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Margaret K 2007. 8. 11. 01:33

   2007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클라라 성녀는 1193년 로마 근교의 작은 도시인 아시시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같은 아시시 출신인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향을 받아 수도 생활을 결심하고서 그의 청빈 생활을 뒤따랐다. 당시 어느 수도회보다 엄격하고 가난한 수도회인 클라라 수도회를 창립한 성녀는 기도와 선행의 삶을 살았다. 1253년 8월 11일 아시시에서 세상을 떠난 클라라는 2년 뒤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태  17,14-20)

 

Amen, I say to you, if you have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ill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t will move.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유다인들은 간질병과 같은 무서운 병은 마귀의 소행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간질병에 걸린 아이에게서 마귀를 몰아내셨다고 성경은 전한다. 제자들이 자신들이 아이를 치유하지 못한 이유를 묻자, 스승께서는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답하신다

 

☆☆☆

 

 야고보 씨는 30년 넘게 시골 병원에서 환자를 보살피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인근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소탈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분이라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야고보 씨는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였습니다. 그의 편안한 웃음은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연로한 그이건만 환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줄을 잇습니다.
야고보 씨의 말은 늘 긍정적입니다. “별거 아니야. 심한 병이 아니니까 곧 나을 수 있어. 힘내.” 자식에게 타이르듯 그의 말에는 늘 정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환자들은 힘을 얻고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의술보다는 인술이 사람을 낫게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제자들의 이 질문에 대한 스승의 답변은 간결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환자에 앞서 의사가 의심한다면 아무리 좋은 약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믿음을 확고히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은총으로 함께하신다고 하십니다.

 

 

   믿음     

-임문철 신부-


 살면서 종종 치유 기도를 청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언젠가 한 알콜 중독자 부인의 요청으로 그의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두 손을 뒤로 한 채 기둥에 묶여 있었는데, 자신을 풀어달라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손목엔 피가 낭자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저렇게 묶어놓았느냐고 물으니, 남편이 정신이 말짱할 때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는 것입니다. 만일 풀어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버섯농사를 짓는 그는 멀쩡하다가도 수확한 버섯을 팔러 도시에 가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술만 먹고 지내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견디다 못한 새댁은 친정으로 가버리고, 본당 할머니들이 간신히 설득해서
데려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의 안타까운 모습에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함께한 교우들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음 날 저는 부임지를 옮겨 다른 본당으로 떠났고, 며칠 후에 그 형제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상태가 좋아졌다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날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저에게 치유의 은사가 있는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는지 따져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체험은 하느님께서 그를
치유해주시기를 청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기적은 일어난다는 소중한 진리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몽유병 환자

-전의이 수녀(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아주 오랫동안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지리하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다. 마음 안에 짙게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가 어찌나 강렬한지 차라리 불속에 몸을 던져 죽어야만 할 것 같은 몽유병을 아주 심하게 알았다. 길을 가다가 웃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 웃을 일이 뭐 있다고 저렇게 히죽거리나?’ 하였고, 이마에 내천(川) 자를 그린 채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살았던 적이 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는지 모른다. 굳게 잠겨진 성당 문 틈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위안을 삼으며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영의 탄식을 들으셨는지 하느님 섭리의 손길이 나를 꽉 잡으셨다. 버스 안에서 이루어진 어느 수녀님과의 절묘한 만남! 그분은 나를 성소 모임으로 이끄셨다. 만사를 제쳐두고 ‘두레박 모임’에 갔다. 이제 그 섭리의 이끄심이 더 확연하게 그려진다. 이 세상에 진실은 없다고,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은 없다며 어둠 속을 헤매던 이 영혼에게 당신의 말씀을 건네주셨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이 말씀을 만나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불신과 어둠으로 가득 찼던 내 영혼에 찬란한 빛이 비추어졌다. 그분 말씀 속에서 생수를 만났다. 그토록 진리를 찾아 헤매던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 참 사랑이신 그분을 만난 것이다.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랑, 그리고 나를 향한 사랑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나는 더 이상 어둠의 포승에 묶여 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이 나의 영을 빛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심한 몽유병을 앓고 있다. 우리는 간질병 환자의 아버지가 간절히 기도했던 것처럼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진실한 마음으로 간청해야 할 것이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비록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만 할지라도 그 작은 진실한 마음 안에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사랑이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슬픈 광대처럼

-양승국신부-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정말 마음에 새겨들을 일입니다. 병에 걸리면 컨디션 관리나 영양보충에 더욱 신경을 쓸 뿐만 아니라,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엘 가야지요. 정확한 진단을 받고, 그에 따른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안수도 받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은 사람 끌고 이곳저곳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굿을 벌인다, 기(氣)치료를 한다, 심령치료를 한다며 여러 군데 다니다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킨 사람들을 봅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가 반항기가 많고,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심리적, 정서적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지요. 아이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보다 집중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며칠씩 감금시킵니다. 밥도 주지 않고 며칠이고 굶깁니다. 악령을 쫓아낸다며 구타를 서슴지 않습니다.


   정말 위험한 모습들이지요. 병이나 크나큰 시련이나 감당하기 힘든 문제 앞에서 우리 인간 측의 과실이나 실수인지, 아니면 정말 악의 세력에 의한 것인지 잘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씩 우연의 일치로 선무당도, 돌팔이도, 용감 무식한 사람도 제대로 맞출 수가 있습니다. 한건 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그런 사람들 더욱 무섭지요. 기고만장해집니다. 사기충천합니다. 메시아라도 된 듯합니다. 뭐든 다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셔서, 개인적 능력 발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겸손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R)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몇 번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 후 제자들은 잔뜩 겉멋이 들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치유활동하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봐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잔뜩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마음으로 치유를 시도했습니다.


   결과는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어, 이상한데, 분명히 잘 됐는데, 이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둘러선 사람들이 의혹에 찬 시선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 사이비 아냐?’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묘기부리다 떨어진 슬픈 광대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갑자기 이토록 당혹한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대로 지적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결국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는 이것입니다. 기도가 배경이 되지 않는 사목이나 치유활동은 헛것입니다. 사이비 무당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도가 선행되지 않는 봉사나 사도직 활동은 자기과시일 뿐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당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악들 앞에서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고 그분만을 내 안에 채우고 살아가리라 서약한 사제로서, 이 성서 구절은 늘 가슴 아린 고백이 되곤 합니다. 왜 저희는 예수님처럼 예수님과 함께 아니,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 하신 약속이 있는데 어제도 오늘도 늘 그 분 앞에 그분의 바램에 미치지 못하는 약하고 무디고 어눌한 모습으로 살 뿐입니까? 비단 사제가 아니더라도 신앙인들은 늘 그분 앞에 왜?라는 의문이나 왜?라는 질문을 하게 마련인 듯 싶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던지는 그 많은 물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우리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밝혀 주십니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들이 진정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온 힘을 쏟아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왜?라는 의문이나 질문은 품지 않을 것입니다. "왜 저희는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오늘도 주변에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악들 앞에 곧잘 하느님께서는 저런 일에 왜 개입하지 않으시는가하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생각이나 그런 말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분 앞에 우리는 왜라고 물을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저지른 죄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오늘도 못 박히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고 계십니다. 그분의 그 사랑 앞에 감히 무엇을 따지시겠습니까? 마음이 산란할 때 그분을 바라봅시다. 괴로울 때에 그분의 몸에서 지금 흘리는 선혈을 기억합시다. 슬프고 힘들 때 그분 고통의 숨결, 마지막 외침을 듣도록 합시다. 그분을 알고 그분께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끝내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승리하여 주님께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능히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멘.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어야 할 믿음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간질병으로 시달리는 소년을 치유하신 기적사화를 계기로 믿음에 관한 가르침을 들려준다. 간질병에 걸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고쳐주시기를 청한다. 그러기에 앞서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다른 제자들에게 데려다 보였던 모양인데 별 효험이 없었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꾸짖으시고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아이를 단번에 고쳐 주신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께 왜 자기들에게는 그런 치유의 능력이 없는가를 묻자 약한 믿음이 그 탓이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기만 하다면 엄청난 결과를 보게 될 뿐 아니라 못 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의 정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자신의 거룩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동안(마태 17,1-13) 다른 9명의 제자들은 군중과 함께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산 아래 남아 있던 그 제자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마귀에 사로잡혀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려온다. 그러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자들이 하나씩 돌아가며 예수께서 늘 하시던 구마행위를 흉내 내어 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윽고 예수께서 3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셨다. 그러자 느닷없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하게 된 것이다.(14-16절)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복음(9,14-29)은 기적사화를 장황하게 보도하고 기적의 힘은 기도에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무리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총 16절의 긴 내용을 단 7절로 축약시키면서, 기적보다는 믿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믿음에 관한 말씀은 마태오가 완전히 개작(改作)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와 제자들을 나무라신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을 탓하시면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11,17),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12,39.45; 16,4),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진 세대’(17,17) 등으로 표현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동족을 규탄하려는 마태오 자신의 표현일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 세대의 무리와 같게 보지는 않으신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진 믿음이 너무 작다는 것, 세상의 씨들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마태 13,32)보다도 더 작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제자들이 가졌으니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그런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관한 믿음으로 바로 ‘여기와 지금’(here and now / hic et nunc)에 있어야 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며, 바로 이 시간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어야 하는 믿음이다. 제자들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치유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들 앞에 주어진 치유과제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는 ‘이 산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시는’, ‘못 하실 일이 하나도 없는’(20절) 지존의 권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겨자씨보다도 작았기 때문이다. 비록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극히 작은 원인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누구나 큰 믿음을 갖고 싶어 하겠지만 그것은 작은 믿음에서 시작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20절)부터 마음속에 간직하고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