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6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Margaret K 2007. 8. 6. 07:15

   2007년 8월 6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 루카 9,28ㄴ-36)


Then from the cloud came a voice that said,

“This is my chosen Son; listen to him.”

  


 제자들은,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이는 등 스승의 갑작스런 변모를 눈으로 직접 본다. 또한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았다. 분명 이 세상의 장면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그곳에 오래 머물고자 한다. 천상의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당신의 모습을 바꾸십니다. 현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웠을까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드러내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셨습니다. 제자들의 방황도 함께 보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미리 천상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좌절하지 말라는 의도였습니다. 당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처럼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스승의 격려와 위안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체험이 없을까요? 인생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은 없을까요? 누구에게나 은혜로운 일은 있기 마련입니다. 고통으로 시작되었다가 유익함으로 마감되는 일들입니다. 주님의 개입 없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님을 믿는 이에게 즐겨 드러내시는 당신의 변모 사건인 것입니다.
은총은 예고 없이 내리고, 생각지도 않은 때에 함께합니다. 꾸준한 기도와 작은 선행이 결정적 순간에 은총을 모셔 옵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길을 가다가 ‘해병전우회’라는 팻말이 붙은 컨테이너 박스로 되어 있는 사무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무실은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해병전우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사무실도 볼 수 있지만, 차에도 해병전우회 스티커를 붙이고 다닙니다. 또한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서 교통정리 등을 하면서 이 사회에서 각종 봉사활동도 하고 있음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저는 지금까지 ‘육군전우회’, ‘방위병전우회’ 등의 간판을 본 적이 없습니다(혹시 있습니까? 있다면 말 좀 해주세요). 분명히 해병대를 다녀오신 분들보다 가장 일반적인 육군이나 또는 단기사병이라고 불리는 방위병의 숫자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전우회라는 간판은 많이 볼 수 있지만, 육군전우회나 방위병전우회라는 간판은 단 한 번도 번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할 만큼 고된 훈련과 작전을 수행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서, ‘해병대, 정말로 지겹다 지겨워~~’를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이겨낸 뒤에는 스스로 이겨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더욱 더 일치된 모습을 갖게 된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내게만큼은 제발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피하면 피할수록 나의 성장은 있을 수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고통과 시련은 나의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리고 이 축일에 맞춰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본 제자들은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지요.

사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지금처럼 교통도 좋지 않은 시절이기에 힘들게 걸어 다니면서 전교활동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너무나 바빠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지요. 때로는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서 어떤 동네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얼마나 쉬고 싶었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시고 또 거룩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 이 자리에 안주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편함에 안주하려는 제자들에게 하늘에서는 이러한 메시지가 울립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바로 예수님의 길을, 즉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의 말을 들으려고 하나요? 혹시 고통과 시련을 피하려는 안일한 마음을 간직하고 세상의 목소리만 들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께서 함께 가자는 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순간의 기쁨보다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힘들다는 말. 이제 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     

-임문철 신부-


 소신학교 시절, 친구 하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제게 말했습니다. “너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 같아. 임진왜란 때 태어났으면 훌륭한 장수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너는 알고 보면 참 괜찮은데, 첫 인상이 그렇게 험해서….”
그래서 그 이후로 저는 제 외모에 대해서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신부가 된 후 젊은이들을 위한 ‘선택’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 봉사자가
“신부님은 얼굴이 못생긴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가면을 쓰고 계셔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제 별명은 심형래 내지는 E.T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할아버지 할머니와 매일 미사를 나오는 일곱 살짜리 꼬마가
제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탄성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이렇게 잘 생기셨어요?” 아이 앞에서 쑥스러워진 저는 속으로
“짜식, 사람 볼 줄 아는 눈은 있어가지고” 하며 웃고 말았습니다.
사실 제가 잘생겼든 못생겼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이 어떻게 보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서 창조주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꼬마 아이가 저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저도
모든 사람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변모

-이인주 신부(예수회)-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말이 있다. 엉뚱한 소리를 할 때 하는 말이다.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 세 분이 만나는 것을 본 베드로는 느닷없이 초막 세 채를 지어 바치겠다고 한다. 변모가 그만큼 놀라웠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정작 그분들이 왜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안타깝다. 그분들의 만남은 천상회의였고 다른 때와 달리 심각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들의 지상 삶을 정리하는 회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느님이 파견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이것이 공식적으로 처음이다. 그 이전에 여러 사건이 있긴 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려오셨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루카 3,`21­22). 그리고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시자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
예수께서 세례 사건과 광야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부여받았다면, 변모 체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시어 면담하게 한 사건이다. 이 세 가지 체험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바꾸는 하느님 나라의 영적 힘을 받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느님 나라의 영적 체험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보고 느끼고 만났던 그런 영적 체험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 체험이 얼마나 투명하고 확실하냐에 따라 삶의 질이나 사도직 수행 능력이 달라진다. 이것에 의해 영적 투쟁의 판도도 드러날 것이다.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자연스럽게 피정을 했다. 틀에 박힌 피정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산·냇물·나무·꽃들 안에서 한 주일을 주님과 대화하면서 지냈다. 피정이 끝날 무렵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소복을 입고 나타나셔서 “아들아, 너의 길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니? 그 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도 아니지만 참으로 복된 길이야.” 하며 따라오라신다. 명동성당 성모동산에 가 보니 한 상 잘 차려져 있었다. “이것을 받아라. 이렇게 좋은 상을 네가 안 받을래?” “아닙니다, 어머니! 받겠습니다.” 상을 받고 보니 어느새 어머니는 사라지고 안 계셨다. 내 귓가로 눈물이 흘렀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이 길을 열심히 가고 있다. 그 후 힘들고 지칠 때면 그때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힘을 주시며 성모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하신다.


  

  <다시금 운명의 책장을 넘길 때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은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숨겨둔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함께 소주도 한잔 했습니다. 저보다 주량이 세더군요. ‘이 인간 도대체 언제 인간될까?’ 걱정 많았었는데, 아주 건강한 젊은이로 변화되었더군요. 기분이 너무 좋은 것을 넘어 기분이 째졌습니다.


얼마 전 운전면허에 합격해서 요즘은 차를 몰고 다닌다는데, 도로 연수중에 선생님에게 많이 혼났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저에게 있다고 하더군요.


이 친구 어릴 때 저와 함께 봉고차 엄청 많이 타고 다녔는데, 쓸데없이 자주 변속기에 손을 댄다든지, 정지차선을 넘어 차를 멈춘다든지, 순식간에 가속도를 붙인다든지 하는 제 나쁜 운전습관이 은연중에 자기 몸에 배였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제 나쁜 습관들을 따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습관 고치느라 꽤 혼났다고 하네요. 저희는 함께 배를 쥐고 웃었습니다.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 하나 없어 홀로 서느라 아직 고생이 많지만, 이제 제 몫을 다해내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아들’의 모습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변화된 ‘아들’을 바라보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녕 기뻐하실 일 가운데 하나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초보 신앙인에서 보다 깊이 있는 신앙인에로의 변화, 이기적인 신앙인에서 이타적인 신앙인에로의 변화, 자기중심적 신앙인에서 하느님 중심적 신앙인에로의 변화를 보여드리는 것, 어쩌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향기로운 선물이 될 것입니다.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에로의 탈바꿈되는 것, 그저 그런 지지부진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 영양가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봉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와 끊임없이 작별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에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일, 낡은 틀을 깨고 나와 새롭게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정녕 행복해하실 일이리라 확신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날 좀 그만 놔둬’ ‘그냥 이렇게 살다 죽게 놔줘’ ‘한 평생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늦었지’ 이런 말들 그만 하면 좋겠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 삶이 너무나 하찮아보일지라도 ‘변화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는 우리의 바람처럼 그렇게 빨리 다가오지 않습니다. 회개 역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랑비처럼 다가오는 것이 변화요 회개라고 저는 믿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실 주님, 우리를 한 차원 높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주님, 우리의 얼굴을 해맑은 천사의 얼굴로 변모시켜주실 주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매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해봅니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이제 모진 비가 그치고 태양이 다시 떠오릅니다. 또 다른 희망의 바람이 절실한 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의 책장들을 넘길 때입니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 좀 더 변화되기 위해 힘차게 일어설 때입니다.

 

"내적 신비 체험"

-이수철신부-

내적 신비 체험이 없으면

단조로운 반복의 일상을 깊이 있게 살아내기 힘듭니다.


알게 모르게 이런 내적 신비 체험이 영육에 활력을 주며,

날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합니다.


오늘 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 밤의 환시를 통해

옥좌에 계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 할 수 있는

종말의 주인공인 사람의 아들을 체험합니다.

 

고단한 예언자의 삶에 크나큰 활력소와 위안이 됐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십자가 길의 여정에 지친 당신 세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산상에서의 공동기도 중

당신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시키십니다.

 

여기 피정하러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이 바라는 바도

이런 내적 주님의 체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 체험은 결코 비상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인도 하에 산상에서의 평범한 공동기도 중

주님의 영광을 체험한 세 제자들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수차례의 공동기도와 미사를 통해

알게 모르게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며 날로 변화되어 갑니다.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주님의 체험이 평범하면서도 깊이 있고,

건강하면서도 안전한 내적 신비체험입니다.

 

수도 교부 카시아노는

열렬한 마음으로 바치는 공동 시편기도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며

하느님을 체험하는 참 좋은 관상기도라 했습니다.

 
새삼 우리의

공동기도와 노동이 조화된 생활 리듬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공동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친교 체험은 물론

형제들과 친교 체험이

우리의 일상의 삶과 노동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공동전례기도나 개인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마음 깊이 새겨진 말씀에 순종함으로

십자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오늘도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주님 변모 축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영광을 체험시켜 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유영봉신부-

묵상길잡이 :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찬란한 모습은 바로 우리가 언젠가 뵈올 부활한 주님의 모습이며, 또한 세례로 우리 안에 싹트고,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가꾸어 갈 때 자라며 완성될 우리의 모습임을 명심하자.

1.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고, 나자렛에서 사신 목수의 아들 그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예언자들이 수없이 예고했던 그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지상에 와서 우리 인간과 더불어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그 분이 참으로 인간이다. 아니다."하는 논란이 되었던 인물은 예수 외에는 없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했던 이단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인간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태생소경을 눈뜨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죽은 사람(나라로)을 다시 살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외양(外樣)을 지니고 인간처럼 행동했을 뿐 결코 인간은 아니었다.”고 그분의 인성(人性)을 부인하는 이단(異端)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예수는 뛰어난 인간일 뿐 결코 신(神)은 아니었다.”고 그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이들도 있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주장을 모두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였다. 교회의 정통 신앙은 예수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조화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려는 듯, 세 제자들 앞에서 눈부신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다.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아가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가 줄곧 이야기 해 온 그 메시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황홀감에 취해서 엉겁결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지내자고 제안하였다.

2.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 하느님의 아들)라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그분과 일치함으로,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하나가 될 때, 우리도 부활하신 그분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는 단순히 석가나 공자나 마호메트처럼 한 분의 성현(聖賢)에 불과한 분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자신은 열심한 천주교신자라고 자부하면서 “예수는 사생아로 태어나, 뛰어난 성현이 되신 분”이라고 거침없이 지껄이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이런 정도의 믿음으로는 예수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그 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고 고백하였다.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가?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3.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 앞에서 보여주신 그 빛나는 황홀한 모습은 그분의 신성(神性)을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마주 뵈올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초막 셋을 짓고 영원히 머물고자 한 그 세계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들어가신 세계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삶의 세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심어주신 새로운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서 자라고 꽃피워야 할 생명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 찬란한 생명에 동참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분과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고,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그 사랑을 실천하신 주님을 본받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철저히 따르기 위해 끊임없이 이기적인 자신과의 진한 싸움을 해야한다. 자신과의 싸움에 있어 기도 외에 다른 무기는 아무 쓸모가 없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다스리는 힘을 얻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눈을 감고 성당 안에 있을 때는 신앙인이고, 성당 문 밖을 나가자마자 비신자와 다름없이 사는, 신앙과 생활이 겉도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 기도로 무장해야 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하신 성부의 말씀을 사는 길이 여기에 있음을 명심하자. 그럼으로써 우리 안에 뿌려진 영원한 생명 즉 오늘 보여주신 주님의 눈부신 모습을 매일 가꾸도록 하자. 아멘.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 서울대교구 홍승모 신부-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의 의미를 묵상하기 위한 출발점은 십자가입니다. 복음서에는 이 장면이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 후에 항상 나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마르 8,34; 루카 9,23). 이것은 십자가의 여정을 걸어가야 주님의 거룩한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첫걸음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는 첫걸음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변모에 함께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도 이 말씀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모세는 율법의 말씀을,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약속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율법이 과거에 계시된 말씀이고 예언자들의 약속이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면, 그 모든 구원의 말씀이 지금 이 수간 예수님에게서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 영원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의 위대함을 목격했던 베드로 사도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바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위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 1,19).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분의 빛이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움과 불안을 밝혀 줄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은 우리의 내면을 기쁨과 환희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분께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결정적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의 끝을 모르고 추구하는 인간적인 욕망으로만 우리 자신을 채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과 철저하게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서슴없이 자행하는 모든 어두움의 행위는 사람들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새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감추어진 주님의 참된 모슴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주님이 원하시는 본래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당신을 찾으려고 애쓰면 변화되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떨끝만치도 들으려 하지 않는 불의한 바벨의 산들은 주님의 현존 앞에서 반드시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도다. 하늘을 주님의 의로움을 알리고, 모든 백성은 주님의 영광을 보도다"(시편 97,5-6)


  

 기도하는 자만이 침묵 가운데 누리는 하느님의 영광

 -박상대신부-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은 복음서상의 실제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 모두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역사적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마르 9,2-10; 마태 17,1-9; 루가 9,28-36)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복음의 원전을 놓고, 일단 그 내용과 구조를 따르면서 고유의 특성을 살려 이 대목을 편집하였다.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주요내용은 같을 수 있으나 제각기 약간의 수정, 변질, 첨가, 삭제 등의 편집방식으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주고자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놓고 세 복음서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이 사건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력에 따라 <가해>에는 마태오복음에서 <나해>에는 마르코복음에서 <다해>에는 루가복음에서 이 대목을 복음으로 봉독하는 것이다.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의 복음이 어느 복음서에서 봉독되든 간에 이 축일의 핵심사상은 부활하신 예수와 지상 삶의 예수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써 누리는 영광은 이미 지상 삶의 예수 안에 묻혀있다는 말이다. 그 영광은 사실 모든 인간의 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예수께서 그 영광을 애써 숨기시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에게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 능력은 첫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박탈되었다. 예수가 가지고 있는 메시아적 능력은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하여 적어도 제자들로부터 검증되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아직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다.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의 하느님으로서의 영광이 드디어 몇 명의 제자들에게 체험되도록 허락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체험이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변모사건 전에 사전준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세 복음서 모두가 변모사건을 위해 일련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은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①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 ②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 ③ 예수 추종의 길 -> ④ 종말의 시기에 관한 토막어 -> 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의 순서가 바로 그것이다.(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가 9,18-9,36)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이 겉으로는 정확하고 장황하였으나 그 실속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통하여 자기들이 고백한 메시아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 것임을 알아야 했고, 그 길이 곧 자신들 또한 가야할 길임을 알아야 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고통 받고 죽어야 하며, 그러나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지존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으로 우뚝 서게 되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순서대로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그 영광을 미리 볼 수 있는 특권은 단지 몇 명의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렇다면 루가복음만이 전하는 주님 거룩한 변모사건의 고유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고, “기도하시는 동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물론 기도에 관한 이야기는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는 없다. 둘째는 변모사건직후 예수께서 세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함구령(緘口令)이 없다는 것이다. 루가는 제자들 스스로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고 말한다. 기도와 침묵, 이 두 가지가 바로 루가복음이 변모사건에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그렇다. 루가는 늘 예수님의 기도를 강조하였다. 루가는 예수 친히 자주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믿음을 보존하고, 유혹을 이기며, 장차 재림하실 인자를 맞으려면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또 기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예수 친히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음(23,34)을 전하고 있다. 누군가는 “기도하지 않으면 타락한다.”고 했다. 기도하는 자만이 세례의 은총을 유지하며, 오직 기도하는 자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자가 체험한 것을 기도하지 않는 자는 알 수도 없다. 말해준다고 해도 기도하지 않는 자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루가는 예수께서 애써 함구령을 내리시는 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기도하는 자가 체험한 것은 침묵 속에 간직된 그만이 누리는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