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Margaret K 2007. 8. 10. 05:06

  2007년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라우렌시오 부제는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분으로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때에 식스토 2세 교황과 동료 부제들에 이어 순교하였다. 박해자들에게 잡히기 전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보물과 소유물 일체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분개한 박해자들은 그를 온갖 고문으로 괴롭히다가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 죽였다. 4세기에 이미 라우렌시오 성인에 대한 공경이 널리 퍼져 있었다.


☆☆☆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Amen, amen, I say to you,
unless a grain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just a grain of wheat;
but if it dies, it produces much fruit.

 

  

 씨앗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씨앗 그대로 남는다. 썩고 죽어야 싹이 돋는다. 자연의 신비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어미는 새끼를 보호하려고 죽음까지도 각오한다. 자식을 위해 부모 역시 평생 헌신한다. 사랑의 신비다. 남을 위한 썩음과 헌신이 있기에 세상은 밝은 것이다. 밀알은 썩더라도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을 틔웁니다. 어디 밀알뿐이겠습니까? 모든 씨앗이 그렇습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도 새끼를 위한 어미의 희생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감동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사회는 어떻습니까? 동식물보다 못한 사람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희생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게 여깁니다.
희생하지 않으면 밀알이 썩는 이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썩지 않으면 하늘의 생명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의 무미건조함이 팽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밀알이 썩지 않는데 어찌 싹이 돋을 수 있겠습니까? 희생하지 않는데 어찌 기쁨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러니 희생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 목숨은      

-임문철 신부-


 “제주도는 언제가 제일 좋습니까, 어디가 좋습니까?” 하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항상 “제주도는 언제라도 좋고, 어디라도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냥 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 섬 구석 구석을 다니면서 늘 떠올리는
생각입니다. 특히 한라산을 지날 때면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순결한 겨울이 좋고, 숨이 터질 듯한 짙푸른 숲의 여름이 좋고, 여린 싹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상큼한
봄이 좋고, 타오르는 단풍과 억새가 어우러진 가을이 좋습니다. 그러나 늦가을
찬 비에 마지막 잎새마저 다 져버려 헐벗은 가지들만 삭풍에 시달리는 모습은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록의 새싹들이 내는 생명의 합창으로 가득한 봄 길을
걸을 때면 그 겨울의 처연함이 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구나 싶어 마음을
여미게 됩니다. 자연도 이렇게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는데,
나만 안 죽으려고, 안 묻히려고, 안 썩으려고 기를 쓰고 있구나 싶어서
절로 묵상이 됩니다.

 

 

 변화 속의 신비

-이인주 신부(예수회)-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존재자를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이라면 더 이상 변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공동선을 향한 것이나 존재자를 향한 변화는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생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성을 들인만큼 열매를 맺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도시에 산다 해도 조금만 노력한다면 생명의 신비가 무엇인가를 곧 파악하게 될 것이다.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잘 모릅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다. 우선 꽃이나 작은 나무 아니면 고추나 상추 등을 베란다에 심어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참으로 소중하다. 좀 귀찮고 힘들어도 꼭 그렇게 해보길 바란다. 그러면 집안 분위기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가족은 그 생명과 매일 대화를 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 생명과 나누는 대화 안에서 신비가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일상의 작은 변화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면 오늘 기념하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처럼 큰 변화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박해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양도하라고 명령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로마 집정관 앞에 세우며 ‘이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보화’라고 했다.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되길 간절히 바란 라우렌시오 부제는 석쇠 위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갔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여! 변화가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오늘의 순교자를 통해 배우도록 하자.


 

심야 비상사태-

-양승국신부-


   아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뒤치닥거리 할 일도 많아집니다. 오늘만 해도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갑자기 열이 오른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담당 수사님은 왕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지체 없이 아이를 엎고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같은 시각 다른 수사님 한 분은 며칠 전 출가(?)한 아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수사님 두 분 다 심야에 출동한 관계로 아이들 침실을 둘러보러 기숙사로 갔었습니다. 아이들은 수사님들의 고초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코고는 소리, 잠꼬대하는 소리에 녀석들이 얄밉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행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짜식들, 수사님들은 즈그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는데...잘도 자는구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나마 녀석들 사고 안치고 이곳에서나마 편안히 머리 눕히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다 흐뭇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수사님들의 지속적인 희생, 일상적인 죽음을 통해 아이들이 활짝 꽃피어나고 얼굴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오늘따라 열정으로 뭉쳐진 우리 형제들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아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매일 체험하는 좌절감과 배신감이 상당할 텐데 뜨거운 열정으로 늘 새 출발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눈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느 한 순간도 아이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한 알 썩는 밀알의 향기를 맡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아이들과 연결시킵니다. 이런 수사님들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행복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남남으로 만났지만 친 부자지간 이상의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이 집에서 저는 매일 하느님 나라의 한 귀퉁이를 엿봅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아이들, 희망으로 똘똘 뭉쳐진 아이들이 자신을 밟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이기를 자처하는 우리 형제들의 삶에서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확인합니다. 

 

 

-대구대교구 김영철(라우렌시오)신부 -

 

 사람은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하여 삽니다. 그 무엇을 위하여 노력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투자합니다. 그 무엇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많이 또 오래 노력하고 투자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전 생애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한 분을 만납니다. 258년 로마시대에 순교하신 성 라우렌시오 부제입니다. 그분의 평소 삶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관한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빈한한 가정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량한 모습이 교황에게 인정을 받아 학업을 마친 후에 로마의 일곱부제 중 수석 부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관리, 가난한 이들의 구호품 분배를 비롯하여 교회 내의 잡무를 모조리 보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박해자들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직책인 거지요.

잡혀온 라우렌시오에게 로마 총독이 “나는 당신네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당신들의 저녁 예식에 금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소” 라고 말하며 관리하고 있던 돈을 내놓기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라우렌시오는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하고 대답한 후 “당신에게 가치있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모든 것을 순서있게 정돈할 시간과 물품 명세서를 만들 시간을 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이미 교황과 함께 체포되리란 것을 알고, 로마의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들을 찾아서 있는 돈을 모두 주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성합조차도 팔아서 주어버렸습니다. 3일 후 라우렌시오는 수많은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한 줄로 세워놓았습니다. 총독이 도착했을 때, 라우렌시오는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재산을 정리할 3일의 기간, 금은 보화와 재물을 잔뜩 기대했을 총독의 표정은 보지않아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집니다.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들이 분명 라우렌시오에게는 교회의 보물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이렇게 다릅니다.

사기를 당하고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총독의 노기가 라우렌시오를 가만 두지 않았겠지요. 총독은 불타고 있는 장작 더미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라우렌시오를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그 불타고 있는 석쇠에 눕혀진 라우렌시오는, “자! 한 쪽은 다 익었으니 좀 뒤집어 주시오” 라 하였고, 잠시 후 “이제 다 익은 것 같으니 뜯어 잡수시오” 하고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얼핏 들으면, 뜨거운 여름 날, 선들 바람이 부는 정자 나무 그늘아래서 돗자리 펴놓고 그 위에 빈 듯이 드러누워 한가롭게 주고 받는 농담 같습니다.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 과부를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로 생각한 라우렌시오. 석쇠 위에 구워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마치 해가 뜨고 지는 일상사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라우렌시오. 과연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대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랑할 때 목숨을 바칩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게 바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명을 느꼈던, “타이타닉”이란 영화에서, 배가 가라앉고, 배 안에 물이 차오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서로를 살리려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많은 분들이 그런 사랑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여자를 살리고 자기는 차가운 물 속에서 얼어죽었지요. 비교가 조금 그렇습니다만, 바로 그런 애틋하고 열렬한 사랑이 하느님과도 가능하다고 알려 주시는 분이 바로 라우렌시오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기쁜 것입니다. 아니 내어줄수록 기쁜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내어주는 만큼 기쁨니까?  


  

-대구대교구 김경식 몬시뇰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겠다는 뜻을 내비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8)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모든 능력을 다 접으시고 십자가의 산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수많은 사람이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도 그 중의 한 분입니다. 그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봉사자였는데, 박해자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258년 화형(석쇠 위에 산 채로 태워 죽이는 형벌)으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다음으로 로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라우렌시오의 죽음으로 과연 교회에 많은 열매가 맺었습니다.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재산, 지위, 명예, 가족, 가문, 생명을 버리는 것을 본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좋은 것 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하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자들은 피로써 사람들에게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떼르뚤리아누스가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원동력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도 인류를 위한 희생양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도록 열정을 더 길러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그분의 일화 중에 석쇠 위에 누워서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제 한 쪽이 알맞게 익었으니 뒤집어 놓게!" 하셨다고 한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에서 이교 신앙이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고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으로 표현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없이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될 것이다"(25절)라고 하시는 것이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대 사회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첫 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이든 다른 사회에서나 내가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쳐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26절)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의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뜻을 버리는 것, 즉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순교 정신이며, 순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라우렌시오 성인을 본받아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벽에 껌을 붙여두었다가 다시 씹고, 다시 붙여두었다가 씹곤 했던 어린 시절.
그땐 껌 하나면 일주일은 넉넉히 씹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또 껌이 귀했던 시절이라 밀을 손으로 비벼서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어
껌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몇 분 씹지 못하고 입에서 녹아 사라져 버렸지만요.
사랑은 희생 없이 자라지 않습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가슴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또한 생명은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는 것처럼 썩지 않고 피는 싹은 없습니다.
꽃이 진 그 자리에서 탐스런 열매가 열리듯이 씨앗 하나 썩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에서 수없이 많은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사랑의 씨앗으로 왔다가 어느 자리에선가 썩어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 밀 하나가 땅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요.
그 씨앗은 썩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썩어서 푸르게 자라는 것도 있고, 열매를 맺어 추수를 기다리는 것들도 있고,
방아에 찧어져 허기진 배를 부르게 하는 것들도 있겠지요.
더러는 썩지 않는 것들도 있겠지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박혜원(경남 거창고등학교)-

 

 ◆밤중에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봉고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왜? 그 교회 차는 어떡하고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시동이 잘 안 걸려요.” 덕유산 자락의 작은 교회 전도사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직 이른 새벽녘 다시 전화가 왔다. “차는 안 빌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떡하려고요?”, “좀전에 시동이 걸렸거든요.”, “좀 있다 또 시동이 안 걸리면요?”, “지금부터 아침까지 계속 시동을 걸어놓을 겁니다.”
신자라고는 산 넘어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 두 분뿐이다. 젊은 전도사는 일요일 아침이면 두 분을 모시러 가곤 한다. 할머니 두 분을 모시기 위해 새벽부터 차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는 그는 대학원까지 나왔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우리 교회에서는 인근 시골의 작은 교회를 돕고 있다. 마음은 많이 돕고 싶지만 실제로 돕는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부터 일 년에 한 번, 그곳 목회자들을 초대해 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도 듣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목회자는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너무나도 고독하다고 말했다. 또 어떤 전도사는 어제 드디어 두 명의 중학생 신자가 생겨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그들의 고독과 아픔 때문에 무지했던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그 앎이 퍼져 나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다들 대도시를 향해, 더 큰 교회를 향해 치닫고 있는 세태에 이러한 작은 밀알들 덕분에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것이리라.


 

 


 

오늘의 강론 ( PBC 제공 ) 게시판

-황금 성당 임범종(프란치스코) 보좌 신부-

 환골탈태(換骨奪胎), 지금까지의 모양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뼈를 바꾸고 모양새를 바꾸자면 얼마나 큰 고통이 뒤따르겠습니까?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아주 유명한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애벌레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노란 애벌레가 있습니다. 
친구인 줄무늬 애벌레와 떨어져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꼬치를 짓고 있던 늙은 애벌레를 만나면서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 노란 애벌레의 물음에 늙은 애벌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하단다.” 
“너의 겉모습은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너의 참 모습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란다.  
삶의 변화가 있을 뿐이지 목숨을 앗긴 것이 아니다.”
꼬치를 짓는 애벌레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죽음과도 같은 꼬치를 짓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과 하직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감히 자신을 던져 꼬치를 지음으로써 흉한 애벌레의 모습을 벗어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자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모습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맺고 있던 집착, 욕심 등을 끊어버림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애벌레가 맛난 잎사귀에만 연연하며 꼬치 짓는 것을 주저할 때,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없듯이 내가 세상에서 죽지 못할 때 보다 높은 차원의 내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죽고자 할 때 예수님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거쳐야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26

-부산교구 박호준 신부-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는 것... 어떤 열매일까?
태어나면서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처....사회의 잘못된 가르침 쇠뇌되어 살아가고 있다. (뼈와 살 속에... 사뭇쳐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로 안한 몰이해와 마음의 상처는 서로


  마음의 상처는 가만히 있지 않고 세상에 퍼져 나간다.
몇해전 지하철 참사를 생각해본다. 그 가족들을 통해 그리고 영적인 영역에서 분명 우리의 마음에 큰 영향... 어두움이 되었던가?
상처와 콤플렉스 역시 이성의 작용을 흐리게하여 판단하고 공격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퍼져만 가는 세상의 어두움... 누군가 끊지 않으면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후손에게 가슴 깊이 전해질 것이다. 세상의 빛이 되는 것, 썩어가는 한알의 밀알이 되는 것은 이런 어두우을 감내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상처와 콤플렉스와 짜증은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세상의 소금, 빛이 되려 하지만... 많은 열매를 맺겠다고 예수님을 따라서 죽어 보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내 친구의 직장동료의 무시와 비난... 배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내가 재일 싫어하는 부조리한 직장 상사라면... 발소리만 들어도 짜증나는 사람....내 뒤에서 나를 밟고 설려고 중상몰약을 일삼는 그 비겁한 동료라면... (그들과 우리 모두는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살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배워왔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따르는 길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는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삶이 세상에 빛이 되는 삶이고 그들 속에서 치유를 위해 어둠의 확산을 막는 것이라는 사실이라면, 우리의 결심과 고백은 의미를 모르는 소리가 아니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난과 중상과 몰약을 감내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저 죽으면... 의 의미였다면 ... 축축하고 눅눅해지는 온 몸의 숨막힘 속에서 세포 하나하나가 섞어서 문드러지고 나서야 열매 맺는다는 무서운 이야기 였다는 사실이 이제는 함부로 따르겠다는 고백을 못하게 합니다.


  상처와 콤플렉스로 너무나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 “왜!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십니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역전하시는 하느님을 늘 봅니다. 그 상처를 용서하고 일어서고 나면 .... 그와 비슷한 사람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며 기도하고 도우려는 저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허락하신 고통이 제가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 기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죽었더니 산 것입니다. 사실은 죽여졌더니가 옳은 일이겠지만...^^ 여러분도 그러한 체험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 라우렌시오 성인과 생명의 역설(逆說)

-박상대 신부- 

  오늘은 258년 8월 10일에 순교한 로마교회의 부제 라우렌시오 성인의 천국 입성을 경축하는 날이다. 라우렌시오 성인만큼 복잡한 명함(名銜)을 가진 성인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스페인을 비롯하여 로마, 뉘른베르크, 부퍼탈 등 수많은 도시들과 가난한 사람, 과부, 청소부, 세탁인, 요리사, 유리세공업자, 양조주, 소방수, 도서사서, 문헌 수집가, 학생, 대학생, 화상환자, 눈병환자, 좌골신경통 환자, 피부병 환자, 페스트, 열병환자, 연옥불로 고통 받는 영혼 등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330년경 로마에 라우렌시오 성당이 세워진 이래로 수많은 성당이 성인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신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시오는 성 식스토 2세 교황(257-258) 시절에 로마교회의 재정과 사회복지를 담당하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이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일차적으로 교황이 감옥에 갇혔다. 그 때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이 교황과 함께 잡혀가지 않은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은 3일 후에 그도 자기를 따라 오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모든 재산을 제국에 헌납할 것을 강요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황제는 교회가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저녁 예식에 금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다. 또 너희의 스승인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야 한다’고 했고, 너희의 신(神)은 돈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말씀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나의 제국에 바쳐라.”

황제의 말을 듣고 라우렌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당신에게 정말 가치 있는 것을 다 갖다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니 3일간의 말미를 주시오.” 이에 3일간의 말미를 받은 부제는 곧바로 달려가 교황의 명대로 로마교회의 모든 재산을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3일후 수많은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황제 앞에 한 줄로 세워놓고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간단히 말했다.

화가 치민 황제는 당장 라우렌시오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석쇠 위에 쇠줄로 묶어놓고 불을 지피게 하였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은 성인은 순교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알고 황제와 형리들에게 놀랍게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고는 하늘을 향하여 로마제국의 회개를 빌며 숨을 거두었다. 형리들 중 하나가 성인의 믿음과 인내심에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성인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2,12-20)과 최후의 만찬(13-17장) 사이에 위치한 내용으로서 생명의 역설(逆說)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생명의 역설(逆說)이란 죽어야 산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 인간에겐 아주 생소한 이론이다.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집착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목숨과 건강을 부지하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은 다 취해야 하는데 말이다.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가장 좋은 예는 바로 밀알의 모범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24절) 밀알 하나가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밀알이 죽는 이유가 많은 열매를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죽음 또한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와 죽음의 시간이 곧 예수께는 영광과 새 생명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의 역설은 곧 예수를 따르려는 모든 제자들의 추종법칙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와 준비를 하였을 때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죽음으로써 새 생명에 얻을 것이고, 영원히 아버지 곁에 있게 될 것이다............◆

 

 


-
모화성당 김충귀(베드로)주임 신부님   -


독일의 한 작은 도시인, 뤼벡의 교회 마당에 서 있는 돌판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러 보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도 배우려 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부유하다 하면서도 구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문이라 부르면서도 두드리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치 않았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되새겨 보게끔 하는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살면서 생활따로 신앙따로인 따로국밥 같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길과 삶의 길, 분명 같은 길이어야 할텐데, 많은 경우 
신앙의 길은 온데간데 없고 삶의 길에 정신을 쏟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다보면 봉사하시는 신자분들 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분열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쪽 말도 들어보고 저쪽 말도 들어보면 결국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삶과 세속적인 눈으로만 바라 봄으로써 나중엔 감정싸움으로 흘러버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봉사를 하다보면 서로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잃어버리는 우리의 신앙들을 보면서, 
화해를 위해 본당신부로써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많은 경우 
자기감정에 매여버려 마음이 좁아지는 신자들을 보노라면 
가슴 아팠던 적이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서로 기도해주자고 달래도 보지만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화해할 기색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 바라보고 있는 신부도 답답하고 당사자들도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섬기다’라는 말은 타동사로써 윗사람이나 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뜻하며 
또한 남을 아끼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그 섬기는 대상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며 동시에 그 섬기는 이를 아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의 뜻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절제할 수 있을 때에 잘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그 섬기는 이의 뜻과 의견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따라 한다면 
과연 그것이 섬기는 이의 제대로 된 삶의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과연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를 위해 봉사하며 누구를 섬기는 신앙인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알의 비유를 통해 
어떤 이들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섬기며 따르는 이들이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들어 높일 것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봉사도 결국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따를 줄 아는 이들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이들이고 
함께 봉사하는 상대방을 존중하며 아낄 줄 아는 이들이 되어야합니다.
감정에 내 자신이 묶이게 되면 눈도 보이지 않고, 마음도 쪼그라듭니다.
그리고 가슴도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냥 혹시 내버려두지 않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지만 
이 그릇된 감정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좋지 않은 감정으로 내 자신이 휩싸일 때 
짧은 화살기도라도 하려고 하는 그런 의지가 있어야하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습관을 들일 때에 
내 감정은 기도로써 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습관을 안 들이는 것보다 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앙의 습관이 내 안에 옷 입듯이 자연스럽게 입혀진다면 
어쩔 수 없는 그 감정들도 우리의 의지로써 서서히 길들여져 갈 것이고, 
신앙의 길 위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작은 밀알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요한 12,24-26)

     -유광수 신부-

 

제가 이 복음 묵상을 쓰고 있는 곳은 여주군 강촌면 도전리라는 깊은 산골 마을이다. 밭에 심어 놓은 고추, 콩 등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고 논에 심어놓은 벼들도 원기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올해는 대풍년이 될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자연만큼 하느님의 섭리에 잘 순응하는 것도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따가운 햇빛이 내려 쬐면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춤을 추고, 더우면 더운 대로 땀을 흘려가며 받아들이고, 추우면 추운 대로 옴추르며 그대로 견뎌낸다. 한번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나간다.

 

봄에 푸른 옷을 입히면 푸른 옷을 입고, 가을에 단풍 옷을 입히면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에 옷을 벗기면 앙상한 살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항상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순응하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모든 자연은 이토록 하느님께 순응하건만 유독 인간만이 하느님의 섭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기를 든다.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하느님의 섭리에 반항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병들고 나약해지고 추하게 변해간다. 인간이 하느님께 순응하면서 나이를 먹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 즉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해 갈 텐데....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모른다. 자연이 아는 진리를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자연은 진리대로 살고 인간은 그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 자연과 인간과의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인간들이 알아듣고 진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아는 자연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봄에 뿌린 벼 씨가 땅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벼가 나서 무럭 무럭 자라고 있듯이 인간도 자라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은만큼 자라야 한다. 인간이 자란다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 죽어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불평이 죽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하느님께 절대적인 순명을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순순히 순응하는 모습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죽지 않기 때문에 툭하면 하느님께 또 이웃에게 악을 쓰고 대들고 이를 갈며 투덜대는 것이다. 벼들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지 말고 다소곤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며 나이 먹음의 무게이다.

 

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겸손을 라틴어로 "humilt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가장 낮은 곳이며 누구나 밟고 다닌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어린이 어른, 미운 사람 고운 사람, 서양사람 동양 사람 흑인, 죄인이거나 의인이거나, 살인자이거나 강도이거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밟고 다녀도 불평이나 거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뿐이랴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비를 받아들이고 햇빛을 받아들인다. 쓰레기를 받아들이고 침을 뱉으면 침을 받아들인다. 추위를 받아들이고 더위를 받아들인다. 대소변을 받아들인다. 땅은 거부하는 법이 없다. 불평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어준다. 그것이 땅의 겸손함이다. 그것이 땅의 봉사요 섬김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요 섬김, 자연에 대한 봉사와 섬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섬김이다. 그래서 땅이라는 humilta라는 단어는 겸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며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섬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인 땅에 떨어져 고개를 떨구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이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있는 곳에 우리도 함께 있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를 거부하고 겸손의 미덕을 멀리하고 있는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팔팔하고 뻣뻣하다. 모두 다 자기가 잘났고 왕이기 때문에 하느님도 이웃도 모두 다 떠받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자기 분수(꼬라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내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참으로 명언임을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유태인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감옥의 간수장이가 랍비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자 랍비가 "당신은 성서 말씀이 영원하며,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믿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간수장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랍비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시대마다 각 사람을 부르십니다. '너는 네 세상에서 어디쯤 도달했느냐? 너에게 주어진 햇수와 날수가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의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하느님은 '너는 마흔여섯 해 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거지요." 자기 나이를 언급하자 간수장은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랍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그렇지만 속 마음은 떨렸다.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검토하고 그 삶의 방식에 대하여 책임지게 하신다. 부버에 따르면 이 결정적인 마음 살핌은 인간에게 있어 영적인 길의 시작이다. 그 작고 조용한 목소리,'너 어디 있느냐?'고 하는 목소리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은 채 헤메이게 될 것이다.

 

아담은 그 목소리에 직면했고, 자기의 곤경으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발견하였다.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우리 삶의 지도에서 '현 위치'와 같다. 지하철 역 안내판의 '현 위치'에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지점을 확인하고 나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