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8일 수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Margaret K 2007. 8. 8. 01:36

2007년 8월 8일 수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도자의 꿈을 가지고 자란 그는 사제가 된 뒤 이단을 반박하는 설교를 많이 하였고, 여러 수도회의 개혁에도 동참하였다. 훗날 도미니코 수도회를 창설한 도미니코 사제는 1221년 헝가리의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려고 여행을 떠났으나 이 여행 중에 얻은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는 1234년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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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안 부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시기를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응답이 없으시다. 부인은 거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의 청을 들어주신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

 

 부모가 자녀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자녀가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선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섭섭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적을 베풀고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기적에만 쏠렸지 그 기적의 원인인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이방인 여인이 하느님의 능력을 청합니다. 마귀 들려 고통 받는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십사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매달립니다. 여인의 간청은 집요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청원에 제자들이 스승께 말하였습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제자들까지도 의아해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지혜롭게 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스라엘에 먼저 자비를 베풀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인의 겸손에 예수님께서 움직이셨습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강아지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표현이 그러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짐짓 이 말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임문철 신부-


 사제단 합동 미사를 드릴 때면 신자들이 제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제일 시커먼스예요. 제발 어느 신부님 옆에는 서지 마세요. 더 검어 보인다니까요.”
한여름 대낮에도 테니스를 즐기는 통에 관광객들이 미사에 왔다가 “동남아
출신 신부님이 우리말을 어떻게 그리 잘하느냐?”고 경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 사목을 겸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주로 필리핀과 베트남 출신들인데, 저를 자기 나라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줘서 이 얼굴도 다 주님의 섭리로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미국으로 유학 간다며 인사를 왔습니다.
잘 다녀오라면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파란 눈 애인 데리고 오면 안 돼!”
그 학생은 “걱정 마세요”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한 이야기지만
아차! 싶었습니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입으로는 잘도 말하지만 한꺼풀만
더 벗겨내면 영락없는 인종차별주의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나 잘 적응한다고 하는 중국인들도 제대로 발 못 붙이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 사람의 피부색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이인주 신부(예수회)-


 어느 정도의 간청을 ‘애원’이라 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고 있다. 그런데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며 거절하신다.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은 표현이다. 이 말씀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는 이스라엘 자손들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여인의 신앙을 알아보고 난 뒤에 당신의 입장을 정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은 첫 번째 태도를 취하실 분이 아니다.
여인은 자신의 애원을 단호하게 거절하신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아주 공손하게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씀드린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제서야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시며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다. 여인의 영적이고 지혜로운 애원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께 애원한 적이 있는가?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을 때 성당이 없어 주일미사는 호텔 강당을 빌려서 드리고 평일미사는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드렸다. 그런데도 나를 그냥 두길래 어쩐 일인가 싶었다. 얼마 후 평일미사를 막 끝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요란했다. 중국어로 시끄럽게 해대는 소리가 “빨리 내려와 오라를 받아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다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 형사 세 명이 와서 차 문을 열어놓고 타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연행이었다. 나는 “이런 법이 어디 있냐? 영장을 보여 달라. 그러면 타겠다. 그렇지 않으면 못 탄다.” “타라.” “못 탄다.” 30여 분을 옥신각신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기도를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당신께서 저를 보내셨으니 책임지십시오. 저에게 지혜를 내려주십시오.’ 그러자 곧 응답이 왔다. ‘일주일 후에 자진 출두하겠다고 해라.’ 얼른 그대로 말했더니 통했다. 지면 관계상 그 뒷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겠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얼마나 주님께 간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필요한 것을 간구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여러분! 참으로 이방 여인처럼 지혜로운 간구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녹여 그분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다.


 

 <제 딸만 살려주신다면>

-양승국신부-


   가끔씩 아주 어려운 부탁을 누군가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청원은 죽기보다 싫지만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몇 번이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어렵게 부탁합니다.


   어떤 경우,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힘들겠네요.” 이런 말과 함께 거절당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네요!”


   “그게 어떤 부탁인지 알고나 하세요?”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 역시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마귀에 걸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몹시 시달리고 있다’는 여인의 말을 통해, 그리고 처절하게도 간청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귀에 시달리는 모습, 생각하기조차 싫은 모습입니다. 한 사람 안에 마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립니다. 몇 시간이고 발작이 계속됩니다. 입에서는 하느님을 모욕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괴상한 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라도 하시려는 듯이 일부러 뜸을 들이십니다. 일부러 냉정한 모습으로 대하십니다. 묵묵부답으로 응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이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다 해도 여인은 상관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여인은 길길이 뛰고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딸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꽤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 앞에 크게 낙담하고 즉시 돌아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심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이방인들을 ‘개’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 텍스트에서는 ‘개’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강아지’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표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오직 딸만 생각합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 돼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을 향한 투철한 믿음, 철저한 겸손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던 가나안 여인은 백인대장과 함께 큰 칭송을 받습니다.


   교부들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확신하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와 똑같이 여기는 겸손...”

 

 
오늘 복음 말씀을 아내와 함께 묵상하면서

-권오광 (한국파트너십연구원·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회장)-


오늘 복음 말씀을 아내와 함께 묵상하면서 아내의 경험담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희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냈던 한 부인이 생각납니다. 남편은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고, 부인은 집에서 동네 어머니들과 꽃꽂이를 하며 세 자녀와 부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24개월짜리 막내아들은 엄마가 꽃꽂이하는 동안 엄마도 찾지 않고 컴퓨터 게임을 하며 잘 놀아 처음에는 기특하게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가 엄마와 눈도 맞추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폐아인 것 같아 급히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영등포역 근처에 세를 얻어 살며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변화는 없고 여러 기관에서 거절당하자 엄마는 직접 아이를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집안에 자폐아가 있으면 숨기는 분위기였는데다 제대로 된 치료기관도 없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시각도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어린이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여건이 여의치 않았고 치료에 대한 확신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간청으로 아이를 맡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누나 둘을 학교에 보내놓고, 아이와 함께 와서 온갖 궂은 일을 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아이를 데리고 특수교육을 하는 기관을 찾아다녔습니다. 교육비도 생활비도 만만치 않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가정을 돌볼 시간도 없이 바빴지만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주변의 냉대와 손가락질이었습니다. 하지만 꿋꿋하고 항상 밝게 웃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사정사정해서 아이를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뒤 교사와 학부모들의 눈총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운동장에서 율동하고,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노래하고 또 가르쳐 가며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영등포역에서 우연히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이를 만났는데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기쁘고 놀라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이젠 글씨도 쓰고 대답도 하고 밥도 혼자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했습니다.”이 가난하고 장애아를 둔 어머니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어머니에겐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여건이 뒷받침해 주지 않았지만 이 어머니의 믿음이 자녀를 치유하는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고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신앙인들의 삶에 은연중 배어 있는 ‘내가 다니는 성당이 훨씬 크고 좋으니까’, ‘나는 세례받은 지 오래됐어’, ‘내가 성당 활동을 많이 하니까’와 같은 겉치레로 신심을 표현하는 것에 빗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외형적인 것들은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의 자세입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겸손되이 간구하는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산교구 김홍태 베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어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다. 22절의 έλέησον은 έλεέω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에서 나온 부정과거, 명령법이다. 거기서 έλεος ‘자선’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므로 원 뜻은 ‘불쌍히 여겨 달라’=자비를 베풀어 달라. 직접적으로 “낫게 해달라,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말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말한 이유는 뭔가?

1.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병자는 하느님의 벌이었다. 그러므로 치유는 하느님의 벌에서 벗어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딸을 위해 애절하게 자비를 간구하고 있는 여인, 그렇다면 딸의 병은 어디서 온 걸까? 이 여인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이 에미의 죄 때문에 가엾게도 자신의 딸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느님의 용서를 빌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 그 다음 병이 나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죄인인 주제에 자비는 무슨 자비! 당연히 그냥 돌려보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죄인은 자비를 입을 자격이 없다고.

2. 그러면 자비란 무엇인가?

예) 나폴레옹과 한 병사의 어머니 이야기:
군법을 두 번이나 어긴 한 병사가 사형을 선고받고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병사의 어머니는 급히 나폴레옹을 찾아갔다.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네 아들은 두 번이나 큰 잘못을 범했으므로 자비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
“폐하, 제 아들이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자비란 용서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저는 바로 그런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란 그런 것이다. 자비는 그 사람의 자격을 뛰어넘는 개념으로써 용서라는 말보다 훨씬 높고 넓은 개념이다. 용서는 어떤 전제 조건이나 단서가 붙을 수 있지만 자비는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예) 마태복음 10, 24-27절을 보면, 부자가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 귀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 했다. 제자들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자 주께서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자비를 가리킨 말씀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라 부른다.

3. 이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려보내려 하든 말든 이 여인은 더욱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애원하며 애절하게 주님의 자비를 간청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걸로 되어 있다.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빵’은 구원을 뜻하며, ‘강아지’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구원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이 된다. 정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는 철저히 유다인의 입장에서 복음서를 썼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와 돼지에 비겼든 것이다.

어쨌든 마태오의 복음서에 의하면 이 여인은 그런 모욕적인 언사에도 아랑곳없이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였다. 자신의 딸이 나을 수만 있다면 어떤 말이든 못 받아들이랴. 그리고 지금 자기 딸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이 예수라는 분뿐이지 않는가! 바로 이런 극진한 모성애와 예수께 대한 믿음이 이제 응답받는다.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셨다.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청하면 응답을 받게 마련이다.

4.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어떤 믿음? 단지 자기를 낫게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믿음이라기 보다는, 보다 더 근원적으로 자기들 같은 죄인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느냐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정말 믿고 있다면 우리도 저 가나안의 여인처럼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대구대교구 장우영(요셉)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마귀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또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드리는 굳은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그 여인은 딸이 마귀 들려 시달리고 있으니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의 태도는 냉냉하기만 합니다.
소란스러이 애걸하는 여인에게 급기야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며 거절하십니다.
매몰차리만치 거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의아한 생각마저 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듯이 거절하셨을까?
또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빵 이야기를 했을까?
당시에 유다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물로 씻기도 했지만, 식빵으로 손을 닦기도 했습니다.
손을 닦은 빵은 버리지 않고, 주위의 강아지에게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가능했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실망하며 돌아갔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억척스러이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지 않습니까?”
딸아이를 낫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온 힘을 다해서 예수님께 매달리며 간청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시며 소녀를 깨끗하게 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겸손과 확실한 믿음을 보시고 딸을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이런 여인의 믿음을 갖고 있는가?
몇 번 주님께 도움을 청해 보고는
이내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은 하지 않았는가?
혹은 대답 없는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하고
아예 예수님께서 안 계시는 듯 생활하지는 않았는가?

오늘 여인의 모습과 함께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모습에 제자들조차도 눈쌀을 찌푸립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길거리에서 고함치는 여자를
버르장머리 없고 예의 없는 여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지닌 여인을 한시라도 모른척하거나 돌려보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 때문에 하마터면 그 여인은 쫓겨 갈 뻔했습니다.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쩌면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여인의 간절한 모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또한 하마터면 곡해된 모습으로 여인을 돌려보낼 뻔한 제자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혹 나의 모습 안에 오늘 제자들의 모습처럼 잘못된, 편협한 이기심으로
주위의 형제들을 소외시키는 우는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

 

  

 끈기 있는 신앙     

-서현승 신부님-

 

 예수님께서도 참 짓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을 깨려 하시다니….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소리를 지르며 뒤쫓아오다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애걸하는 여인에게 해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설정이 있었기에 여인의 답변이 빛을 발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은 딸을 낫게 하는 데 골몰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모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사 훨씬 더 심한 표현을 들었다
할지라도 여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미 집요하게 당신을 쫓으며 애걸하는 여인의 태도에서 이미 감동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단지 그 믿음을 좀 더 확실히 드러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하고 감탄하시는 예수님 음성의 떨림이 느껴집니다.
기적은 하늘이 감동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오셨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감동적인 믿음 앞에서는 당신의 원칙을 고집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킬까 고민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가서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내세울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처지에 이 여인처럼 겸손해질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겸손한 척하다가도 끈기가 부족합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는 일에 좀 더 집요해져야겠습니다.

 

 

-부산교구 임형락 신부-


 저는 신부로 살면서 가끔 신자난 비신자 분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고 믿습니까?> 생각해 보면 정말 황당한 질문입니다.

저는 그 질문에 대해서 이런 답을 합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믿고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 모르지만, 최소한 당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이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질문을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바꾸어서 신부님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 하고 물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지금 어떤 관계인가 하고 물어주십시오.>

저는 많은 신자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냉담해 지는 것을 봅니다. 아니 하느님과의 관계가 냉담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냉담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을 찾고 믿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생각 속에서 그려지는 막연한 하느님을 찾고 있고 맏고 있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설사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쉽게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열어 보여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관해 사고하는 새로운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줌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아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 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는 가능한가>라는 역서의 저자인 '존 퓔렌바흐'신부님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3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첫째, 하느님이 우리를 항상 사랑하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끈질긴 관심과 넉넉한 사랑에 언제나, 어느 때고 의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용서하신다. 내가 아무리 내 삶을 엉망으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제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있다고 느끼든 간에 나와 함께 느끼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의 태도를 눈여겨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이 열어 보이신 참된 하느님의 모습을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장하다고 칭찬하십니다.

오늘날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 새로워졌습니까? 혹시 여전히 자기 생각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고집하면서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도 교회의 일원이다.

-박상대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에 사로 잡혀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몸소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버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는 노예생활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리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로마 군인들이 이스라엘의 전역에서 판을 치며 자기 백성들을 억압하여 자유를 박탈해 갔을 때 더욱 고조되어 갔다. 자유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빨리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 제국을 무찔러 자기들을 해방시켜주고 메시아 친히 자기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 군인들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 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스스로 “나는 왕으로 군림하러 오지 않고 오히려 봉사하러 온 종이다.”라고 하신다.(마태 20,28; 마르 10,45) 모세의 율법에만 얽매여 형식만을 중요시하던 백성의 지도자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그분을 참된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예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마다 꼬투리를 잡고 올무를 걸어 씌우고 모함하여 결국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로 고발하여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하고 만다.


  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께서 오늘은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멀리 지중해 연안의 이방인들의 도시인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와 이곳에 사는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나신다. 마귀가 들린 딸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인의 도시 구석에 사는 가엾고 불쌍한, 남편도 없어 보이는 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이 갖지 못한 눈과 귀를 가졌다. 그것으로 보면 그녀는 누구보다 부자다. 예수를 알아보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주인공이다. 예수께 대한 그녀의 태도는 선민(選民)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비난 받던 한 이방인 여인의 전 생애를 건 마지막 희망이기에 이는 참된 믿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예수께서 분명히 구해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 속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여인의 계속적인 애달픈 간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의 차가운 모습을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 분은 좀더 지체하시면서 그 여인의 마음과 믿음을 살피신다. 자꾸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는 여인을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께 언질하자,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하며 맞장구를 치신다. 예수의 이 말을 곁에서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사뭇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도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의도는 다른데 있다. 예수께 다가와 꿇어 엎드려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차가운 말씀을 던지신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약속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나누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말인 것이다. 예수의 부정적인 이 말씀 가운데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나누어질 수 있다는 강력한 긍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바로 이어지는 여인의 장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인의 믿음에 찬 항구한 간청이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강한 믿음인가.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장한 믿음에 탄복한 예수는 그녀의 소원대로 딸을 치유해 주신다.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이 선민으로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구원관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 분께 믿음을 두는 자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세례를 받고 미사 때마다 그분의 식탁 주위에 앉아 있는 우리들이 바로 새 이스라엘 백성이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른다. 오늘부터 이 교회에는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도 속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아 여인아!> (마태 15,21-28)

 -유광수 신부-

 

우리는 오늘 믿음이 큰 여인을 만남으로써 정말 믿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묵상하게 된다. 교회는 이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 활성화되고, 가르침을 주고,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병든 이들이 치유 받는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큰 이 여인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하자.

 

우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라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예수님이 떠난 그곳은 어떤 곳인가? 예수님이 떠나 온 그 곳을 간단히 말하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15,8-9)라고 말씀하셨던 대로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주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눈먼 이들,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사람의 규정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가르치면서 헛되이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소에 경 읽기와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시어 이방인들이 사는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 가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지역인 그곳에서 이번에는 어떤 여인이 주님을 만나러 나왔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그곳에서 떠나 아예 믿음이 없는 지역인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셨는데 믿음이 없는 이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서 여인이 나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은 믿음이 없는 지역을 떠나 나온 것이고 예수님은 믿는 이들이 있는 곳이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을 떠나 이방인이 사는 곳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과 여인의 만남은 믿는 이의 만남이다. 비록 이방인의 지역에서 사는 여인이었지만 이 여인은 얼마나 큰 믿음이었는 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믿음이 있는 이를 찾아 나서서 결국은 믿음이 있는 이를 만나지만 그래서 더욱 큰 믿음으로 성숙되고 큰 은총도 받지만 반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 믿지 않고 입술로만 공경한다고 하는 진실한 믿음이 없는 이는 오히려 믿음이 있는 이를 떠나 보내고 "자녀들의 빵"마저도 찾아 먹지 못하고 빼앗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이는 비록 신분이 형편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도 없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은혜를 받는다. 결국 은혜는 장소나 신분이나, 지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한 믿음을 갖고 참 믿음을 계속해서 성숙시켜 나가려는 갈망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여인을 보면서 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를 배울 수 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성숙하는데 몇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이 여인은 믿음이 없는 그 곳에서 나와 믿음이 있는 예수님께로 왔다는 것이다. 믿음을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예수님께로 나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요, 모험이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이 성장되려면 이런 용기와 모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믿음이 없는 이들과 같이 어울리고 다니면 우리의 믿음은 점 점 더 믿음에서 멀어져 간다.

 

즉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들과 어울리면 나의 믿음 생활도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하는 믿음 생활이 될 것이다. 또 우리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하고 생명인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않고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복음 아닌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 나의 신앙생활도 복음이 중심이 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을 마치 복음인양 가르치며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신앙생활로 타락할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가 만나는 어려움을 잘 극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청하는 대로 금방 무엇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여인이 큰 소리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대로는 우리의 간청에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려면 예수님의 이 침묵을 견뎌내야 한다. 침묵은 무응답이 아니라 무언의 말이다. 무관심이 아니다. 침묵은 우리의 소리를 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들으려고 노력하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세 번째는 우리 믿음의 성숙을 방해하는 잡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 가
"저 여자를 돌려 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듯이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잡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자주 외딴 곳에 가 주님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네 번째는 예수님은 때로는 우리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실 때가 있다.

어떻게 들으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전혀 이치에도 맞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불신하고 조롱하는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냄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전혀 당신과는 관계없는 사람처럼 또는 귀찮아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을 때 거부하지 말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알아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또 주위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여인처럼 비록 예수님한테 청을 들였다가 오히려 모욕을 받는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가 본래 갖었던 그 믿음으로 그리고 그런 순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고
"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간곡하게 청해야 한다.


여섯 번째는 예수님이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무시하는 듯한 말씀을 하였지만 여인은 그 말씀에 화를 내거나 반항하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무조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이다.

 

아무튼 우리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숙되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을 방해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그런 장소나 분위기, 그런 말들과 행동들에서부터 떠나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믿음의 성숙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나의 믿음을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라는 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이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정녕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칭찬이 바로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