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마태오 9,35 )
Jesus went around to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illness.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낫게 하신다. 바리사이들의 방해가 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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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을 수확한다는 말씀일까요? 구원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현세에서 기쁘게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힘들 것입니다. 내가 기쁘게 살고 다른 이 역시 그렇게 살도록 이끄는 것이 주님 일꾼의 역할입니다.
그렇지만 방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걸고넘어졌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시자, 바리사이들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 것 아니냐며 연막을 칩니다. 이런 행위는 의롭게 살려는 이들을 참으로 힘들게 합니다. 가끔 신심 깊은 사람들이 엉뚱한 일에 휘말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대사제와 바리사이들은 율법으로 백성을 묶으려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관리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은 족쇄가 아니라 자유라고 말씀하십니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신 일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상징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자유로운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억지 믿음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 기쁨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때 너무나도 좋아했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하얀 얼굴도 예쁘고, 말도 행동도 남다른 이 친구는 다른 남학생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그때만 해도 내성적이었기에, 맘속으로 좋아할 뿐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지금도 제가 자기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이를 짝사랑이라고 하나요? 아무튼 그 아이의 모든 행동과 말이 무조건 다 좋아보였습니다. 심지어 이 아이를 괴롭히는 얘가 있으면, 그 친구가 너무나 미워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서 싸우기까지 했다니까요.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친구를 못 만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점점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버스 안에서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났지요. 그러나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이 변했어요. 뽀얀 얼굴은 사라지고 여드름 투성의 얼굴이 되어 있고, 조용하던 아이가 왜 이렇게 수다쟁이가 되어 버렸는지요?
이 새벽. 이 친구가 문득 떠올려집니다. 그리고 왜 그때 그 친구를 향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봅니다. 당시 저는 그 이유를 스스로 붙였지요. 뽀얀 얼굴이 없어졌다고, 수다쟁이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좋아하던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 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변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그 친구가 아니라 내 마음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긴 사랑하는 연인 사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상대방이 무슨 행동을 해도 예뻐 보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전혀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이지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데, 너무나 멋있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말하지요. 주위 사람들을 끊임없이 닭살 돋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뜨거운 사랑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보다는 조건을 붙여서 하느님을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지금 많이 힘듭니다. 지금의 이 문제만 해결해주신다면 제가 당신을 더욱 더 사랑하겠습니다.”식의 기도를 얼마나 많이 바치고 있나요?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직접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에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서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이렇게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다시금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이천년 전의 바리사이들처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을 마귀 두목으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웃은 주님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내가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을 배척하는 것과 똑같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조건과 이유를 달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아는 척하자
-남상근 신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자 선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저기서 당신 마음에 드는 이들을 눈여겨보시며 제자로
부르셨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팀’을 일구셨습니다.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옮기는 열 걸음보다 열 명이 옮기는
한 걸음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일꾼을
청하라 하십니다. 더 많은 일꾼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맡기실 만한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고 하십니까? 오직 한가지 이유.
그것은 당신께 모여든 이들의 처지가 가엾으셨기 때문입니다. 넋이 빠진 듯한
이들의 모습, 너무 힘겨운 이들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게 한 것입니다. 가엾은 이들을 보고 그분은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른 척하는 것이 죄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배우면 됩니다.
알면 됩니다. 하지만 모른 척하는 것은, 알면서도 아닌 척하는 것은 죄입니다.
나는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입니까? 아는 척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사람입니까?
오직 하나의 꿈
-김순중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선을 할수록 “저 사람, 저거 제 힘이 아니지. 얼마 안 가서 쓰러지고 말 거야.” 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자신은 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선을 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리려는 경우를 수없이 발견한다. 선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 진리의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영신수련에서는 악신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빈정대며 돌아다닌다.
우리의 주님은 일의 결과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 하더라도 격려하고 칭찬하는 마음을 지니라고 하신다. 주님은 지치고 허약한 군중이 가여워 당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신다.
나는 온 우주가 선한 기운으로 가득 차는 세상을 꿈꾼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악이 선한 것들로 치유되는 세상이다.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지극히 작은 선 하나라도 제발 방해하지 말고 그대로 두자,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양승국신부-
<내 마음 안에 수채화 한 폭>
가난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한 유명인사가 고마웠던 한 선생님을 회상하는 글을 읽으면서, 저 역시 잠시나마 아스라이 사라져간 과거로 돌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다들 찢어지게 못살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도 엄연히 부잣집이 있었고, 가난한 집이 있었습니다. 같은 교실 안에 대지주의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소작농의 딸도 끼어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당시에도 엄연히 치맛바람이 있었고, 촌지공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의연하셨습니다. 젊고 패기 있고, 풋풋하고 아리따우셨던 우리 선생님에게 있어 편애란 없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해주셨습니다. 코찔찔이든, 부스럼투성이든, 뺀질이든, 그 누구든 그분으로부터 듬뿍 듬뿍 사랑을 한 아름씩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던 교사봉급은 늘 탈탈 털려 모조리 아이들 간식비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자상하셨던지, 얼마나 따뜻하셨던지, 얼마나 화사하셨던지 모릅니다. 그분의 손길이 머리에 제 머리에 잠시라도 닿는 순간은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하교할 때가 제일 슬펐습니다. 선생님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요. 집에 돌아가면 늘 선생님 생각만 했습니다. 밤마다 빨리 날이 새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빨리 학교 가서 선생님 얼굴 뵐 생각에.
선생님은 정녕 가난한 우리들 마음에 따스한 한 줄기 햇살 같으신 분이었습니다. 삭막하던 우리들 마음 안에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을 그려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운 선생님의 아리따운 얼굴을 떠올리며 오늘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참 교사 한분으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행복했던 것처럼,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 찬 착한 목자 한 분으로 인해 수많은 양떼가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가까이 내려가서 자세히 바라보면 얼마나 서글프고 끔찍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때로 피부로 와 닿는 현실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상처가 너무나 아려서, 또 혹독해서 말을 잇지 못합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입니다.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동반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착한 목자입니다.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심연의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험난하고 고통스런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이 마음 안에 사제성소나 수도성소가 활활 불타오르는 것, 이것처럼 뚜렷한 하느님 현존의 징표는 없다고 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불타는 많은 성소자들이 기쁜 얼굴로 주님의 포도밭으로 달려오길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참 목자, 그래서 결국 양들을 위해 자신을 하루하루 소멸시키는 착한 목자가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전할 기쁜 소식은 주님이시며
-강신숙 수녀(성가소비녀회)-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의 본질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체험하지 않으면)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의 골자는 ‘기쁨’이라는 체험을 지닌 자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위기, 혹 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 기쁜 소식에 대한 체험의 부재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고민은 수많은 신자들이 썰물처럼 교회를 빠져 나가서 언젠가 한국 성당도 유럽처럼 텅 빌 날이 조만간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입니다. 고도성장, 저출산 등의 외부적 요소가 서서히 신자 수를 말리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각 교구와 본당 설문조사에서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1순위에 모두 ‘선교’가 올라왔답니다. 그러나 현재 행하는 선교정책의 뚜껑을 열고 보면 여전히 ‘1인 1선교’, ‘쉬는 교우 방문’, ‘가두선교를 통한 신자 배가운동’과 같은 구태의연한 방법에 의존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아직도 이런 옛날 방법으로 선교를 하다니 놀랍기도 합니다. 이런 선교방식은 힘써 끌어들인 신자들을 다시 냉담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가 전할 기쁜 소식은 주님이시며, 그 주님을 체험한 ‘나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나 자신의 인격’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곧 기쁜 소식이므로 내가 가는 곳은 자연히 모두 선교의 장이 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 믿으세요’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선교입니다. 예수님과 나는 하나이고, 그래서 나는 곧 예수님이기도 하며, 나 자신이 세상 한가운데서 드러나는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선교방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신기해하면서 경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독기에 찬 눈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환호와 찬미를 아낌없이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의 왜곡된 생활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의 자세는 예수님의 올바른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날씨가 찌푸려져 있어도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이나 멸시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쌓여 있다면 아무리 날씨가 쾌청해도 짜증과 불만투성이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웃의 선행에도 인정할 줄 모르고 비웃음과 증오감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바리사이파와 같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을 원하십니다. 그 일꾼들은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더라도,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 일꾼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마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셨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안고 기쁘게 출발하면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일매일 건강한 날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박재구 신부-
벙어리는 곧 말을 하게 되었다.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벙어리는 곧 말을 하게 되었다. 군중은 놀라서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보는 일이라면서 웅성거렸다.
그대에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관(五官)을 주셨습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관(五官)은 통로(通路)입니다.
오관으로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이 드나듭니다.
오관(五官)으로 행(幸)과 불행(不幸), 복(福)과 화(禍)가 드나듭니다.
우리는 오관(五官)으로 은총과 축복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밖으로 내보내기도 합니다. 오관(五官)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맑고 밝은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맛보고 느낍니다. 은총의 샘인 그의 가슴에서 자비와 기쁨의 샘물이 솟아 그의 오관(五官)을 통해 이웃과 형제들에게 행복이 흘러갑니다.
예수께서는 벙어리였던 사람이 천사(天使)처럼 듣고 보고 말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그에게서 마귀(魔鬼)를 쫓아내어주십니다. 그러나 가슴 속에 마귀가 들끓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눈에 예수께서 하시는 일마저도 마귀 두목이 하는 일로 보입니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은총의 샘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손끝이 사랑과 자비의 통로가 되기를, 당신의 입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기를, 당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기를, 당신의 귀로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마태 9, 32-38)
-유 광수신부 -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새 번역에서는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라고 되어 있고, 공동번역에서는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예수께 데려 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벙어리가 아니라 마귀가 들려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만일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말들을 하였을까? 부드러운 말을 할까? 남을 칭찬하는 말을 할까?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할까? 아니면 남을 욕하는 말을 할까? 남을 흉보고 멸시하는 말을 할까? 남의 흠을 잡고 비난하고 모욕하는 말을 할까? 말도 안 되는 괴성을 소리 소리 지를까? 아마도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벙어리로 있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기 시작하였을까?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말씀이 있다.
천사가 즈카리야를 찾아와 "두려워하지 마라, 즈가리아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되겠기 때문이다."(루가 1, 13-15)라고 말하자 즈가리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 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루가 1,18-20) 이렇게 해서 그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 뒤 엘리사벳이 해산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는데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가리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안된다고 말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즈가리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가리야는 글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 때에 즈가리야가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아마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던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가 한 말은 즈가리야가 하느님을 찬미하였듯이 그도 분명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마귀를 쫓아내 주셨는데 어찌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으며 찬미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마귀를 쫓아내 주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벙어리로 있다면 그것이 정상이 아닐 것이다.
"숨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라고 시편은 노래하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입을 주신 것은 주님을 찬미하기 위함이다. 주님을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준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을 할 때에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 나와야 한다. 아침에도 찬미, 한 낮에도 찬미, 저녁에도 찬미!!! 찬미는 우리의 말이어야 한다. 찬미는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리는 표현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했으면서도 찬미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을 헐뜯고 욕하고 비난하고 흉보는 말은 잘하는데 주님을 찬미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남 앞에서 자기 자랑은 잘하면서 기도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토록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본당에서 무슨 사목회장이다, 꾸리아 단장이다, 구역장이다, 반장이다 하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찬미하라면 모두가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있다.
왜 그럴까?
말을 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어린 아이가 하루 아침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 쫑알거린다. 그러면서 말을 배우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를 배워야 하듯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 인간의 언어가 있듯이 하느님의 언어가 있다. 인간에게 사용하는 언어가 있듯이 하느님께 사용되는 언어가 있다. 인간의 세계가 있듯이 하느님의 세계가 있다. 자기가 어느 분에 대해 말을 하려면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야 하듯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려면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 왜 기도를 하라면 벙어리가 되는가? 하느님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말 못하는 우리들이 말을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아픔과 질병을 고쳐주셨다." 이것은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고 하였듯이 우리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에 대해 감사드리고 하늘 나라 대해 말을 하게 함이시다.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려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하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을 듣고 깨달음으로써 그렇게 해서 하나 하나 하느님에 대한 언어를, 하늘 나라에 대한 신비를 배움으로써 우리도 말을 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 대해 선포하시는 복음을 듣지 않고 배우지 않고서는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서는 세상 일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흉보고, 비난하는 말은 잘 할런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하느님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하는가? 자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하는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말을 하는가? 직장에서 함께 일을 하는 동료에게, 친구에게 내가 카톨릭 신자라는 것을 말하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나눈 적이 있는가? 몇 년을 함께 지내면서도 서로 카톨릭 신자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한번도 하느님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 벙어리로 지냈기 때문이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복음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생활한 사람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늘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에서나 신자이고 성당을 나오면서부터는 한번도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을 하거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느님에 대해 표현한 적이 없는 마귀 들린 벙어리들이 많이 있다.
말은 자기 생각의 표현이다. 말은 서로 통교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꼭 언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따듯한 미소, 살며시 잡아주는 손, 한 폭의 그림, 관대한 마음 등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표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많은 표현을 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표정 속에서 찾아 볼 수 없다면 그는 마귀 들린 벙어리일 것이다.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데려가자. 또 내가 하느님을 찬미하지 못하는 벙어리라면 나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가자. 오늘도 말 못하는 벙어리인 내가 말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님,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우리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어 당신을 찬미하는 말을 할수 있도록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아멘.
† 복음선포에 필요한 일꾼이 되어야 †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으로써 마태오가 집성한 예수님의 10가지 기적사화에 관한 보도(8-9장)는 일단 막을 내리고 12제자의 선발과 파견설교(10장)가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사건으로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보도한다.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열 번째 기적이다.
그러나 복음에서 보다시피 벙어리 치유에 관한 내용(33a절)은 단 한 줄에 담겨있고, 나머지는 치유사화에 대한 군중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상이한 반응(33b-34절)을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한 전반적인 복음선포 활약상(35-36절)을 요약하고 있다. 끝으로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제자들의 협조가 필요함을 암시함으로써(37-38절) 제자선발과 파견설교를 예고한다.
마태오가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이토록 간단하게 보도하고, 오히려 그 반응을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간단하다보니 좀 성급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돋우는 일이 있다. 마태오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벙어리 치유와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오늘 복음의 대목은 나중에 중복하여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22-24 참조) 뿐만 아니라 어제 복음(9,18-26)과 오늘 복음(9,32-38) 사이에 빠진 부분(9,27-31)도 다시 반복됨을 발견할 것이다.(20,29-34 참조)
비교적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마태오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범했을까? 물론 자세히 살펴 하나씩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기도 할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같다. 서로 다른 점은 두 가지의 기적사화가 9장에서는 대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12장과 20장에는 약간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의문점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마태 11,2-6)에서 풀린다. 특히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5절)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메시아의 도래로 인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적이 증언되기 전에 소경과 벙어리 치유가 선재(先在)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기적사화들을 논리적으로 한데 모아 집성하려는(8-9장) 과정에 따른 무리수(無理數)로 지적된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 복음과의 사이에 빠진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빠진 부분은 예수께서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려주시고 그의 집을 떠나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소경의 치유기적사화이다. 이 대목의 원전(原典)은 바로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 치유사건(10,46-52)이다. 물론 마태오는 원전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개작(改作)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7절로 이루어진 대목을 5절로 축약하면서 1명의 소경을 2명으로 바꾸었고, 지명(예리고), 소경의 이름(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 그리고 소경의 간절한 부르짖음과 사람들의 나무람 등을 삭제해버렸다.
이로써 예수님의 권능이 뚜렷이 부각되며, 그것도 소경 1명을 2명으로 바꾸었으니 마르코에서보다 2배로 강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치유된 두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들은 곧장 그 길로 달려가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린다.(30-31절)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당신에게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이유를 오늘 복음과 연결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록 마태오가 단 한 줄로 보도하고 있는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분명 앞서간 소경치유 끝에 내려진 함구령(緘口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를 똑바로 알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벙어리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을 보고 군중이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보는 일이다”(33절)라고 웅성거리며 놀란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 편에 서서 같이 놀라거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34절) 하며 빈정거린다고 해서 이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기에 감탄했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기적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 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고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36절)일 뿐이며,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고, 예수님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도와 세상의 추수(秋收)에 필요한 일꾼이 되는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마음의 변덕을 다스리는 확고한 믿음의 신앙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신기해하면서 경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독기에 찬 눈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환호와 찬미를 아낌없이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의 왜곡된 생활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의 자세는 예수님의 올바른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날씨가 찌푸려져 있어도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이나 멸시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쌓여 있다면 아무리 날씨가 쾌청해도 짜증과 불만투성이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웃의 선행에도 인정할 줄 모르고 비웃음과 증오감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바리사이파와 같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마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셨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계십니까?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 추수할 것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추수할 일꾼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니 깊은 고민에 빠져듭니다. 어떤 때는 추수할 것에 해당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추수할 일꾼에 해당되기도 해서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내 마음은 오늘복음에서 "군중들의 마음'인가, 바리사이들의 마음인가?...라는 질문에 둘다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마음이란 것이 이렇게 묘한 것인가 봅니다. 날씨에 따라 마음이 변하듯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이렇게 왔다갔다 해서야, 감히 그분께 아멘이라고 진정으로 부를 수 있을지......
그러면 왜 이렇게 신앙생활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측은지심"아라고.... 즉 성서의 말씀으로 인용하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바라볼 때 측은지심이라는 기초 위에서 우리 마음을 쓴다면, 아마 모든 것이 용서되고, 사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측은지심도 어떤 때는 십자가 같이 넓고 깊으면서도, 또 어떤 때는 밴댕이같이 작아지곤 합니다. 결론은 내 마음이 아직도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직도 하느님을 아는체 할 뿐이지, 실상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세상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와 많은 예언자들을 파견하시어 인간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셨고, 신약에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을 가르치셨으며, 그리고 성령시대에는 마침내 성령을 보내시어 가르침을 깨닫고 전할 능력을 주시어, 사도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땅 끝까지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오늘복음에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인류를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며,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영(靈)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땅 끝까지 당신을 증거하도록 하늘나라 복음의 전파 사명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자비와 구원의 역사는 바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크신 사랑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추수할 일꾼을 모으는 것, 즉 이웃에게 복음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전파라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지식이나 테크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이웃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고 대하는 관심입니다. 관심으로 이읏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심이 바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군중의 마음으로, 때로는 바리사이같은 마음으로 오락가락하는 우리에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느냐!!!"...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아멘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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