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26일 제21주일

Margaret K 2007. 8. 26. 02:00

   2007년 8월 26일 제21주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3,22-30)

 

“Lord, will only a few people be saved?”
He answered them,
“Strive to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many, I tell you, will attempt to enter
but will not be strong enough.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강조하신다. 좁은 문은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에, 가진 것을 놓으려 하지 않기에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

 

 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왜 믿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도착점은 같습니다. 온갖 이론과 지식도 결국은 구원에 대한 안내일 따름입니다. 구원의 이론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대로 좁은 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하지만 좁아도 들어가야 합니다. 경쟁률이 높기에 좁은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낮추고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좁은 문입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거듭해도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작아지는 것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약한 모습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비참한 일이나 억울한 일로 상처받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일을 불평과 분노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작아지는 생활의 출발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좁은 문     

-임문철 신부-


 ‘좁은 문’ 하면 갑자기 입시 지옥이 생각나 느낌이 그닥 좋지 않습니다.
요즘 부모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가 아이들의 진학 문제라고 합니다.
아니 진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소신학교 입학 시험을 보는데 꼭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하다가 순간,
‘내가 붙으면 다른 한 사람이 떨어져야 하는데?’ 하고 멈칫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 대신 다른 사람을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저는 하는 수 없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고 말았습니다.
좁은 문은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당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주지 않고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잔뜩 구겨 넣은 이기심과 탐욕의 대형 짐가방을 들고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문입니다. 배낭도, 손가방도 버리고 빈 손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인 것이지요. 대신 좁은 문은 남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는 사랑의 손에는 무한히 넓어지는 자동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좁은 문은 달콤한 멍에요, 가벼운 짐입니다.

 

 

 좁은 문으로, 파이팅!

-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파이팅! 우리말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운동경기에서 ‘잘 싸우자’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호를 너무나 좋아해서 운동경기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도록 하자는 격려의 의미로 아무 때고 사용한다. 가벼운 게임을 할 때도 의례 파이팅을 외친다. 파이팅이 원래 ‘싸움’이라는 뜻의 파이팅(fighting)에서 유래했으니 외국인들의 귀에는 우리가 호전적인 사람들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도 파이팅을 외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힘써라’는 번역은 너무 점잖다. 희랍어 ‘아고니제스테!’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편에서는 거저 주시는 것이나 우리 쪽에서 보면 그저 편안히 드러누워 얻어먹을 수 있는 떡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1티모 6,12), 자신도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2티모 4,7)고 말했다. 여기서 다 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믿음의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은 처절한 싸움의 길이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당신 먼저 좁은 문을 통과하심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문(요한 10,9)이 되어 주셨다. 성경은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고 전한다. 여기서 ‘고뇌에 싸여’라는 표현 역시 너무 약하다. 희랍어로 ‘엔 아고니아’는 머리만 쥐어짜는 고뇌가 아니라, 인류구원의 기로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며 악의 세력과 벌이신 처절한 한판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소수정예로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구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권고와 격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주님이 그 문을 닫아 버리면 밖에서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주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었던 것처럼(1코린 10,1-5), 세례성사를 받아 교적에 이름이 올라 있고, 게다가 성경과 교리지식까지 풍부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장담할 수는 없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하며 주님과 안면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주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하시며 매몰차게 외면하실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우리 모두 파이팅!


 

 좁은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평화신문 2004년 8월 22일-


요즘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대안교육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대안학교를 비교 연구하던 중 특별한 한 학교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교육이념에 충실한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학생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적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높은 대학합격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특별한 학교였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의 강한 소명의식과 끊임없는 헌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를 소개하는 소책자를 읽다가 '직업선택의 십계'란 항목이 유난히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①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②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③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④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⑤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⑥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⑦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⑧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⑨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⑩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한마디로 요약해서 '좁은 문'을 선택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왜 하필 좁은 문입니까? 예수님은 왜 우리를 좀 편하게 두지 않으십니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을 포기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멸망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넓은 문은 누구나 꿈꾸던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추종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선택함과 동시에 넓?예루살렘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영예스런 문이 아니라 고통스런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가파르고 좁고 험한 길인 십자가 길, 치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예수님 길은 좁은 문의 연속이었습니다. 좁은 문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문, 생명에 이르는 문, 생명을 구하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여정의 각 단계 앞에 놓인 많은 문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문 크기에 절대 연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이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이끄는가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문 크기나 외적 화려함에 절대로 현혹되지 마십시오. 문이 얼마나 비싼 문인지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보다는 문의 종착점을 보십시오. 거기에 우리 삶의 최종목표이신 주님께서 계시는지를 보십시오.

우리가 끊임없이 넓은 문을 포기하고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좁은 문은 주님께서 통과하신 문이며, 좁은 문 그 너머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비록 고달프고 자주 포기하고픈 문이지만 결국 그 문만이 영생의 문이며, 구원의 문이며, 부활의 문이며, 천국의 문입니다.

사실 너무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앞에 펼쳐질 구원의 문은 넓기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넓은 것은 아닙니다. 너무도 완고하고 자기 주장이 강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여유가 조금도 없는 사람들, 과도한 욕심과 지나친 이기심으로 가득차 터질 듯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구원의 문은 좁기만 합니다.

내 방식만이 최고라는 사람들, 자기 주장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사람들, 언제나 사사건건 따지고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영혼은 너무도 비대해진 나머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것입니다.

반대로 매일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매순간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는 사람들, 갖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과중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만 매일 떨치고 기쁘게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은 한없이 넓기만 합니다.

 

 
좁은 문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된 자매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 본당 신부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자 어찌나 반가웠든지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이고 신부님, 저는 신부님께서 계시던 본당의 신자였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신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
 
그러자 신부님이 황급히 자매의 말을 막으며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옆에 주교님께서 쉬고 계십니다."
 
물론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신자라는 이유로, 또 신부라는 이유만으로는 천당에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위보다는 복음적인 삶이 더 중요하다는 심오한 가르침이 짧은 이야기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하고 인간적 친분을 내세워 들어가려고 애원하지만 집 주인은 야박하리만치 문을 닫아 버릴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아무리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친분이 있어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지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첫째인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뽑혀서 첫째가 된 그들도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꼴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편 이 말씀은 이방인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도 비록 그 출발은 늦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따른다면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인생역전의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성공 기준은 자녀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켜서 어떻게 출세를 시켰으며, 재산은 얼마나 모았으며, 얼마나 사회적 직위가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조건을 갖추면 첫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요 행복한 집안으로 통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준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마음에 들고 첫째로 꼽힐 사람의 기준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느냐'하는 것이 하느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관점을 지향해서 살아가며 그것밖에 모른다면 그는 세상에서는 첫째였을지 몰라도 죽어서 하느님 심판을 받을 때 꼴찌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면 혹시라도 세상에서는 덜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아주 구체적인 예가 루카 복음 16장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매일 호화롭게 먹고 입고 마시며 잔치를 벌인 부자는 자신의 재산만 믿고 살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부자의 집 앞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며 개들이 종기를 핥던 거지 라자로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뜻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번이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갈등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며, 힘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첫째 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에 가르치신 내용이다.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도 이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기에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23절)라는 질문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이 유다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늘나라를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Meir라고 하는 랍비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Shema(신명 6,4)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와 반대로 어떤 묵시문학계에서는 아주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흐르는 물이 한 방울의 물보다 크듯이 구원받는 사람들보다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제4에스델 9,15).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서 직접적인 답은 회피하시고 구원에로의 결단을 촉구하시고 그 결단의 절박성을 강조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좁은 문’과 그 문이 ‘닫혀지게’ 될 시간은(24-25절)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의 어려움과 절박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위대한 선물인 하느님 나라를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으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24-25절).

만일 문밖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세례를 받았고,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영했다는 것으로 하늘나라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26절). 선을 행한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 앞에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악을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들만이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받은 백성에 속해있다는 특권으로가 아니라, 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에 따르는 의무와 사명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다. 구원받을 사람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인간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다만 하느님만이 은총과 사랑을 통해 당신의 길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차지하고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분명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이제 교회는 이러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사명 즉 ‘선교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열려진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을 통해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1977년 8월 3일, 바오로 6세 담화문).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먼저 항상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이 철저히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부 사람들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교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게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모든 이로 하여금 그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세례 때 받은 그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그에 맞는 삶을 살아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참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많은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1. 연옥에서 만난 주교님


본당에서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한 아주머니는 본당신부님을 항상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당 신부도, 그 아주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연옥에서 그 신자가 본당신부님을 만났다. 그런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높고 먼 곳에 계셨던 본당신부님을 연옥에서 만나다니, 한동안 정신이 멍하였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본당신부님께 달려가서 “신부님, 저는 신부님 본당의 신자였는데, 신부님이 이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은 “쉿! 조용히 하세요. 저기 우리 주교님도 계셔요.”하였다고 한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주교님도 아직 연옥에 계셨다.

이 이야기는 물론 꾸르실료 교육 때 할법한 우스개 소리지만,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없지 않다. 인간 세상에서는 신분과 직책의 고하(高下)나 빈부귀천(貧富貴賤)에 따라 사람대접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2. 꼴지가 첫째 되는 이변


이 세상에도 예상을 뒤엎는 사태들이 많다. 선거 때마다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의 투표소 출구조사에서조차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후보가 의외로 고전하고 낙선하는가 하면, 가망이 없어 보이던 후보가 의외로 민심의 지지를 얻어 당당히 당선되는 예를 많이 본다. 불교의 역사를 보면, 불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선종(禪宗)은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 조사(祖師)로 추대되고, 방장(方丈)이 되어 대대로 전수되어 왔다. 그래서 「달마」 대선사(大禪師)로부터 시작하여,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마도조일」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과연 누가 다음 대를 잇는 조사(祖師)로 추대되어 방장이 될 것인가?」하는 것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조사(祖師)는 수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깨달음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공안(公案)을 내걸고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부엌에서 불이나 지피던 화부(火夫)나 주방장들이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받아 조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무욕(無慾) 무념(無念)의 경지를 얻고, 진정한 혜안(慧眼)을 갖는 득도(得道)의 길은 세상의 출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하는 질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쉽고 편하여 많은 사람이 택하는 길보다는, 어렵고 힘들어 사람들이 외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선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고 말씀하신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학벌, 재산, 사회적 지위, 가문, 미모 등등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비굴하게 행동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에게 남보다 나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너와 다르다.”를 강조하며 “네가 감히 나와 맛 먹으려고?” 하는 자세로 얼마나 으스대고 잘난 체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임을 내세우며 비뚤어진 선민(先民)의식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자렛 촌놈’으로 여겨 배척하였다. 결국 첫째는 꼴찌가 되고, 이방인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 오래된 구교우 집안이라고, 집안에 신부 수녀가 많이 났다고, 재산이 많다고, 본당 간부나 직책을 오래 역임했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주님께서는 “동녘이 서녘에서 사이가 먼 것처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구원될 사람들 중에 들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받들며 살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 십자가의 길 ,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쉽고 편한 것이 =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문 :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자!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우리 민족의 특징을 극단성에서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를 극단적으로 발달시키는 경향입니다. 중국보다 더 극단적인 주자학,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가톨릭 문화가 그러한 예입니다. 최근 웰빙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도 그렇고, 개구리가 좋다하면 개구리가 씨가 마르고, 반신욕이 좋다하면 반신욕과 관련된 용품과 방법이 봇물처럼 터지는 현상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일상적인 건강한 삶에 더해질 때 유용한 것으로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양 한동안 얽매입니다.

이러한 극단을 추구하는 현상은 우리 국민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것보다는 특별하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과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인기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일상적인 가치나 평범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지 않습니다. 탈선이 아니면 꿈속에서나 이루어질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드라마들이 「다모 폐인」이나 「파리의 연인 폐인」과 같은 현상을 낳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인간의 욕심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적이고 그럴싸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이단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수님보다 더 이상적인 사랑과 진리를 추구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은 특별한 비법과 신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이단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본적이고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극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은 특별한 무엇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인양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기본적인 가치를 소홀히 여기게 되고, 특별함만을 쫓다 정말 중요한 일상을 잃어버리는 부작용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회개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먼저 구원이란 인간의 의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 주면서 그 의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의향에 맞갖은 의지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데 그 노력이 좁은 문, 즉 회개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삶에 적용되는 기본진리입니다. 요즈음 올림픽이 뉴스의 중심입니다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승리라는 선수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피땀이 함께하는 연습과 노력이 있을 때 꿈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 버린 뒤에는 두르려도 소용이 없다』란 말씀은 구원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 즉,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세상의 일을 하고 내일은 구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요, 모든 것을 위해서는 물론 서두를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28절의 말씀. 같이 식사를 했거나 가르침을 받은 것과 같은 개인적인 친분이나, 또는 아브라함과의 육적인 관계 등 그러한 자격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의 악을 일삼는 자들(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정의의 실천 여부가 심판의 관건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다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만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여기서 첫째와 꼴찌는 구체적으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유다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있다고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바는 인생에 있어서는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행복으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인생이요,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안주할 수만은 없고,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완성(구원)을 위한 회개의 삶이 바로 오늘의 삶이요, 그러한 삶이 첫째가 첫째로 남아 있고, 꼴찌도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에 왕도와 특별한 비법은 없다』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원주교구 김기성 신부-

 

우리는 많은 불안함을 갖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불안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 이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갖는 불안함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올바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신앙인이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을 지키고 살아가니까 내가 죽은 후에 하느님은 나를 모른 체 하시지는 않겠지?' '비록 내가 약간의 죄를 짓는다 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복음을 보면 바로 이런 의혹과 불안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안한 마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한 편으로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일들을 도와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들만은 구원받을 수 있겠지 하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자부심을 가차 없이 깨트리십니다. 구원의 문은 좁으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고,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사정해도 열어주지 않을 것이란 말씀을 하신 후에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에,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율법서에 적힌 대로만 행동하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아 항상 불안에 떨며 생활하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어딘가 불안 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답을 받고자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약속을 하시지는 않고 구원에 이르는 문을 좁은 문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많은 유혹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좁은 문을 향하여 가려 해도 갈등과 고통이 따르니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넓은 문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다 하여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넓은 문을 통과해서 살다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좁은 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리스도가 제시한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말입니다. 또한 그 좁은 문은 선택된 사람들만이 통과 할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노력만 한다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았으니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자부심만을 갖고 있다든지, 약간의 선행과 의무를 지닌 신앙생활로 만족하여 머물러 있다면 구원의 좁은 문은 영원히 통과할 수 없는 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만족함이 없이, 그리고 멈춤이 없이 넓은 문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매 순간 이겨내는 싸움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 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울 닫아버리면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봅니다. 보지는 못하였어도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사람들은 신(神)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至高)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 법대로 심판하고 벌 줄 것이라 상상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供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그 그늘에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기도 하고 제물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인간 상상이 만들어낸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자비로우신 분이라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질서가 살아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토스에게」,10,6). 그런 본받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질서가 실천되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바로 이 본받음이 보이는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하는 신을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 아들을 통해서 빌면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얻어 낼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재주껏 혜택을 받아내어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에 매료된 사람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본받음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을 얻고,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이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실(失)이 아니라 득(得)이 구원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실이 아니라 득을 주는 구원을 찾아 나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수의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으면서 실천 가능합니다. 소수의 사람이 들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합니다. 그런 것을 하느님이 주시는 특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잃었을 때 하느님이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와 혼동되지 않은 하느님에게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런 것과 혼동되지 않는 하느님을 택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우리가 쉽게 탐내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이, 그러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때때로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교회 제도 안에 몸담는 일도 아니고 기적을 얻어내는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빌어서,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길도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게 합니다. 득이 아니라 실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아내는 길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위해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을 찾지 않고 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주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

-부산교구 최경용 신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지만 사실 구원 문제는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상으로 인해 자기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사람이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즉 구원의 보편성을 가르치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구원은 죽어야 판결이 나고 완성되므로 ‘아직’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구원 받는 조건은 주님을 믿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은 연결되어 있다. 이승에서 잘 살아야 저승에서도 잘 산다.

어떤 이는 자기 조상이 순교 성인이고 자기 집안이 순교자 가문이라고 자랑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집안에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구원은 순교자, 성직자, 수도자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잘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신자 아내를 둔 어떤 비신자가 ‘자기는 하느님의 사위’라고 자랑하였다. 자기 아내가 하느님을 늘 아버지라고 부르니 자기는 저절로 하느님의 사위가 되었단다. 아무리 하느님의 사위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은커녕 장인 되시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일수록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불의를 일삼은 사람에게는 천국 문이 열리지 않는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고 항의해 봐도 소용이 없다. 같은 내용이 담긴 마태 7,21-23을 보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서도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사람만 알아보시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른다고 배척하신다.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행복이다. 사랑하면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비결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 저는 구원 받겠습니까?’

 

"보편된 정신을 살리자"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보편종교


가톨릭이란 ‘공번된’ ‘보편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열린 종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당시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장애자이든, 여자이든, 죄인이든, 세리이든 그들 모두를 받아 들이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시대에, 그것도 모든 계층, 성별, 나이, 종교 등의 엄격한 차별이 있었던 때에 모두가 하나 되기를 열망하시며 포용의 참 평화를 사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후 스승 예수님의 정신을 꼭 닮으려 노력하였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28)

200년 전 그 같은 놀라운 보편된 가톨릭 신앙의 정신이 양반 선비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 왔을 때, 그분들은 분명히 가톨릭 정신을 알았고 그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양반, 중인, 상놈, 노비, 천민, 백정의 계급이 뚜렷했던 그 시대에 그 모든 계급의 벽을 부수어 버리고 함께 평등의 삶을 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호남 교회사 연구소 소장이신 김진소 신부님은 그때의 교우들 감격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천주님의 신비가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감격에 자지러졌다. 이 깨지기 쉽고 허약한 뚝배기 같은 인간, 훅 불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허무한 인간, 정승집 개만도 못한 인간이 천주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의 형제라니, 이제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광명의 빛이 이 땅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신앙의 인품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머리를 숙이고 겸손히 내려오니 그토록 빠른 시간에 복음이 이 땅에 선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진 것처럼, 동방의 한국 땅에도 전해진 것입니다. 보편된, 가톨릭 그 이름으로 말입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 18)

걱정의 소리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하였습니다. 2000년 전, 200년 전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뚜렷했던 시대에도 가톨릭, 보편 신앙이 가능했었는데, 그 모든 차별이 없어진 오늘날 우리가 보편된 가톨릭 이름 값을 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사도들, 무수한 성인 성녀들의 삶이 가엾어 지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자신들과 이해가 맞는 교우들과 신앙이 아닌 친목 모임으로 변절되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된 바리사이 종교가 되어 나가는 행태에 걱정의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본당은 본당대로 자기 본당에 안주하려 들고, 교구는 교구대로 자신의 교구에만 신경을 쓰는 모습에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워집니다.

어느 목사님은 오늘날 개신교의 잘못에 대하여 이렇게 통탄하셨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시장 바닥의 상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도 쟁탈전, 치부의 수단으로 전락한 십일조의 강요, 그것도 모자라 헌금자 명단까지 주보에 올리는 파렴치한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또한 한국교회는 죄인을 양산하는 위선과 기만의 장소이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죄의식만을 심어주고 있다. 그 원죄론은 결국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회자의 협박 무기로 전락하였다. 개인 기업을 상속시키듯 교회의 목회직을 자기의 왕국처럼 혈통으로 세습시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다.”

이 말은 비단 개신교 교단에만 국한된 탄식과 비난이 아닙니다. 우리 가톨릭도 어느 사이엔가 비슷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행하였던 자신들만의 성역을 쌓는 파렴치한 일들을 오늘 우리도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의 신앙의 삶에 물어 보아야할 것입니다. 전통 신앙이라고 자부한다면 그 전통에 걸맞은 너그러움과 보편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미리 시작하였다고 모두 구원의 문에 입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받아들임, 좁은 문으로 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오늘 예수님 진노의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 2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까지 갔는데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 무슨 까닭인지 앞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앞 사람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본래 얼굴과 다른 사람들이 많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답니다. 얼굴이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성형수술이 유행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우스갯말까지 나올 정도로 외모에 대한 관심이 크다 보니 무리한 다이어트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육신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 영혼도 다이어트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문이 좁기 때문입니다. 단지 밥을 굶어서 살을 빼는 다이어트는 생명력이 없고, 적당히 영양을 섭취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건강한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주님!’ 한다고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영양을 섭취하고 실천으로 단련될 때 영혼은 비로소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지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영혼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살펴봅니다.

음식:“얘야, 살아가면서 너 자신을 단련시켜라. 무엇이 네게 나쁜지 살펴보고 거기에 넘어가지 마라. 사실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누구나 즐기는 것은 아니다. 온갖 사치를 누리려 하지 말고 과도하게 음식을 탐하지 마라. 사실 병은 음식을 지나치게 먹는 데서 오고 탐식은 구토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탐식 때문에 죽었으나 그것을 피하는 자는 생명을 연장하리라.”(집회 37,27-­31)
“술 마시는 것으로 남자다움을 과시하지 마라. 술은 많은 사람을 망쳤다.”(집회 31,25)
하느님의 뜻:“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세상의 것:“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콜로 3,5.8)
삶의 자세:“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 1,5-­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자선:“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말:“절대로 말을 옮기지 마라.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으리라. 어떤 말을 들었으면 죽을 때까지 묻어두어라.”(집회 19,7.10ㄱ)
부정 이윤:“상인은 잘못을 피하기가 어렵고 장사꾼은 죄악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많은 이들이 돈 때문에 죄를 짓고 부를 찾는 자는 눈을 감아버린다.”(집회 26,29­27,1)
나눔:“계명을 생각해서 빈곤한 이를 도와주고 그가 궁핍할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마라. 형제나 친구를 위해 돈을 내주어 그 돈이 돌 밑에서 녹슬지 않게 하여라.”(집회 29,9)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자녀교육:“제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 종종 매를 댄다. 그러면 말년에 기쁨을 얻으리라.”(집회 30,1)
용서:“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사랑:“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걱정:“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
시련:“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1베드 4,12)
재물:“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복음선포:“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부모공경:“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에페 61)
판단:“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완전히 지키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문은 바늘귀처럼 좁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합니다. 율법교사나 부자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18,18) 하며 영원한 생명을 자신의 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 질문한 어떤 사람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구원받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적다, 많다’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십니다. 내 역량만큼 힘쓴 다음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한 탈렌트 받은 사람한테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처럼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이 그것마저 빼앗긴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힘쓰지 않은 것입니다. 행하는 사람은 체험을 통해 영적으로 더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더 행하게 되고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빈곤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예수께 감동을 준 이유도 그녀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루카 21,3). 꼴찌 그룹에 속하는, 어쩌면 물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물려받은 것이 별로 없어 창녀와 세리가 된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어떤 특별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들의 처지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참회하는 마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