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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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오 23,17)
Blind fools, which is greater, the gold,
or the temple that made the gold sacred?
‘예물이 중요한가,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중요한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제단을 두고 한 맹세보다 예물을 두고 한 맹세를 먼저 지키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위선을 강하게 꾸짖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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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성녀는 부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모니카 성녀만큼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인도 드물 것입니다.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에 로마의 하급 관리로 일하던 외교인 파트리치오와 결혼하였습니다. 남편은 난폭했고 방탕한 기질로 집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끊임없이 기도하여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장남인 아우구스티노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남편을 위한 헌신이 아들에게로 옮겨 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니카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방탕한 생활과 마니교에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를 성직자의 길로 나아가게 하시어 위대한 학자와 설교가로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많은 이들을 진리로 이끌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습니다.
“복되신 성녀 모니카, 당신은 일생 동안 어머니로서 수많은 근심과 걱정 속에 사셨으나,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녀들의 회심을 위하여 인내하며 기도하셨나이다. 당신께 청하오니, 하느님 아버지께 저희들의 청을 전해 주소서. 저희 남편과 자녀들을 위하여 중재해 주시고, 저희와 함께 기도해 주소서. 저희가 당신의 모범을 따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늘 영광을 드리며 살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새벽을 열며
어제 저녁미사 때였습니다. 주일 저녁미사는 청년들 미사로써 청년 밴드 팀이 반주하면서 신나는 음악과 함께 미사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저는 미사의 어느 한 순간이 되면, 긴장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벌써 한 달째 틀리고 있거든요. 이 부분은 바로 ‘신앙의 신비여’입니다. 저는 맞게 한다고 하는데, 미사가 끝나고 나서는 반주자가 항상 말합니다.
“신부님, 오늘도 틀리셨어요.”
이러한 말을 듣다보니, 이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왜 틀리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하긴 ‘신앙의 신비여’ 버전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린이미사, 중고등부미사, 성인미사, 국악미사, 그리고 청년미사까지... ‘신앙의 신비여’의 음이 다르다보니 이렇게 틀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달째 틀릴 수가 있을까요?
어제 저녁미사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기 위해 사제관에 모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신앙의 신비여’에 대한 말이 나왔지요. 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음을 노래 불렀습니다. 아니랍니다. 저는 이 음이 맞다고 계속해서 우겼지요. 그리고 이 ‘신앙의 신비여’가 나오는 음반을 틀어보았습니다.
결과는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음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단지 긴장을 해서 음이 계속 틀리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한 달 동안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음반을 틀어 보면서 연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쓸데없는 고집이며, 어리석은 저의 모습인 것이지요. 결국은 신자들에게 놀림감만 될 뿐인데,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꾸짖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세부조항에만 목숨 걸고서 지키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 이런 모습을 예수님은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처럼 따끔한 충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까요?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윗자리에 있다는 착각에, 자신들의 말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그래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잊고, 나 중심으로만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할 때 또 한 명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결국 한달 동안 성가를 틀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고집 부려서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지금 당장 실천하십시오.
빠다킹신부
진정한 따름이란
-임문철 신부-
한라산과 해안 사이에 펼쳐진 들판은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그 한 곳에
이시돌 목장이 있고, 거기에는 삼뫼소라는 아름다운 성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첫 토요일마다 성모신심 미사가 있는데, 미사 후에는 호숫가를
함께 돌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면 매 단의 현의를
노래하면서 “아베, 아베” 하는 후렴부분은 양 팔을 쳐듭니다.
저희 본당에서도 성모의 밤 때, 묵주기도를 하면서 후렴 부분은 양팔을 들고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복사 아이들이 모두 한 팔만 들고 노래를 합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제가 앞에서 주송을 하느라 한 손에 마이크를 들고
있어서 나머지 한 손만 들었더니 아이들이 다 저를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고장난 녹음기나 앵무새처럼 그분의 가르침을
되뇌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또는 외워서 전하는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을 잘 알게 되고,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육자의 탈을 쓴 위선자
-한명수 시인(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진리의 길’을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지식과 순수한 지혜의 열쇠를 주는 것과 같다. 길을 모르는 이들은 길을 아는 이들로부터 그 길을 묻고 배워야 하고, 길을 아는 이들은 모르는 이들에게 그 길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지만, 가르치는 내게 참된 지식도 없고 순수한 지혜도 없다면 나한테 배우는 이들은 진리의 길을 걸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없기에 나는 ‘눈먼 인도자’(마태 23,16)에 지나지 않는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가톨릭 학교 교사로서, 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분명 ‘가르치는 사람’이다. 내가 교회로부터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통적으로 배운 것은 가르치는 자의 공적인 일은 진리의 길을 가르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진리의 길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사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나는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열심이 삶의 진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잘못된 요령만을 가르치는 것이 될까 봐 두렵다. 내가 그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먹고사는 일에 눈이 멀어 학생들이 인격체로 보이지 않고, 그저 나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것’으로만 보인다면 나는 교육자의 탈을 쓴 위선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나는 예수님한테 꾸지람을 듣는 율법학자요 바리사이며, 비록 하늘나라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곧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불행선언
- 최경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의 임무는 유다 율법과 조상들의 전승을 지키고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바른 삶을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백성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만 지워 주었습니다. 그들은 악인이면서 의도적으로 성인군자 행세를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곱 가지 위선에 대한 불행을 선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중에 세 가지 위선을 들추어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불행 선언은 이러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율법학자들은 민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교도권을 한 손에 쥐고 사람들을 가르칠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가르치는 사람들부터 언행이 일치해야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문을 닫아놓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반대하였고 죄인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도 반대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늘나라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들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두 번째 불행 선언은 이러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해외 이산 유다교인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조국을 떠난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을 유다교로 개종시키는 선교활동에 몰두함으로써 자기들이 유다교에 충실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고 유다교 공동체에 받아들여 예식에 참여할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유다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을 개종자라고 불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개종한 이방인들을 유다인처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배반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예컨대, 개종하여 사도가 된 바오로를 가장 많이 박해한 사람들이 바로 유다교에 입교한 개종자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다교에 입교한 개종자들을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가로막고 박해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세 번째 불행 선언은 ‘맹세’에 관하여 잘못 가르치고 있는 “눈먼 인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내려집니다. 그들은 자기네를 백성의 인도자로 여기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눈먼 이로서 남을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전통에 사로잡혀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인도하는 이들을 가리켜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자신조차 길을 잃고 헤매면서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생활에는 자신이 한 말에 진실과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특히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말의 진실성을 보장해주는 담보가 필요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그 보증과 담보로서 맹세를 하게 되었고 그 맹세가 신빙성이 있다는 표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맹세의 신성성을 지키는 규정을 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후기의 율법학자들은 이 규정을 구분하여 어떤 경우에는 지켜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세부규정을 가르쳤습니다. 그 예가 오늘 세 번째 불행 선언에 나옵니다. 성전과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과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디에 걸고 맹세를 했건 간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맹세한 것을 충실히 지키는 성실성입니다. 일단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어느 것은 형식에 맞는 맹세이니 지켜야 하고 어느 것은 형식을 밟을 수 없는 맹세이니 지킬 의무가 없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맹세는 양심적인 진실성이 중요합니다. 한 번 맹세했으면 그것은 양심을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나 마찬가지입니다. 맹세는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신앙생활에 가식과 위선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식 없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와 봉사활동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인도자인 저의 눈은 어떤가
-청주교구 유재훈 신부-
한 본당에서 토종닭을 기르던 일이 생각납니다. 봄이 되면 어미닭은 자신이 품을 수 있을 만큼의 알을 낳습니다. 이후 어미닭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둥지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모이를 먹을 때만 빼고는 항상 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알은 부화됩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들은 어미닭을 졸졸 따라다니며 어미닭이 하는 대로 합니다. 어미닭이 부리로 풀을 쪼면 병아리들도 그렇게 하고, 어미닭이 발로 흙을 헤집으면 병아리들도 그렇게 합니다.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어미를 그대로 따라 합니다. 병아리들은 어미닭이 먹는 것을 먹고,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본능으로 압니다. 어미닭은 병아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인도자이자 보호자입니다.
복음에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도자는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과 위험이 있는지 정확히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인도자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에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인도자가 눈이 멀었다면 그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모두 불행한 일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걸어가도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데 인도자가 눈이 멀었으니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앞날은 뻔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인도자인 저의 눈은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혹시 스스로 시력이 좋다고 착각하고 있는 눈뜬 장님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부산교구 전동기 신부-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의 분노하시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보여주는 곳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서, 어쩌면 더욱 정겹고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너희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는 경고의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위선자라는 말, 겉과 속이 다른 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羊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늑대가 들어 있는 그러한 사람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착하고 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시크먼 욕심과 명예심과 이기심의 덩어리가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면들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남들에게 의식이 경건하게 보이도록 애를 쓴다든지, 옷술을 달고 다닌다든지 합니다. 남보는 데서 거룩한 체 폼을 잘 잡습니다. 규칙도 잘 지킵니다. 그렇지만 규칙의 정신이나 본질을 마음속으로부터 잘 이해해서 지킨다기 보다는, 어쩌면 규칙을 위해서 규칙을 지키는 식이다. 그리고는 이내 자아도취 내지는 자기만족에 빠져버리고,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은 헤아릴 줄 모릅니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전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세세하게 만든 율법과 규칙을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용해서,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짐을 지우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이 무서운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서는,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도 못 들어가도록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도록 이끄는 것이 당연히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만일에 자신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들어가려는 사람만이라도 막지는 말아야죠. 이들은 사랑이라는 율법의 근본정신은 도외시한 채, 부수적인 형식이나 절차 따위에 더 초점을 맞췄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첨부해 놓은 세부 규정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만 예를 들어서 살펴보면, '안식일날 무화과 열매 하나나 그보다 무거운 것을 나르면 안식일을 깬 것입니다. 안식일에 무화과 반쪽을 드는 것은 허용되지만, 만일 그 반쪽을 바닥에 놓았다가 다시 들어올린다면 그것은 안식일 날 짐을 나른 것이다' 그러니까 일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아~들 장난하는 것 같지 않는가. 이게 뭔가? 얼마나 형식적인가? 이 속에 안식일의 정신이 배어있을 여지가 있는가?
정말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단정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당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죄책감만 안겨주고는 하늘나라로 가는 데 있어서 걸림돌만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마태오 18, 6에 예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나 여겨집니다.
자 그러면, 오늘로 돌아와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사랑의 계명, 주님의 기쁜소식을, 그것의 껍데기가 아니라 알짜배기를, 그 정신을, 일상생활 안에서 올바로 믿고 실천하고 있는가?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티를 볼려고 하지는 않는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강론중 일부를 소개하면서 마칠까 합니다.
"주일미사에는 충실히 참여하면서 평일에는 의롭게 살지 못하는 신앙은 결코 주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합니다. 기도는 많이 바치면서 마음은 위선으로 가득 찬 신앙은 결코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아닙니다. 그저 평탄하기만을 바라고 금전적인 풍요와 안이를 추구할 뿐, 불의에 항거하는 일을 외면하는 교회는 우리의 거룩하신 구세주를 받드는 참 교회가 못될 것입니다." 아멘.
-부산교구 박승원 니코메데스 신부-
마태복음 23장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선언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선언은 오늘과 내일에 걸쳐 우리가 듣게 될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곱 가지 불행선언 가운데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불행선언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불행선언이란 말은 7개의 단락이 모두가 “불행하다.”라고 하는 말씀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선언은 불행에 대한 암시적인 심판을 수반하는 말씀으로 진복팔단의 말씀과 정반대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1절). 우리는 이로 인해 이 말씀을 해석학적으로 교회공동체와 지도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위선이 아니라 오늘 교회 공동체와 지도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에도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13절부터 시작되는 불행의 선언은 ‘율법’이나 ‘모세의 자리’가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범한 그들의 가르침과 위선에 대한 경고와 교훈입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가 늘 경계해야할 교훈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당하게 될 불행은 3절 후반부터 4절까지 언급된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그리고 무거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그것들을 얹어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3절부터 15절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불행의 선언입니다. 때문에 이 불행은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시각과 관행, 이런 잘못된 시각과 관행에 그 책임이 있는 율법학자들에 내리시는 통렬한 불행선언입니다.
본문에 다섯 번이나 나오는 “外飾하는 者” 또는“위선자, 연기자(배우)”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선행을 하는 동기’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이익과 보상을 얻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 단어는 自己欺滿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欺滿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문적인 율법 연구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유대교의 지도층으로 지칭되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모세의 가르침인 율법을 해석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그릇되게 율법을 해석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문을 사람들 앞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행동이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나,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문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닫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13절) 더구나 그들의 잘못된 인도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倍나 더 地獄의 子息”이 된다는 것입니다(15절).
16절부터 22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 그들의 그릇된 궤변적인 해석과 가르침을 定罪하시는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불행하다. 바리사이 위선자들아!”라는 지금까지의 호칭을 16절에 와서 아주 통렬하게 “불행하다. 너희 눈먼 길잡이들아!”로, 그리고 18절에 서는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로 저들을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무지와 위선, 무책임이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에 얼마나 큰 죄악이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무지와 위선, 무책임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아멘
불행한 인도자들
-김광태 신부-
사제로서 연륜이 쌓여가면서 바뀌게 되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소위 ‘참신한 강론’의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된 일입니다. ‘마땅하고 옳은’ 말만 골라서하는 틀에 박힌 강론을 피하려다 보니, 준비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묵상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피정 차 떠나 있다가 모 주교좌 성당에서 부활성야미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교님은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강론을 하셨습니다.
빛의 예식의 의미부터 시작해서, 신자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차근차근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고루한 면들은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그 주교님의 강론은 그날의 전례가 의도하는 바를 가장 충실히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해온 강론이 참신함의 유혹에 빠져 얼마나 주변적인 것들만 다루었는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란 이미 2천 년 전의 것인데, 그 속에서 뭐 그리 참신함이 나오겠습니까.
우리의 인간성이 원래 낡은 것이다보니 그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능력이 새롭고 참신한 것이지, 전혀 안 들어본 얘기를 가져다 하는 것이 참신함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전해 받은’(1코린 15,3) 신앙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전해주어야 예수님께서 비난하신 불행한 인도자들’이 빠지는 위험을 벗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김보경 수녀(전교가르멜수녀회)-
◆한미 FTA협상 과정을 언론과 지면을 통하여 지켜보았다. 여러 차례 협상을 하는 가운데 양국의 협상 대표들은 ‘길조’ 또는 ‘성공적’이라고 자평하지만 언론에서는 일방적으로 한국이 밀리는 협상이라는 지적과 염려가 많았다. 정부는 한두 분야인 수출면에서 국익이 있었다고 애써 변명하려 하나 국민의 생명과 생활환경에 직결하는 농업과 의약품, 자동차 배기량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매우 불리한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팔아먹는 것도 실은 내 식구 먹이기 위한 것인데 안전한 먹을거리를 보장하기와 자연환경을 청정하게 보전하기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국익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고, 국민에게 건강한 생명환경을 보장해 주어야 수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선포하는 ‘일곱 가지 불행선언’의 전반부이다. 그들은 참된 지식의 열쇠와 영혼을 구하려는 열성이 있으면서도 위선과 눈앞의 이익 때문에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에 들어간다는 것을 상기시키신다. 이들은 덜 중요한 것, 곧 율법을 임의 해석하여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한 것, 곧 하느님 당신을 참으로 경배하는 것보다 더 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우들간의 개별적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겪고 이해타산에 몰두하느라 교회 공동체 전체나 자신이 속한 신심단체의 근본정신을 흐리게 하거나 왜곡하지는 않는지 잘 살펴보고 식별할 일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유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양승국신부-
<삶의 최저점에서>
세상살이의 허무함을 두루 경험했던 성인(聖人), 삶의 최저점까지 내려가 보았던 성인,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렷이 체험했던 성인, 그래서 방황하는 양떼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었던 겸손했던 지도자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기념일을 맞아 복음은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쇄신되지 않은 신앙관, 언행의 불일치, 교만 등의 원인으로 참된 지도자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숙제 한 가지를 주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참된 지도자상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의 묵상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후배 수도자들을 위한 삶의 지침으로 ‘수도규칙’을 썼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규칙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들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규칙을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립니다만, 규칙 속에 묶여서 노예처럼 살지 말고 은총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십시오.”
아우구스티노는 아무런 갈등 없는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공동체와 관련된 그의 사상 안에는 반 유토피아(Anti-Utopia)에 대한 생각이 깃들어있음이 확실했습니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힘에 겨운 규칙의 이행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수도원이 광신도들의 모임과 같은 성격을 지녀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도자들끼리 형제애를 실천함에 있어서 환상을 지니지 말 것을 또한 권고합니다. 수도원도 엄연히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것을 아우구스티노는 잘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자들이 능력도 안 되면서 지나치게 아름다운 삶을 연출하려는 데만 몰두하다보면 어색하거나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일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라고 권고했는데, 그 거울은 다름 아닌 ‘규칙서’였습니다.
정기적으로 규칙서를 들여다보면서 자신 안에 왜곡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지속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위대한 대(大) 성인 아우구스티노의 파란만장하고 굴곡 많았던 신앙여정을 묵상하면서 ‘바닥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약한 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가장 밑바닥, 아우구스티노는 그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을 절실하게 만났고, 거기서 주님과의 영적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세상 것들의 부질없음을 절절히 맛보았던 아우구스티노였기에, 가장 큰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절실히 만났던 그였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았습니다.”
“나 홀로 될 때 타락한 생활을 했사오나 당신 안에서 새 생명을 찾아냈나이다.”
다음은 아우구스티노가 결정적 삶의 전환이 가능했던 배경이 된 기도입니다.
“나는 멀리 떨어져 방황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당신을 기억했나이다.”
행복한 사람들
-이수철신부-
행복과 불행 중 누구나 원하는 바,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연속되는 주님의 불행선언과 더불어 떠오른 게
산상수훈의 행복선언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로 시작되는 불행선언과
‘행복하여라’로 시작되는 행복선언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누가 불행한 사람이며,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불행과 행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 먼 인도자들아!”
눈 먼 어리석은 자들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마음이 겸손하고 순수한 자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눈 먼 어리석은 위선자들이 불행한 사람들이고,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순수한 자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겸손과 순수의 마음을 끝까지 보존하는 게 행복의 관건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애초부터 눈 먼 어리석은 위선자들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의 자리와 직위가, 권력과 금력, 학력이 그들의 눈을 가려버려
허영과 교만의 어리석은 자들로, 위선자들로 변질시켜버렸을 것입니다.
늘 하느님의 현존 안에 깨어 살 때 마음의 순수와 겸손입니다.
오늘 아침 본기도 내용처럼
참 지혜의 원천이시며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뿌리내릴 때
비로소 눈 먼 위선자의 삶에서 벗어나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됩니다(지혜7,14).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 안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를 하느님의 벗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벗’,
이보다 더 영예로운 칭호는,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성체성사의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십니다(2테살1,11ㄴ).
그리고 당신의 벗으로 삼아 주십니다.
아멘.
-임종욱 신부-
현대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들한테 후배들은 선배한테 제자들은 스승에게
또 직장에서는 자기보다 높은 상사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부족한 점들은 감추게 되고 자신의 좋은 점만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척’병에 많이들 걸린 것 같습니다.
없으면서도 있는 척, 배고프면서도 배부른 척, 약하면서도 강한 척, 힘들면서도 힘들지 않은 척,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노력하는 척 등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위선적인 태도에 많은 질타를 하십니다.
그런 위선을 가진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그리고 눈먼 인도자들이
불행한 사람들의 표본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부정적인 모습, 아첨하는 모습, 위선적인 모습을 봅니까?
그러면서도 우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그저 좋은게 좋은 거야하면서 그냥 지나친다든지, 알면서도 괜히 나에게 피해가 갈까봐 함구한다든지,
그냥 현실이 그러니까 받아들인다든지 하면서 넘어 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처럼 부드럽고 온아한 성품을 가진 분이 없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고발하고 신랄한 불과 칼과 같은 말을 합니다.
당시에 기득권을 쥐고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형식주의에 예수님은 예리한 눈을 가지고 그들에게 정면으로 부딪혔던 것입니다.
사실상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물질과 관련되었을 때
마음이 더욱 가서 그러한 맹세들이 앞섰던 것입니다.
황금이냐 아니면 황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 소중하냐?
재물이냐 아니면 재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이냐?
율법이냐 아니면 그 율법으로 정의와 자비를 베풀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냐?
예수님으로부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받았던 질책입니다.
이러한 질책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비켜가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단지 2천년 전에 사람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지금에 와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내면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들이
자칫 우리가 근본적으로 추구해야할 것들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흘러갈 때 그것은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서 보여준 그런 위선과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의 몸인 교회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가면을 벗기고 그들의 집단을 고발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위선과 형식주의를 타파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8월의 마지막 주에 와 있습니다.
우리를 잠 못들게 했던 8월의 무더위 앞에 위선과 형식주의를 녹여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에 꾸미지 않은 나의 기도가 예수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어떤 모습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사제로서 투명한 삶을 꿈꾸며
-상지종신부-
사제로서 가장 편안한 만남은 동료 사제들과의 만남입니다. 아니 어쩌면 사제들과의 만남이 가장 편안한 만남일 수밖에 없도록 안팎의 여건이 강요하는지도 모릅니다.
왜 사제로서 사제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편할까요? 단지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같은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이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사제들의 삶,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많은 부분 감추어져 있습니다. 비단 사제들의 삶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지요.
사제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많은 부분을 감추도록 강요당합니다. 사제는 자의든 타의든 많은 부분을 감추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믿는 이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 드러내면 자칫 의도하지 않았던 분열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교회의 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자분들을 만나면 참 조심스러워집니다. '혹시나 나 때문에...' 하는 마음이 들곤합니다. 이런 저런 응어리들을 내 자신 안에 꼭꼭 감춥니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는 동료 사제들에게 풀어놓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욕도 해대고, 자신의 부족하고 못난 모습들 부끄럼없이 벌려놓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어찌보면 위선자입니다. 적어도 제 자신은 위선자입니다. 일상 생활 안에서 만나는 많은 믿는 이들이 바라보는 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감추어진, 그래서 동료 사제들에게만 살짝 풀어놓는 추한 제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감추는 것이 믿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기도 합니다. 사제를 향한 믿는 이들의 꿈과 사랑을 깨뜨릴 수는 없으니까요. 사제로서 감수해야 할 고통을 그대로 믿는 이들에게 전할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감추려는 인간적인 추함이 자신을 감추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은...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대더라도 겉과 속이 다르니 위선자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참으로 수치스러운 이름이지만,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저의 이름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믿는 이들이 보시기에, 동료 사제들이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럼없이 겉과 속이 똑같은 삶을 살고 싶은데... 언제나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노력할 따름입니다. 한 사람의 사제로서 투명한 삶과 '다름'을 기쁘게 받아 안는 넉넉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불행선언 1,2,3
-박상대신부-
지난 토요일의 복음을 잠시 떠올려 보자.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총체적으로 책망하셨다.(마태 23,1-12) 이유는 그들의 위선(僞善)과,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함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한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이를 근거로 해서 마치 저주(咀呪)와도 같은 엄청난 불행선언을 내리신다.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와 율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선언은 모두 7번에 달한다. 불행선언을 개요하면 ① 하늘나라의 문 / 열쇠(13절), ② 개종노력 / 지옥의 자식(15절), ③ 성전맹세 / 황금맹세(16-22절), ④ 십일조 율법 / 정의, 자비, 신의(23-24절), ⑤ 잔과 접시 / 겉과 속(25-26절), ⑥ 옳은 듯한 겉 / 위선과 불법(27-28절), ⑦ 예언자 무덤 / 책임회피(29-32)와 같다. 오늘부터 우리는 3일 동안 이 불행선언을 나누어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①~③의 불행선언을 다루고 있다.
우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위선자’로 간주된다. 그들이 율법의 세칙들은 곧잘 지키면서 율법의 기본정신을 저버린 까닭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위선자’로 낙인을 찍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 중에 순서 없이 자주 이들을 싸잡아 위선자로 지칭하셨다.(마태 6,2; 6,5; 6,16; 7,5; 15,7; 22,18; 루가 6,42; 12,1; 12,56; 13,15) 잠시 불행선언에 대한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르코복음(12,38-40)에는 간단히 언급되어 있고, 루가복음(11,37-52)에는 6번의 불행선언이 언급되었으나, 3번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3번은 율법학자들에게 해당되며 전후 문맥을 따져볼 때 마태오복음보다 비조직적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대목을 통해서 철저하게 유대교를 와해시키고 그리스도교를 홀연히 세우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이는 곧 예수를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떼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태오는 산상설교처럼 예수께서 간헐적으로 하신 불행선언을 한데 모아 이 대목에 집약해 놓은 것이다.
오늘 복음은 3개의 불행선언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관리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열쇠(지식의 열쇠: 루가 11,52)를 쥐고서 문을 닫아걸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열어주기는커녕 막고 섰다는 것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이는 곧 그들이 백성들에게 하느님나라의 참 지식을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임무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둘째는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엄청난 낭비를 강행하고도 개종자를 얻으면 그를 자기도취에 빠진 유대교 광신자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셋째는 맹세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예수님은 사실상 어떠한 경우에도 맹세를 금지하셨다.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자체가 하느님의 명예를 손상시킨다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다.(마태 5,33-37)
마태오복음사가가 오늘 복음의 대목을 자신에게 속한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해 기록했다면, 이는 곧 오늘날 모든 가톨릭의 지역교회와 전체교회를 위한 지침이다. 교회가 만약 하늘나라의 사물을 이 땅에서 관리한다고 하여 이를 임의로 활용하려 하거나, 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기보다 자신에게 속한 자로 만들려 하거나, 하느님의 성전보다 성전 안에 있는 황금에 더 마음을 두거나, 제단보다 제단 위의 제물에 더 관심을 가진다면 오늘 복음이 선포하는 불행은 바로 우리들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위선과 욕심으로 자신들의 성무(聖務)를 수행한다면 이는 교회의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대사제들을 포함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불행선언을 맞아야 했듯이, 가톨릭교회의 지도층인 교황을 포함한 주교와 사제들은 진솔한 태도와 행동으로 주님의 제자답게 교회를 돌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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