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7일 성 �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사제는 1581년 프랑스의 아키타니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농사일을 돕는 가운데 학업을 마치고 곧바로 사제가 된 그는 파리의 본당 사목자로 일하였다. 빈첸시오 신부는 해적들의 노예살이를 한 것을 계기로 일생을 자선 활동에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그는 성직자들의 영성 수련과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그를 클레멘스 12세 교황이 성인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1833년에는 성인의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설립되어 지금도 전 세계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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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 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면서 예嗤?한번 만나 보려고 하였다. † (루가 9, 9)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로마는 이스라엘을 정복한 뒤 총독을 보내 통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은 임금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은 헤로데였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헤로데는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의 실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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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영적으로 뛰어났던 분이 한 여인의 증오로 말미암아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헤로데 임금과 불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꾸짖자 그를 제거할 기회를 찾던 여인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성경에서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등장을 준비하였던 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부르짖었고 위선을 질책하는 직언으로 이스라엘을 뒤흔든 분입니다. 그러한 요한에게 편안한 죽음은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억울함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습니다. 그 죽음들이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야 억울한 죽음이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려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봉헌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었다는 봉헌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았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느님의 도구였을 따름입니다
새벽을 열며
오늘은 우리 본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입니다. 좋은 말씀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은혜로운 시간이지요. 그러나 이 음악피정이 저절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이 피정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우리 성당의 청년들이 전날에 미리 나와 스피커와 앰프, 악기 그리고 좌석배치까지 모두 미리 세팅해 놓습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밖에 나갔다가 다시 성당으로 들어오는데 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청년이 제게 전화를 합니다.
“신부님! 조금 이상합니다. 사제관 문이 활짝 열려 있고요, 신부님 방도 아주 이상합니다. 책상도 누군가가 뒤진 흔적이 있고, 옷장 문도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볼 때 옷장도 누군가가 뒤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도둑이 든 것 같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추석 명절 기간 동안 성당에 도둑 들은 곳이 많다고 하더니만, 우리 성당에서도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고 외출했던 제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지난번에 도둑을 맞아서 경비시스템을 새로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잠깐 경비세팅 하는 것도 귀찮다고 안하고 외출하더니만 이렇게 되는구나. 서랍에 돈도 좀 있는데, 참 노트북은 괜찮을까?’
부랴부랴 외출했다가 사제관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고 어수선한 제 방을 보고서 청년들이 오해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번 연휴기간 동안 어떤 작업을 좀 하느라 정리정돈을 전혀 하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마치 누군가가 뒤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어수선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제관 문은 아침에 빨리 나가느라 실수로 문을 열고 나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도둑이 들지 않았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만약 경비세팅을 해 놓고 외출했다면 걱정하지 않았겠지요. 경비세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했고, 도둑이 들었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전체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고, 그래서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어떠한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믿음’이라는 형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처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말로 걱정 없이 살기를 원한다면, 정말로 자신 있게 이 세상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소홀히 하지 맙시다. 특히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빠다킹신부
자유
-김인한 신부-
살아가다 보면 주위에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곤 합니다.
그 장애물만 그 사람만 없어지면 내 안에 평화를 얻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장애가 없어지면 또 다른 장애가 우리를 가로막고,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지옥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이 있는데 그것은
머리에 아홉 개의 물뱀이 달린 괴물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괴물은 머리를 잘라도 잘라도 계속 솟아나와
지옥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싸운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찌 보면 우리 안의 괴물과 싸우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의심과 미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의심과 불안의 사나이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불안해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미움과 화해하고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이 내 안에 보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악연
-변진흥(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이스라엘의 헤로데 가문은 불행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이역만리 먼 곳에서 찾아왔을 때 이를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를 해칠 생각을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가 탄생한 장소를 알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가자 헤로데 대왕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있는 두 살 이하 모든 어린이를 살해했습니다. 그 아들 헤로데도 동생의 아내를 탐내 자신의 아내로 삼자, 이를 꾸짖는 세례자 요한을 살해했습니다.
헤로데 부자(父子)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그 손에 끊임없이 의로운 피를 묻힌 것입니다. 헤로데 가문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진정한 정치 지도자였다면 메시아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에 의지하여 정복자인 로마를 몰아내는 역사를 이루어야 했고, 진정 백성을 사랑했다면 백성을 회개토록 하여 진정한 삶의 길로 이끈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해 더러운 손에 피를 묻힌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외침도 너무나 공허해 보입니다. 헤로데가 소문을 듣고 만나 보려 했던 예수님은 바로 그의 아버지가 죽이려 했던 아기 메시아였고, 그가 살해한 세례자 요한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했던 분,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에 빌라도가 자신에게 보낸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신 예수님을 실컷 조롱만 하고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사형선고를 받게 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예수님의 피마저 그 손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속 권력을 뜻합니다. 헤로데 가문과 예수님의 악연은 하느님과 세속을 함께 섬길 수 없는 우리 신앙인들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은 헤로데를 따르는 욕망으로 넘실거립니다.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전주교구 김병환 신부-
헤로데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불안해한다. 여러 가지 일이란 복음서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풍랑을 잠재우신 일이라든지, 마귀 들린 사람한테서 더러운 악령을 쫓아내신 일이라든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신 일이라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헤로데는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이 자신의 권력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헤로데는 어떤 사람인가? 당시 헤로데는 로마의 통치하에서 유다 팔레스티나(이스라엘) 지역을 지배하던 왕이었다. 헤로데의 통치기간은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4년까지로 알려져 있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기 전에 먼저 갈릴래아와 이두매와 사마리아를 장악하고 유다의 땅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왕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면서 유다인들의 적개심을 없애고 자신의 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많은 선심성 일들을 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증축한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헤로데는 유다교로 개종한 자의 후손으로서 그 태생만 유다인이었다. 그가 한 일들을 보면 유다인이라기보다는 악행을 많이 저지른 하잘것없는 이방인 독재자였다. 이러한 그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헤로데는 세속의 권력에 맛들여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자주 폭력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왕권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당시 유다인들이 따르던 최고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도 그였다. 헤로데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가뜩이나 불안하게 생각했다.
세상의 권력이란 이처럼 진리를 외면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죽이고 하느님의 아들마저 경계하면서 죽이려 한다. 따라서 권력은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장애물이다. 권력은 왕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교만과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이웃을 지배하려 하고,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이웃을 누르려 하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믿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부산교구 권경렬 베드로 신부-
오늘은 배와 항해를 우리의 삶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배에는 바닥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를 다 만들고 나면 맨 밑바닥에 바닥짐을 싣는다고 합니다. 배를 바다에 띄우기 위해서는 바닥에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바닥짐이 없다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뒤집히고 만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이 바닥짐은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중심일 것입니다. 그 바닥짐은, 무겁고 힘들다고 내던질 수 없는 인생의 알맹이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항해할 수도 없습니다. 항해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하는 당연하고도 소중한 바닥짐이며 중심입니다.
슈바이처도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며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배에 여러 가지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항해에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성공. 명예. 부. 정의. 평화. 진실. 나눔. 사랑, 등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것들은 항해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 많은 짐들은 배를 무겁게 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힘겹게 합니다. 풍랑이라도 만나면 침몰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진실을 저버리고, 정의에 눈감고, 나눔은 나중으로 미루고.. 항해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빨리 나아갈까만 고심하며 마구 치달아갑니다. 짐이 없어 가벼운 배는 빨리 나아가 목적지인 항구에 빨리 닿습니다. 그러나 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빈 배인 것입니다.“
바닥짐과 빈 배 이야기...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레아의 영주 헤로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고 두려워하며,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헤로데. ‘그의 삶의 중심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그를 보호해주리라 믿고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나의 중심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끝내 붙잡으려는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하깨는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임을 깨닫고 ,하느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성전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너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돌아보아라..”
복음은 나의 삶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삶에서 중심은 올바른지 그리고 나의 삶의 태도는 성실한지? 나의 항해는 어디쯤에 와있으며 배에는 무엇이 실려 있는지? 항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선한 의지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무겁다는 이유로 바닥짐을 내던지고 출렁이는 물결에 균형을 잃고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아무리 벌어들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니었는지 지난 삶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세상의 모습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새로운 파도가 우리를 덮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소용돌이가 치는 한가운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중심이 있듯,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심중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출렁이며 소용돌이치는 물결의 중심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닥짐이 없이는 항해할 수 없는 이치를 알기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디 중심인 하느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용기와 지혜와 성실을 주시기를 청하며 마침내 다달은 항구에서 빈 배의 허무가 아닌, 만선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누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며, 남은 항해가 빈 배가 되지 않고 마칠 수 있기를 원한다면, 바닥짐이란 내어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거짓과 불의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과 함께 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위하여 기꺼이 투신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항해가 빈 배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올바로 하기
-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동해의 해변을 따라 가다보면 어촌 마을들의 작은 포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작은 포구에는 작은 등대들이 있습니다. 등대란 배들이 밤에 뱃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위의 말이나 자신의 그릇된 방향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등대라는 정확하고도 안전한 방향을 향해 배는 움직입니다.
이처럼 인생에서도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헤로데는 소문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진실을 덮으려고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끔 헤로데와 같은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예 또는 아니오’의 확고한 기준을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준, 삶의 등대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력은 민중을 두려워해야
-김덕진(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예수님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온갖 기적을 행하시자 민중은 예수님을 칭송하고 따랐다. 그러자 당시 식민통치를 하던 위정자들은 예수님의 움직임에 바짝 긴장했을 것이 분명하다. 세례자 요한에게 누명을 씌워 죽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례자 요한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이후 ‘사람으로서 생명’을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유로 잃게 되시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도 발견한다.
역사의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늘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역사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멀지 않은 708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아무런 죄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으며 결국에는 죽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진실은 밝혀지고 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로 모든 것이 투명해진 것처럼. 예수님은 엘리야이기도 하고 세례자 요한이기도 하셨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해 죽였지만 민중한테는 그리스도라는 더욱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난 셈이다.
우리 역사도 그랬다. 민주화를 외치고 인권과 평화를 지키려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진 고초를 당했지만 그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 강력하게 싸워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지켜왔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평생을 농사짓고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야 하는 농민들이 있고, 경찰의 진압방패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비정규직 노동자도 있다. 권력은 민중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민중을 힘으로 누르려고만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모두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사회, 하느님 나라는 그런 곳일 것이라 믿는다.
지병철 신부-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왜 만나고 싶어할까요?
그냥 예수님이니깐 죽이고 싶어서일까요?...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수 있었던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만큼은 마음대로 할수 없었습니다.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세례자요한이라
쉬이 죽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딸아이의 소원때문에 할 수 없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잃었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는데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떠돌기시작하는 것입니다.
헤로데에겐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영역에 또다시 누군가가 끼어들지 모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만나서 회유를 하든 안되면 죽이려 들것입니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이런 이유로
그는 예수님을 실제 만나다하더라도 예수님의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고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 기억하고 싶어
예수님을 만나보려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안경을 쓰고 예수님을 보기에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삶이 모습이 너무나 틀린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떠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암울한 상황을 벗아나가해줄
예언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을 맞추어버립니다.
로마의 지배와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없애줄 위대한 예언자가
바로 저 예수님이라 하여 만나고 싶어 따라다닙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기에
언젠가 초라해지는 예수님을 보면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답답할 정도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못하는
머리를 가진 12제자들의 무리입니다.
그들에겐 이 예수님은 정치적 인물로도, 세례자 요한으로도, 예언자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조차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 자체가 좋아서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그들의 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와 같은 상태에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둘씩 칠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들은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이 그들에겐 좋은 복이 될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늘 만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보기에 만나고 싶어하는지
어떤 이유로 만나고 싶어하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설령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예수님 자체, 하느님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면
그래서 무언가를 바래서라면
헤로데의 모습, 요한을 기억하는 사람들, 예언자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는것이 있다면 지워버리는 연습을 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로 만드셔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려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양승국신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는 오늘 제1독서인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서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헤로데 콤플렉스>
-윤경재-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가 9,7-9)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13,31)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23,8.11)
루가 저자는 헤로데라는 인물을 통하여 예수님이 사셨던 시간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 됨됨이를 통하여 인간이 지닌 어두운 모습의 한 면을 그립니다.
헤로데는 남들의 이목과 소문에 민감한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가 행동하는 판단기준은 자기의 주관이 아니라 체면에 달렸습니다. 그런 인물들은 자기 내면의 의지와 실제 들어난 자기 행동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항상 갈등 속에 살게 됩니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했어야 속이 후련할 텐데 결국 남의 이목에 따라 행한 꼴이니 생각할수록 분합니다. 그 갈등이 크면 클수록 그는 더욱 포악한 성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 그는 그 성질을 해소할 대상을 찾게 되고 아마도 예수님을 잡아다가 모든 자기 고민을 분풀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헤로데 콤플렉스라고 부를 만합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처와 아이들을 구타하는 폭력도 이와 흡사하다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알고 보니 가정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랍니다. 그들은 외면과 내면의 갈등을 만만한 상대에게 투사하는 못난이 일뿐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남들이 자기를 좋게 평가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르는 구타와 폭력을 정당하다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남들도 인정할만한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하던 차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자기 앞에 서 계십니다. 헤로데는 만사가 제 뜻대로 되가는 통쾌한 기분을 만끽합니다. 헤로데와 같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 인물들의 특징대로 그는 짐짓 거드름을 핍니다. 제 눈앞에서 어떤 기적이라도 보여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더 높고 힘 있는 자라고 증명해주기를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어도 믿지 못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체면을 살려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철저히 조롱하고 깔아뭉개어 버립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정당한지 아닌지 여부는 애당초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루가저자는 빌라도와 헤로데가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하여 똑같은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참수하는 대목을 읽으며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이 지닌 폭력성이 여실히 들어나는 장면이 바로 전쟁이며 사형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그저 자기의 체면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합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자기의 힘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 사형이라는 극형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형 제도를 행사하는 이유를 공공질서와 안녕을 지키려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지녔다는 만족감을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사형제도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그 제도를 반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사형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1,사회정의 실현 2,흉악 범죄 예방 3,교도행정 비용절약 4,피해자와 피해자 유가족을 위한 처벌 5,국민의 법 감정 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위에 열거된 이유들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여서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역사상 폭력으로 폭력이 잡힌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폭력은 폭력을 낳았을 뿐입니다. 흉악범죄 예방효과는 강력처벌보다는 반드시 잡혀서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고려해야 될 사항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런 제반 사항이 충족되고 모든 국민들의 법 감정이 수긍될 때까지 인간 생명의 고귀함과 사형 제도의 부당함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국민들의 중의가 모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헤로데라는 이름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 세상의 권력자로서 대칭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쥔 지상권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인물로서,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적 권력은 없지만 성령과 사랑의 능력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평화의 왕이라는 분으로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헤로데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크게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헤로데 대왕과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모두 예수님 때문에 당황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들고 찾아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하자 자신의 왕권에 도전 할 또 다른 유다인의 왕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고 불안하여 헤로데는 예수님 탄생전후 두 살 이하의 남자아기들을 죽여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헤로데 대왕이 죽고 또 그 자리를 계승한 헤로데 안티파스(Herode Antipas)는 갈릴레아와 페레아 지역의 영주이면서도 헤로데 대왕처럼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이복형제인 헤로데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했었습니다. 의인이었던 요한은 누차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간하다가 헤로데 안티파스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서, 어느 축제일에 그녀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왕을 기쁘게 하고 왕의 환심을 얻어 요한을 죽이게 했던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모욕한 인물입니다.
헤로테는 심리적으로 의인을 죽였다는데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큰 예언자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는데, 헤로데도 비록 그를 죽였지만 그의 인물에 대해 어떤 위압감마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등장하여 요한과 같은 일을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요한 보다 더 큰 인기를 획득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그리 쏠리자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권력자가 불안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을 제거할 뿐 아니라, 그것은 가족, 형제들까지도 그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나라의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그러한 면이 나타났지만, 로마의 갈리굴라 황제도 자신이 황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제거하고 자기는 새로운 태양, 왕이며 신으로 떠 받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 형제를 죽인 양심의 가책으로 미치게 되어 피비린내 나는 폭정 끝에 그도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헤로데는 의인 요한을 죽이고 양심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차에, 그 요한과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에 그의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누구냐"라고 묻는 질문처럼, 우리는 소문에 들리는 그분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분에 대한 증언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는데, 예수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예수님 한테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울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구속공로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헤로데처럼 에수님에게서 단순히 기적적인 것을 보고 싶다거나 혹은 물질적인 유익함을 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원하는 뜻, 자기자신을 그분께 신뢰를 드리고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문에 진정 자신과 타인의 올바른 구원을 위해 예수를 찾아가 볼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 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하면서 예수를 한번 만나 보려고 하였다.
-강영구신부-
요즘 인기 있는 책 중에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위즈덤하우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49가지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자기를 잃지 않는 삶’과 ‘사랑하는 삶’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리고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도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중에서 단 하나라도 제대로 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짧고 유한한 인생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도 많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생명을 해치고 이웃과 형제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생명을 파괴하고 형제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만과 사련(邪戀) 빠진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는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하여 세례자 요한을 살해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도 있지요.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그의 목을 짓누릅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업보(業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 헤로데의 호기심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을 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開始)를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둔 시점에 두었다.(마태 4,12; 마르 1,14) 그 후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는 반응과 함께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마태 14,1-12; 마르 6,14-29)
여기서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는 전승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삭제하고, 헤로데의 호기심을 덧붙여 그가 예수를 만나 보려하는 의도를 지적하고 있다. 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은 당시 누구에게나 있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바로 곁에서 보고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당시 팔레스티나의 최고 권력가인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가 관연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던 것이다. 헤로데는 아직 예수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이 그의 귓전에 몰려왔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두고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아니면 옛 예언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헤로데에게 있어서 예수는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보도되는 배경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관련성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가는 이 관련성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헤로데와 예수를 관련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예수를 정말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어차피 법정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루가 23,6-12) 그러나 그는 예수를 진정 알려고 하기보다는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한 번 보고 싶어 했을 뿐이다.(루가 23,8)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예수를 경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아인 동시에 종교적인 메시아여야 한다.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부분이 헤로데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헤로데 자리는 위태로워지게 될 것임으로 그는 자연히 불안에 싸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결국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당황한 헤로데 대왕이, 겉으로는 자신도 경배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몽땅 죽여 버릴 음모를 품지 않았는가 말이다.(마태 2,3.8.16)
헤로데 대왕은 그 음모를 실행에 옮겼고,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또한 겉으로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결국은 예수의 사형선고에 적극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빌라도와의 반목을 깨고 친분을 다지게 된다.(루가 23,6-11)
누구든지 예수를 대면하려는 자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헤로데 대왕도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도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려 했기에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그분께 다가서느냐에 따라 그분 또한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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