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일

Margaret K 2007. 9. 23. 07:53
 

2007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13)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ammon.”

 


 집사는 재물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유혹이 많기 마련이다. 재물을 탐하다 발각된 집사는 잔꾀를 부린다. 한낱 집사도 앞날이 불안하자 대비할 줄 알았다. 영생을 바라는 우리 신앙인들은 얼마만큼 준비하며 살고 있는가?(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축내다 발각됩니다. 화가 난 주인이 쫓아내려 하자 잔꾀를 부립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문서를 조작하여 훗날에 대비하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집사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평범한 집사도 장래가 불안하면 살아날 궁리를 하거늘 하물며 영생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은 삶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살았는지의 판가름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 쏟는 노력만큼 신앙생활에도 정성을 쏟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노력하는 만큼 신앙생활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의 노력은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 없이 어찌 주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의 노력은 선행입니다. 신앙생활에 선행이 없으면 그의 신심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데 어찌 기쁨이 주어지겠습니까?
세 번째의 노력은 성사 생활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성사 생활은 미사 참여입니다. 비록 날마다 미사에 참여하기는 힘들더라도 자주 성사 생활을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하느님의 힘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후손      

-김인한 신부-

 

본관이 안동인 저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교회사를 배울 때 순교선조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저희 집안의 선조들이 교회 박해에 앞장섰다는
이야기들을 듣고 부끄럽기도 하고, 못내 안타깝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순교자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순교자들의 피로 커왔고, 순교자들처럼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박해자들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박해자들의
그 잔인함도, 순교자들을 처단하던 냉정함도, 순교자들의 길을 방해하던
교만과 이기심도 우리 안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해자의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내 맘대로 다루고 싶어 억누른다면 우리는 순교자보다 악랄한
박해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피를 흘려서 지켜낸 신앙을 우리가 단순히 무임승차
하여 살면서 선조들의 순교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과거의 칼부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믿음을 증거하고 하루하루
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순교자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우리는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 등 외적 요인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요소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무게가 다릅니다. 내적인 요소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외적 시련이 실제보다 좀 더 가벼울 수도 있고, 더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무게에서 ‘나’라는 것이 없어지면 무게는 훨씬 가벼워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는 것, 그것은 곧 ‘나’를 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 다음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니어그램을 통해(세상 사람의 성격유형을 아홉 가지 테두리 안에서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이해를 해봅니다. 에니어그램이 보여주는 아홉 가지 성격유형은 우리의 거짓 자아상이라고 합니다. 완벽주의자 1유형,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남에게 헌신하는 조력자 2유형, 성취욕이 강한 3유형, 다른 사람보다 늘 특별해야 하는 낭만주의자 4유형, 타인과 늘 거리감을 두어야 편안한 관찰자 5유형, 매사가 불안하기에 충실한 6유형, 어두운 면을 외면하는 낙천주의자 7유형, 힘의 원리에 의존하는 8유형, 관계를 해칠까 봐 자신을 작게 평가하는 평화주의자 9유형.
이렇게 성격이 형성된 이유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내가 ~`해야만’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느끼는 데 있다는 것, 그래서 ‘~`되어 사랑(인정)받기 위해’ 스스로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짓 자아를 발견하고 그 껍질을 벗는 것이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대가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을 채워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지만 내가 그것을 깨닫게 되기까지가 힘겨운 여정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대가’입니다. 예수님처럼 균형 잡히고 반듯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비틀린 자신을 보고 올바로 풀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만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구나.’를 몸으로 깨우쳐야 합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식들을 몽땅 잃고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하였지만 그러고도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을 때까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대가를 치렀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날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나날의 삶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여러 가지 희생과 노고입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혹은 없애고’가 아니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죽음의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지만 지셨습니다. 어느 정도 지고 가다가 내려놓은 것도 아니요, 죽을 때까지 지셨습니다. 우리도 죽는 날까지 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한테 부과된 십자가를 메고 가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니 자신의 것이 훨씬 무거운 것 같아 십자가를 준 사람에게 잘라 달라고 하였지요. 조금씩 조금씩 잘라 내어 가벼워진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나중에 큰 구렁텅이를 만납니다. 모두 자신이 메고 온 십자가로 다리를 놓아 구렁텅이를 지나 낙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는 십자가가 짧아서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 나오는 롯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은 롯의 가족을 소돔의 멸망에서 구해 주시고자 했습니다. 천사들이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 19,17)라고 재촉하자 롯은 “그렇지만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 성읍은 가까워 달아날 만하고 자그마한 곳입니다. 제발 그리로 달아나게 해주십시오. 자그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목숨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창세 19,19-­20) 하였습니다. 그는 산까지 갈 십자가를 가까운 성읍까지만 가도록 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산까지 가라고 하셨을 때는 그가 갈 수 있도록 안배해 주시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롯은 믿음이 부족하였습니다. ‘저 자그마한 성읍’에서 살 작은 그릇, 롯이란 그릇이 그만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에 그는 산 정상에서 맛보는 완전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롯을 산 정상으로 초대하셨듯 우리 모두한테도 ‘야훼의 산’으로 올라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그 산은 율곡 선생의 시 “밟은 이 있어도 발자국 없고, 죽지 않고서는 오를 수 없고, 오르지 않고는 살지 못할 마음속에 아득한 산 하나”와 같은 산입니다.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성인들 중 많은 분들이 무식쟁이였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이 두려워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루카 22,57) 한 것과는 달리 그분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형리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증거하며 귀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분들은 오늘 ‘산’ 정상에서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면서 후손들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피 흘림 없는 순교를 하도록 간구해 주실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

   윤경철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총장)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는 똑똑하기는 했지만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해고를 하자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닫습니다. 집사는 실직자가 된 후의 생활에 불안을 느낍니다.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었습니다.(3)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황 속에서 집사는 필사의 몸부림을 칩니다. 빚 문서를 조작하여 실직 후 자신을 도와줄 인맥을 형성하는 완전범죄를 시도합니다.(4)


우리의 상식으로 본다면 집사의 처신은 잘못된 것이며 결코 칭찬 받을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집사의 이러한 행동을 꾸짖기보다 오히려 칭찬하고 계십니다. 무슨 이유로 칭찬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집사를 두고 칭찬한 것은 그의 부정직한 잔꾀가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취한 신속한 상황 판단과 발 빠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전반적으로 정리하는 심판의 시기입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를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을 잘 활용했던 집사의 태도는 심판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13)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과 재물을 동등한 서열에 둔다면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재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돈을 만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재물에 ‘올인’을 해서 돈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재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부정한 집사가 재물을 사용해서 친구를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재물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방법은 베풂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베푸는 행위를 선으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 베풂을 실행한 사람을 당신의 ‘친구’로서 천국에 받아들이십니다.(마태 25, 34∼40 참조).


이제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모습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기억합시다.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재물은 값지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

  -홍금표 신부-


"구원의 절실함 지금 가슴으로 깨닫자"

인간의 삶에는 가슴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과 머리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대표적인 부분이 인간관계란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가슴의 논리를 앞세우다보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관계란 면에서는 머리의 논리가 차지하는 넓이 보다는 가슴의 논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넓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가슴의 논리는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란 약점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가슴의 논리는 삶의 따스함을 불어 넣는 힘이요,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우리 삶의 최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의 발전과 인간의 행복이 비례하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현상이나 경제 발전이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현상도 결국 경제 자체에 그러한 요소가 있기 보다는 경제를 지배하는 머리의 논리가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삶의 숙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슴의 논리의 고유성을 인정함으로써 가슴과 머리가 조화되는 삶,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슴의 영역을 넓혀 감이 바로 오늘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3개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예수님에 대한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공격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로서 그 주제는 모두 잃은 것을 되찾는 기쁨으로 요약됩니다.

이 비유들은 실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슴의 영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많은 면에서 쉽게 수긍이 갈 뿐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과 뜻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고 좀 더 차가운 머리의 논리로 생각해 본다면 이 이야기들은 많은 문제점을 가진 이야기들입니다.

먼저 잃은 양을 찾는 비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무시하는 것, 이것은 욕심입니다. 맹수와 강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미련을 끊고 99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현명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환산은 힘듭니다만 은전 한 닢은 대략 삼 백원(미화 18센트) 전후의 작은 돈입니다. 때문에 돈을 찾기 보다는 돈을 찾는 노력과 수고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함이 더 적극적인 행위요 칭찬받을 행동입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아무도 없기에 사실 복음의 아버지처럼 잔치를 베풀고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현명한 아버지였다면 어쩌면 그 기쁨을 속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이 크다 하여도, 큰 아들을 생각하고, 또 작은 아들의 소행을 알고 있는 종들과 이웃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 보다는 차갑게 대함으로 근신케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지만 작은 아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한 질책은 성실히 일한 큰 아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상을 받지 않고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행동이 지적을 받지 않고 상을 받는다면 탕자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작은 아들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미래의 수많은 작은 아들들도 그러한 충동에 너무나 쉽게 빠져 들 위험이 있기에, 아버지의 기쁨이야 잔치를 베풀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만 잔치를 베풀고자 하는 욕구를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삭이고, 좀 더 냉정하게 아들을 대하는 것이 좀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자와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모두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점이고 예수님은 이를 교훈으로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줌과 동시에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아낌의 마음으로 머리의 논리와 이익을 넘어서는 어리석은 사랑, 관계 때문에 모든 조건과 이유를 넘어서는 바보 같은 눈먼 사랑이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사랑이요, 신앙인이 추구해야할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함을 찾고 사랑의 조건과 이유를 찾는 머리의 유혹을 자제하는 일,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 때문에 때로는 비웃음과 손해를 감수하는 가슴의 논리로 사는 일, 죄인을 감싸안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라 생각해 봅니다.............◆

 

‘영리한 집사(執事)’의 비유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영리한 집사(執事)’의 비유를 이야기하시고, 재물을 인생의 목적과 같이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에게 충실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교훈하십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의 비유 이야기에 나오는 집사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불의하게 낭비하였습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알고 본인에게 해임을 통보하였습니다. 그러자 집사는 약은 기지(機智)를 발휘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빚 문서를 위조하여 채무를 줄여주거나, 없애 주었습니다. 그는 그가 해직되었을 때, 그들로부터 후한 대접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해임되면서도 배임과 횡령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된 주인이라는 표현은 오해를 일으킵니다. 주인이 아니라 주님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부자 주인이 자기를 속인 집사를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속은 주인이 자기를 속여먹은 집사를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비유의 주인공인, 정직하지 못한 집사를 칭찬하셨다는 말입니다. 동기야 어디에 있던, 그 집사는 빚진 사람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비유 끝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는 불의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이웃에게 좋은 일을 행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비유 이야기는 집사의 불의함을 비호하거나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부각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던 집사가 이제는 빚진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사는 남의 재물을 관리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사람은 모두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집사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은 본시 우리의 것이 아니고, 관리하라고 하느님이 잠시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살기 위해 필요한 재물입니다. 오늘의 집사와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서 자기 주위에 기쁨이 발생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들 중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청빈에 특별히 주목하였습니다. 재물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쌓아놓고 그것을 섬기며, 자기의 위상을 높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루가복음서는 인간이 삶의 보람을 재물에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루가복음서 12장(16-21)에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많은 수확을 올려서, 새 창고까지 지어 재물을 쌓아 두고, 이제부터 즐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느님은 그 날 밤에 그를 데려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재물만 욕심내어 쌓아놓고, 이제는 즐길 수 있겠다고 안심하는 부자는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요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에게 베푸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재물의 위력은 큽니다. 재물은 사람들을 쉽게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재물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우리는 봅니다. 재물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불목하고, 부부가 갈라서고, 형제자매가 등을 돌립니다. 서로 믿고 가까이 지나던 친구에 대한 의리도 쉽게 저버리게 하는 재물입니다. 그런 불행한 일은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쉽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면 하느님도 이웃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난 진지한 종교들과 사상은 모두 재물을 경계하라고 권합니다.

불교는 무소유(無所有)를 깨달음의 절대 요건으로 가르칩니다. 유교 이념을 실천하던 옛날 우리의 선비들도 청빈락도(淸貧樂道)를 제일의 덕목(德目)으로 삼았습니다. 재물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지, 사람이 그것의 노예로 전락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재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자유로운 경지에 사셨는지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 얽매인 사람에게는 큰 위험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더 쉽습니다.”(마르 10,25).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루가 6,20)고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불의하게라도 재물로 친구를 만드는 순발력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재물은 ‘불의한 것’이고 재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하지 않은 다른 재물이 있고, 아주 작지 않은 큰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관련된 일은 ‘남의 것’이라고 말하고 ‘너희의 몫’이 따로 있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재물의 욕심에 허덕이면, 그것은 ‘불의한 재물’이며 ‘아주 작은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인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재물로써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에 휘말리면, 속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도 이웃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생명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과 더불어 마치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처신합니다. 재물을 주님으로 삼은 것입니다.

재물이 인간 안에서 요동치면 인간은 기고만장하고 허세를 부립니다. 그러다 재물이 떠나가면, 그 사람은 살 의욕을 잃습니다. 재물의 노예가 된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의 재물’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여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세상의 ‘작은 일’을 버리고 아버지의 ‘큰일’을 실천하는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재물 사용

-조욱현 신부 -

 

오늘 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재물 사용법에 대해 몇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재물을 잘 사용하여 진정 하늘나라에 자신을 개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시다.

[복음: 루카 16,1-13]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는 어떻게 그런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주인에게 들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나쁜 짓임에 틀림없다. 당시의 청지기는 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자신들의 보수를 챙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의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를 감해주고, 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를 감해준다. 이렇게 이 약은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줌으로써 개인적인 수익을 거둘 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의 환심도 산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다(8절). 이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우선은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는 것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울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9절). 이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알라는 권고로 맺고 있다. 여기서의 ‘친구들’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막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을 의미한다.

이것이 루가의 입장에서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고 해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만다. 재물은 나눔이 있을 때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던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저주만이 있게 된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재화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재화이다. 참고로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12절)고 하시는데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은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재물은 사람의 모든 관심을 당겨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있으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이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태도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교부들도, 오늘의 교회도 이렇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재화의 대부분이 인류의 1/3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듯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1디모 2,2)..............◆

 

   재물은 천국을 가는 데 장애물로 나타나지만, 잘 사용할 때

-서울대교구 홍보처-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생은 가시밭길이라고도 하고 또한 인생은 고통의 바다로 표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어려움은, 심리적으로 서운한 감을 유발시키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서운한 감정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젊은 사람이나 또는 자식을 많이 둔 사람에게 모욕이나 하시하는 대접을 받았을 경우, 자식 없는 서러움에 잠길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월세나 전세를 사는데 집주인과 마찰을 하는 경우, 집 없는 서러움으로 서글픈 감정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돈 때문에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거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돈 없는 서러움에 잠기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서러움은 외적인 자극에 의해 심리적인 요소가 영향을 받고, 외적으로 결핍된 삶의 조건이 인간을 괴롭게 만듦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외적인 요소를 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누구나 쉽게 이러한 심리적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외적 삶의 조건에 대한 결핍된 요소는 인간의 육신적인 욕구가 정신적인 욕구를 대체할 때에, 인간 누구도 만족스러운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욕심이 채워지면 또 다른 욕심이 생기고 이러한 욕심은 끝없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심


인간의 외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시키고 이를 통하여 사람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러한 삶의 요소와는 별 관계 없이 자신의 내적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바꾸니, 바로 거기에 천당과 극락이 있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이 어찌 보면 더 빠른 지름길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삶의 조건은 갖추어져야만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약은 청지기는 적어도 이러한 외적인 삶의 조건을 갖추고 살다가 삶의 조건을 남용한 나머지, 주인에게 모든 것을 박탈당하게 되었고, 이것은 청지기에게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대처방법으로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방법들은 모두 현실적으로 실현하기가 곤란한 것들이었다.

땅을 파면서 막노동을 하는 것도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므로 힘이 들어 못할 것 같고, 쉽게 거지 노릇을 하자니 지금자지 자신이 누리던 신분에 비추어 볼 때 너무 격에 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빚진 것을 탕감해주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나중에 자기를 괄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죄를 생각해내고, 그 방법을 쓰고 있다.

재물도 잘만 사용하면


예수님은 이러한 청지기의 잘못도, 적어도 윤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방법을 통하여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태도를 칭찬하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가 좀 알아듣기 힘들지만, 예수님은 여기에서 어떤 윤리도덕적인 기준을 설정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위기에 처한 청지기가 재빠르게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어, 자신의 설 곳을 마련한 것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들도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라는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재물은 천국을 가는 데 장애물로 나타나지만, 잘 사용할 때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사는 데 겪는 서러움이 사람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이, 재물도 오히려 구원에 있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돈과 재물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돈과 재물을 유용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돈은 인간 사회속에 필수적으로 존재해 왔던것입니다. 돈은 물건들의 가치를 측정하고 값을 매기는데 좋은 매개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각 민족마다 그 나름대로 고유한 돈을 만들고, 그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고 팔고 하면서 사회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여서 만든 상품을 돈과 바꾸고, 그 돈을 가지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사기도 합니다.

이처럼 돈이란 우리 인간 사회에서 교환의 매개체로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여러 가지 종류의 돈중에서도 돈은 각시대마다 유력한 힘을 갖고 전세계적으로 통하는 돈들이 있어 왔는데, 오늘날에는 아마도 '달라'가 제일 유력할 것입니다. 즉 '달라'가 있으면 그 돈가지고 전세계의 어느 상품이고 다 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각나라로 수출을 통해 달라를 벌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도 '달라'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 국제 사회에서 힘있는 나라로 인정받고 또 국제적인 지위도 높아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돈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다 필요한 것이고 또 생존을 위해서나 활동을 위해서나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아마도 돈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움적여도 돈이 듭니다. 먹는데, 자는데, 입는데 다 돈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고 교육하는데, 그밖에 문화생활, 사업하는데 필요한게 다 돈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자선, 애긍, 정의를 실천하는 일 등 그 모든 이야기의 뒷편에는 돈고 하느님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가르침 속에는 돈을 결코 부정시 하거나 돈을 나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돈은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하고 그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므로 돈이 모든 사람에게 정의롭게 골고루 분배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부정한 방법에 의해 몇몇 사람에게 편중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곤란을 끼치는 것을 죄악시합니다. 만일 돈을 나쁜것이라고 여기셨다면, 구태여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과 애긍의 행위를 좋게 여기실리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고, 가난한자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 보면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또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을때 그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이처럼, 돈없는 자에게 돈이가고 돈을 많이 가진자는 없는이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돈을 나누어 주기를 바란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속이고 등쳐 먹는 이들에게는 책망하십니다. 오늘 제 1독서 아모스서에서 듣는 바와 같이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끊은자들, 그리고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등겨까지 팔아먹고 힘없는 자를 빚돈에 종으로 삼고, 미추리 한켤레 값에 가난한자를 종으로 부려먹는자들, 이들의 행위에 대해 하느님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돈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것이고 그 생존에 관한 것입니다. 돈이란 유통에 필요한 것이므로 한곳에 뭉쳐 있으면 그 사회는 병들게 마련입니다. 피가 흐르는데 어느 한곳에 막혀 있으면 병들게 마련입니다. 또 그돈을 죽을때 가지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을 벌되 정당하게 노력해서 벌고 그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인류의 발전과 하느님나라 완성에 쓰도록 해야 합니다.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정직함과 부정직함

-박상대 신부-

 

우리는 지난주일 복음에서 잃은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한 죄인의 참회와 회개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알았다. 비유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세리와 죄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율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정작 회개해야 할 죄인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며, 따라서 내가 바로 잃어버린 양이며 은전이며 아들로서 하느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광야에 놓아둔 채 찾아다니시고, 온 집안을 샅샅이 찾으시며, 매일같이 동네 어귀에서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말씀으로서 앞의 비유들을 염두에 두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 부분은 부정직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일 처리에 관한 비유(1-9절)이며, 둘째 부분은 재물에 관한 말씀(10-13절)이다.

① 우선 첫 부분의 비유는 어떤 부자에 의해 고용된 청지기가 재산을 관리하면서 낭비 또는 횡령한 것이 드러나, 청산(淸算) 후 퇴출(退出)을 강요받는 것으로 시작된다.(1-2절) 그 동안 재무관리로 의자생활에 습관이 되었을 청지기는 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에 묘안을 생각해 내고 일사천리로 일을 해치운다. 묘안은 퇴출 후에도 자기를 후하게 대접해 줄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빚을 삭감해 주는 방법을 택했다.(5-7절) 마지막에 가서 주인은 청지기가 자기를 속이는 줄을 모르고 그의 약삭빠른 일처리를 보고 오히려 그의 슬기로움은 칭찬한다. 비유의 마지막에 붙은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b절)는 말씀은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로 보인다. 물론 빛의 자녀들이 이를 흉내 내지 말 것을 바라시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부자주인과 같은 입장에서 부정직한 청지기를 칭찬하려 하신 것 같다. 무엇이 그리 칭찬 받을만한 일인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부정직한 청지기가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깨닫고 자신의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절묘한 방책을 마련한 것이다. 청지기는 비록 부정직한 방법을 택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법을 동원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청지기의 부정직하고 비양심적인 면은 덮어두고라도 그의 슬기로움은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걱정할 줄 알고, 이를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도 이 점을 칭찬하신 것이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가능하면 본받으라는 것이다. 임박한 심판 앞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걱정해야 한다. 그것도 영생(永生)을 판가름 짓는 심판이라면 그 절박함이 더욱 고조된다. 청지기가 당한 ‘청산 후 퇴출’이라는 실직(失職)의 위기처럼 최후의 심판을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회개(悔改, Metanoia)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이젠 머지않아 우리도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이 세상에서의 퇴출을 명(命) 받을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회개의 삶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일 수도 있다.

② 두 번째 부분의 재물에 관한 말씀은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정직함과 부정직함, 충실함과 불충함의 대조(對照)를 통하여 하느님과 재물 가운데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원칙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보듯이 평소에 남의 것을 마구 낭비하고 횡령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부정직한 방법으로 자신의 미래를 마련한다. 즉, 일의 크고 작음을 떠나 한번 부정직하고 불충한 사람은 끝까지 부정직하고 불충한 사람으로, 한번 정직하고 충실한 사람은 끝까지 정직하고 충실한 사람으로 지속될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이든 비록 단 한번이라도 선택이라 할지라도 삶의 방식 전체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직함과 부정직함은 결코 어울려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