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루가 1,42)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두 사람은 기적의 아이를 잉태한 분들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하느님께 바치신다. 곧 마리아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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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역사 이래로 수많은 종교가 나타났지만 그리스도교만큼 여성의 위치를 합당한 자리에 앉히려 했던 종교는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남성 위주로 기록된 성경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여성의 위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으뜸은 마리아에 관한 믿음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마리아께서는 죽음과 더불어 승천하셨다고 믿어 왔습니다.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곧바로 천국에 가셨다는 신심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결코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사랑과 애정을 쏟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하늘 나라에 계시지만 오늘만큼은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며, 특히 젊은이와 어린이를 애정으로 대하며 꿈을 키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성모님, 저희에게 지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는 은총을 빌어 주소서.”
어머니
-임문철 신부-
저희 어머니는 사제관에 좀처럼 오시질 않으십니다. 오시더라도 잠시 얼굴만 보고 그냥 가십니다. 행여나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늘 조심하시지요.
신부가 되면 마음 고생이 끝나나 했더니, 신부가 되고 나니 더 바늘방석이라고
하는 다른 신부님 어머니의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뵈면
불효자가 된 것 같아 늘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어느 날 그런 어머니가 제게
조심스레 부탁을 하셨습니다. “아무개 자매에게 고맙다고 인사 좀 해라.”
“아니, 왜요?” “그 자매가 이번에 큰 거 하나 들었는데, 그거 다 너 보고 한 거지, 나 보고 한 거냐?” 당시 저의 어머니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험회사를
다니고 계셨는데, 그걸 안 어느 자매가 어머니에게 큰 보험 하나를 가입한
모양이었습니다. 아버님이 편찮으셨을 때, 어머니는 “누가 문안 왔더라.
누가 무얼 갖고 왔다” 하고 제게 일일이 보고를 하셨습니다. 다 저를 보고
한 것이니 제가 갚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관에 값비싼 선물을 놓고 간 분보다도 어머니에게 잘해드린 분이 더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오로지 아들 예수만을 마음에 품고 사셨던 성모님께서
이제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시듯, 우리 어머니께도 호강 한번
시켜드려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알마` 의 승천
-전의이 수녀(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천대받고 버려진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 나자렛 시골 마을의 처녀인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간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소식을 전한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한다.
마리아는 그 응답으로 이 세상에서 죽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문을, 아담의 죄로 닫혀버린 에덴동산의 문을 열어주신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한 새로운 하와 마리아의 응답으로 가능해진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비워진 그릇을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감싸 안으신다.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마리아는 ‘동정녀’로, 히브리말로는 ‘알마(hml[)’이다. 이 단어가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는 아하즈 왕의 부인을 지칭하는데, 그녀를 통해 하느님 뜻에 충실한 왕자가 태어날 것을 예고하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부분을 인용하여 동정녀 마리아한테서 구약의 성취인 메시아가 탄생한다고 예고하였다(1,23). 마리아는 진정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알마’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 비워지고 바쳐진, 오직 하느님만을 담기를 열망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잉태한 알마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았을 때 즉시 구약성경 안에 계시된 말씀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통해 자신 안에서 시작될 구원 역사를 찬양하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주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곧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이제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잉태할 ‘알마’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거처하실 때’ 가능하다. ‘알마’가 된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불러올리신다. 구약의 에녹이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새로운 시대의 관문인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이 그러셨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올라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신 우리의 어머니가 그러셨고, 또 예수님을 쫓아 알마가 된 사도들이 그랬고, 이제 하느님의 알마가 되기를 갈망하는 우리들도 그렇게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이다.
성모승천대축일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으로 ‘마리아의 노래’를 듣습니다. 라틴어로 마니피캇(Magnificat)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노래’는 구원의 역사를 요약해 놓은 찬미가입니다. 교회는 전례적으로 저녁 기도에 이 ‘마리아의 노래’를 바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 첫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개인적 감사의 노래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루가 46-50절). 여기에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합니다(루가 48-49절). 둘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마리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하느님 백성 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루가 51-56절).
마리아의 노래’에서 묵상할 것 중에 하나는, 마리아께서 깨달은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새로운 시각이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으로만 여겨, 우리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하느님께서 비천한 여종인 당신 자녀의 처지를 결코 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루가 1,48-49).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 아닌 겸손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다(루가 1,51). 우리가 마리아에게 배워야 할 신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천하고 낮은 사람으로 처신한 것입니다(루가 1,48). 그러나 교만은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게 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의 눈을 가리게 합니다. 교만은 자신의 실상을 허황되게 평가하고 진실에 눈멀게 합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결정과 행동만이 옳고,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겸손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섬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낮추어 하느님의 권능에 복종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1베드 5,5-7).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오늘은 성모님이 지상 생애를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영광으로 올려짐을 기념하는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 교리는 일찍부터 교회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지다가 1950년 믿을 교리로 선포된 교리입니다.
이 교리가 교회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신앙적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는 뛰어난 덕행으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공적으로 인정한 사람들을 성인이라 표현하는데 성모님은 성인들 중의 으뜸 성인이요 신앙의 모범입니다. 때문에 성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고, 승천이란 이러한 성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성모승천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희망입니다. 인간의 몸을 지니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았기에 우리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표시요,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늘(구원)로 올림을 받을 수 있도록 성모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호소가 바로 이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성모승천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묵묵히 이겨나가신 성모님의 모습을 우리 삶속에서 본받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면서 오늘 복음과 연결하여 필자가 묵상하고자 하는 바는 신앙의 성장 과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기에 성모님은 처음부터 완성된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분께 교훈을 얻기 보다는 부러워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성모님의 신앙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의 신앙이 아니라 갖가지 장애와 혼란을 극복하고 완성으로 나아간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 일면을 복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과 성모님의 노래로써 이 두 부분은 서로 상반되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 많은 이들은 엘리사벳 방문 사건을 엘리사벳을 도와주기 위한 방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만 성서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아닙니다.
성서가 마리아의 선행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마리아의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즉,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은 후에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마리아는 아기를 낳기 직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임신 후 여섯달이 되던 때 방문하여 세달을 머물다가 출산이 임박할 때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도와줌이 목적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인데 말입니다. 이 사실은 방문의 목적이 출산을 돕기 위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방문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마리아에게 있어 엘리사벳의 잉태가 갖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잉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준 상징입니다. 자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처녀로서 임신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이를 못 낳는 늙은 여인 엘리사벳의 임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 흔들리는 신앙에 대한 증거를 찾고자 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라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응답을 했음에도 마리아는 연약한 처녀였기에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 혼란스러운 마음에 해답을 얻고자 함이 바로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의 신앙은 후반부에서는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마리아의 노래(46절 이하부분)에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이 노래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찬미가요 감사가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증거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보통 마음과 같던 마리아의 신앙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되는데 성서는 이러한 극적인 반전에 가장 큰 역할을 엘리사벳 성녀의 마리아에 대한 찬양과 축복의 말에서 찾고 있습니다. (1, 42~46 참조).
지면상 서둘러 결론을 내려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혼란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혼란이 나쁜 것이긴 해도 성모님처럼 답을 얻고자 한다면 혼란은 또 다른 성숙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마리아의 신앙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엘리사벳이 됨으로써 혼란을 겪고 있는 이 시대의 작은 마리아들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하도록 칭찬과 격려, 축복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이 축일은 지상생활을 마치신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나라로 들려 높여졌음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4세기 이후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이 성모님의 죽음과 승천 축일로 받아들여졌으며, 7세기경에 서방교회에 전해졌고, 8세기에 8월 15일로 확정되었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믿어오던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이의 희망의 징표이며, 마지막 날의 완성을 미리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늘은 성모님의 축일 가운데 가장 큰 축일이다.
1.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함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어떤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고 하면 갑자기 교회가 그런 교리를 만들어 법을 선포하듯이 발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교리를 교회의 권위로 공적으로 확인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모 승천 교리도 마찬가지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사도 성 바오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믿음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 등 수많은 교부들의 한결같은 믿음의 증거를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교회가 사도시대부터 교부들과 함께 믿어왔던 교리를 교황이 교회의 권위로서 공적으로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모님의 승천은 그 믿음의 결과이다
성모 승천은 성모님께서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으시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하셨음을 고백하는 교리이다. 그러면 교회는 왜 이 교리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던가? 한마디로 성모님의 승천은, 세상 종말 곧 세상이 완성될 때에 모든 신앙인이 누리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 영원한 세계를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누리게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세상 종말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듯이 비극적인 파멸이나 재난이 아니라, 그 재난을 겪어낸 정화된 이들이 누릴 세상의 완성이 그 핵심이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하고 말한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시며,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주님께 당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맡기시고 전적인 신뢰를 드렸던 것이다.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그 믿음은 변함이 없으셨다.
아들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을 때에도,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고, 급기야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게 되었을 때에도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신 채 묵묵히 따르신 것이다. 참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모범이셨다.
3.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분이시다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예수님의 수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랜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도 그 영화를 보고 예수님의 수난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이었는지를 다시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다음에도 성모님의 고통은 끝없이 밀려왔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흔히 우리는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는 그 아들을 자기 가슴에 묻는다.” 하고 말한다. 마리아야말로 십자가 아래서 사형수로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아들을 바라보셔야만 했다. 유명한 ‘피에타 상’은 십자가에서 내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으신 마리아의 모습이다.
성모님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듯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으로써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고통은 그때부터 더욱 크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받는 사도들과 함께 지내신 성모님은 그 뒤에도 줄곧 쫓기는 사도들과 함께하셔야만 했다. 이렇게 성모님의 생애는 참으로 고통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성모님보다 주님의 수난에 더 깊이 동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믿는 이의 모범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구원 공로를 가장 먼저 입고, 그분의 부활의 영광을 가장 먼저 체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가신 분이며, 우리의 희망을 놀랍게 실현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며 선구자이시기에, 성모님의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 마리아처럼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기쁨이며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렇다. 마리아는 하느님 백성(곧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당신 친히 먼저 가시고 또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전구해 주시고 돌보아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그분의 믿음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면 마리아께서 승천하셔서 누리고 있는 그 영광에 반드시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종말에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이 있고, 우리가 사는 땅이 있으며, 땅 아래에 죽은 이들이 가는 어둠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삼 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축일은 성모님이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성모님도 하느님에게 가신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성모님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 탄생에 대한 예고를 받고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세례자 요한을 보내셨다고 믿는 초기 교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예고를 요한에게 먼저 알리기로 한 것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한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요한에게 알리기 위한 마리아의 방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의 만남을 기쁨과 축복과 찬미의 장면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할 때 느끼던 기쁨이고 축복이며 감탄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예배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노래를 구약성서 표현들을 가져와서 만들었습니다. 루가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그것을 채집하여 마리아의 노래라고 오늘의 복음에 담았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이 자비하셔서 사람들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나타나면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차별을 철폐하신다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 전례가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 안에 우리의 구원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이 마리아에 대해 언급할 때는 성모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에서 언급된 성모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어머니와 제자를 보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보시오. 그대의 어머니이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 사이를 모자 사이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신앙인이 지녀야 하는 자세와 신앙인의 운명을 말하기 위해 성모님을 이야기 합니다.
루가복음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였다고 말하면서, 마리아가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말씀으로 영접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 2장에는 가나 촌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 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예수님에게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좋은 술을 공급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교가 술 떨어진 잔치 집과 같이 따분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모님은 예수님에게 희망을 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들으시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에 대한 기쁨을 체험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복음서들의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의 운명을 새롭게 말할 필요가 있을 때, 성모님에 대해 말합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유럽 지식인 사회를 강타한 철학적 합리주의는 하느님이 이 세상의 일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합리주의는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계시하시지도 않고 섭리하시지도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장에 맞서서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18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원죄에 물듦이 없이 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승천 교리도 성모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축일은 1950년 11월 1일에 선포되었습니다. 20세기 전반부에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렀습니다. 유럽은 그 전쟁의 폐허와 인간의 잔혹함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인류의 미래는 없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 두 번의 세계대전은 그리스도 문화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랑의 복음이 선포되는 땅에서 서로 미워하고 파괴하고 죽인 것입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합쳐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인류는 쓰레기와 같이 비하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성이 파멸된 폐허를 딛고 서서 유럽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천명해야 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 축일은 우리 인간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전쟁도 있고 핵의 위협도 있습니다. 현재 지구가 겪고 있는 환경오염은 우리 후손이 살 수 없는 자연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인간 생명은 존중받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도록 살자는 노래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 안에서 그 생애의 종말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완성되는 삶을 살겠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애를 완성시키는 분이시면, 우리는 지금부터 그분의 자비를 배워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면 우리도 그 자비를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오늘은 㰡성모 승천 대축일㰡이면서㰡광복절㰡입니다. 광복절이 성모 승천 대축일과 겹쳐진 것을 보며 정말 우리나라의 광복절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과 국민들이 노력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전쟁을 잘 했다거나 준비를 잘 하여서 얻게 된 나라의 자유는 아닌 것이지요. 돌아가신 민권운동가 함석헌옹은 이를 두고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㰡8.15는 도적같이 불시에 왔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온 것이다.㰡
고통받는 자들의 탄식을 들어주고, 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성모 승천 대축일과 겹쳐진 우리의 광복절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광복절이며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성모 승천의 기쁨이 겹쳐진 날입니다. 즉,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영광스러운 날이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과연 성모 승천의 의미가 어떤 것이며,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모 마리아께서 유다 산골에 있는 엘리사벳을 갑자기 방문하신 것일까요?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원래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이었습니다.
㰡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㰡(루카1,7)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즈카르야가 사제 직분을 이행하기 위해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고 있는 사이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㰡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㰡(루카1,13)
아내와 자신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즈카르야에게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평생 동안 아기를 낳기 위하여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숱한 노력을 기울였던 즈카르야는 이제 나이가 들어 아기에 대한 꿈을 포기하였을 뿐 아니라 마음을 비운 지가 오래 되었던 것이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그는 주님의 천사를 향해 반문합니다.
㰡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㰡(루카1,18)
그러자 천사가 대답합니다.
㰡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㰡(루카1,19-20)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예고한 대로 엘리사벳은 아기를 갖게 되지요.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어 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십니다.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던 늙은 여인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여 여섯 달이나 되었고 그 남편 즈카르야는 성소에 들어갔다가 벙어리가 되어 나왔다는 소문이 두루 퍼져 사촌 마리아에게도 그 일이 전해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로 그 즈음에 마리아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 가서 이렇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㰡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㰡 (루카1,28)
몹시 당황하여 두려워하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지요.
㰡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㰡(루카1,31)
이에 깜짝 놀란 마리아가 묻습니다.
㰡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㰡(루카1,34)
㰡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㰡(루카 1,35-37)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마침내 대답하지요.
㰡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㰡(루카1,38)
마리아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는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㰡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㰡(루카1,38)하고 마리아는 받아들였지만 인간적으로 얼마나 큰 혼란을 겪었겠습니까? 이제 겨우 열 다섯 전후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마리아는 정말 임신이 되는 것인지, 과연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게 되는 것인지를 놓고 참으로 두렵고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민하는 그녀의 머리에 천사가 해준 말이 떠올랐을 테지요.
㰡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㰡(루카 1,36)
마리아는 문득 발길을 돌려 엘리사벳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칩니다.
㰡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㰡(루카1,42-43.45)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간 마리아는 그 즉시 확신을 얻게 됩니다. 확신에 찬 마리아가 감격에 겨워 노래를 부르지요. 바로 㰡마리아의 노래㰡입니다.
㰡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㰡(루카1,46-49)
인간적인 지식과 경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그 사실이 너무나 큰복이었음을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방문을 통해 이렇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즈카르야는 인간의 판단을 믿었다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자기를 넘어 하느님께 오로지 순종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가장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나의 지식과 경험과 미래에 대한 예측을 떠나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실행에 옮겼을 때 하느님의 은총 또한 크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성경은 이것을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게 됩니다. 그런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시지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으로는 도저히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산으로 올라가지요.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㰡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㰡(창세22,17-18)
또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로 처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순명함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여인 중의 가장 복된 여인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 나라로 들어가시어 그 분의 생애가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선택과 결단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지요. 예수님의 전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의 모든 삶을 완성시켜 주는 것이 바로 성모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고 또 성모님께서 하늘 나라로 올라가신 것처럼 우리 삶의 궁극적인 완성은 하늘나라에 이르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실업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던 어려운 시절에 한 남자가 직장을 잃고 헤매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벌이가 없이 오랜 기간 지내다보니 호주머니에는 단돈 1달러가 남아있을 뿐이었지요. 어느 주일에 이 남자는 미사를 봉헌하며 남은 돈의 반을 기꺼이 헌금함에 집어넣었습니다. 이튿날 이웃 도시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는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웃 마을까지 가는 버스 값은 1달러였고 50센트 밖에 없는 남자는 순간 고민에 휩싸였지요. 남자는 곧 기분 좋게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50센트의 여비까지만 버스를 타고 나머지는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걸어가던 그의 눈에 하나의 구인 광고문이 들어왔습니다. 1주일에 5달러를 준다는 그 광고는 이웃 도시에서 준다는 품삯의 두 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주일만에 주님께 봉헌했던 50센트의 10배를 돌려 받게 되었고 후에는 유명한 신발업체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50센트를 모자라게 해주신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또 없다고 더 인색하게 살수도 있지요. 그러나 믿고 의지하며 나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 몇 배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의 의미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의 삶은 완성되고 채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모든 것이기에 나이 들수록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죽음은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이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이 계신 하늘나라임을 확신하는 신자들의 노년은 늙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나 죽음 앞의 공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거룩한 희망의 시기입니다. 땅만 보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머리를 들어서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곳, 우리가 장차 오르게 될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07년 ‘성모 승천 대축일’ 메시지 /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 정진석 추기경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한국 교회의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상생활을 마치시고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 받으심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 기쁘고 복된 날에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게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한국교회에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우리나라가 36년 간의 일제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광복절이고 또 우리 교회는 성모님께 특별히 봉헌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성모님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안겨 줍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언제나 우리 교회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항상 하느님께 전구하고 계십니다. 과연 성모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시며 당신의 모성애로 아직도 나그네길을 걸으며 위험과 고통을 겪는 우리 신앙인들을 돌보시며 행복한 고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교회헌장 62항).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느님의 은총으로 원죄 없이 태어난 마리아는 평생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 충실하게 실천한 참된 신앙인이셨습니다. 나자렛 처녀 마리아는 동정녀인 자신이 잉태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무척 당황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온전히 맡겨 드립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위대한 신앙의 순명으로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면서도 동시에 아들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로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을 함께 가셨고 예수님의 고난에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생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가난하고 약한 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셨듯이 성모님께서도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경축하면서 무엇보다도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불안하고 혼탁한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청합시다. 주님께서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평화는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하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테러 등 생명의 가치가 경시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을 슬픔에 빠뜨린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인질납치와 살해 사건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훼손한 단적인 예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희생된 분들의 영원한 안식과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해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 생명을 볼모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자기중심적인 삶에 몰두하는 것은 세상의 평화를 위태롭게 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존중할 때 함께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특히 정치·경제·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이 희생적이고 모범적인 언행으로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람의 자세를 먼저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각 분야의 지도자들에게는 국민들의 삶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하는 더 큰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평화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겸손하게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자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세상 안에서 평화와 정의의 증거자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의 삶, 특히 고통과 수난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도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성모 마리아가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신 것처럼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누구에게나 한없는 사랑과 평화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어머니인 성모님께서도 항상 세상과 우리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사랑과 도우심으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성모님의 승천을 통해 보여 주신 하느님의 큰 은총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나의 마니피캇
-박상대 신부-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승천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회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이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달리 많은 신자들에게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전자의 3대축일이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오늘의 대축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한다. ‘성모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세상에 펼치신 인류구원사건인데 비하여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오늘의 대축일이 3대 대축일과는 달리 성서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聖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에 관한 축일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4세기 중엽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제정하여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방교회에서도 7세기초 로마의 황제 마우리씨오(582-602)가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성모 마리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날이 덕행과 믿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소망은 단 한가지로서, 천국에서 당신 아들 예수를 다시 뵙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사시다가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아가 임종할 그 때에 공교롭게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와 같이 토마 사도를 뺀 다른 모든 사도들이 모여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은 토마 사도가 급히 돌아와서, 성모 마리아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한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열어 보았더니 마리아의 유해는 온데 간데 없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마리아께서 돌아 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여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러한 영광을 마리아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성모몽소승천은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믿어 왔던 은혜로운 신앙 조목으로서, 여러 차례 성모님의 발현과, 레지오마리에의 창설과 더불어 성모께 대한 공경과 신심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온 것이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힘입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는 천주의 어머니이시며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그의 양친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신자들이 믿어야할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가장 풍요로우신 하느님’이라는 사도헌장을 반포하여, 마리아가 죽은 후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교리를 믿어야할 신앙 교의로 선포하고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로 정하였다. 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원죄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죽음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전세계의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경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 보다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업적, 그리고 공로로써 부활 승천하셨지만, 마리아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의하여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는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인간이 미구에 받게 될 부활과 승천의 원형이며 모델로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기뻐하며 기념하는 대축일의 크나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인 마리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최대의 영광과 은총은 마리아 편에서 볼 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굳건한 믿음과 겸손이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동정녀의 잉태였을망정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을 걸었던 마리아의 태도가 구세주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업에 지대한 협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는다. 엘리사벳의 찬미에 이어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노래하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알 수 있다. 주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어 기뻐했던 마리아의 겸손,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영광과 은총을 다시금 주 하느님께 돌리면서 모든 것이 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시는 마리아의 겸손, 이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덕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생활 속에서 나의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뻐 설레어지는가?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다시금 돌려 드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이 ‘그렇습니다’ 라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 곁에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 바로 우리의 마니피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을 함께 경축하면서........◆
인사말을 들을 때에(루가 1,39-56)
-유 광수신부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에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 안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복음을 보면 기쁨이 약동하는 것을 느낀다. 인사를 하는 사람이나 인사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가 기쁨의 소리를 전하고 기쁜 말로 응답한다. 그 기쁨이 점점 더 커져서 마리아는 마침내 기쁨에 찬 노래를 불렀다. 서로가 칭찬하는 말이요,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이요, 하느님이 이루신 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이 들을 때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이지만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고 또 그 말을 상대방이 이해해주고 받아주니까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나중에는 노래까지 부르게 된다.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모두가 영적인 이야기로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며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루가 복음은 이렇게 다른 복음과는 달리 기쁨을 전해주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기쁨이 점점 더 커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복음이 다 기쁨을 전해 주는 복음서이지만 특별히 루까 복음은 복음을 통해서 기쁘게 사는 이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쁨의 원천인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그로 인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즈카리야의 노래를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환호하는 천사들과 목자들의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즉 기쁨의 메아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특별히 처음 두 장에서 잘 나타난다. 즈카리야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 베틀레헴 동굴에서 울려퍼진 천사의 노래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등장하심으로써 구원이 도래한 사건을 노래하는 환희와 찬미와 감사의 표현들이다. 루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이 성전으로 돌아와 자기 눈으로 보아 온 바를 두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따라서 루가 복음의 특성은 교회내에서 복음선포의 직무와 봉사와 직책을 수행하는 선교사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이런 질문에 해답을 주는 복음서이다. 즉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할 것인가를 교육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복음 선포의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에게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고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고 노래불렀다. 복음 선포자의 영혼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이어야 한다.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이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영혼은 참으로 복된 영혼이고 아름다운 영혼이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이요, 구원된 영혼이다. 지금 나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가?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런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마리아의 영혼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내 마음이"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은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주체이다.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는 늘 주님을 찬양하고 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마리아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주어가 나에서 주님으로 바뀐다. 즉 이제부터 마리아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마리아 자신에게 이토록 큰 일들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신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을 즐거워한다는 것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열거한 것이다.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려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즉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찬양할 수밖에 없고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오래 전에 모 수녀원에서 년피정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날 마리아의 노래에 대해서 강의를 한 후 수녀님들에게 각자 자기의 마니피깟을 써서 찬미가를 불러 보자고 하였다. 수녀님들은 자기 안에서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이들을 적어 한 사람씩 자신의 마니피깟을 불렀다. 정말 아름다웠다. 정말 수녀님들의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놀라운 일이 없는데 찬양하겠는가?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왜 나의 구원자이신지를 알지 못하는데 그리고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기쁨과 찬양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놀라운 것을 체험하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큰 일을 하셨다면 나에게도 분명 큰 일을 하셨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이 없기 때문에 발견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나의 마니피깟을 만들어서 주님께 불러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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