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1894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청년 시절에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여 1918년 사제가 되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가 설립한 ‘성모 기사회’라는 신심 단체는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보급되어 있다. 콜베 사제는 한때 선교사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였다.
고국에 돌아간 그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한 사람이 탈출하자 남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뽑혀 아사 감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억울해 하는 그를 대신해 콜베 성인이 아사 감방을 자원하였다. 성인은 결국 그 감방에서 1941년 8월 14일 운명하였다. 사랑의 순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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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Amen, I say to you,
unless you turn and become like children,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Whoever becomes humble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And whoever receives one child
such as this in my name receives me.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지 못한다고 하신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된다고 하신다. 어린이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철저하게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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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다 자란 어른이 어떻게 어린이가 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른이 어린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말씀처럼, 어린이처럼 될 수는 있습니다. 어린이의 특성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당부는, 어린이처럼 우리도 하느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어린이가 편안하듯이 그러한 느낌과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살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너무 바쁘고 복잡합니다. 잘 사는 것과 바쁘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바쁜 사람이 반드시 잘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단순한 삶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절제하는 훈련을 꾸준히 반복해야 합니다.
“작은 이여, 나에게로 오라”
-임문철 신부-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제가 가장 탄복하게 되는 것은 수난도 아니고,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도 아니라, 바로 한 여인의 몸에서 한 점보다도 작은
세포 하나로 잉태되시어 점점 태아로 자라나는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신 주님이시지만
제게는 그 잉태의 순간과 태중의 모습이 더욱 경외롭게 다가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도 자신을 작게 하실 수 있는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도 당신 자신을 무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묵상할 때마다
저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기가 가장 어렵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 무언가를 위해서 작위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저절로 낮아지는 삶, 그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빈 마음
-전의이 수녀(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네 관심사는 누가 더 큰사람인가를 따지는 데 있는가 보다. 예수께서 그토록 작은 자의 길을 가르쳐 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들 중에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살던 마을 뒤편에 산등성이가 있었다. 밥만 먹으면 동네 코흘리개들이 산등성이에 몰려와 데굴데굴 구르며 놀았다. 나지막한 산소가 작은 우리의 눈에는 커다란 성처럼 느껴졌고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는 이 세상 끝인 것 같았다. 매일매일 올라타던 마을 어귀 느티나무는 발만 대도 주르륵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훌쩍 커버린 모습으로 그 산등성이를 찾았을 때 마음 안에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 크고 광활하던 산등성이를 겨우 두 폭 걸음으로 오르다니. 거인이 된 그날 내 눈에 비쳐진 세상은 너무나 작게만 보였다.
그런 비대해진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현기증이 나 쓰러지고 말았다. 세상의 온갖 잡다함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소중하고 경이롭게 보이던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비대해진 내 마음은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나보다 더 큰 이를 동경하고 또 그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느새 거인처럼 커져버린 내 마음 안에는 더 이상 주님이 머무실 공간이 없었다. 주님께서 내게 심어주셨던 하느님 나라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한 현기증에 시달릴 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주님은 작고 어린 자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다시금 큰소리가 들려왔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쉽다.” 오늘 우리 세대는 마이크로 시대다. 아마 주님은 오늘의 세대를 위해 미리 이 단어를 쓰셨나 보다. ‘작은 자’는 그리스어로 ‘미크로스(mik�v")’로, 이 말에서 ‘마이크로(micro)’가 나왔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렇게 ‘작은 자’ 곧 영적으로 가난한 비움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 황태웅 신부 -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농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나 어떠냐?”하셨답니다. 부활하셨으니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뵙는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는 주님을 더 가까이 모실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앞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12명 중에서 누가 제일 큰사람입니까? 베드로였습니다. 그 나머지 사도들의 서열은 어떻습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군대에는 계급 순이고 또 다른 모임에는 나이순이던 직위 순이던 간에 어떤 서열이 정해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서는 이것이 아주 뚜렷했고, 성전 내에서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대우를 받기를 좋아했고 모임이나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에 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거기가면 무엇으로 서열을 정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조건부터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하고 어린이와 같이 되는 일”을 예수님께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입니까? 생각이나 행동의, 한마디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다인들이 추구해왔던 것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살아가던 삶의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그 방향을 돌리라는 말입니까? 그 대답은 확실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중에도 착한 어린이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아니한 어린이도 있고, 또 어린이들도 다투고 속이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신체적 어린이를 말씀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냥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하지 않으시고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어른들 가운데 한 어린이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뽑아놓고 가까이 하시던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이름도 없고 몸집도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택되고, 내노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던 신체적으로 또 어떤 면으로 보나 보잘것없는 어린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성숙한 남자들 가운데 서 있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도 없고 자신만만하지도 않는 작은 어린이, 이런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장한 사람이 다시 유아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신체적인 어린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어린이입니다. 이러한 어린이가 되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야 누가 현명하고, 뛰어나고, 자신만만하고, 성숙된 사람으로 자처하겠습니까. 보잘 것 없고 도움이 필요하고 보호를 받아야 할 자신을 잘 알면서 높은 자리다툼을 하고, 큰사람 작은 사람 따지겠습니까?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그 도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해 질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의지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 도우심을 잘 받아들입니다. 오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항상 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여럿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중에서 “누가 더 큰사람이냐”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데 앞선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 29) 하시면서 스스로 겸손한 분, 어린이와 같은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또 병들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 받고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이 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법칙으로 주신 “작은 사람이 큰사람이 되고, 큰사람이 작은 사람이 되는 법칙”은 세상 종말에도 적용이 됩니다. 또 결코 지키기 쉬운 법칙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고 또 저기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서 꼭 지켜야만 합니다.
삶을 향한 죽음, 순교
-양승국신부-
순교자들의 생애, 생각할수록 신비스럽습니다. 보통 사람들 눈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순교자들께서 잠시 지나가는 눈앞의 행복, 눈앞의 이익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참된 행복, 영원한 상급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순교 과정에서의 이루어지는 현실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순교자들의 영웅적 순교를 통해 풍성한 에너지를 얻어왔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거룩함의 절정에는 항상 순교자들이 계셨습니다. 하느님 백성들은 순교자들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영웅적 투신에서 새로운 삶의 불꽃을 지피곤 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영원한 삶을 위해 스스로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순교는 어쩌면 삶을 향한 죽음인 것입니다. 더 큰 삶, 더 큰 인생,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한 현재의 죽음인 것입니다.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는 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는 자신의 순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가장 확실히 참여하게 됩니다. 순교자는 자신의 순교를 통해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역시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종착점은 결국 소멸입니다. 죽음입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절대로 헛된 죽음, 개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활활 불타오른 한 인간의 가장 숭고한 선택이 순교입니다. 사랑 없이 절대로 순교할 수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결실이 순교인 것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이 확정되었을 때, 얼굴이 사색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빛났습니다. 사형언도를 받고 난 순교자들은 큰 목소리로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응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장 33절)는 예수님의 위로가 순교자들에게 지속적인 격려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순교 역시 특별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자신의 눈앞에서 살고 싶어 울부짖던 한 형제를 대신해서 순교당하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살고 싶어 울부짖던 그 형제와는 달리 죽고 싶어 외치셨습니다. 그러나 콜베 신부님께서 선택한 죽음은 영원히 살기 위한 죽음, 더 큰 행복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이왕이면 수많은 사람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어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순교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콜베 신부님께서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순교하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모습은 어찌 그리도 착한 목자의 모습을 꼭 빼닮았는지요? 살찐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에 더욱 관심을 지니셨던 착한 목자가 바로 콜베 신부님이셨습니다.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한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죽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해 죽지 못할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 비록 단 한 사람을 위해 순교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인 전체를 위해 순교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인류 전체를 위해 순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콜베 신부님의 순교는 더욱 특별하고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자가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저도 과거에 어디가면 순교할 수 있나,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언제 순교할 기회가 안 오나 간절히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있더군요. 이 시대 순교의 또 다른 얼굴은 희생입니다. 양보입니다. 내려감입니다. 비움입니다. 물러섬입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 영원히 행복하기 위해, 영원히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하루되길 바랍니다.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권오광(한국파트너십연구원·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회장)-
우리 부부는 큰아이 하나만 낳고 그만 낳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큰애가 다섯 살이 되면서 동생을 낳아 달라고 조르다가 성모상만 보면 성당에서나 집에서나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집에서 기도를 가르치며 “기도할 때는 두 손을 앞으로 곱게 모으고 기도하는 거란다”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딸아이의 얼굴이 환해지자 “무슨 기도를 했냐?”라고 물었습니다. “동생 낳아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손을 주셔서 감사하다고요”라고 대답하기에 “어째서 손을 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하니?” 하고 묻자 “손이 없으면 기도를 할 수 없잖아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도는 손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섯 살 어린아이가 자기 ‘소원을 빌기 위해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할 수 있다’는 감사를 드리는 이 순수한 마음과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주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이 바라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나약하고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권능 앞에 모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나 스스로가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교만과 아집, 경험에 입각한 고정된 관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살다보면 무엇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어딘가에 잘 둔다고 한 것을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서랍 저 서랍, 여기저기 뒤지다가 나오지 않을 땐 남을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그 물건을 발견했을 때, 그 당혹감으로 인해 가슴을 칠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 잘 보관하고서 다른 사람을 의심했구나.’ 물건 하나를 잃어버려도 이처럼 다른 사람을 의심하기까지 하는데,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주인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한국천주교회는 양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양적인 성장만큼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새로 교회에 발을 내딛는 신자들의 양만큼 쉬는 교우들. 그래서 교구마다 성당마다 쉬는 교우들을 다시 성당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매력을 느꼈던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나면 그 매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개신교 신자들은 따뜻한 난로인 반면 천주교 신자는 차가운 돌멩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요?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 교리교사의 주입식 교리가 쉬는 교우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다행히 교구마다 소공동체 모임이 활성화되고, 소공동체에서 예비자들과 함께 교리를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신선한 희망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겸손은 신앙의 열쇠
-부산교구 오남주 프리모 신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가면서 끊임없이 갖게 되는 것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를 통해 상대방이 나에게 인상 깊게 풍겨주는 장점을 말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장점 중에 장점은 겸손의 덕목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성품을 가진 사람치고 누구에게나 호감과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주위에 적이 없고 모든 사람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겸손과 신앙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앞에서 들은 성경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 가봅시다. 예수님은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남을 속이지도 않고 앞뒤를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순수함의 상태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하느님 앞에서 겸손을 이런 어린아이에게만 있는 순진무구함에다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 원죄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느님에 대한 교만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 짓는 여러 종류의 죄는 모두 교만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교만심을 거두어내지 않으면 절대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마태오 11,25에 기도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역시 마음이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을 바꾸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만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이런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부하군인 백 명을 거느린 로마군 장교 백인대장의 얘기가 그 한 예입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집안의 종이 중풍에 걸려 신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직접 뵙고 자기 종의 치유를 간청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식민지 이스라엘을 통치하러 온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신분상의 우월감이나 사회적인 특권의식도 없이,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 위신이나 체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기 종의 병치유를 위해, 예수님 앞에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란 말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의 이런 겸손의 마음은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이와 같은 그의 신앙은 예수님을 가장 인격적으로 만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백인대장에게 있어서 그의 겸손은 예수님께로 가는 신앙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백인대장과는 반대로 평소 돈독한 신앙인으로 자부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칭 열심하다는 신앙심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언제나 교만심과 쓸데없는 아집에 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가장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내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흔히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된다는 뜻으로 통합니다. 현세에 대한 가치욕망으로 그 마음이 꽉 차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머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은 이 마음속에 꽉 찬 세상 가치들을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즉 겸손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울 수 있는 것과 통하지요.
돈과 과학기술이 하느님 대신으로 우상화 되어 있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렵겠지만 누구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첫 관문을 따주는 내 안의 열쇠와도 같은 겸손지덕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구대교구 김충귀(베드로)신부-
수력발전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생기는 낙차를 이용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낙차가 크면 클수록 전력은 더욱 세어진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높은 곳의 하느님 능력이 사람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해서
낮추면 낮출수록 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람과 사회의 논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더 높은 곳에 있고 대접받으며 잘 사는 것처럼 보이고
더 적게 가지고 더 적게 배운 사람이 낮은 곳에 있으며 잘 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나 그 자녀들에게 더 많이 가지는 방법,
더 많이 아는 것에 대해 살아가는 모든 정신을 집중합니다.
참인간으로서의 삶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남에게 뒤쳐지지 않고,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배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그것만이 사람이 살아가는 유일한 것인양 너무 바쁘게 바쁘게들 삽니다.
정작 우리가 추구하며 우리가 가져야 할 인간성을 잊어버린채,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깐 나도 내 자식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뒤쳐지지 않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이들은 적당히 무시하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한 이들과 더 배우지 못한 이들도 그들의 탓으로 돌리거나
무관심하게 함께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의 이러한 삶의 논리와는 다르게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며,
당신을 따라 사는 이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 누구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저는 지금 나의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금 살아가는 곳에서 바라보는 눈높이를 낮추는 것, 세상에 대한 기대치와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세상의 눈높이를 낮추어야 그 낮아진만큼 나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눈높이가 낮아져야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고, 하느님을 느끼고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며,
그들도 나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낮추어진 나를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높이를 낮출줄 알고 자신의 기대치를 낮출줄 안다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이 더 이상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아님을 알게 되며
그들도 똑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숨울 쉬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녀 데레사에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합니다.
“눈 앞에 있는 이 높은 환난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성녀 데레사가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뛰어 넘을 수 없으면 밑으로 빠져 나가세요”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주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가장 하찮고 낮은 종 같이 되심으로써
가장 부유하고 가장 귀하며 가장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기대치와 눈높이를 우리 삶의 목표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런 나를 통해 높은 곳의 그분께서 당신의 그 놀라운 능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시면서 여러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눈높이를 하느님께로 맞추어 보시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기대치를 하느님의 기대치로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이 마음을, 이 상황을, 이 느낌을 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하루의 걸음걸음들이 그분의 나라를 걷는 삶 되시길 미약하나마 기도로써 함께 합니다.
의인이신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박상대신부-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마태오복음 18장은 교회공동체를 위한 설교집성문으로 통한다. 공동체설교에는 모두 7개의 교회규범이 들어있다. 그 7개를 차례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1-5절), ②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 ③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절), ④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 ->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삽입(12-13절), ⑤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잡아 주라(15-17절) -> 매고 푸는 권한 확대(18절), ⑥ 두 명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19-20절), ⑦ 몇 번이고 용서하라(21-22절) -> 무자비한 종의 비유 삽입(23-35절)이 그것이다. 오늘 복음은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잡아 주라는 것과 두 명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언뜻 보기에 오늘 복음의 두 규범은 서로 다른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규범을 서로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형제가 ‘너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우선 가해자와 피해자가 단둘이 만나서 그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다. 여기서 ‘너’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잘못이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잘못이다. 물론 한 신자의 모든 잘못은 그것이 공적이건 사적이건 간에 교회 전체와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과 관련이 있다. 잘못을 한 형제가 타이르는 말을 들으면 일단 거기서 사건은 마무리되지만 말을 듣지 않을 경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복수증인을 택하라는 것이다. 증인을 복수(複數)로 택하라는 지시는 이미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관습이다.(신명 19,15) 죄인이 증인들의 말도 듣지 않을 경우는 3단계로 넘어간다. 즉 교회 앞에 데려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마태오복음공동체를 의미하는 지역교회를 말한다. 죄인이 교회당국의 말도 듣지 않으면 최종 단계로 넘어간다. 최종단계는 죄인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 지역교회에서 추방하거나 파문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다른 신을 믿는 이방인들이나 로마제국을 위한 세리들을 업신여기고 냉대하며, 그들과 절연(絶緣)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였다.(마태 5,46-47; 6,7 참조)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친구로 지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태 11,19) 교회당국이 최종적으로 죄인을 추방하고 파문하는 권한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권한(마태 16,19)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오는 이 권한을 제자들 모두에게 확대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 전체에까지 확대시키고 있다.(18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잘못한 사람을 단죄(斷罪)하는 일은 이미 산상설교를 통해서 금지되었다.(마태 7,1-5) 그 이유는 자신도 단죄 받기 않기 위함이며, 하느님 앞에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오가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확대시키는 것은 그 권한을 제한하려는 역설(逆說)이다. 내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느님께서도 하늘에서 매거나 푸실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태오가 비록 자신의 공동체를 위하여 한 죄인을 다루는데 1~3단계의 과정을 제시하고 최종단계로 파문을 지시하고 있지만, 마태오 자신은 공동체 안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을 바로잡아 주라’는 규범은 ‘둘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과 연결된다. 즉 죄인을 만나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19-20절) 따라서 둘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아버지께 청하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복음(福音)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는 예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는 의인들과 선인들이 많다. 하지만 지상교회는 그들만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공존한다. 누가 죄인인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결정한다. 교회의 의인들은 보통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는 죄인들뿐이다. 따라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죄인들을 골라 최종적인 처방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인 자신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함께 모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면 그 안에 오로지 의인이신 예수께서 함께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는 꼭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아들의 기도를 아버지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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