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3일 월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Margaret K 2007. 9. 2. 00:17

 2007년 9월 3일 월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아우구스티노, 암브로시오, 예로니모와 함께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 학자이다.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은 뒤 부친을 따라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내 그만두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590년에 교황이 된 대 그레고리오는 교회 쇄신과 복음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도 헌신적이었다. 그는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가 4,18)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신다. 먼저 나자렛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읽으신 뒤 그 말씀이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안식일에 맞춰 회당에 들러 예배에 참석하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녔던 회당이라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읽으신 뒤 사람들을 둘러보시니 지난 시절 만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날에 보던 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예언서를 해설하시는 예수님을 낯선 눈길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그 소년 예수였단 말인가? 요셉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던 그 청년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놀라움과 호기심만으로 예수님을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은총을 받아들일 마음 자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충격 요법’을 쓰십니다.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하느님의 기적이 이방인 여자에게 먼저 내려졌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하였습니다. 선입관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입관이나 편견은 그만큼 어리석습니다.

 

 

복음은 선포다

-박기호 신부(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 -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 61장을 펴서 읽었고, 회중은 들었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다만 그랬을 뿐인 상황을 두고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은 무슨 차이일까?
어린이는 다가오는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 이미 자전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엄마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고 그래서 현실이 된 것이다. 말하는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선포다. 광복절 특사 명단이 발표되는 순간 이미 석방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듯. 복음은 선포다. 말씀은 읽고 듣는 순간에 이미 현실이어야 한다.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이미 새사람이 된 것, 용서하라면 이미 화해가 이루어진 것, 나누고 사랑하라면 이미 누군가가 사랑에 넘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에 대한 친절한 주석과 묵상은 선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주님의 가르침을 언제까지나 묵상만 하고 해설만 할 것인가? 이제는 듣는 대로 느낌대로 말하고, 가르침대로 행하고, 예수님의 요청대로 우직스럽게 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들었으니 재산을 처분해 나누어 주고 제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 신자로서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행해 보고 나서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얻었다.’ 하든지, 아니면 ‘완전히 사기당했다.’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자로 산다는 것, 보통 문제가 아니다.

 

    

 참 제자의 척도     

-최혜영 수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첫머리에 나자렛에서의 설교 말씀을 싣습니다.
당신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일목요연하게 선포하신 셈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하느님의 왕정은 세상의 세력가들이 통치하는 지배 구조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께는 손주가 없다”는 말처럼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사랑스런 자녀들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상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가 하는 척도는 우리의 가난 정신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균형 있는 발전, 정의로운 분배를 위해 힘쓴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와 행동방식에 일치를 이뤄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한만옥 신부(의정부교구 백석동 천주교회)-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출신이나 가문·재산 등을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배우자를 고를 때 그런 현상이 심하다. 물론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하나의 자료가 될 수는 있다. 문제는 그런 것에 너무 의존하는 데 있다.
집안을 잘 알고 그의 성장 과정도 잘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나름대로 판단을 한다. 그러나 때로 그것이 올바른 판단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으리라.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그분을 좋게 말하고 그분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분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요셉은 목수이고 당시 세속적인 안목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집안이었을 것이다. 그런 집안의 아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놀라운 은총의 말씀을 거침없이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진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찬물을 끼얹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벼랑에 떨어뜨리려고 한다. 나도 세속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지는 않는가?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시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양승국신부-



<세상이 날더러>


한동안 형제들과 함께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지내다 돌아왔습니다. 낮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해가 떨어지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군요.


소리를 찾아 길을 나서면 그 ‘소리’의 출처는 더욱 확연해져만 갑니다. 잡풀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뒷산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 건너편 마을에서 건너오는 개 짖는 소리, 해변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파도소리...


그 누군가의 표현대로 세상은 날더러 더 빨리 움직이라고, 더 빨리 서두르라고 채근하는데, 밤 별들이 총총하게 하늘을 메운 시골의 밤은 세월이 멈춘 듯합니다. 너무도 느긋하게 천천히 깊어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충고하는군요.


“뭘 그렇게 바삐 서두르는가? 천천히, 더 천천히 주변 경치도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게!”


도시에서와는 달리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시골에서 한 며칠 지내면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던 부질없는 욕심들이 떠올랐습니다. 부초처럼 허망했던 것들을 대단한 것이라 여기며 이리저리 방황했던 지난날도 떠올랐습니다. ‘나’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그리도 몸부림쳤던 지난 세월도 떠올랐습니다.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그렇게 죽기 살기로 기를 써도 족쇄처럼 채워져 있는 ‘나’를 떨쳐버리지 못해 고생하는 제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요.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셔서 봉독하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예수님 당신 사명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와 죽음, 거듭되는 악습, 철저한 나약함, 부족함, 끝도 없는 방황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자유로워져야하는데, 생각과는 반대로 몸과 마음이 부자연스럽습니다. 한 마디로 ‘깝깝’합니다. 나만 답답하면 좋은데, 나로 인해 이웃들도 힘들게 만듭니다.


억눌린 사람들, 갇혀있는 사람들, 죄와 죽음의 올가미에 얽힌 사람들의 해방자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삶의 노선을 수정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는 이웃들을 내 의도와 각본대로 잘 짜인 내 틀에 가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나란 존재는 나도 가두고 이웃도 가두는 ‘감옥’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사랑은 이웃들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이웃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랑입니다. 결국 참사랑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자기중심주의를 탈피합니다. 참사랑은 나도 살고 그도 살게 합니다.


참 사랑은 결국 내 안에 참 자유이신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루가 4,22)

 

<칭찬받지 않기>(2002-09-02)

-오상선신부-

 

살아가노라면

참으로 우리는 남으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고자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보게된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과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애쓰고

부모 또한 훌륭한 부모라는 세평을 받고자 한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이다.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참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참 좋은 사람이다.

참 훌륭한 사람이다.

참 훌륭한 사제이다.

참 거룩한 수도자이다.

참 강론을 잘하는 사제이다.

참 영적지도를 잘하는 사제이다.

참 봉사활동을 많이하는 자매이다."

 

세인들로부터 이러한 평가와 칭찬을 받을 때

나도 모르게 우쭐해지고 기분 좋아진다.

그런데 그 반대상황이 되면

나는 속상하고 기분이 언짢게 되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사실 세인들의 평가란

나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외적인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기에

정확한 평가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평가라면 모를까

세인들의 평가 때문에 내 기분이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오늘 예수님을 극구 칭찬하던 나자렛 사람들을 보라!

예수님을 극구 칭찬하고 그분의 말씀에 탄복하던 그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되었는가?

바로 그들이 예수를 벼랑에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들에게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고 해서 모두 화가 나서

그렇게 칭찬했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세인들의 평가란 이런 것이다.

자기들에게 좀 이로운 소리가 되면 극구 칭찬하고

약한 불편한 소리가 되면 분노하여 저주하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평가에 연연해 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가?

 

오늘 사도 바오로도 이러한 관점에서

고린토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세인들의 평가 때문에 두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평가에 연연해 하며 칭찬받을 궁리만을 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내가 칭찬받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느님의 영광을 내가 도둑질하기 때문이다.

 

칭찬은 받지말고 칭찬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칭찬해 주는 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하고

나는 칭찬받으려 애쓰니 말이다.

우리의 영적 성장이 더딘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니겠는가!

 

어느 TV 프로그램에 그런 것이 있었던가?

<칭찬합시다!>

 

그렇다!

칭찬받으려 하지 말고 칭찬하는 것,

여기에 영적 성장의 비결이 있다.

 

자, 오늘은 <칭찬합시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2004-08-30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가 4,23-24)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고향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권력자가 되거나 재벌이 되어서 금의환향錦衣還鄕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히브리4,12)을 가슴에 품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이 되며,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는’(이사야 61,1-2)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가장 잘 알고,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예언자 엘리야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삼 년 반 동안이나 계속된 기근 속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예언자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요르단 강물이 영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나아만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나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렙다 마을의 과부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방인들입니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따위의 인연因緣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은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열린 가슴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구원과 행복을 보장해줍니다.

예수님,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말씀이신(요한1,1) 당신께 온전히 귀의歸依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구원을 보장합니다.
오늘도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하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도록 살겠습니다.(一明)

 

 

 


 

뒤섞이지 않는 힘과 용기(연중 22주 월 2000-09-04 )

-상지종신부-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이 벼랑 끝에서 맞섭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적대자가 되어 예수님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합니다. 절대절명의 위기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올 수 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복음 속을 들여다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들의 한가운데를...

한가운데를...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자기의 갈 길을...

 

예수님의 발걸음에 함께 해 봅니다. 예수님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적대자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그저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차하게 도망치려 했다면, 끝까지 쫓아가서 붙잡아 기어이 벼랑에서 떨어뜨렸을텐데... 자신들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차마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힘입니다. 예수님께 내리신 성령의 권능입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와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섞일 수 없는, 섞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마구 뒤엉켜버리는 경우를 보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례로 현재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동물들에게 땅이나 자연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은 없다. 매매나 양도 등의 개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본래 내 땅이라든가 내 소유의 강물, 내 소유의 산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만이 갖는 관념일 뿐이다. 인간이 소유의식을 갖기 시작했고 동시에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소유의식의 확대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대립과 분쟁, 투쟁과 패배의식을 갖게 한 원인이었다. 과거부터 전쟁의 원인은 영토 확보와 관련되었다. 폭력의 원인도 또한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위한 투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상품의 생산은 모두 자연물의 가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부도덕한 매매형태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투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산업주의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 헌미헌금부 발행 '9월 헌미헌금 봉헌의 달 자료' 중 강론 참고자료에서 인용)

 

마치 자본주의 자체를 공기와 같이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입니다. 극복해야 할 현실에 오히려 적당히 타협하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할 신앙인을 다시금 일깨우는 비판입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타협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타협하지 않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비타협적인 삶이 십자가의 죽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지만, 바로 이 십자가가 있었기에 부활이 있고, 지금의 교회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분명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정의를 위한 몸부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함... 절대로 포기할 수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들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적대자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당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신 예수님께 청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루가에 의한 예수님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

- 박상대신부-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5,1-25,30)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묵상하였다. 오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 주간인 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4,16-21,36)을 평일미사 복음으로 듣게 된다. 내용상 많은 부분은 마태오복음과 같지만 루가복음사가만의 특수사료도 적지 않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직후, 예수 사건(이야기)은 예수의 직접 목격자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된다. 구전된 자료를 모아 대략 50-60년경 처음으로 기록된 것을 ‘예수어록’(Q자료)이라 한다.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집필된 마르코복음은 60~70년경 구전과 예수어록을 토대로 기록되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대략 같은 시기인 80~90년경에 집필된 복음으로서 구전과 예수어록과 마르코복음을 참고하여 가감수정 하였고, 상당부분 각기 수집한 특수사료를 첨가하였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서문(序文)이다. 이 서문에 예수님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이 담겨있다. 공생활의 목적은 인류구원으로서 이미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고하신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58,6-7; 61,2 참조)는 말씀이다. 예수님 공생활의 방향은 목적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사회의 지극히 소외된 자(가난한 자, 묶인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를 우선적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도래(到來)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새로운 ‘은총의 해’(희년: 레위 25,8-13)가 선포되었다. 따라서 예언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21절) 바로 이루어지게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지금’(nun), 그리고 ‘여기서’(hic) 구원의 성취를 보며, 또한 구원을 선취(先取)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제자리(중심)와 궤도

-이수철신부-

 


오늘 말씀 묵상 중 어제 어느 자매님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바로 십자가의 길은 내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고,

  또 걸어가다가

  십자가를 져주는 시몬 같은 이웃이나 형제자매들을 만나면서

  위로와 힘을 얻고,

  또 걸어가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고 땅에 묻히고...

  너무나 평범하고 현실적인 나의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 자매님의 고백에 즉시 공감했습니다.
환상 속에 마음 들떠 제자리를 잃고 헤맬 때

내 삶의 제자리를 깨닫고 궤도를 찾게 해 주는 참 좋은 기도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다음 고백을 통해서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로 바오로 사도에게도 제자리였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자리를 잡을 때

온갖 환상은 걷히고 삶의 본질은 명료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리 역시 다음 복음 서두 대목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안식일마다 늘 회당 예배에 참석하시어

말씀을 묵상하시며 제자리를 확인하셨던 예수님이셨음을 봅니다.


어제 미사 도중 저 역시 순간 제자리를 깨달았습니다.


“아, 제대를 떠날 수 없는, 주님께 사로잡힌 이 몸이로구나.

  제대가 나의 제자리이구나.”


깨달음과 더불어 한없는 평화와 자유를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수도자들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것은 방편은 무엇일까요?


매일 지키는 일과표입니다.

일과표에 따른 삶의 궤도가

우리 삶의 제자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마음 불안하여 들떠 있을 때

일과표의 궤도에 들어가 함께 미사와 기도, 노동의

규칙적 리듬에 맞춰갈 때 주님을 만남으로

내적 질서와 더불어 평화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 불안하여 들떠 있는 분들에게

늘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드립니다.


“마음 따라, 기분 따라, 감정 따라 가지 말고,

  꾹 인내하면서 일과표의 규칙적인 궤도 따라 가십시오.

  궤도에 충실하다 보면

  곧 떠났던 마음은 되돌아오고 불안했던 정서도 안정이 됩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우리는 우리 삶의 제자리와 궤도를 새로이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가 4,16-30)

   -유광수 신부- 

모든 복음서가 다 전해져야할 복음서이고 또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지만 특히 루가 복음서 전체는 복음 선포자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즉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지,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누구에게 전하는 것인지 등 복음 선포자의 자세와 사명을 중점적으로 전해주는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시고 거기에 적혀있는 말씀을 읽고 자리에 앉으시자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성서를 펴서 읽을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읽는가? 나에게도 성서의 말씀이 "은총의 말씀"으로 다가오는가? 나도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은 "은총의 말씀"이라고 하며 놀라워하는가? 그렇다. 성서의 말씀은 매번 읽을 때마다 은총의 말씀이요, 은혜를 주는 말씀이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왜 은총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이 기뻐지고, 묶여 있던 것들에게서 해방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눈이 뜨이고, 억압받고 있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보내어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언제 이 은혜를 받는가?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은혜는 내일도 아니고 앞으로 받을 것도 아니고 바로 오늘 말씀을 듣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기는 바로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말씀이 이루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듣는 이 가운데에서 이루워지는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1, 15)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000년전 나자렛에서 완성된 말씀은 그 때부터 완성된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 어디에서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듣고 받아들인 그 사람에게 말씀이 가져다 주는 은총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선포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다. 즉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워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것이다. 보라, 성모님은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받아들이고 순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으며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은총의 어머니가 되시지 않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성서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고 오늘 완성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 있어서 말씀은 들은 말씀대로 오늘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이 완성될 때가 바로 오늘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바로 오늘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미래에 이루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말씀 그 자체는 오늘 이루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말씀이다. 다만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만, 그것도 말씀을 듣는 자세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읽을 때 과거의 이야기로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한번도 말씀이 내 안에서 오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읽는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말씀대로 이루워지게 하는 은총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읽고 들어야 한다. 아무리 놀라운 은총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펼칠 때마다 은총의 말씀, 은혜를 받게 하는 말씀이라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마도 말씀이 은총의 말씀으로 느껴지고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읽고 들은 말씀이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아직 내 안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오늘 이루어질 수 없는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읽은 말씀이 어떻게 하면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분의 말씀을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고 말씀하신 대로 나의 마음이 말씀 앞에서 활짝 열려져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닫혀져 있으면 안 된다. 귀, 눈, 지성 등 나의 존재 전부가 말씀 앞에서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듯이 우리의 모든 인격이 열려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의 존재 자체가 모두 눈이 되어야 하고 온통 귀가 되어야 한다. 영성적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존재의 모든 모공(毛孔)이 열려 있어야 한다. 온 대양을 흡수하기 위해서 열려 있는 스펀지의 모공처럼 말이다. 우리의 영적 감각이 모두 열려 있을 때 오늘 내가 읽은 말씀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어려운 주문인가?

 

말씀이 오늘 내 안에서 은총의 말씀으로 다가왔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인가?

 

놀라움이다. 즉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놀란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바로 은총임을 깨닫게 된다. 그 때부터 말씀은 진 꿀보다 더 달기 시작한다. 즉 비로소 말씀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말씀을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은혜를 전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다. 은혜 없이 전하는 모든 말씀은 공허할 뿐이다. 또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