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24일 금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Margaret K 2007. 8. 24. 05:06

 2007년 8월 24일 금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로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다. 그는 필립보 사도가 예수님께 인도하였던 나타나엘이라고 여겨진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거짓이 없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요한 1,47 참조). 교회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소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

 

"Do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is."


  

 “와서 보시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다. 그의 진실함과 정직성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타나엘은 훗날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된다

 

☆☆☆

 

 우정이 두터운 친구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작은 금덩이를 줍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둘은 서로 말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가다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물 한가운데 왔을 때 금덩이를 가지고 있던 친구가 금덩이를 슬그머니 물속에 버렸습니다. 그제야 옆 친구가 놀라며 그 귀한 것을 왜 버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우정에 금이 갈까 봐 버렸다고 답했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과 통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목적 없이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려고 비우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비워야 할 때를 알고 대처한다면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와서 보시오.” 필립보의 이 한마디에 나타나엘은 자신의 뜻을 비우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질보다는 양을 내세우고 있는 요즈음 세상입니다. 무엇이든 많아야 하고, 숫자가 높아야 안심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교회마저 그러한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비우기보다는 닥치는 대로 채우려 든다면 어찌 주님의 힘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정을 위하여 금덩이도 마다한 동화 속의 친구가 그립습니다.

 

 

 

   아버지의 뜻     

-임문철 신부-


 이제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사제 서품을 한 달 남겨 놓고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꿔온 사제의
꿈이었건만 그것이 혹시 저의 인간적인 소망이 아닌지 싶어 늘 불안했습니다.
그러다 성령기도회에서 비로소 확신과 감사를 드릴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냐며 필립보를 타박하던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이 한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겁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선 나무 그늘을
찾게 마련이고, 어쩌다 흔한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걸 맞출 수도 있는 것인데,
나타나엘은 곧바로 예수께 스승이라 부르며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나타나엘은 조그만
징표에도 승복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큰 징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원의와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천둥으로
울려주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늘 성령의 이끄심에 깨어 있는 이들에게는
막 피어난 꽃잎 끝에 맺힌 한 방울의 맑은 이슬만으로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는 순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보긴 누가 봅니까?

-한명수 시인(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일을 마치고 밤 9시가 조금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이 교우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술을 제법 마셨는지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 모습이 보기에 흉했고, 누가 보아도 그렇게 좋게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에구, 많이 드셨네요. 우리 아이들이 보면 어떡하려고, 빨리 들어갑시다!”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장 선생님, 보긴 누가 봅니까? 이런 시간도 좀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허허.”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같이 있던 사람들 중 그래도 덜 취한 교우 한 분이 “걱정 마시고 먼저 가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길래 돌아섰지만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보긴 누가 봅니까?’라는 그의 말이 계속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행동,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는 문제는 자신의 존재 문제와 직결된다.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언행을 삼가는 자세로 지낼 수 있다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나타나엘의 경우를 통해 생각해 볼 때, 예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실 뿐만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물론 행동까지도 아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누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할까? 나도 ‘보긴 누가 봅니까?’라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예수님의 시선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나도 나타나엘처럼 예수께 ‘너는 거짓이 없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와서 보시오.”

-양승국신부-


<이웃선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선교강의록>


*오늘 복음을 주제로 선교 관련 특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뭔가 어색하고 많이 부족하지만 참고하시라고 올려드립니다.



강의 제목: 이웃선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요한복음 1장 45-51절을 토대로)


목차

1. 나타나엘에게 가두선교를 하고 있는 필립보

2. 즉시 직면하게 되는 난관-냉담함

3.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필립보

4.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5. 본격적인 선교에 앞서

6. 칭찬하는 CEO, 예수님

7. 예수님의 노하우

8. 더 큰 지평을 열어주시는 예수님



1. 나타나엘에게 가두선교를 하고 있는 필립보


요한복음 1장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이란 한 대상자를 향해 가두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2. 즉시 직면하게 되는 난관-냉담함


필립보는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자신감 갖고, Feel 충만할 때, 용감히 말을 꺼냈지만, 즉시 나타나는 반응은 냉담함입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타나엘이 이야기한데로 나자렛이란 동네는 완전히 깡촌이었습니다. 나자렛이 속해있는 갈릴래아 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 훨씬 나자렛을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갈릴래아는 지리적으로 고립된 변방 지역입니다. 로마인들에게 반기를 들던 주동자들도 갈릴래아 출신들이 대부분 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갈릴래아인 이란 말은 특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별 볼 일없는 지방, 괜히 골치 아픈 반골들만 많은 지방, 변두리 하류 지방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필립보의 선교에 대한 나타나엘의 즉각적인 거부반응이 이랬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필립보의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그래도 일단 “와서 보시오.”였습니다.


나타나엘이 보인 반응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반복됩니다. 이웃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의무이지만 어렵고도 험난한 과제입니다. 이웃선교 때 우리 역시 즉시 직면하는 것이 비신자들의 즉각적인 반대입니다.

“천주교, 뭐 특별한 것이 있겠어?”


“천주교 신자들, 하는 꼴 보니 안 되겠더라구!”


“우리 옆집 사람도 천주교 신자인데, 정말 밥맛이던데...”



3.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필립보


그러나 이때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필립보처럼 자신의 경험을, 그 감미로웠던 하느님 체험을 자신감 갖고, 확신 갖고, 확실히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필립보처럼 ‘와서 보시오’라고 외칠 수 있는 당당함입니다. 자신감입니다. 투명성입니다. 잘 정돈된 삶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정직함입니다.

비신자들의 완강한 거부감 앞에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라고 즉시 꼬리 내리지 말 것입니다. 물러서지도 말 것입니다. 확신 갖고, 자신감 갖고 이야기하는 사람, 충만한 은총 갖고 이야기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앞에서 전교 대상자의 반응은 확실히 다릅니다.



4.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46절 말미에 “와서 보시오.”라는 필립보의 확신에 찬 초대의 배경에는 참 하느님이자,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진정한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한 필립보였기에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나타나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 ‘와서 보시오’란 초대를 통해서, 구구절절 복잡하게 설명하기보다는 하느님으로 인해 행복하게 엮어지는 내 삶에로,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공동체적 삶에로 그들을 초대해야만 합니다.


‘와서 보시오’라고 외치는데, 도대체 무엇을 와서 보라는 말입니까?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구세주의 얼굴입니다.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와 함께 걸어가는 제자공동체의 천상적 삶의 모습입니다.

비신자들 가운데 “천주교, 뭐 특별한 것이 있겠어?” 하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보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엄한 미사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신성한 전례에 감동을 받습니다. 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성사의 은총은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성사가 있는데, 성사의 중요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 하나가 ‘성사의 현장성’입니다. 집에 드러누워서 TV를 통해 참석하는 미사가 효력이 있을까요? 메신저를 통한 고백성사가 유효할까요? 마음으로 하는 영성체가 유효할까요?


어느 정도 은총은 받겠지만 유효하지 않습니다. 성사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집전자와 당사자가 현장에 있어야만 합니다. 성사가 거행되는 현장에서 느끼는 은총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는 비신자들에게 일단 ‘와서 보시고’라고 교회로 초대해야 할 것입니다. ‘뭐 교회에 온다고 특별한 것이 있겠어?’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현장에 오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먼저 초대하는 일입니다. 그 이후는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5. 본격적인 선교에 앞서


요한복음 1장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일종의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웃선교에 가장 중요한 바탕은 선교자의 강렬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너무나 좋으신 하느님을 나 홀로 간직하기가 아깝기에 이웃들을 그분께로 안내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에서 선교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내 삶이 고달프고 괴롭고 짜증난다면 양심상 어떻게 이웃에게 선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예수님께 초대하려면 다른 무엇에 앞서 먼저 내 삶이 행복해야 합니다. 나부터 주님 은총 속에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칭찬하는 CEO, 예수님


이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언행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는 엄청난 칭찬입니다. 복음서 그 어느 곳을 봐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한 사람을 당신 눈앞에 두고 크게 칭찬한 적은 드물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는 약을 치신 것입니다. 칭찬이란 약을. 예수님께서 이토록 극구 칭찬하셨던 나타나엘이란 사람은 과연 누구였습니까?

오후에 무화과나무 아래 서있던 사람입니다. 무화과나무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지칭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과연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메시아를 만나고 싶은 갈망을 지니고 기도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아래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묵상하던 사람,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반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전교가 훨씬 쉽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미끼만 제대로 던지면 쉽게 걸려듭니다. 선교 대상자를 설정할 때, 그래서 확실한 결실을 빨리 보고 싶을 때 유의해야할 사항입니다. 될 성 싶은 사람에게 먼저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 대한 이러한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신심, 그의 기도행위, 그의 의로움, 그의 정직함, 그의 사람됨,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극찬을 하시는 것입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된 업무 속에서 그나마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직장 상사나 동료들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칭찬에 유독 인색한 우리들입니다. 선진국에서 상사란 존재는 부하직원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사람인 반면, 한국에서 상사란 존재는 ‘스트레스의 요인’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마크 트웨인이란 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한 마디의 칭찬으로 두 달을 기쁘게 살 수 있다.”


최근 큰 프로젝트를 제대로 성사시킨 한 회사원의 이야기입니다. 직속상관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회사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답니다.


그 회사원은 성과 자체보다 상사가 인정해준 점이 더 기뻤습니다. 상사로부터 인정과 격려를 받은 그 회사원은 그날부터 출근시간이 기다려졌답니다. 멀리서 직장건물이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답니다. 보십시오. 칭찬 한마디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 복음구절에서 우리는 칭찬하는 CEO로서의 예수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생활이 시작되자마자 예수님께서 역점을 두신 프로젝트가 ‘인재 양성’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타고난 리더였습니다. ‘인사가 만사’란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단 모집과 양성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셨습니다.


부족한 사람들, 때로 아직 기본적인 교양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뽑아 교육시키느라 예수님은 많은 고초를 겪으셔야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다양한 교육적 접근 방식입니다. 각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 수준, 상황에 적합하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나타나엘(하느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은 진리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제대로 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당시 보기 드믄 유대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의 인간됨됨이를 즉시 파악한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 제자단에 꼭 포함시키고 싶으셨던 나머지 즉시 효과를 보는 칭찬이란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칭찬도 보통 칭찬이 아니라 들으면 입이 찢어질 정도의 칭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칭찬의 강도가 얼마나 세었던지, 나타나엘은 이 ‘한방’에 훅 갔습니다.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자 사람은 거짓이 없다.”


7. 예수님의 노하우


나타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 앞에서 또 다른 한 가지 교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만난 나타나엘에 대한 평가를 통해 한 인간 개인의 고귀한 가치를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소중하다. 너는 가치 있다. 너는 대단하다. 너는 존귀한 존재이다. 너는 정직하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런 칭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 안에 자존감, 용기, 사랑, 자신감을 부여하십니다.


48절에서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 한 개인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제대로 된 이웃선교를 위해서는 선교대상자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에 대한 따뜻한 마음도 필요합니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친밀감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에 대한 사전 정보도 중요합니다. 또한 칭찬할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준비를 갖추고 다가가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이러한 점에서 정말 훌륭한 분이시더군요. 언젠가 제가 우연히 보니 당신이 관내 장애인 복지관에서 소리 없이 봉사하시더군요. 당신 알고 보니 참 사람이 됐더군요.”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8. 더 큰 지평을 열어주시는 예수님


이러한 과정이 마무리되자 마침내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드디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50절과 51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보다 큰 것,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진실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궁극적인 것, 이 세상 그 너머에 있는 것, 죽음을 넘어서는 것 말입니다.


신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이웃선교를 실천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선교 대상자들에게 이 세상 것들이 주는 위로나 기쁨을 훨씬 넘어서는 보다 차원 높은 삶에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간의 인간적, 자기중심적 삶을 깨트리고 하느님 중심적 삶, 이전에 못 느꼈던 행복한 사랑의 새 세상을 만나게 해줘야 합니다. 결국 그들에게 이 지상에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단순한 육적인 것들의 재미. 인간적, 말초적, 감각적인 것들이 주는 흥미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영적인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미사의 은총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알게 해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부터 먼저 확실한 하느님 체험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감미로운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한없는 자비, 애틋한 마음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망망대해가 앞으로 펼쳐진 부산항이나 인천항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거기서 바다를 계속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특별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배가 항구를 떠납니다. 어느 순간 항해를 하고 나면 배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겠지요. 부산항을 떠난 배는 비록 지금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어느 바다위에 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또 다른 대륙의 아름다운 항구인 나폴리나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떠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 이런 사실을 명확히 알고 선교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시작하셔야 합니다.


오늘 비록 고달프고 힘들지만 언젠가 우리의 이 힘겨웠던 인생여정이 끝나고 바다를 건너가면 바다 저편에 사랑으로만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면 좋겠습니다.

 

 

 거짓

-김대열 신부 (일본 시부까와 천주교회) -

 

오늘은 예수께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된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을 가리켜 “그 사람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갑작스레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어떻게 살았기에 거짓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거짓을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거짓된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거짓의 반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상처에서 오는 것일 게다. 우리는 각자의 파란만장한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를 어떻게 소화해 내고 넘어설 수 있느냐에 따라 걸림돌이 될 수도,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어설픈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만든다.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거짓은 면역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음을 하면서도 헤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거짓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생각해 보자. 상처란 무엇인가? 사랑의 결핍이 아니겠는가?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거짓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체험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사랑 안에서 믿음을 받았다는 체험, 그 안에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온 마음으로 믿어본 체험이 필요하다. 그 체험이 바탕이 되어 철저한 자기 싸움을 이끌어 내야 한다. 연습 없는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 거짓된 마음에서는 당신을 만날 수 없음을 압니다. 저 역시 당신에게 거짓이 없는 마음이라는 말씀을 듣게 해주소서. 아멘’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그가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나자렛 사람"이라고 소개한다(45절).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회의를 갖는다. 즉 메시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대단하지 못했던 촌락이었던 나자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라고 하였던 것이다. 필립보는 그 때에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처음에 필립보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가졌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드러냈다. 바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 압도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47-49절). 어떻든 이렇게 믿음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더 큰 일을 보게될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51절). 즉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싹튼 그 신앙이 예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통해 커질 것이며, 확고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편견에 싸여있는 그 마음에서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기원을 드린다면,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며, 결국은 우리도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예수님께로부터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하고 칭찬을 들었듯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

  

 신앙인의 의무

-구경국 신부-

  

예수와 직접 대면하며 함께 생활하였던 열두 제자들과 달리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신앙을 먼저 고백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그들의 신앙 행위를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도 역시 신앙을 전파해야 할 의무를 지니며 뒤따라오는 신앙인들에게 신앙 행위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신앙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모범적인 신앙 행위를 듣고 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키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그 어려움을 궁극적으로 이겨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증거해야 할 희망과 사랑의 믿음은 긍정적이지 못한 것을 찾아 비판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들을 찾아내어 따라할 때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신앙을 통해서만이 다른 신앙인들에게 좋은 것을 말할, 다시 말해서 신앙의 좋은 본보기를 제시하는 의무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김보경 수녀(전교가르멜수녀회)-

 

 ◆나와 기본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인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본의 아니게 공동체 안에서 애물단지가 되면서 열등감에 빠졌다. 가족과 살 때는 착하고 무던하고 욕심 없는 아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어느날 2박 3일 집단상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일정이 끝나갈 무렵 지도 선생님께서 “지난 며칠 보았는데 수녀님은 참 무리 없고 무던한데 왜 공동체에서 그렇게 비난을 받고 어려우셨을까요?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네요” 하셨다.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마음 깊은 곳에 있던 18년간의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스스로 ‘나쁜 죄인’이라 낙인찍었던 것을 지우고, 나는 그들과 다를 뿐이므로 서로 수용하려고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치유와 자유로움을 느꼈다.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이다. 성서학계에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동일인물로 본다. 무화과나무는 평화를 뜻하며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많아서 그 아래 앉아 명상하는 것이 유다인의 관습이었다. 분명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필립보의 말을 보아 그는 모세와 율법이 기록한 분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예수께서 그의 이런 심중을 꿰뚫어보시고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알아주는 분에게 온몸으로 승복하고 신앙고백을 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의 단 한 말씀에 세속을 떠나 자유롭게 제자가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자신을 알아주셨기 때문이리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박재범 신부-


 오늘 교회는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분이신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는 기록 외에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으며,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인도와 아르메니아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곳에서 살아 있는 채 피부가 벗겨지는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런 죽음 때문인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문장은 칼과 벗긴 살가죽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도들을 더 기억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고 한 삶을 그대로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축일을 맞아 사도가 살아가셨던 삶을 묵상하고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오늘 어떤 모습으로 재현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우리가 자주 쓰는 몇 가지 말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죽었다는 말보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씁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돌아가셨다는 말뜻은 돌아가다의 높임말이며 시작점, 즉 출발점으로 다시 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에게 쓰는 이 말은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로 본다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별 볼일 없다는 말을 쓰곤 합니다. 별 볼일 없다는 말은 대수롭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 본 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황당한 경우, 엉뚱한 경우를 만났을 때 쓰곤 합니다. 어처구니는 순 한글이며 맷돌 손잡이를 가리킵니다. 어느 할머니께서 맷돌을 돌리려고 나왔는데 맷돌 손잡이가 없는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네!” 하신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는 별 볼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때 필리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로 가까이 오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은 없다.”고 말하셨습니다. 이 말은 들은 나타나엘은 어처구니가 없는 황당한 모습으로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타나엘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예수님을 믿지 못한 마음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돌아섰습니다. 하느님께로 온전히 돌아갔고, 그 시간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닌 별 볼일이 있는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매사에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아닌 어처구니 같은 사람, 어떤 일에서도 필요한 사람, 그리고 늘 깨어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매번 돌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고 나타나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잘 보라(見)!

-이수철신부-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 ‘본다.’라는 말이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잘 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잘 보지 못해 선입견(先入見)이나 편견(偏見)에 빠지고,

숱한 오해와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며칠 전 축농증 수술을 했던 수련장 신부의 말이 생각납니다.
“축농증으로 코 수술 후 냄새를 못 맡지만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즉시 떠오른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 진정 중요한 것은

  코의 냄새보다는

  눈으로 잘 보는 것이요,

  귀로 잘 듣는 것이겠구나.

  냄새 좀 못 맡아도 잘 보고 잘 들으면 정말 문제없겠다.”


똑같은 육안(肉眼)이지만 보고 깨닫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욕심 가득한 이들 에게는 모두가 돈으로 보이고,

마음 깨끗한 이들에게는

모두가 좋으신 하느님의 현현(顯現)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마음이, 영혼이 깨끗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하느님의 현존’을 보지 못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반신반의하던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만났던 필립보의 확신에 찬 초대입니다.


“와서 보시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습니다.


한 눈에 삶의 모습과 현실을 통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나타나엘을 보는 순간 한 눈에 알아보고 찬탄의 말씀을 쏟아 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참 사람 하나 만나기 얼마나 힘든 세상인지요!
이어 나타나엘 역시 즉각 스승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참으로 순순한 영혼과 영혼의,

순순한 마음과 마음의 축복된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 있어야 비로소 축복된 삶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만남 없어

참 자기를 채 실현해보지 못하고 시들어 가버리는지요!


마음 따라 가는 눈입니다.
마음 깨끗할 때 맑은 눈으로 서로의 진면목을 당장 알아봅니다.


참된 만남은 깨끗한 마음에 깨끗한 눈 있어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혼탁으로 마음 눈 어두워져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실이나 진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또 주님은 나타나엘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정말 무엇보다도

눈 좋아, 마음의 눈, 영혼의 눈 좋아 제대로 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1독서의 요한 묵시록에서

요한 사도는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도성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마음의 눈을 깨끗하게 하시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거짓들 속에서도 진리를,

나쁜 것들 속에서도 좋음을,

추한 것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보게 하십니다.

 

좋으신 하느님을 보게 하십니다.

 

아멘.


  작은 만남, 말씀 한 마디

-강영구신부-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연한 만남 속에 하느님의 손길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말이 씨가 되어 큰 나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심한 말 가운데 하느님의 부르심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연한 만남과 무심한 한 마디 말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진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타나엘이라 불리는 바르톨로메오는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신명(身命)을 바칩니다.

하얀 종이 위에는 작은 점 하나도 크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낙서투성이인 종이 위에는 굵은 글씨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맑고 밝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작은 만남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크게 감지합니다. 깨끗하고 투명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작은 소리로 들려오는 하느님의 부르심도 크게 듣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만남과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손길이 보입니까? 그 소리가 들립니까?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말씀 안에서 진실하게 살아간 사도 바르톨로메오

-경규봉(전주교구)-


사도 바르톨로메오(귀한 아들이란 뜻)는 신약성서에서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따름으로(마태 10,3),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도이다. 다만 그는 요한복음(1,45-51)에서 필립보의 인도를 받아 주님을 만난 나타나엘(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라고 전해진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인도와 아르메니아, 또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문장은 칼과 벗긴 살가죽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살펴보면, 먼저 그는 성서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필립보가 성서에 예언된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라는 뜻을 그에게 전했을 때, 그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한다. 그는 성서에 정통했기 때문에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미가 5,2). 당시 나자렛은 갈릴래아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멸시당할 만한 지역이었기에(7,52), 그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투로 필립보에게 빈정거렸던 것이다. 그는 성서를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성서에 정통한 사람이었기에 필립보의 잘못된 지식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아집에 사로잡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말문이 막힌 필립보가 그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자 그를 따라 주님께 나아갔다.

또한 그는 하느님을 참되게 섬기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보신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는 야곱처럼 간교한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를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세상 것을 탐하지 않는 사람, 진실하게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거짓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기 때문에 거짓이 전혀 없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거짓이 조금도 없는 진실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자라나는 나무이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하고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셨다는 말씀은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주님께서는 그처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그를 보시고 미리부터 그를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셨던 것이다.

그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눈과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서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직결된다(마태 16,16).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며 구약에서 기다려온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주님을 뵙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 그분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되고 그 나라를 차지리라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다.


사도 바르톨로메오는 성서를 열심히 묵상하고 실천하며 진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주님으로부터 그러한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오늘 우리도 사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며 거짓 없이 진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축복받는 신앙인이 되자.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양승국신부-


<이런 분이 백 명만 계신다면>


사목활동을 하다보면 저 자신을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훌륭한 분들을 만납니다.


연세가 지긋하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젊은이로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연세에도 불도저와 같은 추진력으로 저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하는 초대형공사를 지휘하십니다. 대단한 창의력과 기획력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바가 대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수도자인 저희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정직하게 살아가십니다. 한 평생 불의나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고 사십니다. 단 한치도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살아가십니다.


언제나 그분을 뵐 때 마다 ‘진정 훌륭한 분입니다!’ 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어디 가서 ‘한 마디’ 할 기회가 닿으면 저는 자주 그분의 삶을 소개합니다. 참으로 큰 스승이고 존재 자체로 감사한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 백 명만 계신다면...’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 교회는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이란 인물과 동일인이 아니겠는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 시대 당시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던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충실했었고,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던 정통 유다인으로 사료됩니다.


나타나엘의 의로움, 정직함, 올곧은 성품은 당대 모든 사람들이 다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존경의 눈길을 보냈었고, 그런 칭찬 앞에서도 나타나엘은 자기중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 ‘인간이 된’ 사람이 나타나엘이었습니다.


그런 나타나엘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고 칭찬하십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복음서 그 어느 곳을 봐도 이 정도로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서 어디를 봐도 예수님으로부터 이처럼 인정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두렵습니다. 때로 이처럼 비참하게, 때로 이토록 바닥을 기고 있는 저를 어떤 말로 표현하실까, 두렵습니다.


아무리 잘 봐주신다 하더라도 칭찬 받기는 이미 물 건너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자비 극진한 주님이시기에 부족한 저도 측은지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시며, 나름대로 죽을 고생을 한 저를 당신의 따뜻한 품에 안아주시겠지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는 나타나엘의 삶을 묵상하며 살고자 합니다.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정직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으면, 얼마나 하느님 말씀 안에 열심히 살았으면 이런 칭찬을 들었겠습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오늘 하루, 우리도 정직하고 올곧게, 그리고 온전히 주님 안에 한번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흘 내리, 혹은 일주일 내내는 안 되더라도,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열심히 살아 저녁 무렵쯤에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의 말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참으로 내 자녀답다. 참 신앙인답다.”


 


산채로 껍질이 벗겨진 성인

-박상대신부-


  오늘 교회가 공경하고 축하하는 성 바르톨로메오는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12 제자의 명단에 들어 있다.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으니,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마르 3,13-19; 마태 10,1-4; 루가 6,12-16; 요한 1,35-51 참조) 그런데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에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등장하는 요한복음의 대목을 오늘 복음으로 듣게 되는 이유는 성서학자들이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가 이명(異名)동인(同人)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갈릴래아 지방 가나 출신으로 우선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필립보와 함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바르톨로메오를 나타나엘로 기록하고 있으며, 부활하신 예수와 일곱 제자와의 만남에서도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요한 21,2)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바르톨로메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성령강림이후 이집트, 페르시아와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고 한다. 한번은 성인이 아르메니아 폴리미오스 왕의 마귀 들린 공주를 치유해 준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왕은 궁궐의 거짓 신상들을 모두 부수고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왕의 측근이 수백 군대를 풀어 성인을 잡아 가두고 심한 고문을 한 후 산채로 살갗을 벗기고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막연한 전설이 아니라는 것은 미켈란젤로(1475-1564)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벽화 중 ‘최후의 심판’에서 드러난다. 미켈란젤로는 33살의 나이에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위촉으로 4년 반의 공을 들여 ‘천지창조’를 완성한 후 22년이 지난 59살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위촉으로 거대한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된다. 이 벽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표현되는데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옆에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는 두 사람의 성자(聖者) 중에서 오른쪽 성자가 벗겨진 사람의 피부껍질을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순교한 바르톨로메오 성인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미켈란젤로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일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스승이신 그리스도처럼 받아 천상의 월계관을 쓰게 된 것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며, 이웃을 만나고 스승을 만나며, 매일매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사귀며 친구가 된다. 때가 되면 부부의 만남으로 서로를 내어주는 가정을 이루게 된다. 유대교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는 ‘너와 나의 만남’으로서 인간은 전인격적 완성을 도모한다고 했다. 그렇다. 오늘 예수와 만난 나타나엘은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를 따르며 예수를 가르치고 마지막에는 예수처럼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도움으로 예수께 오기도 전에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 대한 나타나엘의 신앙고백도 말뿐만은 아니었다. 당장은 말로 된 신앙고백일망정 그는 순교로 이를 증언하였다. 중국사기(史記)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듯이 예수의 죽음은 나타나엘을 위한 죽음이었고, 나타나엘의 죽음은 예수를 위한 죽음이었다. 이는 신(神)이 인간을 위하여 죽은 것이고, 인간이 신을 위하여 죽은 셈이다. 나아가 예수도 바르톨로메오도 나를 위하여 죽은 셈이 아니겠는가. 우리 또한 성인을 본받아 예수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내가 만나는 이웃을 위해 살도록 힘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