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오 18,21-22)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베드로의 이 질문에 스승은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신다. 현실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임금에게 엄청난 빚을 진 사람이 탕감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는 자신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실상이다
☆☆☆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돈을 빚진 사람이 탕감을 받았으나 정작 그는 아주 작은 돈을 갚지 못하는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누가 들어도 분개할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평생 뒷바라지한 아내를 속이고 다른 여자와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금방 부도날 줄 알면서도 친구를 속이고 돈을 빌리는 이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면서 고통을 안깁니다.
이러한 사람도 용서해야 될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크나큰 덕입니다. 옛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덕을 닦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희생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았고,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이 내리실 때까지 기도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도움의 은총으로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탕감
-임문철 신부-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시며, 무조건적이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조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죄의 용서에 관한 부분일 것입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저희 아버지는 중년의 나이에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시고 난 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동안 목재상을 경영하시면서 다른 사업체도
많이 가질 정도로 꽤나 성공하셨는데, 부도가 난 뒤 우리 가족이 살던 건물도
은행으로 넘어가고 셋방살이를 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재기를 하려고 무척이나 애쓰셨지만 워낙 자본이 없어서 헛고생만 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히브리 말로 빚의 탕감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하느님께 빚진 것으로,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 큰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움을 주셨다면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우리 식구들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고마운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 들지 않았을까요?
용서 안에 미소 짓고 계신 하느님
-양승국신부-
용서(容恕)란 단어처럼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살다보면 백번 깨어나도, 천 번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인간’, 내 소중한 사랑을 앗아간 그 사람, 나를 지근지근 짓밟은 그 ‘짐승’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용서와 관련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영성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성생활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 더 나아가서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님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독특한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소화불량, 두통, 불면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용서란 중요한 작업을 소홀히 했거나 서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우리는 심리적 정서적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연연하기 시작할 때, 즉시 끔찍한 내면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인간’으로 인해 내가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그 ‘인간’이 내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신체의 모든 장기들이 원활하게 가동될 리 없습니다. 즉시 이런저런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절실한 하느님 체험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기도에 집중하려해도 집중이 안 됩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작업입니다. 용서(容恕)란 단어의 용(容)자는 ‘받아들임’을 나타냅니다. 서(恕)자는 상대방을 뜻하는 如(여)자와 심(心)자로 이루어져있으니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용서란 말은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내 시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나름대로의 고충을 참작해주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주는 일입니다. 큰마음 먹고 다시 그를 받아들여주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그와의 관계형성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이 용서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를 실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용서의 과정이 우리 내면 안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네 삶을 즉시 휘청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영혼에 퇴적되는 갖은 독소들-적개심, 증오심, 복수심, 미움, 폭력성, 분노...-은 언젠가 반드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 영혼을 갉아먹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편해집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 찾을 필요도 있습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전의이 수녀(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셈하기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은 간장종지만하다. 그래도 베드로는 제법 큰 간장종지 마음을 지녔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자신의 넉넉함을 은근히 내비친다. “주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빗물 한 방울이 태평양의 바닷물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주님께선 한량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살면서도 자기 동료의 작은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하는 간장종지 같은 마음을 지닌 우리에게 이르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필경 어떤 이는 한 번, 두 번, 세 번 하며 이번이 몇 번째인지 헤아릴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금 알아들으라고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당시 헤로데 임금의 1년 수입이 구백 탈렌트였다고 하니 만 탈렌트는 당시 화폐가치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액수다. 이 엄청난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안 임금은 전액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한테 작은 빚을 진 동료의 애원을 뿌리치고 감방에 가두었다. 하느님께 죄를 탕감받은 우리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형제의 눈에 든 티를 끄집어 내겠다고 야단법석 이다. 주님께선 형제에게 인색한 우리에게 다시금 엄중히 말씀하신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6)라고. 우리는 왜 무한히 넓은 용서의 바다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간장종지를 고집하고 있는가?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은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만다. 하늘에서 아무리 많은 비를 내려주어도 받을 사람이 항아리 뚜껑을 닫아놓고 있다면 담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많은 은총이 부어져도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많은 은총이 쏟아져 내려오지만 우리 안에 그분의 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의 은총을 맛볼 수 없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은 나보다 훨씬 크신 분이 내 안에 오셔야만 가능하다.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일하셔야 한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몇 번씩 용서?
-김광태 신부-
보통 사람이 세 번을 꼽는데 비해, 너그러움을 과시하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할 것처럼 말하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초라해집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께는 용서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좀 더 근원적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문제 삼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며,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고려하여 1만 탈렌트를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노동자의 일당을 5만 원씩으로 계산하면 3조 원에 이릅니다. 현금 천만 원을 조달하기 힘든 서민들의 형편은 말할 것도 없고,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아도 그 정도의 빚을 상환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 즉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빚쟁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창조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존재론적인 가난을
이야기하는 근거입니다. 동료가 빚진 백 데나리온, 즉 5백만 원이 적은 액수라서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떤 것이 커보일 때마다 눈을 돌려서 하느님 쪽을 바라보아야 배은망덕한 행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을 용서해주면서 자기의 너그러움에 스스로 도취하는 착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용서해야 할까요?
-임영숙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남동 성당)-
기가 막혔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수녀님이 전화를 하셨을까요? 35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을지 하느님께 간절히 여쭙는 기도를 막 마친 순간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성서묵상’ 원고 청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고 쓰는 일이 직업이었다지만 매일성서묵상은 기도를 해야만 쓸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한 달 동안 끙끙거리다가 수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발 이 일(일이 아니라 기도입니다만)을 면제시켜 주세요”라고 간청하고 싶었지만 결국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한 달만 연기해 주세요”였습니다.
그리고 미뤘던 숙제를 다시 집어든 순간 ‘맙소사’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가 제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였으니까요. 차라리 지난 달 매일성서묵상을 쓸 걸 그랬구나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꼼수를 부려도 하느님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됐습니다.
그렇지요. 용서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저는 마음속에 분노를 감추고 사는 편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분노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면서 상대방을 용서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묵상을 시작하면서 저는 제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묵상을 할수록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군요.
어떻게 그들을 용서해야 할까요? 우선은 그들을 위한 기도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일만 달란트나 빚진 주제에, 그래서 매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으면서도 제게 백 데나리온밖에 빚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빚 갚기를 재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제가 받을 빚이 더 크게 보이니 말입니다.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언제부턴가 개를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애완견은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애완견을 아들이나 친구처럼 품고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그만큼의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내성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기에 애완견을 친구처럼 품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치유 받지 못한, 용서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갇혀 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잘못한 그 사람을 위해
용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이 잘못을 범했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마 용서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이 행복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서함으로서 마음의 평화라는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용서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와 손해를 입히고도 전혀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하느님께 용서하는 마음을 청할 때 비로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까요?
-부산교구 차성현 암브로시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용서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용서의 마음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방금 들은 복음 내용이었지만, 정말 그 종은 그야말로 무자비, 자비라고는 하나도 없는 종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일까 ? 그 생긴 모습이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맞아 ! 그 무자비한 종은 아마 내가 알고있는 그런 비슷한 사람일거야... 할지도 모릅니다.
수억을 탕감받은 사람이 단돈 몇푼 빚진 친구에게 그렇게 모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돈 탕감 해주지도 않았는데, 제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답답합니다. 그러니 그 많은 돈을 탕감해준 왕의 분노야 오죽했겠습니까?
결국 그 왕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무자비한 종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비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그 무자비한 종의 결말이 궁금합니다.
죽을때까지 감옥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그 빚을 다 갚고 감옥에서 풀려 나왔는지..
일곱번씩 일흔번 용서하라고 했으니 아마도 분명히 그 종은 용서를 받았을겁니다. 물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해야 했겠지요...
언젠가 저는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느낀적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그 존경심과는 또 다른 눈부심이었습니다. 도대체 잘못을 하지 않고는 빛을 발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실때,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사람 하나가 하늘나라의 더 큰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사이에서 느끼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회개의 눈물 앞에서 느꺼지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기위해 항상 도움을 청하는 삶이 되어야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청할 수 있는 더 눈부신 삶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용서를 청할 것은 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해주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늦기전에 용서를 꼭 청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가기전에 용서 받을 일 꼭 용서 받고 가야겠습니다.
성전 건립기금에 몹시도 애를 먹고 있던 어떤 신부님이 한번은 나이드신 할머니에게 그냥 위로라도 얻고 싶어 얘기했습니다. 할머니, 나중에 하느님 만나면 신부의 이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시라고 얘기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할머니가 삐죽하시면서 말했답니다.
"누가 먼저 갈지 어떻게 알아" 하면서 할머니는 섭섭함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신부이다 보니 용서를 청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해성사를 통해 만나게 됩니다. 짧은 시간들이지만, 순간 순간 저의 삶을 되돌아보게하고 은혜롭게 합니다. 저와 같은 죄를 짓고 고민하며 진심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모습에서 저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무한한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신자에게 저는 고해사제가 되지만, 저에게 그 신자는 회개의 은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일곱 자녀가 있는데 유독 한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녀에게 더 많이 가 있습니다.
어느날 그 힘든 자녀가 눈물로 용서를 청합니다. 나머지 여섯 자녀들이 늘 자랑스러웠지만, 오늘 이 눈물의 자녀만큼 그 부모에게 기쁨을 크게 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한번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합시다.
세상에 태어나서 큰 효도 한번 하지 못하고 마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일곱번씩 일흔번까지 용서해주고자 하시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그러나 어떡합니까? 내가 용서를 해주지 못해 내 안에 분노가 가득한 데,
하느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는 억지로라도 해야할 것 같습니다.
결국 용서는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치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容恕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
진정한 용서(容恕)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를 용서(容恕)했다고 말을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 울분과 울화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하긴 했지만 내 방식대로 용서했기 때문에 가슴 속에 앙금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용서(容恕)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나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너는 갚을 능력이 없구나.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인정하고 받아주마.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윽박지른다고 일만 달란트가 어디서 나오겠느냐?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임금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은 그는 더 이상 빚에 짓눌리지 않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어 새 삶을 시작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옹졸함은 친구를 감금하고 끝내 자신도 감금당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소나무를 느티나무가 되라 하지 않습니다. 잔디를 클로버가 되라하지 않습니다. 수국에서 장미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기에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대로 아름답고 늠름합니다.
하느님은 때 묻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깨끗하게 되라 하시거나 깨끗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비의 손길로 감싸 어루만져줍니다. 그 순간 나의 더러움은 씻겨나가고 상처는 깨끗이 치유됩니다. 여기에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容恕)하십시오.
용서(容恕)하는 당신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一明)
†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규범으로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는 것이다. 물론 이 규범의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가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 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가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가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말라.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용서만이 완전한 평화
오늘복음은 생각이나 말로는 가장 쉬우면서도 행동이나 실천으로는 너무도 어려운 용서편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참 답답한 말입니다. 지난날 분심, 원한 등으로 응어리 진 것들이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아, 나이 50이 들어선 지금도 그 사람의 이름만 들으면, 괜히 짜증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판인데, 일곱번도 아니고 일흔번도 아니고, 일흔에 일곱번을 용서하라니요.......에이, 예수님이나 그렇게 할 수 있지, 요 모양 요 꼬라지로 만들어 놓고는 너무 심한 요구 아닙니까...하고 십자가 앞에서 무척 대들기도 했던 젊은 날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용서에 대해서는 에누리(일본어)도 없이 한결같이 똑같은 말씀만을 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고....그러면 더 이상 불순하게 버틸 수도 없고, 순명은 해야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이 말씀에서 주님은 무엇을 바라시며, 요구하는 것은 무언인가를...제대로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복음의 묵상은 용서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참된 용서의 의미와 실천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 인간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용서받을 자는 하느님 앞으로 돌아오라.
우리는 살아오면서 계산 할 수 없는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더 많은 은총을 거져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들은 스스로 죄값을 치를 수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생들은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아 화목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26절의 전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사자(천사)들을 뵙는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죄악으로 만신창이가 된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을 유황불의 심판으로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 도시를 향하여 걸어가는 도중에서 대화입니다.
심판의 사실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간청합니다. "저 도시 안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그 때 야훼(하느님의 천사)가 말하기를 "소돔 성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 죄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어떤 심각한 경우라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싶은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한사람도 멸망치 않는 것을 원하십니다. 결국 소돔의 멸망의 원인은 죄없는 사람(의인) 열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소돔 고모라는 유황불의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지 못하고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의 도시로 유명한 니느웨와 그 백성들은 40일 후면 멸망 할 수밖에 없는 위급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들은 예언자 요나의 복음을 듣고 왕과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서 용서의 은퐁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서 속에 다른 예를 하나더 들겠습니다. 창세기 50,17의 말씀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동생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하고 노예로 팔아 버린 형들을 용서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그 때 요셉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형들의 모든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형들이 악의로 한 일이건 어떻게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 네 아비를 돌보시던 하느님의 종들이 비록 악의에 찬 일을 했지만 용서해 주어라"라는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요셉과 그 형들은 서로 부등켜 않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지은 그 형제들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 55,7입니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신다는 약속입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용서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실천하므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다.
엄청난 부채를 탕감받은, 즉 은총받은 자가 오늘복음에 등장합니다. 그 은총받은 자가 마땅히 행할 것은 자신도 그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맺힌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풀리는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맺힌 것이 있다면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은 엄청난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는 아주 어리석고 불행을 자초하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의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같습니다.) 본문에서 10,000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거져 탕감 받은 자가 100 데나리온 정도의 직은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받아놓고는, 정작 이웃에게는 전혀 용서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엄청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영원한 은혜와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주 미미하고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운 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삶은 결국 엄청난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삶>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하느님께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고백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와 일반인들의 비교를 정신과 의사들이 종종 많이 하고 있습니다. 폴 토레니에라는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치료 사례집속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앙과 질병과의 관계에 대해서, 병과 사람의 생각과의 관계에 대해서 치료한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불치의 빈혈증에 걸린 한 소녀가 날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 어떤 정신요법이나 약물 요법으로도 낫지 않는 병이었다. 마침내 산중의 요양소로 보냈다. 얼마후 요양소에서 진단을 했는데 혈액 검사의 결과 아무 이상이 없고 빈혈증도 아니고 불치의 병도 아닌 정상이었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 지난번 자신에게 진단을 받을 때와 요양소에서 진단을 받을 때까지의 생활상에 무슨 변동이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지독하게 미워했던 사람을 갑자기 용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마음이 환해지고 삶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점점 몸의 병이 나았다고 했다.... 이런 치유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ㅇ아이구 툴툴 털으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 6,14-15입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에페 4,32에서는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영광은 용서에서 옵니다.- 윌리암 브레이크 -
가장 고귀한 보복은 용서하는 것이다. 영국 속담 -
상해에 대한 용서만큼 우리로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 닮게 하는 요인은 없다. - 크리소스톰 -
용서하는 마음이 없이는 어떤 기도도 응답될 수 없다. - J.C.라일 -
3. 예수 그리스도는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 저주스런 삶을 선택하는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복음의 주인공은 엄청난 빚을 탕감을 받았으니 너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탕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탐심의 종이 되어서 조그만 용서도 잘하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용서 할 수 있는 마음은 믿음은 능력입니다. 지혜입니다. 성숙한 모습입니다. 자랑스러운 주의 일군의 몫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엄청난 은총과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 보혈로 용서하심>
하늘에는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신상명세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기록하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계산하셔야 할 갖가지 것들을 모두 책에 기록하고 계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의 과거 신상명세서 첫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미가엘 크리스텀...머리카락은 6,276개..."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저에 대하여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습니다.
두번째 페이지에는 하느님의 모든 법들, 특히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부터는 제가 각 계명을 범할 때마다 표시를 해 놓을 수 있는 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의 신상명세서는 상당히 두껍습니다.
맨 마지막 페이지는 차용증서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미가엘 크리스텀은 제1계명을 8,322회 범했으며, 제2계명을 5,456회 범했고, 제3계명은...제4계명은...그러므로 미가엘 크리스텀은 곧장 지옥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제가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꺼내드셨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스탬프 도장에 자신의 피를 듬뿍 묻히시더니 매 페이지마다 "폐기됨"이라고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쓰레기는 하늘나라에 두실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셨습니다. 누근든지 미가엘 크리스텀의 신상명세서를 보고 싶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영원히 지워진 사건입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이제 우리는 갚지 못할 빚을 지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도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탕감 받은 축복을 누릴려고 한다면 어떤 신앙으로 살아야 할까요? 그 첫째는 감사 신앙이 불타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의 마음에 품고있는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적은 것을 탐심을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큰 은혜와 축복을 놓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지혜로운 자는 용서를 서두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용서할 기회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 사무엘 죤슨 - 의 말입니다. 참으로 의미 깊은 격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손길에 축복을 주셨다. 한 손에는 용서를, 또 다른 손에는 거룩함을 주셨다. - W.E.생스터 -의 말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은총으로 자랑스럽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에 의지하여 사는 삶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용서 베푸는 삶으로 은혜를 유지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믿음과 실천을 병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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