니다.
그런데 묘합니다. 똑똑한 자매만 만나게 되면 피곤합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뭔 부탁이라도 들어오면 기어이 거절하고 싶습니다. 자기는 이쪽 말을 안 들어주기 �문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자매만 보면 괜히 마음이 편하고 신이 납니다. 그리고 그쪽에선 뭔 부탁이 없어도 항상 그녀를 돕기 위해서 제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기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똑똑한 체 하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죄인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진정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볍씨를 파종하기 전에 먼저 소금물에 담급니다. 그러면 싹을 틔울 수 있는 좋은 볍씨는 아래로 가라앉지만 쓸모도 없는 쭉정이 볍씨는 위로 뜨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는 볍씨를 고른 다음에 좋은 것만 모판에 뿌립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시험해 보면 가벼운 사람은 위로 뜨게 마련이며 무거운 사람은 또 아래로 내려앉게 됩니다.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밑으로 볼 수 있기 �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올라가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못 보고 닫혀진 세상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부끄러워도 내려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자들이 하느님을 참되게 만날 수 있습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덕의 어머니이고 또 하느님 앞에 첫째가는 의무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자는 절대로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밥먹듯 하는 일이 넘어지고 떨어지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한 자 되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바로 낮은 곳에 계십니다.
가장 끝자리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마음의 초대
프랑스인들의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님은 평생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엠마우스’ 운동을 세계적으로 펼쳐 오셨습니다. 신부님은 엠마우스 공동체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 13)
하신 명령의 삶을 충실히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노년의 삶은 소외된 이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 보다 더 큰마음의 초대로 사셨습니다. 그 같은 마음을 보이는 신부님의 글이 있습니다.
“나는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엠마우스 동료들의 양로원이나 파리 외곽에 위치한 고층건물 10층에서 지낸다. 거기서는 파리 전체가 기막히게 내려다보인다.
창문 아래로는 수도로 들어서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는데, 저녁이면 도로 양쪽 방향으로 수천 개의 불빛을 볼 수 있다. 밤이면 나는 창문 앞에서 수도 없이 이런 생각을 했다.
‘얼마나 많은 흐느낌과 행복과 어린아이들의 미소와 병든 이들의 비탄과 사랑하는 이들의 기쁨과 고독한 자들의 슬픔이 뒤얽혀 있는가!’
그 후로는 그 열린 창문 앞에 홀로 있을 때면 미사를 드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인간들의 모든 기쁨과 모든 고통을 그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이다. 또한 그 유리창은 내 성당의 중앙 홀이기도 하다. 내 앞에는 내 모든 형제들이 있으며, 그들을 위해 나는 성체성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세의 삶을 살아가면서 직접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을 내 가정에 초대하여 돌보거나 함께 하기는 어려울지라도 마음만은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함께 할 수 없는지, 그 같은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초대가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초대나, 봉사를 가장한 자기 위안과 만족은 그리 오래가는 사랑의 초대가 될 수 없습니다. 가장 끝자리에 내려와 눈물과 탄식의 밥을 먹는 이웃들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초대받은 바리사이 집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부유한 이들이 아닌 버림받은 이들을 초대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님도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셨습니다. 그러자 진정 사랑으로 초대할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을 사랑의 잔치에 초대한 것입니다. 그 같은 초대가 있었던 사람들이 훗날 하느님 나라에 초대되는 것입니다.
겸손의 초대
우리는 가끔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갖추어야 할 윤리나 우정, 사랑이 동물만도 못하기에 나오는 심한 꾸지람, 질책이라 생각합니다.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고래들이 거동이 불편한 동료 고래를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부상을 당한 동료 고래를 떠받치고 물위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이나, 어미의 주검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끝내 숨을 거둔 어린 침팬지의 모습, 신선한 물과 풀을 찾아 늘 이동하는 코끼리들도 자기 어미의 두개골이 놓여 있는 곳을 늘 잊지 않고 들러 한참 동안 그 뼈를 굴리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 다친 동료 코끼리 곁에 함께 있는 모습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답고 숙연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행동이 반드시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이해타산적인 계산이나 하고 심지어는 잔머리 굴리기 일쑤이며, 교만함이 가득 찬 인간적인 생각이 동물에게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초대하기에 앞서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
교우 집으로 초대되어 식사 대접을 받을 때, 어떤 집에서는 마음 편히 먹고 나오는데, 어떤 집에서는 먹는 것이 부담스러워 탈이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이 자기의 과시나 보이기 위한 초대에 응했을 때 당하게 되는 상처는 너무도 클 것이 분명합니다.
순수한 마음과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랑과 겸손의 초대를 가난한 이들은 기뻐하며, 그 기쁨이 하늘까지 닿는 것이며, 그렇게 초대한 사람 역시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보상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 14)
우리는 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지상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가져야 할 희망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복된 사람들
-대전교구 김신호 신부-
인간이 모여 이룩한 사회 안에는 문화의 상이성에 기초하여 조금씩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간 역사 속에서 형성된 관습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알게 모르게 새로 태어난 사회의 일원을 그 사회에 맞는 사람으로 형성시키는 데에 한 몫을 하게 된다.
우리도 이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관습에 기초한 생활습관과 삶의 형태가 사회 안에서 직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모이는 결혼식 같은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모여든 축하객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요즘은 결혼식에 초청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지서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 같은 마음에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참석하다 보니 준비해 가지고 간 축의금을 건네주고는, 결혼식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준비된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또 다른 결혼식에 가보기 위하여 바쁘게 떠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결혼식도 대부분 주일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꼭 그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일과 같이 사람들이 쉬는 날 결혼식을 올려야만 축의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주일과 같은 쉬는 날을 택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므로 봄철이나 가을철과 같이 결혼식이 많이 거행되는 시기에는, 주일에 미사참여자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많게는 몇 십통의 청첩장을 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예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하여 자기의 은행계좌번호를 청첩장에 인쇄하여 돌리기도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고유한 관습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체, 형식만이 존재하게 되어, 오히려 사람을 귀찮게 하고, 사람의 잘못된 심성만을 확인시키는 씁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청첩장은 세금 고지서
그러나 나이든 기성세대가 경험한 결혼식 잔치는, 전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먼저 잔치가 계획되면, 친지나 친척들이 모이고, 모여든 친척이나 친지들은 모두가 한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행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치렀던 것이다. 이 같은 잔치에는 관습에 따른 질서가 있었고, 이러한 질서에 따라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따른 역할을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나 항렬이 높은 친척은, 당연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 자리를 차지하며, 중요치 않거나 초대받지 못한 상태에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주 낮은 자리, 즉 마당이나 또는 마당 귀퉁이에 자리잡고, 잔치에 참석하는 기회를 갖게되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이 초대받은 혼인잔치는, 우리의 잔치 모습과 매우 비슷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혼인잔치에 참석하면 자신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거나 또는 순위가 모호할 때는 큰소리도 내고 하면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사람들이 알아주도록 간접직접 시위를 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사람들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자신의 위치나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행동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은 겸손의 기본이 될 수 있는 요소다. 더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내세울 만한 것이 조금도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느님 대전에서 높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느님이 높여주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답니다.
-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고려 말, 조선 초에 맹사성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학문으로 19살에 장원 급제를 하고 20살에는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를 해 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어느 날 맹사성은 한 고승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스님, 제가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어떤 덕목을 최고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그러자 스님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맹사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인데 이렇게 먼 길을 온 저에게 그 말씀 밖에는 할 말이 없으십니까?" 그 말에 대꾸가 없던 스님이 녹차나 한 잔 하고 갈 것을 권하자 맹사성은 마지못해 다시 앉았습니다. 그런데 찻잔에 녹차를 따르던 스님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찻물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넘친 찻물로 방바닥이 금방 흥건해졌지요. 화가 난 맹사성이 스님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행동이시오? 지금 나를 모욕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한 마디 하는 것이었습니다. "찻잔의 물이 넘쳐서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그리 모르십니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시벌개진 맹사성은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그만 방문에 머리를 찧고 말았습니다. 그 때 스님이 또 한 마디를 조용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답니다." 이상입니다.
오늘 복음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도 직장에서 승진, 또는 사회적으로 출세를 해야 합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정당당히 해야 합니다. 요즘 물의를 빚은 전 동국대 교수 신정아 씨는 미술계에서 소위 잘 나가는 인재였다고 합니다. 올해 광주 비엔날레 예술 감독을 했고, 제법 유명한 사설 미술관에 큐레이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분이 학력을 위조했습니다. 미국 예일대에서 공부를 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단 거짓으로라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보자는 속셈이었겠지요.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명예 실추는 말할 것도 없고, 꿈 많은 학생들에게 허탈감과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검찰은 유명 교수들의 학력 검증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지위에서든지 자신의 본모습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본모습은 신자로서의 기본인 하느님사랑과 사람사랑에 충실하기 위한 겸손입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는 주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참된 희망은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의정부교구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
점점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이나 푸름을 자랑하는 산에서 나비를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지친 영혼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영혼의 고무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나비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 한권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한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들처럼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여기, 저기 산처럼 서로를 짓밟고 오르다가 결국에 꼭대기에서 본 것은 아름다운 날개를 자랑하는 나비였고, 자신이 할 일은 그 욕심의 산에서 내려와 나무에 매달려 나비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임을 깨닫고 그렇게 하여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다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자신의 능력이나 위치 등을 잘 드러내야 이 세상에서 대우받는다고 생각하며 대부분 살아갑니다. 그래서 경력이나 학력을 위조하면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14,11)라고 하시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현세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쫓는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참된 겸손의 의미, 즉 “크신 주님의 권능이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심”(집회 3,20)을 깨닫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 희망은 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받는 것 보다는 남에게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을 늘 바라며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부활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이웃들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맞이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기뻐하기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참된 희망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항상 기도하며 살아갈 때, 애벌레의 삶을 벗어나 하늘을 나는 나비처럼 세상의 굴레를 벗고 자유롭게 주님을 찬미, 찬양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0) | 2007.09.04 |
---|---|
2007년 9월 3일 월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0) | 2007.09.02 |
2007년 9월 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0) | 2007.09.01 |
2007년 8월 31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0) | 2007.08.31 |
2007년 8월 30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0) | 2007.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