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10월 6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07. 10. 6. 01:30

   2007년 10월 6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I give you praise,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스승의 위대함을 깨달은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고 감격했을까? 스승께서는 제자들의 앞날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을 스승께서 격려하십니다.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없습니까?
그분의 힘은 숨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숨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을 잘 모릅니다. 잘되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이 앞설 뿐, 하느님의 도우심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만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한 삶이 계속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만에 빠지고 게으른 사람에게 어찌 하느님의 힘이 느껴지겠습니까? 오히려 그의 영혼은 생기를 잃고 재물에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어 갑니다.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련이 있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제가 어느 피정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이 행복한 이유 100가지를 적어 보시오.”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어떻게 100가지나 적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는 무조건 100가지를 적으라고 하십니다. 만약 100가지의 행복한 이유를 적지 않으면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고 하시네요. 화장실도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만약 정말로 급한 사람 역시 100가지의 행복한 이유를 다 적은 뒤에야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별로 잘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이것 역시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남보다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재벌 아들로 태어나서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하나도 쓰지 못했는데…….

저는 급한 마음에 다른 사람은 어떤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다들 저와 비슷한 것 같더군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의 친구가 정신없이 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어떻게 쓰고 있는지 살짝 컨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고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 나는 팔이 두 개라서 행복하다.

2. 나는 눈이 두 개라서 행복하다.

3.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어 행복하다.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이 친구가 장난하나 싶었습니다. 남들도 가지고 있는 뻔한 것들이 무슨 행복의 이유가 되나 싶었거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 역시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볼 수 없고, 만질 수가 없으며, 냄새도 맡을 수 없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팔과 눈과 코는 내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행복한 이유 100가지. 제가 과연 이 100가지를 쓰기가 쉬었을까요? 어려웠을까요? 너무나 쉬었습니다.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행복한 이유는 100개가 아니라 수천 개라도 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런데 사실 좀 어이가 없습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제자들, 그것도 당신께서 잡히시는 순간에는 모두 도망가는 철부지 같은 제자들인데 이들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다니요? 오히려 하느님께 원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행복한 이유가 그렇게 많기 때문에,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한 이유를 생각해보시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새벽을 열며

 

 

 빠다킹신부

 

 

마음의 눈     

-이수철 신부-

 

그리스도교가 ‘들음’을 강조한다면 불교는 ‘봄’을 강조합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깨달음을 뜻하는 ‘각(覺)’이나 ‘견성(見性)’
심지어는 우리의 ‘관상(觀想)’이라는 한자의 용어에도 꼭 ‘볼 견(見)’자가
들어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생활에서 잘 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고, 예수님 역시 주저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선입견이나 편견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볼 수 있을까요?
육안의 시력이 좋다하여 잘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탐욕이나 교만이
가득하거나 편견으로 물들어 있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좋아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춰지고 철부지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마음에 욕심의 안개가 말끔히 걷혀 깨끗한 마음이 될 때 있는 그대로의 실재,
하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든 수행은
마음의 순수를 목적으로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평생 꾸준히
기도와 노동, 성경 묵상 등 규칙적인 수행생활의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에 밝고 맑은 마음의 눈을 갖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아멘.

 

 

 감탄 속에 계시는 하느님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어린이들은 단순하고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며 감탄을 잘한다.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 떼를 들여다보면서 신기해하고 V자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면서 환성을 지른다. 어린이 같은 단순한 마음을 지닌 우리 가족들도 “우와, 멋져요, 따봉, 정말 예뻐요, 맛있어요, 고마워요.” 등 감탄사를 연발한다. “수녀님! 저것 보세요.” 민순 씨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리니 동백나무 잎에 새 떼들이 모여 있었다. 마침 아침햇살을 받은 나뭇잎마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와아! 보석나무 같아요.” 정말 새 떼들은 눈부신 보석나무에서 미끄럼을 타듯 나무 위로 올라갔다 쪼르르 내려왔다 또 포르르 올라 앉았다. 동백새란다.

마음이 순수한 그들의 눈에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더 많이 보이나 보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감격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이곳 부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해 뜰 때나 해 질 때 금빛 은빛 물결을 자연스레 접한다. 찬란한 태양이 수면 위로 불끈 솟아오를 때, 또 석양에 붉게 타오르던 해가 바다 속으로 풍덩 잠길 때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요즘 점점 더 세상이 메마르고 감탄이 줄어드는 것 같다. 감탄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활력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줄 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시고 당신 영광을 나타내 보이신다.

 

 

 겸손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가 10, 17-24)은 앞 부분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결과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드문 표현인 예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파견 하실 때 그들은 문자 그대로 빈 털털이의 모습이었다.  단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란 선포의 말씀과 "병자들을 고쳐 주어라"란 치유의 명령만을 그들 스승에게서 부여받았다.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제자들의 앞길은 암담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을 따랐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기뻐하며 돌아온 제자들의 결과 보고를 듣고 예수도 큰 기쁨에 가득차 환희의 찬가를 부른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란 이방 칼데아 지방의 현인과 점성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인과 율법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 내신다. 이것은 복음서의 중심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며,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이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구약 묵시 문학에도 이와 비슷한 찬가가 있다.  다니엘 2장으로 지혜와 능력은 하느님의 것이니 이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 드린다 (2:20-23).  하느님께서는 당시의 유명한 마술가나 점성가를 물리 치시고 포로 출신인 다니엘에게 당신의 계시를 밝힌다.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뜻한다.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겸손하고 못난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예수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못난 사람들, 철부지들)에게도 실현 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아버지의 이 응답에 기뻐 감사한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니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신성을 나타낸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본성 자체의 탐구보다도 관계를 통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을 인간들에게 알맞게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아들이 택한 바로 그런 사람들 즉, 미소한 이들에게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마침내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절정에 달한다.  예수는 참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원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놀라운 기쁨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바로 예수와 같은 겸손하고 가난한 자세이다.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하는 이유

-오상선신부-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돌아온 제자들은 신바람이 나 있다.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성과과 좋았기 때문이다.

기대 이상의 성과 앞에 신바람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실 이 기대 이상의 성과는

그들이 잘 난 때문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그냥 들떠서 기뻐했지만

이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예수님은

씨-익 웃으시면서

<얘들아, 너희가 진짜 기뻐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거야>

하신다.

 

가끔 강론을 하거나

피정지도를 하게 될 때

기대 이상으로 칭찬을 들을 때가 종종 있다.

오늘의 묵상에 변변찮은 묵상글을 올리고서도

참 고맙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다.

남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물론 좀 쑥스러울 때도 있지만...

 

하지만

기대 이상의 칭찬과 찬사를 들을 때

그 때문에 제 꼬라지도 모르고 들떠 기뻐만 한다면

이 칭찬과 찬사의 주인공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그분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셨을 뿐이고

내가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수도자요 성직자라는 것 때문에,

벌써 기대에 찬 눈길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결과일 뿐임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으로부터의 칭찬과 찬사에 우쭐하며 기뻐할 일이 아니라

아, 내가 주님의 말씀의 도구가 되었구나!

아, 내가 주님의 제자 반열에 들었구나!

하는 사실이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칭찬과 찬사는

오로지 주님의 것임을 깊이 알고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며 지존하신 하느님이시여,

모든 선이시고 지상 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신 당신께,

모든 찬미와 모든 영광과 모든 감사와 모든 존경과 모든 찬양을 드리오며,

온갖 좋은 것을 돌려드리나이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작은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기쁨

-상지종신부-


 성체를 모시고 간 사제의 손을 잡아주시는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

해맑은 웃음 머금고 달려와 품에 안기는 철부지 어린이,

눈빛만으로 서로의 사랑과 따뜻함을 나누는 학생들,

바쁜 시간 쪼개어 가면서 함께 하려고 애쓰는 청년들,

지친 삶의 넋두리를 편안하게 풀어놓는 교우들,

신부님 떠나시면 안되는데... 마냥 아쉬워 하시는 교우 아주머니,

부족한 보좌신부를 언제나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격려해주시는 주임 신부님,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서로의 삶을 지켜봐주시는 수녀님들,

한 푼 적선에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눈 먼 아저씨,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사랑하시는 부모님,

함께 하지 못하는 안따까움 애써 감추며 나를 믿고 지켜보는 가족들,

가끔 전화로, 편지로 나에 대한 기억을 확인시켜주는 친구들,

오랫만이네요... 반갑게 맞아주시는 술집 주인 아저씨,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

여러 사람들...

 

참으로 작은 이들입니다.

가까이에 있기에 소중함을 잊곤 하는 이들입니다.

그렇지만 나를 아는 이들입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이들, 그렇지만 고마움을 쉽게 잊어버리는 이들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알만한 유명한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나에게 다가오기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으쓱해지는 기쁨에 젖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쁨을 생각합니다.

슬기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무시당했지만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그 기쁨을.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기뻐하는 제자들보다,

무지랭이같은 제자들이 당신을 알게 된 것을 보며 더욱 기뻐하시는 예수님,

흥에 겨워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나에게도 작은 이들이 있습니다.

나를 아는 이들, 나를 순수하게 받아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기쁨에 나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당신의 기쁨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이 기쁨에 취해 나 또한 아버지 하느님께, 예수님께,

그리고 나를 받아 준 많은 작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혜안>

-양승국신부-

 

조금만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깨물어보지만 악습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방황을 시작하는 알콜 중독자들, 마약환자들, 노숙자들, 정신 질환자들, 이 세상 어딜 가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몇몇 출소자들...오늘도 한 아이는 제게 "차라리 소년원에서 그냥 있을걸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너무나도 엄청난 벽 앞에서 제 정신이 아닌 형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큰 숙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새천년기"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새천년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이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이웃들의 고통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이웃을 바라봄에 있어 가장 필요한 노력이 영적인 눈(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눈, 이기적인 욕망이 배제된 영혼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육적인 것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영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형편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지니고 다가갑니다.

 

"저 사람, 비록 지금은 주어진 상황이 몹시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원인이 있었을거야. 저 사람 역시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나와 똑 같은 인간이다."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아무리 한심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 창조 때의 그 고귀한 품성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예수님도 인간을 위한 존재였고, 복음도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역시 어디 딴 하늘 아래, 딴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이십니다.

 

 
선교의 참된 기쁨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21-24절)은 결과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담고 있다. 첫 부분은 루가복음의 고유사료로서 앞서 파견된 12제자의 귀환 때에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9,10)

 

  예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는 대목을 보면, 12제자의 파견 때와는 달리, 다만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10,9) 그런데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두 가지 일에다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결과는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자들이 기뻐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의 행복선언에 관한 내용으로서 마태오복음(11,25-27; 13,16-17)에도 병행절이 발견된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지혜를 똑똑하다는 사람들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 때문이다.(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당대의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두루 다니며 선포한 것을 기뻐하는 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대가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무지(無知)로 이어진다. 무지는 곧 죄(罪)이다. 하느님과 일치하신 예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에 대한 인식(認識)과 지식(知識)이 허락된다.(22절)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어떤 누구도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23-24절)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교육

-이인옥-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걸작이십니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예수님의 표정과 몸짓이 상상이 가십니까? 제자들보다 한술 더 들떠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예수는 보통 분이 아니시니 사탄이 떨어지는 것이 눈으로 보이나보다’라든가, ’사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사탄은 없어졌는가?’등, 어떤 단어나 구절때문에 경직되어 읽는다면 예수님의 기막힌 유머와 해학, 위트를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은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날 선생님께 칭찬 받은 것을 신발도 벗지 못하고 숨가쁘게 이야기하면 엄마는 기특하고 대견해서 자신의 일보다 더 신이 나서 아이를 띠워주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참된 교육자라면 그 선에서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의 성공을 그들보다 더 기뻐 칭찬해 주시면서도, 악령이 복종하는 어떤 가시적인 효과를 기뻐하기보다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하늘 나라에 그들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는 올바른 가르침을 빼놓지 않으시는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신명이 나신(새번역) 예수께서는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이 기쁨을 아버지 하느님께 보고하시는데 이 때 성령이 함께 하심도 언급함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하는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또한 감동적입니다.  그렇게까지 칭찬해주시던 제자들을 <철부지 어린이들>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 말씀 안에는 또 하나의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요?

 

자신들의 성공과 예수님의 칭찬에 고무되어 하마터면 자신들이 무지하게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기고만장할 뻔했던 제자들은 이 기도를 듣고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또한 이런 성공을 이룬 것은 실은 아버지의 업적이었다며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보고를 마치시는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무엇을 가슴에 새겨 넣었을까요?  

 

이제 기도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그윽히 바라보시며 다독여주십니다.  그들이 미처 깨닫지는 못하고 있는 사실 즉,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이 이상의 교육방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