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9일 수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 주마.”하고는 “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마르코 6,22-23)
The king said to the girl,
"Ask of me whatever you wish and I will grant it to you."
He even swore many things to her,
"I will grant you whatever you ask of me,
even to half of my kingdom."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에게 동생의 아내와 사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다 붙들려 있었다. 결국 그 일로 그는 죽음을 당한다. 의로운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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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기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재연하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라는 제1처부터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라는 제14처까지 모두가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변명도 비난도 없이 그저 담담히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세상의 모든 억울한 죽음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참을 수밖에 없는 억울함, 참지 않고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 그러한 억울함을 당했을 때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복수였습니까? 용서였습니까? 아니면 망각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묵묵히 받아들이시며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억울함도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십자가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토록 의로웠던 분이 한 소녀의 춤 값으로 희생되셨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떠한 억울함도 희생으로 받아들이며 승화시켜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임문철 신부-
신구약을 잇는 위대한 예언자라면, 주님의 머리에 물을 부어 세례를 베푼 이라면, 그 죽음도 뭔가 비장한 의미가 있어야 어울림직한데,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헤로데가 그저 호기로 말한 것뿐인데,
그만 헤로디아의 술수에 넘어가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목이 잘리우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고, 애도하는 이도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저는 제 죽음이 폼 나기를 바랐습니다. 풍선 바람 빠지듯이
이 세상을 떠나기보다는, 콜베 신부님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거나,
배문한 신부님처럼 강물에서 교우를 살리려다 죽기를 바랐습니다.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애도의 물결 속에 장례가 치러졌으면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시신 기증으로 몇 사람이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철이 들었는지, 그저 하느님께 순응하는 죽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저 “예, 갑니다” 하고
달려갈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기꺼이 듣고자 하는마음
-한명수 시인(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지난 학기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톨릭 사상’을 종강하는 날, 한 학생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처음에 청강을 하러 들어갔을 때, 27년 짧은 인생에서 최고로 힘든 일을 겪고 다시는 주님 앞에 서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지금 제가 겪고 있는 것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작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제 마음이 변치 않는 한 주님께서도 제 손을 놓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지금 이 느낌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앞으로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꺼내 생각해 보고, 또 주님을 찾겠습니다.”
친구 소개로 내 강의를 들으려고 하는데 허락해 줄 수 있느냐고 묻던 그의 첫인상은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았다. 청강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복잡한 갈등과 아픔도 있었을 터인데 정식 수강생들보다 더 열심히 강의를 듣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치열해 보였다. 나의 강의가 단순히 듣기 좋은 내용만은 아니고, 삶을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가시와 같고 훈계적인 내용도 많은데, 기꺼이 듣고자 하는 그를 보며 더욱 열심히 강의를 했다.
그 학생한테는 내 강의가 다소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듣고자 한 그에게 어느새 하느님은 그 마음 한가운데 자리하셨던 것이다. 자신의 현 상황을 인정하고 기꺼이 듣고자 하는 이에게는 이렇게 큰 기쁨이 찾아오나 보다. 내 강의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체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은총이고, 나를 그런 도구로 쓰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성요한 세레자의 수난 기념일
-김인한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예전에 연세가 많이 드신 신부님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그분이 “김신부 자네는 어떤 사목을 하고 싶나?하고 제게 물어보신적이 잇습니다. 이제 신부된지 얼마 안된 저는 이런 사목도 하고 싶고, 저런 사목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그래 꿈을 가지고 사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그런데 내가 겪어 보니까 신부가 사는 것이 나는 신자들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것 저것 많이 해봤지만, 결국에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더라고.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그리고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평생을 두고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나가는 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나라는 그릇은 어떤 그릇인가를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어떤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인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고 주님의 뜻에서 어떻게 쓰여지는 가를 아는 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안에서 끝없는 번민과 그리고 격정이 치솟는데. 우리는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과 계속했던 전쟁을 그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께 의지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오늘 복음에서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특이하게 낙타털옷을 입고 다니고 그리고 아무것도 살지 않는 심지어 풀조차도 살기 어려운 그곳에서 삽니다. 그리고 들꿀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외칩니다. 아주 자유로운 마음을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해야할 몫을 말입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갔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본 시인데. 만약에 세례자 요한이 시를 적었다면 이런 시를 적었을 것 같아서 읊어드리고자 합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적은 시입니다.
꿈을 접으며
- 관옥
성자가 되고 싶었다.
길이 저만큼 보였고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용기가
모자랐던지, 아니면
발목을 잡는 힘이 만만찮았던지
걸음은 날마다 비틀거렸고
길을 갈수록 멀어만 갔다.
이제 반백이 되어
성자되는 꿈을 차분히 접어두고
아아, 나는 한 마리 순한
짐승이 되고 싶을 뿐이다.
성자의 길도 버리고
의인의 길도 버리고
그냥 착한 아무개로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
언제고 이 가난한 꿈마저
고요히 접어
맑은 한 줄기 바람처럼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결국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또 모든 세상의 시끄러운 문제가 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자 요한은 참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중에 요한 보다 큰 인물이 없었다고 이야기하신 부분은 공감합니다.
안쓰러운 얘기지만 열두제자중 어느 누구도 요한만한 그릇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세례자 요한의 그 모습이 하나의 산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게 있어서 세례자 요한은 제가 본받아야 할 모델입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에게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그릇과 한계를 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말한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오히려 작아져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늘상 나는 켜져야 하고 주님과 다른 사람은 작아져야 합니다. 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알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이야기한 말이 우리들을 향한 말일수도 있습니다.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실로서 보여라”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조그마한 것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자신을 알고, 살아나가는 우리들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청주교구 유재훈 신부-
헤로데 안에서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헤로데는 바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세례자 요한을 옥에 가두지만 죽이지는 않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을 꾸짖는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는 것이 몹시 괴로웠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이어서 소녀의 청을 들어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수난을 당하게 된 이유는 헤로데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이 하느님의 일을 망칠 수 있습니다.
우유부단함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아니,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든든한 후원자를 만드십시오. 우리에겐 든든한 후원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후원자로 둔 우리는 행복합니다. 비록 내가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느님을 믿고 일을 시작하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실수나 실패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이니 걱정이 없고, 과거의 향수에 파묻혀 현재를 도피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혹시 저처럼 우유부단하신 분들, 든든한 후원자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면 어떨까요?
체면
-김보경 수녀(전교가르멜수녀회)-
한 여교우가 정신과 전문병원 원목실에 와서 스물여섯 살 난 아들을 강제 입원시킨 일에 죄책감을 느껴 괴롭다고 했다. 청년은 마르고 보통 키에 피부가 희고 얌전하고 착한 인상이었다. 그도 여느 환자들처럼 잘못한 것을 많이 후회하고 이제부터 잘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때는 말 그대로 믿기보다는 그의 원의를 알아주고 거기서 힘을 얻어 병원생활을 잘 하라고 독려하는 것이 옳다. 청년은 중학교 1년 때부터 엄마에게 간간이 욕설을 했다. 그러나 여인은 엄격한 성품인 남편에게 말하면 집안이 시끄럽고 창피하다고 덮어두었다. 천재인 큰아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고 집안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이 희생하겠다는 생각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청년도 머리가 좋았으나 고교 졸업 후부터 두문불출하고 컴퓨터에 빠지고 폭력을 하므로 마침내 남편이 알게 되었고 이웃에 창피하여 따로 살 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는 가운데 청년의 정신병적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여인은 체면과 현실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여 청년과 온 가족에게 줄곧 거짓말로 위기만 모면한 결과 아들을 환자로 만들고 말았다. 만일 청년과 가족에게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고 전문의의 도움을 청하였더라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년은 거짓말로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려는 어머니에게 보복하려고 의도적으로 폭언을 하였으나 점점 자폐적인 행동을 거듭하면서 그만 빠져 나올 길을 잃고 말았다. 참으로 아까운 한 청년의 인생이었다. 여인은 내게도 여러 번 아들에게 거짓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때마다 진실만이 아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여인 역시 오랜 세월 스스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기에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복음에서 헤로데는 허영심으로 뱉은 말에 걸려 넘어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고 만다. 맹세하였다 해서 그 끔찍한 요청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건만 손님들 앞에서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죄스런 응낙을 한 것이다.
수난을 기념하는 우리 교회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별것을 다 기념하지요? 수난을 기념하는 날로는 예수님을 기리는 성주간과 성모님의 통고 축일이 떠오릅니다. 수난이라는 말 자체는 큰 고통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고통을 기념하는 것인데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고통까지 기념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는 안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이 없을 수가 없고, 또 그것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편 고통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의로운 고통이 있는가 하면 치욕스런 고통도 있지요.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거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순국 선열로 추앙하며 기립니다. 그 고귀한 희생과 의로운 모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하지요. 집안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가정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가정이 어렵고 힘들 때 부모들은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노력하며 그것을 치욕스럽다거나 그 행위가 무의미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가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고통이라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이 또한 의로운 고통이며 의미 있는 희생입니다.
반면 치욕스런 고통도 많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어느 날 감옥으로 가는 대통령과 그 측근의 모습을 보면 정말 치욕스럽지요. 그때의 고통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받을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고통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 역시 얼마나 많은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은 이런 무의미한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 즉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의로운 고통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고귀한 수난을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날이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의 의미인 것이지요.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된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서 벌써 죽었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죽이기에 적당한 시간을 보기 위해서 감옥에 가두어 놓았을 뿐이지요. 헤로데 임금이 좀 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면 감옥에 가둬두거나 적당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죽여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헤로데 임금은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될 부정한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불의하면 그 밑의 신하들이 그렇게 되고, 그러다 보면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 나라의 지도자는 불의와 타협하면 안됩니다. 그 파급 효과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멍이 든 이유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총체적으로 지도자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니까 그 아래 장관들이 그렇고, 장관들이 흔들거리니까 그 아래 사람들이 그렇고, 그래서 온 나라가 온통 진흙탕물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 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해야 할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목숨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바른 삶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지요.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다가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게 됩니다. 두 예언자 모두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또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봉헌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를 보고도 눈을 감고 또 피해서 간다면 수많은 이웃들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 있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로 생각하고 또 민주주의를 하늘의 뜻인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수의 의견이 존중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고 다 맞는 것은 아닌 것이지요. 우매한 대중이라는 말도 있듯이 다수의 의견에 절대 가치를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㰡천주교회도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㰡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절대 민주주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란 다수의 의견에 의해 사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가 결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확고한 뜻이 다수의 의견에 의해 바뀌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독재주의일까요? 아닙니다. 독재주의가 아니라 㰡복음주의㰡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흔들림 없는 중심으로 자리잡아야지 그것이 다수의 의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칫 민주주의라는 우상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했던 사람들 역시 다수였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반대했고 정치 지도자들 역시 이에 가세하였지요.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 이에 맞서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썩어도 소금과 빛은 썩거나 꺼져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 중에 사제와 수도자가 있습니다. 지도자나 가르치는 사람, 또 사제와 수도자와 같이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놓쳐서는 안되지요. 특히 사제와 수도자는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것을 위해서 나의 고통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도 불의를 보고 피해 가는 것은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의로운 고통은 성당 내에서 특히 자주 접하게 됩니다. 단체장이나 반장,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하다보면 공동체의 일부가 바르지 않은 흐름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잘못된 길을 따라가면 안 되지요.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욕을 먹고 힘에 겨운 난관에 부딪히게 되더라도 끝까지 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바르지 못한 흐름으로 흘러가 버리고 많은 이웃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신자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고통은 피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그저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가고 부정과 불의는 피해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삶의 현장에서 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내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때 따라오는 수고와 고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또 예수님께서 그에 맞갖은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고통이고 의로운 죽음인 것입니다.
바르고 의롭게 살고자 노력하며 그 과정 중에 받게 되는 어려움은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산교구 전동기 신부-
오늘은 성요한 세례자의 수난기념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닦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열정적으로 외친, 강인한 인상을 짙게 풍긴 예언자이고,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면 목에 칼이 들어 온다 하더라도, 반드시 말하고야 마는 곧은 성품의 예언자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왕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을 멀리하거나, 백성을 학대하고 향락에 젖어 살거나 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회개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당신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를 통해서 충고하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왕들은 그러한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언자들을 미워하거나 박해하고 죽이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당시에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유대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당시에, 동방에서 온 세 박사의 말을 듣고, 메시아를 죽이려고 죄없는 어린 아기들을 살해했던 헤로데왕의 아들입니다. 그 헤로데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복음에 헤로데로 나오는 헤로데 안티파스이고 그리고 헤로데 필립보 그리고 헤로데 아르켈라오입니다. 父傳子傳이란 말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도 많은 악을 저지르고 향락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본부인을 버리고,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리고 사는 비행을 저질러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 감시한다는 당시의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왕에게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충고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이 두려워서 그냥 스리살짝 넘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게 안다친다는 식의 극도의 보신주의가 몸에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이런 류의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는 극도로 흥분하고 율법을 따지고 하느님을 따지고 그럽니다.
어쨋던 모두가 침묵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누가, 왕앞에 나아가서,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망설임없이, 거리낌없이, 에둘러대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바로 일침을 가한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그 충고의 말을 겸손되이 받아들이지 않고, '촌닭같은게, 어디 감히 "어전에서 겁 없이"' 하는 식으로, 요한을 아예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러한 마음이 헤로디아에게서 사무치듯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요한은 결국 헤로데城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오늘날 표현으로 양심수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원한에 가득찬 헤로디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요한을 죽이려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계속해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헤로데는 요한이 위대한 예언자이고, 당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해서 감히 어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헤로데의 생일이 되어, 王宮에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귀빈이 둘러있는 가운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춤을 잘 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여기에 홀딱 반한 헤로데가, "나라의 반이라도 원하는대로 다 줄테니, 소원을 말하라"는 妄言을 하게 됩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고, 바로 이러한 케이스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여튼 그러자, 헤로디아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 싶었습니다. 안 그래도 오랫동안 벼루고 벼루어 온 요한제거 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그의 잔치놀이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가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분위기 살린다고 한 망발 한 마디 때문에, 머리가 쟁반위에 올리게 된 것입니다. 잔칫날에 음식이 아니라 피묻은 머리가 쟁반에 올려졌다는 말, 요새 말로 얼마나 엽기적일까요. 그리고 머리가 올려지기까지의 과정도 참으로 엽기 그 자체일 것입니다.
즐거운 잔칫날에, 살로메의 춤, 뒤이어 흥에 취한 헤로데의 소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찌꺼린 약속, 주체성 없는 살로메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한 것, 헤로디아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딸에게 시킨 것, 살로메가 어미시키는 대로 헤로데에게 부탁한 것, 헤로데의 갈등과 곧 뒤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명령, 요한살해, 그리고 쟁반위의 머리.
네, 세례자 요한은 그의 열정적인 삶과는 달리, 그의 죽음은 이렇게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구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알렸고,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고 하시며 그 분이 더욱 커지기 위해서 그분의 길을 닦는데 온 힘을 다 기울이고 나서, 하느님께로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옳은 것을 옳다고 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고, 거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두리뭉실하게 살아가자는 회색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정의와 사랑과 진리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항거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고, 우리의 무뎌진 양심의 날이 바로 서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임종욱(바오로) 신부-
2004년 멜깁슨 감독의 ‘passion of christ’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체 일생 중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갈 때까지의 수난 받고
고통을 당하시는 장면만을 집중해서 나온 영화로서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 인들도 많이 시청했던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부분이
아주 잘 묘사되었던 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오늘 수난 기념일을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여정이 참 비슷합니다.
두 사람이 한참 동안을 사막에서 보내셨고 바른 말들을 많이 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사셨습니다.
두 분 또한 남의 손에 넘겨져서 인간의 죄에 희생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데에 초석을 깔았던 인물입니다.
몸소 광야에 들어가서 주님이 오심을 외치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셨던 분입니다.
낙타 털옷을 입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던 요한은 예수님이 오신다면
자신은 엎드려 그분의 신발끈조차 풀어드릴만한 자격이 없다고 낮춥니다.
그렇게 겸손의 모범인 세례자 요한이 한 여인의, 그것도 정상적으로 혼인한 것이 아니라
헤로데 동생의 아내를 헤로데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헤로디아에 의해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어느 누가봐도 요한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그저 정의의 외침을 했을 뿐입니다.
사실상 바른 소리를 하고도 불의를 당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과거 군사정권 시절 많은 젊은이들이 정권에 맞서 대항을 했지만
힘의 논리에 밀려 온갖 고문을 당하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값진 피의 대가로서 이 땅에 민주화를 찾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면 당시 권력의 선두인 헤로데와
그의 권력에 붙어서 행세를 부리는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자기 맘에 들지 않을 때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 모습 속에서
세례자 요한은 진정한 참된 예언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자기 목숨조차 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헤로데의 생일을 맞아 헤로데의 궁정에 모여 있던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잔치를 베풀며 이 세상에서 얻을 것은 다 얻은 사람들인 양 헤로데의 생일 파티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 파티에 분위기를 전환시킨 헤로디아의 춤은 헤로데를 비롯하여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 시대 선지자를 처형하게 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수난으로 이날을 거룩히 하였고 자신의 붉은 피로써 빛나게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자기가 주님에 대해 이미 증거한 것을 순교로써 확인한 것입니다.
자신이 수난당함으로써 미래 예수님이 당하실 수난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겸손의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그를 영적 기쁨으로 오늘을 기념하고 마땅히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념하며 우리도 요한의 겸손함과 의로움을 본받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거짓 체면
-김광태 신부-
인간은 체면 때문에 죽습니다. 때로는 얼마나 모순되고 위선적인가를 잘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언자를 죽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과도,
하늘과도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체면을 지키는 일도 그 전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손상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됩니다.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사울의 딸이 비웃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2사무 6,1-23). 예리코의 돈 많은 세관장 자캐오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체면을 구깁니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 가려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조롱을 받았을지 몰라도 예수님을 만나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루카 19,1-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김영규 신부 -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들었듯이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이미 우리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 그려진 세례자 요한 성인의 삶을 재조명 해보며, 이 시대 안에서 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인 즈가리야와 성모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의 아들로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아인 카림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 역시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예고를 통하여 수태하지 못하던 엘리사벳에게 잉태되었는데(루카 1,5-25), 예수님보다 약 반년 정도 먼저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 그의 말과 행동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힘있는 새로운 메시지로 전해졌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힘은 분명 큰 예언자의 모습이었고, 그의 힘찬 메시지는 전 유다 지방을 뒤흔들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단식과 기도를 가르쳤고(마르 2,18; 루카 5,33;11,1), 찾아와 삶의 방식을 묻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회개의 표시로써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생활을 하라고 이끌었습니다(마르 1,4-5). 또한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랑도 헛된 것이라고(마태3,8-9)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고(마태21,25.32),오히려 그를 마귀들인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마르 11,18;루카 7,33). 그리하여 요한은 그가 어찌하는가만를 보려 몰려온 사람들을 향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든 나무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받아 모조리 불태워질 것(마태 3,10)이라는 날카로운 정의의 가르침을 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에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의 왕인 헤로데가 자신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부정한 일에 대해서 강하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합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간계를 꾸며 딸 살로메로 하여금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하여 참수당하게 하고 맙니다. 헤로데의 불의한 삶에 대한 비판과 뒤따른 투옥, 그리고 진리의 외침 결과로 결국 목숨을 희생당하는 일련의 수난은 모두 그의 일관되고 확실한 신앙의 증명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회개에 대한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온전히 회개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투신한 내적인 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쳤고, 정의를 실천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하나의 예언자 이상의 참 예언자로서 메시아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야 하는 새로운 엘리야였습니다(마태 11,14). 또한 그의 죽음은 곧 사람의 아들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마르 9,11-13; 요한 5,33-35). 루카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 뒤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루카 16,16). 그는 분명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자로서 주님을 증언하러 온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여기 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의의 목소리들이 듣는 사람들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자신이 자기 삶에 대한 깊은 반성과 타인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내적인 힘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그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져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의를 실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를 눈감으며 거기에 동조하거나 방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양승국신부-
<늘 푸른 한그루 소나무>
인간관계 안에서 정말 힘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다름 아닌 가까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언(苦言-듣기에는 거슬리나 도움이 되는 말), 직언(直言-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 기탄없이 던지는 말), 충언(忠言-충직하고 바른 말)을 던지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하늘같은 선배나 스승님, 존경하는 교수님이나 선생님, 사랑하는 부모님, 올려다보기도 두려운 직장상사라면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분들도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입니다. 그분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윤리, 도덕적 기강이 해이해질 때도 있습니다. 삶 전체가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당연히 용기를 내겠지요. 당장 그분을 기분 나쁘게 해드리는 것, 그로 인해 그분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 큰마음으로 감수하겠지요. 그분의 큰 실수에 대해, 그분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적당히, 감 못 잡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명확히 꼬집어서 말할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노력은 어찌 보면 그분을 위해서, 공동선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노력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는 노력,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노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헤로데의 그 알량한 권위 앞에 몸을 낮추었습니다.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그의 심각한 문제 앞에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적당주의로 처신했습니다. 그의 심각한 도덕적 타락 앞에 나 몰라라 했습니다. 모두들 침묵했습니다.
단 한 사람, 세례자 요한만이 아름다운 저항정신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늘 그랬듯이 세례자 요한은 날카로웠습니다. 불의 앞에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당히, 물에 물 탄 듯이, 상대방 눈치를 살피면서가 아니라,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더욱 놀랄 일이 있습니다. 한번 말해서 먹혀들어가지 않으니 거듭 반복해서 헤로데의 타락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세례자 요한은 그 순결한 양심, 그 물러서지 않는 강직함, 그 아름다운 저항정신으로 인해 무고한 죽임을 당합니다.
남들이 설설 기던 부패한 절대권력 앞에서도 단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직면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빛을 발합니다. 오늘따라 더욱 존경스러워 보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상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공동선을 준수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바라보며 산정에 홀로 서있는 한 그루 늘 푸른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야의 소리 스러지다.
-강영구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주는 오늘 복음말씀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코1,3)인 세례자 요한은 오만한 권력자 헤로데와
교활한 간부(姦婦) 헤로디아의 덫에 걸려서 허망하게 스러집니다.
요한은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는”(히브리4,12) 비수(匕首)입니다.
세상은 날카로운 말씀으로 무장한 예언자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하느님의 말씀은 비리와 부정으로 곪은 상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아프기는 하지만 드러난 환부를 치유 받아 새 삶을 누립니다.
그러나 말씀을 거절하는 자는 환부가 온 몸으로 번져 생명을 잃고 맙니다.
권력욕(權力慾)에 눈 먼 헤로데와 애욕(愛慾)의 늪에 빠진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틀어막는데 성공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하늘의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광야의 소리는 스러졌지만 말씀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망(慾望)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향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생명을 얻습니다.(一明)
마산교구
자신의 소명을 다한 세례자 요한
-경규봉(전주교구)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죽임을 당한 까닭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했기 때문이다. 이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한 율법(레위 20,21)을 어긴 행위이다. 사실 헤로데 가문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살인과 치정으로 뒤엉켜 있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로서 이복 삼촌인 헤로데 필립보와 결혼했으나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이며 이복 삼촌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재혼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다윗왕의 간음에 대해 예언자 나단이 비판하였던 것처럼(2사무 12,1-15) 그러한 헤로데 왕의 죄를 단호하게 계속하여 비판하였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따랐고, 그를 위대한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헤로데는 내심 불안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적의를 품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특히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마침 헤로데의 생일이 되어 고관들과 무관들 및 갈릴래아의 요인들이 참석했을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나와서 춤을 추어 손님들을 기쁘게 했다. 당시 그러한 만찬에서 춤추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용된 무희들로서 대부분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지만, 헤로디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 자리에 딸을 내보내어 춤을 추도록 한 것이다. 이를 대단히 기뻐한 헤로데는 그녀의 소원을 무엇이든지 들어준다고 맹세했다. 이 맹세는 구두로 제시된 왕의 인준 및 서약으로서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절대 약속이다. 따라서 헤로데는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헤로데는 자신의 맹세에 따라 살로메의 소원에 따라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그녀에게 주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낙타 털옷을 입고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백성에게 회개를 선포하며 그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회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찾아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는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마태 3,7-8)라고 호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권력도 개의치 않고 서슴없이 직언을 하고 비판한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감옥에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 11,3) 묻게 하였다. 이처럼 정의에 불타고 하느님께 충실하며 자신의 소명을 성실히 수행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여 하느님께 충실하고 소명을 다한 세례자 요한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신앙인이 되자. 그럼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주님으로부터 축복받는 신앙인이 되자.
† 헤로데의 생일(生日)과 요한의 사망일(死亡日)
-박상대 신부-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마태 11,11) 이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교회는 이 말씀을 받들어 전례적으로 요한 세례자의 탄생(루가 1,57)을 경축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마태 14,3-12; 마르 6,17-29; 루가 3,19-20)을 기념한다. 교회가 세례자 요한 성인(聖人)을 놓고 탄생과 죽음을 각각 기념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것은 성인의 삶이 예수님의 구원사에 미치는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기록으로서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즉 12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미 과거사가 되어버린 요한의 수난기를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다.(마르 6,16)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마르 1,14), 그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生日)을 요한 세례자의 사망일(死亡日)로 만들었다. 헤로데가 요한을 잡아 가둔 이유는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17-18절)이고, 요한을 목베어 죽인 이유는 이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의 꾀임(19-28절)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17절의 기록을 오보(誤報)로 인정한다. 복음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했다고 하지만, 헤로디아는 필립보의 아내가 아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아레타 4세의 딸과 이혼하여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로서 대왕의 다른 아들과 결혼하였고, 여기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헤로데의 족보"를 참조하라.)
헤로디아의 간교함에 넘어간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 시점에서 보도하는 이유는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세례자의 수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명에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가 함께 할 것이며, 정의의 외침이 운명을 대변할 것이다.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여 사라지지만 그 외침은 결코 죽지 않는다.
● 헤로데 가문의 족보 ●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자주 "헤로데"를 만나게 된다. "헤로데", 또는 "헤로데 왕"이라는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58번 등장한다. 그 빈도를 살펴보면 마태오복음에 17번, 마르코복음에 11번, 루가복음에 15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15번이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는 헤로데가 다 같은 헤로데가 아니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뒤져보아야 한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이를 중심으로 유대교적 종교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333년 희랍의 알렉산델 대왕군대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헬레니즘의 정신적,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는데, 알렉산델(333-201), 프톨로메오 왕가(200-198), 셀레우쿠스 왕가(198-164), 하스모네오 왕가(163-64)가 차례로 팔레스티나 지역을 다스린다.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제국의 속주(屬州)로 삼았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로마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하스모네오 왕가는 아리스토불루스와 히르카누스 형제의 권력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이를 틈타 헤로데 가문의 안티파텔이 등장하여 권력을 거머쥔다.
헤로데 가문은 유다가 아닌 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 사람들은 원래 유다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모네오 왕가의 통치시절에 유다에 합병되면서(BC.130년경) 유다백성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안티파텔은 로마제국과 그의 황제들에 대한 적절한 충성심으로 신임을 받아 시민권을 얻었고, 이어 총독에 임명된다. 그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안티파텔은 자신의 두 아들,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암살된다. 아들 헤로데는 이를 기회로 삼아 독보적인 위치를 잡는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과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헤로데 대왕이다.(BC.40-AD.4 통치)
헤로데 대왕은 치세 20년경에 대대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증축을 도모하고, 제국에 충성하며,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굳건히 한다. 그는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했다. 거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비용조달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아기 예수께서 이집트 피난길에 오른 것도 헤로데 대왕 때문이었다.(마태 2,13-18) 헤로데 가문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왕"으로 불린다.
헤로데 대왕은 생전에 10명의 아내를 두어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대왕은 마리암느 1세와 아리스토불을 낳았고, 아리스토불은 헤로디아를 낳았다. 대왕은 마리암느 2세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헤로데를 낳았는데, 그가 헤로디아의 남편이며, 여기서 살로메가 태어난다. 대왕은 말타케와 헤로데 안티파스를 낳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필립보를 낳았고, 또 다른 아내와 아르켈라오를 낳았는데 아르켈라오는 줄곧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마태 2,19: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시기는 대략 기원전 7-4년 사이로 추정된다),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이 다스리게 된다. 이들 셋은 모두 이복형제들로서 아르켈라오는 헤로데 대왕이 주로 다스리던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아 AD.6년까지 다스린다.(마태 2,22) 필립보는 북동부 요르단 지역을 AD.34년까지,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르단강 동서 쪽인 베레아와 갈릴래아 지역을 AD. 39년까지 다스린다.(루가 3,1)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가 신약성서의 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고(마태 4,8),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판에서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총독에게 끌고 가서 고발했지만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출신임을 알고는 헤로데에게 보내어 심문을 받게 한다.(루가 23,1-12) 이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당시 갈릴래아 영주였고, 그 시각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또 한 사람의 헤로데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르켈라오의 아들로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인데, "헤로데"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 12장부터 23장까지 15번 등장한다. 사도행전 25장과 26장에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12번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인 "마르코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2세"를 말한다. 아르켈라오는 이름난 폭군으로 10년간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 죽는다. 그후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직접적 통치관할에 편입되지만, AD.41년-44년까지는 아그리파 1세가, 그 후는 아그리파 2세가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마태오복음 2장과 루가복음 1장에 보도된 예수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헤로데 대왕"을 지칭하고, 그 나머지 부분과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를 말하며, 사도행전의 헤로데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 세례자 요한의 수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당당하게 다 이룬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증거했듯이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으므로 당연히 그의 죽음도 가장 위대한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죽음은 순교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기에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사점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가 불의를 질책하다가 헤로데왕에게 순교를 당한 것은 예언자다운 순교이며 사명자로서의 훌륭한 죽음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1. 헤로데왕의 인간성
신약에는 헤로데란 이름이 여럿 있습니다. 마태 2장에서 베들레헴 지역의 어린아이들을 죽인 헤로데가 헤로데왕 혈통의 제1인자로 그의 이름을 대 헤로데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아래로 아들들과 손자들로 6명의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유다 지역에 있는 여러 지방의 성주직(왕)을 나누어 누리며 권세를 잡았던 자들입니다. 이들이 왕으로 혈통을 유지하는 근원은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대 헤로데란 자가 뇌물을 주고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왕으로 임명받은 이후 부터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동안 퇴락한 쯔루바벨의 성전을 재건하기로 하여 이 대공사를 주전 19년에 시작하여 주후 64년경에 마무리졌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헤로데왕이 건설 중에 있는 성전에 출입하셨으며 완공을 보지 못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대 헤로데는 난폭한 성품과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으로 그가 사랑하던 아내 마리암메와 그의 아내의 조부인 힐키너느, 부인의 동생 아리스토불러스 그리고 자기의 아들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안티파스)는 이 헤로데왕의 아들로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 사이에서 태어나 갈릴레아, 베레아의 성주로 헤로데 안티파스란 이름을 가지고 행세했던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를 일컬어 여우라고 부르신 일도 있으며 헤로데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일도 있으십니다. 이 헤로데왕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늘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이 유다에 퍼지자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착각하리 만치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2. 헤로데왕의 죄악
헤로데 안티파스는 혈통적으로 부전자전의 유전을 받아서인지 그의 생활면이 도덕적으로 패륜했습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들은 것은 하느님의 꾸짖음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를 목을 베어 죽임으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1) 그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네 형제의 아내의 부끄러운 곳을 벗겨도 안 된다. 그것은 곧 네 형제의 부끄러운 곳이다."고 하셨습니다(레위 18,16).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2)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지적을 무시했습니다. 헤로데는 그 인물됨이 다윗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함으로 인해 나단 예언자로부터 질책을 들었을 때에, 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를 옥에 가둔 것입니다.
(3) 헤로데은 경솔한 맹세를 하므로 인생 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맹세는 모든 일의 최종적 결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헤로데는 맹세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함부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그 마음이 흥겨운데다가 헤로디아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는 약속을 맹세로 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의인의 목을 베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4)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세례자 요한이 살아나 활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더욱 그의 생애에 두려움을 안겨 준 것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의 순교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대하여 몇가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요한은 불의한 일을 질책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에게 찾아가 그 앞에서 그의 패륜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야를 증거한 후, 그의 사명을 마치면 순교로서 하느님께 갈 줄로 아셨습니다. 순교는 요한에게 적합한 죽음이며 영광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순교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은 그 인도하심이 하느님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와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의뢰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결론입니다. "악한 사람은 제 악행으로 망하지만 착한 사람은 그 정직으로 피난처를 얻는다."(잠언 14,32)고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낱 부도덕한 폭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이로써 요한은 그의 이같은 정직한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피난처로 들어가는 소망을 이루었으니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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