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Margaret K 2007. 8. 19. 04:48

   2007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12,49-53)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부모와 자식이 맞서고, 가족끼리도 갈라설 수 있다고 하신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혈육보다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를 앞선다는 가르침이다

 

☆☆☆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은 세상이 확 바뀌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가 번쩍 뜨일 말씀입니다. 진정 그분께서는 욕심으로 얼룩진 제도를 바꾸러 오셨을까요?
적당주의에 물든 사람을 몰아내고 새 인물로 교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도가 바뀌고 조직이 교체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의 주체는 인간이기에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모두가 순간적 변화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는 변화입니다. 그 불을 내 안에서 일으키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작은 불이 서서히 타올라 큰 산을 태우듯이,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한 사람의 믿음이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를 받지만 마침내 반대하는 사람마저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한 가운데 홀로 입교하여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입교시킨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시련은 견디어 내면 보답이 주어집니다. 시련 속에서는 분열이 있었지만 결국은 은총을 위한 준비였던 셈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느 한 마을에 철수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굉장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어느 날 철수의 옆집에 영수라는 아이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영수 역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입니다.

두 아이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똑같이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라이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경쟁을 했어요.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에 대한 질투심으로 불탔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틀 동안 시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달리기 종목은 이 체육대회에서 최고로 인기가 있었지요. 더군다나 이 두 아이는 동네에서 가장 달리기를 잘 하는 것으로 이름 나 있었거든요.

철수는 영수가 이기면 자신이 창피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영수가 잘 다니는 길목에 함정을 설치했습니다. 영수는 철수의 의도대로 함정에 걸려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어요.

결국 첫날 달리기는 철수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철수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다음날에는 마을 대항전 이어달리기 경기가 벌어졌습니다. 우승 상품도 그냥 달리기에 비할 수 없이 크고 멋진 것이었지요. 경기방식은 2인 1조의 이어달리기였는데, 영수는 다리를 다쳐서 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철수는 잘 달리지 못하는 다른 아이와 같이 경기를 하게 되었고, 마을 대항전 이어달리기에서 어떠한 성적도 얻을 수가 없었지요.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1등을 하는 것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허위 학력 문제가 지금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지요. 사실 학벌이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력과 능력이니까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으면 실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높게 평가되는 세상,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학력을 조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최고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등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옳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같이 묻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만큼 올바른 길로 가겠다는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불을 지르러 왔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가지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일치를 가져오시는 분이며, 평화를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벗어나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세상의 편과 주님의 편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서있나요?

증오와 불의가 가득한 세상의 편인가요? 아니면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주님의 편에 서있나요?



일등만을 지향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예수님 앞에 깨갱

-양승국신부-


   가출만 했다하면 빈집이나 가게, 차 등에 불을 지르던 아이가 기억납니다. ‘방화범’인 경우 피해의 심각성이 크기 때문에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여성 청소년 계’가 아니라 ‘강력계’에서 수사를 담당하지요. 수사도 엄중합니다.


   상습적으로 불을 지르는 아이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아이 내면에는 그냥 있으면 미칠 것 같은 주체하지 못할 에너지로 가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에너지는 굉장히 부정적인 에너지, 무척이도 파괴적인 에너지, 그래서 정말 위험한 에너지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온 상처와 소외에 대한 반발, 사회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방화로 발산된 것이 아닐까요? (R)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내면도 조금 더 참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력한 에너지로 충만해있습니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표현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에 가득 찬 에너지는 철저하게도 생산적인 에너지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는 세상을 파괴하는 에너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에너지가 아니라 다분히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녕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 사랑, 사랑이 아닌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참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불신과 냉랭함, 상호비방과 다툼만이 활개를 치는 이 세상에 연민의 눈물, 그 소중함을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폭력과 분열, 전쟁과 무고한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참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난데없이 “예수님으로 인해 식구들이 분열될 것이라”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까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제대로 된 사랑을 주시는 분, 평생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참 평화 그 자체이신 분, 그간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따뜻한 위로를 베푸시는 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이제 다른 모든 것들은 한 마디로 ‘깨갱’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세상만물은 새로운 질서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시어머니...등등의 존재가 이제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이 아닙니다. 멀쩡한 그들을 갑자기 원수 보듯 대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우리 삶의 제1순위로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대상도 예수님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말입니다.

 

   진정한 평화     

-임문철 신부-


 지금 제주도는 해군기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와 경제효과를 들어 찬성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제주도는 평화의 섬인 만큼 군비축소나
평화연구 등 평화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 찬성하는 쪽이 다소 많아 제주도의 해군기지 설치는
기정사실이 되어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전쟁과
군비증강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사제단이 단식기도로써 도민들에게 호소하자, 도민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 공동체가
양분되어 서로 반목하고 백안시하는 모습이 4·3사건의 흉흉했던 분위기
같다고도 하고, 교회 안에서도 화합이 아니라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볼멘 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언제나 일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평화가 늘 화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럴 때 누가 진실로 예수님의 편에
서는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편가름이 되는 것입니다. 분열이 두려워 적당히
타협하거나, 미봉책을 중용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적인 때가 있는데,
이때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가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자세일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갈등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참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일시적인 나쁜 경향 또는 거짓된 보증,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로 사람들과 상황을 새롭고 대담하게 판단하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이 되고 만다. 이 때의 심정을 예레미야는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옵니다”(예레 15,10)라고 한다.

복음: 루카 12,49-53: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예언자의 운명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은 더 나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49-50절). 여기서의 ‘불’과 ‘세례’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깊은 물 속에 잠기는 행위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강렬한 원의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크신 사랑과 숭고한 가르침 앞에 인간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짓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가족들 간에도 만남과 충돌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951-53절). 즉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근본적인 선택에 있어서 대립되게 되면 불일치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필연적 소명 때문에 복음과 일치되지 않는 사상체계, 정치적 사회적 관습, 그리고 굳어진 현실을 거슬려 싸우는 ‘투쟁자’가 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 동조하고 만다면, 그것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내버려져 짓밟히게 되는(마태 5,13) ‘맛을 잃은’ 소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분의 말씀에, 그리고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내적인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내면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의무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결정적 가치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메시아의 때가 그들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함을 비난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의 여러 기적사화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요란스러운 ‘표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 일인지 스스로 판단할 줄을”(57절) 모른다면 이것은 그분도, 그분의 메시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마음이 거짓되어 진실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겉꾸미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리스도는 예레미야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거추장스러운 예언자이시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원초적 의미로 볼 때, ‘투쟁적’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뜻을 안다는 것’(56절)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예언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두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의 세례를 통해 세례를 받고 또한 그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타오르게 하신 성령의 불로 자신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그분께 ‘충실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제2독서: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기에 2독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이 ‘표지’에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 때문에 가치관의 변화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과 이미 대립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가족들 사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내 자신 안에서 가치관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게 되어 있다. 이 갈등을 통해서 진정 우리에게 평화를 가질 수 있는 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에 일치시켜 평화를 이끌어 내느냐가 내 몫으로 남는 것이다. 이 몫을 잘 하기로 하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일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1. 성경 이야기


제1독서 예레미야 38,4-6.8-10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론 세력을 하느님께서 죄많은 유다왕국을 징벌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로 확신하여 바빌론 세력에 대항하는 일체의 항거운동을 반대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대신들에게 반역죄로 몰려 투옥되었지만 왕궁 내시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구덩이에서 살아났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과 고독, 수난과 오해로 점철된 생애를 산 예언자였습니다.
  
제2독서 히브리서 12,1-4는 시련 중에 필요한 인내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시련을 겪기 마련인데 그럴 경우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신 것을 본받아 끈기 있게 참으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아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내리는 교육적 견책입니다.
  
복음 루가 12,49-53은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과 세례의 상징어(49-50절)와 예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내용(51-53절)입니다. 불과 세례의 상징어는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레 20,9 ; 23,29에 의하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셨고(불을 지르다) 그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기를(불이 타오르다) 바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신약에서 ‘불’은 하느님 나라가 오기 전에 세상이 겪게 될 종말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마르 9,48; 마태 3,11; 7,19; 루가 3,16). 따라서 예수께서는 세상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종말심판이 하루빨리 닥치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50절의 ‘내가 받을 세례’는 예수께서 맞이하게 될 죽음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 고뇌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따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가족과도 갈라지는 경우가 생기니 예수께서는 결과적으로 분열을 일으키러 온 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신 예수께서는 그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세상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겪어야 할 죽음을 눈앞에 그리면서 초조해 하셨습니다. 가족을 등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결국에는 죽음으로써 세상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버리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질책과 박해를 받으면서 살았고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녔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셨던 생활방식을 곧이 곧대로 따를 수는 없겠지만 정신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다보면 때때로 오해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고 사는 삶, 그것이 믿음이며 이 시대의 예수 추종과 복음전파의 올바른 자세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바라셨던 예수님, 그리고 세상 구원과 자신의 죽음을 눈 앞에 그리며 초조해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늘 생각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키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참 평화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그 영원한 참 평화를 우리게 주옵소서." 

우리가 자주 부르는 성가 44번 '평화를 주옵소서'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의 이런 바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고 악의가 가득 찬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처음 성당에 나온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깜짝 놀라서 금방 돌아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에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해왔던 신자들 역시 오늘 말씀을 들으면 어떤 의도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해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평화'이고 집안 식구들과의 '일치'인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으며 집안 식구들이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카 예언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풍전등화의 신세였던 남 유다도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미카 7,5-6).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간에, 또 부모 자식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신과 분열, 악이 끼어드는 이러한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미카 예언자는 호소합니다. 또한 이렇게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주님께서 몸소 원수를 갚아 주시고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줍니다(미카 7,8-10 참고).
 
오늘 예수님 역시 너무나도 가까워서 악이 감히 끼어들 것 같지 않은 인간관계에도 악이 끼어드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부부 사이나 형제 사이일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싸워 분열을 일으켜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싸워서라도 그러한 불의한 것에 대항하여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는 잠시의 혼란이 두려워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싸워 갈라지더라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싸워서라도 도둑질을 못하게 바로잡는 것, 그래서 바르게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분열을 일으키러' 왔으며 집안 식구끼리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악이 끼어듭니다. 먼 옛날 미카 예언자 시대만의 말씀이 아닙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지요.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또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놓고 갈등합니다. 어둠과 죄가 나날이 득세하는 세상을 살면서 노력은 하지 않고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하고 노래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하며 덮어둔 채로 두루뭉술하게 살아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싸워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면서 '평화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노래할 때에야 참 평화가 올 수 있지요. 참 평화를 위해서는 일시적 분열이나 누군가와 맞서는 일까지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정의를 바로 세우고 참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와의 갈등이라도 개의치 말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거짓에 ‘아니’라고 해야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불같은 신앙


신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랑스의 ‘떼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 신부님은 학문적 탐사를 위해 오르도스 사막 한 가운데에 있어서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라는 글을 통하여 이렇게 쓰셨습니다.

“주님, 이번에는 앤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존재가 발원한 샘, 그것은 불입니다. 태초에 차가움이나 어두움이 아니라 ‘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속에서 빛이 서서히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빛’이 있어서, 끈질기게 그러나 어김없이 저희의 어두움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영이시여, 불이시여, 다시 한 번 내려오시어 새로 만들어진 이 가냘픈 물질 덩어리에 혼을 불어넣어 주소서. 세상은 오늘 이 새로운 피조물로 새 단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김진태 신부 옮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도 오늘날 미사성제를 드리신다면, 온 우주를 통째로 들어올리시며 불같이 기도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묵시 3, 15 참조) 우리의 신앙에 진정 뜨거운 열정의 불을 쏟아 부어주시고 싶으실 것입니다.

신앙은 시들어 버리고, 열정은 차가워졌으며, 진실로 주님을 찾는 마음 또한 사라져 버린 오늘, 그래도 염치없이 주님께서 주실 평화를 바라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 51)

예전에 어느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고 말하면서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한번도 천주교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가짜 신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실한 신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 신앙이 아닌 세상의 거짓된 것에 단호히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면 정말 미쳤다는 소리,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때론 가정의 분열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뜨거운 열정의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실로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히브리서의 격려를 기억합시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니다.”(히브 12, 1)

평화를 얻기 위한 노력


화가이신 ‘임옥상’님은 이 같은 멋진 글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 사람 숟가락 놓았어’ 하면, 그가 죽었다는 의미로 안다. 반면 ‘숟가락 하나 더 놓자’고 하면, 식사에 초대한다는 뜻이고, 초대에 부담을 갖지 말라는 의미도 붙어있다.

숟가락 공동체로 우리의 전통 사회는 대동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서양과는 달리 유목 사회가 아니라 농업 사회였던 우리는 유토피아를 대동 사회로 보았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현세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던,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낙원-유토피아를 우리는 현세, 즉 이 땅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한국 초대교회 당시 신앙의 선조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낙원을 이 지상에서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셨습니다.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평화를 살고자 하는 사람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얻고자 하는 평화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평화는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분명한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들은 언제나 말씀에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으셨기에 세상의 것을 다 잃었어도 기쁨과 평화로 사실 수 있었습니다. 진정 신앙 때문에 가정에 분열이 일어났어도 불같은 신앙으로 평화를 지켜내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 2)

오늘날에도 신앙 안에서 참된 평화를 찾아 불같은 믿음 생활을 하는 교우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통은 이제 그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드디어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그리스도교는 현실에 안주하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을 하느님의 뜻 아래 변화시키는 종교이다. 세상을 구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뛰어드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이다.


1. 이벽 성조의 신앙적 고뇌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앙전래는 외국의 선교사가 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던 중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길을 찾았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강학회(講學會,요즘의 세미나?)를 하는 등 학문을 연구하던 선비들 중에는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김원성 이벽 이승훈 등이 있다. 이들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어 세례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이들 중 ‘광암’ 이벽은 ‘죽하공’ 이부만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 가문에 서양 오랑캐들의 학문을 하는 이단아(異端兒)가 생겼다고 하여 아들 이벽을 가문의 수치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아들을 누구를 만나거나 문밖출입 못하게 하였다. 아들 이벽이 방에서 단식하며 결심을 꺾지 않자, 이벽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벽은 할 수 없이 하느님께 대한 스스로의 믿음은 어쩔 수 없으나, 다른 사람에게 천주교를 선전하지는 않겠다고 아버지께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벽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는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며 괴로워한 나머지 결국 건강을 잃고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그는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上帝)가 바로 천주님이라고 확신하였기에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으신 임금님을 모른다고 배신할 수 없었다.

2.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바꾸는 종교이다.


일찍이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쓴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충돌 이론’을 말한 바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의 이 혼란은 세상 종말의 징조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문명이 퇴조하고 새로운 문명의 물결이 들어옴으로 일어나는 과도기적인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그리스도교가 어떤 나라에 들어가면 항상 그 나라의 기존 문화와 충돌을 일으키며 갈등을 빚었고, 그것은 곧 박해로 나타났다. “짐(朕)이 국가다.”는 말이 있듯이, 황제나 왕이 절대권을 휘두르던 봉건체제 하에서 “황제나 왕도 하느님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믿는 신자들은 임금을 우습게 보는 대역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기 집 하인을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하여 노비(奴婢)신분에서 풀어 자유를 주는 일 등은 반상(班常)의 신분 차가 뚜렷하던 그 당시로서는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를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한다고 단정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뛰어드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계시의 빛 아래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세상의 질서를 개편하는 종교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항상 박해를 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얼룩진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3. 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흔히 ‘칼의 복음’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면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에 안주하였다면 결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신자는 세상에 살면서도 참으로 세상에 속한, 세상에 안주(安住)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자들도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녀 낳고 직장생활하며 같은 아파트에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인양 모든 희망을 세상 것에 두고 산다면 그는 참된 의미의 옳은 신자는 아닌 것이다. 그는 세속 사람과 꼭 같아져버렸기에 세상에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며,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일상의 생활 안에서 신앙인으로,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 내가 겪는 어려움과 희생이 없다면 나는 이미 세상에 안주하며,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부산교구 서공석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내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주제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문화권에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의 문화를 배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먼저 ‘불을 지르러 왔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식으로는 예수가 방화범이 되려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에다 비유합니다. 예레미아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님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 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20,9). 이 말씀을 배경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면,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불길같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 왔다는 뜻입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10,38)는 예수님의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세례는 사람을 물속에 잠그면서 행하는 의례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과거의 삶에 죽어서 새로운 삶에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는 데는 타협하지 않으셨고, 그것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자기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주저와 고뇌가 전제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신 다음,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불화를 좋아하신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가정의 분열과 사회적 붕괴가 나타나면,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워지면, 이 세상의 기존 모든 질서들이 무너진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세 개의 주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은 당신의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올라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전해야 하는 말씀을 위해 양보나 타협을 하지 않으셨고, 그것 때문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이 고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존도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많은 곳에서 분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정 공동체가 찢어지며 가족끼리 반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돌아가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들도 그 가정이 분열되고 서로 반목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국의 교회사에도 분열과 반목은 많았습니다.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만 20,000명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인연이 인간의 혈연보다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3,35). 가장 중요한 인연은 형제, 자매, 혹은 아버지, 어머니 등의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에 발생하는 인연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올라서,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마음에 발생하는 인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분열과 반목을 거슬러 싸우고 이겨서 드디어 군림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가 그 충실함 때문에 발생한 분열과 반목을 참고 견딥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그리스도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분열과 반목을 자초하고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참고 견딜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선교한다는 사람들의 독선적 자세를 만납니다. 이웃을 존경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오르기를 원하셨고, 그것을 위해 모든 정성을 쏟으셨지만, 그분은 섬기는 모습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 섬김은 사랑이며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고유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섬김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과 서간들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일을 이어받아 어떻게 실천하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히브리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라고 격려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을 바라보고 배웁니다.

교회는 오랜 유럽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그 사회가 준 수직적 권력 구조와 군림하는 인간관계에 익숙해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던 초기교회의 섬김은 사라지고, 봉건영주 행세를 하는 지도자들이 군림하며 명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서 섬기며 죽어 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지시하며 순종을 요구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럽 중세 세상이 아닙니다. 성전이 웅대하고 화려하다고 감동하여 하느님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중세 유럽의 영주나 왕과 같이 차려입은 고위 성직자들이 있다고 매혹되어 신앙을 받아들일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섬기는 사람이면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가 데살리니카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좋은 것을 지키시오.”(1데살 5,21).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살펴보는’ 현명함을 잃고 아집에 살겠다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불길 같이 타오르게 하지 못합니다. 우월감과 일신의 편안함 안에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려 하지 말고,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으로 하느님의 아들 됨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자

-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기원 전 586년경에 유다왕 시드키야는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정세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바빌론의 포위를 받고 있었는데 에집트의 파라오 왕이 이에 맞서서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자 바빌론군이 일시 포위를 풀고 후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유다의 왕과 대신들이 손뼉을 치며 상황은 이제 끝났다고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부패와 부정이 판을 쳤으며 정치와 사회는 물론 종교까지도 속속들이 썩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대국들의 침공은 이를테면 하느님의 경고요 회초리였습니다. 바로 이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나타나서 왕에게, 절대로 형세를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차라리 바빌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충고했습니다.

나라가 바빌론의 위험에서 풀렸는데 퇴각한 바빌론을 쫓아가서 항복을 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그것은 바보요 미친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과 대신들이 볼 때 예레미야는 국가 반역자요 또는 국가 전복의 기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왕을 설득하여 예레미야를 죽이기 위해 깊은 구덩이에 내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을 끝까지 거부하던 유다는 크게 망했으며 왕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왕도 눈알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 갔다가 거기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사필귀정이었습니다. 썩으면 스스로 망하게 되어 있고 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 예언자는 실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말하자면, 독재 국가에서는 양심 있는 목소리를 싫어하며 썩은 사회일수록 진리와 정의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예언자는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간주됩니다. 그놈들(?)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고 그놈들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시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복음과도 연결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평화를 위해 오셨으며 또 평화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평화를 뒤집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다릅니다. 아주 다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대단히 거북하고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아주 달콤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너무 쉽고 또 편안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결국 인생과 세상을 파괴시키는 거짓되고 환상적인 평화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을 구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비롯하여 자유당 독재, 군사 독재 정권시대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라가 썩거나 말거나, 망하거나 말거나 자기 몸만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처신을 합니다. 아부도 하고 굴욕적인 삶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거짓 평화입니다. 언젠가 신문 보도를 보니까 깡패 두 명이 대로상에서 대낮에 흉기를 휘두르며 여인의 가방을 강탈해 가는데 지나가는 행인들이 멀건히 쳐다만 보고 아무도 손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남자만도 수십 명이 있었다는데, 여차하면 자기들도 다칠지 모르니까 모두가 외면하는 바람에 강도들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평화입니다.

우리가 비록 손해를 본다 해도 그가 진정 정의와 진리를 위해 투쟁을 했으며 악과 싸우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했다면 그는 평생 떳떳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 어려운 때에 자신만의 이익과 신변의 안전만을 위해서 불의에 눈감고 악과 타협하려 했다면 그는 평생 비굴하고 떳떳지 못한 인생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 평화를 알아야 하며 참 평화를 위해서 거짓 평화를 과감하게 깨뜨릴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거저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을 받으셔야 했듯이 우리도 부서지고 깨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걸어간 길은 가시밭길이지만 그러나 그가 걸어간 길은 꽃길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거짓 평화를 부수고 깨뜨려서 불질러 버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참 평화를 위해 노력합시다. 썩은 평화는 모두 끄집어내어 불살라 버리고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비가 쏟아져도 떠내려가지 않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참 평화를 구하도록 합시다.


 

 평화가 아닌 불, 그리고 분열

-의정부교구 고민수 루카 신부-

  

그는 이제 막 길눈을 떠가는 택시기사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더미에 앉은 채 아내까지 병마에 빼앗기고만 그가 절망을 견뎌가며 택시 운전을 하는 건, 아직 어리고 철없는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그는 경쾌하게 손님들께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앞 유리창에 달아놓은 가족사진, 그는 수시로 그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예전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하고 교통지옥을 헤매는 고단한 일이지만, 한 푼 두 푼 모아 빚을 갚는 재미로 쉬는 날도 없이 매연 속을 누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주머니가 봉투를 두고 내리셨습니다. 황급히 불러봤지만, 이미 바쁜 걸음으로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할 수 없이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봉투 속에는 얼만지도 모를 큰 액수의 돈다발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어서 잠시 내려서 담배를 피워봅니다. 그는 약해졌습니다. 돈 때문에 치료 한 번 변변히 못받고 저 세상으로 간 아내, 어깨를 짓누르는 빚더미, 좋은 옷 맛난 것 못 해줘 안쓰러운 아이들. ‘이 돈이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이 돈만 있으면….’ 그의 맘 속에서 욕심과 양심이 엎치락 뒤치락 싸우기를 몇 시간…. 그러던 그가 갑자기 택시를 다시 탑니다. 평소보다 조금 급하게 차를 몰아 그가 당도한 곳은 근처 파출소였습니다. 잠시 후에 경찰에서 연락을 받은 돈주인이 황급히 달려 들어왔습니다. 아주머니가 고맙다고 어쩔 줄 몰라서 인사를 하고, 꼭 사례를 하고 싶다는 아주머니에게 그가 말했습니다. “반나절 동안 천국과 지옥을 열두 번도 더 왔다갔다 했는데, 이제 후련하네요.” 그는 끝내 단 한 푼의 사례금도 받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빠로 남고 싶어서였습니다.

숨가쁘게 살아가는 삶속에서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고 남들보다 더 갖고 싶고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고….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행복(?)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고, 어떤 방법으로든 얻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불,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과의 분열을 말씀하십니다. 행복이 다 같은 행복이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인간은 선택해야합니다.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 우리가 싸워야 하는 수많은 내적·외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치열하게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나만의 행복을 위해서 ‘함께’라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유혹을 단호히 뿌리쳐야 합니다.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가려는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십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행복으로 가기 위한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안동교구 김영식 요셉 신부-


한.미 간의 자유무역협정이 양국의 국회 비준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연합과의 협상도 한창 진행 중입니다. 이모저모를 따져 최선의 가치를 구해야 할 협상이 충분한 준비도, 마땅한 대책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진한 정보의 공개문제, 일방적인 양보, 절차의 비민주성은 차치하고 내용적으로도 부실한 협상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업경시의 시대적 아픔을 막기 위한 절박한 몸짓과 외침들을 스스로 ‘아스팔트 농사’라 부르며 논과 밭에서 흘려야 할 땀방울을 길바닥에 눈물로 대신 쏟아내겠습니까? 안치환의 노래 ‘세상이 달라졌다’의 노랫말처럼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진 여름날의 한때처럼 세상은 고요’합니다. 눈앞에 놓인 이익 때문에 ‘벗들은 말수가 적어지고’ ‘저항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친구가 되어 주지 않으니 마음이 아픕니다. 폭염과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도로변 곳곳에 나부끼는 형형색색의 깃발에 적힌 농민들의 FTA 반대 구호가 무척 힘겨워 보입니다.

에벳 멜렉은 제1독서에서 치드키야 임금에게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예레미야 38장9절)라며 죽을 처지에 놓여있던 예레미야 예언자를 살려 줄 것을 직언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리서 12,1절)라며 박해의 위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다 지친 히브리인들을 격려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 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장49절-50절)라고 하시며 당신이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 기존의 구태의연한 가치를 뛰어 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독일의 극작가요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집 속의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 역사는 언제나 왕과 통치자, 국가의 업적만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을 뿐이며, 역사와 그를 기록하는 역사가는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복할 때 그 혼자서 해냈는지 묻지 않고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완성한 날 밤에 벽돌공들과 인부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헤겔은 이를 두고 세계사의 주역인 나폴레옹 같은 영웅이나 프리드리히 대제와 같은 왕과는 다른 보통의 무구한 사람들은 세계사의 여백”(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의 문학 평론가 복도일의 서평에서 인용)이라고 말합니다.

어디 삶의 애달픔이 극에 달한 이들이 농민들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에벳 멜렉의 직언과 사도 바오로의 격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역사의 진짜 주인공이면서도 뒤안길로 밀려난 벽돌공들과 보통의 무구한 사람들, 역사의 여백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의하게 죽을 처지에 빠져있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줄 것을 직언하는 에벳 멜렉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꾸준히 갈 길을 달려 갈 것을 격려했던 사도 바오로처럼 고통에 빠진 이들을 구름처럼 에워싸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불을 지핀다. 새로 남을 위하여.

-수원교구 박영훈(요한사도) 신부-

 

처음엔 “왜냐고?” 물었습니다. 왜 세상에 불을 지르려 하시냐고, 왜 모든 걸 태워버리려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시냐고도 물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처럼 세상을 온통 불태우려 하시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시듯 그분은 아무 대답도,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분의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온 신경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침묵의 끝에서 그분의 작지만 간절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애처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던지신 말씀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그분의 애처로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의 눈동자를 통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불을 지피시는 모습을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우리들이 아파하며 신음하는 모습을. 저는 불신으로 가득 차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투고 물어뜯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들 안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추악하고 사악한 모습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 다.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개 숙인 채 눈물 흘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그분은 또 한번 거센 불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 있던 우리의 모든 추악함과 사악함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리고 그분 눈빛의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영원히 타오를 지옥의 불길 속에 우리를 내버려두실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분께서 우리들 안에 지피시려는 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화의 불’이자 ‘생명의 불’입니다. 우리들 안에 내재 되어 있던 모든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태워버리는 정화의 불이자, 새로운 모습, 곧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로 태어나게 하는 새 생명의 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망설일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지르시는 불길 속에 우리를 던지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바람을 아룁시다.

“사랑의 불이신 예수님, 더욱 거센 불길로 저희를 휘감아 주세요. 그렇게 저희의 모든 추악함과 사악함을 말끔히 정화하시고 새 하늘, 새 땅을 차지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이끌어 주세요. 아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우리가 살아가는 녹색별 지구가 마치 거대한 용광로가 된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오염의 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더운 여름날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ㄱ)고 하시니, 그럼 예수님이 방화범?
예수님은 책임 의식 없이 재미삼아 불장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 불은 집을 태우고 산을 태우고 사람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냉랭하고 무심한 마음에 지피는 불이므로 ‘자나 깨나 불조심’ 하며 방화범 예수님을 겁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를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시편에 기록된 말씀을 떠올렸다고 요한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2,13-­17). 이렇게 혁명적인 불을 일으키시는가 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루카 15,3-­7) 비상식적인 불이기도 합니다. 미쳤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마르 3,21) 하느님 나라 일에 몸 바치다가 결국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 제자들 마음속에 불씨를 당긴 뜨거운 불입니다.
불은 세상을 밝혀줍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불의와 억압이란 어둠의 실체는 빛 속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 1,5) 그리하여“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의 무딘 양심을 예민하게 만들어 어둠에 타협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편했을 텐데 예수라는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더 많이 받아 갈등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에페 5,7-­9)
빛의 자녀답게 뜨거운 마음의 불을 지니고 살았던 두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제1독서에서 전쟁이 무용하다며 진실을 외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대신들은 구덩이에 처넣어 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ㄴ-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ㄴ)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열이 좋은 것은 분명 아니지만 정의와 진실이 아닌 것으로부터는 갈라서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계층이 다르다고 갈라서고 싸우면 안 됩니다. 올바르고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는 모두가 내 형제이며, 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나 아버지라도 진리가 아니요 의롭지 않으면 그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타협이 아니요, 진실을 은폐하여 그저 ‘좋은 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 3,16)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예레 6,13-­14)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ㄱ) 선과 정의와 진리와 사랑이 승리할 때 이루어지는 평화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ㄱ)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0.21)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과 권력과 치부를 위해 불을 태웁니다. 모차르트·베토벤·반 고흐같이 예술에 불을 태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주독립을 위해,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을 유린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생태계 보호를 위해, 농민들의 생존과 자주경제를 위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며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 곳곳의 긴급구호 현장을 찾아가 고통 받는 이들을 보듬어 안는 한비야씨는 “재미있는 세계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혼자 애쓴다고 세상이 변하나요?”라는 질문에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라이베리아를 떠나기 전 열다섯 살 모모가 “나는 그동안 미쳐 있었어요. 전쟁이 나를 미치게 했어요!”라고 한 것이 자꾸 목에 걸려 “나는 모모와 같이 미칠 뻔한 소년병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싶다. 그 기회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무거운 총 대신 무거운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것, 옆집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밤잠을 설치며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 십대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이런 일상을 돌려주고 싶다.”(「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라고 했는데, 자! 그렇다면 나의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하는 불은 무엇인지요?

예수님이 당겨주시는 불은 이른바 명예와 부와 권력의 습지 안에서는 잘 타오를 수 없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편 42,2­3ㄱ)라고 말하는 가난한 영혼 안에서 잘 타오릅니다. 그리고 지펴진 불길은 하얀 재가 될 때까지, ‘나’가 없어질 때까지 활활 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방화범 예수님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탈대로 다 타시오.…`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일 곳이 없느니다.”(가곡 ‘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