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3일 일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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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말씀이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일깨워 준다
하느님의 신비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 앞에서, 복잡한 일상사에서 그분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그냥 지나치면 평범한 일로 여겨지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그분 힘이 닿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을 인간적 계산만으로 파악하려 들면 힘이 듭니다. 은총이 들어올 틈새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은 하느님의 뜻으로 인정하기 쉬우나, 궂은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라고 하신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하기 싫은 그 무엇입니다. 또한, 하고 싶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십자가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과연 망설임 없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십자가 앞에 선뜻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순교자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들을 기리며 그분들의 삶을 본받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가르침입니다
새벽을 열며
며느리들이 명절 때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사이트에서 추석을 앞두고 기혼여성 1천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명절 때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로 가장 많은 응답자인 33.8%가 “더 있다 가라. 벌써 가게?”를 꼽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위는 동서 지간에 비교하는 말(20.2%), 3위는 음식 준비할 때 잔소리(12.7%)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준비하느라 수고했다.”(31.3%)와 “어서 친정에 가야지.”(22.1%)가 각 1,2위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더 있다 가라. 벌써 가게?”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결코 나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오랜만에 온 가족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래서 명절 제사가 끝나자마자 자기 집으로 떠나려는 가족이 아쉬워서 한 말인데 이 말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라니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오랜만의 만남으로 갖게 되는 즐거움보다는 일하는 어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일하는 어려움보다 만남의 즐거움이 더 크다면 이러한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로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에 대해서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그들의 삶이 과연 평안했을까요?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린 것은 물론 육신의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교자들은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었고,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피의 순교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그러한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현재도 순교와 배교의 생활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반대하는 것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배교자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장 원하는 삶으로 현대의 순교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 듣기 싫은 말을 하기 보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 그리고 남들이 모두 꺼리는 일들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웃음 지으며 행하는 것 역시 현대의 순교입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남들 앞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순교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우리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그들처럼 살고 있을까요?
현대의 또 다른 순교자가 되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내가 받은 사랑의 무한함
-배광하 신부-
한국 초대교회 신앙의 선조들의 영성을 이야기하라면 저는 당연히 겸손을 꼽습니다. 선조들은 참으로 대단한 겸손의 삶을 사셨습니다.
계급의 구분이 뚜렷했던 시대였는데, 어찌 그토록 자신을 낮출 수 있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자 선비이며 양반이었던 신앙의 선조들은 일단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무한히 내려오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백정들까지도 품에 안으셨고 같은 형제자매로 대하셨습니다. 배운 자가, 있는 자가, 기득권을 가진 자가 내려오니 복음은 일사천리로 퍼져 나갔습니다.
윗물이 맑고, 윗물이 모범을 보이니 아랫물 역시 맑게 되었고, 그야말로 신명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 같은 끈끈한 정이 있고 서로가 낮추며 애덕의 신앙생활을 하니 박해 중에도 서로를 격려하며 용감히 순교의 길을 함께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모습은 분명 사도행전의 첫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빼어 닮았습니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당시 교우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가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아주 아무 것도 없는 형제들에게 도움을 베풀어 줄 줄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주니,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 일을 목격한 노인들은 그 때에는 모든 재산이 정말 공동으로 쓰여 졌었다고 말한다. 신입교우 중에서 남보다 학식이 많은 이들은 자기 집안이나 이웃에 있는 무식한 이들에게 기도문과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본분으로 알았다.”
그리스도교는 시작부터 내려옴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 세상에 내려 오셨는데, 우리가 무얼 그리 잘났다고 내려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신앙의 선조들은 분명 겸손 되이 내려오실 줄 아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순교는 자신의 뚝심이나 고집, 자신이 내세우는 주장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 은총을 지키며 겸손되이 더불어 나누며, 지금 바로 이곳에서 천국을 만들어 나갈 줄 알았던 이들이 순교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영원한 삶의 희망을 바로 현세에서부터 만들어 나갔던 이들이 천국 영생의 행복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이겨냅니다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자들의 행적 기록에는 당시 천주교인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던 형구들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읽노라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또한 그 같은 무서운 형벌을 선조들은 어떻게 이겨내고 순교의 길을 걸으실 수 있으셨을까를 생각하면 숙연해지며 저의 안일한 신앙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 고문 몇 가지를 소개해 봅니다.
1. 곤장 - 곤장 서너 대를 맞으면 살이 터져 피가 흘러나오고 살점이 잘게 찢어져서 사방으로 튑니다. 열 대쯤 맞으면 곤장이 속뼈를 후려쳐서 몸서리치도록 끔찍하게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맞는 자나 때리는 자나 땅바닥이나 온통 튀는 피와 떨어져 나가는 살 조각 등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2. 주뢰 - ‘주리’, 혹은 ‘전도주뢰’라고도 하는데, 양편 발의 엄지발가락을 끈으로 한데 꼭 묶습니다. 망나니들이 정강이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우고, 정강이 뼈가 활처럼 휠 때까지 서로 양편에서 주릿대를 힘껏 잡아당깁니다. 이 형벌은 너무 끔찍하고 잔인하다 하여 1732년(영조 8년) 금지령을 내렸으나 이후에도 계속 사용됐습니다.
3. 다리비빔(삼모장) - 삼각형의 몽둥이로 양다리 앞부분(정강이)을 세게 마찰합니다. 살가죽과 속살이 즉시 문드러지고 뼈가 드러납니다.
이밖에도 끔찍한 형벌이 많지만, 이렇게 피투성이 된 신자들을 감옥에 쳐 넣게 되는데, 감옥은 그야말로 더 끔찍하였습니다. 겨울은 너무도 춥고, 여름은 지독히 더웠습니다. 더구나 너무 좁고 옹색하여 거기에 갇힌 신자들은 다리를 뻗을 수조차 없습니다.
또한 매 맞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고름 등이 멍석자리에 젖으면, 이내 썩어서 악취가 코를 찔러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굶주림은 신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괴롭혔습니다. 깔고 누운 멍석을 뜯어 먹거나, 이, 벼룩, 빈대 등을 잡아먹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망나니들의 칼이 자신들의 목을 자르기 전에 감옥에서 목숨이 끊어질 것을 더욱 걱정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03위 성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명의 순교자들이 이 끔찍한 길을 함께 걸으신 것입니다.
그분들은 어떠한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등도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힘으로 이겨 내신 것입니다.(로마 8,35~39 참조)........◆
죽음 넘어선 순교자들의 신앙
-이기양 신부-
순교자 성월인 9월이 무르익어가는 오늘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제의 날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최초로 한국인 사제가 되신 분으로 26살에 돌아가셨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박해시대 때 신부님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복사도 하고 길 안내도 했던 훌륭한 평신도로서 45살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은 이 분들과 1만여 명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를 생각해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천주교가 들어올 때는 선교사들이 앞장을 서지만 우리나라에는 먼저 천주교 관련 서적이 들어왔습니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 틈에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인들을 위해 예비신자 교리서로 쓴 「천주실의」라는 책이 들어왔고, 당시 내로라 하는 학자들은 이 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강학회를 열게 됩니다.
천주학은 공부를 할수록 이들에게 놀라운 세계를 제시해 주었고 새로운 우주관, 신관, 인간관을 접하면서 이들은 점점 천주학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공부할 책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마침 그들과 함께 했던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중국으로 가게 되었고, 그는 그라몽 신부를 찾아가 천주교에 관련된 지식과 신앙을 배우고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세례를 받고 교회에 관한 많은 서적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을 했고 이제 학자들의 모임은 천진암에서 지금의 명동 성당 자리인 김범우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명례방'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합니다. 당시 유명한 학자들이었던 이벽, 권일신, 정약전 형제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천주학은 이들을 사로잡아 이제 학문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목자 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학자들은 교리 연구에 더욱 노력하는 가운데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또 한 가지가 바로 제사에 관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이 문제로 고심하던 그들은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문의를 하기로 하고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시행하고 있는데 계속해도 무방하겠습니까?"
주교는 두 가지 모두 안된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순종한 신자들은 이제까지 행했던 '가성직제도'를 폐지하고 성직자의 파견을 애타게 요청함과 동시에 조상제사 문제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사건이 전라도 진산에서 발생합니다.
윤지충과 권상연 형제가 제사를 지내려고 온 가문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며 신주를 불살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게 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거부한 이들 형제는 대역 죄인이 되어 귀향을 가고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남녀노소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천주교를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사학으로 규정해 대역죄로 엄하게 다스려 뿌리 뽑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1791년 신해년에 처음으로 박해가 일어나 이승훈, 권일신이 귀향을 가고 죽게 되면서 100여 년간의 박해동안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처형당하는 아픔을 겪고서야 마침내 1886년 한불통상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됩니다. 1893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약현성당이 들어서고 이승훈 베드로 한 명으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 500만 명이 넘는 신자수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한국 천주교의 역사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신자 수가 늘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죽음을 넘어선 신앙을 선택하게 했을까요? 비신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희광이의 칼날 아래에서도 기쁘게 주님을 찬양하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오늘 복음 말씀대로 순교자들은 교회의 초석이 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고, 목숨을 잃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순교자들의 목숨을 넘어선 신앙이 우리 신앙으로 뿌리내리길 기원합니다............◆
김신부님의 열정과 철저한 투신
-홍금표 신부 -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입니다. 신부님은 충청도 솔뫼에서 1821년 출생하여, 15세가 되던 1836년 멀리 마카오로 유학해 1845년 8월 17일 서품 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가 되신 분입니다. 서품된 후 약 8개월 동안 활동하시다 체포되어 서품 된 지 1년 1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사제로 계시다가 만 25세의 짧은 생애를 사신 분입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 필자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열정」과 「철저한 투신」이란 두 단어입니다.
물론 「열정」이라는 말과 「철저한 투신」이라는 말은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고 항상 선일 수만은 없는 단어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지향하는 바가 「공동선」이나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선」 또는 「하느님」을 지향할 때 이러한 단어들은 참으로 가치 있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러한 가치 있는 단어들을 살지 못할까요? 아마도 자신의 욕망과 게으름, 그리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고자 하는 마음과 내 안의 유혹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마지막까지 신부님이 선택한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많은 갈등들을 경험하였습니다. 혹독하게 가해지는 육체적 고문이 그것일 수 있고, 신부님에게 당근으로 주어지는 세상의 재물과 권력도 그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욕구가 그것이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떠오르는 의심과 갈등도 또 하나의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 영복씨도 이런 말을 합니다. 고문보다도 침묵과 내면의 갈등이 더 무서웠다고. 아마 신부님도 감옥 안에서 이러한 내면으로부터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유혹은 쉽지만은 않은 이끌림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유혹들은 하나같이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고, 조금만 한눈을 판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무거운 것들이었지만 신부님은 그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그 힘은 신부님만이 가졌던 주님께 대한 열정과 철저하고도 타협 없는 투신의 정신,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처럼 걱정하거나 두려워함 없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의 힘이 적절히 조화된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유혹은 마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유혹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혹과 대화를 시작하면 이 유혹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유혹을 이기기 위해선 단호한 거절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그 유혹과 대화를 시작하면 대부분은 유혹에 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유혹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자세가 김 신부님과 같은 자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김 신부님처럼 자신의 길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타협 없는 신앙만이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삶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삶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에서 연습과 실습 그리고 실패를 통한 자기반성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것도 어쩌면 오늘날 이 땅의 사제들이 사제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바로 신부님이 가졌던 이러한 정신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현대는 김대건 신부님이 사셨던 시대의 국가 권력처럼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방해하는 방해물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 한 사실은 오늘날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적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교묘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름다움과 선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과 학문의 이름을 통해 하느님의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김 신부님의 열정과 투신을 본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오늘의 장애물들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한 것이고 이와 더불어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대한 때로는 맹목적이다 할 만큼 철저한 투신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없이는 순교도 없다
-유영봉 몬시뇰 -
묵상 길잡이 : 선조들은 스스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신앙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고 키우며 지켰다.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확신이 없는 우리의 삼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취미생활이 아닌가? 반성해볼 일이다.
1. 스스로 깨달은 진리
18세기 주자학(朱子學)에 젖어 있던 조선 사회는 갖가지 병폐와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 사조를 갈망하던 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極)등의 서적들을 통해 신앙에 눈뜨게 되었고, 단순히 학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축일표도 없는 상황에서 초이레, 열나흘, 스무 하루 등 7일마다 육신 일을 파(罷)하고, 상제(上帝)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기도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나름대로 주일을 지키며 삼종기도와 아침 저녁기도를 하며 살았다. 그들은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전념하였다. “하느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반상(班常)의 신분차이가 뚜렷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가슴 벅찬 깨달음이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784년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50여 년을 중국인 사제 두 분이 잠시 사목했을 뿐, 평신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일으키고 박해 중에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순교는 믿음의 증거이다.
‘순교자(martyr)’는 원래 ‘증거자’란 뜻이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백여 년 동안 만여 명의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일에 있어서 엄숙하고 비장하지 않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순교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 신부의 부친 최영환(프란치스꼬)는 1839년 7월 아들을 유학시킨 사학죄인으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며 100대가 넘는 곤장을 두 번 이상 맞고, 고문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9월12일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최도마 신부의 동생들인 5명의 자녀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둘째 12세 최희정(야고보), 셋째 최선정(안드레아), 넷째 최우정(바실리오), 다섯째 최신정(델네시포로)는 나이 어려 석방되었고, 세 살짜리 젖먹이(최스데파노)만 옥에 남았다. 그런데 굶주림과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유도(乳道)가 막혀 젖이 나지 않아 젖먹이가 어머니 무릎에서 굶어죽기에 이르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자기 자녀가 무릎 위에서 굶어죽자 이 마리아는 한 때 관장에게 배교(背敎)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감 중인 여러 교우들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금 순교의 뜻을 굳힐 수 있었다. 옥에서 풀려 나온 둘째인 ‘최 야고보’는 동생들과 함께 푼푼이 동냥한 돈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옥중의 어머니를 면회하고, 동생들을 잘 돌볼 것을 약속하며 격려하였다.
순교의 때가 가까이 오자 어머니 목을 벨 휘겡이 ‘회자수(劊子手)’를 찾아가 구걸한 돈을 건네고, 어머니의 모습을 상세히 일러주면서 ‘칼을 잘 갈아 어머니가 고통을 많이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한 칼에 목을 베어주도록 부탁하였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3. 취미생활인가? 신앙생활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 놓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선조들에게 비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차라리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시대엔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자기 진리나 신념을 지닌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권에 눈먼 철새 정치인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자를 찬양하기에 바쁜 매스컴과, 실직한 남편과 자녀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세태는 신앙을 위해 칼 앞에 목을 내민 순교자들의 대열을 ‘바보들의 행진’으로 비웃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자는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없다.”든가, 이스라엘처럼 “그리스도교 신자는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다면, 그래도 성당에 나올 신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와 순교선열들과 근본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고, 부활한 예수가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도 없다. 이 세상이 전부인 이들이 어떻게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는가?
양극화로 인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자들의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듯이, 독거노인들과 소년 소녀가장들 그리고 갖가지 이유로 고통 받는 이웃의 아픔을 지극 정성으로 함께 나누어보자. 그 안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토록 하자. 그리하여 죽음도 두렵지 않는 참 믿음을 가꾸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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