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2일 수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5)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오후에 잠시 일한 일꾼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당연히 더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품삯을 똑같이 준다. 중요한 것은 품삯이 아니라 포도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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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꽃 속에 파묻힌 꿀벌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원을 그리며 날다가 꿀벌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역시 꽃 중의 꽃은 라일락이야. 가슴이 떨리도록 향기롭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비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장미꽃을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리고 저 들국화는 어떻고. 꿀벌아, 너는 정말 무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아니야. 라일락이 최고란 말이야.” 꿀벌은 결코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라일락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차라리 채송화가 더 낫겠다.” 나비의 이 말에 꿀벌은 속이 상해 입을 다물었습니다. 기고만장해진 나비가 꿀벌을 재촉하였습니다. “왜 아무 말도 못하니?”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니?” 꿀벌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비야, 꽃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라일락은 그윽한 향기를 만들어 내지만 잎을 씹어 보면 얼마나 쓴지 몰라. 쓴맛은 자신에게 남기고 향기는 남에게 주는 아름다운 꽃이 라일락이야.”
이 라일락의 우화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되새기게 합니다. 거름을 잘 준 화초가 꽃도 건강하고 열매도 많이 맺는 법입니다. 신앙생활의 거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선행입니다. 이는 또한 얼마나 많이 했는지가 아니라, 정성과 열정을 얼마나 기울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임문철 신부-
예전에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저런
죄를 짓고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아 구원받은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에도 등급이 있어서 순교자들처럼 영광스런 구원이 있고, 간신히 구원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가족 중에 망인 혼자만 세례를 못 받고 죽었는데, 그 유족들이
성당묘지에 묻기를 원할 때 허락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사제회의에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묘지이기에 교회에 속하지 않은 비신자는
교회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가능성에 관한 신학적 이론일뿐 정작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비상세례(대세)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믿음도 없이 교회묘지에 묻히려고 비상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구원일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떠난 이나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자비의 승리요
영광스런 구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투덜대는 마음이었는데
-한명수 시인(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일을 하다 보면 서로가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더군다나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 차에서 오는 소외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회의를 하면서 제안하는 여러 일 중에는 구성원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제안자는 쉽게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일을 자꾸만 요구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전,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며 회의를 할 때였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내가 아이디어가 많고 주일학교 경험도 있으니 일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감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이 매번 회의 때마다 기발한 제안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일은 한명수 선생님이 하시면 딱 제격인데요.”라고 했다. 제안만 하면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해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다시 모였다. 며칠 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교사 회장이 “앞으로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약한 자의 편에서 생각하고 결정을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제안을 하였다.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어려움을 안겨주었고, 새벽부터 일을 하고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했다며 투덜대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따뜻한 배려를 제안했던 그 교사 회장은 주위의 기대감을 살 만큼의 아이디어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녔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작년 연말에 어느 수도원에서 카드와 책을 선물로
-임영숙(서울대교구 한남동 성당)-
작년 연말에 어느 수도원에서 카드와 책을 선물로 발송하는 작업을 도와 달라는 청을 받았습니다. 일손이 부족하여 자원봉사를 호소하는 수사님들을 보면서 나는 하루를 정해서 약속하였습니다. 웬만한 일은 뒤로 미루고 오전 10시에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벌써 많은 분들이 작업을 하고 계셨고, 봉사자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나는 온 마음을 담아 한 해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작업을 도왔습니다. 점심도 얻어 먹고 간식도 대접받아 가면서.
그런데 거의 마무리 시간까지도 봉사를 하겠다고 오시는 분들이 있었답니다. 나는 처음에 ‘무슨 사람들이 얼굴만 삐죽 내밀 것을 뭐 하러 이 시간에 올까?’라며 얄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수사님들은 그분들에게도 똑같이 어려운 시간을 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시간을 내기로 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루를 할애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이치라고 봅니다. 하물며 주인이 품삯을 지불하여 일을 시키는 종은 계약대로 일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답답합니다’, ‘억울합니다’. 매사에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일수록 잘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이 대가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요?
오늘 묵상은 신앙심 깊은 한 친지가 대신한 것입니다. 저는 유아세례를 받은 구교우로서 뜨뜻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터라 열정적인 믿음을 지닌 새 신자들을 보며 감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믿음의 양(기간)과 질의 차이로 우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주님)과 종(우리)의 관계로 묵상해 보니 훨씬 마음이 편안해지는군요. 또 사실 저는 뒤늦게 얼굴만 삐죽 내미는 얄미운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가까운 친지와 함께 복음을 묵상하는 기쁨과 함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산교구 전수홍 신부-
오늘의 복음말씀은 흔히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곰곰히 내용을 살펴보면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일꾼에게 지불할 품삯을 서늘한 시간대인 오후 5시부터 일한 일꾼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너그러운 포도원 주인의 모습은 일반적인 경제논리로 볼 때 이상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비유말씀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로서 인간의 공로에 비례하여 보상하는 하느님이실 뿐 아니라 공로에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즉 우리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하느님 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정의란 언제나 왜곡될 수도 있고 변형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만 보아도 멀쩡한 사람에게 고문을 가한 인간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러한 일을 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고, 탈법적인 방법과 노동임금의 착취를 통해 돈을 번 기업인들도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민주화에 가장 역행했던 카멜레온같은 일부 언론들이 이제 언론의 민주화를 외치며 정의를 논할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정의는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탕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다시 끌어 안아주시는 분이요,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같은 고상한 인물들보다는 세리나 과부같은 죄인들과 어울려 마시기를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실존주의 철학가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 중에는 "신 앞에 단독자"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지 그 성당에 신부가 멋있어서 혹은 수녀가 호감이 가서 아니면 친구때문에 신앙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가진 신앙이라면 그 인간들이 싫어지면 신앙도 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도 나와 하느님과의 단독적인 관계이요 심판도 나의 삶에 대한 결과를 그 분 앞에서 단독으로 심판받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 품삯을 받으면서 "이 맨 나중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 하루종일 뙤약볕 밑에서 고생한 우리와 같이 다루십니까?" 하고 불평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또 하나의 경계할 점은 남과 비교판단하는 것입니다. 저 집은 이런 것도 하는 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옆집 애는 이런 저런 학원도 보내는 데 우리 애는 왜, 저 친구는 왜 나보다 더 멋있을까 등등. 이웃과 비교를 하면서 죄에 빠지기 쉬운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비교해서 남보다 더 나으면 자연히 교만해 집니다. 그러나 남보다 못하면 곧 열등의식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질투하게 되고 결국은 서로 갈라져서 용서하지 못할 미움과 증오 속에서 묶여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이 주는 메시지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우리 인간의 보상적 논리를 초월하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내리는 무상의 선물임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의 누구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이웃과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당당하고 주체적 신앙인이요, 하느님께서 거저 내리시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됩시다. 하늘의 먹구름이 아무리 짙게 드리워 있어도 그 위엔 밝은 태양이 존재함을 알 듯이 이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한 맺힐 일만 생긴다 해도 언제나 그 뒤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고 있음을 생각합시다. 아멘 *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어느 연수회에서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그룹대화 때 행려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가난한 사람들이나 행려자들이 게으르고 의지가
약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지만 너무도
허약했어요. 폐도 안 좋고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도 거의 볼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일을 할 수 없고 가족들에게 민망해서 집을 나온 것이지요. 대부분의
행려자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일 만큼 육체적으로 가난했어요.”
오늘 복음에서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이나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아침부터 열심히 일한 사람은 억울하겠지요.
나도 오후 다섯 시쯤에 와서 잠깐 일할걸 하는 후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그 한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에 일한 사람이나 딸린 가족이 있음을 본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받아야
한 가족이 먹을 저녁 양식과 다음날 양식, 그리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후 다섯 시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을
그 일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오늘도 공쳤구나,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어떻게 보지, 오늘 아침에도 빵이 모자랐는데….”
실직자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다른 사람들이 일할 시간에
산에 오르거나 공원에서 신문을 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
- 조명연 신부-
현재 저는 새벽 6시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청취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새벽을 기도로 시작하자는 의도로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이 방송 중에 EVENT 행사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한 문제씩 맞추기 Event입니다. 즉, 하루에 제가 한 문제씩을 내는데, 그 문제들의 정답을 적어서 월요일에 제게 E-Mail로 보내주시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점자가 나올 것을 대비해서, 새벽에 대화방 참석 점수, 그리고 게시물 작성 점수를 만들어 1등과 12등(행운의 등수)에게 상품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대단한 상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이 Event에 참석하셔서 더욱 더 활기찬 카페의 모습을 갖추게 되더군요. 특히 상품에 욕심내지 않고 Event 문제의 답을 서로 상의하면서 푸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는 분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인사를 올리는 모습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도 이곳 카페입니다.
사실 이 사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지요. 어떻게든 1등을 하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이 사회 안에서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 아래 모인 이 카페 안에서는 이 사회 안에서의 1등 증후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이 카페를 방문하시고, 이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얼마 전부터 성지 안에서의 봉헌 초를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께서 방문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초 홀더가 예뻐서 많이 없어지겠다.”
초를 담는 홀더가 조그맣고 예뻐서 사람들이 그냥 집어 갈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신부님의 걱정과 달리, 지금까지 단 하나의 분실도 없었습니다. 사회 안이라면, 이렇게 분실 없이 쓸 수 없겠지요. 어쩌면 남아나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담겨 있는 성지이기에 그런 분실이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주님 아래에서는 1등도 없고, 내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 가득한 소유욕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 세상의 법칙과는 다르게 활동하시는 주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그렇지요.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에 일한 사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는 것.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래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서 더 사랑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즉, 그 안에서는 자기의 수고와 노력도 남과 함께 나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복음에서의 그 소작인들도 처음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일거리를 준 포도원 주인에게 너무나 감사했지요. 그 주인이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을 떠나려 할 때, 그들은 욕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투덜거립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곁을 떠나려 할 때, 바로 이런 세속적인 욕심과 원망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맘에는 어떤 마음이 있나요? 사랑과 나눔의 마음이 있나요? 아니면 이 세상의 미움과 욕심이 자리 잡고 있나요? 내 마음을 통해서 내가 지금 어디 밑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박기흠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하늘나라’란, 어떤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숨 쉬는 생명체이며, 인격이라고 하십니다. 한때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어떤 세상 또는 장소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마음 상태'(루가 17, 21)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넉넉한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야말로 바로 ‘하늘나라’이며, 우리 삶이 되어야 함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 역시 이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이른 아침, 노동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품을 팔기 위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 역시 일꾼을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새벽 인력시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이른 아침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일당을 주기로 하고 모두 포도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주인의 깊은 뜻을 알 수 없지만 세 시간 후, 오전 9시에 다시 나가 그 시간까지도 일품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일한만큼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그들도 자신의 포도원에 데려옵니다. 그때까지 장터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하루를 공쳤다고 생각했을 터인데 일거리를 얻었으니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주인은 계속해서 정오 12시든, 오후 3시든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일꾼들도 그냥 노니 자신의 수고에 절반에 그 절반이라도 버는 것이 좋을 테니까 주인의 말에 쉽게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오후 5시면 그날 일을 마무리하고 끝내야 될 시간인데 포도원 주인은 또 시장에 나갑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 주인이 단지 포도원의 일이 급해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이 아니라 바로 '사람'에게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몸으로 일을 해야 먹고사는 사람에게 일이 없다는 것은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일자리가 없어 쉬고 있다는 것은 분명 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IMF를 겪은 우리 국민들은 ‘일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일하라'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구원의 목소리입니다. 그 가운데 오후 5시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하루에 대한 절망뿐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으로 깊은 자괴감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잊지 않고 그들에게까지 희망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비록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포도원에서의 일은 단지 '고달픈 노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인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샀고 시간이 되기까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능하면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뿐,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삯을 받아야 하는 고달픈 현실입니다. 그들에게 포도원에서의 일은 삶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달픈 현실이기에 한 데나리온은 은혜가 아니라 단지 그들 품에 대한 삯일뿐입니다. 그러나 오후 시간에 늦게부터 잠깐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은 일에 대한 품삯이 아니라 주인의 깊은 연민과 그의 자비심을 체함하였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평생을 하느님의 일에 헌신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어떤 보상을 기대한다면 하느님을 율법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은 결코 우리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며, 영원한 생명도 우리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은 주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은혜입니다. 나아가 주인은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 모두에게 똑같이 엉뚱하게 한 푼씩 주는 계산법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세상의 원리로 보면 당연히 위배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으로는 먼저 온 자들에게는 많이, 나중에 온 자들에게는 조금씩 차등을 두어야 당연하지만 하느님은 인간들의 계산과는 다르며, 그 어떤 누구도 잊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하늘나라’로 상징되는 포도원 주인은 일감이 없어 비록 일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밥을 굶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일꾼들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법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주는 한 데나리온은 우리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의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들 역시 이 주인과 한 데나리온처럼 자비로운 신앙 행위로 하늘나라를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박영희-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12절)
세상의 논리로는 불공평할 수밖에 없는 포도원 주인의 태도입니다. 더우기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이러한 포도밭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싶은대로 살다가 죽기 바로 전에 세례를 받고 죽는 것이 낳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길을 가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9시쯤부터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오후 다섯시쯤에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보다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시에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포도원 주인과 함께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을 누리지 않았을까?
포도원 주인이신 하느님의 포도밭에 있었기에 육정이 빚어내는 일을 멀리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갈라디아 5, 20-21)등과 같은 것을 경계하고 이러한 것들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적어도 노력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행복한 것입니다. 진흙탕에 빠져들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 (갈라디아 5, 22)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포도원의 일꾼으로 뽑힌 특은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나의 자유를 손상당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안에 있었기에 나는 거짓된 행복에 빠져들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여정속에서 행복하게 지낸 것입니다.
아래의 "주는 사람이 되라" 는 글은 왜 포도원에 일찍 부름받은 것이 행복한지를 어느부분 설명해 줍니다.
린다가 댄스파티에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서려는 순간 그의 집에 와서 며칠 묵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가 불쑥 말했다.
"그 파티에는 왜 가려는 거니, 린다?"
"물론 즐기려고 가는거죠."
린다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오! 그럼 너는 다만 얻으려고 가는 거로구나"
그의 말에 린다가 물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이죠?"
그러자 그 신사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파티에가서 즐겁게 지내야지. 하지만 파티에 네가 기여하는 것도 있어야되지 않겠니? 네가 거기감으로써 그 파티가 더 낳아져야 돼! 넌 언제나 주는 사람이 돼야 해. 그 파티에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너와 그렇게 가깝게 접촉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거야. 그렇다고 연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하라는 얘기는 아니야. 사려 깊은 한마디 말이나 친절한 행동으로 하느님을 그들에게 전하라는 거지. 그렇게 해보지 않을래?"
린다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 자신이 타인들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도 증진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 만들기 /J. 모러스 >
그렇습니다. 포도원에 일찍 부름받은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특혜를 미리 받은 것입니다. 린다가 파티에서 누군가에게 기여하려는 것이 자신의 행복도 증진시켰음을 깨달았듯이 우리가 포도원에 가서 일찍부터 일한 것은 곧 우리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켰던 것임을 깨닫습니다. *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강영구신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과 형제들이 잘 되는 꼴을 보아주지 못하는 심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도 배가 아픕니다.
공평과 정의의 잣대를 고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마저 불평하게 됩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나와서 일한 사람은 해거름에 나와서 일한 동료가 주인으로부터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며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혼자서 많이 차지하고 누리는 곳에는 하늘나라가 없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를 잘 아시지요.
부자가 한 방울의 물이 아쉬운 지옥(地獄)에 떨어진 것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호의호식하며 자기 삶을 즐길 줄만 알았지,
대문간에 누워있는 거지 라자로의 불행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거기에 지옥(地獄)이 있었고 지옥을 살았던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늘나라(天國)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하늘나라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권(主權)을 행사하시어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자비(大慈悲)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정의가 꽃피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꽃피는 나라입니다.(一明)
마산교구
하느님의 이상한 계산법
-상지종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또 다른 하늘 나라의 비유를 듣습니다. 오늘의 비유를 묵상하면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과 하느님의 자비, 인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가 서로 부딪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아침 9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일꾼을 부릅니다. 날이 저물어 하루 일한 품삯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대충 이 시간을 오후 6시 정도라고 생각해봅시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일한 시간을 따져보면 오후 3시에 온 사람은 세 데나리온을 받아야 하고, 아침 9시 온 사람은 아홉 데나리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 대충 오전 8시 쯤이라고 하면, 이 시간에 온 사람은 열 데나리온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람들의 공정한 계산 방식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 정의입니다. 사람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인간들의 물질적인 경제 정의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정의가 항상 지켜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가 정당한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는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일꾼들은 자신의 정당한 주장, 적어도 인간의 정의로는 타당한 주장을 포도원 주인에게 합니다. 이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보면, 이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은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일한 시간만큼만 계산하면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 본 계산을 역으로 하면 되죠. 아침 아홉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9 데나리온을,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3데나리온을, 그리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1 데나리온을 주면 되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주었다면 일찍부터 나와 하루 종일 일한 사람으로부터 항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자신과 가정을 꾸려가야 할 일꾼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루종일 초조한 마음을 졸이며 막막한 생계를 걱정했을 오후 5시에 온 일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싶었던 것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산 방식이고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일보다 사람을 먼저 봄으로써만 가능한 생명력있는 삶의 경제 정의이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상황을 이것 저것 조목조목 따져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도 오늘 포도원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따져서 거기에 맞게 품삯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바로 온전한 한 사람 자체이고, 이 사람의 삶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따지지 않고 하루 생활할 수 있는 품삯, 즉 한 데나리온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후 5시에 불려온 일꾼이라면 주인에게 항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로움에 감사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른 아침에 불려온 일꾼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주인의 처사가 못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처사가 몰상식한 것이라고 불평하겠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일을 돕기 위한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곧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불릴 수도 있고, 나중에 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언제부터 언제까지 한 것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품삯을 치러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고 주님께서 치러주실 삶의 열매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품삯을 치러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이재희(베네딕도)신부
1년 전 쯤에 제가 타던 차를 판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때 누가 저에게 말해주기를 차에 세차도하고 광도내고 타이어엔 약품을 뿌려서
더 새것처럼, 때깔좋게해서 팔아야 돈도 많이 받고 잘 팔린다고 했습니다.
중고상에도 차 팔 때 다 그렇게 겉만 보기 좋게 해서 돈 많이 받고 판다고 했습니다.
차를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차의 성능보단 겉모습으로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높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외부의 형태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품을 자꾸 대형화시키고 자꾸 비싼 값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값도 싸고 소비자에게 유익한 물건은 이윤이 적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선택의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본래의 모습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화장하고 겉만 치장하려 합니다.
겉을 바꾸기 보다는 삶을 바꾸고 내면을 변화시키려는 풍토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에 온 사람 순으로 임금을 주었습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많이 받겠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모든 일꾼들은 똑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아침에 일찍 온 사람에게나 오후 늦게 온 사람에게나
임금을 똑같이 주는 것은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한사람, 시간적으로 오래 한사람이 보상을 많이 받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하고 그렇지 않고, 또 내가 본당에서 직책은 무엇을 맡고 있고,
영세를 일찍 받고 늦게 받고 그것이 은총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때 더 귀한 일이 있고, 덜 귀한 일이 있고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덜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날 일의 실적이나 단순히 쓰여진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내가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제까지 너무 못살았다는 실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느냐,
그렇다면 지금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다면 현재의 변화된 모습과 일하고 있는 그것만으로
하느님의 은총은 풍성하게 내려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나라이며,
하느님께서 활짝 열어 놓으셨기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품삯을 주는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과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는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립니다.
신앙인의 삶에서 변화가 지금 시작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시작된 변화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뒤늦게 후회하고 회개한 사람이 구원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언제나 후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한편, 겉으로는 일을 잘하고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잔꾀를 부린다거나
심성이 악한 사람에게 은총이 풍성히 내려진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현대에는 포도원에 일하러 오라고 부르는 포도원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 일이 많은데도, 본당에서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도
봉사에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
-이철희 -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 자유이지만, 그 말을 할 때 갖는 생각은 세상의 것이라면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는 가능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야기에, 예수님은 우리더러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검가나 희게 만들지 못하면서 맹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을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는데서 나옵니다. 신앙의 표현으로는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인 오만함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한다면 ‘나보다 더 힘이 강한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자신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정말 필요할 때는 두려움을 갖기 마련입니다.
신앙인으로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켜 ‘두려워 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특히 견진성사를 이야기할 때에 그런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서 나오는 존경심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올바로 돌아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태어나는 일도 내 맘대로 못했고, 세상을 다 마치는 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그 둘 사이의 인생의 시간을 우리는 함부로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백성들의 목자를 향하여 징벌의 소리를 선언하십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는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 각자의 마음이기는 해도 그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한 주인의 처사에 항의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던 포도원 주인의 말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양(量)과 질(質)의 차이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해주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이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지난 월, 화요일의 복음이었던 ‘부자청년의 추종거부 이야기’(19,16-22)와 ‘부자의 구원불가능에 대한 단언’(19,23-26)과 ‘예수추종의 보상에 관한 대담’(19,27-30)에 이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마태오가 앞서간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뜻으로 오늘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19,30)는 역설적인 말을 오늘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하는 비유의 끝(20,16)에 되풀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나라가 완성되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약간의 서열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변화, 즉 처음과 끝이 뒤바뀌는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초기 교회 안에 상당히 짙게 깔려있던 생각이었다. 이는 마치 유행어와도 같은 것이었다.(마르 9,35; 10,31; 마태 19,30; 20,16; 루가 13,30) 그러나 이러한 처음과 끝의 뒤바뀜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예수께서 친히 이 말씀을 발설(發說)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것과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비교적 사회의 피지배계층과 소외계층이 예수를 추종하였기에 그 추종의 대가로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생각의 참뜻은 오늘 비유에 담겨있다.
오늘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隱喩法)이기는 하지만 비유 자체로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된다. 포도원은 하늘나라요, 장터로 일꾼을 찾아나가시는 분은 포도원의 주인인 하느님이시다. 포도원에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 받고 일하는 일꾼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마태오가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시간을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로 구분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태오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구분이다. 각 시간대(時間帶)의 순서는 곧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들, 즉 백성의 원로들과 지도자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일반 서민들, 그리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들, 즉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소외 받은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의 순서로 볼 수 있다. 이같이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하느님나라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비유 속에서 보듯이 포도원 주인의 후한 처사에 대하여 처음부터 일하던 일꾼들의 불평은 당연하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품삯이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중에 온 일꾼이 일찍 온 자기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배 아프다 못해 신경질 나는 일이다. 사람의 계산법은 그렇다. 적게 일하고도 많이 일한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적게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재수나 횡재 같이 보이고, 많이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억울하고 불공평하며,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하느님의 계산법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상식(常識) 완전히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비유자체의 내용에 머물지 말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중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비유는 두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았으며,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꼴찌로 초대받은 세리와 창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처사에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의 심기(心氣)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산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대접이라고 해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그곳에 두 번째 교훈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같은 대접이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품삯의 양(量)은 같지만 그 질(質)은 다르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의 한 데나리온 속에는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정성이 베어있다는 것이다. 늦게 왔는데도 같이 주어진 품삯의 가치는 처음 것과 다르다는 말이다. 많은 수고 없이 주어진 품삯은 같은 액수라 할지라도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양만 많으면 좋아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같은 양이라 할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내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 1-16)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예수님께 채용된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포도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채용된 예수님의 일꾼들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의 첫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일을 하던지, 가정에서 가정 주부로서 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을 하던지, 또는 병원에서 일을 하던지, 크리스챤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직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양로원 등을 가보면 운영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사업체의 운영에 또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복음전파의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가정의 가장들이나 주부들도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된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저의 매일 복음 묵상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이 내용만이라도 가족들과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포도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사야서에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서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1-7)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복지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살펴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도 않았고 야훼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로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이었다. 이제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새로 만든 포도밭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가 송이송이 맺게 해야 한다. 포도송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포도밭은(장소는)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 직장 등은 포도송이를 맺어야할 포도밭이다. 포도송이를 맺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집안이든 아니면 직장이든 그곳은 나의 포도밭이 아니라 주님의 포도밭이다.
따라서 우리는 채용된 일꾼답게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포도송이를 맺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노는 사람, 자기가 관리해야할 포도밭은 팽개쳐 놓고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그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노는 사람 등은 자기 몫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주님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한 사람들이다.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일한 노동의 대가의 비용이다. 즉 우리가 하루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노동의 대가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 데나리온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잘나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이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리며 기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루 일한 대가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노동을 하는 것이요 일종의 노예로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일한 대가에 목적을 두고 일을 한다면 즉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복음 전파를 할 수 없고 다만 마지못해서 시키는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복음전파가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대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일하도록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일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김으로서 일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따라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이는 일 자체에서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너스로 받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를 더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말고 오직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나 5년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이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일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불만?
-이인옥-
오늘 복음인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보면 늘 불만스러웠다. 포도원 주인은 물론 하느님이고, 일꾼들은 우리 인간인 셈인데, 나를 보고 옹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행한대로 갚는 것이 우리의 정의(正義) 개념이다. 가뜩이나 사회가 정의롭지 못해서 화가 치미는데, 하늘나라마저 그렇다면 어디에서 위로를 받을 것인가?
우리는 이 우화를 우회적으로 돌려서 해석하고, 미화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보았다. 그럼에도 만일 내가 첫번째 온 일꾼의 입장이라면 흔쾌히 수긍할 수 없기에 항상 불만의 앙금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것은 어느 날 TV에서 하루살이 인부들의 ’인력 시장’ 을 취재한 다큐멘타리를 본 후였다. 즉 예수께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생존의 마당에서 건져내신 예화를 가지고 하늘나라의 정의(正義)를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인력 시장은 말그대로 하루 일감을 구하러 나온 날품팔이 사람들로 새벽부터 번잡했다. 그들은 연장을 어깨에 둘러메고 자신을 데리고 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봉고차가 하나 들어오면 우르르 몰려간다. 현장감독인 듯한 사람은 일꾼들을 주욱 둘러보자마자 사람들을 골라 차에 싣는다.
한 차가 떠나고 다음 차가 들어오면 또 같은 광경이 벌어진다. 새벽이 끝나고, 한낮이 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며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젠 더 이상 차도 오지 않고, 며칠 째 공친 사람들은 근처에서 장국 한 그릇도 사먹지 못하고 꽁초만 줏어피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말하나마나 별다른 재주도 없고, 근력도 없고, 병색이 돌거나 늙어서, 일을 시키기엔 적합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카메라는 날이 저물어 힘없이 돌아가는 한 사람을 따라갔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는 아이들과 노부모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그를 맞고 있었다. 며칠째 빈손으로 들어오는 아들을 말없이 맞는 꼬부라진 노모의 어깨, 그리고 애늙은이처럼 분위기를 파악하는 철든 어린 것들...
아,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포도원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왜 하루 다섯 번, 그것도 해질녁까지 인력시장에서 품꾼을 데리고 왔어야 했는지를... 왜 그분이 하루살이(우리 모두는 그분이 주시는 하루의 생명을 살아가는 하루살이들이다!)들에게 그 날의 생계비를 똑같이 주셔야 했는지를...
그분의 목적은 <일이 아니었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쓸모가 있는 인간이냐, 없는 인간이냐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무슨 쓸모가 대단히 있겠는가? 그분께 해드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해질녁까지 남아있는 일꾼들! 인간이 쓸모없다고 제쳐놓는 그들은 병자, 장애인, 노약자, 필요없다고 서슴없이 죽여버리는 태아까지도 포함된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지 않다고 굶어죽어야 하는가? 사회에 공헌하는 게 없다고 필요없는가? 우리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내버려두어도 되는가?
오늘 독서에서는 양들을 보살피기는커녕 자기의 이익만 챙기는 거짓 목자들을 향해 분노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우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 그 중에서도 빈약한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는데 찾아 나서는 목자 하나 없어서' 주님은 진노하신다. "보아라. 나의 양 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더이상 거짓 목자에겐 맡기지 못하겠다고, 당신이 직접 챙기시겠다고 나서신 것이다. '아직도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리느냐?'
이젠 솔직해지자. 이 비유를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며, 함부로 하느님의 정의를 왜곡시키지 말자. 아직도 먼저 온 일꾼에겐 어떤 보상(현세적이던, 내세적이던, 심리적이던)이 더 있을 거라고 은근히 기대한다면, 아직도 먼저 온 일꾼과 나중 온 일꾼을 차별하고 있다면, 아직도 인간의 정의로 하느님의 정의를(그것의 다른 이름은 ’자비’다) 재려는 것이다.
인간들이 아니, 내가 보살피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느님<이라도> 보살펴야 하는 것은 너무나 그분다운 일이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그분의 행위에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오! 주님 저희들의 옹졸한 마음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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