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10. 8. 04:56

   2007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루가 10,27)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영원한 생명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삶이다. 영원한 생명을 깨달으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완벽한 모범을 보였다

 

☆☆☆

 

 오늘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 된 사람을 구해 줍니다. 그는 치료비까지 주고는 말없이 떠나갑니다. 요즈음같이 삭막한 세상에서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시며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말씀하실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최고봉을 제시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완벽한 이웃 사랑인지 그 예를 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한 일은 사랑의 높은 단계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단번에 험하고 높은 산을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낮은 산부터 오르내리며 산에 대한 감각을 익혀야 하듯이,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번에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황새입니다.
남에게 너그러우려면 먼저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 사랑에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자신은 부정적으로 보면서 어떻게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새벽을 열며

 

 음식을 할 때, 단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단맛이 나지 않을 때와 짠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짠맛이 나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단맛을 더 내고 싶을 때는 설탕을 더 넣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을 간장을 조금 넣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단맛이 더 강해진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짠맛을 더 내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할까요? 간장을 더 넣는 것이 아니라 설탕을 아주 조금 넣어보면 짠맛이 짙어진 것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반대의 것으로 오히려 맛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습니다. 그런데 그때 과연 행복할까요? 사실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 점은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리는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은 오히려 나를 행복과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더욱 더 행복해지게 만드는 것을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그것도 나만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오히려 나를 더 행복하게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설탕이 아닌 약간의 간장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또한 짠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간장이 아닌 약간의 설탕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아니라 약간의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의 실천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당시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키지요.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아무리 다른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멸종되어가는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얻어낸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나비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비와 공생 관계에 있는 개미도 보호해야 한다.’

이 세상에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지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 역시 이웃과 친구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야 나를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그들도 행복하고, 그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이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시다.


 빠다킹신부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양승국신부-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위로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어떤 사람이 되던지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그래서 단 한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의 벼랑 끝에 몰려있습니다. 그 누구도 도움은커녕 위로의 말 한마디 던져주지 않습니다. 울다 울다 지쳐 쓰러져도 그 누구도 등 한번 두드려주지 않습니다. 그 결과 최후의 선택으로 자살을 꾀합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에게 전화 한통만 해줬어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와 만나 소주잔 한번만 기울여줬어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물질적 결핍으로 인한 가난도 큰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혹독한 가난이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가난입니다. 소통의 단절고 인한 가난입니다. 영성의 결핍으로 인한 가난입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함으로 인한 가난입니다. 고독으로 인한 가난입니다. 절망과 좌절 끝에 맞이하는 가난입니다.


아무리 백만장자라 할지라도 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소통의 길이 꽉 막혀있는 무인도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루 온종일 천장 벽지만 바라보며 드러누워 있지만 단 한 사람도 초인종을 누르는 이가 없다면 그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봉사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명확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그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펴주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억만장자여서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놓여있는 한 인간의 비참하고 딱한 상황 앞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그를 쳐다봅니다. 자동으로 그의 상처에 손이 갑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일거수일투족은 봉사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을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 사실 생각같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내게 딸린 많은 식솔들이며, 매일 처리해야할 산더미 같은 일들 사이에서 이웃 봉사를 위한 시간을 내기도 사실 힘듭니다.


그러나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안에서 쪼개고 쪼갠 시간을 봉사활동에 사용하는 것 참으로 의미 충만한 일입니다. 나도 어렵지만, 나도 힘들지만, 나도 시간이 없지만, 그래도 짬을 내어 이웃봉사에 투신하는 일, 그것은 참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봉사입니다.


남들이 다 선호하는 봉사활동, 폼도 나고, 위신도 서는 그런 봉사활동도 좋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내가 나서겠다는 자발성을 바탕으로 한 봉사활동, 봉사활동 가운데 생기는 크고 작은 갈등과 상처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의연함이 얼마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봉사활동인지...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 지금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 지금 가난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들 안에는 하느님께서 숨겨놓은 값진 보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우리 교회가 취해야할 어쩔 수 없는 노선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는 우리 교회가 늘 염두에 둬야할 철학입니다.


 

   살기 위하여     

-이수철 신부-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고 시작되는 아주 예전 어릴 적 흥겹게 따라 부르던
대중가요가 생각납니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진실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자신감과 활력이 넘칩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 밥 먹고, 숨 쉬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내 전 존재를 다해 사랑할 때 우리는 충만한 존재, 갈림 없는 마음,
순결한 마음이 됩니다. 사랑할수록 깨끗한 마음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애매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행동을, 표현을 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기도하고
미사 드리고 성경 읽고 일하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의 열매로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 공부는 바로 하느님을 배워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언제나 사랑에는 초보자임을 인정하며
모든 존재를 다해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그리고 일상의 삶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닮은 민수 씨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유다인을 본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고 가엾은 마음을 느꼈다.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은 서로 상종하는 관계가 아닌데도 그에게 다가가 응급치료를 해준 다음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여행 중이던 그는 자신의 귀한 시간을 그 사람을 위해 바쳤으며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얼마 전 하민수라는 분이 찾아오셨다. 우리 환자 백정훈 씨를 보고는 “어디로 갔는지 너무 궁금했어요.”라며 반가워했다. 며칠 전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민수 씨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정훈 씨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다리가 불편한 정훈 씨는 며칠째 굶은 상태였고 옷은 소변으로 젖어 있었다. 민수 씨는 정훈 씨를 차에 태우고 몇 곳의 쉼터를 찾아갔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인근 경찰서에 찾아가 오만 원을 주면서 좋은 곳에 보내주십사는 부탁을 했단다. 경찰관은 “우리가 해결하겠다. 돈은 필요 없다.”고 했다. 민수 씨는 정훈 씨 주머니에 몇만 원을 넣어주고 왔다. 며칠 후 그는 경찰서에 들러 정훈 씨의 소재를 파악한 후 마리아구호소에 입소한 것을 알고 정훈 씨를 만나러 온 것이다. 민수 씨는 그동안 정훈 씨의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회복되었고 절뚝거리긴 해도 걸을 수 있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정훈 씨에게 잘살고 있으면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한 민수 씨는 후원금을 내고 돌아갔다. 다시 만난 민수 씨와 정훈 씨의 눈길에서 따뜻한 사랑이 느껴졌다. 정훈 씨에게 민수 씨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표중관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즉 너는 율법서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신명기6장5절의 인용하여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는 의도로 목에 힘을 주어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에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말하는 이웃은 누구일까? 그리고 나의 이웃은 누구일까?



  오늘 날처럼 아파트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겐 위아래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바로
앞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날 때라도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의 이웃은 누구일까? 아마도 친한 사람, 학연, 혈연, 지연, 동아리 등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닐까? 저마다 돈깨나 있고 사회적으로 이름난 사람들과의 친분을 크나큰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에겐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을 것입니다. 명망가의 길흉사엔 예외 없이 얼굴을 내미는 사람들에겐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는 한 인간이 보일 리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분명 유대인들만이 네 이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무시하고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이 여행도중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반쯤 죽어가는 한 유대인을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가서 간호해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 가버렸습니다. 그 지도자급 인사 중엔 종교 지도자, 법률가, 사회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 포함됩니다. 자신의 신분, 체면, 위신, 때문에 길바닥에 쓰러져 반쯤 죽어가는 불쌍한 한 동족을 힐끔 쳐다보고는 못 본체 다른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들에겐 비천한 사람들 함께 있다는 것이, 그들과 동일화 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병들고 의지 할 곳 없는 사람이며,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방인까지 포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31-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의 장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에게 해준 것을 자신에게 해 준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창녀와 세리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처신할까? 아마 자신도 모른척하고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을까?

 

 
요나로 하여금 소명에 충실하도록 인도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아미때의 아들 요나는 엘리사가 죽고 아모스가 활동하기까지 약 40년 동안 북이스라엘에서 기록된 유일한 예언자이다(2열왕 14,25).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2열왕 19,36)에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치며 회개를 선포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다르싯으로 도망치려고 요빠로 가서 배를 탔다. 그러자 주님께서 바다에 폭풍을 일으키시어 요나가 탄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했다.

뱃사공들은 겁에 질려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배 안의 짐까지도 버렸지만 폭풍은 더욱더 거세어졌다. 그런데도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 잠들어 있었다. 결국 그들은 그 원인을 알고자 제비를 뽑아 보니 요나가 나왔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 넣어야만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 넣자 바다는 잠잠해졌다.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시어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요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르싯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시리아가 하느님의 경고에 따름으로써 심판을 면하고 더욱 흥한다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아시리아로부터 더 많이 시달릴 것이었다.

요나는 자기 민족을 위해 원수의 나라인 아시리아가 멸망하기를 바랐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쳤던 것이다.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원수의 나라에 가서 회개를 선포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리하여 요나는 하느님을 피해 바다로 도망쳤고, 하느님으로부터 더욱 깊이 숨기 위해 배 밑창에까지 내려갔으며, 아예 말씀을 듣지 않도록 깊이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육지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바다의 하느님이시기도 하며 온 우주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요나의 그 마음을 모르셔서 그를 니느웨로 보내고자 하신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요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그렇지만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었으니(요나 4,11) 성 안의 인구는 적어도 60만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사람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백성의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어찌 그들 모두를 멸망시키겠는가! 그들도 살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고자 하셨던 것이다.

결국 요나는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죽음을 체험했고, 구원이신 하느님을 깊이 체험했으며,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시 살아나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할 것이다.

때때로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고달파서, 또는 삶에 지치고 피곤하여, 또는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주어진 소명과 책임에서부터 벗어나고픈 충동에 사로잡히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마음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잘 알고 계신다.

그렇지만 당신의 일에 우리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를 뽑으셨고, 우리에게 각각 소명과 책임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힘들고 지칠 때 하느님을 원망할지라도,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깨닫고, 주어진 소명과 임무에 충실한 신앙인이 되자. 요나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곧 죽음이며,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참 생명을 얻는 것임을 깨닫고,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의 길을 소중히 여기며 힘차게 살아가자.........◆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력, 사랑, 나의 온전한 하느님 사랑     

-이성우-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의 시간을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도 하고 누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은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공유하게 되고 닮게 되듯이,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력, 즉 사랑을 닮게 되고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생명력을 너무나 주고 싶어 애가 타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간절히 소망하고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대로 간직하고 활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힘으로 온 정신으로 사랑하기를 너무나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할 때, 우리에게 당신에게서 나오는 생명력, 사랑을 나누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력은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성숙시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원래 모습,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을 두고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아주머니와 딸기

-홍선미(의정부교구 중산 천주교회)-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복음을 읽을 때면 몇 년 전 남편과 북한산을 다녀올 때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전철을 탔는데, 감기기운이 있었던 터라 다른 때보다 더 힘이 들었다. 서너 사람이 서 있는 전철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그때 한 중년 여성이 바구니를 들고 타더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공연히 격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어떤 사람은 당황스러웠는지 옆 칸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 여성은 앉아 있는 사람들을 쭉 훑어보더니 사람들에게 다가가 입가에 딸기를 들이대며 먹으라고 했다. 누가 보더라도 온전한 정신이 아니지 싶었다. 모두들 외면하고 고개를 숙였다.
맞은편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아무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인가?’라고 생각했다. 나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들이대는 딸기를 먹는 것뿐이었다.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큰 용기를 내어 딸기를 받아먹었다. 그 여성은 두 번이나 더 먹여주고는 전철에서 내렸다. 그때 내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후로는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전과 다른 용기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용기는 마음을 연 내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었다.
강도를 만나 매맞고 쓰러져 있던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던 사마리아인은 어떤 선물을 받았을까?


 

 


 

 “너희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양승국신부-


<항구함, 충실성, 지속적인 신뢰>


A. J. 크로닌이 지은 감명 깊은 소설 ‘천국의 열쇠’에 등장하는 프랜치스 치셤의 신부의 성소 여정은 굴곡 많고 험난하며 의외성으로 가득 찬 사제성소의 한 단면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프랜치스 치셤은 사제로 서품되기 전까지 여러 번에 걸쳐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뜻하지 않게 다가온 부모님과의 사별과 그로 인한 뼈저린 고독 앞에서 방황하고 몸부림칩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 친구 노라의 죽음, 신학교에서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 발령받는 본당 마다 직면하게 되는 주임사제와의 마찰...


그럴 때 마다 그의 곁에는 한 따뜻한 은사님이 계셨습니다. 신학교 시절 학장이었던 러스티 맥 신부님. 다른 사람들은 다들 드러내놓고 ‘이 인간은 안 된다’고 펄펄 뛰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 평생에 걸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학장신부는 프랜치스 치셤 안에 잠재되어 있는 하느님을 향한 순도 높은 신앙, 순수한 열정, 불의에 맞서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을 눈여겨봅니다.


프랜치스 치셤 입장에서 볼 때, 비록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전달되는 학장신부님의 근심어린 배려와 기도, 걱정 섞인 연민의 눈길이 자신의 사제성소를 활짝 꽃피어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나중에 확인합니다.


항구함, 충실성, 지속적인 신뢰를 토대로 한 둘 사이의 인간관계,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추구해야할 관계의 전형이자 모범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때 어떤 마음으로 바라봅니까? 혹시라도 상대방을 내가 딛고 올라서야할 경쟁자로 바라보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은 내가 물리쳐야 할 적대자가 아닙니까? 상대방은 내 성취의 도구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런 시각은 빨리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보내셔서 관계 안에 살게 하시는데, 우리는 그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서로 격려해주고, 서로 지지해주고, 서로 보완해주는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수도원 입회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대형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는 속성상 군대와 비슷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있어야 하고, 돌아올 시간에 정확하게 돌아와야 합니다.


요즘 양성담당자로 살다보니 제가 저질렀던 ‘장기간 무단이탈’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담당자들에게 있어 얼마나 속상하는 일이었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철없던 시절, 프랜치스 치셤에게 있어 러스키 맥 신부님과도 같던 신부님이 제게도 계셨습니다. 돌아보니 제 힘으로 걸어온 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지속적인 배려와 항구한 인내 속에 한 사람의 성소가 싹트고 열매 맺는다는 것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의 실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며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 본보기는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특징은 ‘항구성’입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끝까지 그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무엇보다도 뒷마무리가 확실합니다. 애프터서비스까지 책임집니다.


적당히 해보다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건 내 영역이 아니다, 이건 내 힘에 부친다며 어느 순간 물러서지 않습니다. 짜증내지도 않습니다.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누가 알아봐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이 지금 내 눈앞에서 괴로워하고 있기에, 고통 받고 있기에, 죽어가고 있기에,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사랑의 실천입니다.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 전동기 신부 -


 꼭 진시황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죽기가 두려운 때문이다. 죽기가 두렵다기 보다는, 죽고 난 후의 미지의 세계, 결과가 두려운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죽음과 내세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좁은 머리로 해결해 보려고 낑낑거리면서 골머리를 앓고 그런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교사는 정말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배어있는 손발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한마디로 오늘 복음 맨 마지막에 나오듯이,‘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행함에 있다는 것이다. 율법에 나와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그것도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비유 말씀이다. 오늘은 다른 것은 거두절미하고, 사마리아인의 반응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춰서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네, 그 전에 그 옆을 지나간 사람들, 그리고 그를 본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제도 있었고 레위인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데도 그냥 지나가 버렸다고 한다.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알고서도 나름대로 합리화하면서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눈 뜬 장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도 쓰러진 사람을 본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반응이,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네,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 측은지심을 느꼈다는 것은, 사람이 감정과 양심을 지니고 있는 이상,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느끼기만 하고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자칫 값싼 동정만을 보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다가갔다고 한다. 주저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 다가감의 행동이 즉시 나오고 있다. 그리고는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다”, 가까이 가서 즉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한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쓰러져있는지, 누구한테 당했는지, 어디 출신인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우선, 현재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응급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그 일을 할 따름인 것이다. 그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다음에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나 안 보는데서나 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냥 대충 때우려는 식이 아니라,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하고 있다.
뒷부분을 보면, 이 사마리아인은 아주 바쁜 사람인데, 그냥 응급조치만 한 것도 대단한데, 자기 노새에 태워서 여관까지 데려갔다는 것은, 최고의 서비스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대하는 사마리아인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주인에게 주면서”라고 이어지고 있다.
네, 여기서 ‘이튿날’이란 말을 미뤄봐서, 우리는 이 사마리아인이 아마도 밤새도록 한숨도 못자고 상태를 보면서 치료해 주었거나 돌보아 주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지고한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는 여관주인에게 뭐라고 하나?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공사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도 뒷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해야, 그 일을 완전히 끝마쳤다고 하듯이, 뒷마무리를 확실하게 하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이다. 철저한 사랑의 실천이다. 자기는 볼 일이 있어서 지금 가지만, 다시 올테니 그때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라는 말,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봉사가 아니겠는가?


나중에 이 쓰러진 사람이 일어나면, 적어도 이 사람을 치료하는데 쓰인 돈이라도 받아내야지 하는 생각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정말로 길을 떠나는 사마리아인의 그 발걸음이, 그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냥 대충대충 해치우는 사랑의 실천, 사진을 남기기 위한 사랑의 실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그야말로 남이 알든 모르든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실천,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하라고, 율법교사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말씀하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이회진신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 나아가 모든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자신이 살아갈 “길”과 “목적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수많은 예언자와 현자들이 이에 대해 말을 했지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다시 율법의 정신에 대해 물으시면서

율법학자 자신에게, 즉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대답하시게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이 목적을 향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기도를 필요로 하는 것도 기도가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사랑으로 우리의 사랑의 힘을 복돋아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삶의 모든 행위에 대한 근본 원리이며

생명을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을뿐더러 홀로 인생의 여정을 사는 존재도 아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기에

모든 믿는 이들이 고독할 수 없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사회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져야 한다.


세상에서는 무수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인 사이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벗에 대한 사랑, 동포와 조국에 대한 사랑 ...

그러나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자기애적 사랑으로 변질되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불행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이 그 좋은 예입니다.

1933년 독일교회는 “하느님은 히틀러를 통해 오셨다.”고 선언하였는데,

이 히틀러는 자기 민족 게르만의 우월성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지닌 경제적 부와 민족적 우수성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유대민족은 게르만 민족을 위협하는 존재들이었기에

게르만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대민족을 없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게 되면 자신의 마음이 아프고 슬프기에,

사랑하는 이가 다치고 마음 아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의 한 형태입니다.)


그래야 자신도 아프지 않을 테니까요. (이것은 자기방어의 한 형태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랑하는 것에 위협되는 모든 것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나아가서는 그런 위협으로 사랑하는 것/사람을 지키기 위해

살인과 폭력마저도 서슴치 않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소유화의 집착적 경향입니다.)

사랑의 폭력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사랑의 극단적 표현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분은 우리와는 멀리 계시지만 그리고 실제로는 사마리아인처럼 아무 연관도 없지만

세상으로부터 이리저리 터지고 맞아 반죽음이 된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마저 내어주는 희생과 피흘림이라는 기름과 포도주로

인간의 상처를 싸고 동여매줍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당신의 은총과 축복을 남겨 놓으며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을 교회와 믿는 이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당신처럼 그렇게 가서 다른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 길이 어떤 길이며,

어떤 정신으로 가야 하는 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어떤 일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도 배운 것과 체험으로 알고 있으며, 

그런 일을 보게 될 때 어떻게 또는 누구처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주님, 당신은 제게도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찮다고 다른 형제에게 미루었던 일을 오늘은 나서 보겠습니다. 아멘.”



 

 완전한 만남

 -최영균 신부 -


철학자 카스퍼(Bernhard Casper)는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너를 나 자신으로서 만나고 마찬가지로 너는 나를 너 자신으로서 만난다.”
만남은 인간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만남을 통해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확장시킵니다.

바로 나와 마주대하는 ‘너’ 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말의 의미가 가능해집니다.

‘너’를 고백하고 ‘너’와 함께 일을 할 때 ‘나’라는 말도 호칭되고 ‘나’라는 한 주체가 세상 안에서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라는 사람이 홀로 산다면 ‘나’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할 것이고 ‘나’라는 한 사람이 하는 일은 ‘나’라는 의미성을 세상 안에서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는 주어에 의미를 부여해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너’를 사랑함으로써 동시에 ‘나’의 존재가 사랑받게 됩니다.

사랑은 마주서서 보는 것이지 자기의 틀 속에 갇히는 독백이 아닙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관심을 상대방의 언어와 행동 속으로 내맡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를 위해 우리의 관심과 우리의 존재를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되기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강영구신부-

하늘은 늘 열려 있습니다.
열린 가슴으로 하늘의 뜻(天命)을 받아들이고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열린 하늘을 누릴 수 있고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다가 하늘을 닮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늘의 뜻(天命)입니다.

민족(民族)과 혈통(血統), 지위와 신분, 율법 따위의 장벽에 갇힌 사람은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없고 열린 하늘을 누리지 못합니다.
강도 만나 사경(死境)을 헤매는 동족을 외면하는
사제와 레위는 열린 하늘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사랑은 그에게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자유와 힘을 줍니다.
그는 혈통과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어 하늘의 뜻을 실천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태인들의 편견과 증오도 그를 가두어놓지 못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죽음을 생명으로, 비참을 환희로 바꾸어놓습니다.

사랑만이 저를 살리고 당신을 살립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진정한 이웃사랑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을 손꼽으라면 "많은 일 중에 가장 요긴한 하느님 말씀의 경청"(10,25-37), "주님의 기도와 옳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과 함께 단연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12,28-34)이나 이를 참고한 마태오복음(22,34-40)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사랑"(신명 6,4-5)을, 둘째가는 계명으로 "이웃사랑"(레위 19,18)을 제시하면서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가장 큰 계명이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복음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루가가 원전을 각색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곁들여 고유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의 같은 대목을 살펴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직접 사랑의 이중계명을 설파하신다. 그런데 루가복음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하고 묻는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절)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루가가 계획하는 편집의도가 들어 있다.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행동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고맙게도 루가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추가하여 참된 사랑의 실천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수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나의 이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신다.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웃사랑이 실천되지는 않는다. 물론 함께 있어주는 것도 사랑실천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신다.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인물인 사제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기까지 하여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의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었으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위급에 처한 사람보다는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칠 일간 부정하다"(민수 19,11)는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둘째 인물인 레위 사람은 성전제사의식에서 제사장을 돕거나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서 육체적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괜한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길이었으니, 그 사람은 유다인임이 틀림없다. 유다교의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유에서 보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심하게 다친 유다인에게 기대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준다.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게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자는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긴 했겠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림으로써, 즉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가버림으로써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오상선신부-


 식사를 하다가

수사님 한분이 아일랜드에서 보았던 일을 이야기 하셨다.

수사님이 머물렀던 아일랜드에서는

우리 수도원은 초라하기 그지 없고

까푸친 형제들의 수도원은 엄청나게 번창해 있고

주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아일랜드에 흑사병과 역병이 창궐하였을 때

우리 형제들은 아주 많이 있었는데

살기 위해 모두 도망을 하였고

그때 까푸친 형제들은 들어와서

병마와 싸우며 주민들을 돌보아주었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의 어려움에 함께 하였기에

지금도

그들은 까푸친 수사님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까푸친 형제들은 그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하겠다.

반면 우리 형제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사마리아 사람을 외면한 사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도

우리 수도자, 성직자들은

신자들과 주민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못 되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저러한 핑계로

성무를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정작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만나주고 벗이 되어주기보다는

나에게 잘해주고

현실적으로 유익이 되는 사람이나 일만을 찾아서

바쁘다고 하고

꼭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외면하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말이다.

 

누가 성당을 찾아와서

무엇을 요청하면

우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혹시 나쁜 짓이나 할 위인이 아닌지 먼저 생각하고

도움이 요청되면

다른 데 가서나 알아보라는 듯이

이런 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쫓아버리기에 급급하지는 않는가 말이다.

 

성전은

그 누구나가 와서 영혼의 안식을 되찾고

주님께 하소연할 수 있는 자유 공간이어야 할텐데

말끔한 사람만이

예복을 갖추어 입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

둘러대고 있지는 않는가?

 

수도원에 하루 묵어가자는 사람은

과연 우리 수도원은 쉽게 받아들이고 환대할 수 있단 말인가?

먹을 것을 달라는 이에게

과연 우리 수도원은 쉽게 먹을 것을 차려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돈을 달라는 걸인에게

사기친다고 내어좇아버리는 우리가 아닌가?

 

우리 수사님들을 통해서

그런 사기를 당한 경우를 많이 듣게 된다.

너무 불쌍해서 도와주었더니 다른 수도원에 가서도 똑같이 그런 식으로 하여

전문 사기꾼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도와주어서

백번 중에 한번이라도 참으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었다면

그게 바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핑게를 대기보다는

한번에 1-2천원씩 속고 내어주더라도

혹시 그런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실지도 모를 예수님을 생각하여

흔쾌히 내어주면 안될까?

 

오늘 주님께서는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하신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요것저것 따지지 말자.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지 말자.

저 사람이 유대사람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생각지 말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냥 도움을 베풀자.

도움에는 이유나 구실이 필요없다.

그냥 나의 이웃이라는 이유로,

그냥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는 이유로

흔쾌히 도움을 제공하자.

 

그래서

정말 우리 교회와 수도원, 가정 모두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