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8. 13. 07:02

200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사람의 아들은 머지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마태오 17,23)

 

 "The Son of Man is to be handed over to men,
and they will kill him, and he will be raised on the third day."
And they were overwhelmed with grief.

 

  

 성전 세는 모든 유다인이 내야 했다. 그것도 이스라엘 화폐로 내야 했다. 그만큼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세금이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성전 세를 바치신다. 이스라엘의 모든 법규에 충실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갈릴래아 호수로 떠난다. 예수님 말씀대로 고기를 잡아 성전 세를 마련할 계획이다

 

☆☆☆

 

 예나 지금이나 세금은 무거운 짐입니다. 오죽하면 세리를 ‘총 안 든 강도’라 했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에도 세금이 많이 부과되었습니다. 로마는 골치 아픈 유다인들을 다스리고자 무겁고 비합리적인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리고 껄끄러운 상대에게는 표적 세무 조사를 하였는데, 이 모든 일의 하수인이 세리였습니다.
당연히 지주들과 상인들은 탈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정된 세금을 다 내다가는 망하는 판이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인들과 유지들은 그렇게 해서 로마에 협력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금은 세 가지로, 지세(地稅)와 소득세, 인두세(人頭稅)였습니다. 지세는 곡식의 1할을 바쳤고, 소득세는 소득의 100분의 1을 바쳤습니다. 인두세는 14세 때부터 의무적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제도에 응하시며 세금에 관한 한 책잡힐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세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기적을 베푸시어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세금 부담이 만만찮습니다. 우리 삶에는 세금이 아니더라도 강제성을 띤 돈이 적지 않아 그 부담이 더욱 무겁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교회에 바치는 헌금과 교무금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바쳐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제가 어제 읽은 책의 내용 중에서 제가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기반성이 담겨 있는 글인데, 그렇게 유명한 그 작가가 한때 심한 고통 속에서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더군요. 즉, 양쪽 귀의 이명(耳鳴)과 어지럼증, 우울증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작가는 항상 따뜻한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책에 담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 분의 책을 쭉 보아왔던 저는 그가 이러한 아픔 속에서 힘들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고통의 나락 속에서 자살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했던 지금 그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물론 여전히 양쪽 귀의 이명은 여전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견디어 내고 있으며, 3년 동안 먹었던 우울증약도 끊으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을 극복했다고 하네요. 그가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명예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는 지금도 책의 수익금을 자신을 위해서 쓰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후원하면서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명예와 재산을 쫓지 않는 그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신앙이며, 사람들의 사랑이 자신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고…….

바로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그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더 큰 용기와 희망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말을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기도의 응답 방식과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기도의 응답 방식은 다르다.”

그 다름을 생각하지 않고, 나의 기도 응답 방식만 옳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세금에 대한 문제가 나옵니다. 성전 세를 내야 하는가? 내지 않아도 되는가? 라는 문제이지요. 성전의 주인인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갖다내라면서 동전을 베드로에게 건네주시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만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까지도 배려하시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서로간의 다툼을 만들지 않으시려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만을 보아도 주님께서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나의 이웃들을 배려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나의 기도 응답 방식만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서, 내 이웃들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한 어리석음. 이제는 내 안에서 사라져야 할 텐데요……. 그런데 잘 안되지요?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기도의 응답 방식을 받아들이세요.


 빠다킹신부

 

 

   성전세     

-임문철 신부-


 제주도는 국제자유도시입니다. 아직은 제대로 법과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모든 물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자가 면제되어야 하고,
관세가 없어야 합니다. 현재 제주도는 공항이나 부두에만 있는 면세점이
확산되어, 제주 전역이 무관세 지역이 되어 전 세계의 재화가 제주도에 몰려들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금이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재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실한 국민이라면 기꺼이 납세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는 것을 유다인으로서 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림도 없이 “내십니다” 하고 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고 하느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립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도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성전세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의 자유로움

-전의이 수녀(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그런데 첫 번째 수난 예고인 마태오복음 16장 `21절과 달리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점이다. 여기서 ‘넘겨지다’라는 동사는 그리스어로 ‘pa�divdwmi(파라디도미)’라는 수동태다. 이 ‘파라디도미’라는 단어는 ‘넘겨주다’라는 뜻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배반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그릇된 메시아관으로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파라디도미’(마태 26,`15)`했고, 수석 사제들과 산헤드린은 예수께 대한 시기와 질투로 예수님을 ‘파라디도미’(마태 27,`2)`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비겁함과 야욕으로 인해 예수님을 ‘파라디도미’(마태 27,`26)`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파라디도미’`했고, 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을 ‘파라디도미’`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파라디도미’ 동사를 하느님도 쓰셨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극악무도한 죄인들 손에 넘기셨다는 것이다(마르 14,`41). 또한 사랑받는 아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자신을 속량 제물로 내놓으셨다. 우리는 이 한량없는 사랑에 힘입어 온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 생명수는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폭포수처럼 내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금 징수 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당연히 세금에서 면제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저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돈은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에 있다고 하신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 입성 때에 벳파게에서, 어느 어느 장소에 가면 어린 나귀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니 가서 끌고 오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그들이 뭐라 하면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라 하라 이르신 대로 가 보니 과연 어린 나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께서 아들의 때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는 사랑받는 아들의 거침없는 자유로움이 넘실거린다.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 황태웅 신부-

  

메시아의 비밀 그리고 성전세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한자기는 당신의 수난예고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응은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께 대한 실망이었고 낭패였습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며 기적도 행하고 가르침도 주시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루빨리 당신 왕국을 세우고 자기들을 등용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 주님께서 수난하시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단히 나무라셨습니다.“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네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또 부활이야기를 하시지만 수난하게 될 예수님을 미리 알았다면 그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마음도 편하고 또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좀 잘되기 원해서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된다고 하지만,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또 어떤 분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당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 빼놓고 다른 가르침이나 기적으로만 으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고, 우리 모두를 어떻게 구원 해주실 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이 주님이십니다”하고 외쳤을 때 “입 다물어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조차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것도 몇 번이나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메시아의 비밀” 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비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 성령의 내려오시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져야하는 우리자신의 모든 어려움,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피하고서는 즉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또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을 만류했다가 야단맞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 피하고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도 없고, 주님의 질책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두 번째는 성전세금을 내는 문제입니다. 그 당시 유대아에서는 남자가 20세가 되면 매년 성전세를 냈습니다. 세금을 내는 돈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리스 돈 드락메가 아니라 유대아 자기나라 돈 세겔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돈으로만 성전세를 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하던 그들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다른 돈은 일상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성전세금을 내는 데는 불가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신으로 숭배되었으니 당연히 우상입니다.


  우상이 새겨져 있는 돈,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우상이 된 돈이 성전마당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돈 그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마당의 환전상 자판을 뒤집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또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관들과 다른 종사자들은 성전세를 면제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세상 임금들은 누구에게서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냐, 아니면 남들이냐?” 베드로는 “남들입니다”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하고 확인하십니다. 그러니 주님도 또 베드로도 성전세를 면제 받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 없다”하시고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이 교회 내 일 때는 교무금이 되겠습니다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잘못도 범하겠지만,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라도

-양승국신부-


주변에 마라톤 마니어가 된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훈련시간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꼭두새벽부터 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단꿈에 젖어있는 이른 새벽, 그 달콤한 새벽잠마저 포기하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맵니다. 대회가 다가오면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기대감에 설렙니다. 더욱 열심히 훈련에 매진합니다.


저도 한때 좀 달려봐서 조금 아는데, 마라톤 그거, 보통 힘든 운동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입니다. 한번 코스를 뛰다보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수 백 번도 더 포기하고픈 유혹을 느낍니다. 그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몸무게가 꽤 나가는 분, 그래서 움직임이 좀 둔한 분은 ‘뛰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달리는 것일까요?


완주했을 때의 그 충만한 성취감,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그 환희 때문입니다.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 그것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참 묘합니다. 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대상을 획득하기 위해 부차적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도 합니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밤송이 안에 들어있는 맛있는 밤을 얻기 위해서 가시 좀 찔리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날카로운 우럭 지느러미에 손이 시큰거려도 ‘대물’을 잡은 기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머지않아 당신에게 다가올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예수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에 몹시 당황해하고 슬퍼합니다.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 최고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예수님의 고난은 필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인류구원을 위해 예정된 십자가 죽음, 명분은 참으로 그럴 듯하나 현실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피해갈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잔혹한 방식의 죽음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의연하게, 너무도 당당하게, 단 한 치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이 험난한 산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더 큰 행복, 더 큰 기쁨, 더 큰 환희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기꺼이 견뎌내십니다. 당당하게 맞서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더 큰 행복, 더 우선적인 목표, 곧 하느님 나라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했기에, 부차적인 대상들에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피 4장 11-12절)


삶이란 때로 혹독합니다. 삶은 시작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환상을 깰 것을 요구합니다. 삶은 점차 우리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의 쓴맛을 맛보도록 인도합니다.


다가오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고통에 고통으로만 엮어진다하더라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일 우리네 삶이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그저 곧 썩어질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땅속으로 인도함뿐이라면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을 사는 사람은 고통 너머에 참된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참 신앙인은 더 큰 가치관, 더 큰 희열, 더 큰 희망을 얻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모든 것들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강하다는 건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부활

-최종수 신부-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습니다. 생명이 다한 자연사도 그렇거니와
사고로 인해 맞는 죽음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순리처럼 다가오는 죽음을 거역할 수 없기에 그만큼 두려움도 더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신이기를 포기해야만 했던 예수님. 죽음 앞에서
얼마나 많은 번민을 했습니까? 가시관과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두렵기에
피땀을 흘리셨을까요?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다시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이 슬퍼한 까닭에는 스승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의 희망과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배반을 했으니, 제자들이 슬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작은 죽음과 작은 부활을 체험합니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뜬다는 것이 작은 죽음이며 작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한 번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도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빈손으로 왔던 손에
무엇을 들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생이 사랑만 남기고 가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그 사랑을 품에 안고 하느님 곁으로 갈 뿐입니다.

 

 

 참된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경규봉(전주교구)-


이스라엘은 마음과 정성과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주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잘 되는 길이며, 진정한 삶의 의미와 복된 길을 주시는 축복이다(4,40; 5,29; 6,2). 이 세상 모든 것은 주 하느님의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죄에서 벗어나 마음의 할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합당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30,6; 예레 4,4; 에제 44,7).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거역하거나,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말아야 한다(9,6). 이방신들은 마음 없이 바치는 재물도 받아들이지만, 하느님은 참된 회개나 믿음이 없이 바치는 제사나 재물을 절대로 받지 않으신다(1사무 15,22; 2역대 19,7). 하느님께서는 고아나 과부, 나그네처럼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하고 남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나 천대를 받기 쉬운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보살피신다(예레 22,16).이스라엘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을 상기하여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출 23:9).

오직 하느님만을 경외하여 충성을 다하고 섬겨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셨으며,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다. 그리고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대로(창세 15,5; 22,17)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찬송해야만 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하기 위하여 재물을 모으고, 학식을 쌓으며, 보다 많은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결코 만족을 얻거나 행복할 수 없다. 설사 세상 어떤 것을 통해서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이내 모자람과 부족함,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끼곤 한다. 오히려 갈증만 더 커질 뿐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나를 결코 채우거나 만족할 수 없다. 세상 것들은 모두 유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까닭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처럼 무한함을 원하고 영원을 원한다. 사람의 본모습인 하느님을 희망하고, 하느님처럼 되고자 한다. 사람의 영원한 꿈이며 희망은 하느님이다. 사람은 오직 무한하신 하느님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것이 인간 능력의 한계이다. 세상 것을 구하면 하느님을 섬길 수 없고, 하느님을 섬기면 세상 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흩트리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마음의 중심에 모셔 그분만을 경외해야 한다(마태 10,37).


모세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함으로써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세상 것들의 무가치함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무이하신 참된 신이시므로(4,35),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 쏟아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섬기라고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규정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라고 가르친다. 그 길만이 사람이 잘 되는 길이요,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오늘, 우리의 근원이시며 주이신 하느님, 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섬기고 경외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며 잘 사는 신앙인이 되자.

 

 

 

 † 수난예고와 성전세의 관계
-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이 한데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한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세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에 관한 말씀이다.

우선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은 공관복음 모두에 보도되지만 마태오는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마르코와 루가는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마르 9,30-32; 루가 9,44-45)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마태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말로 고쳤다.(23절) 이로써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교육이 한 단계 진척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제자들의 귀엔 수난과 죽음은 크게 들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크게 들리는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것은 스승의 다가올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그러나 그 애도 뒤편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숨어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하는 마음 말이다. 이 마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가야 하실 길과, 제자들이 가고 싶은 길 사이에 갈등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연결된 성전세 납부 문제는 마태오복음에만 수록된 고유 자료이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기 전까지 제관들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일년에 한번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도 성전세를 내야 했다.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 성전세를 징수하는 사람의 물음에 베드로가 예수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말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처음 낚아 올린 물고기 입 속에서 두 사람 몫의 성전세 한 스타테르(이스라엘 은전 한 세겔)를 발견한 것이다. 이 사건이 베드로에게는 기막힌 일이었겠지만 예수께는 대수가 아니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만물은 언제나 말씀이신 예수님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베파게의 당나귀: 마태 21,2-3, 최후만찬을 위한 방: 마르 14,13-16 등)

그렇다면 왜 마태오가 두 번째 수난예고의 말씀과 성전세 납부 문제를 서로 붙여놓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수난예고와 성전세 납부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가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한데 묶어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마태오복음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고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없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물리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야훼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훼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말씀도 여기에 근거한다.(요한 2,14-21; 마태 21,12; 26,61; 27,40; 마르 14,58; 15,29) 하느님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찾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實定法)에 권리를 양보하신다. 입법자와 집행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리 하셨다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때가 오면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며,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가 선포될 것이다.

이는 인자(人子)가 자신의 죽음으로 취득한 자유이며,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지켜낸 아들에게 선사된 자유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는 누구나 이 무한한 자유를 나누어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