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Amen, I say to you, he will gird himself,
have them recline at table,
and proceed to wait on them.
충실한 종은 깨어 있으면서 주인이 언제 올지 항상 준비하고 있는 종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건 깨어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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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질의 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물질의 힘만을 믿었다가 주저앉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소리 없이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그분의 힘 속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종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든 이를 향한 칭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은 늘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늘 깨어 있으며 준비하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너무 늙어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그는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의 믿음을 묵상하며 이번 한 주간을 지내도록 합시다.
내 마음은 어디에
-임문철 신부-
얼마 전 사제연례피정 중 성당에서 모처럼 잠심에 들어가려는데, 모기가 귓가에서 앵앵거렸습니다. 손으로 쫓아내고 다시 고요 속에 머무르려는데 금방 또
앵앵거리며 떠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산책길에
나섰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문득 제 자신이 모기만도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기는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데,
손으로 쫓는다고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저는 내 생명의 원천이며 주인이신 주님을 찾는 데 금방 싫증을 느끼고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 다른 생각이란 게 대단한 게 아니라, 고작해야 제가 좋아하는 운동인 경우가
많습니다. 몇 주 전부터 윈드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파란 바다에서
바람을 맞으며 물살을 가르는 맛에 흠뻑 빠져들어 있는 찰나였습니다.
윈드 서핑을 하려면 바람의 상태가 좋아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성당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지부터 먼저 살필 정도로 열성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주님 생각하면서 잠이 들고, 아침에 눈 뜨면
처음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어야 하는데,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좋은 경치를 대하면 함께 거닐고 싶고,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제일 먼저
주님과 대화를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야말로 “살아?주님과 함께, 죽어도 주님과 함께”가 되지 않겠습니까?
깨어 있기
-서울대교구 김영국신부-
학창시절에 시험 때가 되면 밤잠을 포기하고 공부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제대로 실행한 적은 없고,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하며 며칠씩 밤낮으로 깨어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복음 말씀을 포함하여 오늘의 모든 성경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깨어 있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기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음으로써 눈앞에 다가온 ‘현실’의 이면까지도 꿰뚫어 보고 올바르게 대처함을 의미합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었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그 밤”(지혜 18,6)에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지시에 따라 떠날 준비를 하였던 것은, 파라오라고 하는 절대 권력자의 지배 하에 강요되던 노예생활이 ‘현실’의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느님만이 참된 ‘현실’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제2독서(히브 11,1-2.8-19)는 깨어 있는 삶은 혹독한 시련의 삶이기도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을 약속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히브 11,8) 길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어렵사리 얻은 외아들을 봉헌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깨어 있는 삶을 살았던 구약의 수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믿음만으로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히브 11,13)처럼 살다가 떠난 이들이지만 이들은 결코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복음 역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관점에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사를 받아 교회 안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크고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하는 말씀도 있습니다(루카 12,41-48).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언젠가 돌아오실 주인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셈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 삶의 바탕인 시간은 어느 순간이나 하느님의 영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은 이 사실을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른다”,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합니다(루카 12,39-40). 하느님은 언제라도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잘잘못에 대해 판결하실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섬세한 감각’을 통해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희망하며,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기다림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지난 주 복음이 재화(富)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이번 주 복음은 시간(기다림)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제시하십니다.
첫번째 비유는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태도에 대해, 두 번째 비유는 집에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집주인의 태도에 대해, 세 번째 비유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다스리도록 책임 맡은 관리인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는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들 모두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어떤 기다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이런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기다림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루가 12,38). 기다림 속에서 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의 현존을 맞아들일 준비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준비 행위는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이 상징하듯 우리의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하는 우리의 그릇된 욕구를 거슬러,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기다림은 미래의 시점을 가리킬 뿐 아니라 현재의 시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루가 12,42-44). 기다림은 막연한 것만은 아닙니다.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 쌓이면 확고한 희망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현재의 순간에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요한 묵시록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 3,20).
주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과 만남, 생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에 지쳐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내고”(루가 12,45) 있지는 않습니까? 권력에 대한 남용,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무절제, 시간에 대한 허비와 게으름 등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만 기다림 속에서, 이런 본능에 지배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이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향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더왕은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뒤에 동방 원정을 시작으로 유럽과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세계 문명의 조류를 바꾸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까지 호칭되기에 이른 그도 32살 나이로 바빌론에서 운명을 달리하였지요.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한 알렉산더는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내가 죽은 후 나의 시신을 관에 넣어 묻을 때에는 내 양손을 밖으로 내놓아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라."
놀란 신하들이 되물었지요.
"아니,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분부를 내리십니까?"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도 죽을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통일한 뛰어난 인물도 결국에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단지 재산 관리인에 불과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다시 거두어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고 심판에 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란 그 사람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지요.
'왕이 왜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것일까?'
겁에 질린 그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함께 가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제일 친했던 첫번째 친구는 부탁을 꺼내자마자 못 가겠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가긴 가는데 왕궁 앞까지만 같이 가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함께 가주겠으나 왕의 대전까지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친구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갈 것을 흔쾌히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소환에 기꺼이 함께 응하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갈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 첫번째 친구는 평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재물입니다. 재물은 죽는 바로 그 순간 나를 떠나버립니다. 왕궁 앞까지만 간다고 말한 두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구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무덤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덤에 같이 묻힐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같이 간다고 했지요. 그는 우리의 육신을 말합니다. 무덤 속까지는 같이 가서 썩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왕 앞에까지 함께 가겠다고 나선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그가 평소에 가장 멀리했던 자선과 선행이었습니다. 자선과 선행은 내가 심판을 받을 때 끝까지 하느님 앞에까지 함께 따라와 나를 변호해 준다는 것입니다(탈무드).
심판을 준비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나는 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을 얼마나 쌓고 있습니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는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무서운 말씀으로 심화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 가르쳐 드려야할 것을 제가 공연히 가르쳐 드렸나요? 아니지요. 우리에게는 알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늘 깨어 준비하여 언제든지 주님 앞에서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항상 깨어있는 삶
1. 성서이야기
지혜서는 집회서와 더불어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입니다. 제1독서 지혜 18,6-9는 이집트 맏아들들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의 젖먹이들을 수없이 죽인 죄로 징벌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의 중재로 재앙을 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 11장은 그 유명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반영하는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근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믿음의 빛에서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2,32-48에는 다섯 가지 각기 다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33-34절)의 의미는 마르 10,21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을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35-38절)는 주인이 언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든지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듯이 제자들 역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입니다. '도둑의 상징어'(39-40절) 역시 인자가 도둑처럼 생각지도 않는 시간에 오실 것이니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청지기 종의 비유'(41-46절)는 하느님 나라 비유로써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모르니 항상 깨어 봉사할 준비를 갖추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루가가 지도자들에게 새롭게 적용한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종의 상징어'(47-48절)는 예수께서 율법에 정통한 율사들과 율법에 무식한 백성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 율법을 잘 아는 율사들이 백성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늘 깨어 있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루가는 청지기 종의 비유에서 한 사람의 종이 충성과 불충 둘 사이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며, 이 종은 결국 자신이 결정한 행동에 따라 주인에게서 전혀 다른 보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루가는 이 비유를 지도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예수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지도자들은 결코 게을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비유가 마태 24,45-51에 나오는데 여기서 마태오는 지도자들에게 "제 때에 교우들에게 양식을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제 때에 교우들에게 주어야 할 양식은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종말 지연을 핑계로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예수 재림의 지연은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을 가려내는 시금석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인들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키는 일에 게을리 행동한다면 비유에 나오는 불충한 종과 같을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준비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 종이 주인의 뜻을 잘 몰라 행하지 않는 종보다 벌을 더 받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몰라서 행하지 않는 일반인들보다 엄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48절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누구든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더욱 더 청하실 것입니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겠다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오늘의 주제는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은 하느님께서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준비하시고 실현시키시며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느 때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서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제1독서: 지혜 18,6-9: 하느님의 약속을 분명히 깨달았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일어났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의 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수백 년 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믿음’에 근거하고 믿음으로부터 계속적인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해, 역사를 통해 완성돼 나가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직 도래하여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다.
복음: 루가 12,32-48: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 역시 지난 주일복음과 같이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고 이 세상의 재물에다 자신의 보증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다(32-34절). 이렇게 재물과 재화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내용은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르는 ‘집주인’을 깨어 기다린다는 내용(36절)과 연결되고 있다. 즉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현실적으로든 미래에 있어서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지상의 재물로부터의 자유보다도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에”(40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순간에 나타나게 될지 모르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자유롭고’ ‘깨어있는’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35-36절).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여행이나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즉 움직이기에 편하도록 하는 것이다. ‘등불을 켜놓는 것’은 한 밤중에 갑자기 주인이 돌아올 때 필요하다. 종들의 이러한 태도는 겁이 난다든지, 염려스러워서 취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그 종들의 시중을 들어주리라는 사실이 입증하듯이 기쁨에 차서 취하는 태도이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예수님은 특히 수난사에서 ‘야훼의 종’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40절)는 이 권고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오는 그 빛에 기쁘게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어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다.
충실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1-48절).
이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관리인처럼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진정한 ‘주인’에 대한 기다림이 이미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으로 항상 종말론적 ‘심판’ 아래 놓여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8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내용이 그들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 자체가 지배와 권세의 도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제2독서: 히브 11,1-2.8-19: 아브라함의 신앙
2독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약속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던 믿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선조들의 믿음은 그 ‘약속 받은 땅’이 장차 얻게 될 천상 고향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다림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다. 항상 우리에게 오시고 계신 그분을 우리가 항상 알아 모실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질 수 있는 삶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항구한 신앙으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과 같이 우리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깨여 준비한다는 것은!
-수원교구 이상선(요아킴) 신부 -
중국 당나라 때에 노생(盧生)이란 사람이 세상을 유랑하다가 ‘한단’이라는 마을의 주막에 머물게 되었다. 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노생은 어여쁜 처녀를 만나 결혼하고 자녀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출세도 하여 재상(宰相)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렇게 신나게 살고 있는데 귓전에 ‘어서 일어나 식사하라’는 말에 깨어보니 꿈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밥 먹으라’는 소리에 그토록 생생하던 현실같은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음식이 나오는 잠깐 사이에 그는 인생을 다 산 셈이 되었다. 노생은 얼마나 황당 했을까. 흔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하듯 노생의 일화에서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 유래한다.
요즘 ‘웰빙’(well-being)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사전적으로는 ‘복지’(福祉)의 개념이지만, 몸과 마음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시켜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다양한 노력에 관한 문화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인간에게 최적의 상태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생활로 웰빙이 오인되기도 한다. 몸이 허약한 사람은 건강을 돌보아야 하고,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은 때때로 일손을 놓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휴식해야 한다. 생사가 달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템포에 맞춰 삶을 평화스럽게 유지하려는 내·외적 노력은 현명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오늘 복음말씀의 묵상은 짧게 ‘깨어 준비하라’로 요약된다. 종말에 다가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도 가르치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비유를 들어가시며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원한 삶을 위하여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을 원하시는 사랑의 권고 말씀이다. 의롭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농부가 이른 봄에 일년 농사를 준비하는 것만 보아도 매사에 합당한 준비는 마땅한 삶의 원리이다. 살아가면서 한두 번쯤 준비의 부족으로 낭패를 본 경험은 있지 않을까? 하물며 구원을 향하는 신앙인들에게 ‘깨어 준비하는’ 삶의 자세는 필요충분조건이라 할만 하다. 찬미와 기도와 감사와 봉헌과 봉사가 몸에 배인 신앙인은 남의 말이나 행동에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대처한다.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삶이 질서 있고 마음에도 여유가 있어 사랑을 베풀게 된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은 날’에 오신다는 말씀은 긴장과 초조 속에 살라 하심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헤아려 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삶에 깊이 현존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 날’은 그 언젠가가 아닌 지금 살고 있는 현실과 일상이다. ‘한단지몽’에 매이거나 재물과 명예만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그릇된 가치관에 편승하지 않고, 참신한 영성생활의 일상 가운데 살아간다면 주님 보시기에 ‘깨어 준비하는 삶’이라 하겠다. 때문에 균형 있는 영적건강(spiritual health)과 화목한 인간관계의 성장을 경주해야 한다. ‘깨어 준비하는 삶’이란 영혼과 육신이 건강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며, 냉담하지 않는 복음적 생활이 아니겠는가.
믿음은 기다림의 준비
-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오늘 1독서에 봉독된 지혜서의 저자는 에집트에서 살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지금은 고국이 그리스의 속국이 되어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언제고 이루어진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처럼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믿었으며 지금 당장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백 년 후, 아니면 천 년 후에라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성취되리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그런 애절함 때문에 숭고한 것입니다.
2독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사람은 진정 무엇을 바라보고 또 희망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가치 가 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인 그리스도께 우리의 미래를 걸고 있을 때 우리는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용기를 갖게 됩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하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약속이 성취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충실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준비는,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 등불을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 주인이 가져오실 위대한 선물 때문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즉 보다 높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 보다 낮은 재화를 나누고 베푸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결혼이나 회갑처럼 미리 날짜와 시간을 받아 놓고 기다리는 것이며 둘째는 어떤 돌발적 인 사고나 죽음처럼 시간과 날짜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첫째의 경우는 정도 이상으로 준비하지만 두번째의 기다림에는 또 대단히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여름밤에 시골길을 운전하다 보면 개구리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것들이 길가에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지나가는 불빛 때문인지 달리는 차를 향해 펄쩍 뛰어듭니다. 그래서는 깔려 죽습니다. 이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갑자기 달려드는 일이기에 미처 피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괜한 욕심을 내다가 자기 명을 헛되게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으며 자기 판단이 옳다고 자신하다가 그만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숱한 교통사고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 그런 식으로 마지막 시간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선하게 살면서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은 언제 무슨 일을 당해도 떳떳합니다. 당당하며 자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를 살아도 천 년을 사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그 날을 미리 알았다 해도 선하게 살지 못했던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기만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며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언제고 잃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필요한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어려운 본당, 정말 가난한 공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재물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물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자들과 어려운 본당은 다 우리의 소중한 재물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천 원씩만 더 헌금할 수 있다면 매년 수백억 원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시골 본당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 돕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입니다. 살아가며 그때그때 돕는 것입니다.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들고 불우 이웃을 찾는다면 그는 정말 멋지게 기다리는 길을 아름답게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성실한 기다림의 자세를 갖도록 합시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유별나게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점점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지엄하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전제 군주들과 같이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인권이 소중하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높고 무서운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언어는 과거 봉건시대나 전제 군주시대에 통용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오늘도 하느님은 높고 두려운 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언어가 복음적 체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지극히 높고 심판하실, 무서운 분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야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도 내세를 보장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그런 분이면 오늘 복음의 말씀,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신앙 진리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생각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아 삽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대인에게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명을 이어받았지만 독자적으로 사는 생명체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반대되는, 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당신 자녀로 키우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오늘 우리를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어야 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자상한 생명을 살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혹은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다음 만나는 환상적인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높고 무서운 분으로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입니다. 높고 무서운 사람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무섭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군 지휘관이나 재판장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가르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나라 혹은 그분의 ‘함께 계심’을 은혜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받들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자녀답게 변하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 ‘함께 계심’을 철저히 사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은혜롭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풀어서 은혜로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향해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기 위해 준비된 모습으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재물이나 지위를 자기가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살기도 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재물과 지위는 자기 한 사람이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재물을 사용하고 지위가 요구하는 봉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한 사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아버지 앞에서 가지는 자세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 백석을 바쳐야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심청전의 용왕과 같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여 이루어드리는 것이 자녀 된 사람의 기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도 부모의 뜻을 삶으로 실천하여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자기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베푸심은 은혜로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높고 무서워서 빌고 바치지 않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베푸시기에 우리도 베풀고, 그분이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고치고 살리기 위해 힘씁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실현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사는 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 : 항상 ‘의식’하며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알츠하이머병으로 5년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의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분은 자신의 시한부 처지를 축복으로 이야기하면서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존재다』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우선 그동안 무심하게 행했던 모든 일들에 신경을 쓰게 되지요. 하찮은 걸음걸이에서부터 집안의 작은 꽃 한송이까지 의식하게 됩니다. 즉,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내 서랍을 다시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물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임을 자각함으로 좀 더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 분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우리의 성취와 계획,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아버리면 우리는 좀 더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삶을 놓아 버리면 역설적이게도 좀 더 충실하게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기에, 삶에 충실하기 위해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이를위해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지난 주 복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모아야 할 곳은 지상의 창고가 아니라 하늘의 창고요, 하늘 창고에 보화를 저축하는 길은 자선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후반부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뜻하고 종들은 우리 신앙인들을 뜻하는데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결혼 풍습에 대한 대강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의 혼인은 약혼기간이 끝나고 혼인날이 되면 저녁 때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집을 방문하여 신부와 손님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신랑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잔치는 일주일 정도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그러기에 이때 혼인잔치에 참석한 주인을 모시고 있는 종들이라면 주인이 돌아올 때 까지 밤낮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준비해야 하는데 이를위한 준비를 복음에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는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일할 준비, 즉, 자신의 역할을 언제든 할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하고, 등불을 켜 놓는 것은 밤에도 주인을 맞이할 수 있는 태도를 뜻하기에 언제든 주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할 사실은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종들의 이러한 자세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요 기본적인 임무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임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놀라운 칭찬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일 자체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의식함에서 우러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똑같은 행위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에 칭찬을 받는 밤중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은 것도 만일 주인이 돌아와 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행동은 의미를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기름낭비 또는 게으르다는 이유로 책망받을 수도 있는 행동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사실은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언제」 하느냐가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매일의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처지가 종들과 비슷하기에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밤중이나 새벽녘이라는 표현은 「재림의 지연」을 뜻하기도 하고, 「뜻밖의 시간」이란 의미로써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한 말입니다만 이는 오늘날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 파묻혀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경고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는데, 어떻든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분명한 현실이기에 현실에 안주하는 불충한 종(46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요, 하느님 앞에 서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매일 반복되는 나의 일상과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의식함. 아마 예수님을 맞이해야할 우리가 갖추어야 할 띠와 등불이 아닐까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옳게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묵상 길잡이
신앙이 없는 사람은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신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안다. 그분의 뜻대로 살려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참된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것이다.
1. 졸면 죽는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은 보초를 설 때 ‘졸면 죽는다.’는 표어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후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전방 철책선 근무를 하는 사람이나, 전후방의 구별이 없는 월남전이나 게릴라전에서는 너무나 절실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적(敵)을 먼저 발견하고 숨거나 선제공격을 해야 살 수 있다. 누가 먼저 적을 발견하느냐가 생사를 결정짓는 유일한 조건일 때가 많다. 매복을 할 때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째 조건은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敵)이 있는지 없는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깨어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깨어있음이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아니겠는가?
2. 내 인생은 참으로 나의 것인가?
누구나 어릴 때에는 부모형제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식주를 책임져 주고 갖가지 배려를 하며 지켜준다. 그러나 점차 성장할수록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찾고 일자리를 구하는 등 자기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각자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안목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 남자로 또는 여자로, 어떤 소질과 어떤 외모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한 바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내가 언제 죽게 될지,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철저한 불확실성에 쌓여있다. 한마디로 우리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나 자신의 모든 조건에 대해서 전혀 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의 삶은 참으로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신앙인은 인생을 제멋대로 살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간다. 여기에 인생을 사는 자세의 근본 차이가 있다.
3. 진정한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오늘 복음은 세 가지 비유를 전하고 있다.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 하인을 맡아 다스리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관리인의 비유가 그것이다. 모두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를 일깨우는 비유들이다. 그리고 나의 삶이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 언젠가는 셈을 바칠 수 있도록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관리인에게 중요한 것은 일을 맡기신 분께 대한 충성과 성실이다.
누구나 유비무환의 자세로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깨어있는 삶인가? 많은 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신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삶이 알차고 깨어있는 삶인 양 생각한다. 물론 게으르고 소극적인 삶보다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목적지를 잘못 알고 엉뚱한 곳으로 달리거나, 함께 뛰는 사람을 걸어 넘어뜨리면서 달린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기 살기로 하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은 진정 깨어있는 태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깨어있는 삶을 위해서는 가끔 멈추어 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장 완전한 거울이신 주님 앞에 우리를 비춰 보아야 하고, 진리이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 ‘깨어있음’은 진정한 유비무환이 아닐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조카의 대부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또 길을 가던 대학생이 이야기 중에 친구를 한 대 쳤는데 맞은 사람이 넘어지면서 뇌를 다치는 바람에 숨졌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침에 건강하게 나갔던 사람을 시신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을 사고 순간에서 5분만, 아니 단 1초 만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사고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서쪽으로 달려가서 지는 해를 붙들어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루카 12,39)
만약 내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안다면, 그래서 내게 단 하루 24시간이 남아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소중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분도 있겠지요. 이 세상을 떠날 사람은 남아 있는 가족이 너무 상심하지 않도록 해주고, 남아 있는 가족은 떠날 사람이 마음 편히 갈 수 있도록 해주면서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관계가 ‘만약’이라는 가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관계 면에서 깨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ㄱ)
그런데 집주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올까요? 김수환 추기경은 ‘새벽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웃 사람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일 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무지막지한 직장 상관의 모습으로, 일을 제대로 못해 애를 먹이는 동료의 모습으로, 지성·감성·의지·외모·부까지 다 갖추어 질투 나게 하는 잘난 사람의 모습으로, 출근길에 마구 끼어드는 얄미운 운전자의 모습으로, 마주쳐도 인사 한번 하지 않는 이웃 사람의 모습으로, 불친절한 점원의 모습으로, 피곤한 아내(남편)의 모습으로, 말썽 피우는 자식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볼 눈이 있다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모습’으로 오시는 주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때 만났던 한 자매님의 나눔이 떠오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저녁, 기도모임에 참석한 뒤 고속도로로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답니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시멘트 계단은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한 멕시칸 노숙자가 15달러만 주면 어디 가서 잠을 잘 수 있겠다며 구걸을 했습니다. 자신의 주머니에는 50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 있었지만 그 돈은 꼭 쓸 데가 있어 줄 수가 없고, 잔돈은 하나도 없어 난감해하다가 내려오던 교우들에게 그 사정을 말했답니다. 3명이 5달러씩 내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리고 5달러를 빌려 달라고 했는데, 교우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며 서둘러 가버렸답니다. 자매님은 순간 화가 났답니다. 기도모임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자기 식구들을 위해서는 미사예물 20달러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자매님은 그만 앞뒤 생각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노숙자 손에 50달러를 꼭 쥐어주면서 ‘이런 대접받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오늘 밤 따뜻한 곳에 가서 쉬라.’고 사과했답니다. 노숙자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매님은 그에게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는 차를 타기 위해 황망히 물기 젖은 마당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얼마 안 가 바닥에서 100달러 지폐를 주운 자매님은 그것마저 그 사람한테 주기 위해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더군요. 그날 그 자매님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노숙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ㄱ)
어떤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히브 11,8) 아브라함은 오랜 기다림 끝에 사라한테서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그는 기쁨의 아들, 약속의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믿음이, 기다림이 최고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련을 즉각적인 순종으로 통과했습니다.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히브 11,9)에서 보듯 아브라함의 삶의 자세는 언제나 하느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즉시 응답할 태세를 갖춘 준비된 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순종은 하느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듯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즉시 문을 열어드립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ㄱ)
사랑 나누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믿음의 기다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동물들이 불이 붙어있는 둥근 고리 속을 통과하는 장면입니다. 대개의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불을 무서워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동물들이 자신의 큰 두려움인 본능을 뛰어넘어 불이 타고 있는 고리 속으로 달려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같은 놀라운 힘은 불 속에 뛰어든 후에 주어지는 보상이나, 혹은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훈련이나 체벌이 아니라,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의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물에게는 이제껏 조련사가 훈련시키는 대로 해서 목숨이 위험했거나 손해를 당한 적이 없다는 믿음, 죽을 위험으로 내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불 속으로 뛰어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체험을 합니다. 누군가 가족들과 언짢은 일이 있은 뒤 성당에 나왔는데, 그날 따라 성경 말씀이나 강론 말씀이 가족 간의 사랑과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면, 그 말씀이 꼭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다는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꼭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다”가 아니라, 분명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매일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삶의 조언과 생명의 길을 안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 위험에 처할 명령이나 손해 볼 일들을 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 ,8)
동물들도 조련사를 믿고 그의 명령에 본능을 뛰어 넘어 따릅니다.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명령과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따라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랑의 기다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 35~36)
그런데 이 같은 기다림에 앞서 하신 말씀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 33) 입니다.
참된 기다림이란 무턱대고 넋 놓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이며, 그럴 때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같은 실천적 의미의 사랑의 기다림에서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박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분은 1940년 방글라데시 치타공 시에서 태어나 치타공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반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 뒤 조국 치타공 대학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 1974년 방글라데시에 엄청난 기근이 몰려 왔을 때, 그가 강의하던 치타공 대학 인근 조브라 마을의 참상을 보며 마을 주민 42명에게 주머닛돈 27달러를 빌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1983년 방글라데시 말로 ‘마을’이란 뜻인 ‘그라민’ 은행을 설립합니다.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담보나 보증 없이 소액 융자를 줌으로써, 지난 26년 간 방글라데시의 인구 10%를 넘는 240만 가구가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무하마드 유뉴스’ 교수는 대학 강단을 뛰쳐나와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동거동락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죽는 데에도 여러 방식이 있지만, 굶어서 죽는 것처럼 끔찍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경제학 이론을 가르치면서 보였던 그 열성을 기억한다. 그리고선 이 모든 이론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늘 주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 하신 것은, 진정 사랑의 실천으로 당신을 기다리라 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준비할 기다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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