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의 디종 근교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운의 꿈을 안고 공부하던 중 어머니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24세 때부터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훗날 아빠스(수도원장)가 된 그는 훌륭한 모범으로 수도자들을 이끄는 가운데 교회 안의 분열을 막고자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기고 1153년 세상을 떠난 베르나르도 성인을 비오 8세 교황은 ‘교회 학자’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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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20-21)
The young man said to him,
“All of these I have observed. What do I still lack?”
Jesus said to him, “If you wish to be perfect, go,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한 젊은이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준 뒤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젊은이는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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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재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하루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재물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재물의 축적이 삶의 목적으로 생명보다 소중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 재물이 많은 젊은이를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망설이다가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많은 재물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그를 낭패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청년을 붙잡은 것은 재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재물의 힘이 어떤 힘보다도 강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재산을 나누어 준 뒤 오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재물의 위력도 소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길을 가고 맙니다. 내일 복음 말씀에서는, 청년이 떠나자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나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부부가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애완동물 가게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도 동물을 좋아하는 이 부부는 애완동물을 보기 위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지요. 그런데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문가의 횃대에 앉아 있는 뚱뚱하고 밉살스러워 보이는 앵무새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에요.
“당신은 어리석고, 당신 아내는 못생겼어.”
남편은 화를 내면서 다시 묻습니다.
“뭐라고?”
그러자 앵무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말합니다.
“당신은 어리석고, 당신 아내는 못생겼다고.”
아내는 하찮은 동물에게까지 무시당한다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가게 주인을 찾아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아내와 모처럼 같이 외출해 귀여운 동물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저 꼴같잖은 앵무새가 기분을 망쳐 놓았소. 내 아내가 저놈 때문에 지금 울고 있단 말이오.”
“저놈이 또 그랬군요.”
주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장갑을 낀 다음 그 앵무새를 잡아 머리를 몇 차례 쥐어박았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속이 후련해졌지요. 그런데 그들이 가게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그 앵무새가 다시 말을 겁니다.
“이봐, 친구.”
남편이 인상을 쓰면서 재빨리 돌아보며 묻지요. “왜?”
그러자 앵무새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알지?”
과연 누가 똑똑한 것일까요? 당연히 앵무새가 더 똑똑한 것 같지요? 그런데 사실 남편과 아내는 그렇게 기분이 망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성과 미모에 대해 말하고 있는 앵무새의 비판이 결코 정확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밉살스럽긴 하지만 말은 잘하네…….”
사실 분노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고 합니다. 바로 이 부부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고 그랬기 때문에 동물의 비판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젊은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지요. 하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재산과 예수님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재산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집착으로 인해서 혹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길로 못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꼬랑지) 제가 오늘부터 휴가를 떠납니다. 그래서 목요일에 돌아오니까.. 새벽 묵상 글은 목요일까지 없을 것입니다. 이 점 기억해주시고요... 금요일에 다시 밝은 모습을 다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남의 비판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빠다킹신부
한 걸음만 더
-양승국신부-
한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반성도 했습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도 큰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지요. 황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 물질문명의 극치 속에 살아가다보니, 은연중에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경향이 우리 몸에 배어 있습니다. 교회나 수도공동체 역시 이런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그 수도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창살 안에 가두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했습니다. 스스로 문명세계를 등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평생을 그 좁은 테두리 안에서 마무리 짓습니다.
이분들의 선택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이 싫어서 그 길을 선택했을까요? 세상에 혐오감을 느껴서 일까요? 그도 아니면 실연이라도 당했을까요? 세상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였을까요?
그런데 그분들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만 가두었을 뿐 그분들의 영혼은 얼마나 자유로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삶 전체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했었는데, 그분들의 얼굴에는 ‘행복해죽겠네’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비록 그분들은 세상을 등졌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아픔과 상처에 민감했습니다. 그분들의 입술에는 세상을 위한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보다 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보다 완벽히 스승 예수님을 닮기 위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스스로 그 험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 때로 알다가도 모를 분이십니다. 때로 한없이 여유로우시고, 끝까지 인내하시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분이시지만, 때로 요구가 얼마나 많은 분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온 한 청년에게, 그 지키기 어려운 계명들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켜온 요즘 보기 드믄 청년에게 큰 상급을 내리시거나 칭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특별히 열심히 신앙생활 해나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하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저희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돈보스코 역시 자신들의 어린 제자들에게 힘에 부치는 요구를 많이 하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된 어린 소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너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깜짝 놀라 이렇게 반문하곤 했습니다.
“신부님, 제게 지금 장난치고 계신 거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이예요?”
돈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애야, 성인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네게 매일 주어지는 일과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정성껏 미사에 참석하는 것, 고백성사를 잘 준비하는 것, 그것으로 너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마음으로 이렇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래, 나는 반드시 성인이 되고 말거야.”
은혜롭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화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만천하에 확실하게 공표했습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더 이상 성직자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했습니다. 성화의 길은 하느님 백성들이면 누구나가 다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길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모두를 성화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일상에 대한 충실과 꾸준한 기도생활로 보다 완전함에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내어드리기
-임문철 신부-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슬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재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다른 은총과 축복,
은사와 재능 역시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슬픔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선배신부님이 제게 ‘요한 금구’라는 과분한 별명을
지어주실 정도로, 사실 저는 말씀의 은사를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피정 지도나 강의 봉사를 많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보면 똑같은
내용인데도 기립 박수를 받기도 하고, 시큰둥한 청중들을 만나게도 됩니다.
그럴 때 좋은 반응은 제가 강의를 잘해서 그런 것이고, 시큰둥함은 청중들이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제가 저의 체험들을 교우들과 쉽게 교감할 수 있도록 하는 언변을
지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저의 것인 양 살게 되면 그것은 교만의 원천이 되고, 그 기준에 따라 남을 평가하게 되어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제가 만일 성당 대신 아무도 오지 않는 오두막을 지키라는 소명을 받는다면,
그 청년처럼 슬퍼하며 떠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보시니 좋았다!
-전의이 수녀(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보시니 좋았다’라고 하시며 연일 기뻐하신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절정인 6일째 되는 날에 드디어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씨 있는 풀과 생명이 있는 모든 과일 나무’를 양식으로 주시며 생명의 존재가 되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짐짓 자신이 꽤나 잘살고 있는 양 자부하며 주님께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분께서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때때로 부자 청년처럼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며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마치도 자신의 업적인 양 떠들 때가 있다. 이는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이 내는 꽹과리 소리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선한 일’을 자기가 했다고 떠들어 대지 않는다. 마치도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의인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고 …`찾아가 뵈었습니까?”라고 묻는다. 의인들은 선행이 자신한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선한 행동은 오로지 선 자체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존재하실 때만 맺어지는 결실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생명의 동산에서 쫓겨나간 이들은 유독 ‘자기’를 내세운다. 하느님의 동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제가 알몸이기에’,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저에게 주기에 제가’, ‘저를 꾀어서’라며 자신이 하느님한테 기인한 존재임을 망각한 채 자신을 내세우며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이제 세상의 것들로 부유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추슬러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던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야 할 때다. 주님께서는 온갖 죽음의 문화가 넘실거리는 오늘의 세상을 미리 내다보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부자 젊은이가 자신의 재물 때문에
-부산교구 전수홍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부자 젊은이가 자신의 재물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져간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를 찾아와서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행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계명을 들면서 이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부자 젊은이는 "그런 것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하고 의기양양해서 다시 묻습니다. 아마 나름대로는 이 젊은이가 윤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충실하게 살았던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대답은 결정적입니다. "당신이 완전해 지려거든 가서 당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라고 청빈에 대한 확고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그이가 부자였음을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이에 부자는 갈등합니다. 그리고 근심하면서 예수를 떠나갑니다. 이 내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내가 가진 여분의 것도 남에게 주는 것이 아까운데 가진 것 모두를 주라니, 어찌보면 예수의 요구는 너무 무리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요구는 예수를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에 대한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말은 신앙인라고 하면서 적당한 세속과의 타협을 바라고 세속과 양다리를 걸치면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기꺼이 신앙을 버릴 수도 있는, 그래서 신앙이 마치 요술도깨비 방망이나 악세사리같은 도구가 되어버린 인간들에게 참된 신앙의 길을 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얄팍한 계산법과는 다르게 주어집니다.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선택들인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을 비우는 일을 과감하게 실행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반드시 더 큰 은총이 주어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한 예화가 생각납니다. 어떤 이가 천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가지의 의문을 지닙니다. 첫째가 내같은 인간이 어떻게 천당엘 왔을까였습니다. 다음으로 가진 의문이 저런 인물이 어떻게 천당엘 왔을까 였습니다. 세 번째로 가진 의문이 그 사람이 왜 천당엘 못 왔을까 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눈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은 마치 개미가 인간을 판단하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신유박해가 있은 지 20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 신앙인들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만 보이고 사악한 사람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신심과 피를 흘려 순교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려 했던 용기는 200년이 지난 오늘날 성인이라는 월계관을 받게 되어 온 세상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진정 그들은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과는 달리 가진 것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신앙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단지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박해의 목적은 신앙을 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고 있습니까? 현대에는 무슨 박해가 있기에 그리합니까? 칼을 들이대는 물리적인 박해는 아니지만 교묘하게 다가오는 현대적 박해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순교는 어떤 것인지 오늘 이 강론을 통해 묵상해 봅시다. 아멘.
부자 청년
-김광태 신부-
젊은이는 다른 부자들과 달랐습니다. 재물에 취해 하느님을 몰라보지도 않았고, 흥청망청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십계명도 다 지켰다니 그 열성을 인정해줄 만합니다. 유혹도 많았을 텐데, 자신을 지켜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젊은이는 예수님을 만나고 충격을 받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젊은이가 그동안 초점을 맞춘 부분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즉 많은 재물을 활용하여 하느님께 열성을 바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느님이 그의 삶에 주체가 되시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삶 전체로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재물이 악이라서가 아닙니다. 재물은 힘을 지니고 있어서 쉽게 사람들을 지배하고 오염시킵니다.
그 힘을 동원해서 하느님과의 관계까지도 해결하고 싶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보잘것없는 자기 재물에 의지할 수 없다보니 하느님께 의지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본래 가난한 존재가 아닙니까?
하느님이 참된 주인이시라는 걸 잊지 않아야 부자 청년처럼 다른 데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김보경 수녀(전교가르멜수녀회)-
◆젊은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자 예수께서는 계명을 준수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십계명 중 하느님에 관한 처음 세 계명은 언급하시지 않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계명만 말씀하신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당신의 뜻임을 밝히신 것이다. 그러나 대화의 핵심은 두번째 질문에 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젊은이는 예수님의 인격과 활동을 보고 구약의 율법이 주지 못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예수께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젊은이의 고유 상황, 곧 재산이 많아 그의 마음이 오롯이 하느님께만 속하지 않고 갈라져 있다는 것을 보셨다. 제자 됨의 조건인 ‘완전한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따르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보셨던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매일 만나는 교우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개 십계명을 준수한다.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부모님을 잘 모시려고 애쓰며 각종 봉사활동을 통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2프로 부족하다’는 광고에 동의한다. “주님,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복음의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다. 나에겐 어떤 재산(탈렌트)이 있을까? 노래·노인 모시기·요리·유머 감각·예술 감각·각종 손재주·전문기술 등등. 만일 내가 2프로 부족하여 갈증을 느낀다면, 완전한 사람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충만한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예수께서는 가진 탈렌트를 다 내놓아 이웃에 봉사하는 데 쓰고 당신을 ‘따르라’ 하신다.
가진 바를 나눕시다!
-강종석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 계명의 준수는 물론이고 자신의 가진 바를 나누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이웃과 또 필요로 하는 이들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습니다. 따라서 거저 베풀어야됨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많은 것을 움켜지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회개가 진정으로 필요합니다. 남에게 거저 주는 것을 망설이고 아까워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일미사를 꼬박 꼬박 지키면서도 돕는 일에 인색한 것은 회개한 신앙인으로서는 곤란합니다. 계명은 준수하지만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면 신앙인으로서 미흡합니다.
얼마 전 수해로 중부지방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달려가 복구작업에 노력을 보태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보았습니다. 휴가를 봉사활동으로 보내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성금을 내서 보태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TV를 통해서 희귀병을 앓는 사람들, 힘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어려운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한 푼 한 푼 성금을 보태는 사람들이 각 방송사마다 매주 수만 명씩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법대로만 살아서는 신앙인의 의무가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계명을 잘 지켰습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그것은 거저 받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은 전염됩니다. 나눔은 받은 사람들을 가만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남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바를 나눠주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전염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나눠주는 입장에서는 보람있고 기쁘고 받는 입장에서는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또 나누다보면 우리는 더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눌 것이 재물뿐만 아니라 내능력 시간 생명 신앙 이 모든 것이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쑥스럽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나눠보십시오.
그리고 나눌 때는 거만한 태도가 아니라 친절하고 받는 사람의 약점을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눈높이를 맞추시기 바랍니다. 받으러 오너라 라는 식으로 하면 안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마치 상장을 받듯이 남들에게 보이는 행사하는 식으로 해서 받는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주면 안됩니다. 오히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셔야 합니다. 받는 사람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괜히 이름 석자 내보려고 위선적으로 나누는 행위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삽니다. 숨어서 하는 것이 옳습니다. 숨은 일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걱정을 합니다. 부나 지식이나 건강도 대물림이 되는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빈곤도 병고도 저학력도 대물림이 되는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 신앙인들은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도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불합리를 나눔으로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거저 베풀어서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 이상으로 남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으로 남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 목숨조차도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나누지 않는 것은 횡령죄에 속합니다. 주님의 것을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보살핌을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병든 사회는 강자만의 세상입니다. 약한 자는 소외됩니다. 소외된 약자를 돕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따라서 나눔은 세상의 타락을 막고 서로 같이 구원받고 같이 행복하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나눌 때, 갚음을 받고 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보다는 갚을 수 없고 돌려줄 수도 없는 이들에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아멘!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따른다.
-박상대신부-
갈릴래아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다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신다.(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태 19,1-20,34) 예수님을 따라 열두 사도들은 물론, 여인들까지 포함된 큰 제자단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마태오는 지난 토요일,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의 복음(19,13-15)에 이어 오늘과 내일 복음으로 ‘예수추종’에 관한 가르침(19,16-30)을 들려준다. 예수추종에 관한 대목의 가르침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① 부자청년이 재산을 버리지 못하여 예수추종을 거부했다는 이야기(16-22절), ②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단언(23-26절), ③ 예수추종에 대한 보상에 관한 대담(27-30절)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주제와 한 가지 결론을 담고 있는데, 처음 것이 나중 것에 종속되고, 예수추종으로 종결된다고 하겠다. 그 과정은 부자청년의 질문을 계기로 전개된다. 첫 번째 주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준수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 주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의 같은 대목(10,17-22)과 비교하여 보면 마태오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을 약간 수정하였다. 이야기의 발단은 한 젊은이가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善行)에 대하여 질문한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십계명(출애 20,12-16; 신명 5,16-20) 중에서 부모를 공경하라(제4계명), 살인하지 말라(제5계명), 간음하지 말라(제6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제7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제8계명),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열거하신다. 마지막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레위 19,18)은 마르코에 없는 것을 마태오가 첨가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산상설교(마태 5-7장) 안에 들어있다.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이 직접 언급된 바는 없지만, 이웃사랑은 예수님의 대당명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충분히 부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와의 대담에서 하느님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의 계명을 율법서의 가장 큰 계명으로 천명할 것이다.(마태 22,34-40)
청년이 이 모든 계명들을 어릴 적부터 잘 지켜왔다고 하니, 그에게 영원한 생명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일까?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20절) 라는 청년의 질문이 계속된다. 마르코는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청년을 보시면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0,21)고 말씀하신다. 유대교에 의하면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 예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6개의 대당명제 끝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완전함은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율법의 근본정신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는 인간의 완전함은 단순한 계명 준수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계명 준수와 함께 선행과 추종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복음에서 보듯이 부자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에 예수추종을 요구받는다.(21절) 그러나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풀이 죽어 떠나가 버린 것으로 오늘 복음은 끝난다.(22절)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 우리는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로서 계명을 지키며 살아 갈 수도 있고, 큰 재산 없이 가난한 자로서 계명을 따라 살아 갈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한번 계명을 지킨 것으로 영생을 보장받거나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해서 당장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계명 준수와 선행은 종말론적인 영생과 완전함을 위해 평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덕행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 완전함은 미래지향적이다. 부자청년은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듯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계명을 준수해야 하는 조건이 남아 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신나는 일이다. 완전함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추종은 또다시 역으로 세속적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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