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루가 4,36)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그 자리에 있던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해 주신다. 악의 세력을 제압할 능력이 당신께 있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
악한 영을 대표하는 ‘사탄’은 마귀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가끔 사람들에게 들어가 혼란을 불러일으켰으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탄을 몰아내시며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의 놀라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사탄을 두려워하면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사탄을 제압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러한 능력과 힘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그러한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실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예수님의 힘과 권능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탄의 손짓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사탄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은총을 청합시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인
-김인한 신부-
사제로 살아가는 시간들이 더해갈수록 부딪히는 시간들보다는
타협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삶의 치열함보다는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논리들이 더해져가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복음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내 편한 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아닌 내가 내 모든 삶의 주인인 양
교만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신이 저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있는 대로 제가 살게 내버려달라’는
오늘 악령 들린 사람의 말은 또 다른 저의 목소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해 숨쉬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인 양 떠들어댑니다.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은 내게 치워두어야 할 방해물로만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입 다물라!” 하시며
더 이상 거짓된 말을 중단하고, 거짓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끊임없이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우리의 삶을 봉헌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준엄한 꾸짖음으로 들립니다.
예수와 악령은 상관이 크다
-박기호 신부(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
복음에 치유와 함께 악령을 추방하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사회적 불균형과 혼란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압도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사회적 무질서는 육신의 질병과 정신질환을 동시에 일으킨다. 창세기는 본래의 창조성을 이탈시키는 작용을 악마의 짓으로 파악했고(창세 3,1-5)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와 악령과는 공존불가로 여겨 악령을 추방하고 정화하셨다.
가정 경제 향상은 소비가 살아나는 경기부양에 있다며 화려한 상품 소비를 부추겼다. 사람마저 하나의 상품처럼 여겨 능력만을 사고팔고 퇴출하고 폐기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버지도 인간도 없다. 민주주의, 경제발전, 문화생활 향상, 기술시대, 여성의 지위향상, 올림픽, 월드컵`…. 우리 사회는 하고 싶은 많은 것을 이루어 보았으되 남은 것은 이기주의와 넘치는 쓰레기와 생태계의 파괴와 악성종양(암)과 잘못 달려와 되돌아가야 할 길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뿐이다.
거짓 이정표로 우리 사회를 인도해 온 것이 무엇인가? ‘문화생활의 행복’이란 믿음이다.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은 화려한 영상과 정보력으로 오는 마케팅의 실체를 우리 시대의 악령으로 파악한다. 소비를 부추기고 의식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으로 예수 님의 제자한테는 합당치 못하다. 예수님은 불호령을 내려 마케팅의 악령을 추방하신다. 삶의 필수처럼 여겨진 쇼핑을 두고 그것이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자는 악령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신앙과 소비생활은 큰 상관이 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양승국신부-
<봄밤의 수수꽃다리 향기보다 그윽한 사람>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납치극을 바라보며, 그리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섬뜩한 사건사고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인간이로구나’하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무참하게 살상하는지, 마치 놀이하듯 사람 생명을 침해하는지, 어찌 그리도 쉽게 인권을 유린하는지, 무섭기만 합니다. 사람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인간의 본능에 자리하고 있는 선과 악은 천사와 악마처럼 서로 충돌하면서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주체의 존재를 위태롭게 합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추악한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태어날 때부터 흉악범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조직폭력배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본래 인간 그 자체는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한 작가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우며, 봄에 올라오는 여린 잎의 연둣빛보다도 곱고, 봄밤의 수수꽃다리 향기보다 그윽하다.”
봄날, 우리의 후각을 황홀하게 만드는 수수꽃다리의 아름다운 향기는 단 며칠간의 따뜻한 봄 햇살을 받고 급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혹독한 한파를 이겨내며 오랫동안 묵히고 묵힌 그런 향기이기에 더욱 그렇겠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두드러진 일 하나는 죄와 폭력으로 훼손되고 오염된 인간 고유의 가치를 복원시켜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악령과 병,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시달려 갈 데 까지 간 사람들에게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신 일이었습니다.
최선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십니다.
시련이 다가올지라도 기를 쓰고서라도 최선의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사랑의 태양이신 하느님께서 그대를 향해 활짝 팔을 펼치실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때로 스토커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외면할 때도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정면으로 대들면서 막살아도 우리 곁을 맴도십니다. 고질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지라도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악령이 들려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다녀도,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하느님만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낼 때, 언젠가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자비의 팔을 펼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느님, 그 모습이 오늘 복음에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더러운 마귀의 영이 한 가련한 사람 안에 들어가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한 가련한 인간 안에 들어가, 그의 영혼은 물론, 육체와, 정신, 품위를 완전히 훼손시킨 악령, 그 악령의 활동으로 인해 죽음 문턱까지 도달한 한 가련한 인간의 고통 앞에 사람들은 다들 서둘러 피해갔습니다. 다들 두려워 떨었습니다. 다들 악령이 자신에게 옮겨 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다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분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구원의 손을 펼치십니다. 본래의 고귀한 성품을 되찾아주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시켜주십니다.
고뇌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한 인간, 그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오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겹다면, 오늘 모든 것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면, 오늘 비참으로 흐려진 눈을 들 수 없다면,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하느님께서 환한 얼굴로 그대에게 다가올 순간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혼란과 어둠을 몰아내는 그 분의 권위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안정되지 않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등 어느 것 하나 시끄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지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가는가 하면 기러기 같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까지 외국 유학을 보내고자 애를 쓰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기우가 아니라 실제로 교육 현장을 들여다보면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틈만 나면 총장실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초중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야단 한번에 경찰을 출동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한 형편입니다. 또 회사를 운영하는 많은 기업인들은 이런저런 어려움을 하소연하며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사업하기가 벅차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떠난다고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나라의 지도자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안은 외화 반출이나 유출등 여러 부작용을 계속해서 불러오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육하는 사람들, 경제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 또 정치하는 사람들 등 모든 지도자들이 국민을 안심시키고 각자의 분야에서 권위 있게 일을 해나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권위가 서지 않으면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고, 회사가 발전할 수 없으며 나라는 강대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혼란의 시대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권위 부재의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각계각층이 흔들리고 불안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각 분야에 지도자로 있는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 실력과 권위를 가지고 끌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독재 정권 시대를 살아오면서 잘못된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모든 권위 자체를 거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고, 실제로 그 시대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모든 자리를 차지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오류를 청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는 혼란 또한 이 사회를 흔드는 요인이 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권위 부재의 상황은 시대적인 환경의 소산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랜 동안 대를 이어 농경 문화와 대가족 제도 아래 살아왔습니다. 과거 선조들의 경험이 부모 세대에 고스란히 전달되고 다시 그 자식들에게 대물림됨으로써 부모 세대의 가르침과 경험은 새롭게 시작하는 자손들에게는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농경 문화와 대가족 제도가 산업화로 밀려나고 특히 요즘같이 첨단 과학 시대로 접어들면서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경제 현안 속에서 농경 문화는 첨단 산업으로 바뀌고 대가족 제도 또한 핵가족으로 변화되었으며 그나마 이제는 핵가족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만큼 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져 가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부모 시대 경험이 자식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잘 알고 지내는 한 형제님에게는 수재인 자녀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공부를 잘 하였던지 고등학교, 대학교를 월반하고 미국의 유명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자녀가 아버지께 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컴퓨터 인공 지능을 전공하려고 하는데 아버지의 생각을 어떠신지요?”
그때 그 형제는 할 말이 없더라는 겁니다. 과거 경험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첨단 과학이 낯설기만 했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자식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무너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상황이지요. 형제님은 솔직히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전공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그러나 부모로서 네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받침은 힘껏 해주겠다.”
이 형제님의 자녀는 외국에서도 최연소자로 학위를 받고 지금은 대기업의 유능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 세대의 경험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생각지도 못한 변화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상황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지요. 혼란하면 할수록 교육도 어렵고 경제는 불안하며 정치 또한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오늘 복음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보인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마다 그 가르치심에 경탄하여 마지않았다.”(루가4,32)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놀라 수군거렸습니다.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루가4,36)
예수님께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계셨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볼 수 있지요. 그 당시 사회 지도자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이 지닌 커다란 힘은 지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성서 주석가였으며, 법률 관리와 교육 전문가 대우를 받고 있었지요. 바리사이파 사람들 또한 엄격한 율법 준수와 기도와 단식으로 백성들을 지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고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아무런 세력도 없는 예수라는 사람의 권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며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쳐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궁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 그토록 권위를 가지고 유대 백성들을 이끌어 가고자 애를 썼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권위를 잃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5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사람을 가르칠 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 께 바쳤다' 고 말만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 이 위선자들아, 이사야는 바로 너희를 두고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마태15,5-9)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가르치지 않고 사람의 것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쳤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3장에 보면 그것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하느님의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언행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고 말만 할 뿐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권위가 없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권위는 결코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말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권위는 진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육하는 데에 참된 진리가 있습니다. 경제에도,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에도 진리가 있지요. 이 진리를 바탕에 두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이렇게 불안정한 이유는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이기적인 출세지향에만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편애하고 촌지에 눈을 돌리는 교사들의 모습이 교육의 현장을 권위 부재의 상황으로 만들어간 것이지요. 정치가 어지러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한 바른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온갖 부당한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기업 또한 왜 그렇게 노동자들의 불신을 받게 되었겠습니까? 공평한 분배가 아니라 몇 사람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독점욕과 불법적인 부의 세습 등의 문제가 노사간의 갈등을 불러온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투자하고 헌신하면서도 원하는 열매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 있는 모습으로 참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후에 여러분들이 노력하고 수고한 만큼의 효도를 받을 수 있을 지의 여부는 다음 질문의 답변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자식을 위해서 100 만큼을 헌신한다고 할 때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위해서는 얼만큼 헌신하고 있습니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은 당연히 부모보다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헌신할 것입니다. 그런 모습만을 보고 자랐으니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부모에 대한 효를 성심 성의껏 실천해 왔다면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을 성심껏 모시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하면서도 낳아주신 부모님들에게는 소홀합니다. 그러면서 자녀에게는 덕과 효를 가르치지요. 이런 모순된 모습이 부모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지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요즘 부모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바른 권위는 진리에 바탕을 두며, 참 진리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혼란의 시대를 수습하고 더욱 성숙한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리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모들은 진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살아 있는 참교육을 이루고, 선생님 역시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진리에 따른 바른 교육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 또한 권력과 재물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국민과 나라를 위하여 부단히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혼란의 수습은 간단합니다. 새로운 권위와 질서, 또 안정은 참 진리이신 하느님께 바탕을 둘 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경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참 진리이신 하느님의 권위 앞에서는 마귀들도 힘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이 혼란스러운 여러 모습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에 바탕을 둔 권위 앞에서 수습될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말씀을 담고 실천하는 곳에 참 권위가 살아 움직입니다. 혼란 중에도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참 진리를 심어나가는 여러분이 계시기에 우리의 미래는 밝고 아름답습니다.
권위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학교에서는 스승의 권위가 사라진다고 걱정입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주어진 맹목적이고 봉건적인 권위는 물론이고, 올바른 권위마저
사라져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사제관에서
신학교 동아리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후배 신학생이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익산 부근의 초등학교 아이들이었어요.
비행기를 처음 탔다며 창가에 앉고 싶다고 해서 자리를 바꾸어주었더니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요. 두 녀석의 사이에 앉아 있던 제가 참다참다 못해 물었어요”
“어디에서 왔지?” “○○초등학교요.” “무슨 일로 왔다 가는 거야?”
“아람단에서 왔어요.” “아람단에서 왔으면 공중질서를 잘 지켜야지 왜 이렇게
떠드는 거지?”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려고요. 으하하!”
(갑자기 터져 나온 어이 없는 웃음소리) … “더 이상 할말이 없었어요. 계속해서
떠들면 너희 부모님과 선생님이 욕을 얻어먹게 된다고 했더니 뭐라고 대꾸한 줄
아세요?” “부모님은 우리의 거울이지요.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일부러
선생님이 들으시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부모님이 가정에서 교육을 잘 시켰다면,
자녀들에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범을 보였다면, 선생님이 학교에서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였다면 부모와 스승의 권위는 바로 설 것입니다.
-부산교구 김정수 대건안드레아 신부-
복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짜릿했다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가 감동했다, 이런 표현은 없고 오늘 말씀대로 “그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마다 그 가르침에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루가 4,32)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마음에 말씀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율법학자들, 요즘 말로 하자면 대학원 교수 이상쯤 되는 이런 분들, 또는 원로, 사회 경력과 학력이 높은 위치에 계신 연세가 많은 어른들보다도 젊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훨씬 권위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권위가 어떤 권위냐 하면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진리를 가르쳐주는 힘의 권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권위를 지니셨기 때문에 율법학자들보다도 더 큰 권위를 가졌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썩 나가거라.”(루가 4, 35)하고 꾸짖으시자 마귀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하느님의 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악령의 힘도 무력화시킬 수 있고, 멸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힘이었고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하느님의 권위였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 설득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악령까지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셨지만 근본적으로 하신 일은 악의 원천을, 악의 뿌리를 흔들어 바로 잡으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느님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원칙이 세상을 이끌어 가고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이 바뀐다는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고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수군거렸다.”(루가 4, 3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혁명가나 정치가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병자를 고쳐주셨더라도 병을 치료하러 오신 것만도 아닙니다. 결국은 인간에게 믿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당신의 계획이었고, 이 계획은 하느님 말씀에 의한 실천이었습니다. 세상과 인간관계도 하느님을 앞세우고 하느님 정신으로 바꾸어 놓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속에 있는 악의 요소를 처 부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였고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한 가지 반성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안에서 무엇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예수님 정신으로 얼마만큼 우리가 무장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더라도 그런 느낌이 없으면 우리의 빈 마음은 세상의 정신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여러 가지가 하느님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신앙이 귀찮아지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강요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바뀐다는 생각을 이제 교정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바뀌어지고 또 하느님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악의 원칙을 멀리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오늘을 살면서 예수님 말씀 따라 악을 멀리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시기를 빕니다. 하시는 일을 예수님과 상의해서 하시면서 그분의 말씀도 듣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를 쳐 이기시면서 또 하나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거기서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하셨지만 그 다음에는 한적한 데 가셔서 기도를 하시고 사람들이 몰려 올 때 그 사람들에게 매어 있지 않고 즉시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몰려와도 우선 기도를 하는 것을 앞세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마귀를 몰아내는 것 자체가 우선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우선한다는 것을 아시고 기도를 하러 가신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계시지 않고 다른 곳에 가셔서 역시 그들의 필요한 것을 다 해결해 주셨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한 곳에 모여 있는 병자, 몰려오는 백성, 마귀가 붙은 사람을 떼어내시는 등의 일은 하시고 그 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또 필요한 곳을 찾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가 마음을 두는 그 곳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더불어 폐쇄적인 삶을 산다는걸 아시고 떠나셨습니다. 인간이 어느 한 곳에 안주하고 그곳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 바로 그곳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타락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도록 장소를 옮기셨습니다. 한곳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필요한 곳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알아듣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정승환 신부-
오늘 예수님은 갈릴레아의 마을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셔서 가르치시면서 우리 평화공동체를 초대합니다. 우리 다 함께 허리에 띠를 두르고 주님이 베푸시는 말씀의 식탁에로 나아갑시다. 가파르나움에서 주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이들은 그 교리에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처럼 궤변을 늘어놓거나 결의론에 빠지거나 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권위를 가지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제나 명확하며 모호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이의 지능을 초월합니다. 부드러우며 독선적이지 않기에 청중들은 그 말씀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그 자리에 마귀 들린 사람이 무대로 나오게 됨을 주목하십시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 날 회당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영으로 알아본 사람은 악령 들린 사람하나였던 것입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가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이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령은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어 대항을 시도합니다.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 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4장 34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놀라운 구마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 사람의 입을 다물도록 명령하시고, 마귀에게 썩 나가라고 권위 있게 말씀하십니다. 또 한번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아보고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제 암흑의 나라가 빛의 나라인 예수님에 의해서 해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4장 36절)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선과 악의 싸움을 보았고,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옛말에도 "등불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고 했듯이 빛이신 그리스도 앞에 악령은 결코 더 이상 그 세력을 확장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사탄은 예수님과의 대적에서 번번이 지기는 하지만 완전히 떠나가지는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싸움은 오늘 가파르나움 회당을 거쳐 공생활 내내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싸움의 궁극적 종말은 묵시록 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마지막에 이르면 사탄의 권한은 완전히 그 힘을 잃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통치권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권능도 완전히 주님께 굴복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아니하였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귀처럼,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는 악의 세력이 끝없는 유혹의 모습으로 그리고 쾌락의 모습으로 간단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외칠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리더십
-최혜영 수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고도 하는데, 제 생각으론 후자의 의견에 더 신뢰가 갑니다. 남들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일도 역량이 있는 사람이 맡게 되면 금세 중요한 일이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품위가 느껴지지 않고 믿음직스럽지 못해 걱정만 끼치니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자기 분수대로 본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쓸데없이 어떤 자리를 탐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거나 행동하시는 데 권위가 있으셨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왔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비전이 있으셨고, 당신의 정체성이나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왔기에 생각과 행동에 갈라짐이 없이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뚫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현대 리더십에서 리더는 과거 리더가 가졌던 통제와 관리의 기능보다는 가치와 관계성을 중시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어가고 개인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리더의 권위는 남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잠재력을 발휘하여 창의적으로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데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으로 요약되는 섬김의 리더십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한만옥 신부(의정부교구 백석동 천주교회)-
◆양심성찰을 할 때 혹은 피정 때 자신의 죄를 살피거나 묵상할 때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좀더 성실하게 잘살 것을…’ 하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왜 이 모양일까? 왜 주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어렸을 적 주일학교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러분 한쪽에는 천사가 있고 한쪽에는 마귀가 있어요. 그런데 둘이 늘 싸운답니다. 누가 이길까요?” 우리는 모두 “천사요” 하고 외쳤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천사의 말을 들으면 천사가 이기고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귀가 이기는 거예요” 했다.
사제수품 때 독신과 순명을 약속하고 청빈의 정신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했고, 수없이 그 약속과 다짐을 되뇌이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욕심이 가득함을 발견한다. 진정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어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 주일학교 선생님 말씀대로 매순간 천사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더러운 마귀의 영이 끊임없이 악으로 이끈다는 것을 체험한다. 주님 은총이 아니면 한순간도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기 어렵다.
더러운 마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지금 주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면 예수께서는 똑같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앉아서 죄로 이끄는 그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실 것이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하실 것이다.
예수의 간섭(2001-09-04 )
-오상선신부-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
내가 잘 아는 자매가 하나 있다.
최근 그 자매는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받고 있다.
이유인즉
그 자매와 그 자매의 형제자매들이 지금까지 애써 아끼고 저축한 돈을
한꺼번에 사기당하여 날려버리고
덧붙여
빚까지 떠 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하느님께서는 하셔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내치실수가...
어떻게들 살아왔는데...
남들 잘 먹을 때 안 먹고
남들 옷 살 때 사지 않고
남들 집 살 때 전세집에서 살고
아끼고 또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왔는데...
--------------------
하느님께서는 가끔 이렇게
너무 하신다고 하실 정도로
선한 사람을 내치실 때가 있다.
오늘 악령들린 사람 안에 들어있던
마귀가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반문하듯이
때로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 왜 이러십니까?
왜 당신 자녀가 잘 되는 꼴을 못봐주십니까?> 하고 싶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내침이 필요하다.
그 악귀를 그 사람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는
초죽음이 될 정도의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예수님께서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나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린다.
그리고 악령이 완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천천히 기운을 회복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마귀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 마귀들을 몰아내어 주시기 위해서
때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분이 우리를 미워하실 리가 없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마귀들을 몰아내어 주시며 치유시켜 주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내치시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힘이 워낙 강력하여
잘 안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우리도 함께 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지나보면 안다.
그분은 우리를 죽지 않을 정도로 내치신다.
우리는 악령이 떠나간 후에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게 되고
영적으로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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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아는 자매에게 말해주어야 겠다.
하느님께서는 자매를 정말로 사랑하신다고...
그래서 아프지만 내치셨다고...
자매를 내치신게 아니라
자매 안에 있는 자매가 의식하지 못하는 악령을 내치신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오, 주님
당신의 뜻을 알아채리기가 이렇게도 힘든단 말입니까???
사랑은 권위
-강영구신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고 권위 있는 사람은 대통령(大統領)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대통령은 권위를 잃고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그가 권력욕(權力慾)에 휘둘리지 않고 사심 없이 나라와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권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권위는 힘입니다.
사람의 몸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재력(財力), 폭력(暴力), 무력(武力), 권력(權力) 따위입니다. 사람들은 돈의 힘이나 주먹의 힘, 권력의 힘 때문에 마지못해 움직입니다.
사람의 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있습니다. 지식(知識)이나 학력(學力) 따위입니다.
선후(先後)를 조리 있게 설명하여 설득하면 사람의 머리와 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과 머리와 마음을 다함께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힘으로 강제하거나 합리적으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와 몸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습니다.
참 권위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마귀들도 사랑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4,16)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나자렛 예수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랑이자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분 말씀 안에는 구원할 수 있는 능력과 해방의 권위가 있습니다.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참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一明)
마산교구
† 루가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박상대 신부-
오늘복음으로 이어지는 루가복음 4,16-30에서 보았듯이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절대적인 인류구원 계획과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그 증거로 봉독하셨고, 이것으로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안다는 근거로 한 발짝 물러난다. 예수께서는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는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시지만,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기원전 850년경)에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언급하시면서(1열왕 17,7-16; 2열왕 5,1-14), 하느님의 손길이 이스라엘을 떠났음을 지적하셨다.
화가 치밀어 오른 고향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예수를 벼랑으로 끌고 가서 죽이려 했으나, 글쎄 아직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한 가운데를 지나 가야할 길을 계속 가신다.(30절)
마르코복음(1,21-28)에서와 마찬가지로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첫 번째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치유’, 즉 구마기적을 보도한다. 나자렛을 떠나 가파르나움으로 오신 예수께서 가르침을 내리신 후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이 구마기적인가? 왜 마르코와 루가는 예수님 공생활의 첫 번째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치유를 보도하는 것일까?
오늘날 마귀나 귀신에 관하여 얘기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요즘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다가 엑소시스트 영화의 제목이나 소재로나 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2)등 사람 안에서 나오는 온갖 악(惡)에 관하여 얘기한다면, 아마 웃는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마귀나 귀신에 관하여 얘기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요즘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다가 엑소시스트 영화의 제목이나 소재로나 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2)등 사람 안에서 나오는 온갖 악(惡)에 관하여 얘기한다면, 아마 웃는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마귀나 악의 기운을 실존(實存)하는 세력으로 간주하였고, 사람과 결탁된 이런 기운을 몰아내는 일이 예수님의 일상적 소관(所關)만은 아니었다. 마귀나 악은 비인격적으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세력일수도 있고, 인격적으로 사람에게 속한 개성일수도 있다. 우리가 ‘나쁜 사람’ 또는 ‘악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런 나쁘고 악한 기운과 세력에 습관화된 사람을 말한다. 이 습관이 행동으로 성취되면 죄(罪)가 되는 것이다.
성서(聖書)는 마귀에 대한 어떤 정확한 정의도 내리지 않고 있다. 다만 마귀가 사람과 결탁하였을 때의 현상을 보여준다. 마귀 들린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보다 더 이상한 현상을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마귀 들린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셈이다. 모든 가치와 규칙과 기준이 고유한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간에서 훌륭하게 풀어 가는 ‘마음의 법칙과 육체의 법칙’의 관계에 참으로 공감한다. 바울로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善)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惡)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罪)입니다”(로마 7,15.19-20) 라고 하였다.
여기서 바오로가 죄(罪)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자신과는 별개(別個)인 하나의 대상(對象)이다. 그것도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이 아닌 대상인 셈이다. 그런데 이 죄라고 하는 대상이 사람 안에서 활동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善)이 모자라면 악(惡)이요, 악(惡)이 행동하면 죄(罪)가 되고, 악(惡)이 될 수 있는 생각은 이미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 있다. 그런 생각을 태도로 보이거나 행동으로 옮기고 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마음에 들어 있는 악한 생각을 쫓아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조금씩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루가 4,31-37)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하신 이후에 곧 이어서 루가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말한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위엄을 갖추신 가르침이란 말인가? 외적으로 화려하고 품위 있고 높은 지위에 앉아서 가르치는 권위를 말하는 것인가? 외적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는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란 희랍어로 "엑수시아"(Exusia)라고 하고 그 뜻은 "힘"이라는 뜻으로 오직 하느님께만 사용하는 단어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하느님의 힘이 담겨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무슨 힘인가? 창조의 능력, 치유의 능력,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 등이 담겨져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오늘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는 이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은총의 말씀이다. 그래서 탄복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다만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밖에 없고 그 말씀은 그 때나 지금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힘이 담겨져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고, 어부들을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했던 그 권위 있는 말씀은 오늘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은 권위 있는 가르침이요, 오늘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며 수단인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구원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루신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에서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잡혀간 이들이 해방되고, 눈먼 이들이 보게 되고, 억압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이다. 성령을 "푸네우마"라고 하는데 "입김, 힘, 기운"이라는 뜻이다.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이 성령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의 활동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이 후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가운데에서 구원 사업을 이끌어 가시는 주체이시며, 우리 안에서 놀라운 역사를 주도해 나가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현존하시고 역사 하신다. 말씀에는 성령이 담겨져 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은 가시적인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역사 하신다. 그러니까 말씀은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곳이며 어떻게 역사 하시고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시는 수단이며 방법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성령이 담겨있는 가르침이란 뜻이다. 그래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담겨져 있는 이 말씀대로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인 기쁨, 평화, 사랑, 온유, 절제, 겸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이 곧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삶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즉 말씀이 하느님의 힘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면 왜 내 안에서는 이런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가? 내가 매일 말씀을 읽고 들어도 내 안에서 아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하느님의 권위는 위엄 있는 권좌에 앉아서 선포하는 권위가 아니다. 높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권위가 아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칭찬 받기 위한 권위가 아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봉사하기 위한 권위이고 힘이다. 즉 봉사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기 때문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시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하려면 나 또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시는 말씀이 내 안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완전히 맡겨드려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처럼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거부한다면 그리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로만 또는 교만한 마음으로 또는 머리로만 아는 척 하는 이들 안에서는 절대로 역사하지 못하신다.
예수님은 오늘도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가르치셨다."는 동사는 반 과거이다. 반과거는 가르치는 것이 끝났다는 것을 말하는 과거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한 가르침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2천년 전에 가르치기 시작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때에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셨다면 오늘은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말씀을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치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권위 있는 가르침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신다. 말씀 앞에서 무성의한 마음, 교만한 마음, 목마름이 없는 마음으로 머무는 사람에게서는 그 어떤 놀라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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