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루가 10,41-42)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마르타는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하느라 정신이 없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느라 움직이지 않는다. 이 역시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이 있으며, 또한 그것에 충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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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르타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바빴습니다. 열 명이 넘는 장정들이 들이닥쳤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짜증이 난 언니는 예수님께 동생을 보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동생 마리아를 두둔하시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오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이 점을 간파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분의 뜻을 먼저 파악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바쁘게 살면서 업적을 남겨야 보람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일을 만들고 움직여야 잘 사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바쁜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동분서주한들 좋은 몫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늘 바쁩니다. 마르타처럼 사는 일에 바쁘기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마리아처럼 우리 삶 속에 와 계시는 그분의 뜻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하이든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악에 관련된 것 같지요? 저 역시 ‘하이든’이라고 해서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요제프 하이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하이든이 아니라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에릭 하이든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합니다. 에릭 하이든은 한 대회에서 무려 다섯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입니다.
내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라고 생각해보세요. 금메달을 독식하는 에릭 하이든과의 경기를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과는 경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하이든 효과’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반대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1980년을 전후해서 국제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오히려 모두 다 하이든과 함께 경기를 하겠다고 신청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와 함께 경기를 치러 자신의 최고 기록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이든 효과입니다. 닮고 싶은 사람, 존경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다보면 자기도 그처럼 최고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이 하이든 효과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닮고 싶은 분, 정말로 존경하는 분이 있어야 할 텐데요. 누구를 내 삶에 있어서 가장 닮고 싶은 분,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삼겠습니까? 바로 주님을 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고통의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신 분.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시금 기회를 주시면서 끊임없이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 따라서 세상의 것들을 나의 첫 번째 자리에 위치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신 주님을 나의 첫 번째 자리에 모셔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닮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앞선 하이든 효과를 본 선수들이 과연 하이든과 단순히 경기를 했다고 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이든을 존경하고 그를 조금이라도 더 닮으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입으로만 주님을 닮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나의 시선을 끊어버리고, 이제는 주님께 모든 시선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접대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르타를 칭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기만 하는 마리아를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그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내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이든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분주하게 살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영성생활의 기초
-이수철 신부-
우리의 영성생활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베네딕도회 규칙서도
‘들어라’(obsculta)로 시작되며 예언자들이 수없이 반복하는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
활동은 자연스레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 베네딕도회의 모토 역시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영성생활의 모범이 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음에서 시작되며 서로간의 대화도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음에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역시 들음에 이어 묵상이,
묵상에 이어 기도가, 기도에 이어 관상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과연 얼마나 마음의 귀를 기울여 잘 듣는지요? 잘 듣기 위해 전제되는 게
침묵입니다. 잘 들어야 순종과 겸손의 덕도 뒤따릅니다.
그러니 평생 삶의 배움터에서 끊임없이 배워가는 학인들인 우리의 기본 자세는
매사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성령이 충만한 마리아는 기도의 몫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묵상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을 예수께 봉헌하고 관상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기도를 필요한 것이라 하시고 좋은 몫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루카 복음사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와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나란히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남에게 봉사하려면 먼저 마리아의 기도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창설자 신부님의 훈시 말씀이다. 봉사 활동에 너무 분주한 나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 위에서 유유히 떠다니며 먹이를 찾는 물오리는 참 평화롭고 고요하게 보이지요? 그러나 물속에서 얼마나 바쁘고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이 오리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인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 소풍 갔을 때 물오리를 보면서 하신 창설자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 표중관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예수님의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생인 마리아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으니 조금은 화가 나서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는 활동가와 관상가의 모범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 식사 대접은 당연하고 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손님으로 모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홀로 방 안에 계시고, 두 자매가 식사 준비에만 정신이 없다면 얼마나 예수님께서 쓸쓸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집에 오신 이유는 두 자매와 정담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장4절]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의미이며, 목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과 마음, 혼과 혼이 통해야 살 수 있듯이,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소통이 없다면 무슨 의미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장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시중드는 일을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몫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의 몫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생전에 ‘살아있는 성녀’라는 칭송을 들었던 고 마더 데레사 수녀는 ‘관상에서 넘쳐 흘러나온 것이 활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기도하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녀에겐 기도와 일이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활동하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는 많은데 기도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호흡하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없는 삶은 생기 없는 삶이며, 메마른 삶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린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곳은 생명력이 없는 곳이며, 삭막한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 냉담자가 많은 이유도 교회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활동에만 치우치고 기도의 삶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요? ‘활동이 기도를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칫 활동에만 열중하다보면 기도는 점점 하기 싫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느님은 잊어버린 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룰 수없는 일까지도 설계하고 밀고 나가면서 한없이 쫓기게 되고, 설계한 것을 이루지 못해서 초조해하고 실망하고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속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없는 나는 누구입니까? 기도가 없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마치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 새와 흡사한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장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속엔 기쁨과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넘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에 다시 한 번 귀기우려 봅시다. ‘ 마리아 너는 오직 하나 필요한 것,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 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몫을 택했으니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결코 그 몫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아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특별한 여인, 마르타>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다들 특별한데,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인물이 한 사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입니다.
마르타는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의 누이동생이며, 마리아의 언니입니다(요한 11장 1절). 예수님께서는 이 가족 구성원들과 각별한 우정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배고플 때 가끔씩 그들의 집에 들르시곤 하였는데, 그들도 예수님을 흠모하며 따랐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향해 보여준 언행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오빠 라자로가 중병에 걸렸을 때, 제발 좀 살려달라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늑장을 부리셨지요. 결국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까지 다 치루고 난 뒤 나타나신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질책은 아주 매섭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비난을 아주 고상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실제상황은 훨씬 신랄했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급한 성격을 참작했을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제 나타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오빠 친구가 되가지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 다 살리면서, 그래 그렇게 절친했던 우리 오빠를 그냥 죽게 놔둬요? 그동안 아귀 같은 일행들 식사 대접한다고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오늘 복음에서도 마르타는 동생 마리아 때문에 심기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다녀간 지가 몇 일 안됐는데, 또 다시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나타났습니다. 마르타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막 식사를 대령해야할 순간이었습니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순간, 동생 마리아 생각이 났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소매를 단단히 걷어붙이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저는 아침부터 쌔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 재는 도대체 뭡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마리아를 보고는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이, 여시 같은 ☓, 너 여기서 도대체 뭐하고 있어? 좋은 말 할 때 당장 부엌으로 안 나와?”
예수님을 향해 겁도 없이 질책을 서슴지 않는 여인 마르타,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가족 같은 관계, 오빠 동생 같은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줄 아는 마르타를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을 너무나 큰 대상, 그래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싫을 때는 있는 그대로 싫다고 소리칠 줄 아는 마르타,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용기를 지닌 마르타였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친한 오빠에게 하듯이 졸라대기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마르타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성실한 봉사활동도 좋지만 영성생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그를 통한 영혼의 구원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부탁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열렬한 봉사활동도 좋지만 그 봉사의 목적, 정신을 먼저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눈앞의 일도 중요하겠지만, 더 멀리 내다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보다 궁극적인 일, 영혼을 위한 일에 더 우선적 투자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제2차적인 일, 주변적인 일, 부수적인 일,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 기를 쓰고 몰두하느라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 정말 좋은 몫인 하느님, 영적생활은 뒷전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활동지상주의는 신앙인으로서 경계해야할 대상입니다. 봉사활동에 앞서 짧게나마 기도로 시작하려는 노력, 봉사활동이 끝나는 동시에 주모경이라도 한번 바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이라는 토대 위에,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배경 위에 봉사활동이 이루어져야 그게 바람직한 것입니다.
좋은 파트너
-이정희 (한국 파트너십 연구소)-
오늘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언제나 친절하고 극진해서 즐겨 그의 집을 찾곤 했다. 친구들과 그 집에 가면 작은 텃밭에서 가꾼 야채와 맛있는 된장찌개 등 늘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었고,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그러나 주인인 친구는 몹시 분주했고, 그런 친구에게 자리에 앉기를 청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이야기하곤 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우선 구해야 할 ‘필요한 것 한 가지’를 놓쳐서 예수께서 꾸중을 듣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같이 보면 마리아와 마르타 모두 ‘참 좋은 몫’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마리아와 마르타는 죽은 라자로의 동생들이다. 그들의 집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인 베다니아에 있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 자주 들러 쉬어가던 곳이었다. 전도여행과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지친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편히 쉬도록 한 마르타의 배려에 대해 예수님은 고마워하셨을 것이다. 마르타는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냐?”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라고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다. 또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값진 나르드 향유를 부어드린 적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 운운하면서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한다고 볼멘소리를 하자 예수께서는 “나의 장례식을 위한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여정을 알고 고난의 시간을 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사랑했던 마르타와 마리아는 아주 좋은 파트너였다. 마르타는 마음이 급해서 뛰어나와 우리를 맞으시던 내 외할머니처럼 쫓아나와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한 반면 마리아는 집안에서 맞이했다. 마리아에게 마르타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좋은 안내자였을 것이다.
나는 매일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관심사를 쫓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곤 한다. 내가 왜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사는지 생각해 보지만 ‘더 중요한 몫’을 위해 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다. 내 안에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공존한다. 그래서 주어진 일을 다 하면서도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에 귀기울이던 마리아가 내 안에서 힘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한다.
-김기홍 베르나르도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는 너무나 잘 알려진 예수님과 두 자매와의 만남, 즉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들여줍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형성은 만남의 형태에 따라 자우됩니다. 예를 들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운동을 통해서 서로 만남의 관계를 형성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관에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가가 좋아하는 음식점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음식상을 맞대고 예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자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합니다. 한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면서, 즉 말씀의 식탁에서 그분과의 만남의 시간을 보냅니다. 두장면 모두 아름다운 장면이다고 봅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불평을 하자. 다시말해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0, 40)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루카 10, 41-42)
「실상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니며 메시지라고 봅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분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기 위해 어떤 만남을 만들 것인가? 그 만남을 위해 나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과 일치를 위해 교회의 사목활동과 신심생활을 합니다. 이런 생활에서 우리는 어디에, 무엇에 더 비중을 두고 하는지? 다시말해서 진정 주님과의 만남, 일치에 초점을 두는지?를 반성하고 정검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분은 마르타의 행동을 활동적인 봉사생활이라 하고, 마리아의 행동은 관상적인 신심생활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비교하여 말하기를 예수님은 활동보다 명상과 기도를 좋아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관상생활이든 활동적인 봉사생활이든 간에 그 안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주인이 되시어 자리잡고 계신가? 그분을 그 안에서 만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발치에 앉아 있듯이 감실 앞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드라도 내 기도와 내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비신자들이 자기의 소원만을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를 들어 “하느님! 우리 집 아이를 축복하시여 금년 수능시험을 잘 치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장부도 축복하시여 이번에 회사에서 과장으로 진급하게 해주소서. 진급만 시켜주시면 교무금 잘 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과 이와는 달리 “하느님, 오늘 하루 저에게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특히 제 딸을 보살펴 주십시요. 자기만 아는 천방지축입니다. 보다 남을 생각할줄 아는 당신의 딸이 되게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카 저와 제 딸에게는 기쁨이 되고 당신께는 찬미와 영광이 되게하소서. 아멘.”
앞의 기도는 자기와 자기안에 있는 사람과 자기 소원만 기원했지,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는 주님을 배제한 나만의 독백인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기도는 감사와 봉헌의 기도와 함께 하루를 주님의 뜻안에 살려고 기원하고 주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역시 본당에서 하는 사목활동, 신심활동, 사도직 활동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다만 활동에만 몰입한다면 자짓하면 세속적인 것에 치우쳐 하나의 출세 방편으로, 어떤경우는 나를 들어내는 간판으로, 어떤 경우는 나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환으로 전락시킬것입니다. 더나아가 이웃사랑의 실천마져 하나의 일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봉사활동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만나지 못하는 불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분들은 오래동안 본당에서 사목위원이나 신심단체의 간부급으로 일하다가도 그 직책을 그만 둔 후, 본당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기 힘들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관상생활이든 활동적인 사도직 생활이든간에 하느님의 말씀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이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마르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라고 하신 그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나? 봅시다. 활동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말씀이 참 신앙의 삶에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을때, 우리의 모든 행위가 마치 반석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것과 같아, 홍수나 큰물이 들이치더라도 조금도 흔들이지 않을 것이요.(루카 6, 46-48) 우리의 모든 신앙의 삶에 참된 가치가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루카 10, 41-42)
타인과 외부활동에 대한 관심, 주님 말씀의 경청, 기도와 활동
-이성우-
마르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 다른 사람의 행동에도 관심이 쏠려 있는 마르타입니다. 마르타는 많은 일에 신경이 다 가 있습니다. 집으로 모시기 위해 청소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마리아를 채근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이제는 필요한 한 가지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분주한 외부의 행동에 가 있는 마르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라고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마르타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꼭 필요한 것은 무수히 많은 외부의 행동들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즉 이제는 조용히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은 몫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게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 말씀을 충분히 들은 뒤에는 손님맞이를 하느라 분주하더라도 마음은 고요히 주님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활동 속에서도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충분히 들은 뒤에야 가능합니다. 조용히 듣는 그 시간이 없이 활동을 할 때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애꿎은 마리아만 탓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어긋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느껴봅시다.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기도를 한 뒤 활동을 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활동 속에서도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부른 기도
-홍선미(의정부교구 중산 천주교회)-
답사할 일이 있어서 강화에 있는 수도원에 다녀왔다. 봉쇄수도원과 활동수도원이 한 곳에 있었다. 수도원 경당에서 기도하는 도중에 양쪽으로 다른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칸막이가 처진 오른쪽 옆에서는 봉쇄수도원 수녀님들의 낮기도 소리가 마음을 적시고, 저쪽 마당에서는 활동수도원 수녀님들이 그날 오후 피정 올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도하면서 활동하시고, 활동 안에서 기도하시고. 마음이 평화롭고 따뜻해졌다.
내 안에도 기도하는 내가 있고, 활동하는 나의 삶이 있다. 20년 전 결혼하면서 남편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우선 몇 년은 미사전례에 익숙해지느라 애를 먹었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역반장이 되어 본당일을 하게 되었다. 구역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신앙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배우게 되었고 조금씩 익어갔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복사단 자모회·부부독서단원·레지오마리애·성물방 봉사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뭔지 모를 목마름을 느꼈고, 다 좋은 일인데도 자꾸만 지쳐갔고 힘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힘들었던가 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도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고 그런 기회를 만나서 내 삶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그 의미를 깊이 모르고 했던 교회 안의 여러 활동이 나를 기도하게 만들었고 그 기도가 나 스스로를 이해하게 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포기와 나눔의 활동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기도를 불렀다. “비아야, 너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 전동기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르타는 아주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반면, 마리아는 상대적으로 침착하고, 오늘 복음에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편이다. 대개 활동적인 사람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가만히 있는 것을 불안해한다. 반대로 조용한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잘 한다. 정적인 게 마음이 편하다. 이것은 어떤 편이 좋고, 어떤 편이 나쁘다고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둘 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는, 심각하고도 찹찹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이 두 자매의 집을 들르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대하는 두 자매의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다는 기쁨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대접하느라고 여념이 없고, 그래서 그의 마음과 행동은 외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동생 마리아는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예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통과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의 마음에 함께 하고자,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응답하면서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누구의 발치에 앉는다는 말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여성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다는 말은, 당시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유다인의 풍습으로는 랍비들이 여성을 가르칠 수 없었다. 여성들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도 없었고, 율법을 공부할 의무조차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나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시중들고 접대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마르타가 마리아에 대해 투정내지는 비난한 것이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차별하고 굴레를 씌우고 하는 그런 관습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시며, 음식대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모두 다 사랑하셨다. 그렇지만 오늘은 마르타가 그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고 좋기는 하지만, 예수님께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고 부담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기에,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슷한 예로, 가정 방문을 할 때, 서로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 하는데, 가자마자, 사람만 혼자 앉혀 놓고, 이야기할 상대는 부엌에 들어가서 무엇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정성은 대단히 고맙지만, 어떤 때는 마음이 그렇게 편치 않다는 것이다.
혼자 내버려 두지 말고, 그냥 말씀을 들어주기만 하면 좋다는 것이다.
아마, 예수께서도 수난 당하시기 전에, 평소에 사랑하시던 마르타와 마리아와 다소곳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르타가 바깥으로 나가서 음식을 장만한다고 하니까, 그 정성은 고맙지만, 별로 기분이 나지 않으셨던 것이다.
더군다나 마르타가 혼자 준비하느라고 바쁘다고, 마리아마저 자신의 일에 투입시켜 달라고, 한마디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홀로 있게 해달라고 하는데, 만일 그러면 예수님은 혼자서 무엇을 하시겠는가?
듣는다는 것
-최영균 신부 -
종종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고유한 그 사람 자체로 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고정시켜서 바라보려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진실한 만남을 방해합니다.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왔을 때 마르타는 즉시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은 먹고 편히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들으려고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모습입니다.
우리는 가끔 마르타처럼 다른 사람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경청하지 않고 행동에 들어가곤 합니다.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실행할 수 있습니다. 들음 없는 실행은 마르타처럼 본질을 잊어버린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나의 방식이 아니라 그의 방식으로 맞아들일 때 거기에 성공적인 만남이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마리아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
+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강영구신부-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싸늘합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이 감기에 걸리지 않는 비결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지금’뿐이고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여기’뿐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한(悔恨)과 미래에 대한 망상(妄想)으로
‘지금’을 소홀히 한다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여기 저기 머물 수 없고,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걱정과 염려, 지나친 욕심 때문에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 덤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실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지금, 여기’의 일에 충실하고 ‘지금, 여기’서 만난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과 담소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마르타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일념으로 음식을 장만합니다.
마리아도 마르타도 다 사랑스러운 여인입니다.
당신도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관상과 활동의 적극적인 조화
-박상대 신부-
어제는 우리가 루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어떤 율법교사 스스로가 뱉어낸 대답이었다. 바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웃이냐는 반문에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예수님에 대한 행동양식을 통하여 삶에 있어서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오빠인 라자로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편 요르단강 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에 살았다고 한다.(요한 11,1) 그런데 루가가 말하는 ‘어떤 마을’이 베다니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중이긴 하지만, 복음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아직 예리고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루가 18,35) 루가에게 있어서 지리적 위치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루가는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이한 가족에게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손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 처음에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위치가 바뀌어 손님이 주인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야훼의 천사 셋을 보고 손님으로 맞아들인 경우와 같다.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 셋을 뛰어나가 맞으면서 손님으로 들어와 줄 것을 청한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극진한 정성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 그러나 곧 야훼의 손님들은 그에게 이사악의 출생소식을 선물로 준다.(창세 18,1-10) 주인이 오히려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된 셈이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하여 더욱 명확해진다.
통상 집에 손님이 오면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데 바쁜 가족도 있을 것이고, 와중에 손님 곁에서 대화를 꾸려나가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흔히 있는 일로서 같은 자매끼리 마르타처럼 누구는 일하고 마리아처럼 누구는 일하지 않고 손님 곁에서 노닥거린다면 자매지간에 꼴사나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르타도 자신의 불평을 주님께 말씀드린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에는 마르타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시지만, 당신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통하여 자신을 ‘베푸는 자’로 부각시키신다.
예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은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로서 바로 말씀이신 당신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마태 20,28) 그렇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섬기러 오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은 사실상 없다. 그렇다고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관상(觀想)과 활동(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德目)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별개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관상이 없는 행동은 생각이 없는 행동과도 같기 때문에 임의(任意)나 무작위(無作爲)가 될 수도 있으며, 행동을 동행하지 않는 관상은 공상(空想)이나 허상(虛像)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소극적인 조화보다는 적극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먼저 관상하는 것이며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먼저 행동(行動)하고 사고(思考)하는 것보다 먼저 사고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먼저 관상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 말씀(요한 1,3-4)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을 ‘베푸는 자’로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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