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5일 연중 제18주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탐욕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분수를 망각한 과도한 욕망은 언제나 어두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탐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듣게 되는 복음의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깨달음의 은총을 청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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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3-21)
"Be on your guard and avoid every kind of greed,
for even though you have many possessions,
it is not that which gives you life."
탐욕 때문에 안락한 생활을 망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사람이 탐욕 앞에서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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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주님의 이 당부는,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고 재물을 삶의 첫자리에 앉히려는 이 시대에 경각심을 주는 말씀입니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어느 정도의 욕심은 필요합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삶은 무미건조해집니다. 어떤 것이 지나치지 않는 욕심일까요? 그 기준은 감사드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탐욕에 빠지지 않습니다. 감사는커녕 끝없는 부족감을 탓하며 살기에 탐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생활은 참으로 풍족해졌습니다. 먹고 입는 것에 부족함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삶의 질을 높일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족보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더 많이 소유했다고 여기면 쉽게 만족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물질의 축적을 끊임없이 꾀하였지만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재물은 주님께서 섭리하십니다. 그분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며 감사드립시다. 이것이 탐욕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새벽 일어나니 몸에 모기한테 물린 자국이 보입니다. 사실 어제만 물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며칠째 계속해서 모기한테 물리고는 있는데, 문제는 그 모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제 새벽 드디어 제 눈앞에 있는 모기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파리채를 있는 힘껏 내리쳤고, 드디어 모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모기를 잡은 제가 과연 기뻤을까요? 기쁘지 않았을까요?
며칠 동안 잡겠다고 벼른 모기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기에서 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어제 새벽 저는 모기한테 네 군데나 물렸습니다. 따라서 저를 문 모기라면 피가 나와야 정상인데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를 물은 모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실망과 함께 저를 문 모기를 잡지 못했다는 분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방 구석구석을 돌면서 모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모기는 딱 한번만 문다.”는 언젠가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제가 피가 나오지 않은 모기를 잡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저를 곧 물을 모기를 미리 잡았다는 것으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불평불만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우리 성당 중고등부 학생들이 캠프를 간 가평에 위치한 청소년 수련원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이 그렇게 막힐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동해로 휴가 가는 차량들이 아닌가 싶어요. 저는 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했지요. ‘뭐 이렇게 휴가 가는 사람들이 많아? 요즘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던데, 다 거짓이구만?’
가평에서 인천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는 더 길이 막히더군요. 그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 갔다가 이 시간이 돼서야 나오는 거야? 길 막히게…….’
조금만 더 생각하면 나 역시도 길 막히는데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요. 그 많은 차량 중에 하나의 차량이니까요. 그런데 저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편하게 가려는 욕심으로 다른 차들을 판단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버린다면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인데… 우리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있기에 나쁜 것만을 생각하고 나쁜 것만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합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재산을 형이 독차지를 했나 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간청은 공명정대한 분배를 원하는 것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탐욕을 보셨습니다. 즉, 공명정대한 분배라는 이름을 내세워 자신의 재산을 늘리려는 욕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형제간의 사랑이 더욱 더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비유한 사람의 비유를 통해 지금 이 순간, 재화를 모으는 데에만 신경 쓰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님을, 대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임을 말씀해주십니다.
이제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만을 꼭 움켜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나의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부유한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섣부른 판단을 하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합시다.
빠다킹신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양승국신부-
<베드로 사도의 재채기>
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큰 탁자가 중앙에 놓여있고, 그 앞에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수많은 성인성녀들께서 앉아계셨습니다.
그 탁자 위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켜져 있습니다. 그 촛불 하나하나는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생명 하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촛불들을 점검해보기 위해 그 앞을 지나가시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 촛불로 향하는 바람에 촛불 세 개가 꺼져버렸습니다.
촛불 세 개가 꺼져버렸다는 것은 세 사람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순간 지상에서 잘 지내고 있던 세 사람, 아직 올라오지 말아야 할 세 사람이 갑자기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세 사람은 즉시 베드로 사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미안했던 베드로 사도께서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하시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지상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고생한 대가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씩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말단 공무원으로 지냈는데, 높은 위치에 한번 앉아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너무 높은 자리는 골치만 아플 것이니, 적당한 자리를 하나 알선해주겠네.” 하시면서 꽤 높은 지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거금 한번 만져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셨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여기 가져가시오.” 하는데 보니, 10억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돈도 지위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경치 좋고, 조용하고, 마음이 평화롭고, 괴롭히는 사람 없고, 그래서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 때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아십니까?
“에끼, 이 사람아! 그런 좋은 곳 있으면 나부터 가겠네!”
오늘, 연중 제13주간 성경 말씀의 주제는 ‘영혼의 우위성’ ‘영적 생활에 대한 우선권’ ‘천상적 삶의 가치’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최 우선권을 부여하는 가치, 대상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돈의 위력, 정말 대단합니다.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합니다.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딱 한 가지 생각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단단히 한 몫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급속도로 재산을 증식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에게 한 차원 높은 단어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봉사, 희생, 나눔, 가족애, 우정... ‘그까이 것들’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단연 첫째가는 화두는 자녀교육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자신의 미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투자한 자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확실하게 책임져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자녀가 내 노후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건강이나 외모도 빠지지 않는 화제 거리입니다만 장례식에 자주 가면서 늘 보게 됩니다. 결국 한 줌 재더군요. 결국 한 줌 흙이더군요.
어떻게 해서든 보다 덕스럽고, 보다 영예롭고,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의미 있는 것에 대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다름 아닌 영혼에 대한 투자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지상생활을 마무리 짓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우리가 그토록 물불 안 가리고 투자했던 육신은 다 두고 건너가야 합니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간 노력해왔던 영적생활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봉사요, 희생입니다.
쉬지 않는 젓가락
-임문철 신부-
본당에서 큰 일들이 생길 때 늘 궂은 일만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교우들간의 말썽을 수습해달라고 부탁하면 “신부님은 꼭 힘든 일만 시키세요” 하고 눈을 흘기고 가지만, 기대 이상으로 멋지게 수습해냅니다.
본당 신부도 수녀도 하지 못하는 그분들의 그런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언젠가 본당 신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데, 한 자매의 손길에 제 눈길이
미쳤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는 그 손길, 생선뼈를 발라내어 먹기 편하게 해놓고, 고기 탄 부분은 먹지 않는 게 좋다면서 가위로 다듬어 접시에 올려놓고,
반찬 그릇이 좀 빈다 싶으면 얼른 새 걸로 갖다놓습니다. 이젠 좀 드시라고 하면, “예, 저 많이 먹고 있어요” 하고 대답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시중들기에 바쁩니다.
제 젓가락은 부지런히 접시와 내 입 사이만을 왔다 갔다 하다가도
내 입이 가득 차면 가만히 쉬는데, 그 자매의 젓가락은 남의 접시들 사이를
오가느라 한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이게 맛있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이거 잘 구워졌네요. 이거 드세요.”
아무리 산삼, 녹용 같은 좋은 것들도 제 한 입만 위하면 보약이 아니라
독이 됩니다. 풀뿌리를 먹더라도 이 자매와 같은 모습이라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나?”(루카 12,14)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흔히 ‘소귀에 경 읽기’라고 하지요. 예수께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하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뜬금없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김이 쑥 빠지는 느낌입니다. 여태 설교한 모든 의미가 이 엉뚱한 청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뀌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르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을 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한 것과 비슷한 어투로 주문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내 요구대로 다 들어주어야 하는 분이어야 하듯,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등 돌려버리는 값싼 신앙이 아니어야 하겠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루카 9,41)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우리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열 가진 자가 하나 가진 자의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도 그랬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왕이 한낱 평민인 나봇의 포도밭을 탐내다가 결국 그를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합니다(1열왕 21,1-16). 다윗 왕도 그랬습니다. 후궁이 많건만 굳이 충신 우리야를 전장에 내몰아 죽게 하고 그 아내를 차지하였습니다(2사무 11,1-27). 오늘날 다국적 기업이 제3국의 나라들에 손을 뻗쳐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논리가 아닌가 합니다. “인간의 온갖 노고는 제 입을 위한 것이건만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다.”(코헬 6,7) 탐욕은 현재의 처지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하늘의 새를 먹여주시는 분,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나리꽃들을 솔로몬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 입히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길을 가던 나그네가 나무 그늘 아래서 자고 있는 어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어부를 깨워 왜 물고기를 잡지 않고 자고 있는지 물었지요. “나는 이미 우리 가족의 저녁식사에 필요한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았답니다.” “만약 당신에게 더 큰 그물이 있어서 더 많이 일한다면 당신은 물고기 열 마리도 잡을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난 두 마리만 있으면 되는데 왜 열 마리를 가져야 하죠?” “그걸 팔아서 배를 살 수 있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훨씬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요. 당신은 사람을 고용해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아올 수 있고 그러면 당신은 더 부자가 되죠.” “그 돈으로 뭘 하죠?” “즐기며 살 수 있잖아요. 편히 쉬며 놀다가 그늘에 자러 가는 거죠.” “지금 내가 뭘 하는 것 같나요?”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사실 성공을 하고 큰일을 이루어 내고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마음껏 누리고 지식을 많이 쌓고 권력을 잡은 사람이 행복한 듯 보이지만 죽음은 온 세상을 평준화합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실현과 행복은 재산을 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 안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그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 있다고 합니다.
작년 휴가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근심·걱정·우환이 있는 집의 공통점이 모두 ‘재산이 있는 집’이라는 것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재산은 자녀들의 일과 공부에 대한 의욕을 앗아갔고, 재산 분배 때문에 형제가 서로 원수가 되어 상처를 껴안고 살았습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를 살해하는 일도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걸 보면 물신주의를 실감합니다. 결국 재산이 집안의 평화와 행복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수께 청한 어떤 사람은 ‘유산이냐, 형제애냐?’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재산, 형제애, 보이는 지상의 것, 보이지 않는 천상의 것 중에서.
신영복 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사람을 사람한테서 소외시키는 것은, 곧 함께 사는 ‘모두살이’를 개인주의적인 ‘각(各)’살이로 조각내는 것은 ‘사유(私有)’라고 했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네 불행이 내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근거는 ‘사유’라고. 이런 것은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라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사도 4,32) 초대교회의 모습은 ‘모두살이’의 원형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가 누구의 상속자인지 사도 바오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에페 1,14)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물질적인 것보다 다음과 같은 깨어 있는 정신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하늘에 쌓는 보화
-가톨릭신문 -
요즘 운동으로 조깅을 하고 있다. 조깅을 하는 이유는 첫째로 건강을 위한 마음과 마라톤 자체가 주는 매력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번 가을쯤 하프 마라톤을 뛰고 내년에는 42.195 Km의 마라톤 풀 코스를 한번 도전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 마라톤 완주를 위하여 연습하면서 느끼는 느낌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마라톤도 그냥 연습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와 공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열심히 뛰기만 하면 되겠지 하고 뛰다가 얼마 전 마라톤에 관한 책도 구해서 읽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료도 참고하게 되었다.
물론 많은 내용 중 실제로 나에게 도움을 준 것은 몇 페이지에 불과하였지만 그러나 그 한 두 가지 지식은 나의 마라톤 연습에 너무나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예를 들면 자세 편을 읽고 실제로 그 자세대로 나의 자세를 조금 수정하고 뛰었을 때 얼마나 호흡하기에 편했는지 모른다 !
이것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삶과 우리 신앙에도 같이 적용되리라 생각되었다. 그냥 산다고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생활과 우리 인생을 위한 공부와 거기서 주어지는 기쁨을 우리가 체험할 때 우리 인생의 행복과 멋은 한층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라톤을 즐기고 코스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조깅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조금만 더 천천히 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잘 안 되느냐 하면 차츰 마라톤에 맛을 들이고 거리를 늘려가면서 슬금슬금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제는 몇 Km를 몇 분에 뛰었으니 오늘은 몇 분에 뛰자! 또 오늘은 몇 Km를 더 뛰자는 등 시간과 거리에 대한 욕심이 운동을 힘든 노동으로 바꾸고, 전체 생활 리듬까지 깨뜨리며 더러는 부상도 가져와 마라톤을 망치는 주범이 되곤 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능력을 보지 못하고 '조금 더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의 벗어남이 마라톤을 즐기고 풀코스를 완주하는 가장 큰 밑천이 아니겠는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되리라 본다. 왜냐하면 재물에 대한 '조금만 더'라는 이 미묘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우리 인생을 병들게 하고 인생의 참다운 멋과 행복을 앗아가는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탐욕이다.
인간은 땅에 발을 디디고 삶을 시작한 순간부터 자기 실현의 욕구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자기 실현의 욕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고, 이러한 자각은 성장해가면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노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은 부족한 부분을 흔히 재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재물로 우리의 부족함을 채울 때 인생은 완성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돈과 재물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고 더 나아가 나의 생명과 나의 미래까지도 재물에 의해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바로 이러한 착각이 인간으로 하여금 재물에 대한 탐욕에 빠지게 만들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재물이 인간의 삶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재물을 위한 인간의 노동이 삶인지 그 자체가 모호해지고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우리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복음의 전반부는 상속문제를 거론하면서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후반부의 어떤 부자의 예화는 재물은 죽음 앞에서 무력하며, 재물에 의해 우리의 미래는 결코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원문 하느님 앞에 재물을 모으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히려면 21절과 내용이 비슷한 구절들을 참작해야 한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루가 12, 33).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루가 8, 22). 이러한 구절들을 참작해보면 하느님 앞에 인색한 사람이란 다름 아닌 가난한 이웃에게 희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때문에 오늘 복음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보증해주고 우리의 미래를 보증해 주는 것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보다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의 해방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 돌아서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행위가 바로 우리의 생명과 미래를 보증하는 표가 된다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의 상징인 돈
-이기양 신부-
아주 큰 부자가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앞장서서 천국을 안내하고 부자가 살게 될 집을 찾아갑니다. 아름다운 천국을 바라보며 부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역시, 천국은 다르군. 아~, 여기서 살게 되다니 정말 좋구나.'
그런데 천사는 으리으리한 저택들을 계속 지나쳐 가기만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자는 더 좋은 집을 기대하며 천사를 따라갔지요. 천사와 부자는 다음 마을로 들어섰는데 이 마을에는 165㎡(약 50평), 330㎡(약 100평)가 넘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도 살만은 하겠군.' 부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사는 그 마을을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저만큼 달동네가 나왔습니다. '설마 저 곳은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가는 부자에게 천사는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세워진 어느 쓰러져가는 판잣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가 당신이 살 집입니다."
화가 치민 부자가 따졌습니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저는 지상에서 살 때에도 호화주택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아니 천국에 와서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자 천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네요. 당신이 지상에 살면서 보내준 건축 자재로 지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니까요."
우리 모두는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끼고 모아서 자식을 교육시키고 저축을 하는가 하면 남은 인생을 위해서 보험까지도 들지요. 더군다나 요새는 80, 90살이 예사로 느껴질 만큼 수명이 늘어나 노후대책을 위한 국가 차원의 해결책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가끔 세상에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노라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얼마나 준비해 놓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영원한 세상에 더 큰 희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신자 여러분들은 정작 하늘나라에 얼마나 저축을 해 놓으셨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산이 많은 부자를 야단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는 말씀처럼 자기와 가족을 위해서는 넘치게 살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인색한 이들에게 나눔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재물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에 형제 사이를 갈라놓고 심지어 부모 자식 간의 왕래마저 끊게 만드는 사건의 내막에는 대부분 재산 다툼이라는 어두운 면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한평생 고생하며 모아 놓은 재산을 앞에 놓고 부모 형제가 남만도 못한 가슴 아픈 관계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반면 열심히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잘 활용하면 이것처럼 큰 축복도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재산이라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기쁘게 사용하면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영광을 드릴 수 있고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없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소유하는 순간부터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믿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없는 재물은 이웃을 피눈물 나게 만들 수 있고, 사방에 죽음의 문화를 꽃피우기도 합니다. 또한 영원한 세상을 믿기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재물의 유혹이고 악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생에 대해서 오늘 독서는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고 말씀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산 분배에 대한 불평으로 괴로워하며 가르침을 청한 청년에게 지나치게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며 살아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당부이시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히 잃지 않을 재물, 진정한 재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과 이웃입니다...........◆
재산의 소유와 분배
-홍금표 신부 -
바둑의 묘미 가운데 하나가 수순의 묘입니다. 똑같은 자리를 둔다 하여도 순서가 바뀌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수순의 묘입니다. 아마추어 7~8급인 저의 바둑실력으로는 그 차이를 전부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만 해설을 들으면서 느끼는 점은 우리 인생도 바둑과 같은 수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뀜으로써 우리 인생을 볼품없이 만드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소유와 나눔, 목적과 수단, 영혼과 육신 등으로 표현되는 인생에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서로 대조되는 특징을 가진 가치들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탐욕에 의해 우선순위가 바뀔 때 우리 인생은 자신이 꿈꾸는 행복한 미래와는 너무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재산의 소유와 분배 그리고 소유와 생명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전반부는 유산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산문제에 대한 판단을 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판단을 거부하면서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소유와 생명이 관계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먼저 예수님은 세속적 문제의 해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재산이나 권력 등 세속적 가치마저도 신앙과 연결하는 우리, 재산의 유무와 성공의 정도를 축복의 잣대로 선택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분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이 이야기는 소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탐욕에서 찾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는 소유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기준과 논리를 가지고 있고, 또 물질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기준대로 판단합니다.
아마 복음의 질문자가 예수님께 기대했던 바도 분명한 기준과 판결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점은 예수님은 어떤 기준이나 당위를 제시하지 않고 『어떤 탐욕에도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 하여라』라는 경계의 말씀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판단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탐욕에 대한 경계」가 소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는 점을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할 점은 소유는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합니다만 현재의 상태를 증폭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즉, 지금 행복하다면 소유는 행복을 증폭시키고, 지금 불행하다면 소유는 불행을 가중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현재의 상태가 소유보다 중요하기에 우리는 정신적 부가 더 중요하다는 점과, 탐욕 없는 마음이 있을 때만이 소유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예화입니다. 엄청난 수확을 얻은 부자는 그것을 즐기려 합니다만 그러나 부자는 그날 죽음을 맞이하기에 그러한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사람처럼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예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선 생명이 물질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생명이 있을 때 물질이 의미를 가지기에 소유보다는 생명을 지향함이 인생의 올바른 순서라는 뜻입니다. 소유에 우선순위를 두면서도 영원한 생명에는 무관심한 우리, 탐욕에 빠져 소유를 위해 삶과 생명마저 희생하는 우리에게 생명과 물질의 올바른 순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이 예화는 인생은 우리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부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의 지도를 가지고 미래를 계획합니다만 그 계획은 죽음으로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소유가 나의 미래를 보증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않습니다. 지금은 나의 능력범위안에 있는 일을 다만 할 뿐이요, 미래는 미래의 구원과 행복을 주관하는 그분께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미래의 행복은 소유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아마 부자는 자신의 소유가 행복한 미래를 보증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고, 사실 이러한 부자의 모습은 보통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부자를 비웃으면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하늘에 보물을 쌓지 않는 사람」,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뜻합니다(마르 10, 21절 참조).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미래의 행복은 「소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면 소유에 의지하기 보다는 탐욕의 절제와 함께 나눔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한 주 나의 탐욕과 곡식 창고를 점검하면서 내가 잘못 실천하고 있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반성해 보는 한 주간의 삶이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재물을 보고 이웃에게 베풀자.
-서공석 신부 -
오늘 복음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유산으로 인한 형제간의 시비에 개입해 달라고 청하였고,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회에 재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큰 창고를 지어 재산을 많이 쌓아두고 이제 걱정할 것이 없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재산이 인간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말씀과 재산을 쌓아두고 죽으면 그 재산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고 반문도 하십니다.
우리에게 재물은 좋은 것입니다. 재물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리합니다. 재물은 사람을 편하게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도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재물을 좋아합니다. 인간은 한 가지에 마음을 빼앗기면, 다른 것을 소홀히 합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도취하면 주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소홀히 합니다. 권력에 맛들인 사람은 그것을 쟁취하고 보존하기 위해 추태 부리기도 불사합니다.
재물이나 권력을 소중히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쉽게 잃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고, 형제간에 불목하며, 친구를 배신하기도 합니다. 재물도, 사랑도, 권력도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어느 것 하나를 삶의 최대 보람이라고 단정하고 나서면,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며 사람노릇을 하지 않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합니다.
구약성서는 장수(長壽), 건강, 사람들의 존경과 더불어 재물을 선하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오복(五福)에서, 명대로 살다가 편하게 죽는다는 고종명(考終命)이라는 항목 하나가 빠진 사복(四福)입니다. 시편에 보면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23,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풍요로움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시편은 “맹수들은 먹이 찾아 배고플지 모르나, 야훼를 찾는 사람은 온갖 복을 받아 부족함이 없다.”(34,10)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곤경에 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류는 신으로부터 복을 얻기 위해 기도도 하고 제물(祭物)도 바쳤습니다.
예수님이 재물을 보는 시선은 구약성서의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은 실천이 있는 우리의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삶의 기원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당신 삶 안에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당신 스스로 실천하면서 하느님이 우리의 생명을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서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에 심취하여 사신 분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마르 10,21)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에 발목을 잡히지 않아야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알아보고 실천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고, “장사꾼이 발견한 값진 진주”와 같습니다(마태 13,44-46). 그것에 심취한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가졌던 것을 모두 팔아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도 가르치셨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태 6,24)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재물을 얻기 위해 하느님에게 빌지도 않고, 재물을 얻었다고 그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루가복음서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루가 6,20)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부유한 사람은 불행하다.”(6,24)고 말합니다. 가진 재물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무소유(無所有)의 경지를 이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도 재산을 상당히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을 초대했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을 제공한 사람도 부자이면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리마태아 출신인 한 부자가 왔는데, 이름은 요셉이고 그 역시 예수의 제자였다.”(27,57).
복음서는 재물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장애물이라서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 인용한 마르코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루가 16,19-31). 라자로는 부자의 집 문간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부자와 걸인이라는 빈부(貧富)의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비극은 라자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우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에게 어떤 연대감을 느끼고 가진 것을 나누는 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의 재물을 보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이웃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재물만 보고, 그것을 더 가져야 하겠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자기 욕심 성취의 수단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베푸시는 하느님의 일을 자기의 실천 안에 살려내지 못하면 하느님에게 인색한 것입니다.
베품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면, “그 너그러움이 우리를 통해 많은 이에게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는”(2고린 9,11)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우리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먼저 은혜롭게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롭게 보이면,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도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하도록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을 요약하여 의례(儀禮)로 남기신 예배인 미사는 예수님의 삶이 ‘내어주고 쏟는’ 나눔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미사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모시는 우리는 내어주고 쏟으신 그분의 몸짓과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여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실천 안에 나타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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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의 모습
-조욱현 신부 -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전도 1,2). 이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반향되고 있다. ‘헛되다’(hebhel)라는 단어가 전도서에 22번이 나온다. 그 본래 의미는 ‘수증기’, ‘숨’을 의미하여 폐에서 콧구멍과 입에 이르자마자 없어지는 ‘숨’처럼 단기적이고 단명한 모든 것을 말한다.
[제1독서: 전도 1,2; 2,21-23] : 헛되고 헛되다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고 제1독서는 말한다. 돈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일에 대한 수고와 걱정과 불안에 대해 돈이 과연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는가 라고!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21절).
그러므로 돈을 쌓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보통 두 가지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 갑자기 닥치는 죽음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자기의 재화를 누릴 수가 없고, 자신의 고뇌를 행복과 평온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즉 부자가 된 그는 이제 그렇게 애써 모은 재화를 지키기 위해 밤에도 마음을 죄어 걱정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1독서의 내용은 세상의 것들의 ‘일시성’과 잠정성을 알게 함으로써 인간을 고통과 실망 속에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부’(富)에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복된 가난한 이들’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복음: 루카 12,13-21]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오늘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재화’ 앞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재산분배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즉 첫째로 인간은 그 내부로부터 이기주의라는 악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기주의를 치료함으로써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산의 공평한 ‘심판자’처럼 행동하려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청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 필요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은 재화와는 관계가 없는 인격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관한 것이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15절). 많은 사람이 그들이 갖고있는 ‘재산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정 반대의 의미이다. 소중하게 여긴 그 재화가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잃게 한다. 즉 애덕과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지 못하게 하고, 재화를 쌓는 일에만 몰두하여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21절)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의 이기심은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되고, 스스로 자신을 자신이 지은 감옥에 가두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여기서 그 자신 안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존재할 수 없고 그의 재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은 그에게 허무를 안겨주는 모습이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20절). 생명과 재산이 그에게는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 보였던 그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고 있다.
성서에서 ‘어리석다’는 개념은 하느님을 모르는 체하고(시편 14,1) 잘못된 근거에 자신의 신뢰심을 두는 사람으로 하느님을 거부한 후 스스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이 부자는 아둔하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고 전혀 가진 것이 없는 ‘어리석고 가난한 자’이다. 즉 자신이 죽는 순간에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을 전혀 갖지 못한 자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21절).
[제2독서: 골로 3,1-5.9-11] :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묵시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너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3,17). 이 세상에서 재화와 재물에 집착하여 거기에 매여 노예가 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성과 사랑에 대해 신뢰심을 가질 것을 권고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염려하며 애쓰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 12,29-31).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화나 재물에 매여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 재물이나 재화에 집착하고 거기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우상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재물이나 재화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재물이 그것을 만드신 주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사용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2-3절).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내 재산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유영봉 몬시뇰 -
묵상길잡이 : 돈의 가치를 모르고 낭비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부지이다. 그런가 하면 「돈이 전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인생의 깊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내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안에 남의 몫이 있음을 깨닫자.
1. 고해소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일.
사제들은 고해소에 신자들의 고해를 듣고 나면, 보속을 명하기 전에 간단한 영적 충고와 훈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경험으로는 재산 문제로 친지나 형제들과 마음을 상하고 원수가 되다시피 해서 증오와 원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설득력 있는 훈시를 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한 쪽의 이야기만 듣고 시비를 가릴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재산 문제로 속을 끓이고 증오하다보면, '돈 잃고, 사람 잃고, 건강까지 잃는' 수가 허다하다.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였다면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형제간의 재산 시비에 대한 판결을 요청 받으시고는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12,14)하시며 이를 거절하신다.
2.성숙도를 가늠하는 기준
돈 귀한 줄을 모르고 낭비를 일삼는 사람을 보고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총각들은 부양가족이 없고, 삶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기에 돈을 모으지 못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만큼 살고 나서도 돈을 위해서는 체면도, 인간다운 도리도, 의리도 내 팽개치는 사람이 많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적게 남은 연륜에 있으면서도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은 인생에 있어 참으로 값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돈 귀한 줄 모르거나', '돈밖에 모르는' 사람은 덜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돈이 삶을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참으로 깨달을 때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하며 하느님은 안중(眼中)에도 없이, 모든 것이 내 손안에 있는 양 자만한다. 그 순간에 하느님은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가 갈 것이다. "하신다. 죽음 앞에서 돈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돈 일억을 갖다 바치면 생명을 1년 더 연장시켜주는 곳'이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험악해 졌을까? 이렇게 볼 때 남녀노소(男女 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은 참으로 고마운 손님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 복음의 부자와 같은 사람들을 가끔 본다. 성전 건립이나 교회 사업이나 남을 돕는 공익을 위한 일에는 최소한의 체면치레로 일관하며, 형제와 친척 간에도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을 자주 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뒤에서 "그 사람, 그 돈 아까워서 어떻게 죽었을꼬!"하며 비웃는다. 돈을 믿고 의지하는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내가 가진 것 안에는 '남의 몫'이 있음을 알아야.
철저한 반공교육 덕분에 우리는 공산주의가 왜 나쁜지, 어떤 점이 나쁜지를 모르면서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하느님과 영적 세계를 부정하고 물질이 전부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지, 재산 분배에 관한 한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면이 많다.
일찍이 성 암브로시오는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도울 의무를 말하면서 "네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것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함께 쓰도록 주어진 것을 네가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재화(財貨)는 모든 사람의 것이지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하셨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돕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세계 사목헌장'에서도 "누구나 재화(財貨)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모든 사물을 사유물(私有物)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 여겨야 한다."(69항)고 하였다. '사유재산의 사회적 성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합법적으로 취득한 사유재산(私有財産)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타인을 위한 몫'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재화(財貨)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이가 먹고, 쓰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실업과 불황으로 우리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로 인한 갈등이 증폭되는 느낌이다. 이런 때일수록 가진 자의 올바른 의식이 요구된다. 내가 가진 것 안에는 '남의 몫'이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능력과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나만을 위해 쌓아 놓지 말고, 나눔으로 죽음 앞에서도 힘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천상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참으로 부자 되는 길
-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한여름입니다. 우리는 대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을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마기간 동안에 내린 비로 땅은 물을 충분히 확보하였고 뜨거운 태양은 열매를 재촉합니다. 곡식과 과일로 풍성한 계절을 기대하는 시점에서 교회는 복음말씀을 통해 우리가 세상과 자연이 주는 재화에 현혹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부자 농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곡식과 재물” 그리고 “목숨”이라고 하는 대립구조를 통해 소유와 존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화들(재산, 경력, 경험)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수단은 수단일 뿐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재화의 증식과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화의 증식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생각했던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자신이 언제라도 죽어야 할 존재이며 죽은 뒤에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집니다.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입니다(1코린 3,11-15 참조). “자신을 위해서”(루카 12,21)라는 말을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재화를 “자신을 위해서” 모읍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는 말씀처럼 그에게는 하느님이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코헬렛(전도자)은 온갖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해 벌어들인 재화가 결국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리라는 말을 함으로써 재화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코헬 2,21-23). 그는 비관주의자도 아니고 무책임한 삶을 찬양하는 비현실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의 재화들은 결국 바람처럼 지나가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던 매우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그로서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1) 하며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저 위에 있는 것”이란 벌어들인 재화나 재능 또는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에 나온 “곡식과 재물” 그리고 “목숨”의 대립구조가 여기서는 “땅에 있는 것”과 “위에 있는 것”으로 반복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참된 생명이고, 우리 존재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콜로 2,3)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부(富)가 무엇인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쌓은 재산 때문이 아니라 그 재산을 잘못 관리한 데 있습니다. 그가 축적한 재산은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형제들과의 연대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는 새로 지은 창고에 자기가 모은 재산을 쌓아 두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영혼까지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려 주시는 이 비유는 형제 사이에 유산 분배로 인해 분쟁이 생긴 어떤 사람의 부탁으로 시작합니다. 유산의 공정한 분배를 원했던 이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부가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루가 12,15). 예수께서는 부탁한 사람이 기대했던 공정한 분배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녀들에게 애써 모은 유산을 남겨 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기억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아버지의 마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부는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며 선물입니다(신명 28,1-14 참조).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유산을 선물로 남겨 주듯이 말입니다. 유산을 선물로 남겨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들 간의 불목과 분쟁이 아니라, 서로를 보살펴 주는 사랑의 유대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부가 과연 진정한 행복을 주는지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20) 이 말씀은 ‘어차피 가져가지 못할 것이라면 그렇게 애써 모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는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루가 12,21). 정확히 번역하면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는 뜻입니다.
이 부자의 문제는 그가 애써 모은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를 축적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다는 의미는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풍요로운 무엇인가를 행하고 쌓으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삶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골로 3,3). 영원한 생명을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기에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주님만은 알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들
-평화신문-
한평생 '결국 믿을 것이라곤 돈뿐이다. 돈이 최고야!'라고 외치며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자린고비로 살았지요. 혹시라도 부인이 허락받지 않고 색다른 반찬 한 가지 준비한 날은 난리가 나는 날이었습니다. 동기생들, 또래 사람들이 다하는 계모임이나 송년회도 회비 아깝다고 한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왕래도 쓸데없이 돈만 든다며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주말이 와도 '움직이면 돈'이라며 가족끼리 나들이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너희들, 잘 들어둬. 이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어. 돈이 최고야 돈이!"하고 가르쳤습니다.
평생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가 지상 최대 과제였기에 말년에 이르러서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큰 빌딩도 두 동이나 소유하게 되었고, 건물 임대료로 나오는 수입만으로도 재벌 못지않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나중에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를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돈만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돈만 있으면 만사가 오케이(OK)고, 천년만년 살 줄 알았는데, 돈으로도 안 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사(生死) 문제'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죽음의 때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죽음 앞에서는 돈을 아무리 갖다 퍼부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 이름'하는 큰 병원 의사들도 방법이 없다고 하자, 전국의 이름난 한의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의 건강은 하루하루 악화되었습니다. 정신도 점점 혼미해져갔고, 결국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임종 직전의 순간에 도달했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그 순간은 참으로 서글픈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분명 애도의 순간이어야 할 텐데, 병실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재산상속권이 있는 부인이나 자녀들, 그밖에 이런저런 이유로 부자의 유산과 조금이나마 관련있는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과 기 싸움은 정말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넘어간 뒤에도 귀는 얼마간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부자는 자신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은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바닥으로 내려앉는 소리를 숨이 넘어가는 순간 고스란히 듣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부인들이나 자녀들, 친지들이 체면불구하고 환자 앞에서 재산권 문제로 싸우는 이유도 결국 자신이 '돈이 최고'라고 평소에 가르쳤던 결과였기에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부자 할아버지의 인생은 맛있는 죽을 열심히 쒀서 자신은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개밥통에 부어준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네 삶도 그 부자 할아버지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기를 써서 모은 많은 재산들은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물론 자식들에게 좋은 일 한번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간 후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게 될 것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들인 빌딩도 절대로 아닙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게 될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궁극적인 것은 우리 각자의 영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영혼의 중요성, 영혼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위치를 재물 위에 설정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건전한 가치관, 인간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일깨우는 영성,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관대한 마음, 인간이 지닌 무한한 정신적 능력, 하느님, 신앙, 우정, 이런 요소들이 사실 재물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기억하는 이번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고 여기고 돈에 집착할 때에도 우리만은 돈 그 위에 하느님이 계심을 선포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가진 것 없이 살아간다 하더라도 충분히 당당하고, 충분히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세상 앞에 온 몸으로 보여주도록 노력합시다.
부자 되세요!
-부산교구 김영곤 신부-
부자 되세요! 어떻게? 구원받으세요! 어떻게? 어떻게 해야 부자가 되겠는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겠는가? 진정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참된 재물을 사랑하라!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은혜롭고 풍요로운 재물을 사랑하라!
장난감 가게에서나, 대형마켓에서 어머니를 따라온 어린이를 관찰해 봅시다.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것,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을 양손에 잔뜩 쥡니다. 그리고 더 좋아 보이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 쥐고 있던 것을 그 자리에서 즉시 놓아버리고 새로운 것을 움켜쥡니다. 어린이에게 있어 더 좋은 것이란 더 맛있어 보이는 것, 더 예뻐 보이는 것, 더 신기해 보이는 것, 더 커 보이는 것 등등 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미련 없이 먼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더 좋은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어린이처럼 과단성을 가지고 선택을 할 용기가 있습니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손으로 재물을 움켜쥔다면 많이 움켜 쥘 수 있고 지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것 - 구원은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구원은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손만 비우면 거저 주어질 구원을, 손을 비우지 못하여 받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입니까? 한 손은 재물을 나누는 손이 되고, 또 다른 한 손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손이 되기를 바랍시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기 위해선, 하늘에 보화를 쌓기 위해선 끊임없는 자기 비움이 필요 합니다. 이 비움은 재화에 대한 비움이요, 탐욕에 대한 비움이요, 우상 숭배에 대한 비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쌓아야 할 것들은 ‘신앙과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는 신앙과 사랑이 쌓여 있습니다.”(제2독서기도)
‘생명에 대한 희망은 우리 신앙의 시작이요 목적입니다. 의화는 구원의 시작이요 목적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행하는 의로운 행위의 증거입니다.’ 사랑의 나눔이 바로 하느님 앞에 쌓아야 할 하늘나라의 재화입니다. 신앙을 지탱해 줄 두려움과 인내심을 키우며, 자신의 신앙을 옹호하기위해 너그러움과 자제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하기 위해선 참된 재물에 대한 깊은 인식과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부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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