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07. 9. 1. 04:59

 2007년 9월 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오 25,23)

   

‘Well done, my good and faithful servant.
Since you were faithful in small matters,
I will give you great responsibilities.
Come, share your master's joy.'

   

  

 주인은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맡긴 탈렌트의 양이 달랐다. 많이 받은 이는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하나를 받은 이는 우왕좌왕하다가 그 하나마저 빼앗겼다. 탈렌트는 능력이다. 주인의 뜻에 맞도록 사는 능력이다

 

☆☆☆

 

 탈렌트는 예수님 시대의 화폐 단위로, 한 탈렌트는 노동자 한 명이 이십 년 동안 일해야 받을 수 있는 품삯과 맞먹는 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무지무지한 금액을 비유에 등장시키셨습니다. 확실한 느낌을 가지라는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이 그만큼 크다는 암시였을까요? 아무튼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잘 활용하여 두 배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받은 사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적었기 때문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가르침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누구나 탈렌트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 탈렌트도 엄청난 돈입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 탈렌트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펼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로 이윤을 남긴 종들에게 한 주인의 말입니다. 주인과 함께 나눌 기쁨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통하여 깨닫는 삶의 기쁨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여인이 우연히 일생동안에 있었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게 만드는 망각의 강물이 있는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사람이 친절하게 말해줍니다. 이 망각의 강물을 마시고 안 마시고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이지요. 그러자 그녀는 반갑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저는 고생한 것을 모두 다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기뻐했던 것도 함께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자가 다시 말해요.

“저는 저의 실패도 모두 다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승리도 모두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미움을 당한 것도 모두 다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사랑받던 것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잠깐 동안 이 물을 마실 것인지, 마시지 않을 것인지를 고려해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부분까지도 모두 잊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결국 그녀는 이 망각의 강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생동안에 경험한 사랑과 기쁨을 잊는 것보다는 슬픔과 실패와 함께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슬픔과 아픈 시간에 더 오래 머물러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실제로 그러한 시간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행복을 누리는 시간은 아주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일부의 시간으로도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러한 능력들을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나도 힘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탈란트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듯이, 탈란트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노동자 한 명이 20년 동안 일해야 받을 수 있는 품삯)입니다. 결국 한 탈란트나 두 탈란트, 다섯 탈란트 모두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는 큰돈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차이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능력 자체가 워낙 큰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차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입니다. 그 능력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자신이 받은 능력을 땅에 묻어 두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들을 잘 활용해 나갈 때, 세상의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희망을 간직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빠다킹신부

 

 

   믿어주시는 하느님      

-김인한 신부-


 신학생 시절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무료병원에서 일할 때, 심한 알콜 중독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고 퇴원을 하자마자 술에 취해 병원을
찾아와서 또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이가 그를 내쳤는데,
오직 한 수녀님이 ‘그래도 우리는 이 사람이 치유될 것을 믿고
받아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이가 구제불능이라고 했던 그는
이제 중독에서 벗어나 아마 지금도 그 병원 앞마당을 쓸고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비로운 주인의 비유, 사랑 가득한 주인의 비유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탈렌트를 받아서 쓰는 종이 아니라, 주인이 종들을 먼저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충실한 종은 불리고, 불충한 종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어떻든 간에 주인이 먼저 그들을 믿고 탈렌트를 맡겼다는 것입니다.
불신하여 맡기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주님은 종들을 믿고
편안히 먼 길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주님,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신 주님, 우리를 먼저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먼저
구원해주신 주님, 우리를 먼저 안아주신 주님. 그런 분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나 자신조차 나를 감당할 수가 없는데, 그런 나를 먼저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든든합니다.

 

 

 교육은 몇 년 정도 필요한가?

-박기호 신부(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


 모든 부모들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자녀교육이다. ‘교육이란 사회화 작업’이라 정의한다. 전통 사회에서는 어려서부터 예의염치(禮義廉恥)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중요한 윤리교육으로 가르쳤다. 쌀 한 가마니를 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평생 동안 일하고 먹고 살아갈 교육이 마무리되고 이어 결혼시킨다. 부모를 벗어나도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농사짓고 자식을 양육하며 살아가는 데 부족함 없는 온전한 성인으로 키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은 유아원에서 대학원까지 줄잡아 22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방과 후 학원까지 중복 계산한다면 40년 세월을 공부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서른 살 늙은이(?)가 될 때까지 돌봐주고 아파트를 사서 결혼을 시킨다. 한데 문제는 액자를 걸기 위해 못을 박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김치나 고추장도 담그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도 양육을 못해 친정 가까이 살아야 한다. 좋은 학벌과 자격증, 고소득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경쟁력 있는 자녀로 교육시켰지만 결국 책상 앞에서 궁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반쪽짜리 교육을 시킨 것이다. 이건 불구자다. 게다가 이제는 ‘부지런한 가난뱅이보다 게으른 부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수완과 능력을 보지 않으시고 ‘삶의 충실성’을 보는 분이시다.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탈렌트란 환경과 여건일 뿐 생산 능력이나 경쟁력이 아니다. 다섯 탈렌트를 맡았건 두 탈렌트를 맡았건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인간’을 만드는 일이 교육의 핵심이다.

 


 

 -김인한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저는 신학생때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무료 병원에서 두달가량 현장체험으로 일한 적이 잇습니다. 무료병원이라서 그런지 참 어려운 분들이 많이 왔었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거나, 아니면 너무나 가난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서 일을 할 때 가장 골치아픈 환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노숙자들 가운데 알콜 중독을 가진 분들이엇습니다. 처음 알콜 중독 환자들을 보고 많이 놀랬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니 온 병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진정제를 아무리 놓아도 듣지를 않고, 욕을 하기 일쑤이고, 수녀님을 보고도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하고, 힘이 얼마나 센지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치료를 하면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정상적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나 퇴원을 하자마자 술에 취해서 병원에 찾아와서 또 난동을 부리는 것을 보면 참 허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그중에 그런 한명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수녀님들까지도 한명이 계속 그것을 반복하니까, 그냥 받아주니까 그런거라면서 병원에 받아주지 말자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명의 수녀님이 그래도 우리는 받아줘야 한다고, 그래도 우리는 이 사람이 치유받을 거라고 믿고 그래도 치료해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받아줬지만 그 사람은 그것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술을 끊고 그 병원에 청소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곳에 가도 될텐데, 그래도 그 사람은 부모 형제도, 친구들도 인간쓰레기라고 하면서 안믿어주엇지만, 나를 유일하게 믿어준, 그리고 이세상에서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나를 사랑해준 이곳에 청소라도 하고 살것이라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어찌보면 제 모습이 그 사람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받아주신 주님앞에서 그것을 어기고, 그리고 모든 것을 반대로 살아가고 늘상 그 자리에 머무는 그런 저를 믿어주고, 그래도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는 주님께 머물지 못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나를 누구보다도 믿어주시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니 나보다 더 날 사랑하시고,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고, 믿어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상 아니 나 자신조차도 나를 사랑하지도, 믿지를 않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흔히 달란트의 비유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자비로운 주인의 비유, 혹은 사랑가득한 주인의 비유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전까지 이 복음을 늘 묵상할 때 받은 달란트를 잘 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중에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종들을 먼저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충실한 종들은 그것을 불리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불충한 종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떻든 간에 그들을 믿고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입니다. 계산적이지 않고 먼저 종들을 믿어준, 불신하여 맡기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종들을 믿고 편안히 먼길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믿어준 주님, 우리를 먼저 사랑해준 주님, 우리를 먼저 용서해준 주님, 우리를 먼저 구원해준 주님, 우리를 먼저 안아주신 주님 그런 분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나 자신조차 나를 감당할 수가 없는데, 그런 나를 먼저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나만을 안아주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보답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의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이 나를 믿어주시는 것의 백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믿고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이렇게 믿어주시기에 우리의 이러한 부족함에도, 우리들의 이러한 나약함에도, 우리들의 이러한 한계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시고, 그래 너희들은 잘할꺼야. 너희안에 참 소중한 보물이 있단다. 그래 그것을 믿고 살아가면 된단다. 하고 우리를 응원하시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보물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믿음입니다. 그것을 충실한 종처럼 불리고,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눈물의 아들>


   끝도 없는 자식의 방황과 탈선 앞에서 ‘죽을 고생’을 다 하는 어머니들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어느 정도라야 하는데, 어떤 녀석들은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다가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놀란 가슴이 이제 심장병으로 발전했습니다.


   수 백 개에 달하는 아이가 저지른 ‘건수’ 뒷감당하느라 어머니는 바쁩니다. 부지기수로 파출소로 불려갑니다. 몇 번이나 법정에 섭니다.


   그런 상황 앞에서 대개 ‘더 이상 안 되겠구나. 내 능력 밖인가 보다’ 하고 물러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한 어머니는 끝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려가는 곳 마다 눈물로 하소연합니다. 자식 때문에 너무 울어서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대단한’ 어머니를 생각할 때 마다 언젠가 분명히 좋은 날이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흘린 그 눈물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와 정성이 결국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모니카 성녀 역시 아들 아우구스티노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던 어머니였습니다.


   비행과 범죄 쪽은 아니었지만, 아들 아우구스티오의 윤리적 방황과 타락, 마니교에의 심취는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질 듯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아들 아우구스티노 때문에 흘린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은 그 양이 엄청나 강물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 모니카가 흘린 눈물 때문에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구원됩니다.


   오랜 기도와 눈물의 결실로 드디어 아우구스티오가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어느 날, 모니카는 덜컥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으로 인한 기쁨에 모니카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조차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아들의 회심)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 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바로 그것이었단다.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내 청을 들어주셨구나.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하느님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었이겠느냐?”


   급작스런 객지에서의 어머니 죽음 앞에 너무나 슬퍼 제 정신이 아니었던 아우구스티노에게 모니카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아들아,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한 가지만 너에게 부탁한다. 네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회심이전의 청년 아우구스티노의 품행이 아무리 ‘막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니카는 절대로 그를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부드러운 태도로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대속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들이 짓는 죄를 대신 보속하기 위해 고신극기를 계속했으며,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자선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어느 날, 모니카는 한 주교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들 문제를 털어놓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모니카를 바라보며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안심하십시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청주교구 유재훈 신부-


하느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각자의 능력―신앙·지성·건강―에 따라서 재능(달란트)을 주십니다.

저는 동기 신부들의 재능을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다. 왜 나는 박모 신부처럼 운동신경이 좋지 않을까? 왜 나는 김모 신부처럼 노래와 악기 다루는 실력이 없을까 하며 제 자신의 부족한 재능에 대하여 하느님께 원망하였습니다. 동기 신부들의 재능을 부러워하다 보니 제 모습만 초라해 보였습니다. 어느날 초라한 제 모습 속에 어떤 재능이 있나 살펴보니 저만의 독특한 재능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키워 나갈 생각은 않고 남이 가진 재능만 부러워하며 사는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한 재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신앙과 지성과 건강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능력에 맞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부산교구 김기태 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미리 준비가 있으면 환난을 막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시간성에 따라 인간의 세계관을 쉽게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현재 일만 생각하고 현실에 집착된 현실주의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미래만을 생각하는 꿈에 사는 비 현실주의자, 다른 말로는 이상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미래를 향한 꿈만 생각한 나머지 허황한 생각에 매이며 결국 현실을 등한히 여기든 가 무시하는 그런 유의 사람입니다. 셋째는 과거에만 집착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지향하는 이상을 가졌고 그 미래가 오늘의 현실을 지배하는 미래 지향적 현실주의자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비유는 루가 복음에서도(19, 11-27) 등장합니다. 루가의 대목과는 달리 마태오의 경우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가 맡겨집니다(25, 15). 첫 번째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즉시 잘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종은 달란트를 땅에 숨김으로써 규정을 올바르게 준수했습니다. 이로써 랍비의 법에 의하면 세 번째 종은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번째 종은 가장 안전한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려운 나머지'(25절) 세 번째 종은 달란트를 땅 속에 숨겼습니다. 바로 이 두려움이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 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스프링 팍 영양(羚羊)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산에서 수천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산양의 일종입니다. 이 양은 이유 없이 집단으로 달리기를 시작하여 나중에는 모두 다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동물학자들은 이 양들이 집단으로 자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집단으로 자살을 하는지 그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수천 마리가 무리 지어 가다가 풀밭을 만나 풀을 뜯어먹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짓밟으며 가기 때문에 뒤에 있는 양들은 도무지 풀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뒤쪽에 있는 양들이 풀을 먹기 위해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한답니다. 그런데 양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자꾸 뒤에서 민답니다. 앞에 있는 양은 뒤에 있는 양이 미니까 걸음이 빨라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뛰게 됩니다. 앞에 있는 양이 뛸 때 뒤에 있는 양은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될 텐데 양의 본능에는 집단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양은 풀도 못 먹고 앞에 가는 양을 따라 같이 뜁니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결국 모든 양이 초원을 달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들이 자기들이 뛰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앞에서 뛰니까 뒤에서 뛰고 뒤에서 뛰니까 앞에서 뛸 뿐입니다. 생각 없이 달리기 때문에 어디로 뛰는지도 모릅니다. 멈출 생각도 안 합니다. 그냥 열심히 달립니다. 벼랑에 다다라서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는 벼랑인지 모르고 계속 달리기 때문에 앞의 양들은 떠밀려서 벼랑으로 떨어집니다. 뒤에 오던 양도 속도를 줄이지 못해 수천 마리가 다 몰살한다는 것입니다. 스프링 팍 영양들의 무작정 달리기와 죽음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단에서 이탈되는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곧, 막무가내 집단에 소속되어 버리고 안주하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이 영양과 같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차게 뛰는지 모릅니다. 아마 이 영양과 같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한 두려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짐승적인 본능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있어서 피땀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고 열심히 살면 그만큼 빨리 망합니다. 확실하게 망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뛰면서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에만 가치를 발휘합니다. 목표 없이 뛰는 것은 죽음을 향해 뛰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주신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유혹은 우리에게 삶의 목표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세상에 안주하는 게으른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충성스런 종이 될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2-3년은 청년실업자로 지내는 것이 이제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갈수록 내 탓은 없고 남의 탓만 불길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잠시 흥가 3성과 폐가 3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세 가지의 소리가 그치지 않아야
그 나라가 번성하고 그 가정이 화목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길쌈하는 소리와 책 읽는 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보면 싸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릇 깨지는 소리도
여전합니다. 한쪽에서는 경기가 좋지 않아 신음소리를 내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방학만 되면 해외여행을 가느라 공항이 만원을 이루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할 줄 알지만, 어서 빨리 청년실업이 줄고,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갖고, 자영업자들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의 일터가 지뢰를 묻어놓은 것 같다는 어느 비정규직의
고백에서 보여지듯 우리 사회가 일터라도 안정적이었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2백만 원을 받던 정규직 노동자가 어느 날 갑자기 1백만 원을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했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프랑스 루이 왕 시대에 가난한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헐어빠진 깔개에 공과 칼을 말아서 겨드랑이에 끼고 저녁도 굶은 채 잘 만한 헛간을 찾아 걸어가던 그는 같은 길을 걷는 수도자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수도자는 바르나베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그의 순박한 마음에 감동되어 '마음이 깨끗한 사람'임을 알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르나베 친구,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소."

이리하여 바르나베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들어간 수도원에는 각자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지식을 다해 성모님께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박식한 모리스 수사는 글을 독피지에 옮겨 쓰고 일렉산드로 수사는 거기에 아름다운 세밀화를 그려 넣으며 마르보드 수사는 쉬지 않고 석상을 깎고 있어서 수염과 눈썹, 머리칼이 온통 먼지로 하얗게 뒤덮여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는 또한 시인들도 있어서 성모님을 찬미하는 송가나 산문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투어 성모님을 찬송하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쌓이는 것을 보고 바르나베는 자신이 단순하고 무지한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바르나베는 기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성당으로 달려가더니 한 시간 이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도 또 성당에 갔습니다. 이때부터 매일 성당이 비어 있는 시간이면 바르나베는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수도원장이 고참수사를 데리고 문틈으로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르나베 수사는 성모님 제단 앞에 거꾸로 서서 허공에 쳐든 발을 여섯 개의 구리공과 열두 개의 칼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가 분개하여 그를 끌어내려 할 때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제단에서 내려와 푸른 옷자락으로 곡예사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곡예사의 봉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의 가르침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기 분수에 맞는 달란트를 받았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겼습니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마태25,15)떠났지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얼마 뒤에 돌아온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여 더 많은 달란트를 벌어들인 두 하인을 보고 기뻐하며 말합니다.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나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마태25,25)한 종에게는 호통을 치며 화를 내지요.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25,26-30)

그렇습니다. 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걸맞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는 왜 다섯 달란트를 주고 두 달란트를 주며, 또 한 달란트를 주었는냐고 비교할 필요가 없지요. 받은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여 성실한 결과를 내놓는다면 하느님께서는 더 큰 상급으로 우리를 격려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달란트는 지능, 용모, 건강, 감성 등 참으로 다양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잊고 왜 남보다 지능이 떨어지며, 용모가 뒤쳐지는지, 또 재물이 넉넉지 않는지 남과 비교하며 불평을 하지요. 그러나 비교하기보다는 남과 다른 재능을 받은 만큼 부지런히 잘 활용하여 개발해 나가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에디슨은 이런 말을 했지요. 역시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얼마나 많이 쌓고 벌었느냐가 아니라 가진 재능을 얼마나 성실하게 잘 활용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성실히 노력한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겠지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또 묵상할 것은 우리는 마치 내가 만든 재능에 내가 잘나서 내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단지 그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도대체 누가 여러분을 남보다 낫다고 보아줍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1고린4,7)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기보다 하느님의 관리인입니다. 관리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주인인 하느님께 대한 충성이지요.

“관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1고린4,2)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이나 건강, 자녀 등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종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자 받은 재능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관리인에 지나지 않다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산다면 집착에서 오는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     

-최혜영 수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천재는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구나!”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 악상이 떠올라 그것을 그대로 악보에 옮겨 놓으면 훌륭한 곡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역사 안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긴 작가나 화가, 과학자들, 위대한 지도자나 영웅들, 그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타고난 재능은 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돌아봐도 내 자신이 탁월한 역량을 갖춘 비범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의 삶을 다른 이의 삶과 바꾸거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나로서 족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하지 않습니까? 나의 잠재력은 어느 만큼 될는지, 앞으로 나의 미래에는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지 등등. 참된 교육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발견하여 그것이 잘 꽃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잣대가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가 될 수 있도록 자기지도력 교육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재능을 잘 키우고 이용할 수 있기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한만옥 신부(의정부교구 백석동 천주교회)-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선생님께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날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며 제출한 과제물을 돌려주시더니 급우들 앞에서 읽으라고 하셨다. 시에 대한 감상문이었는데 참 잘 썼다는 것이다. 음악 시간에는 노래를 잘하니 성악공부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들었다. 미술 시간에도 내가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구도도 좋고 색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다는 칭찬을 들었다. 내 자랑인 것 같지만 정말 그랬다. 아마 예술적인 재능이 좀 있기는 있었나 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런 재능을 하나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탈렌트 비유를 볼 때마다 하느님께 죄송스럽다. 탈렌트는 흔히 재능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잘 계발하고 발휘해서 자기 완성을 도모하고 또 세상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하지만 재능은 꼭 그것을 업으로 한다고 해서 발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제로 살아가면서도 주어진 재능이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 노래 미사 때나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듣는 이를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기분좋게 해준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문장력이 있다면 강론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미적인 안목이 있다면 성전을 꾸미는 일이나 기타 많은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느님, 제게 주신 재능에 감사합니다. 그것을 더 키우고 사목적으로 잘 이용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이곡 성당 임종욱(바오로) 보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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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전 베스트셀러 였던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라는 소설책을 기억하십니까? 
그 이야기의 토대는 유대 민족의 설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설화에는 꿈속에서 많은 보물이 묻힌 곳을 본 양치기가 등장합니다. 
그 양치기는 자신의 꿈이 예사롭지 않음을 확신하고, 
꿈속에서 본 그 곳을 향해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여정 끝에 드디어 양치기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거기서 그곳을 지키던 파수꾼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양치기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이 먼 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파수꾼은 자신도 꿈속에서 한 양치기가 누워있는 나무그늘 밑에 
많은 보물이 묻힌 보물을 보았다고 말하며, 
꿈 하나만 따라 이 먼 곳까지 온 양치기를 비웃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양치기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이 즐겨 찾던 나무 그늘 밑에서 
많은 보물을 발견했고, 꿈을 따라간 여행을 통해 더욱 성숙해 졌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도 주인이 맡긴 탈렌트를 어떤 종은 배로 불리기도 하고, 
어떤 종은 그저 땅에 묻어 두기만 했습니다. 
탈렌트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재능, 소질”등의 뜻임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즉 성경이나 예화에 나오는 이야기의 핵심은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탈렌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그 탈렌트의 크기나 모습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노력에 의해 결과는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선한 종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배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악한 종이나 예화의 파수꾼의 태도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진 탈렌트마저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즉 모두가 똑같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지만 결과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선한 종과 악한 종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모두에게나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자신만을 위해서 쓰거나 
남이 탈렌트를 부러워하는데 쓴다면 그 결과는 좋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받은 능력을 묻어 두고, 자신 안에만 둔 종은 결국 악한 종이 되었고, 
자신의 능력을 남을 위해 쓴 종은 선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의 탈렌트를 부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내 외모가 조금 더 잘 났다면, 내 집안이 조금 더 부유하다면, 
내가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이러한 부러움에서 나오는 “~한다면”은 
결코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장점이나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타인을 위해 사용할 때 나의 탈렌트는 2배 3배로 늘어 날것입니다. 
결국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비와 태양 빛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각자에게 다른 탈렌트의 크기와 모습을 주신 것은, 
나 혼자 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임을 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종이 악한 종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 종에게도 탈렌트를 주신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때로는 주님을 멀리 할지라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큰 희망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에는 다섯 탈렌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두 탈렌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한 탈렌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탈렌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만 
적은 탈렌트를 받아 사는 사람들에게도 적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은 그 능력에 관계없이 
똑같은 축복과 상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좀 부족하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내가 살아가는 가운데서 채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묻어두지 마십시오. 작은 나눔이라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나눔의 실천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일, 사소한 일은 없다.

 -강영구신부-

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52가지 삶의 지혜 ‘어머니의 편지’(吳章鴻, 넥서스BOOKS)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진정 작은 일, 사소한 일이란 없단다.
천 길 둑이라 할지라도 작은 개미굴로 인해 무너질 수도 있는 법,
큰 문제는 종종 우리가 무심코 넘긴 일에서 기인하거든.
소홀히 여긴 작은 일이 파괴적인 재난을 불러올 수도 있단다.”(85쪽)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글입니다.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크고 엄청난 일에 신경을 써야지 작고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고 아들에게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 큰 인물이 될 수 없다고 충고하는 어머니가 아들보다 더 훌륭한 인물입니다.

인생살이에서 큰일과 작은 일을 따지고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큰일은 작은 일에서 시작하고, 작은 일들이 기초가 되어서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허술한 기초 위에 큰 집을 지을 수 없듯이
큰일을 하겠다고 덤비면서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일을 성취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天國)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라고 선언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이성호(요한)신부님- 


 성서를 읽다보면 가끔씩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대목이 있는데
오늘 복음 말씀도 그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인이 세 종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먼 길을 떠났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셈을 합니다.
두 종은 자기들이 받은 만큼의 이윤을 남겨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무서운 성격을 겁내 했던 세 번째 종은
혹시나 돈을 잃어 버릴까봐 받은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돌려주었는데
게으른 종이라며 호통을 듣고 가진 것 마저 빼앗깁니다.

주인의 자리에 하느님을 놓고, 이윤을 남긴 종의 자리에 우리를 놓는다면,
비유에서 돈을 잘 활용해서 이윤을 남긴 종이 칭찬받는 모습을 보니
세상의 고리대금업자는 예수님의 엄청난 총애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소심하고 겁 많은 세 번째 종에 우리를 놓는다면
소외되고, 가난하고,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그 진실성을 되묻게 됩니다.

비유가 우리에게 던지고 싶은 알맹이는 무엇일까요?

주인의 관심은 얼마나 많이 주었고, 벌어들였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은 종이 얼마나 자기 재능대로 그것을 관리했느냐에 있습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이 한 달란트를 더 벌여 들어오지 못한 것에 화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은 돈을 움켜쥐고 썩혔던 게으름의 모습에 화가 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종의 자리에 우리를 넣어 봅시다.
달란트는 재물, 재능이라는 우리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몇 개의 달란트를 받았을까요?
그리고 얼마만큼의 이윤을 남기고 있을까요?

혹시 남보다 재능이 없다 해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남보다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남을 위해 내어 놓을 줄 모르고 손을 움켜쥐고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없어도 최소한 한 달란트는 받은 우리들입니다.
겨우 한 달란트.. 그런데 알고 보면 겨우 한 달란트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군요.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 일반 노동자들이 하루 품삯으로 받던 액수지요.
그러면 한 달란트를 모으려면 몇 년을 쓰지 않고 일하며 모아야 할까요?
16년 하고도 6개월을 더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맡긴 돈 치고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느님께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제일 크게는 숨쉬고 살아가는 생명부터 시작해서
매일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들... 생각해보면 많이 받았습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재능을 적게 받았다 원망 말고
나는 적게 가졌으니 내어 놓을 것도 없다 웅크리고 있지 말고
오늘 하루 이웃을 위해 내 시간과 내 마음을 열어 봅시다.

 

 비교는 불행을, 감사는 행복을...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 중에서 달란트의 비유(25,14-30)에 해당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24,44)는 말씀에 따라 종말비유의 특징을 ‘늘 깨어 준비함’으로 규정하였다. 늘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종말의 시간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고,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종말 후에 세워질 신국(神國),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불시(不時)에 들이닥칠 종말을 깨어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종말로 시작되는 하느님나라의 시민(市民)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살아 있는 동안에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으로서 연중시기에 듣게 되는 마지막 복음이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오늘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행적과 가르침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묵상해 왔다. 이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한해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4,16-21,36)을 평일미사 복음으로 묵상하게 될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많은 종들을 부리는 아주 부자가 틀림없다. 주인은 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자의 능력대로 재산을 맡긴다. 루가복음은 금화의 비유(19,11-27)에서 열 명의 종에게 각각 금화 한 개씩(100 데나리온)을 맡기는데 비하여 마태오복음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품삯에 해당하니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다. 따라서 세 명의 종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30,000 데나리온), 두 달란트(18,000 데나리온), 한 달란트(6,000 데나리온)를 받는다. 그리고 주인은 떠났다. 종들에게 이 많은 돈을 맡기면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고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다. 따라서 맡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종들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주인이 떠나간 후에 종들은 각기 받은 달란트로 첫째와 둘째는 배가(倍加)시켰고, 셋째는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 느닷없이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셈을 밝히게 된다. 셈의 결과는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종말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깨어 기다리는 것’이다. 초기 교회가 당면한 ‘재림지체 현상’을 염두에 두고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와의 맥락에서 달란트의 비유를 묵상하여야 한다. 출타한 주인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꼭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 사이의 긴장감은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믿음의 마음을 굳건히 하고, 목적의식을 뚜렷이 가지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두 번째 교훈이 들어 있다. 비유가 주는 둘째 교훈은 각자가 받은 달란트(Talent)를 종말의 시기까지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그릇에 맞게 능력을 주셨다. 비유에서 보듯이 받은 능력의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받은 것을 그냥 묻어두어서도 안 된다. ‘얼마나 많은’ 능력보다는 많던 적던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불행은 남과의 비교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듯이 양을 가지고 남의 것과 비교하는 순간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반대로 양에 관계없이 자기에게 맡겨진 능력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사용한다면 여기서 인간의 행복은 시작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마태 25,14-30)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 나라를 어떤 사람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얼마나 더 많은 이익을 남겼는가에 다라서 보상을 해주는 이야기이다. 얼핏 들으면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느냐에 따른 보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포상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달란트를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유익하고 덜 받은 사람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처럼 성과에 다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방법이야 어떻게 되든 많은 이익만 남기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이익을 남기면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가난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즉 얼마나 많은 물질적인 부를 누리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든지 아니면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과연 그런 뜻인가? 아니다.
 
그러면 달란트란 무엇인가? 우선 달란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달란트란 그 사람의 어떤 능력이나 재물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재산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나의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요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이웃에게 베풀어야할 사랑을 말한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라고 말한 사랑이다.

 

아무리 재능이 탁월해서 많은 일을 하고 그래서 많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성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 보자.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희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코전13, 1-3)

오늘 복음은 세 가지 시간대를 말하고 있다. 즉 과거는 우리가 달란트를 받은 시간이고, 현재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는 시간이고, 미래는 우리가 사용한 달란트에 대한 셈에 따라서 상을 받는 시간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내가 달란트를 사용한 것에 대한 셈만 하실 뿐이다.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사용한 것에 대한 평가일뿐 다른 것을 가지고 셈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일까? 오늘 우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지금 내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거나 아니면 잘못 사용하고 있다면 마지막 날까지 가지 말고 지금 교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날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차 심판날에 예수님께서 어떤 문제를 내실 것인지를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고 그 때의 시험 답안지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은 하나도 실천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성당에만 왔다 갔다하면 죽음 후에 천국 즉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이런 신앙생활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생각과 같이 잘못된 신앙생활이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 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그 어떤 사랑도 실천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바로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받은 달란트만큼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많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환경, 좋은 자리에 있어서 많은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랑은 활동 범위가 좁고 또 여건이 여의치 못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기 능력껏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만큼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문제는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사랑으로 실천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지 일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4-25) 라는 말씀이 바로 구체적으로 오늘의 말씀을 이야기 한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재산인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일이고 그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져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이 다음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는 축복된 말을 듣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